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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궤를 만들라
25: 10-22
10.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짓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1. 너는 정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윗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12. 금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이편에 두 고리요 저편에 두 고리며
13.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고
14. 그 채를 궤 양편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15. 채를 궤의 고리에 꿴대로 두고 빼어내지 말찌며
16.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찌며
17.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8.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 한 그룹은 이 끝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하게 할찌며
20.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1.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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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집을 하나 짓다 보면,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돈이 훨씬 더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짓다 보면 설계를 변경하야 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설계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고 욕심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계변경이 전혀 없이 아주 완벽하게 설계되고 완전하게 시공된 건물이 있었는데 그것이 성막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설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주 세밀하게 설계하여 주셔서, 그 설계대로 건축했기 때문입니다.
성막의 모든 자재와 치수와 모양 들은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모형입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지으라고 하시면서 맨 먼저 그 성막 안에 두어야할 것 중에 가장 중요하고 중심이 되는 법궤에 대한 설계도부터 주셨습니다. 오늘은 그 법궤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첫째, 법궤의 재료는 가시나무와 순금 이라는 두 가지입니다.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짜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규빗 반,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너는 순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위쪽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법궤는 조각목으로 만들어야 하고, 금으로 완전하게 싸야 하는 장방형의 상자였습니다. 길이는 2.5규빗(120Cm), 넓이와 높이는 1.5규빗(70Cm)입니다.
조각목이라고 하는 나무는 광야에서 자란 아카시아 과의 가시나무인데, 쉬띰나무 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이 나무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사막에서 자랐기 때문에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고 오랜 세월 고생고생하면서 자란 마디가 많고 딱딱하고 볼품없는 나무가 쉬띰나무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 나무는 우리 주님께서 취하실 인성을 예고합니다. 그리스도는 처녀에게서 태어나 육체를 가지셨는데 그 육체는 가뭄에 찌들리며 자란 광야의 가시나무처럼, 너무나 심한 고난을 받아 상하게 될 수난용 육체였습니다.
성막을 통해서 그림자로 예언하신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선지자를 통해서 언어로 예언하신 이사야서에 보면, 사53:2.3에 예언하기를, “그는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은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육체는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가지신 육체가 아니라, 고난당하기 위해서 가지신 육체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육체가 가시나무처럼 찔리고 찢기고 상하여 너무나도 보잘 것 없이 될 것을 가시나무로 묘사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 대신에 맞고 찔리고 피 흘려 죽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가시나무가 보여줍니다.
법궤의 두 번째 자재는 순금입니다.
법궤를 쉬띰나무로 만들되 그것을 안팎으로 순금으로 싸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명하셨을까요? 금은 불변의 속성을 가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육체는 가시나무처럼 볼품이 없고 고통 받고 죽게 될 변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갖고 있지만, 그리스도는 사실상 영원 전부터 살아계시며 영원히 변함없는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이 순금은 영원하신 예수님의 신성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육체만 가지신 것이 아니라 존귀하신 신성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는 육체만 가진 인간만이 아니라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요10:30에서 주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라고 하셨고,
요1:14에서 요한은 증언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라고 증언하였습니다.
법궤는 가시나무로 짰지만, 순금에 싸여 있어서 가시나무는 보이지 않고 찬란한 순금궤로만 보였습니다. 나무를 감싼 순금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가치를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순금으로 묘사하신 것입니다.
순금은 또한 왕의 신분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그 새벽에 동방에서부터 별을 따라 찾아온 박사들은 예수님을 만나 경배드리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는데, 황금을 드린 것은 그분을 왕으로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사9:6-7은 예수님의 신성과 그의 왕 되심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가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고대의 제왕들은 금으로 치장하였는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왕 중에 왕이시라고 예언되었고, 그것을 드러내는 계시가 바로 법궤를 정금으로 싸라고 하시는 명령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25:11에 “너는 정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윗 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라고 하셨습니다. 법궤가 왕관을 쓰고 있는 모양입니다.
