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성리해변 학살지 원혼표식설치
「여순사건은 얼마나 참혹한 비극적 사건이었는가. 아직도 그 실체적 진실이 역사의 베일에 가려 있다.
1948년 10월19일 전남 여수에 주둔한 국군 제14연대 병사들이 제주 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동족상잔 결사반대’, ‘미군 즉시 철퇴’를 주장하며 여수, 순천 등 전남 동부지역을 일시 점령했다. 14연대의 김지회·홍순석·이기종 등이 주축이 된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가 발표한 ‘애국인민에게 호소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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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연대 장병들. [사진-김삼석] |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이런 호소문은 여수, 순천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폭력적 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이어졌다. 여순사건을 ‘여순민중항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자 정부는 대규모 진압군(토벌군)을 투입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1월4일 특별담화를 통해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며,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방위해야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남녀 아동까지라도’라는 표현은 섬뜩하다. 대통령이라는 자가 어떻게 어린이들까지도 제거하라고 지시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린이들도 ‘빨갱이’라는 말인가.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힌다.
이에 따라 진압군은 여수, 순천의 전 시민을 반란군으로 간주했다. 이들을 모두 적으로 삼는 무차별적인 공격을 감행해 2만여명에 달하는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했다. 20대국회는 "진실화해기본정리법일부개정안"과 "여순사건특별법"이 행안위에서 상정 계류중이다.

[대한문앞 애기섬학살지 순례기자회견문]
민족 최대의 비극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9주기가 되었습니다.
전쟁은 멈추었으나 전쟁이남긴상처는 아물지 않고 곳곳에 남아있습니다.특히 남북모두가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지만
정확한 진상규명이되지않아 그로인한 유족들이 겪은 고통은 이루말할수없는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국가공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집단학살은 반인륜적인 전쟁범죄입니다.
국회는 지난 6월25일 가까스로 과거사기본법개정안을 행안위법소위에서 의결처리하여 전제회의에 상정하였으나 자유한국당의 반대로 또다시 지연되고있습니다.
여수국민보도연맹사건은 여수시에 거주했던 국민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들을 정부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 검속해 여수경찰서 유치장과 각 지서 등에 구금하였으며. 그 후 1950년 7월 16일과 23일경, 여수경찰서 경찰과 여수지구 CIC(미군방첩대)대원 그리고 당시 여수 주둔 후 후퇴하던 제15연대 헌병대원들이 남해군 소재 무인도(속칭 애기섬)에서 총살 후 바다에 수장한 사건으로 민간인 희생자는 2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발표하였지만 국가는 아무런조치도 취하지 안았습니다. 공식적인 사과는 커녕 추모비하나 하나 세우지 못했습니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와 관련시민단체들은 2018년도46개지역 순례에이어 2019년도에도 한강인도교폭파원혼비설치행사를 시작으로 여수애기섬 민간인집단학살지를 순례하여 무인도 애기섬에 원혼비를설하고 천도재봉행을 통하여 국가의책임을 환기시키고 여순사건특별법과 과거사법안의 조속한 통과를 촉구하기위한 순례의길을 걸어가겠습니다.
원한의바다.통곡의바다.침묵의바다.저주의바다였던 애기섬은 알고있습니다.
어렵고 험난한 길이지만 백만피학살자의 염원을 가슴속에 품고 대장정의 여정을 열어가기위해 여수애기섬으로 힘차게 출발합니다. 감사합니다.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되고,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여 70년을 오는 동안 숱한 인권유린, 국가권력의 일탈, 일명 국가폭력이 작용하였다. 아쉽게도 국가권력의 일탈에 대한 반성이나 성찰을 갖지 못한 채 여전히 국가주의에 따른 경제 논리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대한민국 정부 수립 70주년, 여순항쟁 발발 70주년. 70년이란 시간을 되돌려 대한민국과 여순항쟁의 관계 속에서 파생되었던 일명 ‘대한민국 최초’란 타이틀로 여순항쟁을 독자와 함께하고자 한다.
‘최초’, ‘최대’, ‘제일’ 등과 같은 단어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최초’란 타이틀을 쓴 것은 여순항쟁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와 인식을 확대해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그러하였다는 것을 양해 바란다.여순항쟁이란 용어 속에서는 여수와 순천이라는 지역명이 들어가 있다. 그러다 보니 여수와 순천이란 특정 지역에서만 발생한 사건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 피해지역은 전남 전체와 전북과 경남 일부를 포함하여 37군데이다. 그리고 여순항쟁은 대한민국 70주년을 걸어오는 과정에 숱한 발자국을 남겼다. 즉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사회에 미친 파장이 만만치 않다. 그런 점에서 여순항쟁을 제대로 아는 것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일부를 아는 것이다.여기서는 여순항쟁과 대한민국 최초 ‘반헌법적인’ 명령이 작동했다는 문제를 다루겠다. 긴 글이니 차분하게 읽어 주기 바라며, 이 글의 목적은 여순항쟁에 대해 독자들과 그 공감대를 형성하고 인식의 폭을 높이고자 한 기고문이다.
제14연대 병사위원회의 주장은 정당한가?1948년 10월 19일 여수주둔 제14연대 군인들은 제주도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하였다. 군인이 상부의 명령을 거부한 행위를 두고 여태껏 ‘반란’이란 족쇄를 채웠다. 상명하복의 가치가 절대적으로 적용되는 군인이란 특수한 신분이, 상부의 명령을 거부한 행위에 대해 일반 국민도 ‘반란’이라고 인식할 경향이 매우 크다. 일반인이 이러한 인식을 할 수밖에 없게 하였던 요인에는 반공주의와 군사주의 문화가 내재적으로 자리한 사회적 현상이 작동했기 때문이다.반공주의를 마치 ‘국시(國是)’처럼 여겼던 문화를 터전으로 살아온 오랜 시간은 자신과 다른 시각이나 비판을 ‘틀렸다’고 정의하였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틀렸다’는 정의는 곧바로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하였고, 그 선택에 기준은 반공주의 문화의 습성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정치적 문제에서는 정부를 비판하거나 정책을 반대하는 데 인색할 수밖에 없었다. 비판이나 반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국민들로 하여금 애써 외면하는 것이 선(善)이라는 판단을 하게 이르렀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우리 동네에서 ○○○을 모르면 간첩이지”란 말이 아무렇지 않게 통용되었다. ‘간첩’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반공주의 문화 속의 엄청난 파장을 고려할 틈도 없이 자연 발생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였다.군사주의 문화가 사회 전반에 내재한 오랜 시간. 이는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나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나 대부분이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는 관성적인 습성이 자연적으로 체화된 상황을 의미한다.
분단국가 그리고 전쟁이 발발했던 요인으로 남북 간의 이념 투쟁이 격화되면서 ‘안보’를 제일의 가치로 여겼던 인식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면서 발생한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군인은 상부의 명령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 할까? 1) 국군의 사명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이다.여수 주둔 제14연대 군인들은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며 자신들을 ‘제주도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이하 병사위원회)’라고 칭하고 「애국인민에게 호소함」이란 성명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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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인민에게 호소함' [사진-김삼석] |
이 성명서는 누런 종이에 붓으로 썼으며 여수 시내 거리 곳곳에 부착되었다. 병사위원회의 유일한 문서라는 점에서 유의미한 사료라고 본다. 그 내용을 보면,제주토벌을 거부한 병사들의 호소문㉠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직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동아일보, 1948년 11월 30일) 제14연대 군인들은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고 했다. 즉 군인의 사명을 언급하고 있다. 병사위원회가 주장한 군인의 사명은 첫째 국토방위이다. 둘째는 인민의 권리와 복리이다.
