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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행과 포교하는 사부대중 >
눈이 안 보인다고 마음도 안보이는가?
서울시 종로구 ‘인명 손자극 센터’
대표 양만석 원장
양만석 원장
기자: 안녕하십니까? 인터뷰 허락해주셔서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원장: 저는 평생 시각장애학교에서 교사로 지내다가 지금은 퇴직하고 서울 종로구 종각역 근처에서 안마원을 운영하면서 후배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운영을 돕고 있습니다.
기자: 그러시기에 지난번에 뵐 때 많은 청년들이 와서 가르침을 받고 실습하는 것을 보게 되었군요.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얘기를 들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원장: 제가 태어난 게 1944년 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이었어요. 피난과 기아 등의 척박한 환경탓인지 어릴 때부터 시력이 약했어요. 그런데 12살 될 때까지는 맹학교가 있는지도 몰랐고, 다른 시각장애인들처럼 어른이 되면 점을 쳐야되는 줄 알고 복술이라는 것을 배웠어요. 12살 때 맹학교가 부산 송도에 있는 걸 알고 가서 공부를 했고 그러면서 서울 맹학교 사범학교까지를 나오게 됐어요 사범학교를 나오면 원래 교사를 할 수 있지만 그때 시각장애인 사회의 상황은 시각장애인에 대한 일반사회의 인식이 너무 나빴고, 직업을 통한 자립생활 터전을 만드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에 돈을 벌어 생존을 해야 되는 것이 급박한 과제였어요. 그래서 학교에서 배운 안마로 생활을 하면서 사회활동을 통해 열악한 인식을 개선하고, 직업세계를 개척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당시 태동하고 있던 복지단체 설립 같은 활동과 함께 안마사 노동 운동에 가담하게 하게 되었어요.
기자: 아! 선생님께서요?
원장: 저 혼자 한 게 아니라 같이 참여해서 그렇게 한 14년 동안을 바깥에서 활동을 했어요. 활동을 하면서 당시 선진국들에서는 시각장애인들의 독립(independent)을 위한 매커니즘들이 개발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 중에는 흰지팡이 사용을 통한 단독보행법이 개발․보급되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주 참신해보였어요. 우리나라에서도 옛날부터 맹인들이 지팡이를 짚고 다니기는 했는데, 60년대에 미국에서 후버식 흰지팡이 보행법이 수입되었지요. 그래도 요새 시대라고 하는 게 새로운 기술 그러면 다 서양 기술 이야기하잖아요. 이 후버식 보행법을 눈 보시는 분들이 미국에 가서 교육받아 우리나라에서 시각장애인들에게 가르치게 된 것입니다. 그분들 중에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서울맹학교같은 곳에서는 교사들이 가르치는 도중에 쓰러져 순직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훈련기회를 빌미로 선진외국에 가서 한번 살아보자는 구실을 만들어 홍콩 등으로 도망쳤다가 잡혀오기도 하는 등 불미스러운 일이 있곤 했죠. 이때문에 보행교사훈련 파견계획에 참여한 저를 포함한 맹인단체의 실무자들이 정보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는 일이 생기곤 했어요. 그래서 시각장애인 보행훈련같은 문제는 우리 문제이니까 내가 직접 해봐야겠다고 뛰어들었어요. 당시 당국도 그렇고 맹인계 안에서도 시각장애 보행교육은 눈이 멀쩡한 사람들이 해야지, 맹인이 맹인보행을 어떻게 가르치느냐는 부정적인 견해가 있어서 난관에 부딪치기도 했어요. 그런데 8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서 시행하는 보행지도자 연수를 지도하기 위해서 미국에서 오신 보행전문가 로버트 C. 제켈이라는 분이 내가 연수받으면서 주변의 인식때문에 고민하는 것을 보고는 저와 주변사람들을 향하여 “헬렌켈러를 가르친 앤 설리번도 거의 맹인이었다. 너같으면 이 나라 맹인을 위해서 충분히 일할 수 있지 않겠느냐, 우리가 양성하려는 교육프로그램이 시각장애인을 지도하는 교사를 양성하는 개발프로그램이다”라고 조언을 하셨어요.
