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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福34 제69차 文化遺産踏査(8-3); 雲峴宮 특별전(4-3)
淸 나라 幽閉時期 興宣大院君의 生活相
(99) 淸 保定府에 幽閉된 興宣大院君 (*幽: 그윽할 유)
*保定府: 중국 河北省 中部에 있는 州都로, 北京에서 남쪽으로
15㎞에 위치한 지역으로 정치의 중심지였음.
(100) 돌아와 천진에 이르러[回到天津]…우연히 읊다[偶吟]
回到天津 往中堂査庭後 偶吟(회도천진 왕중당사정후 우음) /
돌아와 天津에 이르러 中堂 査庭에 다녀온 후 우연히 읊는다.
天子의 호령에 배에 올랐다가, 中堂에 찾아온 것도 天命이라.
異言 異事는 모두 뜻밖인데, 同軌 同文은 오히려 눈앞에 있네.
萬 번 죽다 살아나기는 오늘만이 아니오, 사사롭지 않아 바름으로 돌아감은 뒷날의
경계이다.
나 같은 신세 누가 알 수 있을까? 오직 저 하늘만 있으니 따져 물어볼 거나.
-石坡 李昰應 雜記-
(101) 興宣大院君의 幽閉生活
*興宣大院君의 幽閉地, 舊 淸河道署
舊 淸河道署는 保定府의 行政官廳[道臺衙門, 1726년 건립]으로 興宣大院君이 유폐될
당시에 이미 賓館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근처에 直隸總督署가 있어 北洋大神 李鴻章이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
山東, 直隷, 奉天 3省의 通商, 外交 등의 업무를 관할하는 直隷總督은 北洋大臣의 업무를
兼職하고, 淸末 朝鮮에 대한 업무는 北洋大臣이 管掌하였다.
舊 淸河道署 자리에는 1901년 天主敎 聖堂[保定市 蓮池區 裕華路 2號]이 들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102) 淸 保定府에서 興宣大院君이 쓴 簡札
세 사람이 作奸(간악한 꾀를 부림)한 일을 만약 누설하면 실로 나에게 害를 입힌다.
절대 가볍게 행동하지 말라. 위에서 어떻게든 하지 않을 리 없다. 위에서 만약 魚∙金(금)
두 사람에 대해 논의하게 되면 나는 살아 돌아가기 어렵다. 십분 별다르게 헤아려라.
모두 이 한가지 일이니 은밀하게 도모하라. 위에서 들으면 우리나라 일은 매우 위태로워
진다. 魚∙金이 다시 이 땅에 들어오면 朝鮮은 OO가 아니리니…
-(중간 缺落)-
詔書에 대해서는 비록 다 기억하지 못하나 대강은 들었다. 이번 謀逆도 작년 가을의
凶事인데 (책임)을 나에게 돌리고 있다. 重典(重罰)을 받아야 마땅한데, 특별히 은혜롭게
減刑하신 것은 國王께서 스스로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某(大院君 자신)는 保定府에
안치하여 엄하게 가두어 사람들과의 사이를 막되, 그러나 희름(餼廩: 官府에서 주는 양식과
땔감)을 넉넉하게 준다고 한다. 李氏(大院君 자신)가 많은 비난을 듣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니, 이곳 士論(輿論)은 내보내라고들 한다. (*餼: 보낼 희 *廩: 곳집 름)
(103) 석파잡기[石坡雜記] -石坡 李昰應 -1882~1885년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石坡雜記>는 石坡 李昰應이 1882부터 1885년까지 淸 保定府에 幽閉 生活할 때 남긴
기록이다.
草書로 된 原本 자료를 筆寫로 淨書하고 이를 복사하여 影印한 것이다.
전체내용은 天津으로 被拉된 뒤에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과 李鴻章을 비롯한 淸國
인사들과의 筆談, 興宣大院君의 詩와 日記, 흥선대원군에게 보낸 膳物 物目, 면담신청서,
蘭草그림 요청 등으로 구성되었다.
保定府 幽閉時期의 흥선대원군 관련자료는 매우 희귀한 편으로, 당시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104) 흥선대원군 사진[興宣大院君 寫眞] -1882년
雲峴宮에서 寄贈한 興宣大院君위 天津 사진 原本이다.
