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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82) 교리 교육과 십계 공부
계명마다 구체적 행동 규범 제시하고, 하나하나 실생활에 적용해 설명
- 일본 동경대학 오구라문고 소장 「천주십계」 1877년 필사본 표지와 첫 면.
십계는 교리 교육의 출발점
초기 교회의 교리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글을 모르는 일반 백성이나 여성에게 처음으로 행하는 입문 교리는 ‘십계’였다. 지적 수준이 높은 양반들이 「칠극」과 「천주실의」로 서학 공부를 시작한 것과는 다르다. 벽동의 김치 가게 주인 최조이가 정광수의 처 윤운혜를 처음 만났을 때 일이다. 최조이가 선물에 감사하며 무심코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자, 윤운혜가 질색을 하며 그걸 외우면 지옥에 간다고 하면서 십계를 가르쳐 주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것을 외우면 죽은 뒤에 천국에 올라갑니다.” 「사학징의」에 나온다.
십계 공부를 신앙의 출발점으로 삼는 장면은 「사학징의」 속 방성필, 박점쇠, 김유산, 김종교, 한덕운, 변득중, 이부춘, 김경노, 곽진우, 이우집, 임대인, 황차돌, 박사민, 한은, 강성필, 김한봉, 김세봉, 비녀 소명 등의 공초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외교인에게 신앙을 권할 때 처음에는 거의 예외 없이 십계 공부로 시작했다.
불교에서 나무아미타불을 열심히 외우면 극락왕생한다고 가르친 것처럼, 천주교에서는 십계를 외워 실천하면 천국에 간다고 가르쳤다. 간명해서 알기 쉽고, 일상생활의 예시를 통해 설명하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지 않았다. 삼위일체나 천주 강생에 대한 깊은 이론 지식 없이도 묵주기도와 십계의 암기만으로 내가 구원받고 내 집안이 복될 것이었다.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늘 벅찼다.
정하상 바오로는 「상재상서(上宰相書)」에서 “천주를 받들어 섬기는 방법이란 높고 아득하여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요, 은미한 것을 찾아 괴이한 일을 행하는 종류도 아닙니다. 허물을 고쳐서 스스로 새로워져서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는 것일 뿐입니다”라고 하고, 이어 십계명을 나열한 뒤, 다시 “위 십계명은 모두 두 가지로 귀결됩니다. 천주를 만유의 위에서 사랑하고, 남을 자기처럼 아끼는 것이 그것입니다. 앞쪽의 세 계명은 주님을 섬기는 절목이고, 뒤쪽의 일곱 계명은 몸을 닦고 살피는 공부입니다”라고 간명하게 설명했다.
이를 다시 단순하게 나누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1, 3, 4계명은 해야 할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해서 안 될 일은 헛맹세, 살인, 사음, 도둑질, 거짓 증언, 남의 아내 탐냄, 남의 재물 탈취 등이다. 윤지충도 관장에게 글로 써서 제출한 공술기인 「윤지충 일기」에서 십계의 항목을 나열한 뒤에 “이 십계는 요컨대 두 가지로 요약되니, 천주를 만유 위에 사랑하라는 것과 모든 사람을 자기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라고 「상재상서」와 똑같은 설명을 했다. 근거로 삼은 교리서가 같았다는 뜻이다.
조목별로 가르친 십계 교육
「십계」 교육은 십계명 10조목만을 외우는 데 그치지 않았다. 각 조목별로 세부 내용을 갖추어 하나하나 따로 교육하는 프로그램이 갖추어져 있었다. 따라서 십계의 조목을 모두 배우려면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다. 십계를 외우지 않고는 정식으로 입교할 수가 없었다.
양성 사람 박점쇠는 김성옥이 십계를 써주면서 익히게 했는데, 늙고 병들어 외우지 못했고, 이후 황심이 십계 공부를 또 권하므로 힘껏 배웠으나 4, 5조목을 익혔을 때 붙잡히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방성필도 공초에서 “제가 무식한 소치로 간신히 2, 3조목만을 배웠다”고 진술했다. 십계 교육이 매 조목별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시일을 두고 가르치는 방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십계 교육은 글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로 구두 전달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곽진우는 “십계는 제가 입으로 외워 지황 처의 어미 손조이(孫召史)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진술하였고, 박사민은 “금년 정월에 최봉선과 땔감을 지고 작반하여 가던 길에 최봉선이 사학에 대해 잔뜩 말하면서, 먼저 십계를 가르쳐 주므로, 제가 과연 그 말을 듣고서 몰래 외운 것은 분명합니다”라고 했다. 한은도 “작년 2월에 상경하여 창동 정가(丁哥) 양반의 행랑채에 붙여 살 때, 이른바 김한빈과 한 채에 같이 살게 되어 절로 친숙해졌습니다. 그가 입으로 전해준 십계를 과연 외워 익혔습니다”라고 진술했다.
