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백린, 김관현, 어담(중장), 윤치성
노백린(盧伯麟, 1875년1월 10일~ 1926년1월 22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아호는 계원(桂園)이다,황해도송화출생으로 어릴 때는 한학을 수학했다. 1895년대한제국의 일본관비 유학생으로 뽑혀서 게이오의숙과 일본육군사관학교(제 11기)를 졸업했다.그는 1900년귀국하여 어담, 윤치성등과 함께 육군 참위로 임관한 뒤 한국무관학교교관, 육군연성학교교장을 맡았다. 그러나 노백린은 어담 등의 친일 군인들과는 달리 을사조약체결과 군대 해산, 한일 병합 조약등으로 국권이 순식간에 일본에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1907년안창호, 전덕기, 양기탁, 이동녕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했고, 결국 1915년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미국에서는 하와이 주에 머물면서 미군의 도움을 받아 박용만과 함께 한인 독립군 부대를 조직했다가,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하여 1920년캘리포니아 주북부에 비행학교를 설립하고 공군 독립군을 양성했다[1]. 그는 일찍부터 공군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고 한다.
1919년3·1 운동직후 결성된 한성임시정부에서 군무부총장을 맡았고,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군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까지 지냈으며, 이동휘, 류동렬, 신채호, 박용만 등과 함께 무력을 통한 독립 운동을 지지하는 쪽에 속했다.1926년상하이에서 병사했으며, 1962년건국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아들인 노선경, 노태준, 딸 노순경도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이다.김관현(金寬鉉, 일본식 이름: 金光副臣[1], 1877년?~ ?)은 대한제국의 무관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경기도또는 충청남도연산[3] 출신으로 1894년일본유학생으로 뽑혀 게이오의숙에서 수학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보병 장교로 교육을 받았다. 노백린·어담·윤치성(尹致晟) 등과 함께 1900년일본육사 제11기생으로 졸업했다. 육군 보병 참위로 임관한 뒤, 도야마(戶山) 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만주로 발령을 받아 보병정위(步兵正尉)로 러일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우고 일제로부터 종군기장(從軍記章)과 전공금(戰功金) 1천5백원을 받았다.일본은 그를 귀국시켰고 1905년유길준등과 함께 역모혐의를 받았으나 곧 풀려났고 대한제국군대의 장교로 일하게 하면서, 내부의 참서관(參書官)·서기관, 광제원장(廣濟院長), 내부 회계국장, 위생과장, 남양군수 등의 행정 관료직을 거쳤다.1910년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총독부가 행정권을 장악하자 경기도 수원군군수에 임명되었고, 이후 도 참여관과 지사를 지내며 친일 관료로서 활동했다. 1917년함경남도참여관을 시작으로 전라남도참여관(1918), 충청남도지사(1921), 함경남도지사(1924)를 역임했다. 1926년퇴관과 동시에 중추원의 칙임참의가 되었다.1924년일본 정부로부터 훈삼등 서보장을 서훈 받는 등 공로를 인정 받았고, 1934년부터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직에 앉았다. 그는 1926년관직에서 물러났는데, 이후로는 토지의 개량을 통한 산미 증식을 추진하는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고문으로 근무했고, 1937년에는 중추원에서 조직한 화북장병위문대에 가담하여 장직상등과 함께 중국 전선의 일본군 위문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뒤 1945년까지 여러차례 참의직을 중임하였다.총독부가 1935년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일제의 통치에 공을 세운 조선인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항상 대국(大局)을 달관하여 일본과 조선의 융화 공영에 진력한 바가 두터웠으며, 그의 공(功)과 노고는 다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평가가 실려 있다.2002년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광복회와 함께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어담(魚潭, 일본식 이름: 西川潭一, 1881년5월 7일~ 1943년7월 5일)은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군인이다.
경기도광주에서 태어나 1895년국비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했다. 게이오의숙과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제11기)하고 1900년육군 포병 참위(參尉)로 임관했다. 동기생 가운데 노백린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가가 되었고, 김관현은 일제의 관료가 되었으며, 어담은 계속 일본 군대에 남아 있었다. 윤치호의 동생인 윤치성도 이들과 함께 졸업했으나 일찍 사망했다 러일 전쟁때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자 일본 육사를 나온 그는 능력을 인정 받았고, 일본은 그를 고종의 최측근에서 호위와 감시를 병행할 수 있도록 시종무관등의 지근직으로 임명했다. 1910년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이왕직 왕실 호위부대인 조선보병대에서 근무했다. 3·1운동등으로 만세 운동 중 살해된 경찰관이 나온 후 1921년열린 순직경찰관초혼제에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다[2].1930년일본 육군의 중장으로 진급했고, 1931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에 임명되어 1936년연임되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1938년일제가 지원병제를 실시하자 《매일신보》에 이를 지지하는 담화문을 발표한 바 있다. 배영동지회의 상담역과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도 맡았다.2002년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광복회와 함께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2005년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중 군 장교 부문에 선정되었다. 2007년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회고록 《어담소장 회고록》을 남겼다.