사진 오른쪽 아래에 ‘高麗國 大院君 時 光緖八年 歲在 壬午 秋八月
盟日 照於 營務處’라고 써있어 興宣大院君이 淸軍에 납치되어
天津에 도착한 직후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105) 흥선대원군 간찰[興宣大院君 簡札] -1882~1885년
興宣大院君이 淸 保定府에서 幽閉生活 중에 가족과 정치적 助力者, 知人들에게 보낸 은밀한
쪽지 편지이다.
朝鮮의 국내사정과 歸還與否에 대한 정치적 상황을 전하는 내용과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天津에 도착한 후 保定府에 유폐될 때까지의 긴박한 旅程과 괴로운 拘禁生活을 濾過 없이
보여주고 있다.
(106) 칠보문좌삽병식 체경[七寶文座揷屛式 體鏡] –淸 代
몸 전체를 비추어 볼 수 있는 큰 거울인 體鏡으로, 하단에는 七寶,
그 위에는 獬豸를 장식한 臺座 위에 曲頭紋으로 테를 두른 틀 안에
거울을 부착하였다. (*獬: 해태 해 *豸: 해태 태)
거울 위에는 ‘壽’字가 透刻된 如意珠를 중심으로 두 마리의 龍을
조각한 전형적인 中國家具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107) 방등[方登](왼쪽)-태사의[太師椅] (*椅: 의자 의)
=방등[方登] –淸代
太師椅와 함께 淸代 家具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각형 의자이다.
다리와 다리 사이의 초입에는 唐草紋을 透刻하여 莊重하고 화려한 淸나라 때 가구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태사의[太師椅] -淸 代
중국의 官職名인 太師와 관련 지어 이름 지은 의자로, 南宋 때 太師를 지낸
秦檜(1090~1155)의 古事에서 비롯되었다. (*檜: 전나무 회)
太師椅는 北宋에서 시작하여 淸代까지 유행하였으며, 이 유물은 청나라 때 제작된 의자이다.
(108) 절임안진경 삼종서[節臨顔眞卿 三種書] -王堃 -19세기 (*堃: 땅 곤)
淸나라 왕곤(王堃)이 顔眞卿의 <爭座位帖>∙<自書告身>∙<送劉太冲敍>의 세 가지 筆跡에서
句節을 따 부채에 臨書하여 興宣大院君에게 보낸 것이다.
왕곤은 흥선대원군이 접했던 淸나라 文士로 여겨진다.
글씨는 臨書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筆致가 個性的이다.
*臨書: 法帖을 옆에 두고 이것을 보면서 쓰는 방법, 또 그렇게 쓴 글씨.
(109) 석란도[石蘭圖] -石坡 李昰應 -1884년(65세) 7월
興宣大院君이 淸 保定府에 유폐 중이던 高宗 21년(1884) 7월 어느 날, 열다섯 살 成年이 된
맏손자 石庭 李竣鏞(1870~1917)을 위해 그려 보내준 것이다. (*竣: 마칠 준)
현재 6폭이 전하는데 원래는 8~10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保定府 시절 興宣大院君 墨蘭畵의 典型을 보여주는 예로 꽃대가 많은 蕙蘭이다.
마지막 폭에 나이 육십오 세에 손자에게 그려 준다는 畵題가 있다.
雲峴宮의 財産 形成, 收入과 支出
(110) 量案을 통해 본 雲峴宮의 財産 形成
*量案: 토지를 측량하여 만든 土地臺帳.
(111) 雲峴宮 財産의 淵源과 形成過程
戶曹에서 ‘金堤∙萬頃∙全州∙益山 屯田의 租稅가운데에서 1,000냥(兩)은 종전대로
明禮宮(德壽宮)에 바치고 나머지는 모두 糧餉廳에 도로 소속시켜서 이른바 導掌이라는
명색을 영원히 革罷하소서.’라고 아뢰니, 傳敎하기를, “明禮宮에 바치는 것 외에는 모두
興宣大院君宮에 소속시키도록 하라.”고 하였다. (*餉: 건량 향)
*糧餉廳: 朝鮮後期 중앙 軍部隊의 하나인 訓鍊都監에 속한 재정기관.