법궤의 위쪽 가에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게 했는데, 그것은 왕관을 의미했고, 왕관은 주권의 상징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시고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는 사실 왕 중의 왕이시며, 우리를 영원히 다스리는 우리의 왕이라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는 육체를 가지고 오실 것이지만, 그분의 근본은 영원하시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이시고 왕 중의 왕이시라는 사실을 법궤의 자재와 모양이 계시하고 있습니다.
둘째, 법궤는 언제나 두 개의 채로 꿰어서 메어야만 했습니다.
법궤 안에는 십계명을 새긴 두 장의 돌판을 담을 것이고, 만나를 담은 항아리도 담을 것이며,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담을 것입니다. 또한 아주 딱딱한 나무로 만들고 금으로 싼 궤짝이니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마차에 싣도록 했으면 참 쉬웠을 텐데 그렇게 아니하시고 궤짝의 양 옆구리에 두개씩의 고리를 만들고, 금으로 싼 긴 나무막대기를 궤짝의 고리에 꿰어 사람들이 어깨에 메어서 운반하라고 하셨습니다(13,14).
왜 그렇게 하라고 하셨는지는 그렇게 하지 않다가 당한 일을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삼하6:에 보면 다윗이 선발된 군사 3만 명을 데리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법궤를 모셔오는 기록이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깨에 메어온 것이 아니라 새 수레를 만들어서 법궤를 수레에 싣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불레셋 사람들의 방법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일을 하면서 기뻐서 수많은 악기를 연주하게 하고 행렬을 뒤따랐습니다. 그런데 나곤 이라는 사람의 타작마당을 지나갈 때 수레를 끄는 소들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웃사 라는 사람이 법궤가 땅에 굴러 떨어질까 봐서 붙잡았더니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그 일을 본 다윗은 법궤가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자기의 도성으로 모셔오지 않고 가드사람 오벳에돔의 집으로 옮겨다 두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그 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어깨에 메고 가라고 했습니다(삼상6:10) 법궤는 사람이 어깨에 메고 가는 것이 법이었습니다.
편리하게 수레에 싣고 갈게 아니라, 힘들게 어깨에 메어 운반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을 힘들게 하려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장차 우리의 구주로 보내실 그리스도는 아무도 질 수 없는 인간의 죄짐, 인간이 저지른 저주의 십자가를 당신의 것이라고 여기셨습니다. 그것이 너무 무겁고 너무 창피하지만 결코 벗어던지지 않고 당연히 짊어질 당신의 짐으로 여기시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생활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의 무게를 느끼면서 한걸음, 한걸음 순종의 삶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계시하기도 합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쉽게 살려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바르게 사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너무 무거워서 벗어 던지고 싶은 때도 올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결코 벗어던지지 말고 그 무게를 온 몸으로 느끼면서 뚜벅뚜벅 말씀 따라 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임을 말씀을 담은 법궤는 꼭 메고만 가라는 명령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요즈음은 위성예배와 사이버교회가 생겼습니다. 위성예배란 대형 교회가 멀리 이사 간 성도들이나 타 지역 사람들을 그 지역의 다른 교회로 가지 못하게 하려고 지역마다 지교회 라는 것을 세우고, 본교회의 목사님이 하는 설교를 위성중계로 보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서울의 내노라 하는 큰 교회는 거의 이런 위성교회를 세웠답니다. 그리고 기독교 TV가 생겨서 집에 앉아서도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집에 앉아서 TV로 설교를 듣고 온라인으로 헌금을 보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봉사 없이, 수고 없이, 간섭받지 않고, 쉽게만 믿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해서 제대로 신앙생활이 되며,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그것을 싫어하십니다. 법궤는 어깨에 메어야만 하고 섬기는 수고가 따라야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법궤를 고리에 꿴 채는 빼지 말고 항상 꿰어두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언제까지나 이 방식을 고수하라는 명령입니다.
셋째, 이 법궤가 언약궤라고 불리게 됩니다.