• 15기(1903년11월 30일졸업, 1904년2월 12일임관, 708명)
• 류동렬, 박두영, 이갑
류동열(柳東說 1877-1950)독립운동가. 평안북도 박천(博川) 출생. 1903년(고종 40)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군 참령으로 있다가 1907년(순종 1) 군대가 강제해산되면서 안창호(安昌浩)·이상재(李商在)·윤치호(尹致昊)·김구(金九)·양기탁(梁起鐸) 등과 신민회(新民會) 조직에 참여하여 구국운동과 계몽활동을 하였다. 1909년에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 살해사건의 배후인물로 체포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석방되었다. 1911년 105인사건에 관련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뒤에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7년 연해주 솽청[雙城(쌍성)]에서 문창범(文昌範)·김립(金立) 등과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를 조직하였다. 이듬해 서일(徐一)이 만든 중광단(重光團)에 입단하고, 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서명하였다. 1919∼1925년에는 상해임시정부 초대참모총장을 지냈고, 한때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35년 난징[南京(남경)]에서 김규식(金奎植)·지청천(池靑天)·신익희(申翼熙) 등과 민족혁명당을 조직하고 독립운동단체들을 모아 통일전선을 형성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미군정청 초대 통위부장(統衛部長)을 역임하였다. 6·25 때 납북되어 자강도(慈江道) 희천(熙川) 부근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출처] 류동열(柳東說)|작성자 myomyodan
박두영(朴斗榮, 일본식 이름: 木下斗榮[1], 1880년11월 28일~ ?)은 일본군장교 출신으로서 만주에서 조직된 첩보 조직 민생단단장을 지냈다.일본 밀정인 배정자가 남편인 현영운등 8명을 뽑아 보낸 대한제국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일본 육사 제15기생으로 독립 운동가 류동렬, 이갑과 동기였다. 졸업 후 망명한 이들과는 달리 박두영은 1904년일본 육군의 포병 참위로 임관한 이래 의병 토벌에 앞장서서 유명한 의병대장 이강년을 제천에서 체포, 사형 당하게 하면서 일본의 큰 신임을 받게 되었다.만주국에 군사 고문으로 파견되어 있다가 1932년일제가 창단한 간첩 조직인 민생단의 단장을 맡았으며, 1937년부터 광복 시점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를 지냈다. 민생단 사건은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에 큰 타격을 주어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따로 언급되어 있고, 이 무렵 박두영의 행적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2].태평양 전쟁시기에는 경상남도지역 순회 강연을 맡아 징용, 징병 지원을 권유했다. 전쟁 지원용 비행기 생산을 위한 금강항공공업주식회사이사를 지내기도 했다.광복 후인 1949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충청북도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제1조 위반 혐의자로는 최초로 체포된 사람이었다. 화려한 친일 경력을 볼 때 사형 선고가 유력시 될 정도였으나, 이후 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풀려났다.2002년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2007년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들어있다.이갑(李甲.1877.5.12∼1917.4.24) 독립운동가. 호 추정(秋汀). 평안도 숙천(肅川: 平原) 사람.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참령(參領)이 되었다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군대에서 나왔다. 1906년(광무 10) 정운복(鄭雲複)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ㆍ[오성학교(五星學校)]를 창립하고 새 세대의 교육에 힘쓰는 한편,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했다. 뒤에 시베리아에 망명하여 이강(李剛)과 함께 [정교보(正敎報)]를 발행하며, 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받았다. (이홍직: <국사대사전>) 1906년 10월 양기탁ㆍ박은식ㆍ유동열 등과 함께 계몽운동단체인 [서우학회(西友學會)]를 조직하여 학교설립과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했다. 1907년 4월 안창호ㆍ양기탁ㆍ이동휘ㆍ전덕기 등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했다. 그해 7월 일제의 강요에 의해 고종 양위의 조칙이 내리자, 궁중 내의 양위반대세력과 손을 잡고 양위식에서 매국 대신들을 모두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정보가 누설되어 일본군이 출동함으로써 실패하고, 이도재(李道宰)ㆍ박영효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1908년 1월 서우학회를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와 통합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로 발전시켰다. 1909년 10월 안중근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사살되자 안중근과 친분이 있다 하여 헌병대에 붙잡혀가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군기지와 무관학교를 건설하기로 한 신민회의 방침에 따라서 1910년 4월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여, 산둥성(山東省) 칭다오(靑島)에서 안창호ㆍ신채호ㆍ유동열 등과 함께 독립군기지 창건의 구체적 실행책을 논의했다. 무관학교 설립이 여의치 않자 러시아의 상페테르부르크로 갔다. 이곳에서 전신불수의 병에 걸렸으나 독립군 양성에 대한 취지서를 만들어 해외의 동포들에게 재정적 원조를 촉구했다. 1911년 미국에 가 있던 안창호의 주선으로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로 초청되어 뉴욕에 도착했으나 이민국이 상륙허가를 해주지 않아 다시 시베리아의 치타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대한인국민회원동지방회(大韓人國民會遠東地方會)의 회장이 되고, 이강(李剛)과 함께 [정교보(正敎報)]를 발행하여, 독립운동과 계몽활동을 했다. 얼마 뒤 만주로 옮겨 밀산무관학교를 세우고 교장으로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그 뒤 지린성(吉林省) 목릉현(穆陵縣)으로 옮겨 요양하다가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21기(1907년 입교, 1909년 5월 27일 졸업, 1909년 12월 25일 임관, 418명)
