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으로 진입한 뒤 작전은 순조로웠다. 반란군은 광양 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한 뒤로는 반격다운 반격을 펼치지 못했다.
1948년 10월 22일 날이 밝으면서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내로 밀고 들어간 진압군은 쉽사리 순천을 탈환할 수 있었다. 반란군 주력은 이미 보이지를 않았으나, 경찰의 무기나 죽창 등으로 무장한 좌익 학생과 좌익단체 단원들이 저항했다. 그러나 큰 위협이 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반란이 일어났던 현장은 모두 끔찍했다. 이데올로기적인 갈등에 더해 평소의 원한이나 좋지 않았던 감정, 이해관계까지 실려 사람은 극단적인 대립을 일삼게 된다. 주민들도 극도의 혼란 속에 누구를 어떻게 맞아야 할지 모를 상황에 빠져든다.
1948년 10월 27일 전남 여수에 진입한 국군은
반란에 가담했던 14연대 장병과 좌익 단체 회원을
검거했다. 반란 참가 혐의를 받은 사람들이 진압군
트럭에 실려 가기 직전의 모습이다. 당시 미국 종군
기자였던 칼 마이던스가 촬영해 라이프지에 실었던 사진이다.
좌익이 휩쓸면 그곳은 좌익의 천하가 됐다. 반대로 그들이 물러가면 좌익에 의해 죽어 넘어진 사람들의 가족과 친지들이 가만히 있지 않는 법이다. 좌와 우가 쉽게 뒤바뀌면서 잔혹한 보복이 잇따르는 그런 세상에서의 혼란 때문에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자주 벌어지곤 했다.
한 진압군 장교에 따르면 군이 순천을 거쳐 광양으로 진입할 때, 아직 인공기가 걸려 있었다고 했다. 소대원을 이끌고 군청과 경찰서 건물을 접수한 뒤 마을로 들어섰을 때, 주민들은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쳤다고 했다. 진압군 소대원 중의 일부가 이북 출신으로 아직 고향 말을 쓰고 있는 것을 보고 주민들이 인민군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주민들은 태극기와 인공기를 모두 준비해 놓고 새로 진입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본 뒤 알아서 행동해야 했던 것이다.
여수로 진입하기 전에도 참상(慘狀)은 자주 눈에 띄었다. ‘소화 다리’라고 불렸던 당시 벌교의 부용교 주변에서는, 반란군이 들이닥치면서 100여 명의 우익 인사가 집단으로 학살당했다가, 다시 반란군이 물러가고 진압군이 닥치면서 군경과 우익단체 단원들에 의해 짧은 기간 동안 활약했던 반란 동조자와 부역자들이 집단 처형됐다.
마지막 남은 곳은 여수였다. 진압군은 서서히 여수를 조이기 시작했다. 반란군은 점차 빠져나가 지리산 쪽으로 이동하는 상황이었지만, 뒤에 남은 좌익 단체 단원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진압군은 27일께 여수를 탈환했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몰아붙였는데도 여수 탈환은 쉽지 않았다. 반란군은 여수 진입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장군봉이라는 곳에서 필사적인 반격을 펼쳤다. 송호성 작전사령관은 장갑차에 탄 채 장군봉을 뚫고 진격하려다가 기관총 사격을 받아 한쪽 귀를 먹기도 했다.
그러나 반란군은 장군봉 반격 뒤에 물러났다. 여수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제때 도망치지 않으면 완전히 포위당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아 있던 좌익들은 건물 등을 진지로 삼아 마지막 저항을 하고 있었다.
진압군은 이들이 몸을 숨긴 건물을 박격포로 사격하면서 계속 밀고 들어갔다. 나중에 대전에서 1개 대대를 이끌고 현지에 내려왔던 함병선 2연대장은 그때 사격을 받았다. 전봇대 뒤에서 날아온 총탄이 하마터면 함 중령에게 맞을 뻔했다.
총을 쏜 사람은 조그마한 여학생이었다. 함 중령이 “네가 나를 죽이려고 했느냐”고 호통을 쳤지만, 그 여학생은 전혀 당황하지 않더라고 했다. 그 여중생은 오히려 “내일이면 인민군이 와서 우리를 해방시킬 것”이라며 큰소리를 치더라는 것이다.
그 여중생을 이끌고 여수 여중으로 갔을 때, 그런 학생 200여 명이 모여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대부분 총을 쏜 여학생과 같은 생각에 젖어 있었다고 했다. 함 중령은 나이 어린 학생들을 한참 훈계해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했다.
선동(煽動)은 무지(無知)의 틈새를 교묘하게 파고들기 마련이다. 여수 주민들은 반란이 일어나던 10월 20일 아침부터 방송을 일절 청취하지 못했다. 벽보를 통해 좌익들이 모든 방송 청취를 금지시켰기 때문이었다. 사회 기층까지 파고든 좌익 단체들은 이 기간 동안 주민들에게 ‘곧 인민군이 38선을 치고 내려온다’는 정보를 심어줘 이들을 선동했던 것이다. 아울러 좌익들은 ‘제주도 4·3 폭동’을 의거(義擧)로 내세운 뒤, 이를 진압하는 군경을 ‘동족 살상자’라고 선전했다. 동족을 죽일 수 없어서 봉기한 군대라고 자신들을 선전하기도 했다.
진압군은 반란군과 그 잔여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맹렬한 포격을 가했고, 여수는 그렇게 불탔다. 내가 김정렬 대위(후일 공군참모총장)가 모는 L5 경비행기를 타고 애초 14연대가 처음 반란을 일으켰던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여수는 반란과 진압이 남긴 처참한 몰골로 남아 있었다.
비행장에는 김백일 여단장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시내에 들어섰을 때였다. 경찰서 인근으로 기억하는 곳에 도착했는데, 시체가 썩는 냄새로 도저히 그냥 지나치기 어려울 정도였다.
여수역도 마찬가지였다. 상가가 밀집해 가장 번화하다고 하는 중심지도 마찬가지였다. 여수 곳곳이 모두 시체로 넘쳐나고 있었다. 가장 심했던 곳은 역시 경찰서 부근이었다. 좌익과 우익이 심한 싸움을 벌이면서 집중 타격을 받았던 곳이었다.
이런 충돌은 어떻게 우리 앞에 나타났는가. 어떻게 이를 막아야 할 것인가.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진 참상들은 2년 뒤의 처참한 동족상잔의 피바람을 충분할 정도로 예고하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14연대 반란사건으로 드러난 대한민국 내부의 극심한 혼란상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내부의 적, 그들은 갓 출범한 대한민국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다는 느낌이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