이 주장은 국군의 사명과 부합한 것일까?1948년 7월 17일에 제정한 대한민국 헌법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7월 12일 제정하여 7월 17일 공포하였다. 헌법이 공포된 7월 17일을 제헌절로 부르고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였다. 제헌헌법은 전문과 본문 10장 130조, 부칙으로 구성되었다. 제헌헌법 제53조 “대통령과 부통령은 국회에서 무기명투표로써 각각 선거한다”는 규정에 따라 7월 20일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이 당선되었다.
이승만 초대 내각이 구성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대통령에 관한 규정은 제헌헌법 제61조이다. “대통령은 국군을 통수한다. 국군의 조직과 편성은 법률로써 정한다”고 규정하였다. 대통령 취임 선서(제54조)는 “나는 국헌을 준수하며 국민의 복리를 증진하며 국가를 보위하여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에게 엄숙히 선서한다”고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방장관에 이범석을 임명하여 국무총리직을 겸임케 했다. 국군 통수권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있으며, 군대의 통할을 국방장관 이범석에게 부여하였다. 헌법에서 대통령에게 국가를 보위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면서(헌법 제54조), 그에 따라 국군 통수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했다(제61조). 이는 현재의 제6공화국 헌법도 마찬가지이다.대통령이 ‘국가의 보위’란 중책을 맨손으로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혼자서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국가 보위’의 최후 보루로 군대를 두었다. 이것이 국군이며, 군인이다.국군은 국가 보위의 최후의 보루인 만큼, 헌법에는 국군의 사명을 명확하게 명시하고 있다. 물론 제헌헌법에도 마찬가지이다. 제헌헌법 제6조 “대한민국은 모든 침략적인 전쟁을 부인한다. 국군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국군의 사명으로 헌법에 명시하였다.앞서 제14연대 군인들은 두 가지 국군의 사명을 주장했다. ‘국토방위’와 ‘인민의 권리와 복리’이다. 두 가지 중 제헌헌법에 명시된 국군의 사명과 ‘국토방위’는 일치한다.
그렇다면 제14연대에 제주도 출동 명령을 하달할 시기에 제주도가 국토방위의 심각한 위협을 받았는가? 아니면 국토방위를 목적으로 제14연대를 출동시켰는지를 확인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먼저 당시 제주도가 다른 국가로부터 특히 북한으로부터 위협 등 심각한 상황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껏 알려진 바가 없다. 알려진 바가 없다는 것은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으로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적으로는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국토방위의 목적으로 제14연대에 제주도 출동 명령이 하달되었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제14연대 출동은 국토방위보다도 제주4・3항쟁의 토벌을 목적으로 출동명령이 내려졌다는 것이 지금껏 연구 결과이다. 이는 계속 이야기가 될 것이다. 2) 국군은 사명은 ‘인민의 권리와 복리’이다.병사위원회가 국군의 두 번째 사명으로 인식한 ‘인민의 권리와 복리’는 어떻게 된 것일까? 당시 제헌헌법에는 국군의 사명에 명시되지 않았다. 그 근거는 현행 제6공화국 헌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5조
①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
②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고 규정하고 있다.제헌헌법과 달리 현행 제6공화국 헌법에는 ‘국가의 안전보장’이 국군의 사명으로 추가되었다. 근대 국가의 요소는 영토, 국민, 주권이다. 영토에 대해서는 ‘국토방위’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가의 안전보장’이란 국민의 생명이 위협받거나 주권이 위태로운 상황을 염두에 둔 법률적 근거라고 볼 수 있다.국민의 생명이 위협받는다고 매번 군인이 출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치안 문제일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는 경찰의 임무이기도 하다(경찰법 제3조 국가경찰의 임무). 군인의 출동은 다수의 국민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으며, 특히 경찰로서 국민 생명을 지킬 수 없을 정도의 아주 심각한 상황이 도래했을 때 군인이 나서서 국민의 안전을 확보하고 사회질서의 안녕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헌정 70년에서 국군이 투입되어 국민의 안전을 지킨 사례는 있었던 것일까? 대한민국에서 전쟁, 대규모 간첩 침투, 해외에서 국민이 납치된 경우를 제외하고 국군을 투입하여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1979년 부마항쟁과 1980년 광주민주항쟁에서처럼 일부 지배 권력의 망동을 제외하고는 말이다.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지역에서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란 반정부・반독재 집회에 대해 부산에 비상계엄 선언, 창원마산지역 위수령을 선포한 공수부대 등을 투입하여 군대의 힘으로 진압하였다. 이때 계엄령과 위수령 그리고 공수부대 투입은 박정희 유신정권의 연장을 위한 조치였지, 국민 생명이 심각하게 위협받아 취한 조치가 아니었다. 이를 ‘부마민주항쟁’이라고 한다..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도 마찬가지이다.
5월 17일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전국비상계엄 확대 조치와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한 것은 국민의 생명과 무관하다. 사회질서의 안녕과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신군부의 정권을 유지하려는 일련의 조치에서 피의 학살극을 자행했다. 즉 국군의 사명과 부합하지 않은 자국민의 생명을 위해(危害)하는 행위를 국군이 서슴지 않았던 것이 광주민주항쟁이다.부마민주항쟁과 광주민주항쟁에 국군의 투입은 지배 권력자의 망동으로 역사는 기록하였고, 대한민국 정부도 법률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법률적 단죄를 내렸다. 부마항쟁과 광주민주항쟁과 달리 국군이 정반대적 입장을 취한 사건이 있다. 지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국민의 생명을 심각하게 위해하는 명령. 이를 거부한 국군이 있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주둔 제14연대 군인이다.아이러니하다. 부마민주항쟁과 광주민주항쟁처럼 국군이 투입된 사건에 대해서는 특별법을 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배 권력자의 망동을 거부한 사건에 대해서는 특별법을 제정하지 않고 있다. ‘반란’이란 족쇄를 채워서 말이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주둔 제14연대 군인들은 ‘반란’을 목적으로 제주도 출동 명령을 거부했던 것일까?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다시 병사위원회의 「애국인민에게 호소함」을 살펴보자. 이들이 제주도 출동을 거부한 것은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으로 간주하였다. 병사위원회의 주장이 옳다고 가정하면, 분명 제주도 출동 명령은 잘못된 것이다. 어떻게 자국의 군대가 자국민을 학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여기에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그렇다면 따져야 할 것은 제14연대의 제주도 출동 목적이 정말로 “제주도 인민을 무차별 학살하려”는 작전의 일환이었느냐는 것이다. 병사위원회의 주장에 신빙성이 있냐를 따져봐야 한다.