십계 공부의 세부 내용
십계 공부의 구체적 내용은 최해두가 평해 감옥 중에서 쓴 「자책」과 다블뤼 주교가 펴낸 「성찰기략」에 아주 상세하다.
한 예로 제5계 ‘살인하지 말라’는 조목에 대해 최해두는 먼저 살인에도 손으로 살인한 것과 입으로 살인한 것 있다면서, 여럿이 모인 중에 남을 욕해 그로 하여금 죽고 싶은 마음을 먹게 하거나, 남의 잘못을 몰래 퍼뜨려 그의 신세를 망치게 하는 것은 입으로 살인한 죄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남이 나를 해롭게 한다 하여 그를 속으로 미워해 죽거나 망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은 마음으로 살인한 죄가 된다.
또 남에게 죄짓게 하거나, 남의 범죄를 보면서도 구하지 않는 일, 내가 나쁜 짓을 해서 남이 이를 본받게 하여 남의 선을 꺾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죄에 해당한다. 또 입으로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것, 육신을 해쳐 병을 내거나 영혼을 돌보지 않아 죄에 빠지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죄에 해당한다. 심지어 남을 부추겨 시비를 붙이는 일, 화해할 수 있는데 화해하지 않는 것도 살인죄에 해당한다고 규정했다. 살인의 적용 범주가 매우 폭넓고 갈래가 세분화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블뤼 주교는 「성찰기략」에서 십계의 하위 항목을 조목별로 나눠서 더 구체적으로 기술했다. 제5계를 사람의 영혼과 마음과 몸을 해치는 죄라 하고, 이하 무려 41조항의 죄목을 나열하였다. 이 가운데 열 가지만 꼽으면 이렇다. 남을 해칠 뜻이나 죽일 뜻을 두기, 남이 재앙을 받거나 일찍 죽기를 원하기, 독한 말로 남을 꾸짖거나 혹 죽으라고 말하기, 남에게 심술을 부리거나 일부러 듣기 싫은 소리를 하기, 남을 부추겨 싸우게 하거나 원수 되게 하기, 분노하여 먹지 아니하거나 혹 몸을 부딪쳐 상하게 하기, 약을 먹거나 혹 방법을 써서 낙태하기, 누워 잘 때 조심하지 않아 어린아이를 다치게 하거나 눌러 죽이기, 남을 시켜 죄 되는 일을 행하게 하기, 언짢은 표양을 드러내어 남을 범죄케 하기 등이 그것이다.
제5계 ‘살인하지 말라’에서 죽인다는 의미는 단지 남의 목숨을 빼앗는 것만이 아니라 남이나 나의 육신과 영혼에 해가 되는 행동까지를 포함하는 포괄적 윤리로 확장되고 있다. 이를 다시 입과 행동과 영혼의 범죄로 구분하여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지침으로 제시하여 확대했다. 십계는 짧은 10개의 문장에 그치지 않고, 각 계명별로 인간으로 갖추고 지켜야 할 윤리의 기준으로 범주화함으로써 천주교의 윤리관과 선악 인식을 명확하게 드러내었다.
제4계 ‘부모에게 효도하라’도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만이 아니라, 상하관계에서 상호 지녀야 할 바른 몸가짐과 본분에 대한 78항목의 가르침을 담았다. 그 결과 자식에게 ‘나가 죽어라’ 하기, 딸을 낳았다고 산모나 아이를 돌보지 않기, 부부가 미워하여 불목하기, 심지어 마땅히 바쳐야 할 세금 안내기까지도 이 조목의 세부 항목 속에 들어있다. 이 같은 항목들은 모두 하나하나 점검하여 고해성사 때 사함을 받아야 했다.
