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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27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면? / 이수관 목사
우리가 지난번 설교를 통해 모세오경에 대한 이야기를 대강 살펴본 적이 있지요. 그리고 나서 여호수아기에 오면 이 책이 꼭 앞의 다섯권의 결론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 주제가 동일하게 이어집니다. 광야에서 40년을 기다리시고 노예 생활을 경험하지 않은 2세대로 완전히 세대 교체가 되자 그들을 이끌고 요단강 맞은 편인 모압까지 오는 얘기가 민수기에 나와 있고, 신명기에서는 그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와 다시 계약을 갱신하시고, 율법을 새로 주시고, 그리고 모든 것이 준비된 상태가 되면 여호수아기에서는 이제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강을 건너서 그 땅을 취하고 모든 지파별로 땅을 분배함으로 창세기때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약속이 마침내 이루어진다 는 것이 바로 여호수아기에 전반적인 주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 가운데 우리가 읽은 오늘 본문을 보면 기가 막히게 대비된 두 사람의 얘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에 막 들어가는 그 어귀에서, 한명은 저주받게 되어 있던 사람이 약속의 자녀로 바껴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고, 또 한명은 약속의 자녀이면서 저주에 휩쓸리게 되는 그런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어떻게 해서 한사람은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한사람은 그러지 못하는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의 땅은 물론 긍국적으로는 우리가 돌아가야할 천국을 가르키는 말 일 수도 있겠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이 땅에서 실현되는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의 성공적인 삶입니다. 아름답고 풍성하고 최선의 삶,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그리고자 하시는 성공적인 인생의 모습이 바로 약속의 땅이다라고 얘기하는데는 별 무리가 없으리라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여호수아기에 나오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즉, 그 약속의 땅으로 가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어떤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해 가신다.
우리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기억해야하는 첫번째는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의 땅, 즉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인데, 그것은 우리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인생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최선의 계획을 가지고 있고, 그분은 그 계획을 성취해 나가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당연하지요. 믿음은 보이지 않는 소망에 내 인생을 거는 일종의 모험같은 것인데,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있어서 최선이 어떤 것인지 알고 계시고, 그에 따른 최선의 계획을 세우시고 그것을 성취해 나가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야, 또 그것을 신뢰하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우리가 믿음에 모든 것을 던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 분인가 하는 점을 계속 얘기를 하고 있고 또 이 여호수아서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때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최선의 계획이었지요. 그리고 아브라함을 택하여 하나님 신앙을 심어주십니다. 그리고 이끄시고, 이어서 이삭을 이끄시고, 또 야곱을 이끄시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그들은 수없는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릅니다.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못믿어서 첩을 통해서 아이를 낳고, 형에게 사기치고, 사람을 속이고, 그런 그들의 끊임없는 실수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실수들 마저도 사용하셔서 결국 큰 민족이 이루게 하시고 그런 후 그 민족을 이끌고 나와서 원래 아브라함에게 400년전에 약속하셨던, 내가 너의 자손들에게 주겠다라고 했던 그 땅까지 이끌어 오시는 것, 즉 하나님은 그들에게 최선의 약속을 세우셨고,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나가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최선의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 계획과 목적대로만 살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우리의 인생에서 그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나에게 그런 최선의 계획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그분이 나를 나보다 더 잘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를 잘 안다고 하지만 사실 잘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나를 위해서 세우고 있는 계획은 잘못될 가능성이 굉장히 많은 계획이고 우리를 잘못 이끌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계획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 같은 경우는 제가 저를 위해서 세운 계획들이 이제껏 많은 부분 실패로 끝났으니 망정이지 그대로 되었다면 제 인생은 엉망이 되었을 겁니다. 여러분도 그런것을 느끼시지요? 왜 그렇습니까? 내가 날 잘 모르기 때문에 나한테 최선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흔히 첫 단추가 잘 끼워져야 한다고 얘기를 합니다.
