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 李陸史 | Lee Yuk-sa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시인
본명 - 이원록(李源祿)
이명 - 이원삼(李源三)
필명 - 이활(李活), 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 육사(肉瀉·戮史·陸史)
자 - 태경(台卿)
본관 - 진성 이씨
출생 - 1904년 5월 18일 (음력 4월 4일)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 원촌마을
(現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706)
사망 - 1944년 1월 16일[6] (향년 39세)
중화민국 허베이성 베이핑시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관 교도소
(現 중국 베이징시)
묘소 - 대한민국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산4-1
부모 - 아버지 이가호 (1878 ~ 1941)
어머니 허길 (1876 ~ 1941)
형제자매 - 형 이원기 (1899 ~ 1942)
남동생 이원일 (1906 ~ ?)
남동생 이원조 (1909 ~ 1955)
남동생 이원창 (1914 ~ ?)
남동생 이원홍
배우자 - 안일양 (1905 ~ 1983)
자녀
아들(친자) 이동윤 (1930 ~ 1932)
아들(양자) 이동박 (1941년생)
장녀 이경영
차녀 이옥비 (1941년생)
종교 - 유교 (성리학)
학력 - 보문의숙 (졸업)
긴조예비학교[17] (중퇴)
중국대학] (사회학과 / 2년 중퇴)
교남학원 (중퇴 現대륜고등학교)
조직 - 의열단
서훈
건국포장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금관문화훈장 추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시인. 본관은 진성(眞城), 호는 육사(陸史), 본명은 이원록(李源祿) 또는 이원삼(李源三). 한때 이활(李活)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적도 있으며 후에 자신의 수감번호였던 264를 따와 이육사로 개명했다.
윤동주, 한용운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의 저항 시인으로 유명하다.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독립유공자 이광호(李洸鎬)와 독립유공자 이영호(李寧鎬)는 그의 9촌 삼종숙(三從叔)이다.
1904년 5월 18일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現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원촌마을) 881번지에서 퇴계 이황의 13대손인 아버지 이가호(李家鎬, 1878 ~ 1941.4.26.)와 어머니 김해 허씨 허길(許吉, 1876 ~ 1942. 4. 29)[21] 사이의 6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영천군 화북면 오동리(梧洞里) 사람 안용락(安庸洛)의 딸 안일양(安一陽, 1906.11.7. ~ 1983)과 결혼하였다.
이육사의 딸인 이옥비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1934년 육사와 정치군사간부학교 1기생 동기인 처남 안병철(安炳喆)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들어간 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한 자백으로 여러 사람이 체포되어 죽거나 다쳤다.
이 일 때문에 이육사는 크게 분노해 안병철의 뺨을 때린 후 장인과 처삼촌에게 두루마리 6장이나 되는 편지를 보내 더러운 피의 일족(부인 안일양을 지칭)인 사람을 더는 받아들일 수 없으니 데려가라 전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 일 이후 무려 7년 동안이나 본가에 들러도 부모님께 인사만 드리고 잠은 여관에서 잤다고 한다.
어린 시절 대한제국 시기 장릉(章陵) 참봉을 지낸 조부 이중직(李中稙, 1847 ~ 1916. 1. 17)에게서 소학을 배우는 등 한학을 공부하다가 조부가 사망한 1916년, 그의 가문인 진성이씨 문중에서 설립한 보문의숙(이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였다.
이 경험으로 그는 훗날의 창작 활동에서 한학을 배운 흔적이 보인다. 졸업 후 1920년 가족들이 모두 대구부 남산정(現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662번지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19살 때 영천군의 사립 백학학원(白鶴學院)의 교원으로 9개월간 근무하였고 1924년 4월 일본 도쿄에 유학하여 킨죠(錦城) 예비학교를 1년간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1925년 8월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하여 중국대학(中國大學) 사회학과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중퇴하였다.
1927년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때의 수인번호인 264에서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소 후 1929년 5월부터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1년간 근무했다. 1830 1월 3일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한다.
이때 후에 교보생명을 창업하게 되는 신용호에게도 영향을 미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고, 나아가 교육보험사업에 설립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931년 8월에는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전직하였으나 1932년 3월 퇴사하였다.
같은 해 4월 만주국 펑톈으로 가서 의열단 핵심단원 윤세주를 만나 의열단 입단을 권유받고 곧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로 입교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폭탄·탄약·뇌관 등의 제조법과 투척법, 그리고 피신법·변장법·무기운반법 등을 배웠으며 권총 사격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전한다.
1933년 4월 졸업 후 7월경 귀국하여,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했다.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1934년 3월, 의열단 및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자라는 이유로 경성부 본정경찰서에 검거된 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7월에야 기소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다.##2
1937년 윤곤강(尹崑崗)·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가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이듬해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
대나무로 다리 살점을 떼내는 고문을 당해 옥에서 입은 바지는 늘 피에 적셔 있었다고 한다.#
둘째 동생 이원창과 함께 의열단에서 활동했던 이병희가 그의 유해를 수습하여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고, 1960년 안동시에 이장됐다.
1968년에는 안동시에 그의 시비가 건립됐다. 2004년에 이육사 문학관이 세워졌고, 안동시에서는 안동 강변도로를 "이육사로"로 개칭했다.
강변 도로를 타고 안동댐으로 가면 수몰지구 민속촌 입구에 시인의 대표 시인 광야 시비가 세워져 있으며, 도산면 서부리와 도산서원을 지나 온혜리 도산면사무소 교차로에서 토계리 방향으로 들어가면 원천리에 이육사 문학관과 청포도 시비가 세워져 있다.