이렇듯 십계 교육은 계명마다 지켜야 할 수십 가지의 행동 규범을 제시하여, 하나하나 실생활에 적용해 설명하는 방식이어서, 단순히 10계명을 외우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나하나 이치를 들어 설명하고 문답을 통해 확인하고 점검했다. 십계의 교리를 다 깨우치려면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 밖의 기본 교리서들
이 같은 내용들은 주로 십계를 풀이한 교리서인 「척죄정규(滌罪正規)」, 「십계진전(十誡眞詮)」, 「천주십계(天主十誡)」 등에 바탕을 두었고, 그밖에 「교요서론(敎要序論)」, 「성교절요(聖敎切要)」, 「성교요리(聖敎要理)」 등의 교리서에도 십계는 주요 교리 부분으로 취급되었다.
특별히 「척죄정규」는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인 알레니(Julius Aleni, 1582∼1649) 신부의 저술로, 양정균(楊廷筠, 1557~1627)이 서문을 썼다. 이중 권1의 「천주십계」에 보면 십계의 계명을 범하는 것에 해당하는 여러 죄를 나열하여 스스로 반성하기에 편하게 한다면서, 앞서 살핀 각 계명별로 해당하는 죄과들을 주욱 나열하였다. 그러니까 최해두나 다블뤼의 작업은 이 같은 앞선 저작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사학징의」 끝에 실린 「요화사서소화기」에 십계와 관련된 책자로 「삼문답 부십계(三問答 附十誡)」와 「텬쥬십계(天主十誡)」란 서명이 보인다. 특별히 「텬쥬십계」는 한글본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는데, 일본 동경대학 오구라 문고에 1877년에 옮겨 적은 한글 필사본이 남아있다. 이 책 속의 세부 항목은 「척죄정규」나 「성찰기략」과는 사뭇 다르다. 십계의 첫 항목이 “조상의 목패(木牌)에 절하기”를 꼽은 것과, 복잡한 설명을 배제하고 조선에 토착화된 내용이 많이 든 것으로 보아, 초기 교인들이 공부하던 「요화사서소화기」 속의 한글본 「텬쥬십계」를 베낀 책이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서소문 신앙 공동체의 리더였던 이합규는 「삼본문답(三本問答)」 1권과 「진도자증(眞道自證)」 2권, 「성교일과(聖敎日課)」 2권을 바탕으로 교리 교육을 진행했다. 이우집은 1795년 유관검에게서 십계를 배운 뒤에 「조만과(早晩課)」 1책을 받아와 공부했고, 임대인은 정약종에게서 십계와 「칠극」을 배웠노라고 했다.
「삼본문답」은 영세문답, 고해문답, 성체문답 등 영세 예비자를 위해 세 가지 기본 개념에 대해 설명한 책자이다. 이중 고해문답에는 십계의 내용을 포함하여 고해성사의 개념과 방법을 설명했다. 여기에 더해 신자들은 미사 때 쓰는 「성경광익」이나 「성년광익」 속 성경 말씀과 성인 전기를 마음에 새겼다. 다시 「준주성범」의 각종 기도문에 묵주 기도를 더하면 말씀의 은혜가 안에서 차고도 넘쳤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83) ‘주님의 기도’ 어떻게 바쳤을까
뜻 모르고 한자음으로 외웠지만 말씀의 힘이 주는 감동은 충분
- 영국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천주경' 자료. 윤유일이 로 신부에게 써주고 발음한 것을 듣고 로 신부가 알파벳으로 독음을 달고 그 아래에 그 같은 경과를 적었다. 윤민구 신부 제공.
초기 교회의 기도 생활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기도문을 어떤 방식으로 바쳤을까? 「사학징의」 끝에 수록된 「요화사서소화기」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압수품목 중에 기도 생활과 관련해서 눈에 띄는 물품은 염주(念珠), 즉 묵주다. 십자패가 달린 묵주가 한신애의 집에서 4꿰미, 오석충의 집에서 3꿰미, 윤현의 방구들 밑에서는 8꿰미, 김희인의 집에서도 6꿰미나 쏟아져 나왔다. 정섭과 정광수, 김조이의 집 압수물품 목록에도 묵주가 어김없이 들어있다.
여주 김건순의 무리에 속했고, 원경도의 외종으로 포도청에 끌려온 김치석은 이렇게 진술했다. “1798년 정월에 원경도가 저에게 사학을 하라고 권유하면서 책 3권과 베껴 쓴 5, 6장의 첩책(帖冊) 1권, 염주 한 꿰미 등의 물건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받아와서 배워 익혔습니다.” 충청 감영의 공문 중 여사울 최구두쇠와 송윤중 관련 기록 속에도 묵주가 등장한다.