로버트 씨가 주변 사람들과 관계당국을 설득하고 인식을 바꾸기도 했지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81년 사회단체 일을 중단하고, 서울맹학교에서 보행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한 8년간 열심히 하면서 흰지팡이 신제품도 개발하여 외국에 선보이고 했는데, 89년 무렵 시각장애인 안마업계의 빠른 변화가 일어나면서 선배 선생님들이 나한테 “이제 보행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졸업 후 안마업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새로 개발한 기술 등 이료업의 기술향상을 위해서 이료교육에 매진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해서 그 후부터는 안마, 마사지, 지압, 침 등 손으로 하는 이료교육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007년 정년퇴임을 하고 다시 안마원 운영을 하면서 사회단체 활동을 재개하게 된 것이죠.
기자: 복술이라고 하셨던 같은데요, 시각장애인들은 눈이 안 보이는 대신 촉각이나 청각 등이 예민하고, 영감이 뛰어나서 그 영감으로 점을 치게 되는 건가요?
원장: 참 흥미있는 말씀이네요 동서양을 불문하고 시각장애인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무능력할 것이라는 견해이고, 또 하나는 눈이 안 보이니까 영험이 있을거라는 생각들을 하시는 모양인데 두 가지 다 아니에요. 시각장애를 가진 평범한 사람일 뿐이에요. 그리고 점을 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어요. 신탁을 받아 하는 신점, 정신수련을 통하여 갖게 되는 예언적 점성술, 별이나 그림을 보고 행하는 별자리, 타로점들이 있는데, 시각장애인들이 하는 점은 이와 달리 음양오행, 명리학, 주역 등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철학을 배워서 행하는 것이에요. 이것이 일반인들의 점성술과 구별이 잘 되지 않아 오해를 받는 면이 많기도 해요. 시각장애인들이 행하는 복술은 미신이 아닌 동양철학을 매커니즘으로 하는 일종의 정서지지적인 부분이 있고 상담분야입니다.
기자: 시각장애학교에서 배우는 기술을 이료라고 하셨는데, 의료하고 어떻게 다른가요?
원장: 이료라는 건 물리라는 이 자입니다.
기자: 이치할 때 이 자입니까?
원장: 네 다스릴 이, 치료 료 그러니까 손이나 그 외의 것으로 화학적 방법, 즉 약 안쓰고 수술 안하고 순전히 만져서 침놓고 치료하고 이런 걸 가지고 이료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름도 사실은 다른 말로 지을 수 있었겠지만 그 당시 분위기는 시각 장애인은 의료법에서 결격 사유에 들어가 있었어요 우리 나라에서 의료인이 될 수 없는 결격 사유가 있었으니까 의료 영역 쪽의 용어가 들어가면 안되었지요. 그래서 이료라는 단어로 교육 과정을 만들어서 편재할 때 그 용어가 공식 용어로 들어가게 된 것이죠.
기자: 그래서 평생 치료전문가가 되셨군요.
원장: 네, 그런데 교육현장에 있을 때 우리나라 이료 교과목은 일반대학에서 가르치는 곳이 없었어요. 시각장애대학이 따로 있지도 않고, 특수교육교사를 양성하는 과정들에서는 이런 특수한 분야를 가르치는 과가 없었어요. 이렇게 양성과정이 없다보니 배워서 배출되는 학생들이 무자격교사한테 배운 무자격기술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우리 의료법에서는 고등학교 학력을 가진 시각장애인들에게 안마사자격을 정식으로 주고 있지만, 양성과정과 낮은 학력이 문제가 된 거죠. 그래서 정부의 특별한 프로그램에 의해 이료교사자격연수를 통해 현직교사들이 이료교사 자격증을 받는 과정을 실시하여 법정이료교사를 양성하게 되었고, 시각장애인 안마사들에게는 학력 상향을 위하여 유자격 안마사들에게 3년재 학점은행 교육과정을 개설하여 이료전문학사 자격을 주는 작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 결과 현재는 여러 시각장애학교에서 이료전문학사를 양성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기자: 그럼 교육부 공인된 그런 전문 학사가 될 수 있는 것인가요?