현재까지 정부나 국방부에서 제14연대를 왜 제주도에 출동시키려고 했는지에 대한 ‘작전명령’ 문서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혹여 국방부는 그런 것은 없다고 주장하거나 소실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병력을 투입하면서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은 말이 될 수 없다. 또한 여순항쟁을 토벌하는 ‘전투경과지도’, ‘군법회의 자료’ 등 숱한 자료가 존재한다. 그런데 유독 ‘작전명령’ 문서만 소실되었다는 것은 언어도단에 불과할 것이다.정부와 국방부가 제14연대를 왜 제주도 출동시키려고 했는지에 대한 문서를 공개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당시 다른 사료와 여러 정황을 종합하여 병사위원회의 주장이 타당한지 따져볼 수밖에 없다.
제주도 출동명령은 정당하였는가?
1) 어떤 선결조치도 없이 군대의 출동명령이 있었다.먼저, 부마민주항쟁과 광주민주항쟁에서 군을 투입할 경우 ‘선결조치’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비상조치 또는 계엄 등을 말한다. 단, 당시 비상계엄이 정당하다는 의미는 아니다.계엄령에는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이 있다. 부마민주항쟁과 광주민주항쟁에는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현행 계엄법 제2조(계엄의 종류와 선포 등)에는 “비상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시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되어 행정 및 사법 기능의 수행이 현저히 곤란한 경우에 군사상 필요에 따르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선포한다”고 정의되어 있다.부마민주항쟁과 광주민주항쟁에서 군을 투입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이다. 그렇다면 제14연대의 제주도 출동명령을 하달한 시점에 제주도에도 비상계엄 또는 경비계엄이 선포되었는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혹여 당시에 계엄법이 존재하지 않아 계엄령을 내리지 못했다고 강변할 수도 있다.
계엄법이 제정된 날은 1948년 11월 24일이다(법률 제69호). 일리가 있다고 고개를 끄덕일지 모르겠지만, 여순항쟁이 발발하고 여수, 순천지역에 10월 22일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령이 존재하지도 않았음에도 계엄을 선포한 것이다. 물론 제주도도 마찬가지로 계엄법이 없었음에도 1948년 11월 17일 계엄을 선포했다.무장한 군인을 제주도에 출동시키려고 했다면 그에 상응한 조치가 있어야 했다. 비상계엄이든 경비계엄이든 간에 말이다. 그런데 어떠한 비상조치도 선포되지 않았다. 이 말은 제주도가 그다지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고로 토벌을 목적으로 국군의 출동은 ‘제주인민의 학살’이라는 병사위원회 주장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2) 군인은 무조건 명령을 따라야 하는 신분인가?
두 번째, 특수한 신분의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고 하지만, 부당한 명령까지 실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무조건 군인은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것이 정당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군형법 제44조에는 ‘항명(抗命)’이라는 죄가 있다(1962년 1월 20일 제정). 여순항쟁 당시에는 군형법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국군의 규율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항명’의 일반적인 사전적 의미는 “명령이나 통제에 따르지 않고 맞서서 반항함”이라고 되어 있지만, 군형법에는 “제44조(항명) 상관의 정당한 명령에 반항하거나 복종하지 아니한 사람”에게 주어진 형벌이다.
제44조는 개인의 행동에 국한한 경우라면,
제45조는 집단항명을 정의하고 있다. “제45조(집단항명) 집단을 이루어
제44조의 죄를 범한 사람”이라고 개념을 정하고 있다.국군은 개인에게 또는 집단이든 상관은 정당한 명령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군형법 제44조가 입증하고 있다. 즉 이는 정당한 명령이 아닐 경우에는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법률이다. 그런데 군사주의 문화가 팽배한 우리 사회는 군인은 무조건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견지가 깊숙이 내재한 속에서 제14연대 군인의 출동명령 거부 행동에 대해서 생각해볼 가치도 없이 ‘반란’이란 족쇄를 채웠다.
극단적인 국가주의와 반공주의 광기어린 프레임이 작용한 현상이다.상하 위계질서가 군인과 다르지 않은 경찰을 통해 제14연대 군인의 행동이 정당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항명죄에 해당한 행동이었는지 판단해보고자 한다. 다시 1980년 5월 광주를 떠올려 보자. 당시 전남경찰국장(현 전남지방경찰청장)이었던 안병하는 계엄사령관의 “경찰이 무장하고 도청을 접수하라”는 명령을 거부하였다. 오히려 안 국장은 “경찰은 시민군에 형제, 가족도 있을 테고 이웃도 있는데 경찰이 무기를 사용하면서까지 할 수 없다”면서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에 두었다.
당시 신군부는 안병하 국장을 1980년 5월 26일 직위해제하고 후임에 송동섭 치안본부 작전과장을 전남경찰국장으로 발령하였다. 안병하 국장은 지휘권 포기 및 직무유기 혐의로 체포되어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8일간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그 고문의 후유증을 겪다 1988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1980년 전남도경 국장 안병하는 당시 행동이 정당하게 인정되어 2006년에 국가 유공자로 인정되었으며, 경찰 사상 처음으로 2017년 올해의 ‘대한민국 경찰 영웅’으로 선정했고, 경무관에서 치안감으로 추서하였다.
1980년 당시에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했던 사람이 이제는 국가유공자이며, 대한민국 제1호 ‘경찰 영웅’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1980년 당시 안병하의 ‘항명’은 정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명령을 내린 자들은 처벌되었다. 부당한 명령에 대한 역사의 심판이었다.여수사건 당시의 광경3) 국군 수뇌부는 제주도 상황을 어떻게 인식했는가?세 번째, 당시 국방부 수뇌부가 제주도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봐야 할 것이다.
6월 18일 박진경 암살 이후 새로 부임한 최경록 제11연대 겸 제9연대 연대장은 임무를 마치고 수원으로 귀환하면서 담화를 남겼다. 그 담화는 “제주도 사태 수습에 있어서 무력 해결로써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함께 귀환한 김용주 제3대대장은 제주4・3항쟁의 상황과 원인으로 “부락에는 가축만 남아 있고 대개가 산으로 도망하고 없다. 이는 경찰의 탄압과 폭도들의 유인이 원인이다”고 하였다. 폭도들의 유인도 있었겠지만, 경찰의 탄압으로 제주도민이 산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최경록 연대장의 당시 제주도 상황 인식은 한 신문의 사설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사설을 요약하면 “단순히 무력에 의한 토벌 그것만으로는 해결을 기약키 어려운 점은 현지의 국방경비대며 경찰의 책임자가 누누이 지적하였다”면서 “일찍부터 정치적 비상수단을 베풀 것을 군정 당국에 경고한 바 있었다”고 하였다. 특히 군의 토벌작전은 최후 수단이 되어야 하며, 이는 비상대책을 마련하여 병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군의 행동은 어디까지 동원된 본정신과 애족애국의 군 본래의 사명에서 사건 수습의 주도적 기능을 발휘케 하여야 할 것이었다”고 강조하였다.제주도 주둔 제9연대는 부산 제3여단에서 1948년 8월 8일에 광주 제5여단 예하부대로 소속이 바뀌었다. 제5여단장 김상겸 대령을 대리하여 참모장 오덕준(吳德峻) 중령은 8월 30일 제주도에 도착하여 제주 상황을 점검했다.
