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시칠리아와 부속도서는 지중해에서는 가장 큰 섬으로 제주도면적의 약 14배다. 이탈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 사이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인 관계로 예부터 지배세력이 숱하게 바뀌어온 지역이며, 근래에는 리비아나 튀니지 등지의 난민들이 배를 타고 오는 관문으로 알려져 EU와 이탈리아정부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섬 대부분이 산악지대로서 지진과 화산 활동이 매우 격렬했으며, 유럽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인 에트나 산(3,261m)이 있으며, 동쪽의 카타리나 평야가 유일하게 넓은 평지이다.
온화한 기후로 관광 및 휴양지로 유명하지만, 농업과 관광업을 제외한 기간산업의 발달되지 않아 낙후된 곳이나 화산토가 만든 비옥한 토질로 농사가 잘 된다. 기원전 8세기에 이 섬에 식민도시를 세운 그리스인들은 포도재배와 와인제조기술을 전했고 아랍인들은 관개시설을 이용한 작물 재배법을 전수하여, 예부터 밀, 오렌지, 올리브, 아몬드와 포도 등 웬만한 식재료가 다 생산되며, 섬 근해에서 잡히는 참치 맛도 훌륭하여 저렴하고 맛있는 시칠리아 요리는 이탈리아 음식의 정수로 꼽힌다.
인구는 약 500만 명이며 GDP는 US$ 2만에 육박하며 남쪽으로는 시라쿠사에서 배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몰타 섬이 있으며, 이탈리아 본토로부터 불과 3.2 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아직까지 다리를 놓지 않아 본토에서 오가는 기차는 메시나 해협을 마주보는 본토 최남단의 산 지오반니 항구에서 그대로 페리에 옮겨 실려 30분 정도 걸리는 메시나 해협을 건너 메시나 항구에서 다시 팔레르모로 가는 기차와 시라쿠사로 가는 기차를 분리하여 연결된 철로에 다시 옮겨 타고 시칠리아를 달린다. 기차를 통째로 페리에 올려 바다를 건너는 노선으로는 여기가 세계에서 유일한 곳이다.
청동기 시대부터 미케네 문화와도 접촉하며 고유의 문화를 지녔던 시칠리아는 BC 8세기에 도래한 그리스인들이 낙소스, 시라쿠사, 제라 등의 식민도시를 건설하자, 원주민들은 내륙으로 밀려갔고, 그리스화된 해안 지역에는 그리스식 신전이 많아 ‘그리스를 보려면 시칠리아로 가라’는 말도 있다. 고대 로마 초기의 시칠리아의 동부는 식민도시인 시라쿠사의 지배하에 있었고 서부 지역은 카르타고의 통치를 받았다. 시칠리아 북부의 메시나와 시라쿠사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메시나는 동맹국이었던 로마에 지원을 요청하자 시라쿠사는 카르타고를 끌어들여, 결국 기원전 264년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여 기원전 241년 패전한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로마에게 양도하였다.
이처럼 시칠리아는 로마제국 최초의 속주가 되어 2세기 이후 로마의 곡창으로 번영했으나, 동서로 로마가 갈라지고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부터는 동코트의 지배를 받았다. 그후 비잔틴 제국이 반달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탈리아를 병탄하면서 다시 동로마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사산조와의 전쟁에 패하고 이슬람 제국의 발흥으로 비잔틴제국이 쇠퇴하면서 9세기 초부터 사라센의 지배가 시작되어 이후 200여 년간 팔레르모는 스페인의 코르도바와 더불어 아랍문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11세기중엽 북방의 신흥 세력인 노르만족이 남부 이탈리아 일대에서 패권을 놓고 싸우던 동로마, 이슬람, 독일, 교황 세력 모두를 격파하고 남부 이탈리아에 노르만 왕조인 시칠리아 왕국을 세우고 합리적인 체제로 왕국을 경영하여 시칠리아는 전성기를 맞았다.
