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 없네
열왕기하 7장 16-20절, 시편 33편 4-12절, 마태복음서 17장 14-20절
한 문 덕 목사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 없네(For believers nothing is impossible!)]
오늘 특송으로 여러분이 함께 들으신 찬양은 저도 무척 좋아하고 잘 부르는 찬양입니다. 그래서 제가 성가대 지휘자이신 박지형 집사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 또한 바로 이 찬양에서 따 왔습니다.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 전혀 없네.(The Almighty God with His power, there is nothing He can not do.)
그리고 이 찬양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주의 말씀 의지하여 믿음으로 그물 던져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함 없네!(The Word of the Lord you trust in with faith throw the net. For believers nothing is impossible!)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없는 일은 없으시고,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며, 그를 믿는 자에게는 불가능이란 없다고 찬양의 가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찬양에서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진 사람은 누가복음서의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했지만 허탕만 치다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졌더니 물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울 정도로 엄청나게 잡게 됩니다.(누가복음서 5:1-11)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은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서의 동일본문인 마가복음서 9장 2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심한 간질병으로 고통 받아온 아들을 둔 아버지가 예수님께 자기 아들의 상태를 길게 설명하고 나서, “하실 수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을 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여기서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라는 이 말씀의 개역한글판 성경의 번역이 바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씀은 바울 사도가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했던 말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과 함께 한국의 교인들이 매우 좋아하고 사랑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아멘’으로 화답]
제가 설교자로서 확신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베드로가 겪었던 일이나 또 병든 아들이 치유되는 이 말씀을 전하면서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이라고 하면 많은 교우들에 저의 말씀을 따라 함께 “아멘!”이라고 응답하시면서 위로를 받고 힘도 얻으실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었던 숱한 삶의 위기 상황 속에서 실제로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넘겼던 체험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행과 고통, 위험의 순간과 갈등과 긴장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네 인생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은 되지 않습니다. 뜻밖의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멀쩡하던 몸이 말을 안들을 때도 있고, 계획했던 일들이 틀어지기도 합니다. 시험에 떨어지고, 회사에서 해고당하는 일들도 생깁니다. 이런 삶의 위기들이 늘 우리들 곁에 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게 되면 우리의 간구는 더 간절해지고, 하나님 앞에서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신음하던 우리를 찾아 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에서 구원하셨던 것처럼, 사자굴에서 다니엘을 꺼내 주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주님 은총 가운데 놀라운 체험들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열왕기하의 말씀은 시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 중에 겪은 놀라운 이야기 중 한 부분입니다. 시리아 왕 벤하닷이 전 군대를 소집하여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를 포위하였습니다. 온 사방의 길이 다 막혔기 때문에 사마리아 성 안에 있던 주민들은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온갖 물자들이 동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소 머리도 아닌 나귀 머리 하나가 은 팔십 세겔에 거래되고 비둘기 똥의 사분의 일도 안 되는 작은 열매를 사려고 할 때도 은 다섯 세겔이나 주어야 했습니다.
한 번은 이스라엘 왕이 성벽 위를 지나가고 있는데, 한 여인이 왕에게 원통한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높으신, 임금님, 저를 좀 살려 주십시오.” 그러자 왕이 대답합니다. “무슨 일로 그러시오?” 여자가 말합니다. “며칠 전에 이 여자가 저에게 말하기를 ‘네 아들을 내 놓아라. 오늘은 네 아들을 잡아서 같이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잡아서 같이 먹도록 하자.’ 하였더니, 이 여자가 자기 아들을 숨기고 아직까지도 내놓지 않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서로 자신의 자녀의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는 참담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왕은 너무 괴로워서 자기의 옷을 찢어버리고, 지난 번 시리아의 전투에서 시리아를 몰살시키지 않도록 했던 엘리사 예언자에 대하여 저주를 퍼 붓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가 왕에게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이맘 때 쯤에 사마리아 성문 어귀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에 사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에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예언자 엘리사는 사마리아의 상황이 곧 좋아질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씀 드린 대로 지금 사마리아는 사람 사는 곳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을 부축하고 있던 시종관 하나가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주님께서 하늘에 있는 창고 문을 여신다고 할지라도,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다시 엘리사가 말합니다. “당신은 분명히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볼 것이요. 그렇지만 당신은 그것을 먹지는 못할 것이오.”