원장: 그렇죠.
기자: 대단하십니다. 헬렌켈러 말씀을 하시니까 그 분의 말씀중에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보다 비극적인 일은 앞을 볼 수 있으나 비젼이 없는 것이다”가 떠오릅니다.
원장: 네 그렇습니다.
기자: 선생님이 지금까지 살아오신 삶에서 비전이라면 무엇이었습니까?
원장: 저는 어릴 때부터 자라서 무슨 큰 꿈이 있다 이런 거 별로 생각을 안해보고 살았어요 왜 그러냐면 어릴 때부터 환경이 매우 힘들었고 생활보다는 생존 쪽에 더 신경을 써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언제나 생각하기를 오늘 할 일을 오늘 정확하게 충실하게 끝내자 왜냐면 다시 안 올 기회일지 모르니까, 두 번째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불편해지는 것이 싫은 것과 내 존재로써 큰 도움도 줄 수가 없으니까 적어도 나 때문에 불편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최우선 이었는데, 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느낀 게 이 사회에는 시각장애인이 살아가는 데 장벽이 너무 많다는 것을 더 강하게 겪게됨으로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장애 자체가 장벽보다는 장애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 때문에 삶이 더 힘들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어떻게 하면 장애인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도록 할 수 있을까를 궁리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알리는 것을 한 것이 비젼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기자: 그러시다보니 후학들을 가르쳐서 생존을 넘어선 질 높은 삶을 살도록 가르치셨군요.
원장: 후학들에게 늘 얘기했던 것이 이 땅에서 시각 장애인이 생활을 하려고 하면 시각 장애인이 살아가는 기술을 먼저 익혀라 그 다음에 직업을 익히고 학문을 익히고 그 다음에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걸 하는 것이지 하고 싶은 개성 멋스럽게 살고 싶은 그거 먼저 하면 나중에 밥벌이가 없어진다고 얘기했는데 요새는 그런 소리 안좋아하지요. 나는 늘 시각 장애인이 되면 세 가지 고통을 숙명처럼 겪고 살아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얘기를 했어요. 첫 번째로 공부를 시작하려고 하면 점자라는 게 있거든요 그때는 점자 기계에다 종이를 끼워서 송곳 같은 걸로 콕콕 찍어야 하는데 그 두꺼운 종이를 계속 빠른 속도로 찍어내려고 하면 보통 글자 하나 만드는데 한 넉 점부터 시작해서 열 점까지 찍어야 하니까 이름 하나 쓰려고 해도 한 스무 점 찍어야 하잖아요 그걸 빨리 하려고 점자를 익히려면 손가락에 못이 박히도록 글자를 쓰는 과정을 거쳐야 글자를 쓸 수 있거든요
기자: (손가락을 보면서) 예 못박힌 게 보입니다
원장: 두 번째로는 지팡이 보행을 하려고 하면 지팡이를 계속 손목을 사용해서 짚고 다니니까 손목이 많이 아파요 그 과정을 빨리 빨리 이수해서 지나가야 해요 세 번째로는 요새는 다원화되어 있지만 그때 대부분 점치는 것 말고 학교 출신들이 할 수 있는 직업이 침이나 안마거든요 침이나 안마를 배우려고 하면 양 팔이라든가 전신에 힘이 많이 올라가야 하니까 중노동보다 더 심한 훈련을 해야 해요. 그 과정에서 팔이나 손가락이 변형되어서 못하게 되는 사람도 있으니 이료인이 되려면 세 번은 아파야 한다는 각오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기자: 말씀해주신 가운데 숙명이라는 단어가 제 마음에 아프게 꽂혔습니다 그러면 우리 원장께서는 시각장인으로써 눈으로 보이지 않는 그것을 어떤 신념이나 철학을 통해서 숙명으로 받아들이셨는지요?