중세왕국의 특징에 따라 단일혈통 왕국이 아닌 결혼과 상속을 통해 지배세력이 계속 바뀌면서, 신성로마제국의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왕위를 이어받은 시칠리아 왕국은 1442년부터 나폴리 왕국과 통합하여 세력을 확장했으나, 호엔슈타우펜 왕가가 반도 전체에 야욕을 보이자, 이를 거부한 교황은 프랑스의 루이9세의 동생인 앙주 샤를을 초빙해 호엔슈타우펜 왕가 대신 시칠리아 왕으로 삼았다. 앙주 샤를은 비잔틴제국을 침략 비용을 마련키 위해 국민에게 물린 가혹한 세금으로 반감으로 야기된 반란으로 시칠리아에서 쫓겨났고,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 왕이 되었다.
이후 스페인계 왕국(합스부르크 왕가)이 왕위를 계승해 오다가, 1734년 스페인의 국력이 기울자,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을 거쳐 나폴레옹의 지배도 받았지만 그의 사망 후 다시 부르봉가의 페르디난도가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의 왕이 되었다. 1860년 팔레르모의 혁명위원회는 부르봉왕가에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도운 이탈리아왕국의 가리발디장군의 도움으로 승리하여 그들의 희망대로 1861년 이탈리아왕국의 영토가 된다. 이처럼 끝임 없는 외세의 침범으로 고대그리스, 로마, 프랑스, 스페인, 비잔틴, 아랍, 노르만 등 다양한 문화가 섞여 있으며, 도시 곳곳에 그들이 남긴 문화유산들을 산재해 있다.
이후 통일정부가 반도의 중북부를 집중 관리하여 시칠리아는 낙후되었고, 정부의 소홀한 보호에 불안을 느낀 시칠리아인들은 18세기에 자생한 마피아에 상납을 하며 그들의 보호에 기대기도 했지만, 지금 마피아는 큰 도시로 자리를 옮겨 기업 형태로 운영되어 지방도시에서의 영향력은 상당 부분 상실되었다. 이런 정치적인 불안과 가난 때문에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많은 시칠리아인들은 미국이나 아르헨티나등지로 이민을 갔다.
원만한 유럽의 유적지에는 년 전부터 관광에 눈을 뜬 중국인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귀에 거슬리는데, 아직도 시칠리아는 중국인들에게는 낯선지, 유명관광지를 시끄럽게 만드는 중국인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나 질서의식은 아직 이곳에 정착되지 않아 시골길을 달리는 운전자들은 아예 중앙선이 없다는 태도로 운전을 하며 끼어들기도 장난이 아니고, 버스시간도 정시라는 개념이 안착되지 않아 들쭉날쭉하여 아예 렌터카를 빌려 다니는 게 속 편하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곳이 많았고 산 가운데는 터널 대신 구불구불 돌아가야 하는 도로가 많아 예상했던 거리가 배가 넘게 걸리기가 일쑤다.
팔레르모(palermo)
기원 전 8세기에 페니키아인들이 식민도시로 건설하였으나, 로마제국, 비잔틴 제국 등의 지배를 받았고 9세기에서 11세기 아랍지배 말기에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알려졌던 팔레르모는, 11세기말에 이탈리아 남부를 거쳐 시칠리아로 쳐내려온 노르만족에 의해 일부가 파괴되었지만, 그들과 원주민들이 힘을 모아 도시를 재건하면서 탄생시킨 아랍-노르만 양식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12세기에 노르만과 신성로마제국 왕조의 혼인으로 탄생하여, 독일과 예루살렘 왕도 겸직한 페데리코 2세는 문화의 황금기를 열어 팔레르모를 유럽의 중심도시 중 하나로 만들었다.
이곳을 방문한 괴테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극찬했던 시칠리아의 주도인 팔레르모는 그리스어로 ‘좋은 항구’라는 뜻이다. 구시가지에서는 6세기의 아름다운 분수가 있는 프레토리아 광장, 12세기부터 600년에 걸쳐 건축된 노르만 양식의 팔레르모 대성당, 노르만과 비잔틴 양식이 가미된 팔레르모 노르만 궁전 등, 고대 그리스로부터 이슬람, 노르만 등 서로 다른 양식의 다채로운 유적지를 만나볼 수 있다.