예언자 엘리사의 말대로 정말로 상황은 역전되었고, 주님의 말씀대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에,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에 거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왕은 자신을 부축했던 시종관을 성문 관리로 임명했는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대로 이 사람은 백성들의 발에 밟혀서 죽고 맙니다. 하나님의 예언자가 주님의 말씀을 전한 것에 반기를 들고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이웃 사람의 자식마저 잡아먹어야 하던 상황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바뀐 것일까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성경은 또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사마리아 성안이 지옥과 같은 곳으로 변하자 온갖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 네 명이 성문 어귀에 앉아 있다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에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겠느냐? 성 안으로 들어가 봐도 성 안에는 기근이 심하니, 먹지 못하여 죽을 것이 뻔하고, 그렇다고 여기에 그대로 앉아 있어 봐도 죽을 것이 뻔하다. 그러니 차라리 시리아 사람의 진으로 들어가서 항복하자. 그래서 그들이 우리를 살려 주면 사는 것이고, 우리를 죽이면 죽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로 그 누구에도 돌봄을 받기가 어려웠던 이 환자들 네 명이 죽을 각오를 하고 적진으로 갑니다. 투항하는 것이지요. 사실 시리아 왕이 이 환자들을 받아 줄 리 만무합니다. 전혀 쓸모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 네 명의 환자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어차피 죽을 것 무엇이라도 해 보자라는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황혼 무렵에 일어나서 시리아의 군대가 빼곡한 곳으로 걸어가는데 놀랍게 시리아 진의 끝까지 가보아도 군대는 온데간데없고 한 사람의 군인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주님께서 이 네 사람의 걸음 소리를 가지고 병거 소리와 군마 소리와 큰 군대가 쳐들어오는 소리처럼 들리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시리아 군인들은 이스라엘 왕이 그들과 싸우려고, 헷 족속 그러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고대 철기 문명을 이끌었던 히타이트 족속과 이집트의 왕들을 고용하여 자신들에게 쳐들어온다고 생각하고 걸음아 나 살려라 해 놓고 모든 장막과 군마와 나귀들을 버린 채 줄행랑을 쳤던 것입니다. 이 상황을 목격한 네 사람은 곧 그길로 이스라엘 왕에게 알렸고 그리하여 모든 문제가 해소되고, 이스라엘과 사마리아에는 평화가 찾아왔던 것입니다.
다소 과장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삶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숱한 위기의 순간과 자신의 생각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일들을 주님의 도우심으로 해결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저 또한 그러했고, 사실 제가 생명사랑교회에 부임한 이후에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지난날이 그러했습니다. 이 모두는 주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고, 능력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방식으로 놀라운 일들을 해 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능하신 나의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 전혀 없다고 고백하고, 동시에 믿는 자가 주님의 말씀을 의지한다면 불가능이란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의 저자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온 땅아, 주님을 두려워하여라. 세상 모든 사람아, 주님을 경외하여라. 주님은 말씀으로 하늘을 지으시고, 입김으로 모든 별을 만드셨다. 주님은 바닷물을 모아 독에 담으셨고 그 깊은 물을 모아 창고 속에 넣어 두셨다. 한 마디 주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이 생기고, 주님의 명령 한 마디로 모든 것이 견고하게 제자리를 잡았다. 주님은, 뭇 나라의 도모를 흩으시고, 뭇 민족의 계획을 무효로 돌리신다. 주님의 모략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으며, 마음에 품으신 뜻은 대대로 끊어지지 않는다.”
오늘날 온 세상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정말 온 땅은 주님을 두려워하여야 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주님을 경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천박한 이해에 딴지 걸기]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우리 신앙인들의 이런 고백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 없다”고 말을 해도 실제로 잘 먹히지 않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왜일까요? 세상 사람들의 이런 반응에는 나름 일리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모든 일이 다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지금 우리에게 닥친 코로나도 쉽게 해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는 1년 반이 넘도록 코로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바로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한 번 여쭤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둥근 사각형을 만드실 수 있을까요? 사랑의 하나님께서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실 수 있을까요?” 우선 둥근 사각형은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건 우리들이 용납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능치 못하실 일이 없다고 우리는 고백을 하지만 한번만 더 생각해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 어딘가에선 끔찍한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고, 누군가는 고통 속에서 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시며 사랑이신 하나님이시라면 왜 세상에 이런 죄악과 고통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일까요? 어찌 해볼 도리가 전혀 없는 일들을 당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능치 못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제가 어느 자리에서 강의하면서 여러분에게 드렸던 똑같은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둥근 사각형을 만드실 수 있을까요?” 그랬더니 어떤 분이 가능하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은 그렇게 말할 자유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신앙고백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둥근 사각형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을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계속 우기면 이제 그 사람은 어느 누구와도 상식적으로 소통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더 신학적인 질문을 던져 보자면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약속을 어길 수 있을까요? 그리고 약속을 어기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신뢰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기도하고,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다고 고백하지만, 그 언어가 어떤 신앙과 상황 속에서 터져 나온 고백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해 가능한 신앙을 줄기차게 가르쳐 왔습니다. 비상식적이며 무논리적이며 무턱대고 믿는 맹신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사용하기도 합니다. 아무 일에나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고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합니다.