그는 제주도에서 기자들과 간담회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9연대가 제5여단 관하로 소속된 후 본도 순시와 아울러 본도 사태를 조속히 해결코자 함이 본관이 내도한 제일 목적이다. 제주도 사태는 어느 정도 수습되고 있으므로 군으로서는 사태 수습의 방법을 완화책에서 구할 것이며, 그 단계로 선무 등을 적극 전개하며 동요 중에 있는 도민들의 민심을 수습코자 하고 있는데 벌써 군의 의무반이 농촌에 나가서 활동을 전개한 결과 지방의 민심 수습에 현저한 성과를 얻었다(동아일보, 1948년 9월 7일). 오덕준은 8월 30일 비행기로 제주도에 도착, 일주일간 제주도 사태에 대한 보고와 함께 현지를 시찰하며 상황을 파악하였다.
오덕준이 본 제주도는 어느 정도 수습되고 있었다. 군은 선무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방법이라고 했다. 군 의무반 등이 농촌에서 선무활동을 전개한 결과 현저한 성과를 내는 것을 오덕준은 확인하였다. 강경 진압작전보다 선무활동의 전개를 통해 제주도 상황을 수습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파악하였다. 또한 오덕준은 “도민들의 왕성한 근로정신은 모두가 본받아야 할 점이다. 나는 앞으로 건군에 있어 근로정신을 모범하도록 할 작정이며 광주로 돌아가 제주도에 대한 인식을 철저하게 할 것이다” 하면서 제주도민의 왕성한 근로정신에 큰 감동을 하였다. 오덕준이 본 제주도 상황은 군인을 투입할 이유가 전혀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9월 초순으로 들어서면서 제주도는 유격대의 활동이 재연될 기미가 나타났다. 국방부에서는 육군 총참모장 정일권(丁一權) 대령과 해군 총참모장 김영철(金英哲) 대령을 10월 1일 현지로 파견하였다.
5일 동안 현지를 시찰하고 돌아온 정일권 대령은 “제주도의 현 사태는 예상했던 것보다도 평온하다”고 제주 상황을 전했다. 유격대의 치고 빠지는 전투(빨치산전)가 9월 초순부터 숫자상으로 많아졌지만, 평온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렇게 큰 문제로 보지 않았다. 정일권은 군대가 제주도에 파견되어 있으면서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음을 국민에게 미안해하면서 조속히 해결하겠다는 약속도 덧붙였다.만성리 입구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4. 마무리하면서당시 제주도에 다녀온 국방부 군 수뇌부는 제주 상황을 낙관적으로 적시하였다. 특히 제주도 제9연대의 상급부대인 제5여단 오덕준 참모장의 경우 제주도민의 왕성한 근로정신을 육지에서도 적용하겠다는 의지까지 피력하였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굳이 군대를 꼭 제주도에 출동시켜야 할 상황이었는지를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제주도 상황이 급박할 정도의 사회 안녕질서 유지에 국군의 투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면, 정부는 비상조치를 발동했을 것이다. 즉 계엄령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어떤 비상조치도 없이 초토화 작전에 돌입한 것이다.제14연대의 제주도 출동은 법률적인 문제를 따져도 모순의 연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이승만 정부는 제14연대를 제주도에 출동시켜야만 했던 것일까? 병사위원회는 자신들의 제주도 출동을 제주도 동포의 학살로 보았다.
이미 박진경 중령을 내려보내 강경진압작전으로 수많은 제주도민이 학살된 전철이 반복될 것이라는 징조, 아니 그것보다 더 훨씬 무법적인 초토화 작전이라고 인식하였다.자국민을 학살하라는 제14연대 제주도 출동은 헌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국군의 사명과 전혀 부합하지 않은 반헌법적인 명령이었다. 따라서 제14연대 제주도 출동명령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최초의 반헌법적인 사례였다는 것을 역사가 기록해야 할 것이다. 역사는 기록하고 기억할 때 교훈을 얻을 것이고, 심판이 가능할 것이고, 새로운 창조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자연이 준 선물, 아름다운 여수의 섬

저 멀리 수평선에 떠 있는 엄마섬과 애기섬 사이로 새해 첫날의 붉은 해가 솟으면, 수평선을 기준으로 붉은 태양과 여명이 채 가시지 않은 오동도의 실루엣이 조화를 이루는 환상적인 광경이 펼쳐진다. 새해 첫날, 여수 사람들은 물론이고 여수를 찾은 관광객들이 왜 자산공원을 찾는지 이유를 알 수 있다.
자산공원을 내려와 오동도 방파제를 걸으면 예전과 사뭇 달라진 보도를 만난다. 우레탄으로 산뜻하게 포장된 인도를 따라 방파제 벽에 그려진 형형색색의 동백과 바닷게, 물고기의 문양이 관광객을 반긴다. 768m의 방파제를 지나 오동도를 들어서면 섬 전체를 덮고 있는 3천여 그루의 동백나무로 이루어진 동백림이 눈길을 잡는다. 오동도의 자랑이기도 한 동백나무는 10월부터 개화를 시작해 겨울에도 붉은 꽃을 볼 수 있으며, 2월 중순경에는 약 30% 정도 개화하다가 3월 중순경에 절정을 이룬다.
오동도는 동백과 신이대 등 193여 종의 울창한 희귀 수목과 기암절벽이 어우러지며 천혜의 절경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울창한 숲 사이로 잘 닦인 산책로, 푸른 잔디로 곱게 조성된 5천여 평의 야외광장,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는 음악분수대, 2012여수세계박람회 홍보를 위한 박람회홍보관, 새로 개축하여 2002년에 준공된 오동도등대 등이 여행객들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해안의 아름다운 경관과 병풍바위·용굴·지붕바위 등을 구경하기 위해서는 오동도 입구 선착장에서 출발하는 유람선이나 모터보트를 타야 한다. 배를 타면 오른쪽으로는 돌산도의 아늑한 섬 정경이 시야를 압도하는데, 새하얀 포말이 뱃전을 때리면 오동도를 소재로 한 수많은 시구절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신병은의 「그 섬이 있다-오동도」도 역시 그런 시 중의 한 편이다.
"당신, 밝게 열어주는 숲의 마을이라죠/ 웃자란 그리움이 동백꽃 빨간 입술로 열리는 날에/ 동박새 낯익은 울음 또르르 또르르 벼랑 아래로 구르다/ 바람의 갈피를 세운다죠/ 아주 가끔씩 스스로 그늘이 되어 문득 고요해지는 그 섬,/ 맨발로 맨발로 걷다보면 마음 먼지 빨갛게 열려 온다죠"
오동도의 새로운 자랑거리인 음악분수대는 한여름밤에 절정을 이룬다. 여수 신항에서 실려 오는 갯내음을 맡으며 자전거를 타고 오동도방파제를 달리면 호수 같은 내해에 오색찬란한 불빛들이 밤하늘의 별보다 더 영롱하게 하나 둘씩 물 위에 떠오른다. 오색찬란한 조명을 한껏 받은 물줄기는 부드럽게 좌우로 흔들리다가 때로는 격정적으로 밤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관객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는데 답례를 해야 할 지휘자는 보이지 않는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연인끼리 모여 앉은 야외음악당엔 밤이 깊을수록 사람들이 자리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어느새 바다 위에서 맞은편 도시의 야경이 거울처럼 비치며 보름달이 휘황찬란하게 걸린다. 음악을 듣는 동안 누군가 경포호의 달을 남해로 옮겨 놓은 듯하다.