사학죄인의 압수품목 가운데 묵주가 적지 않은 것을 보면, 당시 기도 생활에서 묵주기도가 대단한 비중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천주경’과 ‘성모경’은 당시 모든 신자들이 일상으로 외워 암송한 가장 기본적인 기도문이었다.
앞서 김치석은 5, 6장 분량의 첩책 1권을 원경도에게서 묵주와 함께 받았다고 했다. 첩책이란 두꺼운 종이를 병풍처럼 접어서 펼쳐볼 수 있게 만든 휴대용 책자다. 옷소매 안에 넣을 수 있는 수진본(袖珍本) 크기로 만들면 손바닥 안에 넣을 수 있어, 보관과 휴대가 간편했다. 첩책에는 ‘오배례(五拜禮)’와 ‘천주경’과 ‘성모경’이 첫머리에 나오고, 그밖에 ‘종도신경(宗徒信經)’과 아침 저녁 기도 등 주요 기도문이 적혀 있었을 것이다.
「요화사서소화기」 속 압수 품목 중에는 유독 한글로 베껴 쓴 작은 첩책이나 낱장의 종이가 많았다. 특별히 윤현의 방구들 밑에서 나온 물품 중에 낱장의 종이에 베껴 쓴 것들이 더욱 많았다. 한글로 베껴 쓴 작은 종이가 300여 장에다가, 작은 종이에 사서를 베껴 쓴 것 300여 장, 그리고 보자기 세 개에 베껴 쓴 쪽지는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중에는 책자로 만들려고 베껴 써놓고 미처 묶지 못한 것도 있고, ‘천주경’과 ‘성모경’ 같은 기도문을 낱장에 베껴 쓴 것도 있었다. 한신애의 집에서 나온 「제송초(諸誦初)」도 가장 기본이 되는 기도문을 베낀 것이었다.
‘천주경’과 ‘성모경’ 독송법
신유박해 이전 시기의 기도문은 한글이 아닌 한문 기도문을 음으로 독송하는 염경(念經) 기도 방식이었다. 대부분 의미를 모른 채 음만 따라 읽었다. 독송법은 오늘날 불교 신자들이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방식과 똑같았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과 같이 뜻을 모른 채 한자음으로만 읽는 것과 한가지다.
1798년 6월 12일에 충청도 정산 고을에서 체포된 순교 복자 이도기 바오로는 글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신문하는 관장에게 천주의 가르침을 끝까지 굽힘 없이 증언하다 순교했다.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그는 또한 초자연적인 지능을 받은 것 같아서 천주교 기도문의 아름다움을 아주 유식한 사람들보다도 더 잘 음미하였다”고 썼다. 이도기는 글을 몰랐지만 소리를 통해 기도문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의미까지도 깊이 빨아들였다는 뜻으로, 이는 당시 이들의 독송이 아름다운 가락을 지닌 것이었음을 알려주는 진술이기도 하다.
또 1800년 3월 여주에서 순교한 이중배 마르티노와 원경도 요한도 부활절을 맞아 “모두 큰 소리로 알렐루야와 부활 삼종경을 외우고 나서, 바가지를 두드려 가며 기도문을 노래하였다”고 썼다. 이들에게 기도문은 기쁘고 아름답고 거룩한 노래였던 것이다.
윤민구 신부가 영국 국립도서관에서 찾아낸 한글본 ‘천주경’이 있다. 이 기도문은 1790년 윤유일이 북경에 갔을 때, 그곳 로(Raux) 신부의 요청에 따라 「수진일과(袖珍日課)」에 수록된 ‘천주경’에 조선에서 기도하던 방식대로 한글 독음을 달아서 써준 것이다. 로 신부는 한글 매 글자 옆에 한글음을 알파벳으로 받아 적었다. 그 정황은 사진 아래쪽에 적힌 메모에 자세하다. ‘천주경’ 원문을 일부 당시 표기를 반영해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재천아등부쟈(在天我等父者) 아등원(我等願) 이명현성(爾名見聖) 이국임격(爾國臨格) 이지승행어지(爾旨承行於地) 여어천언(如於天焉) 아등망(我等望) 이금일여아아일용량(爾今日與我我日用糧) 이면아채(而免我債) 여아역면부아채자(如我亦免負我債者) 우불아허함어유감(又不我許陷於誘感) 내구아어흉악(乃救我於凶惡) 아믕(亞孟)
당시 신자들은 ‘천주경’ 즉 ‘주님의 기도’를 위 한문 독음 그대로 또는 한문에 한글 토를 붙여서 읽었다. 예를 들면 “재천아등부자자(아), 아등원, 이명현성(하시고), 이국임격(하시며), 이지승행어지(를) 여어천언(하나이다.)”와 같은 방식으로 독송하였다.
