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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심을 이기는 능력(딤전 6장 6-12)
성경본문:디모데전서 6: 6-12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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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의 정체
탐심, 즉 탐욕은 무엇일까요? ‘내용이 아닌 포장에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요?
사람들이 ‘외적인 것’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크기를 생각하게 되고, 더 큰 것을 바라는 욕망은 탐심으로 나타나죠. 탐심은 가장 비열한 인간의 본성 중의 하나이고, 탐심이 드러나면 인간의 존엄성은 보이지 않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천민자본주의’라는 말을 씁니다. 혹은 ‘졸부’라는 말을 하기도 하죠. 이는 존엄성이 없는 소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
김형석 교수는 자신의 책 [어떻게 믿을 것인가?]를 통하여 우리 근대사에 있었던 창피스러운 일 몇 가지를 지적합니다.
180만 평의 거대한 독립기념관을 지으며, 심지어 일본산 자재로 지어놓고 자랑하는 나라.
초등학교 교실이 부족해 3부제 수업을 하고 있을 때 180억을 들여 국회의사당을 짓고, 한 번도 민주적인 국회운영을 못 해본 나라.
서울 올림픽 이후에 ‘서울 평화상’을 제정하고 노벨상보다 상금이 많다고 자랑하는 나라.
성당이나 예배당의 수가 지나치게 많을 뿐 아니라, 그 건물의 크기를 가지고 목회의 성공을 말하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탐심은 아닐까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6절입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자족하는 마음’이 없어서 탐심이 생긴다는 것이죠. 자족하는 마음이 없어서 경건한 삶을 살지 못하고 세상적 욕심의 노예가 되는 것이죠.
스캇 솔즈의 책 [예수님처럼 친구가 되어주라]를 보면, 런던의 한 백만장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2008년 금융위기에서 재산의 절반을 잃은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백만장자였고 삶의 질도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재계 서열에서 밀려났다는 수치심이 그를 자기 혐오와 절망에 이어 마침내 자해와 자살로 내몰았던 것이죠.
탐심이 무서운 것은 다른 모든 죄와 같은 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진실, 현실을 왜곡시킨다는 것입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심으로 인해 영혼이 피폐해지는 것이죠.
오늘은 탐욕에 대한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먼저 용혜원 목사님이 쓴 글 중에 있는 “욕심”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욕심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한 청년이 들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한참 걷다가 길에서 요술 램프를 발견했습니다.
청년은 신기해서 요술 램프를 문질러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요정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소원이 있으면 딱 한 가지만 말하세요. 그러면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때 청년에게는 세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돈과 여자와 결혼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를 다 갖고 싶어서 욕심이 난 청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여자결혼>을 갖고 싶소!"
이 청년은 그 후에 정말 <돈(돌다) 여자와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죠?
낚시꾼이 이상한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금빛을 띠고 있는 이 물고기가 말을 합니다.
“제발 나를 살려주세요. 나를 살려주면 세 가지의 소원을 들어주겠습니다.”
욕심이 생긴 낚시꾼은 물고기와 흥정을 합니다.
“다섯 가지의 소원을 들어주면 살려주겠다. 네 가지 소원을 들어주면 살려주겠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물고기는 세 가지 소원밖에는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최종적으로 낚시꾼은 할 수 없이 세 가지를 허락했으나, 물고기가 숨을 쉬지 못하고 죽어 버렸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5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한 가지 이야기를 더 소개할까요?
결혼 30주년을 맞이한 60세 동갑내기 부부가 있습니다. 결혼기념일에 천사가 나타나서 소원을 한 가지씩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먼저 말했습니다.
“그동안 너무 가난하게 살아 여행 한번 변변히 하지 못했는데 세계 일주를 하고 싶어요!”
그러자 천사는 아내에게 항공권과 여행경비를 건네주었습니다.
이것을 지켜본 남편은 아내의 눈치를 슬슬 살피더니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나는 평생 동갑내기 아내와 살아왔는데 이제 30살 어린 아내와 살아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두 사람이 다 인생을 열심히 살아서 주는 선물인데 소원을 안 들어줄 수도 없고 그렇게 원하신다면 소원을 들어주어야지요.”하면서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남편이 갑자기 90세의 노인이 되어 30살 어린 60세의 아내와 함께 세계 여행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본문 9절을 보면 말씀이 잘 이해가 될 듯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목회서신에서 자족하는 마음과 부하려고 하는 마음 사이의 차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경건의 이익이 있음과 대비하여, “부하려 하는 마음”은 시험과 올무, 여러 가지 해로움과 정욕에 떨어질 뿐 아니라 결국은 멸망에 빠지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영어성경에서는 “탐욕”을 “Evil Desire”라고 표현합니다. 악마적인 욕망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욕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이루려는 마음, 혹은 무엇을 가지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이것이 “vision”으로 발전하게 될 때, 매우 긍정적인 작용을 할 수 있습니다.
