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화랑정신의 발상지이며, 일연스님의 ‘삼국유사’가 탄생한 천년고찰 청도호거산운문사. 여승만이 머무르는 도량답게 초입부터 흐트러짐이 하나 없는 단아함에 대가람의 엄숙함이 묻어난다. 청정한 솔바람과 향기에 취해 ‘바람의 솔숲’을 걷는다. 운문사 솔숲은 우리나라에서 첫손 꼽히는 아름다운 숲이다. 수백 년 됨직한 굵고 굽은 수많은 적송이 오랜 세월 모든 고뇌를 인내하며 보듬고 서로를 위무하는 모습이다.
솔숲 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두 손을 들고 하늘을 향하여 애타게 기도하는 듯 보이는 큰 소나무가 보인다. 그 하단에는 혈색 없는 삭정이가 애처로이 붙어있다. 어린 시절 겨울철이면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지피던 추억의 나래를 편다. 거기에는 삭정이가 있으며, 그는 궁창의 별이 되어 내게로 돌아왔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은 산자락을 끼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연료가 풍족하지 못하던 시절이라 땔감은 주로 나무에 의존하며 살았다. 가족들이 부지런하게 살면 안살림이 비록 궁색할지라도, 마당 한 귀퉁이에 잡나무나 솔가리라도 쌓아 놓고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었다. 그 시절에는 처마 밑이나 집 뒤꼍에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지내는 집은 그리 흔치 않았다. 서민의 아궁이에 지펴지는 불기운이 얼마나 풍요로운가에 따라, 그해 겨울 동안 마음이 넉넉하기도 하며 웅크린 채 살아가기도 했다.
집안에 일손이 부족할 때에는 아궁이에 불 지피는 일이 나의 몫이 될 때가 있었다. 여러 종류의 땔거리를 지피다 보면 나무에 따라 모양과 풍기는 맛이 다르다. 불꽃의 모습과 색깔들이 전해지는 다양한 불기운을 통해, 사물에 내재해 있는 오묘한 색에 대하여 관심을 두게 되었다. 잘 마른 소나무 장작을 땔 때는 아궁이 앞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풍성한 기분이다. 북어 켜처럼 잘 쪼개진 장작개비가 불이 붙고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광경을 보면 나와 불꽃은 하나가 되어 불길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타 닥, 타 닥, 탁 탁, 불타는 소리와 꽃처럼 피어나는 불꽃 모습에 한참 동안 깊은 자아에 빠져든다.
하지만 다양한 즐거움을 주는 것은 단연 삭정이를 태우는 일이다. 소나무 삭정이로 불을 지필 때는 몇 시간을 아궁이 앞에 앉아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내겐 오히려 그 어떤 놀이보다 소나무 삭정이를 때는 일이 훨씬 더 즐거웠다.
삭정이가 만들어내는 불꽃은 장작불과 또 다른 영적 세계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장작에 불이 붙는 과정이나 한창 타오르는 불꽃 모양과 너울거림이 오케스트라 협연이라면, 삭정이가 타오르며 보여주는 빛깔과 불꽃의 모양새들은 풀룻이나 클라리넷의 흐름이다.
손가락 굵기의 소나무 삭정이는 송진 기름이 배어 있어, 여러 가지 다양한 색을 띠며 가지를 감싸듯 휘돌며 불꽃을 일으킨다. 초록색 불꽃 속에 붉음이 있고, 오렌지 빛깔인가 하면 진분홍의 너울거림이 어우러지기도 한다. 불꽃이 마치 매화 봉우리가 벌어지듯 몇 개의 꽃잎처럼 피어오르다가, 갑자기 유월의 샐비어가 만개하듯 가지 끝에서 타다닥! 진홍의 불꽃을 토해내기도 한다.
삭정이는 살아있는 나무에 붙은 채 말라 죽은 가지이다. 나는 지금도 등산길에 삭정이를 보면 가슴이 아려오며 눈가가 젖어온다. 갖가지 모양과 아름다운 색깔의 향연을 펼쳐 보이며, 즐거움을 선사하고 재만 남기고 사라진, 삭정이 같은 남동생에 대한 슬픈 기억 때문이다.
내가 여섯 살 즈음, 시골고향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꽃 잔치가 벌어지는 오월에, 집안의 대를 이을 남동생이 태어났다. 아기 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 아기는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얼굴에는 이 세상에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사랑과 기쁨을 전하는 힘을 가진 천사의 행복한 모습이었다. 아기의 손을 잡았다. 고운 흰나비의 날개, 진달래 꽃잎, 형용할 수 없는 부드러움이었다. 아기가 눈을 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수정처럼 맑고 까만 눈동자는 어떤 악마라도 삿된 생각이 미칠 틈을 주지 못하게 하는 순결한 힘을 가진 듯하다 .
아기는 자라면서 따스한 날이면, 온종일 나와 함께 향기 좋고 아름다운 꽃들이 핀, 집 앞동산에서 놀았다. 집으로 돌아올 때면, 나의 등에 업혀 내가 꺾어 준 예쁜 꽃들을 내 머리에 꽂아주며 “누야 좋아!”하며 즐거워하였다. 때로는 마을 어귀에 놀며, 석양이 질 무렵 논밭에서 돌아오는 농부들에게 안겨 재롱과 웃음으로 그날의 수고를 씻어주었다.
동생이 세 살 되던 해, 가을걷이가 끝난 황량한 들녘에는 소슬바람이 불고 있었다. 할머니와 아이가 나들이 나갔다가, 해 질 무렵 할머니는 아이를 업고 황겁히 집으로 들어오시며 울부짖었다. 모든 식구는 할머니 등에 업혀 온 아이에게 달려갔다. 휑한 늦가을 들판에서 불어오는 강한 맞바람에 경기를 일으킨 아이의 얼굴은 백지장으로 변하고, 눈동자는 이미 풀어져, 얼마 후 잠자는 듯 숨을 거두었다.
나는 사고가 나던 가을 햇덧을 원망하며 동생 이름을 불렀다. 너무 무섭고 겁이 났다. 마당에 나와 보니 우듬지에 걸린 갈고리달이 처연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 예쁜 꽃망울만 맺고 꽃을 피워보지 못한 아이는 그날 밤, 홀연히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났다.
솔밭주위가 고요하다. 밤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어둠은 호거산에서 내려와 솔밭 위에 앉는다.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저승과 이승을 이어주는 미리내는 천사의 손가락 사이로 뿌려지는 은빛 알갱이 같다.
많은 싸라기별 중에 유난히 빤짝이는 별 하나에 웃음 짓는 동생 얼굴이 아른거린다. 머리 위에는 꽃가루를 뿌린 듯 별똥별이 떨어져 내리며, 무리 중 초록별 하나가 내 품에 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