원장: 저 같은 경우는 어릴 때부터 눈이 안보였잖아요 그래서 특별히 살기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그런 생각을 오히려 안해봤어요. 왜냐면 전혀 안보이는 게 아니고 큰 물건은 형체가 보일 정도이고 색깔을 구별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거든요 밖에 다닐 때도 큰 지장이 없고 글자를 익힌다거나 미세하게 무얼 봐야 할 때 그럴 때가 지장이 있었지만 생활에 큰 불편은 없었어요 그러나 직업인이 되기 위해서는 힘들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일차적인 생활에서는 큰 불편이 없다가 직업 생활을 하고 사회에 진출해서 살아야겠다고 할 때에 길이 없구나 사방이 캄캄하게 다 막혀 있어 출구가 없는 진로 때문에 고통을 겪게 되고 두 번째 내 주변에서 많은 시각 장애인들을 만나면서 중간에 눈이 안보이게 된 사람들 있잖아요. 멀쩡하게 살다가 학교를 다 나왔다든가 사회에서 직업 생활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한다든가 산업재해를 겪는다든가 망막이 변성되어서 눈이 안보이게 된다든가 이런 문제가 생기면 이게 거의 인생의 1막이 끝나버리는 것 같은거죠. 처음에는 2막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해요 그럴 때 생각하기를 물론 종교적인 문제가 다르긴 하지만 우리가 흔히 볼 때에 이 사회에서 일반인들은 전생 현생 내생 안 따지잖아요 죽으면 그걸로 끝이고 눈이 안보이니까 이 세상이 끝났다 그렇지만 조금 있다 보면 다음 세계가 있다! 분명히 있다는 자각이 생깁니다 . 이것이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 있잖아요 그 윤회와 연결 해볼 수 있는 깨달음이 생깁니다. 죽으면 아무 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역시 죽음과 같은 터널을 지나고 나니까 또 길이 있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더 이상 살 수 없다고까지 생각 했다가도 사람을 만나서 사귀고 재활하고 직업을 익히고 이렇게 하면 다음 세계가 또 시작이 되는 것처럼 삶들의 과정이라고 받아들이면 그 어떤 삶도 받아들인다는 뜻의 숙명입니다. 하여, 불교 수행 얘기를 더러 해주기도 해요 길이 막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한테는 부처님의 삶을 대하는 가르침이 느낌으로 닿는단 말이죠 금방 수행해서 깨닫는 게 무엇인가 라는 걸 그 사람들이 깨달으면 세상이 달라지는데 그 과정이 마치 이것과 똑같다고 얘기해주기도 합니다. 숙명이란 부정도 긍정도 아닌 사실 그 자체를 있는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그 받아들임은 생명력을 담은 희망이기도합니다.
기자: 윤회설을 적용하셔서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며 깨달음과 연결될 수 있음을 말씀해 주시어 감동입니다. 윤회를 말할때나, 현재는 과거에 근거해 있기에 나타난 것이라는 부정적인 해석을 하는 경우의 ‘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요?
원장: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좋은 것은 좋으니 편하니 다행이고 나쁜 것은 피하고 싶잖아요 그래서 나한테 고통이 생기면 왜 하필이면 저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는지 의문을 갖고 한탄하기도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사람한테만 온 거 아니거든요. 다 똑같이 올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요즘의 코로나 바이러스를 보면 제때에 제대로 조심하지 못하면 누구나 걸리는 상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어려움은 언제 누구라도 겪을 수 있고 행복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상황을 지혜롭게 만들 노력은 스스로와 가정 사회 국가 지구적으로 서로 해야겠지요.