(112) 富平府所在 寧嬪房 折受 各島 打量案(왼쪽부터)-富平府 鷹島 寧嬪房 新免稅陳田畓
打量成冊-富平府 靑蘿島所在 寧嬪房 新築堰畓 量案] (*蘿: 쑥 라 *堰: 둑 언)
=부평부소재 영빈방 절수 각도 타량안[富平府所在 寧嬪房 折受 各島 打量案] -1848년
1848년 10월 富平府에 있는 寧嬪房 折受地의 田畓과 柴場 현황을 기재한 兩岸으로,
靑蘿島, 鷹島, 西日島 등이 해당된다.
=부평부 응도 영빈방 신면세진전답 타량성책[富平府 鷹島 寧嬪房 新免稅陳田畓 打量成冊]
-1713년
1713년 9월 京畿右道 富平府 毛月串面 鷹島에 있는 寧嬪房의 新免稅 田畓 현황이
記載된 兩岸이다.
=부평부 청라도 소재 영빈방 신축언답 양안[富平府 靑蘿島 所在 寧嬪房 新築堰畓 量案]
-1859년 (*蘿: 쑥 라 *堰: 둑 언)
1859년 11월 富平府 靑蘿島에 있는 寧嬪房 新築堰畓의 현황을 기재한 양안이다.
*量案: 토지를 측량하여 만든 토지대장
(113) 부평부 서면 신대리 전지지 제언작답 양안[富平府 西面 新垈里 全地池
堰作畓 兩岸](왼쪽)-부평부 서면 신대리 전지지 제언작답 절목[富平府 西面 新垈里
全地池 堤堰作畓 節目] -1868년 (*堰: 둑 언)
1868년 1월 宗親府에서 작성한 富平府 西面에 있는 全地池의 堤堰作畓에 관한 節目이다.
*節目: 規則의 조목, 조항. 또는 항목. (유사어; 條目).
(114) 용천군 신북동 소재 운현궁 답험실수[龍川郡 新北垌 所在 雲峴宮 踏驗實數](왼쪽)-
평안도 용천부 신북동답 수세정식 절목[平安道 龍川府 新北垌畓 收稅定式 節目]
=용천군 신북동 소재 운현궁 답험실수[龍川郡 新北垌 所在 雲峴宮 踏驗實數]
-1900년 (*垌: 항아리 동)
1900년 3월 용천군 신북동에 있는 雲峴宮 소유 논의 현황을 기재한 양안이다.
=평안도 용천부 신북동답 수세정식 절목[平安道 龍川府 新北垌畓 收稅定式 節目] -1910년경
1865년 12월에 작성한 평안도 용천부 신북동에 있는 논의 收稅에 대한 절목으로,
龍川都護府使가 龍川 義州 境內의 신북동 莊土에 대한 현황과 向後 收稅 基準과 納稅 등에
관한 規定을 정하여 보고한 것이다.
(115) 만경현소재 명례궁속 각둔전답진 기구별 양안[萬頃縣所在 明禮宮屬 各屯田畓陳 起區別
量案](왼쪽)- 만경현소재 명례궁속 환구둔전답진 기구별 양안[萬頃縣所在 明禮宮屬
換舊屯田畓陳 起區別 量案]
=만경현소재 명례궁속 각둔전답진 기구별 양안[萬頃縣所在 明禮宮屬 各屯田畓陳 起區別
量案] -1853년
1853년 4월 全羅道 萬頃縣에 있는 明禮宮이 管轄하는 田畓 현황을 작성하여 보고한
양안이다.
다른 量案과는 다르게 규격이 큰 편이고, 책의 粧䌙을 비단으로 표지를 입히고 金屬으로
編綴하였다. (*䌙: 동일 황)
*粧䌙(裝潢): 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서 책이나 畫帖, 족자 따위를 꾸미어 만듦.
(*潢: 웅덩이 황)
=만경현소재 명례궁속 환구둔전답진 기구별 양안[萬頃縣所在 明禮宮屬 舊屯田畓陳 起區別
量案] -1853년
1853년 3월 全羅道 萬頃縣에 있는 明禮宮이 管轄하는 換屯田畓 현황을 작성하여 보고한
量案이다.