법궤 안에 넣은 두 돌비에는 인간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절대법인 십계명이 적혀 있는데, 사람이 이 법을 준행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되어있습니다. 아담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고, 신28:에는 율법을 주시면서 ‘내가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었다’고 하셨으며, 신약에도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누구도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킨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지 못한 인생은 모두가 심판과 사망의 대상일 뿐입니다. 십계명을 포함한 모든 율법은 사람의 죄를 들추어내서, 너는 이 계명을 지키지 않았으니 너는 죄인이고, 죽어야만 한다고 정죄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 무서운 율법이 바로 그 언약궤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법궤가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그곳은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이며, 죄인을 정죄하는 곳이고, 죄인을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축출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누구든지 그 법궤가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기만 하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심지어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번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조차 두려웠고, 그들도 죽음을 대비해서 허리에 끈을 매고 옷자락에 종을 매달고서야 들어갔습니다. 죄인을 정죄하는 율법이 들어있는 그 법궤는 사람에게 사망선고를 내리는 궤짝이었고, 사실상 사망의 궤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대책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궤의 뚜껑을 닫아버리고 그 위에 속죄소라는 것을 만들어 얹게 하신 것입니다.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17)
그 덮개는 법궤 안에 있는 물건들이 보이지 않게 하는 덮개 부분과, 양쪽에 두 명의 천사가 법궤 중앙을
향하여 날개를 펴고 마주 앉아 있는 조각부분으로 되어있는데, 이 모든 것은 한 덩이의 금으로 무겁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속죄소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법궤의 뚜껑을 덮고는 그 뚜껑을 속죄소라고 부르게 하셨는지 아십니까? 대제사장은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긴 휘장을 쳐들고 들어와서 속죄소라 부르는 그 법궤의 뚜껑에 피를 일곱 번 뿌려서 백성들의 죄에 대한 사죄를 청하였고, 하나님은 그 피를 보시고 백성들을 죽이지 아니하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제사장으로 오실 그리스도가 자기의 피를 하나님앞에서 뿌리심으로, 하나님의 법을 명백하게 어겨 영원한 사망을 받게 된 인간에게 심판이 내리지 않도록 하신다는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그 속죄소는 바로 속죄자이신 그리스도의 분명한 상징입니다.
속죄소란 히브리어로 카포렛이며, 카포렛의 원형인 카팔은 ‘덮는다.’는 뜻입니다. 속죄소를 다른 말로는 시은소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자기 피를 뿌리심으로 진노의 율법을 덮어두셨고 도리어 은혜를 베풀게 되었다는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분인데, 하나님의 시퍼런 법이 그대로 열려 있다면 죄인에게 심판과 멸망은 자명합니다. 그런데 율법이 들어있는 궤를 두꺼운 순금 덮개가 덮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그리스도의 피를 뿌렸습니다. 정죄의 율법을 하나님이시면서도 우리 대신에 죽으신 그리스도가 덮고 있어서 그 법이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은 정녕 죽으리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라고 선언 하셨으나,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
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출12:13). 죄의 삯은 여전히 사망이지만, 그리스도가 너희 대신에 피 흘려 죽으셨으니, 이제는 너희 죄 값을 묻지 않고 넘어가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가치 있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는 자는 그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특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너무 신기하고 너무 감사하지 않습니까?
이제 믿는 사람에게는 율법이 더 이상 사망을 요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정밀한 이치입니까?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이제는 법궤가 “믿는 사람은 구원해 주리라.” 는 언약을 보증하는 언약궤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직도 법궤이지만, 그 피를 믿는 사람에게는 이제 구원의 언약을 담보하는 언약궤가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들을 법궤의 모양을 통해서 상세하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놀랍지 않습니까?
넷째, 언약궤 안에는 만나가 들어있는 금 항아리도 있었습니다(출16:33, 34).
법궤는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 법궤 안에 만나가 들어있는 금 항아리를 담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생명을 주신 분이요 생명의 양식이라는 사실을 계시합니다. 그분에게 나아가지 않고는, 그 누구라도 진정한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6:48에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지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으로 먹고 죽지 않게 하는 것이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요6:51에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하셨고, 요6:55에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고 하셨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바뀌어도, 사람을 진정 사람답게 살게 하고, 영생하게 만드는 구원의 양식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공급받을 수 있다는 예언을 법궤안의 만나 항아리로 정확하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다섯째, 언약궤 안에는 아론의 지팡이도 있습니다.