우리의 삶 전체가 ‘업’인데 어떤 사건 하나만으로 업이라 할 수 있을까요?
업이라는 것은 나쁘다 좋다 그런 개념보다는 지금까지 내가 현상으로 여기에 있게 한 과정이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기자: 훌륭하십니다. 그러한 견해로써 후학들에 이료술을 가르치시기도 하고 그 분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직업도 연결해주시는 것이군요.
원장: 지금은 그런 것 뿐만이 아니라 자립할 수 있게 하는 장애인자립생활 센터를 만들어 놓고 있어요. 그걸 하기 위해서는 시각 장애인들의 능력 계발도 해야 하지만 시각 장애인들에게 정보도 제공해줘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회가 자꾸 바뀌면서 전자제품들이 많이 쓰이고 하는데, 시각 장애인들은 그걸 다 따라 활용할 수가 없어요. 요새 아이파크 같은 좋은 데 가면 스크린도 옛날에는 돌출식으로 되어 있어서 만지면서 누를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전부 화면으로 되어 어 있어서 보이질 않으니까 내 집에 어떻게 들어가야 할 지 자기 집도 들어가기 힘든 상태가 된 게 풍요로운 문화 생활 속에서 겪는 일종의 시각 장애인들의 어려움이거든요 여기에 적응하려고 하면 그것도 배워야하잖아요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해요. 우리는 그런 것을 배운다는 것을 정보 제공이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각 장애인은 정보소외계층이예요. 어떤 경우엔 “왜 시각 장애인들한테는 이런 것 저런 것 갖다가 배려를 해야 하느냐” 라는 것에는 알려줘야 하니까 그럴때는 인식 개선운동 차원으로 하는 것이지요.
기자: 그러시기에 시각 장애인의 아버지라 불리우시는군요.
원장: 그렇지는 않아요 그냥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한 동료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생각해보면 나이가 많은 사람이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보면 아랫사람인데 열심히 일하다보니 물어볼 게 있는 사람인 정도이지요.
기자: 지난번에 젊은이들이 원장님께서 아주 크고 어려운일을 모든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해 주신 것으로 아주 고마워하며 인사 드리는 것을 뵈었는데 참 겸손하십니다.
원장: 도움이 된다면 당연히 해야지요, 어릴 때는 주변 분들이 불편하지만 않기를 바랬다면 요새 와서는 그저 내가 옆에 있어서 조금 편해지면 좋지 않겠나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장난 삼아 하는 얘기가 어떤 사람들이 “왜 나를 이용하려고 하느냐”며 사람들이 누가 자기한테 피해줄까봐 걱정들을 많이 할때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성인들이 왜 성인인 줄 아느냐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2천년이 넘도록 수많은 사람이 그 이름만 팔아먹어도 잘 살아 그런데 우리는 도대체 가진 게 뭐가 있다고 내 이름 좀 팔리면 어때서? 나를 이용해서 할 수 있는 이로움이 생긴다면 내가 누구를 이용해서 내 이익이 생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것 아니냐고요. 다만, 그 방법 중에서 어리석은 이용은 당하지 말아야 하거든요 예를 들어서 돈이 있으면 누가 같이 투자를 하면 얼마를 벌어주겠고 내가 뭐하는데 무슨 보증을 좀 서주면 어쩌고 저쩌고 이런 것들은 봐서 그걸 선별하는 게 지혜거든요 나한테 큰 탐심만 없으면 쓸데없는 일에 관심이 많이 가지 않을 것이고, 정말로 힘든 사람이 나한테 왔을 때 내가 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해줄 수 있는 게 뭐냐 그것만 생각하고 있으면 누가 이용한다고 해서 그렇게 잘못되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설령 이용 당한다해도 그리고 노력한다해도 우리는 성현들만큼 그렇게 이용당할 수도 없구요.
기자: 훌륭하십니다.
원장: 감사합니다.
기자: 원장님께서 법당을 하나 지으셨다고요?