(116) 전주부 익산군소재 명례궁 둔답 양안[全州府 益山郡所在 明禮宮 屯畓 量案] -1853년
1853년 4월 30일 全州府와 益山郡에 있는 明禮宮의 屯畓 현황을 작성하여 보고한 양안이다.
量案의 마지막 면에 全州府 判官 尹奎錫과 內需司 사관 梁植이 서명하고 啓字印을
踏印(官印을 찍음)하였다.
*內需司: 朝鮮時代에 宮中에서 쓰는 쌀, 베, 잡물과 奴婢 등에 關한 일을 맡아보던 官衙.
(117) 김해부 노전 양안성책[金海府 蘆田 量案成冊](왼쪽)-김해 양산소재 남판서댁 노전 타량책
[金海 梁山所在 南判書宅 蘆田 打量冊] (*蘆: 갈대 노)
=김해부 노전 양안성책[金海府 蘆田 量案成冊] -1867년
1867년 12월 金海府에 있는 蘆田(갈대밭) 현황을 기재한 양안으로 옆에 전시된 打量
冊과 연계된 양안으로 보이며, 朝鮮後期 宮房의 蘆田 경영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김해 양산소재 남판서댁 노전 타량책[金海 梁山所在 南判書宅 蘆田 打量冊] -1859년
1859년 11월 金海 梁山에 있는 蘆田 현황을 기재한 양안이다.
蘆田, 즉 갈대밭만을 대상으로 작성된 양안으로 朝鮮後期 宮房의 蘆田 경영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118) 統照須知를 통해 본 雲峴宮의 財政運營 (*須: 모름지기 수)
(119) 統照須知를 통해 본 雲峴宮 土地分布 現況
(120) 통조수지[統照須知]
雲峴宮의 재정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한 會計帳簿 筆寫本(1889.01~1892.01; 3년 1개월)
(121) 統照須知에 나타난 雲峴宮 購入物品
(122) 운현궁 양안[雲峴宮 量案]
雲峴宮이 소유한 논, 밭 등 토지와 관련된 量案으로, 운현궁이 소유한 토지가 全國에 흩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면적도 상당이 넓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각종 免稅地가 있으며 糧餉廳, 明禮坊 등에서 관리하던 토지가 移屬된 것으로 보아
雲峴宮은 단순한 私家가 아닌 王室財政의 일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餉: 건량 향 *坊: 동네 방)
*糧餉廳: 조선후기 중앙 軍部隊의 하나인 訓鍊都監에 속한 재정기관.
*明禮坊: 조선시대 초기부터 있던 漢城府 남부 11방 중의 하나.
老樂堂
(123) 老樂堂
(124) 老樂堂 -2012.12.11 운현궁에서 촬영한 사진-
(125) [老樂堂] 편액(扁額)
雲峴宮의 안채인 [老樂堂]의 堂號를 쓴 편액이다.
老樂堂은 雲峴宮의 가장 中心이 되는 건물로 高宗과 明成皇后 閔氏가 嘉禮를 치른 곳이다.
[老樂堂] 扁額은 威堂 申觀浩(1810~1888, 나중에 申櫶으로 改名)의 글씨이다.
(*櫶: 나무이름 헌)
威堂 申觀浩는 武官이었으나 詩, 書, 金石學에서 秋史 金正喜의 의발(*衣鉢은 佛敎 用語)
傳受받은 弟子로 알려진 文武를 겸비한 인물이다.
款識로는 白文方印의 ‘大司馬 大將軍’, 朱文方印의 ‘申觀浩 印’을 찍었다.
*款識(관지): 글자 등을 陰刻한 것과 陽刻한 것을 아울러 이르는 말.
*白文方印: 모양은 네모이며, 그림이나 글씨를 陰刻하여 종이에 찍었을 때 글씨가
하얗게 나오는 도장.
*朱文方印: 글자나 그림 등을 陽刻으로 새겨 종이에 찍었을 때 글씨가 붉게 나오는
사각 모양의 도장.