“vision”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간절한 마음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에 이것을 갖게 되면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창조적인 작용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경계하는 것은 바로 욕망이 “탐욕”의 얼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욕망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이 욕망이 “탐욕”으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하고, 욕망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첫 번째, 탐욕의 정체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잘못된 욕망입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자신이 창조한 것도 소유한 것도 없는 존재입니다.
자신이 원하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이 탐욕으로 변하는 것은 아닐까요?
본문 7절을 보세요.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는 인간 최초의 탐욕을 ‘선악과’를 탐했던 아담과 하와에게서 찾습니다.
창세기 3장 5~6절에 보면 사단이 이렇게 유혹합니다.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하와가 유혹에 넘어간 말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라는 것인데, 유한한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같이 되어 선악을 판단하게 되는 것은 재앙입니다.
왜냐하면, 선악을 알아도, 선악 간에 완전하게 살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며 우리를 ‘판단’하는 존재가 아니라 ‘순종’하는 존재로 만드신 것은 아닐까요?
자유의지가 없는 수동적 존재가 아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있는 참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유혹 한 가운데 있습니다.
‘욕망’이 유혹인 것은 늘 ‘보암직’하고 ‘먹음직’하다는 것이고, 욕망이 무서운 죄로 변질되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남편인 아담에게도 먹도록 한 것처럼 말입니다.
대체로 인간이 죄를 지으면 그 죄책감을 더는 방법으로 공범을 만들게 되죠.
자신과 같은 죄를 지은 인간을 보면서 안도감을 느끼기 때문은 아닐까요?
탐욕이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탐욕이 있기 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탐욕이 들어서자 하나님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분이 아니라, 나의 대적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마 6:24)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것인지, 하나님의 대적자가 될 것인지 둘 중의 하나이지 양다리를 걸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것은 자신 속에 있는 탐욕의 정체를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참지 못하는 것,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만드는 것, 즉,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주말이 되면, 골프나 낚시, 등산과 같은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되나요?
여러분의 컴퓨터 속에 찾아오는 메일, 쇼핑의 유혹,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하지는 않나요?
자신에게 맡겨주신 지식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마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가리게 되고,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직장에서 자신이 올라가고자 하는 그 자리를 향해,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밖에 없다면….
☞두 번째, 탐욕의 정체는 ‘부족감’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8절을 보세요.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이 말씀을 가지고 묵상했던 한 권사님이 이런 글을 적었더군요.
백화점에 갔더니 의심할 정도의 가격으로 신발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마트도 아니고 백화점! 발에 맞는 사이즈로 골라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왔습니다.
신발장을 열었을 때 다른 신발들로 가득한 것을 보았고, 또 비슷한 모양과 비슷한 색의 신을 사 왔음을 알았습니다.
이 신발을 언제 어떻게 다 신지? 내 발이 ‘지네’도 아니고.
그때 누가복음 12장에 먹을 것을 잔뜩 쌓아놓고 만족해하는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오늘 내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닌데….
그런데 우리의 삶을 가만히 보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축복이고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 평범한 진리를 잊어버리는 순간 ‘탐욕’이 들어옵니다.
족함을 모르면 찾아오는 것이 ‘탐욕’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마음입니다.
본문 9절은 이렇게 표현하죠.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우리 인간들이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훈련하신 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났던 ‘만나’입니다.
탐욕을 경계하는 훈련은 매일매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죠.
출애굽기 16장 4절을 보세요.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시험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즉, 일용할 양식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향한 매일 매일의 감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양식을 내가 쌓아 놓고, 내가 준비한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가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감사를 알지만, 이 양식을 내가 모아놓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 무엇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 양식의 주인이 내가 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디모데전서 6장 6절에 자족하는 마음이 경건에 유익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매일 자족하는 사람은 매일매일 하나님이 필요함을 인정하게 될 것이고, 매일매일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사람은 매일매일 감사하게 될 것이므로, “경건”한 삶을 살 것입니다.