"박제된 복어의 나뒹구는 은빛 눈썹에/ 진눈깨비 내릴 것 같다/ 더러는 밀물로 선 간끼 든 사랑으로/ 햇살의 깊이만큼 깎여지는 바다에/ 흰빛 갈매기의 낮은 휘파람 소리로/ 겸손하게 출렁이는 여수항/ 닻을 올린 어선하며 어구의 깊은 잠수/ 일어서고 있다"
여수항이 여수반도와 돌산도를 연결하는 돌산대교는 각종 농수산물의 육상 물류 운송뿐만 아니라 오동도, 향일암, 방죽포해수욕장 등 여수 주변 관광벨트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다리이기도 하다. 또 돌산대교 바로 앞에 위치한 돌산공원에 오르면 아름다운 여수항과 여수의 시가지 주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으며, 주변에는 장군도와 이순신 장군이 발명했던 거북선 모형(추정되는 실제 크기)이 있어 관광객들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향일암은 전국 4대 관음 기도처 중의 한 곳으로 전국의 많은 신자들, 특히 경상도 지역의 불자(佛者)들이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해안을 따라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은 속세의 번뇌를 털고 중생을 위해 떠나는 구도의 길과 같이 험난하고 에돌아가는 길이다. 남해 수평선의 일출 광경이 장관을 이루어 향일암이라 하였으며, 또한 주위의 바위 모양이 거북의 등처럼 갈라져 있어 ‘영구암’이라 부르기도 한다.
향일암은 원래 644년인 백제 의자왕 4년 신라의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로 당시는 원통암이라고 불렀다. 958년인 고려 광종 9년에 윤필대사가 금오암으로 고쳐 부르던 것을, 조선 후기인 1715년(숙종 41)에 인묵대사가 향일암이라 개칭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충무공을 도와 싸웠던 승병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현재 향일암은 대웅전과 관음전, 칠성각, 독서당, 취성루 등이 복원되어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향일암은 금오산의 기암절벽 사이, 동백나무와 아열대 식물에 둘러싸여 있다. 마을에서 향일암을 오르는 산길은 제법 가파른 편으로, 암자 근처에 이르면 집채만한 바위 두 개 사이로 난 석문을 통과해야 하는 등 아기자기한 등산 코스가 섬 여행의 운치를 더해 준다. 임포마을 입구에는 수령이 5백 년 정도 된 동백나무가 있고, 뒷산인 금오산에는 흔들바위와 부처바위가 있다.
암자 뒤편 금오산 정상에 오르면 오밀조밀한 섬과 잘 어우러진 맑은 남해바다의 섬세함을 볼 수 있는데, 한려수도의 절경을 압축해 놓은 듯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하다. 특히 남해 수평선의 일출 광경은 장관이어서 평일은 물론 새해 첫날이면 일출을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들로 분비는 해맞이 명소로도 유명하다.
금오도 여행은 여수 중앙동 물양장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을 타고 함구미에 내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함구미에서 매봉산 산록 안부까지 오르노라면 다도해의 많은 섬들이 호수 위에 떠 있는 섬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길목 어귀 마을 돌담길이 유독 정겹게 느껴지는데, 한국 영화 「인어공주」를 촬영했던 그 돌담길이다. 돌담 위로 고개를 내민 담쟁이넝쿨이 지나는 길손들을 정겹게 반기는 듯하다.
멀리 신선대를 바라보며 걷는 옛 송광사 터로 가는 길에 펼쳐진 푸른 망망대해가 여행길의 고단함을 한방에 날리고도 충분하다. 송광사 터에서 잠깐 다리쉼을 하고 매봉산으로 가다 보면 곳곳에 초분이 보인다. 남해안 섬지방에 아직도 남아 있다던, 그야말로 전설처럼 들리던 초분을 대하면 섬뜩함 때문에 발길이 잠시 멈칫거린다.
금오도는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곳으로, 금오도 여천마을의 조개더미 유적은 유송리 여천마을 동쪽 바닷가에 위치한다. 현재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조개더미층이 드러난 면적은 동서 30m, 남북 15m 정도의 작은 규모이다. 조개더미층은 흑갈색 자갈층 위에 형성되어 있으나 눈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금오도는 조선시대에 궁궐을 짓거나 보수할 때, 혹은 임금의 관(棺)을 짜거나 판옥선 등의 전선(戰船)을 만들 재료인 소나무를 기르고 가꾸던 황장봉산(黃腸封山)이었다. 소나무의 중요성 때문에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던 기간도 길었는데, 봉산으로서 금오도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나타난다.
남면의 면소재지가 있는 우학리에는 봉산이었던 금오도가 1885년 민간인들이 들어와 살 수 있도록 국유지에서 민유지로 바뀐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18년에 세운 ‘금오도 개척 100주년 기념비’가 면사무소 옆에 나란히 서 있다. 또한, 내외진마을 중앙에 위치한 한국전력공사 남면서비스센터 안에는 금오도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78년 12월 5일 세운 ‘남면전화점화기념비’도 볼 수 있다.
남면 우실마을에는 여남초등학교와 병설유치원, 여남중학교·여남고등학교 등 교육기관이 자리잡고 있다. 여남초등학교는 1921년 우학리교회에서 세운 개량 서당으로 시작해 4월 4일 남면사립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꾸었고, 1981년에는 병설유치원을 설치하여 유치원과 초등 교육의 중심이 되고 있다. 여남중학교는 1965년 12월 24일 개교하였고, 여남고등학교는 여수시의 도서지역에서 일반계 고등학교로는 처음으로 1985년 4월 18일에 세워졌다.
금오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학교를 세우는 일이 쉽지 않았으나, 몇몇 사람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무사히 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학교를 세우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의 고마움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는데, 우실마을에 있는 ‘박재규선생선덕불망비’와 ‘진명조남식선생송덕비’가 대표적이다.
한편, 금오도는 항일운동과 관련된 사건이 많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1936년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1938년 9월에 열린 제27회 한국 기독교의 장로회총회에서 강압적인 신사참배가 결정되자 당시 우학리교회 목사 이기풍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일로 이기풍은 여수경찰서에 투옥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기 직전 금오도로 강제로 옮겨졌으며, 1942년 6월 20일 일요일 아침 우학리교회 목사관에서 죽었다.
송고마을은 1879년 소라면 달천에서 살고 있던 김양단이 조정의 명을 받고 금오도에 사슴사냥을 나왔다가 이곳을 지나던 중 산수가 수려하여 전 가족을 옮겨 정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 밀양박씨와 경주김씨 등이 이주해 옴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었고, 마을 전체가 소나무로 우거져 ‘솔고지’라 부르다가 송고(松高)로 이름을 바꾸었다.
송고마을에는 금오도를 비롯한 많은 섬에서 이어내려 왔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린 당제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송고마을에서는 당제를 모시는 것을 ‘제만 모신다’라고 부르는데, 상당과 하당, 그리고 선창에서의 헌식제로 모두 세 곳에서 이루어진다. 당제는 음력 정월 초하루 자시부터 시작되는 상당제와 이튿날 오전에 행해지는 헌식제까지 이틀 동안 치러진다.
