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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날마다 새롭게
히브리서 3:7~13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믿음이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목표를 향하여 계속 전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마 18:3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우리의 본성이 아이같이 순전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히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라고 하였습니다. 고전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했습니다. 말하는 것, 깨닫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야 할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장성한 분량이란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있는 품성과 인격을 말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우리의 인격이 자라기 위하여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있습니다. 그 첫째 관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히 3: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95:7-9에서 인용되었는데 이를 ‘성령이 이르신 바’라는 표현을 하여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 성령에 의하여 이뤄진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이라는 말씀에서 ‘오늘’이란 헬라어 ‘세메론 σήμερον’이라고 하는 데 이것은 내가 처해 있는 현재의 시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내가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기를 원할 때 언제든 어디에서든지 성령으로 내게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요 10:3~4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라고 하였습니다. 저녁이 되면 목자는 들에서 풀을 뜯기며 치던 양들을 불러 모으고 우리로 이끌어 옵니다. 비록 양에게는 수많은 단점이 있지만, 최고의 장점은 목자의 음성을 잘 듣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양은 비록 몸은 둔하지만, 청각이 잘 발달하여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므로 사나운 짐승에서 밤새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우리에서 쉼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먹이를 얻기 위하여 목장의 음성을 따라 우리를 나서 들판에 이르게 됩니다.
들판에 풀을 먹으면서도 불안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것은 목자의 음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양들을 노리는 사나운 짐승이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목자는 언제나 깨어 있다가 위험이 닥치며 목자의 우렁찬 목소리로 짐승을 쫓아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으로 내게 하시는 말씀을 깨닫고 순종할 수 있을까요?
우선은 성령 하나님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성도에게 임하여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성령님은 내 안에 있는 말씀을 떠올리게 하므로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보혜사’는 ‘파라클레토스 Παράκλητος’라고 합니다. 이것은 ‘옆에서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내게 적합한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서 떠올리게 하므로 말씀하십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할 때도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제가 부목사로 재직하면서 기도원에서 내 갈 길을 알려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제게는 아무런 준비된 것도 없는데 주님의 음성은 분명하였습니다.
제 아내도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결혼하였습니다. 믿음이 없는 아내에 대하여 더 정이 들기전에 정리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여 금식 기도원에 올라 기도하는 중에 롬 14: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고 하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이것을 응답으로 알아 저는 주저하지 않고 제 아내를 받아들였습니다.
고후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내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그 말씀대로 성취되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됨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의 음성으로 새롭게 되는 과정에서 경계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히 3: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마음이 ‘완고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완고’는 ‘딱딱해짐, 굳어짐’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사상이나 지가 선호하여 원하는 것을 집착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기를 싫어하는 옹고집을 뜻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생각의 틀’ 즉, 통념 신념 전제를 절대 바꾸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판단하는 것이 옳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기의 주장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하여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완고한 마음으로는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그 결과 신앙이 자랄 수 없습니다.
광야에 시험하던 날에 관한 내용은 시편 95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물이 없어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평한 사건에 대한 언급입니다. 구체적으로 출애굽 한 후 1년에 지났을 때인 신(Sin) 광야 르비딤에서 일어났고, 다른 사건은 민수기 20장에 등장하는 진(Zin)광야의 가데스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때는 출애굽 한 지 40년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떨어졌다는 것은 생명에 대한 중대한 위협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이런 위기 상황에서 어떤 방법도 찾지 못하고 낙심하여 모세에게 죽일 듯 대들며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원망과 불평을 토해낸 것입니다. 출 17장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호렙산에 있는 한 반석에 올라 나일강을 치던 지팡이를 치면서 저들의 물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40년이 흘러 똑같이 마실 물이 없어 온 이스라엘 백성이 크게 낙담하여 민 20:3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이르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투어’의 원형 ‘다투다’ 히브리어로 ‘리브’라고 하였고 이 뜻은 ‘죽자사자 덤벼들며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물 문제는 이 두 번뿐이었는지 아니면 반복적으로 이뤄졌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을 E. P. 샌더스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라는 책에서 반석에서 나온 물이 약 4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다녔음을 고린도전서 10:4을 근거로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삭막하기 그지없는 광야에서 저들의 마실 물과 가축 떼가 마셔야 할 넉넉한 물을 변함없이 공급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대략 250만 명으로 추산하고 거기에 따르는 짐승의 숫자를 고려할 때 2만 갈론(7,600리터)을 실을 수 있는 유조차 1,875대로 수송해야 하는 엄청난 양입니다. 이 물을 40년 동안 변함없이 공급하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 불평하고 원망하는 모습이 완고함이라는 것입니다. 