‘성모경’의 독송 또한 ‘천주경’처럼 한글 독음으로 읽었다. 「수진일과」의 한문 표기를 일부 당시의 발음을 반영해서 적으면 아래와 같다.
야우마리아(亞物瑪利亞) 만피에라지아쟈(滿被額辣濟亞者) 주여이해언(主與爾偕焉) 여중이위찬미(女中爾爲讚美) 이태자여수(爾胎子耶) 병위찬미(倂爲讚美) 천주성모마리아(天主聖母瑪利亞) 위아등죄인(爲我等罪人) 금기천주(今祈天主) 급아등사후(及我等死候) 아믄(亞孟)
「수진일과」의 기도문 중 처음 “야우마리아(亞物瑪利亞) 만피에라지아쟈(滿被額辣濟亞者)” 부분은 한문으로는 도저히 해석이 안 된다. 중간에 끼어있는 라틴어 발음을 음차한 어휘들 때문이다. 원문은 “Ave Maria, gratia plena’이다. ‘아물(亞物)’은 ‘야우’로 읽는데, ‘아베(Ave)의 음차다. 또 ‘액랄제아(額辣濟亞)’는 ‘에라지아’로 읽으니, 라틴어의 은총 또는 성총의 의미인 ‘그라치아(gratia)’의 음역이다. 이 대목이 뒤에 「천주경과(天主經課)」에 실린 ‘정모경(貞母經)’에서는 “신이복마리아(申爾福瑪利亞), 만피성총자(滿被聖寵者)”로 바뀌었다. 위 ‘액랄제아(額辣濟亞)’가 ‘성총(聖寵)’으로 대체되었다. ‘신이복(申爾福)’은 ‘아베’ 즉 ‘기뻐하소서’를 풀이한 표현이다.
눈을 지그시 감고 가락에 맞춰 암송하는 이 같은 염경(念經) 기도 방식으로 초기 교인들은 묵주기도를 바쳤다. 뜻 모를 한자음의 조합이었지만, 몸을 앞뒤 또는 좌우로 흔들며 가락을 타고 외우는 ‘천주경’과 ‘성모경’의 리듬 속에는 거룩한 말씀의 아우라가 뭉클한 빛이 되어 소리를 타고 흘렀다.
한글 기도문의 출현
1838년 앵베르 주교가 1838년 12월 1일, 로마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편지에 당시 기도문에 대한 중요한 증언이 담겨 있다.
“천주교가 들어온 시초에 조선 신자들은 자기 재능에만 심취하여 조선말을 경시하는 생각으로 조선말이 천주께 기도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문으로 된 기도문을 그 뜻까지 번역하지는 않고 뜻은 전혀 모르는 채 발음만 조선식으로 하여 바쳤습니다. 그러나 중국 사람도 책을 보지 않고 말만 들으면 전혀 그 의미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어느 정도 조선말을 배우자마자 네 명의 통역을 데리고 공동 기도문들을 번역하여, 지금은 젊은이나 늙은이나 유식하든 무식하든 모든 신자들이 열심히 배우고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19세기 중반까지도 조선의 신자들은 중국의 「수진일과」와 「천주경과」 등에 실린 한문 기도문을 조선식 한자음으로 뜻도 모른 채 독송하는 방식으로 기도를 드렸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번역된 한글 기도문을 현대어를 반영해서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비신 자여! 네 이름의 거룩하심이 나타나며 네 나라가 임하시며 네 거룩하신 뜻이 하늘에서 이룸같이 땅에서 또한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 죄를 면하여 주심을 우리가 우리게 득죄한 자를 면하여 줌 같이 하시고, 우리를 유감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또한 우리를 흉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앞서 단음으로 된 한문 기도문을 염불하듯 염송하다가, 이처럼 한글로 번역된 기도문이 생기면서 독송 방식에도 변화가 왔을 것이 당연하다. 신자들은 비교적 긴 호흡의 글을 읽을 때 쓰던 가사창의 염송법을 끌어와 적용해, 예전 연도의 가락과 같은 낮고 그윽한 메나리토리의 가락을 얹었을 것으로 본다. 주거니 받거니 서로 메기면서 화답하는 기도가 오랜 기간 가락을 타고 입에 익어 고저장단에 박자가 착착 맞게 되었을 것이다.