(126) 노락당기[老樂堂記] -1864년
高宗 元年(1864)에 제작하여 雲峴宮 老樂堂에 걸어 두었던 懸板으로, 당시 禮曹判書 穎樵
金炳學이 짓고, 글씨는 承政院 都承旨 瓛齋 朴珪壽가 썼다.
(*穎: 이삭 영 *樵: 나무할 초 *瓛: 옥홀 환)
현판 내용은 老樂堂의 건립과 이와 관련된 제반 내용을 담고 있다.
聖上 元年 甲子 9월에 大院君의 새로운 집이 造成되고, 大王大妃와 王大妃를 모시고 吉日을
택하여 行次한 내용을 담았다.
또한 聖上께서는 潛邸에서 나와 임금이 되셨으니 이러한 것은 하늘과 땅의 靈驗과 徵兆의
결과라고 하는 등 國王과 그 一家에 대해 稱頌하였다.
*潛邸: 나라를 세우거나 임금의 親族에 들어와 임금이 된 사람의 임금이 되기 전의 시기.
또는 그 시기에 살던 집.
(127) 백자청화 ‘운현’명 접시[白瓷靑華 ‘雲峴’銘 楪匙] (*楪: 마루 접 *匙: 숟가락 시)
접시의 안쪽 바닥에 ‘福’字, 굽 안 바닥에’雲峴’ 銘文이 있는 접시로, ‘雲峴’ 명문으로 보아
운현궁에서 쓰던 그릇임을 알 수 있다.
草花紋, 寶相唐草文 등을 그렸다.
(오른/족부터) 白瓷靑華草花紋 ‘雲峴’銘 접시-白瓷靑華草花紋 ‘雲峴’銘 접시-
白瓷 ‘雲峴’銘 접시-백자청화초화문 ‘雲峴’명 접시- 백자청화 ‘雲峴’명 접시
(128) 대삼작(大三作)노리개 -조선 후기 –진주, 호박, 산호
노리개는 女性의 몸치장으로 韓服 저고리의 고름이나 치마허리 등에 다는 패물로 宮中은
물론 上流社會와 平民에 이르기까지 널리 애용되던 장식물이다.
金∙銀∙玉石∙寶貝의 진귀함과 크기∙규모에 따라 대삼작∙중삼작∙소삼작 노리개로 구분되며,
재료 및 형태에 따라 구분하기도 한다.
대삼작노리개는 가장 크고 호화로운 노리개로 주로 宮中에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삼작을 한곳으로 연결한 띠돈 뒷면의 고리로 옷고름에 걸며, 꽃모양을 조각한 귀이개,
호리병형 香盒, 바늘통을 달아 장식과 實用을 겸하였다.
(129) 삼작노리개 -조선 후기 –산호, 玉, 琥珀
(130) 첩지[疊紙](앞에서부터)-칠보죽잠[七寶竹簪]-서각매화잠[犀角梅花簪]
=첩지[疊紙] -19세기 [*疊: 겹쳐질 첩 *簪: 비녀 잠 *犀; 무소(코뿔소) 서]
宮中에서 內外命婦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머리 중앙에 착용했던 裝身具로, 鳳凰 첩지는
王妃 또는 世子嬪이 착용하였다.
=칠보죽잠[七寶竹簪] -朝鮮 末期
대나무와 梅花를 七寶로 장식한 비녀로, 가는 陰刻線으로 대마디를 표현하고 그 사이에는
가는 線으로 昆蟲모양의 장식을 부착하였다.
=서각매화잠[犀角梅花簪] -조선 말기
검은색 물소뿔로 만든 비녀로 주로 궁중에서 葬禮用으로 사용했으며, 石榴와 梅花무늬를
조각하였다.
(131) 여흥부대부인 민씨 교지[驪興府大夫人 閔氏 敎旨] -1863년
高宗의 母親이며, 興宣大院君의 夫人 閔氏(1818~1898)를 驪興府大夫人에 封하는 敎旨이다.
高宗 즉위 직후인 1863년 12월 興宣君을 ‘大院君’으로 封爵하는 교지와 함께 내렸다.