출발이 옳아야 나머지도 잘되어 갈 수 있다는 그런 의미이지요. 그런데 내가 성공한 인생을 살기 위한 첫 단추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에게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휴스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시려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직장이 되어서 이리오셨든, 연수를 오셨든, 아니면 공부를 하기 위해서 유학을 오셨던,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내 꿈, 내 계획에서 시작하면 그것은 잘 못 끼워진 첫 단추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시작해야 합니다. 또 사업을 새로 시작하시는 분들, 뭔가 새로운 계획을 세우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분들도 내 계획, 내 꿈이 중요하다면 뭔가 잘못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선 순위를 두시고 그분이 내 인생에서 가지고 계신 계획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시기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그분의 계획에 맞추어져 있는가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럴때 우리의 계획은 옳바르게 출발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안에서 첫단추를 잘 끼우셔서 축복스럽게 시작하시는 첫걸음이 되시고 열매도 잘 맺는 그런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 그러면 그런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제 본격적으로 두 사람의 Case를 통해서 우리가 약속
의 땅에 들어가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좀 배워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라합의 경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나의 것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약속을 나의 것으로 만들라
라합은 바로 그렇게 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는 상관이 없는 외인이었는데 한순간의 선택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 당시 라합은 원래 가나안 사람으로 여리고성에 살던 사람인데 아마도 당시에 여리고 성이 워낙 크고 또 가나안 땅의 관문이 되는 도시니까 여관업과 술집을 같이 하면서 때때로 몸도 파는 그런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녀의 여관과 술집에는 많은 여행객들과 뜨네기들이 드나 들었을 것이고 그래서 이스라엘의 진군에 대한 소문도 가장 밝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별 볼일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가? 그녀에게 발견되는 가장 놀라운 점은 진리를 깨달았을 때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영적인 결단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1) 영적인 결단력을 가지라
2장 10-12절을 보면 그녀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홍해가 갈라진 이야기, 그리고 요단강 동쪽에서 아모리의 왕인 시혼와 옥을 완전히 전멸시킨 이야기등은 소문으로만 들었습니다. 직접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리는 것이 아니고, 아! 이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다. 뭔가 이 사람들이 섬기는 신은 신중의 신이 틀림이 없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그 분을 섬기기로 그 자리에서 결단해 버립니다. 대단한 결단력이 있는 영적으로 부지런한 여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문에서 발견하는 첫번째 교훈은 영적인 결단력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 비해서 우리는 영적으로 얼마나 게으른지 모릅니다. 아무리 기독교 진리에 대해서 듣고 또 복음에 대한 얘기를 들어도 늘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립니다. 내가 이것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을 싫어 합니다. 그리고 그냥 시간만 보냅니다. 때가 되면 믿어 지겠지. 아니면 그 생각조차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아, 귀찮아. 그냥 친구들이 있고 하니까 교회나 다니지 뭐. 그런데 이런 경향은 믿는 우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떤 것을 듣고 내가 이것을 전적으로 신뢰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것인가 아닌가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그냥 시간만 보냅니다. 제가 지금 꼭 교회일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면에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요즈음 우리의 보편적인 경향이라는 것 아십니까? 우리들은 무언가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정신 치료에 권위자중에 Scott Peck이란 사람이 있거든요. 이분의 말에 따르면 현대인의 가장 심각한 병중에 하나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뭔가를 결정하는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랍니다. 그분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영적으로 심각하게 게을러서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것에 관해 깊이 생각하고 결단하기를 싫어한답니다. 그리고 이런 영적인 게으름이 영적인 문제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어지기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고 산다는 겁니다. 그분이 이런 얘기를 해요.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가만히 앉아서 문제를 들여다 보고만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쳐다보고 있으면 문제들이 사라질 것처럼 생각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이 말이 맞아요. 