그의 경력이 독립운동에 매진한 것으로(옥살이만 17번) 채워진 덕분인지 그는 윤동주와 함께 '저항 시인'으로서 평가받게 되었으며 실제로 1943년부터는 한글 사용에 대해 탄압을 가해오자 한시만 쓰는 식으로 붓을 꺾지 않으면서도 저항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윤동주는 서훈이 3급이고 이육사는 서훈이 4급이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보훈부에 정정을 요구하였으나 보훈부에서는 안 된다는 말만 있어 왔다.
아무래도 윤동주는 문단에서 힘깨나 쓰는 분들과 엮일 일이 없었으므로 거부감이 적었으나 이육사는 문단에서 숨기고 싶은 일들이 많은 분들과 엮여 왔던 만큼 그의 이름이 언급되면 불편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동생부터 남로당계 고위인사라 북한 사회주의 정권과의 연결성을 부정할 수 없는 것도 문제다. 현대에야 이런 연좌제적인 사상을 거의 적용하지 않고 대중들도 이육사 시인의 동생에 대해 거의 알지도 못하지만 여러 요건이 얽혀 영향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동생뿐만 아니라 이육사 본인도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다. 1931년에는 김원봉에 대해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중국의 부르주아 계급과 야합"하고, "사상이 애매하고 비계급적"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주의를 위반하여 "조선인이 중국에서 조선의 혁명 사업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혁명적 정조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가 1933년 조선에서 발표한 '자연과학과 유물변증법'이라는 글도 그의 이념적 성향을 잘 보여준다.# 그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졸업식 때 지은 연극 '지하실'에서는 조선에 공산제도가 실현되고, 토지는 국유화되고, 노동자와 농민이 지배하는 사회가 실현돼,
마지막으로 '조선혁명 성공 만세'를 외치는 내용이어서 그가 독립운동의 방향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상일 동의대 교수는 "이육사 연구는 사회주의적 성격에 대해서는 사실상 함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저항시인'이라는 수식어조차 부족해 보일 정도로 평생을 초인적인 삶을 살았다. 이미 20대 초반 무렵무터 각종 독립운동에 연관되어 감옥살이를 했으며 만주까지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했고 조선 독립군이 사용할 무기 반입 계획에 몸소 참여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마흔 남짓한 짧은 인생이었지만 강렬하게 불타오른 애국지사의 표상이다.
일제강점기의 문인들 중 가장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다. 39년의 인생 동안 옥살이만 17번을 했다는 사실이 그의 삶을 대변한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작품
이육사의 시는 독립운동 지사로서의 강한 의지를 담은 시들이 많지만,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느끼던 인간적인 고뇌를 담은 시들도 존재한다. 대표 시로는 <황혼>, <절정>, <광야>, <꽃>, <교목>, <청포도>가 있다.
이육사는 살아 생전 시집을 출간하지는 못하였고 순국 후, 당대 대표적인 문학평론가인 둘째 동생 이원조가 형인 이육사의 시를 모아 1946년 유고시집인 육사시집을 출간하였다.
유고시집 출간 시에 동생 이원조는 형인 이육사의 시작활동에 대해 "혁명가적 정열과 의욕으로 시에 빙자해 꿈도 그려보고 불평도 폭백한 것"이라고 회고하였다.
비밀결사 단체 ‘노도간’에 가담하고 독립운동을 하면서 시작을 한 까닭에 남겨진 시는 30여 편에 불과하였으며, 자신의 시작활동에 대한 생각은 "계절의 오행"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나는 이 가을에도 아예 유언을 쓰려고는 하지 않소. 다만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이육사 독립운동 행적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 의사 사건 연루
대구격문사건 (1931년 1월)
1929년 11월에 터진 광주학생항일투쟁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사건임.
1930년 1월 중순에 동맹휴학이 시도되었고 6월에도 동맹휴학이 단행되었으며, 대구에서도 10월에 대구농림학교, 1931년 1월에는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동조하여 동맹휴학에 들어가게 되었음.
이육사는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옥고를 치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졸업 (1931년~1933년)
관련인물 : 김원봉, 윤세주
서대문감옥 수감 (1934년 6월)
중국에서 군사간부로 육성된 목적에 충실하기 위하여 국내 공작원으로서 부여받은 사명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 1934년 3월 22일 경찰에 체포됨. 일본 경찰은 육사가 만주로 사라진 1932년 4월 이후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음. 일본경찰의 기록에 따르면 "1932년 4월에 다시 만주로 갔으나 그 뒤에 소재불명이어서 요주의 인물로 수배중에 있었음"이라고 적혀 있으며, 체포 후 6월 23일 기소유예로 풀려남.
1934년 7월 안동경찰서 보고내용은 육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음. 기록내용 : "배일사상, 민족자결 , 항상 조선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의의 선전을 할 염려가 있음 . 또 그 무렵은 민족공산주의로 전화하고 있는 것으로 본인의 성질로 보아서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
베이징 소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 (1944년 1월 16일)
1943년 7월, 모친과 형의 소상(小喪)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 후, 늦가을에 동대문 형사대와 헌병대에 검거 및 베이징으로 압송됨.
1944년 1월 16일 새벽, 베이징 네이이구(內一區) 동창후뚱(東廠胡同, 일제시기에는 東昌胡同) 1호에서 순국.(이곳에는 당시 일제의 문화특무공작기관인 동방문화사업위원회가 있었다.)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여)가 시신 거두어 화장하고, 동생 원창에게 유골 인계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됨(1960년에 고향 원촌 뒷산으로 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