(*爵: 벼슬 작)
(132) 餘興 閔氏와 驪興府大夫人
(133)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1899년 (*璿: 구슬 선)
肅宗 때부터 1931년까지의 王室族譜이다. 興宣大院君의 母親 郡夫人 閔氏, 夫人
驪興府大夫人 閔氏를 함께 수록하였다.
大院君家와 驪興 閔氏와의 계속된 혼인관계는 두 家門의 깊은 관계를 보여준다.
(134) 雲峴宮의 祭器, 계이[鷄彛](왼쪽부터)-황이[黃彛]-가이[斝彛]
=계이[鷄彛] -조선 말기 –개인소장 (*彛: 떳떳할 이)
宗廟祭禮나 王室喪禮에 사용하던 祭器로 鳥彛와 함께 사용하였다.
봄에는 明水, 여름에는 鬱鬯酒를 담아 올렸으며, 몸체의 앞 뒷면 중앙에 東方의 생물이며
仁을 상징하는 닭을 조각하였다.
=황이[黃彛] -조선 말기 –개인소장
宗廟祭禮나 王室喪禮에 사용하던 祭器로 가이(斝彛)와 한 쌍을 이룬다.
가을에는 鬱鬯酒, 겨울에는 明水를 담아 올렸다. (鬯: 울창주 창)
몸체의 앞 뒷면 중앙에는 눈을 조각했는데 黃彛는 황금으로 눈을 그린 黃目尊으로,
이때 눈은 청명한 氣를 이른다. (*斝: 술잔 가 *尊: 술 그릇 준)
=가이[斝彛] -조선 말기 –개인소장 (*斝: 술잔 가)
宗廟祭禮나 王室喪禮에 사용하던 祭器로 황이(黃彛)와 함께 쌍으로 사용하였다.
가을에는 明水, 겨울에는 울창주를 담아 올렸다.
몸체에는 잘 익어 고개를 숙인 벼를 조각했는데 이는 白色과 義를 상징한다.
<宗廟儀軌> 등의 기록에는 손잡이가 달려있는 것으로 전하는 것과 다르게 손잡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135) 홍칠삼층 각게수리장[紅漆三層 千眼廚欌]
-19세기 말~20세기 초 -피나무 (*廚: 부엌 주 *欌: 장롱 장)
紅漆하고 여닫이 문안에 서랍 여러 개를 설치한 3층 각게수리장으로,
귀중품을 보관하기 위한 金庫나 藥欌으로도 사용하던 가구이다.
여닫이 문짝 四方 테두리에 如意珠를 가운데에 두고 마주 보는 한 쌍의
龍을 장식하여 宮中에서 사용하던 家具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단의 서랍에는 꽃을, 문 복판에는 수팔련[水波蓮]과 ‘壽’字를,
네 칸의 마름칸에는 壽∙福∙康∙寧을 한 글자씩 배치하였다.
(136) 괴석모란도 병풍[怪石牡丹圖 屛風] -19세기 말
牡丹과 怪石을 함께 그린 전형적인 宮中畵風의 牡丹圖이다.
모란은 富貴榮華를 상징하며, 牡丹圖는 嘉禮 등 王室의 慶事뿐만 아니라 葬禮儀式과
宗廟에서 거행하는 祖上崇拜儀禮에도 사용했으며, 주로 宮中의 畵院畵家들이 제작하였다.
4폭 병풍 2점으로 구성되었으며, 같은 畵本으로 제작하여 거의 비슷한 형태를 지닌다.
각 폭마다 붉은색과 흰색 모란을 ‘之’字 모양으로 배치하고 그림 하단의 怪石은 같은 모양에
진한 靑色과 연한 黃土色을 번갈아 사용하여 변화를 주고 있다.
(137) 생신기신첩[生辰忌辰帖] -年代 未詳
雲峴宮에서 年中 챙겨야 했던 生辰日과 忌辰日을 알아보기 쉽게 날짜 별로 정리한 帖으로,
正月부터 12월까지 매 달을 한 面으로 하고 해당 날짜에 내용을 기입하였다.
1년 중에 64일에 내용이 기입되었다.