요즈음 많은 사람들은 장사에 문제가 있어도 장사가 안되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녀에게 문제가 보이는데도 “문제가 있네, 크면 괜찮아 지겠지” 하고 그냥 둔다는 거예요. 괜찮아 집니까? 더 나빠지지요. 이것이 영적인 게으름이라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영적인 게으름을 방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뭐겠습니까? 조금 귀찮아도 행동으로 옮기고 처리해야할 일을 빨리빨리 처리하는 버릇을 들이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야겠다 싶으면 미루지 말고 등록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인 게으름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내가 믿어야 겠다 싶으면 예수님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교회를 대표하는 회원교인이 되고 빨리빨리 진행해 나가야지요. 설교를 듣다가 그래 그렇다 싶으면, 속으로만 맞어. 그러고 있지 말고 나와서 헌신하고 행동에 옮기셔야지요. 그러지 않고 듣고 말고 듣고 미루고 그러면 그런 게으름을 어디에서 고치겠습니까? 교회에 와서 게으른 버릇을 도로 얻어서 가시겠습니까? 제가 가끔 이해가 안되는 건 말이지요. 교회를 다닌지 2년 3년 아니면 그 이상도 되었는데, 예수님 영접했다는 확인도 안받은채로 지내는 분들이 있어요. 물론 아직 안믿으시는 분이면 괜찮아요. 그런데 보면 예수님도 믿으시는 분이예요. 예수님도 믿는 분이 영접확인도 안한체 그러구 몇년씩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계세요. 그런 분들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하는 건지. 뭔가 제가 모르는 무슨 이유가 있겠지요? 잠언 26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게으른…생각한다. 뭐예요? 게으른 사람은 자기가 한번도 대답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지혜롭지 못한 사람인지 모르고 사는 거에요. 즉 게으름은 자기를 마비시킵니다. 자기가 믿는지 안믿는지도 모르고, 자기에게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지내는 것이지요.
여러분들 우리가 영적으로 게으르지 맙시다. 결국 그 게으름때문에 약속에 땅에 못들어 가요. 생각해야 하는 것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 결정하고, 그리고 행동에 옮겨서 라합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내것으로 만드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2) 스스로를 약속외인으로 만들지 말라
두번 째 라합에게서 배우는 교훈은 그녀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모습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약속의 외인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녀가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뭔가 이 사람들은 자기와는 차원이 다른 도덕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들었을 겁니다. 민수기에서 나오지만 이스라엘 사람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을 했을 때 모세는 각 집안의 우두머리들을 전부 목을 달았거든요. 그런 소문을 들었을 거라구요. 그런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는데 자기는 지금 창녀란 말이예요. 두려웠겠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기의 현재 모습 때문에 스스로를 제껴놓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면 스스로를 제껴 놓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는 우리가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고 훨씬 더 축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인데도 자기가 스스로를 제껴놓고 포기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봅니다. 자기에 대한 기대 수준이 낮은 것이지요. 우리는 말이죠, 내가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사랑받는 자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자녀라면 뭔가 날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지 않겠어요. 재벌도 그렇지 않습니까? 뭔가 사랑하는 자녀라면, 아니 사랑을 안해도 그렇지요. 물려 줄 기업체 하나는 떼어놓잖아요. 물론 이제는 그러기가 힘든 세상이 조금 되어가지만 말이예요.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에게 주실 어마어마한 저기에 축복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를 제껴놓고 포기하기 때문에 못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좀 지난 얘기인데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에 두번 나갔다가 두번 다 근소한 차이로 낙방한 이회창씨 기억하시죠? 두번 다 떨어진 이유가 뭔지 압니까? 아들 군대 안보냈다는 거에요. 아들 빼돌리고 군대 면제시켰다는 그 문제가 항상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회창씨가 만약에 자신이 대통령이 될 만한 인물이라는 꿈을 가졌다면 그렇게 치사하게 아들 군대 안보냈겠어요? 대통령까지도 아니고 만약 장관이 될 거라는 기대만 했더라도 그러지는 않았을 거에요. 자기에 대한 기대치가 낮으니까 그런 사람으로 못사는 거에요. 그런 사람으로 못사니까 결국 자기에게 축복의 기회가 왔는데 그 축복을 못 받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다 그래요. 우리가 훨씬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고, 훨씬 더 근사한 사람이 될 수 있는데, 훨씬 더 많은 축복을 받으며 살 수 있는데 내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낮으니까 나를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살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오다가도 멈추는 거예요.