다블뤼 주교는 당시 조선어로 된 ‘성모경’을 함께 염송하는 소리를 듣고 이런 말을 남겼다. “주일날, 회원들이 조선말로 기도문을 외우는 것을 들을 때의 나의 감격은 참으로 깊습니다. 나는 모든 국민의 이같은 협력, 즉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고, 죄인들의 회개를 빌기 위해, 모든 나라 말로 부르는 이 노래를 생각합니다. 착하신 어머님이, 그렇게도 많은 나라에 널리 내려주신 수없는 은혜를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문 하나에도 긴 역사가 숨 쉰다. 뜻 모르고 한자음만으로 외우면서도 말씀의 힘이 주는 감동은 충분하였다. 일자무식의 백성이 기도문의 염송을 통해 초월적인 지혜를 얻어 장강대하의 웅변으로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잔혹한 고문을 견뎌 기쁘게 순교했다. 그것은 은은하고 잔잔한 가락이다가 어느새 고조되어 높이 솟아 천상의 선율이 되곤 했다. 그 선율 속에 천주 강생의 신비가 아련히 떠돌았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84) 죽여서 입을 막다
주문모 신부 입국 사실 숨기려 윤유일 · 최인길 · 지황 비밀리에 처형
- (왼쪽부터) 복자 윤유일 바오로·최인길 마티아·지황 사바. 1795년 5월 11일, 한영익의 밀고에도 주문모 신부는 정약용의 도움을 받아 계동 최인길의 집을 극적으로 탈출했다. 최인길의 가짜 신부 행세는 포도청에 압송된 뒤 바로 들통이 났고, 기찰포교에 의해 대신 윤유일과 지황이 잇따라 붙잡혀 왔다. 최인길·윤유일·지황 세 사람은 잔혹한 고문을 받고 이튿날 새벽 옥에서 순교했다.
기록에서 사라진 세 사람의 죽음
1795년 5월 11일, 한영익의 밀고에도 주문모 신부는 정약용의 도움을 받아 계동 최인길의 집을 극적으로 탈출했다. 상황이 너무 다급했다. 최인길은 시간을 끌려고 상투를 잘라 중국 사람처럼 꾸미고 기다리다가 체포조가 들이닥치자 말을 어눌하게 하고 중국어를 섞어가며 주문모 행세를 했다. 그는 역관 집안 출신이었다. 조선 말을 못 알아듣는 척 시간을 끌었다.
수염이 길었다는 한영익의 밀고와 달리 수염이 하나도 없었던 최인길의 가짜 행세는 포도청에 압송된 뒤 바로 들통이 났다. 속은 줄을 안 기찰포교들이 화들짝 놀라 다시 주문모 체포에 나섰다. 신부는 그 사이에 남대문 안쪽 수각교 인근 강완숙의 집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숨어든 뒤였다. 대신 윤유일과 지황이 잇따라 붙잡혀 왔다.
최인길, 윤유일, 지황 등 세 사람은 5월 11일에 체포돼 이튿날 새벽에 죽었다. 참 이상한 일은 당시 「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국가의 공식 기록 속 당일의 기록에 이들의 체포 사실 자체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점이다. 이들은 기록상 체포된 적이 없어 사형 집행 기록도 당연히 없다. 이들이 어떻게 죽었고, 누가 심문했고 심문에 임하는 태도는 어땠는지, 시신은 어찌 처리했으며, 가족과 관련 인물의 후속 처리는 어찌 마무리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조차 전무하다. 세 사람은 그야말로 전광석화로 끌려가서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다.이들의 죽음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만 편린의 기록이 남았다. “체포된 그 날 밤으로 그들은 법정으로 끌려나갔다. 그들의 굳은 결심과 그들의 말의 지혜는 재판관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명백하고 용감한 신앙고백이, 재판관들이 외국 신부와 그의 도착과 그의 서울 체류에 대하여 하는 모든 질문에 대한 그들의 유일한 대답이었다. 그들에게서 신부에게 위험한 자백을 끌어내기 위하여 여러 차례 고문을 하고, 매를 몹시 때리고, 팔과 다리를 뒤틀고, 무릎을 으스러뜨렸으나 아무것도 그들의 용기를 꺾거나, 그들의 인내심을 흔들 수는 없었다. 그들의 마음에는 천상의 기쁨이 넘쳐 얼굴에까지 번졌다. 마침내 임금은 천주교의 원수들이 거듭 내는 요청에 못 이겨 그들의 결안에 서명하였다. 판결은 그날 밤으로 옥 안에서 집행되었고, 순교자들의 시체는 강에 던져졌다.”