(138) 희준[犧尊] -조선 말기 –개인 소장 (*尊: 술 그릇 준)
宗廟祭禮나 王室喪禮에 쓰던 祭器로 봄과 여름 제사 때 明水와 醴齊를 담았다.
(*醴: 단술 예)
살집이 있는 소의 모습을 形象化했는데 귀는 쫑긋하게 세우고 뿔은 안으로 굽은 모습이다.
등에는 손잡이와 뚜껑이 달려있어 분리할 수 있고 손잡이의 양끝은 꽃봉오리 모양으로
장식하였다.
(139) 국기탄신 가기생신표[國忌誕辰 家忌生辰表] -연대 미상
朝鮮 歷代 王과 王妃의 國忌日(제삿날)과 誕辰日, 雲峴宮 사람들의
忌日과 生日을 정리한 표이다.
표의 한 면에 보름단위로 내용을 기입하고 앞뒤 양면으로 작성하여
총 12매의 표를 액자 안에 넣었다.
(140) 老樂堂, 高宗∙明成皇后 嘉禮空間
(141) 고종명성황후가례도감의궤[高宗明成王后嘉禮圖鑑儀軌] -1866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1866년 3월 雲峴宮에서 거행한 高宗과 明成皇后의 嘉禮過程을 상세하게 기록한 儀軌이다.
婚禮式 행렬을 그린 班次圖와 사용한 물품 등을 그린 圖說로 구성되었다.
특히 이 嘉禮 班次圖에는 大院君의 轎子와 府大夫人의 덩[德應; 가마]이 있어 대원군과
부대부인이 嘉禮에 함께 참석한 것을 알 수 있다. (*轎: 가마 교)
(142) 왕비가례등록[王妃嘉禮謄錄] -1910년경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복제품) (*謄: 베낄 등)
1866년 3월 高宗과 明成皇后의 嘉禮를 치르면서 同牢宴과 朝見禮에 필요한 饌品의
준비과정을 기록한 謄錄이다. (*牢: 우리 뢰 *見: 뵈올 현 *饌: 반찬 찬)
원래 司饔院은 吏曹에 속한 正三品 衙門으로 王의 식사와 大闕 안의 음식물 공급에 관한
일을 맡은 官廳이다. (*饔: 아참밥 옹)
특별히 王室 嘉禮에는 동뢰연과 조현례 음식을 담당하였다.
맨 앞에 初揀擇부터 大殿 조현례까지 日時를 기록하였다. (*揀: 가릴 간)
*동뢰연(同牢宴): 신랑과 신부가 新婚의 交拜儀式을 마치고 마주 앉아 술잔을 나누는 儀禮.
*조현례(朝見禮): 妃∙嬪이 새로 간택되어 嘉禮를 마친 후 父王과 母妃를 뵙는 예식.
*饌品: 반찬. 그 수는 제사나 의식의 종류, 신분에 따라 정해져 있었음.
(143) 병인가례시 기명발기[丙寅嘉禮時 器皿發記] -1866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복제품) (*皿: 그릇 명)
高宗과 明成皇后 嘉禮 때 사용한 物品名과 그 수량을 적은 문서이다.
각 節次에 따라 필요한 器物이 나열되어 高宗의 嘉禮를 얼마나 盛大하게 치렀는지 알 수 있다.
(144) 병인가례시 정각명 청화백자수복문항아리[丙寅嘉禮時 靑華白瓷 壽福紋缸]
-1866년 –높이 20.8cm, 몸통지름 21.5cm
丙寅年 嘉禮인 1866년 高宗과 明成皇后 嘉禮 때 사용한 항아리이다.
굽 주변에는 한글로 새긴 ‘병인가례시 큰뎐고간 대듕쇼 이십듁’이라는 銘文이 있는데
‘큰뎐고간’은 大殿 곳간을 뜻하며, ‘대듕쇼’는 大∙中∙小를, ‘이십듁’은 20죽(1죽; 10개)를
뜻한다. (*대는 ‘아래 아’로 표기)
따라서 이 항아리는 丙寅年 高宗 嘉禮 때 大殿 곳간에서 사용한 대∙중∙소 200개의 그릇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 景福34 제69차 文化遺産踏査(8-4); 雲峴宮 특별전(4-4)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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