여러분 기대치를 높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실 축복은 이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기억하고 기대를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자격 따지지 마세요. 내가 이것밖에 안되는데 내가 옛날에 이렇게 살던 사람인데 그런 옛날 기억들로 자기를 옭아매지 마세요. 이제부터 잘 살면 되지요. 라합이 자기의 과거 생각하고 자기의 현재 모습 생각했으면 그 축복을 받았겠어요. 이스라엘이 오기도 전에 스스로 자살했을 거예요. 그런데 그는 자기에게 다가온 은혜에 대해서 전적인 믿음을 보이잖아요. 그래 지금은 은혜의 때다. 이제부터 내 삶이 달라진다. 그러고는 걱정 안하잖아요.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들어 와서 성벽이 무너졌는데 이사람들 허둥대지도 않습니다. 그냥 자기 창문에 달아놓은 붉은 색 끈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잖아요. 이런 은혜에 대한 전적이 믿음이 그를 축복으로 이끄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기대를 높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업을 새로 시작하시는 분, 불안해 하거나 걱정하지 마세요. 잘될겁니다. 기대를 높히시구요. 은혜에 대한 전적인 믿음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는 내가 어떻게 살았던지 지금부터는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해 본다. 결정하시고 기도하세요. 새로 직장생활을 시작하시는 분, 새로 학교 생활 시작하시는 분, 걱정하지 마시고,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해 나갈때 주실 축복을 기대하고 그리고 기도하세요. 걱정하는 사람은 기도못해요. 걱정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기도도 아니예요. 내 자신에게 하는 하소연이지. 잘될거라 믿고 기도하세요. 그런 깡은 있어야지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을 가지시고, 걱정하는 대신에 뜻대로 사업하고 공부하고 직장 생활하셔서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축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약속의 자녀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 약속에 땅으로 들어가려면, 두번째 아간의 경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약속의 자녀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7장 1절을 보면 전멸시켜서 주님께 바쳐야 할 물건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에만 있는 특이한 명령입니다. 이 말은 ‘헤렘’이라는 한 단어인데 이 단어를 조사해 보면 심판이라는 의미와 분리라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그 당시에 타락이 극에 달했던 가나안을 심판하기 위해서, 동시에 그런 타락한 문화에 이스라엘이 오염되지 않도록 분리하기 위해서 전부 파괴하라고 했던 것인데 아간이라는 사람이 그 명령을 어기고 불태워 버려야 할 외투 한벌과 얼마의 금과 은을 탐내어 숨겼다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문턱에서 주저 앉게 되고 이 이유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서 패한다는 얘기입니다.
1) 승리와 패배는 하나님의 임재에 달려있다.
따라서 첫번째 우리가 여기서 배우는 교훈은 승리와 패배는 하나님의 임재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7장 3-4절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긴장감이 탁 풀려버렸다는 것이 느껴지시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동안 수많은 전투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특별히 손 하나 쓰지않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나니까 완전히 자신이 붙어서 조그만 아이 성을 앝보고 올라갔다가 되려 당하고 내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승리와 패배는 우리의 전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임재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가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성공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내 삶속에, 내 사업속에, 내 공부 안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내 경험이 얼마나 있느냐, 내가 얼마나 노력하느냐, 내 앞에 있는 미션이 얼마냐 어렵냐 쉬우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 쉬운 진리인데 우리는 끊임없이 이 문제로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무슨 일을 시작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위해서 노력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같이 하셔야 일에 성과도 나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만나고, 위험도 피해가고, 쓸데없는 손해도 줄이고 그러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보면 끝없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자기가 정해놓은 길로 달려가요. 그리고 무리수를 두고 그 욕심때문에 더 어려워지고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따라서 새로운 사업을 앞에 놓고, 또는 새로운 일을 앞에 놓고 계신 분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시간 가지시고, 일에 바쁠수록 균형을 잃지 않도록 예배, 찬양, 성도들 간에 교제를 희생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바쁠 수록 절대로 목장빠지고, 예배빠지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 힘들어요. 우리의 삶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지는 것은 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질 때 잘 나가던 일이 실패로 돌아서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꼭 기억하셔서 하나님의 임재안에서 승리하시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죄는 하나님의 임재를 방해한다.