남의 것을 도둑질해서 부자가 된 사람이 이 고백을 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면 될까요?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올바르며, 그 하시는 일은 언제나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온 땅에 가득하구나.” 그렇습니다. 주님의 전능한 힘은 정의와 사랑을 동반한 힘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은 불의 속에서도 꿋꿋하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하는 고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서에서 등장하는 환자는 소년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어린 아이들, 청소년들은 나라의 미래를 담보하는 희망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청소년 세대가 불 속과 물 속을 헤매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치십니다. 예수님이 아이를 다 고치고 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쭙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기 때문이라면 믿음이 많으면 가능할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어서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을 여기에서 저기로 옮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겨자씨는 그 어느 씨앗보다 작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너희가 믿음이 많다고 하지만 실은 너희의 믿음이 잘못된 믿음이었다. 그래서 너희는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라고 불려도 마땅할 정도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을 수 있겠느냐? 내가 떠나면 너희가 스스로 이제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야 하는데, 너희는 빨리 참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너희가 진짜 믿음을 겨자씨만큼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너희는 놀라운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런 저의 해석은 동일본문인 마가복음서의 구절에 의해서 지지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은 왜 더러운 영을 쫓아내지 못했느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쫓아내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쫓아 낼 수 없다.”고 대답하십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대로 따르겠다고 결단하고 그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래 세대를 살리는 일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따를 때만 가능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 없다”라는 말의 의미가 명확해졌습니다. 주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 시기가 언제일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악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승리하신다고 믿습니다. 그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올바르게 회복되고 다시는 눈물이 없는 세상, 고통과 아픔이 사라진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한숨과 고통, 불안과 두려움, 때때로 공포와 폭력의 위협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뜻을 일구며, 주님의 뜻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그 힘으로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가고, 이 세계의 멸망을 늦추게 합니다. 희망의 불씨를 끄지 않으며, 주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 없다고 고백할 때 혹시 우리의 이 믿음이 자본주의가 세뇌시킨 욕망으로 오염된 것은 아닌지, 사회적 성공과 경제적 부유함만을 뒤따라 간 것은 아닌지 우리 모두는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 되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간다면 우리는 그 때서야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바울의 고백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이미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많은 것을 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뜻을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새 시대의 새 일꾼이 되고, 변화의 흐름에 따라 새롭게 주어지는 사명을 발견하며, 전능하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며, 주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일을 볼 때 저와 여러분 모두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신 하나님께,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게 될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능력의 하나님! 우리가 어깨를 쫙 펴고 똑바로 서서 올곧은 길을 가게 하여 주소서. 세상 풍파에 시들지 않게 하여 주소서. 120의 나이에도 영롱한 눈을 가지고 빛을 잃지 않았던 모세처럼, 우리도 밝은 눈으로 어둔 세상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하여 주소서. 믿는 자의 능력을 드러내게 하시고, 사랑과 정의가 이길 때까지 결코 절망하거나 낙담하지 않게 하여 주소서. 한낱 미물인 바이러스나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볕도 주님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우리들의 열정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우리 생명사랑 신앙공동체가 주님의 비전속에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 없다는 믿음을 더욱 굳게 지니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전국으로 코로나 19가 재확산되고 있습니다. 시름이 깊어지고 한숨 또한 늘어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께 감사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영상으로 예배할 수 있는 것, 신앙 교육을 받고 우리들의 믿음을 성찰하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고요히 집에 머무는 시간을 통해서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올 날들을 준비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통해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지의 구름이 걷히고, 우리의 모든 이웃이 주님의 향기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과 예물을 드립니다. 꼭 필요한 곳에 써 주소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곳에, 생명을 살리고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곳에 쓰이게 하소서. 생명사랑교회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우리 믿음이 굳세어지고 더욱 더 주님과 가까워지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십시오. 주님의 뜻을 따르고, 세상 권력에 주눅들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가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친교가 참된 믿음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내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이 시간 전국에서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