그들은 5월 11일 저녁에 잡혀가, 당일 밤에 심문장에 끌려갔고, 잔혹한 고문을 받았지만 신부의 소재에 대해 끝까지 침묵했다. 당일 판결을 내려 옥 안에서 사형을 집행했고, 시신은 강물에 던져졌다.
과연 그랬을까? 달레의 기록은 대부분 추정 기술일 뿐이다. 극비리에 끌려가 이들의 체포 사실 자체를 아는 이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천주교의 원수들이 거듭 내는 요청이란 것은 애초에 있을 수 없었다. 시신을 강에 던졌다는 말도 믿기 힘들다. 시신을 강에 던져 공연한 소문을 키울 일도 아니었다.
- 주문모 신부를 탈출시키려고 가짜 신부 행세를 한 최인길 마티아. 그림=탁희성 화백.
무시된 법 절차와 공서파의 반격
이들 세 사람에 대한 처결은 법절차를 깡그리 무시했다. 당일 체포한 주요 사범에게 당일에 사형을 내려 이튿날 새벽에 시신을 강물에 던지는 것과 같은 법 집행은 조선의 사법체계에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고문을 당해 죽었다기보다, 입을 막으려고 살해한 것에 가까웠다. 주문모 신부를 기필코 잡으려 했다면 세 사람은 결코 죽여서는 안 되는 거였다. 세 사람과 주변 인물들과 가족까지 모조리 붙잡아 들여 신부가 붙잡힐 때까지 고문하고 심문했어야 했다.
한영익의 밀고로 갑작스레 돌출한 주문모 신부 체포 문제는 이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쉬쉬하며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문제는 당사자인 주문모 신부의 종적이 내내 묘연한 거였다. 시간문제로 보였던 신부의 체포가 시일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자 임금과 조정은 당황해 허둥지둥한 기색이 역력하다.
달레는 이때 세 사람 외에 5명의 교인이 같이 체포되었고, 보름 간 고문을 당한 뒤에 자유의 몸이 되었으며, 기뻐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며 물러갔다고 썼다. 실제로 「사학징의」 중 허속의 공초를 보면, 최인철의 매부였던 그는 “1795년 5월에 제가 처남 최인길과 함께 본청에 체포되었는데, 최인길은 죽었고, 저는 감화되어 바른 길로 돌아오겠다는 뜻으로 공초를 올리고 석방되었습니다”라고 했다. 김종교도 “저는 최필공, 최창현, 김종순(金宗淳), 최인길, 최인철 등과 서로 사서를 강학하다가, 1795년에 포청에 체포되어, 감화되었다는 뜻으로 공초를 바쳐 석방되었습니다”라고 진술했다. 앞선 세 사람 외에 허속과 김종교가 별도로 체포된 5인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위 명단에서 김종순은 다른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이름이다. 나머지 세 사람은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위 명단 중에 들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 사람이 서학 문제로 포도청에 끌려와서 당일 매 맞아 죽어 나갔다는 소문이 수군수군 퍼져나갔다. 이만채는 「벽위편」에 「포도청에서 세 역적을 급히 죽인 일(捕廳三賊徑斃事)」이란 항목을 따로 두어 이 일에 대해 논했다. 그런데 워낙 극비리에 처리된 일이고 보니, 문제 삼는 측에서도 명확한 사실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벽위편」의 기록은 이렇다. “이 해 6월 염탐하는 포졸에게 잡히게 되자, 임금께서는 밤중에 좌의정 채제공과 포도대장 조규진을 들어오라 명하시고, 세 역적을 포도청에서 다스리되 좌의정으로 하여금 그 일을 주관케 하였다. 그때는 자궁께서 회갑이 가까운 시점으로 조야가 모두 경하하는 때였는데, 임금께서 이러한 명령을 내리시니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성상의 뜻이 엄중함을 우러러보았다. 그들을 엄히 신문하니, 이가환 이승훈 황사영 등의 이름이 모두 문초 속에서 빠짐없이 나왔다. 그러나 이른바 중국 사람은 도망쳐 버려 체포하지 못하고, 다만 최인길, 윤유일, 지황 세 역적만을 체포하여 그 밤에 박살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문에 붙이었다. 그들을 잡아 죽인 것을 매우 비밀히 하였으나, 여기저기서 세상 사람들의 수군대는 말이 많으므로 권유의 상소가 나오게 된 것이다.”