안도선착장에 내리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10m 높이의 풍향대이다. 바람의 방향을 알려 주는 풍향대는 1918년 안도어업협동조합에서 처음 세웠다. 그후 세월이 흘러 낡아지자 20여 년 전에 보수를 했지만, 녹이 슬고 제구실을 못하자 GS칼텍스에서 제작해 준 것이다. 기단부에는 ‘섬마을 사랑’이라고 새기고 있는데, 1995년 씨프린스호 기름유출 사고로 직접적인 피해를 보았던 섬 지역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 같다.
풍향대를 지나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정자나무와 팔각정이 있으며, 그곳에1896년 새롭게 설치된 돌산군의 초대 군수였던 조동훈(趙東勳)이 남면 일대를 순시하다 안도에 들른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높이 90cm, 폭 40cm 크기의 직사각형 사암에 ‘호남한위 팔역요충(湖南捍衛 八域要衝)’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훼손된 일부분은 시멘트로 메웠다.
안도항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아주 좁아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섬 가운데로 들어가면서 S자를 이루며 폭이 넓어져 천연 호수를 형성하고 있다. 밀물 때는 큰 배도 마을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으며, 1959년 사라호 태풍을 제외하고는 태풍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천혜의 요새이다. 이러한 지형 조건 때문에 옛날에는 해적이나 왜구의 근거지였다는 소문이 있기도 하다.
안도항에서 마을을 돌아 여안초등학교와 여남중학교 안도분교장을 지나면 이야포해수욕장에 도착한다. ‘이야포’라는 땅 이름은 어부들이 고기를 잡으면서 노동의 힘겨움을 이기고, 서로 호흡을 맞춰 노동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이야 이야”라고 가락을 맞추는 소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야포는 ‘이앳게’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보아 마을 뒤편에 있는 바닷가라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이야포에는 오랜 세월 바위가 파도에 갈라지고 서로 부딪쳐 닳아진 작고 고운 자갈밭이 있다. 자갈 사이로 들어 온 바닷물이 다시 내려가면서 내는 소리는 인간이 흉내내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준다.
안도마을 동쪽에는 백사장이 발달되어 해수욕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안도해수욕장은 모래가 맑고 깨끗하여 백금포(白金浦)라고도 부른다. 해수욕장과 몽돌해안이 있는 안도는 여름철 또다른 매력을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서고지마을은 안도의 서쪽에 위치한 ‘곶’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앞에 있는 섬은 모양이 가마솥을 닮아 ‘가마도’라 부르다가 ‘가마부(釜)’ 자를 써서 ‘부도(釜島)’라고 했다. 안도 상산봉에서 본 부도의 아름다움을 이옥근은 「안도에서 시를 줍다」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이른 새벽/ 여수시 남면 작은 섬,/ 안도의 앞바다가 시를 쓰면/ 나는 미명을 딛고 상산봉에 올라/ 그 시를 줍는다.// 육지에서 온 이는/ 그 시를 낚싯대로 낚아 올리고/마을 사람들은/ 그 시를 주워 집으로 나르고/ 바다로 내려간 배들은/ 그 시를 그물로 끌어내기도 한다// 섬으로 올라 온 시들은/ 동백나무에 걸려 꽃으로 피어나고/ 아침상에 올라가 풍성한 반찬이 되어,/ 파도처럼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 속에/ 분교 운동장 구석구석에 나뒹군다.// 나는 오늘도/ 그 시를 주워/ 불꽃 가슴으로/ 그리운 이름을 적어/ 우체통에 넣는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음을 알려 주는 조개더미 유적이 있는 안도는, 9세기경 일본 승려 엔닌[圓仁][794~864]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땅 이름이 기록된 곳이기도 하다. 838년 6월 13일 중국 당나라의 불교를 배우기 위해 선발된 일본 승려 엔닌은 당나라에 파견될 사신의 배를 타고 지금의 큐슈 후쿠오카를 출발하였다.
엔닌은 천태종의 발상지인 천태산 순례가 좌절되자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에 머물며 당나라 불교를 배울 방도를 찾다가, 840년 불교 성지 가운데 하나인 오대산 대화엄사에서 고승들의 가르침을 받고 불교 유적을 순례하기 시작하였다. 840년 8월, 당나라 수도 장안에 도착한 엔닌은 자성사라는 절에 머물면서 일본에 없는 불경을 손으로 베끼어 쓰고, 고승들을 찾아 불교의 도리를 깨우쳤다. 그러나 장안에 머물기 2년째 되던 해에, 당시 황제였던 무종(武宗)이 행한 대대적인 불교 탄압에 845년 5월 강제로 일반인으로 환속(還俗)하게 되었다.
845년 5월 15일, 엔닌은 그동안 베껴 쓴 불경과 그림 등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신라 사람으로서 통역을 담당한 유신언, 관리 장영 등의 도움을 받아 적산법화원에 머물며 귀국선을 구하였다. 그리고 유신언과 김진 등의 도움을 받아 847년 7월 20일 귀국길에 오른다. 엔닌은 8월 15일 일본으로 돌아가는 배 위에서 다시 머리를 깎고 승복으로 갈아입었으며, 우리나라의 남해안을 거쳐 9년 3개월 만인 9월 17일에 후쿠오카로 귀국하였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엔닌이 9년 이상을 여행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 책의 847년 9월 8일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오전 4시경 바람이 없었으나 출발하였다. 포구를 얼마쯤 나가니 갑자기 서풍이 불어와 곧 돛을 올리고 동쪽으로 향했다. 마치 영묘한 이치가 있어 우리를 도와주는 것 같았다. 산들이 있는 섬 사이를 가니 남북 양쪽은 다 산과 섬으로 겹겹이 겹쳐져 있어 태연하게 보였다. 오전 10시가 되려고 할 무렵 안도(雁島)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 이곳은 신라의 남쪽 땅으로 궁궐[內家]에서 말을 기르는 곳이다. 동쪽 가까이에 황룡사의 장원이 있으며 띄엄띄엄 인가 두세 군데가 보인다. 서남 방향에는 멀리 탐라도가 보인다. ……"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책으로 여수 지역과 관련된 땅 이름이 나오는 책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 고려 전기인 1145년(인종 23)에 편찬된 『삼국사기(三國史記)』이다. 『삼국사기』에는 원촌현(遠村縣)과 돌산현(突山縣) 등 여수 지역의 옛 행정구역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보다 3백여 년 전에 기록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안도(雁島)’라는 땅 이름이 나타남으로써, 안도가 당시에는 우리나라와 중국을 오가는 항로에 있으면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남쪽으로 탐라, 즉 제주도가 보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상산에 올라가면 맑은 날 제주도를 볼 수 있는 것도 엔닌이 현재의 안도에 기착했음을 알려 주는 증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거문도에서는 세 개의 섬이 병풍처럼 둘러쳐서 1백만 평 정도의 천연 항만이 호수처럼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을 도내해(島內海)라고 부른다. 큰 배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항구 구실을 하고 있는 이러한 입지적 여건 때문에 거문도항은 예부터 빈번히 열강의 침입을 받아왔다. 거문도에 있는 영국군 묘지도 그 흔적의 하나이다.