참 신기하죠?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시는데, 그것을 신뢰하지 못하고 쌓아두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쌓아둔 것이 내일(來日)이 되면 썩어 없어지는데도 마냥 쌓아뒀다 버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광야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탐욕의 진실한 정체는 ‘헛수고’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경험했던 ‘만나’를 유일하게 보존할 수 있는 때가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6장 5절을 보세요.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오직 만나가 썩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한 때입니다.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양식이란, 재물이란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때 쌓아지는 것이지, 인간의 탐욕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탐욕으로 모인 재물이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때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때요, 인간이 인간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 무엇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할 때, 탐욕을 이기게 됩니다.
창세기 4장 26절에 ‘에노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에노스 때가 되어서야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나니 하나님도 인정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탐욕의 무서움은 우리의 눈을 가려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합니다. 탐욕의 무서움은 하나님과 대척점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존재로 변합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부자’에 대한 아주 부정적인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가 등장하게 된 이유는 재산분배 문제로 형제가 서로 싸우다가 예수님을 찾아와 해결하고자 합니다. 유대관습에, 형은 3분의 2만 상속받게 되어있는데 부모가 갑자기 죽자 형이 혼자 독차지하려고 했기에 동생이 불만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평한 분배를 말하지 않고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15절),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0절)”고 말씀하시면서 분배문제가 아닌 인간의 탐심에 대한 치료의 말씀을 교훈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우리 주님은 “형제간의 싸움을 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 인간 속에 들어있는 탐욕의 죄를 보고 계셨습니다.” 바로 탐욕으로 인한 비겁하고도 저열한 이기심 말입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지적해 주셨습니다.
탐욕의 정체가 무엇인가요?
탐욕이 들어가면 ‘인격이 상실’됩니다. 타인이 보이지 않습니다. 가족도 보이지 않습니다. 좋았던 관계가 물질로 인해 깨어지고 있다면 인격이 상실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탐심이 들어가면 도덕성이 상실되고, 도덕성이 없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성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있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 40개 중의 16개는 돈과 소유에 관한 내용인데 사람은 돈 때문에 걱정이 많아지고 심령이 악해져서 타락하였으며 이러한 사람은 모두 구원을 상실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결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다”라는 말씀입니다.
탐욕을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후반부에서는 탐심을 이기는 방법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먼저 10절을 보겠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돈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10절 말씀에 보면 ‘사랑한다’라는 표현도 썼는데, 돈을 얼마나 좋아하면 사랑한다는 표현을 썼을까요?
돈을 사랑하고 돈을 사모하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사랑해본 사람은 알지만, 사랑하는 순간 그 사랑하는 대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돈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사람이 ‘믿음을 떠났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돈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므로 실망할 수밖에 없죠.
돈을 사랑하고 부릴 줄 알아야 하는데, 돈에 지배를 받고 있으니 어떻게 믿음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답이 무엇인가요? 11절입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이것들을 피하라’는 말은, 돈을 사랑하고 돈을 사모하는 마음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참 흥미롭죠?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와 배치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하지 못한 것은 변하기 때문에 배신하는 것이고, 가변적인 것에 빠지면 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없어질 것에 매달려 있는데 어떻게 인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용하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돈을 지배하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기 때문이죠.
저는 오늘 두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1) 하나님께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대상29:14).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우리가 흔히 봉헌할 때 많이 불렀던 찬양의 가사입니다.
이 말씀이 헌금을 많이 해라! 그런 말로 들리나요?
우리가 헌금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며,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삶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성경에 보면 헌금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두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헌금하는 것만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축복을 인식하는 것이고, 헌금하는 순간 이 돈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청지기의 삶’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내 소유이든지 아니든지 나에게 맡겨진 것을 내가 사용하는 데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관계”적인 측면입니다.
청지기의 타락은 바로 이 관계를 망각하면서 시작됩니다.
나의 것으로 생각하면서 욕심이 생기고, 욕심이 생기면 줄 수 없게 되고, 줄 수 없는 마음이 들면 이제 우리는 물질의 주인이 아니라 물질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제 삶의 고백이고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제가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지, 또한 지금 하는 이야기들이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단지 노력이라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목사가 되면서, 아니 소명자로서의 의식이 생기면서 가장 부끄러웠던 것이 돈에 집착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집착까지는 그렇고, 돈을 가지고 제 인생의 준비와 설계를 해서 올바른 사명자로 서지 못하는 모습이죠.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그런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살아야겠다.’