원장: 오래전 일인데요, 시각 장애인들이 따로 모여서 법회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불교가 지금은 많이 달라지기도 했지만 일반 법회 의식 같은 곳에 갔을 때 모르는 사람들이 가서 하기가 쉽지 않아요. 80년대부터 조계종에 신행회라고 있었거든요. 신행회 하는 스님이나 대원들을 만나서 교감을 하게 되었는데 우리 실정을 얘기를 했더니 처음에는 “우리가 그럼 법회에 모시고 다닐게요” 그랬다가 몇 번을 해보시더니 이 분들을 위한 특별한 모임이 따로 필요하겠다 그래서 도남동 보문동 이런 데에서 세를 얻어서 하고 있다가 그게 점점 발전해서 강남 쪽에도 가서 하고 그랬었는데 나중에는 정착지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해서 나이가 들면 수행하며 살 장소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해서 강원도에 절을 하나 지었어요. 그런데 절 지어놓으면 유지하기도 힘들고 한데 어쨌든 운이 좋아서 하나 만들고 그랬었는데 욕심이 생긴 것이 문제 였습니다. 같이 활동하던 멤버들이 어떤 사람이 그 돈을 융통하게 해주면 “지금 한국은행에 소송 중인 사건이 하나 있는데 그게 되면 엄청난 혜택을 주겠다” 그러면서 무지개 법인 이런 걸 만들어놓고 좀 덕을 볼까 하고 말려들었던 것입니다. 말려들었다가 지어놓았던 절을 담보로 보증을 섰다가 그걸 못갚으니까 그 절이 경매가 된 거지요 그래서 없어졌습니다. 그 뒤로 우리가 어떻게 모임을 갖느냐 그런 걱정을 하게 되었고 당연히 우리 젊은 친구들이 걱정을 많이 햇는데 요새는 연화직업재활원이라는 곳에 혜성 스님이라고 계시는데 그 분께서 농아인 포교를 먼저 시작하셨는데, 우리 시각장애인 얘기를 들으시고 한 달에 한 번씩 연화원에서 법회를 하게 해서 요새는 거기서 법회를 드리고 있어요. 지었던 절은 없어졌고요...
기자: 많이 안타까우셨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으로도 어떻게 수행을 해오시고 계신지 짐작됩니다만 불자로서 수행 삼는 가장 중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무엇인지요?
원장: 내 생활을 성실하게 하는 것이 첫째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틈틈이 시간이 되면 생각을 좀 해봅니다. 오늘은 내가 누구한테 어떤 신세를 졌고 내일은 또 그 신세를 어떻게 갚을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남한테 신세지는 일이 더 많죠 그러니까 그것만 생각하고 있어도 생활을 다잡을 수 있는 것으로 두 번째로 삼고 있습니다.
기자: 법당 크게 잘 지으려다 아예 못하게 된 것처럼 때로 깨달음 대박주의에 빠지면 오히려 어려울 수도 있다는 관점에서 비추어보면 실제 삶에서 수행을 이루시는군요.
원장: 흔히들 사람들이 말하잖아요 견성을 하기 위해서 용맹정진 한다! 훌륭한 수행입니다. 저는 우리네 삶이 한번이 아니란 면에 관점을 두고 있습니다. 좀 빨리 가려고 이러고 저러고 한다 해도 살아보면 다 그만 그만 하기도 하니까요. 오늘 하루 잘 살았는가? 스스로에 물으며 삽니다.
기자: 제가 원장님을 뵙게 된 것은 친구의 친구인 캐나다 교포가 몸이 좀 불편해서 왔다가 원장님께서 당장 큰 병원으로 가서 종합진찰 및 내장계통의 정밀 검사를 가능한 빨리 오늘 내일로 검진 하시라 하시어 발견돤 것이 췌장암 말기 였다고 들었습니다. 이료술로써도 어떻게 아실 수 있으신지요?