히 3: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여기서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는 ‘입증하기 위하여 시험하였다’라는 뜻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을 그대로 믿기 보다는 객관적인 증거로 하나님께서 보고 만질 수 있도록 나타내 보이라고 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딤전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이 다가오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맞는지 의심하고 불평하는 때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에 대하여 히 3:10~11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미혹되어’의 원뜻은 ‘방황하다’, ‘속다’, ‘잘못하다’라는 의미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보다는 현재에 부딪히고 있는 문제가 더 커 보이기에 믿음을 잃고 방황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없으므로 언제나 흔들리고 불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성령을 의지하고 믿음이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히 3: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은 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굳건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내 생각과 판단이 앞서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길을 가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기를 원하십니다.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알자’라는 단어의 원형 ‘알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야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 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할 때 ‘동침’이 ‘야다’입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경험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 역시 오직 성령으로 인한 체험으로 아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예를 들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 여자 집사님과 상담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분의 남편은 남을 이해하거나 수용하는 능력이 아주 부족한 분이었습니다. 그런 남편과 사는 부인은 자기의 마음을 읽어주지 못하는 남편으로 인하여 섭섭하였고 무척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부부간의 갈등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와 사는 날들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씨 착하고 고운 아내가 있어 행복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제게 상담을 청해 왔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면서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제게 영감을 주셨는데 지남철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지남철은 N극과 S극으로 이뤄졌습니다. 막대 지남철을 뚝 잘라도 여전히 하나는 N극과 S극으로 나눠집니다. 이처럼 남편이 극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아내의 극성도 강해지고 있음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 집사님께 남편의 문제로 고민하지 말고 오히려 그런 남편을 주심을 감사하며 받아들일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럴 때 집사님의 품성을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다른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크게 임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저의 제안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런 후 얼마가 지나 제게 고백을 합니다. 자기 안에 다른 사람에 대한 긍휼함이 더욱 크게 생겼고 이해력이 넓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게 유익이 되는 것만 생각하여 이럴 때 억울한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그렇습니다. 내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를 더욱 활성화하기 위하여 나와는 안 맞는 사람을 붙여 살도록 하므로 내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새롭게 되기 위하여 믿음의 공동체의 긴밀한 교제가 중요합니다.
히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권면하다’는 ‘옆으로 와서 도와주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의 ‘오늘’은 기회가 있는 동안을 말합니다.
삼상 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고 하였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사환으로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의 전을 섬길 때였습니다. 저녁이 되어 누었을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아! 사무엘아!”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리라고 꿈에도 생각을 못 해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가 “부르셨습니까? 저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였지만, 제사장 엘리는 “부르지 않았다. 가서 자라”고 합니다 사무엘은 누가 불렀는지를 여러 번 음성을 들은 후에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엘리가 직감적으로 깨달았습니다. “이번에 또 음성이 들리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하라.”고 말입니다. 사무엘은 네 번째 음성을 듣고 합당한 반응을 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이것이 ‘피차 권면하라’는 말씀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가 아직 어려서 분별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일러주는 것이 권면이라는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더니 그의 말을 하나도 땅에 덜어져서 소멸하지 않고 모두 응답하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아이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리라고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설마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겠어.” 하고 무시해 버립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축복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큰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 합당한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위대한 계획을 세우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때입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길을 알고 그 길을 걸으려고 해야 합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도록 우리의 느낌에 집중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 감정에 느껴지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에 밀려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머리로 다 이해가 안 되지만 하나님이 언제나 옳으십니다. 우리는 빨리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하나님의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위험해 보여도 하나님의 길로 가야지 다른 길로 가려고 하면 망합니다. 어리석어 보여도 하나님의 길로만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반역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우리로 믿음을 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엄청난 기적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일 때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미혹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람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단의 부추김을 더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불신을 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었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떠나는 죄까지 범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날그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기 쉽습니다. 죄의 유혹에 빠지고 굳어진 마음으로 돌변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그처럼 누군가가 위험한 모습으로 변할 때 우리가 서로서로 권면해야 합니다. 같이 유혹에 빠지지 말고 정신차리고 제 자리로 돌아오라고 권면해야 합니다. 그리해야 처음 믿을 때에 가졌던 확신을 끝까지 품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함께 누리게 됩니다. 믿음은 수시로 흔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들은 말씀으로 피차 확신을 품도록 권면할 때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 믿음에 서서 하나님의 선물을 풍성하게 누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