군함 6척과 수송선 2척으로 구성된 영국 해군선단이 거문도를 점령하고 기지와 항구를 구축한 것은 1885년(고종 22) 4월이었다. 그 후 영국군은 거문도에 2년간 머물렀는데, 이러한 행위는 우리나라 주권을 무시하는 도발행위로 기록되어 있지만 당시 거문도 주민들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철수 당시 거문도에는 영국인의 묘지가 7~9기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3기만이 확인될 뿐이다. 남아 있는 묘지 2기는 거문도 뒤편 산령에 자리잡고 있다.
거문도는 섬 일대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곳으로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그 중 거문도등대는 거문도를 찾는 관광객이 여행하는 필수 코스라고 할 수 있다. 여객선 선착장이 있는 거문리에서 등대까지 걸어서 약 1시간 남짓 걸리는데, 삼호교를 거쳐 유림해수욕장을 벗어나면 물이 넘나드는 ‘무넘이’를 지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바다의 기암절벽을 낀 1.2㎞ 거리의 동백나무 숲이 우거진 산책로가 펼쳐진다.
거문도등대까지 오르는 길은 산책로로도 손색이 없다. 길을 따라 늘어선 동백나무숲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울창하고, 초입을 5분 정도 오르면 완만한 경사로 이어져 아이들과 함께 올라도 무리가 없다. 약 20분간 산을 타면 등대가 나타나는데, 탁 트인 바다를 배경으로 잔디가 고운 별장 같은 관사를 만날 수 있다. 또 절벽 위 관백정에서 내려다보이는 남해 바다가 진풍경을 연출한다.
대삼부도에는 주민들은 거주하지 않고, 폐사(廢寺)와 폐가옥 몇 채가 있는데, 이곳에서 염소를 키우던 동도 주민이 일시적으로 거주하던 곳이다. 대삼부도와 소삼부도는 현재 전라남도교육청 재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갯가는 원래 거문도 동도리 어촌계의 재산이었으나, 해방 후 어려웠던 시절 동도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들의 급료를 마련하기 위해 동도 주민들이 자기들의 재산이었던 삼부도를 학교에 양도한 것이다.
대삼부도는 1980년대 ‘박종철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고문경관 ‘이근안’이 도피 생활을 했던 섬으로도 유명하다. 현재는 스킨스쿠버 동호회를 비롯한 관광레저 스포츠 활동이 성하다. 소삼부도에는 무인 등대가 있으며, 주위에 있는 ‘검등여’는 1948년 여순사건 때 좌익사상을 가진 거문도 젊은이들이 그곳에서 처형되어 바다에 수장된 슬픈 현대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거문도등대에서 해뜨는 방향으로 39개의 무인군도로 이루어진 백도가 보인다. 상백도와 하백도를 포함한 상백도·하백도일원은 1979년 12월 명승 제7호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백도는 특히 여름 관광지의 대표적인 명소로 천연기념물 제15호인 흑비둘기를 비롯하여 팔색조, 가마우지, 휘파람새 등 30여 종의 희귀 조류가 서식하고 있다. 또한 풍란, 석곡, 눈향나무, 후박나무, 동백 등 아열대식물들이 즐비하며 353종의 식물분포와 연평균 수온이 섭씨 16.3℃로 큰붉은산호, 꽃산호, 해면 등 170여 종의 해양생물이 서식하고 있어 그야말로 생태계의 보고라 할 수 있다. 거문도에서 비정기적으로 유람선이 출발하며, 섬 주위를 관람하는 데는 약 40분 정도 소요된다.
백도라는 이름은 대략 백여 개의 섬이 모여 있어 백도라 하기도 하고, 백에서 하나가 모자란 99개여서, ‘일백백(百)’ 자에서 ‘한일(一)’ 자가 빠진 백도(白島)라 하기도 한다. 매바위와 병풍바위가 있는 상백도와 옥황상제의 아들이 바위로 변했다는 서방바위·각시바위·거북바위가 있는 하백도 일원에는 각종 해식애와 시스텍이 발달해 있어 가히 해식지형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백도는 생태계 파괴 방지를 위해 섬에 내릴 수 없어 배를 타고 돌아보는 것만 허용된다. 또 날씨가 안 좋으면 배가 운항하지 않으므로, 그 자태를 본다는 것은 행운이 따라 줘야 가능한 일이다. 날씨가 맑을 경우, 보통 하루에 1회~3회 정도 운항한다.
백야도는 여수에서 남서쪽으로 18.5㎞ 떨어져 있다. 원래는 호랑이같이 사나운 사람이 산다 하여 백호도라 불렀으나, 1897년 돌산군 설립 당시 백야도로 개칭되었다. 약 4백 년 전 장흥고씨가 들어와 정착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백호산에 봉수대와 백야산성이 있었고, 말을 사육하던 백야목장이 있었다. 짐막골해수욕장과 화백해송림 등 아름다운 경관으로 해마다 여름에 많은 피서객들이 찾고 있으며, 특산물로는 향기 좋은 유자가 유명하다.
백야도의 야생화로는 길가에 핀 노란 고들빼기, 우리나라 토종인 비목, 팔만대장경 목판을 만드는 데 사용됐다는 산벚나무, 환경의 지표식물이기도 하고 줄기가 하얗게 보이는 국수나무에 이어 일명 멩감나무라 불리는 청미래덩쿨 등이 서식한다. 청미래덩쿨의 뿌리는 굵고 구불구불 옆으로 뻗어 토복령으로 불리며 성병에 효험이 있는데, 수은의 해독제로도 사용된다.
줄기가 질겨서 소의 코를 꿰뚫는 데 사용되어 ‘코뚜레나무’라고도 불리는 노간주나무의 열매인 도송실은 향이 좋아 드라이진의 원료가 된다. 숙성이 되면 럼주가 탄생한다. 한편, 노간주나무의 줄기에는 가시가 박혀 있어, 섬사람들은 쥐구멍에 거꾸로 꽂아두어 쥐 퇴치용으로 사용했다.
산길 양 옆에는 ‘결초보은(結草報恩)’이라는 고사성어를 낳은 수크렁이 널려 있다. 수크렁은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지낸 대부분의 어른들에게는 추억을 되살려 주는 재미난 풀이다. 풀 끝을 한 움큼 잡아 서로 옭아매 놓고 친구를 일부러 건드려 쫓아오는 친구가 걸려 넘어지도록 했던 추억의 풀이다.
백야도등대는 여수시 화정면 백야리 산 34번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1928년 12월 대한제국 세관공관부 등대국에 소속되어 최초로 밤바다를 밝혔다. 현재는 1997년 5월 이후 여수지방해양수산청 백야도항로표지관리소로 불리고 있다. 백야도의 명물 백야대교는 여수시와 고흥군을 잇는 11개 연륙교와 연도교 중 첫 다리로서, 2005년 4월 14일에 준공됐다. 여수시 화양면 안포리와 화정면 백야리를 연결하는 백야대교는 길이 325m, 너비 12m로 착공된 지 5년 만에 완공되었으며, 주탑 없이 아치로 상부를 지탱하는 주전자 손잡이 모양의 닐슨 아치교로, 교각간 거리가 국내 최장인 183m이다.