그 지팡이는 마른 지팡이였는데 싹이 나서 살구가 열린 기적의 지팡이입니다(민17:8). 모세의 형인 아론이 모세를 도와 제사장이 되자,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것을 부인하고 모세가 정실로 자기 형을 그 자리에 앉혔다고 불만이 많았습니다. 모세는 속을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각 지파의 두령들이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를 다 가져오게 하고, 그것을 성막 안 법궤 곁에 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열두 지파의 지팡이를 모아 성막 안에 두었다가 다음날 아침에 가져왔더니,
아론이 사용하던 마른 나무 지팡이에서는 싹이 나고 살구 열매가 맺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론을 택하셨다는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셔서 백성들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이 일을 후손들도 알아야 하기에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법궤 안에 보관해 두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질서를 파괴하다가 망하는 사람들을 예방하기 위하여 취하신 조치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장차 하나님이 보내실 인류의 대제사장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실 것을 가르치기 위한 계시였습니다. 하나님이 지정하신 아론의 지팡이는 마른 막대기였는데도 싹이 나서 꽃 피고 열매가 열린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죄인 대신에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서, 부활이라는 모든 인생이 희망하는 꽃을 피우고, 구원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싹이 나고 열매가 열린 지팡이를 법궤 안에 담아두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참으로 신기하지요?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증명서이며, 우리에게 내세 천국을 주신다는 보증서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부활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아론의 지팡이는 왜 하필 살구나무였을까요? 렘1:11-12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시고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그중에 하나가 살구나무 가지에 꽃이 핀 모습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여주시고는 설명을 해주시는데,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살구나무는 다른 나무가 잎을 피기 전에 가장 먼저 꽃을 피워서 봄을 알리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살구나무를 ‘깨어 있는 나무’라고 했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말씀을 그대로 이루기 위해서 잠들지 않고 깨어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법궤와 성막과 모든 상징물들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약속해 주시면서, “나는 이 약속을 잊지도 않고 잠들지도 않고 있다가, 정확한 그 때에 그리스도를 보내주마”하고 살구나무 지팡이로 계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약속대로 때가 차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는 약속대로 우리의 속죄소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른 봄에 살구나무가 가장먼저 깨어나 꽃을 피우듯이, 이 세상 끝 날에 주님이 재림하여 우리를 데려가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너희에게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 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고 신약성경의 맨 마지막 약속도 남기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된 우리의 구주이신가를 알게 되었지요? 성경은 사람들이 쓴 책이 아니라 신비한 하나님의 약속의 책입니다. 어떤 분이 특별히 착하고 기적을 많이 행하시기에 감동을 받은 몇 사람이, 이분을 우리가 구주로 믿자고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준비하시고 계시하시고 보내신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그는 본래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왕 중의 왕이시며, 생명의 떡이고, 오늘은 구체적으로 내 삶을 인도하시고 내일 재림하셔서 우리를 부활케 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우리의 자녀들은 어떻게 길러야 할까요?
세월이 변해서 세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과, 욕심과 죄악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세상 사람의 삶이 완전히 양분되는 시대가 시작됩니다. 그 시대에는 중립이란 게 없습니다. 한없이 악하게 살다가 사단과 함께 지옥에 가든지, 순교를 각오하고 주님 따라서 진리를 행하며 살다가 영생을 얻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오늘은 어린이 날입니다.
이 시대에 어린이를 어떻게 기르려 하십니까?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돈 많이 버는 사람보다,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의의 도구로 살다가 천국에 갈 사람으로 길러야 합니다. 아이들을 기르되, 힘들지만 날마다 하나님 바라보고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으로 길러야 합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어린이날 설교는 없다고 생각해서 이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으면 그 말씀을 따라서 사는 성도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