• 장제스
장제스(장개석. 중국어 정체: 蔣介石, 병음: Jiǎng Jièshí, 188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5일) 또는 장중정(장중정. 중국어 정체: 蔣中正, 병음: Jiǎng Zhōngzhèng)은 중국의 정치·군사 지도자이다. 황푸군관학교 교장, 국민혁명군사령관, 국민정부정석, 행정원장, 국민정부군사위원회위원장, 중화민국 총통, 중국 중국 국민당 총재, 삼민주의 청년단 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 23기(1909년 입교, 1911년 5월 27일 졸업, 1911년 12월 26일 임관, 740명)
• 김경천(중위, 한국 독립군)
김경천(金擎天, 1888년 6월 5일 ~ 1942년 1월 2일)은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서 해외로 망명하여 일제 강점기에 무장 독립 운동을 벌인 독립 운동가이다.함경남도 북청에서 무관 가문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현충(金顯忠), 김광서(金光瑞)이며, 후에 신팔균, 지청천과 함께 '하늘 천(天)'자를 넣어 지은 김경천(金擎天, 金警天 또는 金敬天), 김응천(金應天)은 별명이다.아버지인 김정우는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구한국 육군의 엘리트 인사였다. 군인인 아버지 및 형들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군인이 되기를 꿈꾸었고, 서울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1911년 일본 육사를 졸업(제23기)하고 도쿄에서 기병 장교로 근무하였는데, 수년간 기회를 엿보다가 1919년 2·8 독립 선언을 계기로 탈출을 결심하고 귀국했다. 그해 6월 초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청년단(총재 안병찬)에 가입해 활동했고,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현역 일본군 장교인 그의 가세는 무장 독립 운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1919년 연말 경에 김경천은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 그는 이곳에서 의용군을 모집하여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중국인 마적단과 싸웠으며, 창해청년단(단장 김규면) 총사령관으로서 전투를 거듭하면서 시베리아 지역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21년에는 수청의병대의 지도자가 되었고 러시아의 혁명 세력과 연합하면서 연해주 지역의 조선인 지도자로 소련의 인정도 받게 되었다.1922년 수청의병대는 대한혁명단으로 개칭하였으며, 김경천은 사령관을 맡았다. 그해 말에는 고려혁명군(사령관 김규식)이 조직되었고 그는 동부사령관을 맡았다. 그러나 이후 정세 변화로 러시아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이 소강 상태에 빠지면서, 노령(露領) 무장 독립 운동의 선도격이던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1922년 이후로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국경경비대의 장교로 일했다는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
1937년 스탈린 정권 하에서 그는 간첩죄로 체포되었고, 1939년 재차 체포되어 두 차례 복역했다. 두번째 복역 중에 유배된 뒤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사망 시기나 경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일본 육사를 졸업한 장교로서 보장된 앞길을 버리고 홀연히 망명한 뒤 시베리아 일대에서 '김장군'으로 불리며 유명해진 그는 흰 말을 타고 만주와 시베리아를 누비는 전설적인 항일 영웅으로서의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특히 김경천은 여러 가명을 사용했고 일찍부터 '장군'으로 불린 인물이기에, 김일성이 그의 가명과 항일 투쟁 경력, 전설적인 이미지 등을 도용했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199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다.
• 26기(1914년 5월 28일 졸업, 1914년 12월 25일 임관, 742명)[
• 김준원(金埈元 ; 초대 공군참모총장과 1987년에 국무총리를 역임한 김정열릐 부친), 박승훈(朴勝勳 ; 여순반란사건 당시 14연대장, 중령), 신태영(대한민국 국방부장관), 안병범(安秉範 ; 한국전쟁시 자결, 대령)), 안종인(安鐘寅, 일본어: 亀村貞信, 한국군 준장), 유승렬(일본어: 江本烈, 한국군 소장), 이대영(李大永), 이응준(일본어: 香山武俊, 한국군 중장), 지청천(대한민국 임시정부 총사령관), 홍사익(중장)
• 27기(1915년 5월 25일 졸업, 1915년 12월 25일 임관, 761명)
• 김석원(일본어: 金山錫源, 한국군 소장)
[편집] 육군사관학교 본과 이후
• 45기(1933년 7월 11일 졸업, 1933년 10월 20일 임관, 337명)
• 이우(중좌) • 49기(1937년 6월 졸업, 471명)
• 이종찬(소좌), 채병덕(한국 육군참모총장)
• 56기(1942년 12월 졸업, 1672명, 일부는 1943년 5월 졸업)
• 박임항(대한민국 중장), 이형근(李亨根, 일본어: 松山武雄)
• 57기(1944년 4월 졸업, 1268명, 일부는 1944년 3월 졸업)
첫댓글 일군 출신이면서 동시에 독립운동을 했던 몇몇 인사들을 보면, 처신이 어려웠던 당시 국민들 처지를 느끼게 해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