두번째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죄는 하나님의 임재를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전쟁에 패한 후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이유를 물으니까 너희 중에 물건을 훔친자가 있다라고 하셔서 죽 조사를 하니까 이제 아간이 걸렸습니다. 저는 아간이 받는 벌을 보면서 참 섬듯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많을 것을 훔친 것도 아니고 또 엄청난 계획을 세운 후 턴 것도 아니고, 그냥 아름다운 외투 한벌 보고 탐이 났던 그 우발적인 죄가 이렇게 엄청난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여기서 알수 있는 것은 죄의 경중은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겁니다. 우리는 때로 “아니 내가 사람을 죽였여? 남을 해꼬지를 했어? 내가 왜 죄인이야?” 하는 사람을 만나는데 그것은 세상법에 비춘 내 판단이고, 하나님은 전혀 다른 눈으로 내 죄의 경중을 보실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아간의 죄가 큰 이유는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를 방해했기 때문인데, 그 얘기는 여기서 길게 할 수 없고,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죄는 아무리 작다고 해도 하나님의 임재를 방해하고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여긴 작은 죄가 큰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아이, 이 정도는 괜찮아. 저 사람은 저런 것도 하고 잘 사는데 뭐. 하나님께서도 이 정도는 봐 주실거야.” 이런 소리는 절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왜? 죄는 하나님의 임재를 방해하고 그것이 결국 나를 실패로 몰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내 안에 있는 아직 남아 있는 작은 죄를 가지고 두려움을 느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차차 우리와 함께 정리하실 거구요. 내가 할 일은 아무리 작은 죄라 하더라도 성령님께서 지적하시면 “이 정도의 괜찮아”하지 말고 그것을 정리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정도는 괜찮아 할 때는 대부분 성령님께서 그거 정리하라고 죄를 지적하시는 경우일 수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정도는 괜찮아 하고 거절하고 있는 거예요. 따라서 내 안에 성령님께서 양심처럼 지적하는 죄에 대하여 절대로 이 정도는 괜찮아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작은 죄가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막고 결국 우리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잡은 올무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안에서 자유로운 삶을 사시고 그러면서 성령님께서 지적하시는 작은 죄는 정리하시고 그런 삶 가운데 하나님이 활발히 역사하시는 그런 능력의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4. 역사의 아이러니
자, 결국 이렇게 해서 라합의 가정은 이스라엘 가문에 편입이 되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고, 아간의 가정은 멸망을 당합니다. 우리는 나중에 라합이라는 이름을 마태복음에서 발견합니다. 결국 라합은 유다 가문으로 편입이 되어 다윗 왕족의 고조 할머니가 되고, 그 후 예수님이 태어나는 가문으로 이름을 냅니다.(마태1:5) 그에 비해 아간은 어떻습니까? 그는 원래 유다 가문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아간이 아간의 가족이 예수님의 가문이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지요.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서 40년을 광야에서 잘 참고 왔는데 한 순간의 일이 두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어떤 분은 무슨 운명의 장난이냐고 할 분이 있을 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결국 그 일은 이 사람들의 평소의 신앙과 삶의 태도가 빚은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행동하는 결단력이 있는 삶, 영적으로 게으르지 않는 민감한 삶을 사는 습관을 드리고 그러면서 작은 죄도 정리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임재함 속에 살아서 이 땅에서의 축복도 누리시고 또 결국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