원장: 요새는 기계들이 많이 있고 사람들이 기계를 믿잖아요 기계 없으면 아무것도 안되는 줄 알아요.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진찰한 것을 내어 보여줄 수가 없잖아요 x레이나 mri를 찍어서 보여주면 잘 믿지요. 우리가 병을 알아내는 것으로는 첫째.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의 문답입니다. 문답 과정에서 기초 지식에 의한 자료가 쌓여지고 두 번째로는 만져봄입니다. 만져보면 느끼게되고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몸은 거의 비슷하거든요. 제게 배운 이술은 몸의 부분만을 아는 것이 아닌 몸 전체를 배웁니다. 세번째는 그 사람이 사는 리듬을 알고 병을 아는데 씁니다. 넷째는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하여 마지막으로 직접 만져봅니다. 그걸 촉찰이라고 부릅니다. 이런과정으로 병을 알 수 있지만 어떤 병에 걸렸다고 말하기는 아주 곤란하니 가장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병원으로 가시라고 합니다. 단지 종합 병원이나 전문 병원이나등등의 병원에 얼마나 빨리 가서 어떤 진찰을 하시라고는 알려 드립니다.
기자: 저도 몇 년 전에 다친 발목을 여러 곳에 다녀도 낫지 않은 것을 원장님께서 원인을 파악하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요... 부처님께서 “아픈 사람이나 어려운 사람에게 잘 해주는 것이 곧 나에게 해주는 것이다” “내가 이 몸이 열반에 든다고 해서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왜냐면 당신들이 그런 사람을 볼 때에 도와주는 것이 곧 나한테 하는 것, 즉 나를 보는 것이다” 라는 가르침을 주셨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원장님께서는 직접 그런 일을 해오고 계시는데 기 치료도 하신다는데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원장: 기라는 개념은 요즘엔 동서양을 막론하고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특히 동양에서 오랫동안 여러 방면에 써왔던 것입니다. 기라는 것은 에너지로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 몸으로 돌고 있는 에너지 말입니다.. 우리가 만일 몸에 육신만 있고 움직일 수 있는 기운이 없다면 그거는 죽은 사람이거나 식물인간이겠지요 죽은 사람과 식물인간의 차이는 죽은 사람은 과학적으로 볼 때에 아예 세포 기능이 떨어졌으니까 좀 지나면 생체가 아니기 때문에 썩어요 식물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은 움직이거든요 움직이는데 그것이 실제로 활력을 갖지를 못하죠 그러한 상태를 흔히들 식물 인간이라고 말하고 활동까지 다 할 수 있으면 정상적인 생활체라고 보는 거거든요 기는 에너지에요 우리 몸을 돌고 있는 에너지. 제가 30살 좀 넘어서부터 여름이 되면 치료하는 것도 한가하고 학교에 있을 때는 방학이었잖아요 그래서 경상남도 함양 산청 이런 곳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에 방송통신대학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했을 때는 공진청에 근무하는 사람들 고향에 해당하는 덕적도 영정도 백련도 이런 쪽으로 돌아다녔어요. 낮에는 방통대 친구들인 공직자 분들이 일하니까 저녁 되면 이장집 등에서 죽 모여 이야기도 하곤 했는데 하루 종일 일 했으니 여기저기 몸이 피곤하고 아프다 해서 제가 주물러줄까요? 침도 좀 놔줄게요1 처음에는 그렇게 다니다가 얼마 즈음 지나면서부터는 같이 갈 치료 팀 몇 사람 짝을 지어 만들어 다니기도 했습니다. 마치 의료 봉사팀 비슷하게요. 그렇게 다닐 때에 진주 근처인가 어디를 갔는데 첩첩산중이었죠. 밤중에 엄마가 애기를 안고 왔는데 도회지 같으면 당연히 의료 기관의 응급실로 바로 갈 건데 거기는 그럴 수도 없고 애가 열이 오르고 숨결도 좋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저도 겁이 덜컥 나는 거예요. 그렇다고 그 상황에서 병원에 빨리 가라며 아무 것도 못한다고 할 수도 없는 다급한 상황이기도 했고 겁은 났지만 해야겠다는 살려야겠다는 바램도 있었습니다. 