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과 남태령
뚜껑은 두건頭巾이 변한 말이다.
마당은 마의 땅, 즉 남쪽에 있는 땅이라는 의미이다.
마는 남쪽이니, 남쪽의 땅인 ‘마땅’이 오늘날 ‘집 마당’이 되었다.
‘마땅하다’라는 말도 집이 남향하여 남쪽에 마당이 있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못 마땅’ 한 것이다.
뒤뜰은 뒤의 땅, 북쪽의 땅이 뒤뜰이 되었다.
그러므로 뒷마당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
남태령도 남쪽의 고개, 앞 고개, 남 고개이다.
안성맞춤과 남이섬
안성에서 만든 그릇을 ‘안성맞춤’이라고 한다.
지금의 표준어이다.
그러나 ‘맞추다’는 어떤 목표물을 적중시키는 것이고 ‘마추다’는 옷을 맞추다, 신발을 마추다로 몸이나
발에 마추어 짓는 것으로 볼 때 ‘안성마춤’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임거정이 나라의 우환이라 하여 임걱정이 되어 ‘걱정’이란 말이 되고 조선 초기 안다갑이라는 여자
이름에서 ‘안타깝다’라는 말이 생겨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국을 다녀온 사신이 붓대롱에 조그마한 벌레를 넣어가지고 와서 성종임금에게 보였다.
성종이 대롱 속을 들여다봐도 벌레가 너무 작아 아무것도 안보이므로 ‘빈대롱 밖에 없구나’라고 한
것이 그 벌레를 ‘빈대’라는 이름이 되었다.
남이섬 역시 ‘남쪽의 섬’이라는 뜻으로 ‘남의 섬’인데 그것이 ‘남이섬’이 되어 엉뚱하게 남이장군이 전사
한 곳이 되어 가짜무덤까지 만들어 놓았다.
남이섬은 원래 섬이 아니었으나 일제 때에 발전소를 만들기 위하여 댐을 막아서 물이 차올라 섬이 되었다.
춘천 쪽에서 바라보면 남쪽에 있는 섬이므로 ‘남의 섬’이 된다.
앞섬은 남섬, 앞산은 남산이다.
남이장군의 무덤은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남전 2리 산 145번지에 있다. 남전2리 바로 뒷동산이다.
정동진이라는 지명도 원래는 그곳 주민들이 마을의 정 동쪽에 있는 나루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서울의 정 동쪽에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 아니다.
옛날 그 지역 주민들에게 서울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경산 남매지
경산 남매지도 남쪽에 있는 못이다.
‘남의 못’ ‘남지南池’이다.
‘남지’가 ‘남못’이 되고 ‘남의 못’이 ‘남의지’ ‘남에지’ ‘남매지男妹池’가 되어 남매간의 슬픈 전설을 지닌
못으로 변하였다.
남이섬의 경우와 같다.
경산 용성면 고죽리에 살았던 해인海印이라는 도인道人의 예언에 의하면 남매지는 통일이 되어 세계의
일꾼을 길러내는 교육장으로 쓰이기 위하여 지금은 사람이 손을 못 대도록 못이 되어있다고 하였다.
그는 서울로 갈려고 할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사는 곳을 서울처럼 만들라는 말도 하였다.
또 그는 논이 바둑판처럼 반듯반듯해지는 농경지 정리를 예언하였고 들판이 서리 내린 듯 하얗게 될 때
우리나라가 잘살게 된다는 비닐하우스 경작시대를 예언하였다.
또 아폴로가 달에 간다고 온 세상이 떠들썩할 때에도 엄청난 경비를 들여서 가봐야 가져올 것이라고는
결국 돌맹이 몇 개밖에 없다고 하였다.
웅진과 공주
웅진은 큰 나루라는 뜻인 ‘나루’ '검나루'인데 '곰나루'로 변하여 '웅진熊津'이 되었다.
지금 웅진나루에는 커다란 곰동상이 서있고 옛날에 곰이 많이 살았다는 전설의 고향이 되어있다.
공주도 큰 마을인 (큰)주가 검주<곰주<공주로 변하였다. 금
강도 강<곰강<검강<금강이 되었다.
충청도 사투리로 ‘검’은 ‘금’으로 발음된다.
원효와 당항성
흔히 ‘원효당진’이라고 하여 충남 당진은 당나라로 가는 나루고, 한진은 한나라로 가는 나루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송고승전宋高僧傳의 의상전義湘傳의 기록에 의하면 원효가 당나라로 떠나고자 했던 나루는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 32 당항성黨項城아래의 나루였다고 한다.
현재의 화성시 권역 안에는 고구려 점령시 당성군唐城郡과 매홀군買忽郡이 있었다.
화성에 염불산, 법동, 삼존리 금당리 등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 많은 것도 원효와 의상의 당나라 유학길의
영향으로 보는 것이다.
충남 ‘원효당진’의 유래는 경기도 ‘당항성’의 와전이다.
당진과 한진
충남 당진의 ‘당’은 닥, 단, 당으로 원래 산을 뜻한다.
그 ‘산’에 군대가 ‘진’을 친 곳이 산진, 당진이다.
‘한진’은 ‘큰 나루’이다.
‘한漢’은 ‘클 한’으로 크다는 의미이다.
당’이라는 지명은 연천의 당포성, 경남 고성의 당항포, 서천군, 창녕군, 해남, 여수 등의 당포 등이 있다.
당집은 산에 있는 집이다.
당산堂山은 부군당 등의 당집들이 있던 곳, 당 나무가 있던 산이다.
광희문밖에 있는 신당동은 신당神堂들이 있던 곳이다.
사당동은 남묘가 있는 곳이다.
원래는 지금의 남대문 경찰서 뒤쪽에 있었다.
원래 사당동祠堂洞인데 사당동舍堂洞이 되었다.
김삿갓의 시에 사당동祠堂洞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울진은 울릉도로 가는 나루이다.
강릉은 강(남대천)과 삼왕릉이 합쳐진 이름이다.
가좌동과 가평
가좌동은 가장자리의 여울, 갓여울이 가여울, 가재울로 변하면서 가좌동이 되었다.
이것이 가재가 많이 살았다는 말로 와전되면서 지금은 큰 가재 동상을 세워 놓았다.
그것도 토종 가제가 아니라 킹크랩을 세워 놓았다.
‘가평’ ‘가동’ ‘각동’ ‘각골’ ‘갓골’ ‘가리’가 모두 물 가장자리에 있는 동네이다.
기자촌은 1969년에 박정희대통령이 기자들을 위하여 만든 마을이다.
문화촌은 문화 예술인들의 마을이다.
해방촌은 북한 실향민 마을이다.
청평과 양평
청평은 가평과 마주보는 들판이므로 맞뜰, 막뜰이 되고 ‘막’이 ‘맑’이 되어 ‘맑들’이 되면서 맑은 들판,
청평淸平이 되었다.
양평은 조선시대에는 양근楊根군이라 하였는데 일제 항쟁시대에 지역을 통합하면서 양근군과 지평군을
합하여 ‘양평군’이 되었다.
또 양평이라는 단어만 보면 ‘벋은 들’이 ‘버드나무 들’이 되어 양평楊平이 되기도 한다.
(반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