5월 11일의 일을 6월이라 하고, 밀고로 잡은 것을 포졸의 염탐에 걸렸다 한 것을 보면 사실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6월 18일에는 정조의 모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국가적 잔치로 예정돼 있었다. 화성 건설도 본궤도에 올라 속속 건물이 낙성되던 터여서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였다. 이 와중에 도성의 한복판, 그것도 임금이 집무하던 창덕궁 담장에서 1㎞ 정도의 지근 거리에 중국인 신부가 버젓이 천주당을 만들어 놓고 서학을 포교하고 있었다.
강세정도 「송담유록」에서 이때의 정황에 대해 기술했다. “영의정 채제공이 포도대장 조규진(趙圭鎭)을 불러서, 하룻밤에 삼적(三賊)을 때려죽이게 했는데,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다들 사적(邪賊)인데 그것이 퍼져 나가는 것을 걱정해서 입을 막으려는 계책이라고들 했다. 주문모 때문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모든 일 처리가 극비리에 이루어졌고, 소문만 무성하게 번졌으나 실상이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공서파, 포문을 열다
최인길, 윤유일, 지황 세 사람은 붙들려 온 지 12시간도 채 못 된 이튿날 새벽에 고문 끝에 죽었다. 이것은 심문이 아닌 살해에 가까웠다. 중국인 신부의 잠입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원천 봉쇄하려 한 것이었다. 은폐의 시도는 일단 성공했던 듯하다.
화합의 메시지와 새 시대의 청사진이 막 펼쳐지려는 시점에, 1791년 진산 사건 이후 잠잠해진 천주교 문제로 정국이 격랑 속에 다시 빠져드는 것은 국왕 정조도 좌의정 채제공도 원치 않았다. 더욱이 주문모는 중국인이어서, 자칫 그를 공개적으로 체포하여 처형했다가는 심각한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었다.
신문 과정에서 이가환과 이승훈, 황사영 등의 이름이 나왔다고 했지만, 속사정을 모른 채 넘겨짚어 찔러본 데 지나지 않았다. 수군대는 말이 떠도는 것이 당연했다. 대비의 생일잔치가 끝나고 보름쯤 지난 7월 4일, 대사헌 권유(權裕)가 상소로 첫 포화를 쏘아 올렸다. “일전에 포도대장이 때려서 죽인 세 놈은 듣자니 사학하는 무리라고 합니다. 비록 대신이 경연에서 아뢰어 포도대장을 지휘하여 그리했다 하나, 이는 보통의 변고가 아니고 또한 비밀로 감출 일이 아닙니다. 진실로 마땅히 뿌리와 마디를 자세히 살펴서 법 집행을 밝고 바르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얻어서 알게 하고, 얻어서 토벌케 해야 하는데도, 한밤중에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다급하게 거두어 죽여, 마치 단서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입을 없애고 자취를 가리려 함과 같은 점이 있으니, 이것이 무슨 뜻이고 무슨 법이란 말입니까?”
난감해진 정조는 비답에서 어찌 자세한 사정도 모르면서 이처럼 과도하게 말하느냐고 나무랐다. 멸구엄적(滅口掩跡) 즉 입을 틀어막고 자취를 감추려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며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다만 이들이 너무 갑작스레 죽는 바람에 드러내놓고 알릴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임금의 대답은 옹색하기 짝이 없었다.
사흘 뒤인 7월 7일에는 부사직(副司直) 박장설(朴長卨)이 다시 상소를 올렸다. 그는 상소에서 엉뚱하게 이가환을 저격했다. 그는 이 일이 중국인 신부 때문에 일어난 사건인 줄을 전혀 모른 채 헛다리를 짚고 말았다. 저들이 상황도 모르고 신서파 타도의 깃발만 올린 줄을 알게 된 정조는 불같이 노해 박장설의 직위를 박탈하고 삼천리 유배형에 처해버렸다.
정약용은 「정헌묘지명」과 「복암묘지명」에서 권유의 상소와 박장설의 상소가 척사파 악당들의 사주를 받아, 채제공을 공격하고 이가환과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벌인 음모였다고 반복해서 썼다. 하지만 결국 이 일로 이가환은 충주목사에, 정약용은 금정찰방으로 쫓겨났다. 정조의 개혁 구상은 이렇게 또다시 주춤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