그래서 통장에 돈을 남기지 않고 돈을 모으지 않기로 했습니다.
물론 제 아내는 제가 받는 월급 중에서 보험도 들고 연금도 들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월급 이외에 들어오는 수입원이 있습니다.
외부에서 설교나 세미나를 통해 받는 사례비, 결혼 주례비, 책을 출판하는 인세 등등. 그렇게 돈을 모아놓으면 꽤 많은 양이 될 것 같더군요.
그래서 돈을 모으기보다는 월급 이외의 외부 수입을 모두 헌금으로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모두 헌금을 드리고 나니 불편한 부분도 또 돈이 필요한 부분도 있습니다.
재무부에서는 저에게 그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모두 헌금을 하지 마시고 조금씩 모았다가 필요한 곳에 쓰세요. 사람들은 목사님이 얼마를 헌금했느냐가 아니라 교회에서 얼마를 받느냐에 관심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필요한 만큼 쓰고 헌금을 하려고 보니, 문제는 그 ‘필요한 만큼’에 있었습니다. 그 기준이 너무 모호해서 돈을 가지고 있거나 모으기 시작하면 그 한계를 정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은 자기와 싸움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완전할 수 없고, 누군가의 기준에서 보면 과하고 부끄러운 부분이 있겠지만, 끝까지 이 여정을 가는 동안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인정하려는 훈련입니다.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제일 두려운 것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되는 것입니다.
혹시 이런 말을 해서 어떤 목사님들을 불편하게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누군가보다는 조금 의롭게 보일지 모르지만, 누군가보다는 또한 분명히 문제가 있는 사람일 테니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식의 끈을 놓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탐욕에 물들지 않으려면 하나님 앞에서 소유의 의미를 끊임없이 묻고 훈련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오늘 나의 생명을 거두어 가신다면, 내게 남아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물질의 소유권에 대해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규칙적인 헌금 생활이었습니다.
십일조는 “내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일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것이 내 소유의 십 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 중에서 9를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십일조가 늘어날 때마다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만, 내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십일조가 늘어날 때마다 아까운 마음이 들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십일조뿐 아니라, 서로 나누어 먹기 위한 “회식의 십일조”, 삼 년마다 드리는 “구제의 십일조”도 있었습니다.
이것저것 다 합치면 소득의 23%를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드렸던 것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민 18:21)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 26:12)
2) 영적 보험으로 탐욕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 12절을 ‘영적 보험’이라는 의미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고, 탐욕에 쓰러지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영생을 취하기 위함’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 우리가 아까운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적 보험이기 때문입니다.
아까워 보이지만 그것이 우리를 붙들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물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용기가 나지 않겠습니까?
적절한 예화가 될지 모르겠지만, 제가 경험했던 작은 일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2016년 미국에 다녀와서 페북에 잠시 나누었던 내용입니다.
“보험” 혹시라도 광고라는 오해가 없기를.
보험을 들 때면 아까운 생각이 많이 듭니다. ‘만약’을 위해 드는 것이지만 그 ‘만약’이 일어날 확률이 그렇게 높지 않기 때문이죠.
특히 미국에서 렌터카를 이용할 때면 무척 고민하게 됩니다.
보험은 돈을 적게 내고 작은 사고를 커버할 수도 있고, 많은 돈을 내고 큰 사고에 대한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죠.
어쨌거나 돈을 많이 낼수록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번에 미국에서 2주 정도를 지나는 동안 차를 빌렸습니다.
역시 고민이 되더군요. 얼마나 보험을 들어야 하나. 돈보다는 편안한 마음이 더 중요할 것 같아 ‘full coverage’로 보험을 들었고, 그다음 날 큰 사고는 아니지만 고속도로 위에서 위험한 순간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차들이 빠르게 달리는 도로에서 바로 제 앞에 철제 장애물이 나타난 것이죠. 그 짧은 순간에 여러 가지 생각이 나더군요.갑자기 차선을 바꾸면 혹시 부딪칠 수도 있다는 생각, 그런데 그 짧은 순간에도 보험을 들었다는 생각에 그냥 차로 받고 지나갔습니다. 앞에 범퍼가 찌그러지고 철제 장애물이 튕겨 나가면서 큰 사고를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차를 반납하며 참 편안하게 ‘사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보험에 들었던 영수증을 보내주었죠. 그리고 오늘 미국에서 메일이 날라 왔습니다. 사고에 대해 설명만 해 주면 된다고, 그리고 모든 것은 보험 처리가 되었다고 말이죠.