포르타 누오보문을 통과하여 마시모 극장까지 이어진 거리를 걸어갔다. 포르타 누오보 문은 1535년 카를로스 5세가 튀니지와의 전쟁에서의 승리후에 팔레르모 방문을 기념하여 1584년에 완공한 것이다. 높이는 25m 정도로 보이며 17세기 중엽에 화재로 일부가 손상된 것을 복구한 것으로, 상부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상징인 독수리가 그려져 있고 하부 양쪽에는 두명의 아랍인 상반신이 부조되어 있다. 터번을 쓴 그들의 모습은 아랍인들이 문지기나 하라는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수염 기른 동족의 모습을 보는 아랍인들은 그들이 불쾌감을 받지 않을까?
교차로에 있는 ‘콰트로 칸티‘라는 건물 4채는 ’4개의 모서리‘라는 의미의 건물로, 외벽 1층에는 4계절의 여신들이, 2층에는 시칠리아를 지배했던 왕들이, 3층에는 산타 아답타 등 4명의 성녀가 조각되어 있다. 광장 네 모퉁이를 원형으로 들어가게 건축하여 넓어 보이는 빌리에나 광장은 도시의 중심으로 4개 지구로 나누어지는 구시가지의 교차로이며, 바로 우측 뒤편에 있는 프레토리아 광장의 분수 가에 늘려있는 나체 조각상들이 있다. 알몸에 치부마저 노출돼 있어 이 분수 앞을 지나 골목 안에 있는 3개의 성당으로 가는게 창피했던지, 이곳을 ‘수치의 광장’이라 부른다.
분수 맞은편의 산타 카테리나 달레산드리아 교회는 1311년에 건축된 여자수도원이었으나, 16세기 중엽에 신축한 것으로, 성 카테리나는 3세 기의 이집트 순교자였다. 볼품없는 누렇고 우중충한 외관과 달리 내부의 치장은 예상외로 화려하고 교회 내부도 크고 알차다. 중앙제단 위의 돔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도 인상적이며 부속예배당의 그림과 조각들이 눈길을 오래 잡아끌었다. 마모된 계단으로 올라 루푸 탑에 올라 테라스를 지나면 아래로 프레토리나 분수가 아래로 보인다.
광장 옆의 두 교회는 좌측이 노르만양식의 ‘라 마르토라나 교회’로 1143년에 노르만의 루제로 2세의 제독이었던 마이오가 기증한 것으로 제독의 교회라는 산타 마리아 달렘미랄라도 교회로 불렸으나 12세기 말에 마르토라나란 사람이 옆에 여자수도원을 설립하여 교회를 흡수하여 이후부터는 라 마르토로나 교회로 불린다.
12세기 중엽에 추가하였다는 모자이크는 팔레르모 최초의 모자이크로 중심부에는 4명의 천사에 둘러싸인 그리스도가가 있다. 손톱 1/4만 한 각각의 색깔이 다른 돌조각을 맞추어 만든 모자이크는 성격이 느긋한 장인들이 아니면 엄두를 못 낼 명작으로 이런 작품을 볼 때 마다 그들의 인내심과 각별한 노고를 바라보는 관객은 항상 경의와 고마움을 보내게 된다. 돔의 네 모서리에는 사도와 선지자가 있으며 18세기 초 지진 발생 종탑과 함께 바로크식의 정면이 추가되었지만, 골격은 비잔틴 형식이다.
우측에 세 개의 핑크색 큰 돔이 이색적 으로 보이는 2층 건물 머리에 얹은 산 카탈도 교회는, 12세기에 건축한 아랍-노르만의 전형적인 건축물로 대접 받으나, 4개의 기둥에 아름답게 장식 한 상감세공을 제외하면 내부는 장식이 없다. 1160년경에 건축되었다는 이 교회의 내부는 약 30평 정도로 아담하나 벽돌과 회벽의 마감은 간결하다. 교회 내부의 절제된 아름다움은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고 바닥의 모자이크 역시 단순하지만, 다시 보고 싶은 흔치 않은 교회다. 이런 입체감이 주는 시각적인 평온과 즐거운 감동은 직접 보지 않으면 느낄 수가 없으니 고달픔도 있지만 여행 보따리를 챙겨 비행기에 오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