떠 맡긴 아이를 받아 안아서 어르고만 있었습니다. 그 어린 아이에게 침을 놓는 것도 위험하고 하여 아기를 품에 안고 간절히 비는 마음이었습니다. 이 얘가 조금이라도 좋아졌으면! 하며 비는 마음엔 무기력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해줄 것도 없고 할 일도 없는 상태에서 한참을 안고 있다가 잠시 아이를 가족에 맡기고 마당에 있는 펌프물을 퍼서 진갈색의 플라스틱 대야 같은 곳에 손을 씻으려 물에 담그니까 이 손끝에서 정전기 현상같이 파란 불빛이 촥촥 튀어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옷에서의 정전기 반응 같은 것은 경험해 봤지만 물에 닿은 내 손끝에서 그런 게 나가는 건 처음이었어요. 그 다음에 아 이거라도 싶은 기대감으로 다시 방에 들어가서 아이를 안고는 한참을 기도하는 마음에다 기운을 실어 안고 있었는데 아기 아버지가 아기 얼굴 색깔이 달라진다고 해요. 저도 맥을 계속 보고 있었는데 숨소리가 편안해지면서 아이가 칭칭 거리고 울다가 나중에는 잠이 들었습니다, 어릴 때 고아원 같은 데 있으면서 엄마 없어서 막 우는 아이들을 그냥 등에 업고 졸리면 벽에 기대서 자고 그러면 애들도 같이 자고 그런 경험이 있었거든요 그렇게 했는데 그 다음 날 애기를 데리고 왔어요 열도 내리고 아침에 변을 봤는데 푸른 똥을 쌌다고 그래서 그건 열 때문에 그런 건데 속이 차가워서 그런 거니까 그 날도 좀 만져주고 안아주고 해서 아이가 괜찮아졌어요. 저도 그때는 뭐가 어떻게 됐는지 몰랐죠. 정식으로 이건 이렇게 되고 저건 저렇게 되고 경락상으로 뭐가 어떻게 되고 그런 치료가 아니었거든요 그러나 아이는 낫긴 했고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이 난리가 났어요 2박 3일 있다가 오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동네 입구까지 나와서 배웅하고 뭘 못 줘서 안달이었죠. 집에 돌아오니까 주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놀러 갔다 오면 바가지 썼다 그러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그러더라고요. 그때부터 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디서 배운 게 아니고 그렇게 체험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때부터 이런 저런 책도 보고 그러면서 수련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 다음에는 비원 근처에 있는 정신 문화원에서 기공수련을 했어요. 그리고 유한평 교수 등을 만나면서 최면 과정을 초급, 중급, 고급 배우게 되고 그러면서 수련도 했는데 가만히 몇 번 다니다 보니까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 같았지요. 그래서 호흡과 함께 기수련을 하게 되었어요. 또 기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장소를 찾아다니게 되었어요. 강화도 마니산 지리산 또 강원도 영월 쪽에 있는 사자법통사 그런 데 가면 괜찮아요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 때문에 간 곳이 중국의 태산이었어요. 내 생각에 그 곳들 역시 기가 있는 산인 것 같았어요. 그렇게 저렇게 하면서 기감을 익히고 그걸 침놓고 치료하는데 활용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자: 이러하신 원장님은 누구십니까?
원장: 이 세상에 와서 처음에는 뭔가 잘못되서 왔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불법을 좀 알게 되고 그러면서 무명에서 온 것은 맞지만, 왔으니까 이 무대에서 내가 해야 할 배역이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역활에서 어느 정도 밥값이 주어 질 것이고, 연기를 하는 있는 배우입니다.
장소: 서울 종로 손자극센터
날짜: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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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동적입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