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申東曄, 1930년 ~ 1969년)
충청남도 부여 출생으로 전주사범, 건국대 대학원 국문과 수학했다..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사범학교 시절에 독서에 힘씀으로써 아나키즘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 갔다.
1948년 11월 이승만 정권의 토지개혁 미실시와 친일 미청산에 항의하는 동맹 휴학으로 학교에서 퇴학되었다. 1949년 부여 주변에 있는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사범학교에서 퇴학되었지만 교원자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3일 만에 교사직을 그만두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 고향으로 내려가야 하였다. 동엽의 지식을 조직사업에 활용하려는 인민군의 요구로 그해 9월 말까지 부여 민주청년동맹(민청)선전부장으로 일하였다. 동엽의 생각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무정부주의자였다.
1953년 단국대를 졸업한 뒤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자취방을 얻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돈암동 네 거리에 헌책방을 열었다. 신동엽은 이때 이화여고 3학년이던 부인 인병선을 만났다. 1957년 인병선과 결혼한 뒤 고향으로 낙향했다.
주산농업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58년 각혈을 동반한 폐결핵을 앓게 되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 돈암동 처가에 아내와 자녀를 올려 보낸 뒤 고향 부여에서 요양하며 독서와 글쓰기에 빠진다.
1959년 독서와 문학 습작에 몰두하다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를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60년 신동엽은 건강을 되찾아 서울에 있는 '교육평론사'에 취업한 뒤 성북구 동선동에 터를 잡았다. 그해 《학생혁명시집》을 집필하며 4·19 혁명에 온몸으로 뛰어들었다. 그래서 신동엽을 가리켜 '4.19 시인'으로 평가하는 문인들이 많다.
훗날 4·19 혁명의 기억을 되살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와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가 나올 수 있었다. 1961년 명성여고 야간부 교사로 안정된 직업을 얻게 되어 시작에 몰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1964년 건국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3년 시집 《아사녀》를 출간하고 1967년 장편서사시 《금강》을 발표했다.
1969년 4월 7일 간암이 악화되어 40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아버지의 사상적 문제 때문에 나도 학교에서 굉장히 외롭고 왕따를 당하는 입장이었는데 신동엽 시인이 그렇게 말해줘서 내가 너무 감동받아 마음을 금방 준 것 같다”고 밝혔다. 급속도로 사라져가는 농촌 문화를 되살리고자 줄기차게 연구해온 ‘짚풀문화’가 이제 그의 남편이다.
신동엽은 시를 통하여 전통적인 서정성과 역사의식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그는 격변하는 역사 속에서 민족의 전통적인 삶이 붕괴되는 것을 시로서 추적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 시가 ‘껍대기는 가라’ 이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껍대기는 가라-
이 시는 여러 교과서에 실려있는 유명한 시이다. ‘껍데기는 가라’라는 절규에는 역사와 허구성을 폭로하는 내용이다. 그런 것은 모두 껍데기이고, 민중의 이념이야말로 알맹이라는 것이다. 그는 4. 19 혁명의 자유와 민주의 껍데기가 아닌 참 뜻은 동학혁명과 연결된다고 노래했다. 알맹이가 느끼는 환희를 아사달과 아사녀가 초래청에서 맞절을 하는 것으로 구체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