좀 장황하게 보험 이야기를 했죠?
아침 묵상을 하는 데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투자하는 시간과 물질이 종종 아깝게 느껴질 때도 있을지 모릅니다. 이 바쁜 세상에서 주님과의 개인적인 시간을 갖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빡빡한 세상에서 누군가를 위해 물질을 나누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물질을 사용한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의 도로에서 죄와 유혹의 장애물이 나타날 때, 그것을 피하거나 외면하려고 더 큰 문제를 만날 수도 있을 때, 담대하게 이기고 나가는 것은 우리의 삶에 들어 놓았던 ‘보험’이라고 말이죠.
우리를 담대하게 만드는 것, 모든 것을 지키시며 함께하시는 주님께 우리가 들어 놓았던 시간이 아닐까요?
종종 운전하거나 혼자 길을 걸을 때 우리의 입으로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가장 많이 부르고 들었던 노래가 흘러나온다는 것이죠.
우리가 어렵고 힘든 시간을 지날 때 머리에 떠오르는 말과 글이 어떤 것인가요?
평소에 가장 많은 묵상의 시간을 투자했던 것이 아닐까요?
가장 어려운 순간에, 죽을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께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종종 제가 목회자임에 틀림이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결정을 하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의 얼굴은 늘 교인들이기 때문이죠.
아직은 제 믿음과 신앙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보험 이야기는 세상의 광고는 아니고, 글을 쓰다 보니 ‘영적 세일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오늘 우리가 들고 있는 영적 시간과 보험 그리고 투자가, 우리의 삶을 말해 줄 것입니다. 명예를 생각하면 명예를 따라갑니다. 돈을 생각하면 돈에 인생을 겁니다. 이성에 관심을 두면 그렇게 흘러갑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우리 자신을 지키는 것이 참 힘든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도 많고, 우리가 이기기 힘든 환경도 참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보험을 들으셨나요?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고 최고의 보험을 들고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요즘은 종종 또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정말 복음의 능력을 믿는가? 교인 가운데 믿음에 실패한 이야기를 많이 듣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을 확실하게 붙들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많이 하고요.
어제는 밤에 산책하며 그런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더욱 확실하고 선명한 말씀으로 복음을 제시해야겠다는 것 말입니다. ‘복음’ 가장 확실한 보험입니다.
지난주에도 심방을 하면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20년 동안 만나 교회를 다닌 분입니다. 평범하게 다닌 분이 아니라, 열심쟁이로 봉사하며 기도하며 다녔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인 문제가 생겼습니다. 너무나 어렵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분의 마음속에 ‘나는 절대로 만나 교회를 떠날 수 없다.신앙을 버릴 수도 없다’는 오기가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이렇게 아무것도 없이 떠나면, 하나님이 수치를 당하시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데 말입니다.
담대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할 때, 담대한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담대한 마음이 생기면,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물질을 가지고 인심을 쓰면서, 칭찬받는 청지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애굽의 보디발 장군이 요셉의 정직함을 보고 모든 재산을 맡겼던 것처럼, 요셉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인 것을 인정한 애굽의 바로가 모든 것을 요셉에게 맡겼던 것처럼, 우리가 탐욕에서 자유하고 하나님께 인정받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더욱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맡기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 많은 것이 우리에게 축복인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임을 깨닫기 시작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사실 시편 23편의 다윗의 고백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 수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
탐욕이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고, 더 가지려고 하는 데서 생기는 마음입니다.
“부족함이 없다”고 느끼는데, 탐욕이 생기겠습니까?
그런데 이 만족감이란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신뢰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즉, 매일 매일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주님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저는 늘 기도하면서 훈련하는 것이 있습니다. 물질로부터 자유하게 해 주십시오.
혹시라도 물질이 제가 하는 일에 조건이나 환경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혹시라도 물질 때문에 사람들에게 편견을 가지지 않도록 말입니다.
물질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한 것일진대, 물질 때문에 흔들리지 않기를 말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십시오.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담대해질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물질에도 넘어가지 않는 우리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욕망이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이 욕망이 탐욕으로 변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의 신앙 훈련 속에서 우리는 탐욕으로부터 담대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인생은 천부께서 책임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