사도는 본도와 추도, 중도, 시루섬[증도], 장사도, 나끝, 연목 등 일곱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 2월 영등일 등 두세 차례에 걸쳐 2~3일 동안 ‘물 갈라짐[일명 모세의 기적]’ 현상이 일어나는데, 길이 1.5㎞, 폭 30m의 길이 생겨나 일곱 개의 섬들이 ‘ㄷ’자형으로 연결되는 장관이 연출된다.
그뿐만 아니라 본섬의 선착장에서 20분간 해변도로를 따라 걸어 들어가면 마주치는 중도의 기암들도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순신의 눈에 띄어 거북선을 구상하게 했다는 거북바위, 충무공의 전설이 어린 시루섬의 장군바위, 맑은 물이 솟아나는 젖샘바위와 멍석바위, 남산 야외음악당을 방불케 하는 높이 20m의 동굴바위, 사람의 옆얼굴을 닮은 바위, 고래바위를 비롯해 용꼬리를 닮은 용미암 등 기암마다 갖가지 전설이 숨어 있어 더욱 흥미롭다.
그밖에 양면이 바다로 트여 있는 양면바다해수욕장, 고운 모래밭이 일품인 사도해수욕장, 해변 가득 피어난 들꽃이 눈길을 끄는 본도해수욕장 등 작은 섬 안에 세 개의 해수욕장이 자리잡고 있다. 가족 단위 피서객을 위해 새롭게 조성된 벚나무공원의 언덕에 앉으면 바다 건너편의 낭도까지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사도와 추도 간에 공룡발자국화석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공룡발자국화석 중 가장 길다고 한다. 최재환은 이러한 사도(沙島)의 아름다운 대자연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사도(沙島)에서」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배를 띄운다./ 포효(咆哮)하듯 쫓고 쫓기는 이리떼들/ 한식경 지나면/ 바람이 깃빨처럼 펄럭이는 안개숲 사이/ 개벽(開闢)일까, 창세(創世)의 길이 열린다./ 삶이 여울지듯/ 구비구비 발자국도 선명한 것을/ 잠룡(潛龍) 드디어 승천하능갑다./ 고샅에 깔린 찡한 그림자들/ 모두가 살붙이라./ 가끔 낯익은 얼굴들이 선수(船首)를 스쳐가고/ 삿대를 비껴 쥐고 잊혀진 흔적들을 뒤적이며/ 어둠 속에도 내일이 있음을/ 늘 감사한다."
여자도는 여수 시내에서 동쪽으로 약 44.5㎞ 지점에 있는 여자만 중앙에 있는 섬으로, 좁은 수로를 사이에 두고 대여자도와 소여자도로 나누어 있다. 여수시 소라면 섬달천에서 배를 타고 약 30분 정도 가면 도착한다. 대여자도에는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자체 전력을 생산하는 한국전력발전소가 있어 여여자도까지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여자도에는 물 사정은 좋지 않아 빗물을 받아 식수로 이용하고 있다.
소여자도는 마을 입구부터 꽃밭이 가꾸어져 있다. 이곳에는 소나무를 당산나무로 활용하고 있으며, 마을 뒤쪽으로 가면 1968년 개교했다가 2007년 3월 1일 폐교된 소라초등학교 송여자분교장 터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소라초등학교 송여자분교장 터 주변을 ‘왜막골’이라고 부른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그곳에 거주하면서 새우와 활어를 중매하였기 때문이다. 소여자도에서 대여자도로 가는 중간에는 ‘검등여’가 있는데, 여름부터 초가을 사이 감성돔 포인트로 유명하다.
해안선을 따라 도로가 발달하고, 청석포와 모전의 몽돌해수욕장과 낚시터가 유명해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는 개도는, 1994년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여덟 군데의 조개더미가 발견되어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말해 주고 있다. 발견된 유물로는 덧무늬토기, 눌러찍은무늬토기, 무늬없는토기 조각과 돌칼, 돌도끼 등이 있다.
『여산지』에는 조선시대 개도에 목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화산마을에는 높이 30m, 둘레 10m 정도의 느티나무 노거수(老巨樹)가 있는데, 400년 이상 자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를 ‘마녀목(馬女木)’이라고 하며 그에 대한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또한 월항마을에는 장수감이 될 아이가 부모의 손에 의해 수장(水葬)되었다는 ‘용바구[용바위]’에 얽힌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개도 화산마을에는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민속으로 천제(天際)와 당산제가 있다. 천제는 음력 3월 1일 자정 무렵에 지내고, 당산제는 3월 2일 오후 5시쯤 지낸다. 천제는 천제봉에서 지내는데, 돌로 쌓아 만든 넓은 제단이 있으며, 마을사람들은 이곳을 ‘상당’이라고 부른다. 중당 아래 산 중턱에는 ‘기우집’이 있어 이곳에서 제를 모시기 전에 몸과 마음을 닦고 정성을 드린다. 당산제는 마을 옆에 있는 ‘천제당’이라는 당집에서 행해지며, 이곳을 하당이라고 부른다. 천제당 내부에는 제기가 보관되어 있고, 지난 해 제물로 쓴 명태 한 마리가 매달려 있다고 한다.
개도에 있는 전통가옥으로 ‘강석원 가옥’이 있는데, 이 가옥은 사각형의 대지에 동쪽으로 대문을 내고, 안쪽에 남서향으로 안채를 놓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 가옥을 ‘도가집’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술을 만드는 곳, 즉 주조장을 의미한다. 안채의 가옥구조는 정면 4칸, 측면 3칸에 전퇴가 있고, 왼쪽으로부터 부엌-방-대청-건넌방 순으로 각각 1칸씩 자리하고 있다. 가옥의 전체 구조는 ‘ㄷ’자 모양이다.
개도 여석마을은 옛날 숫돌의 원료가 많이 생산되었던 곳이다. 여석마을에서 동쪽 운구지마을로 가는 길에 두 개의 벅수가 세워져 있다. 이 벅수는 마을 어린이들이 질병에 자주 시달리자 그 원인을 귀신의 짓으로 생각하여 잡귀·잡신을 모두 마을 밖으로 쫓아내고자 동구 밖에 세운 것이라 한다. 1921년(辛酉年)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수 지역의 다른 벅수와의 연관성을 고려하면 훨씬 이전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벅수의 생김새로 보아 시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연상할 수 있다. 두 벅수는 모두 옛날 벼슬아치들이 썼던 모자나 군인들이 썼던 전립(戰笠)이 없는 민머리형이다.
개도의 특산품으로 유명한 것이 조선시대부터 만들어 내려 와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개도막걸리이다. 개도막걸리는 물이 좋기 때문에 부드럽고 깔끔한 맛을 지니고 있다. 생산과정이 기계화되면서 찌꺼기가 거의 없어 여성들이 특히 좋아하며, 많이 마셔도 다음 날 머리가 아프지 않는다고 한다.
여수시내에서 남서쪽으로 약 22.2㎞ 떨어져 있는 상화도와 하화도는 사도를 지나는 길목에 도열해 있다. 원래 진달래꽃과 동백꽃, 선모초가 많은 꽃섬이라 하여 상화도·하화도라고 불렀다. 숲이 울창하고 해안을 따라 기암절벽이 절경을 이루고 있는 섬으로, 봄에 꽃이 필 때 가장 아름다운 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