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 교체기의 이신(貳臣), 홍승주(洪承疇)
청나라의 개국과 관련하여, 범문정을 이야기하면, 홍승주를 빠트릴 수 없다. 두 사람은 모두 한족이고, 청나라건국에 공이 크다. 그러나, 필자는 범문정은 동정하지만, 홍승주는 좋아할 수 없다.
청사고에서 :홍승주는 자는 형구(亨九)이고, 복건 남안(천주) 사람이다. 명나라 만력44년에 진사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는 숭정황제가 아주 총애하고 믿던 명나라의 중신이다. 그는 일생동안 명나라주씨황가의 은덕을 입었고, 그 깊이는 바다처럼 깊었다. 이 점에 대하여 그 자신도 부인하지 않았다. 홍승주는 대련을 하나 지어서 자기집에 걸어둔 적이 있는데 바로 다음과 같은 글이어?.
군은심사해(君恩深似海)
신절중여산(臣節重如山)
임금의 은혜는 바다처럼 깊고,
신하의 절개는 산처럼 무겁다.
홍승주의 벼슬길은 그다지 순탄하지는 않았다. 그는 비록 명문집안출신이지만, 그의 증조부때 집안이 몰락했고, 홍승주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집안이 빈한했다. 그리하여 그가 11세때 부득이 공부를 중단해야 했고, 모친을 도와 두부를 만들어 거리에 가지고 나가 팔았다. 그러나, 홍승주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고, 두부를 팔면서도 빈시간을 이용하여 자주 친족인 홍계윤이 연 학관에서 강의를 청강하곤 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을 도와서 대자(對子)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홍계윤은 홍승주가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졌고 포부를 가졌음을 알고, 학비를 면제해주고 제자를 삼아주었다. 홍승주는 아주 열심히 공부하고, 많은 책을 읽어 스승의 칭찬을 들었다. 스승인 홍계윤은 일찌기 그의 문장에 평가를 하면서 "가구천리, 국석만균(家駒千里, 國石萬鈞)"으로 높이 평가한 바 있다. 또 한번은 그가 홍계윤 선생과 대련을 만들면서 벼루를 주제로 하여 다음과 같이 답한 적이 있다고 한다. "검은 벼루, 벼루는 검다. 관리의 철골은 단단하게 검게 싸여 있다". 이는 그가 청렴하고 성취를 거두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큰 포부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것이다. 만력43년(1615년)에 홍승주는 향시에 합격하고 다음해에 북경의 회시에 참가하여 진사가 된다. 홍승주는 벼슬길에 나간 이후, 계속 강서, 절강, 섬서등지에서 관리를 지냈는데 모두 하급관리였다.
홍승주가 드러나게 된 것은 숭정제때였다. 명나라말기의 정치부패로 농민반란이 계속되었다. 숭정원년(1628년)에서 숭정3년의 기간동안 고영상, 장헌충, 이자성이 선후로 반란을 일으켰다. 홍승주는 농민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그의 정치, 군사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참정, 순무를 거쳐 섬서삼변총독을 거쳐, 태자태보, 병부상서의 직함을 지니고 하남,산서,섬서,호광,사천의 5개성의 군사총독을 지냈다. 홍승주의 최대공로는 고영상을 포로로 잡아 죽이고, 이자상을 대파한 일이다. 일시에 홍승주의 명성은 크게 떨쳤고, 그의 군공으로 "홍군(洪軍)"으로 불릴 정도였다. 이때부터 숭정황제는 홍승주를 특히 아끼고, 계속 상을 내렸다. 숭정11년(1638년) 9월, 청태종이 의주를 점령하고 금주를 포위공격하여, 관외의 사정이 아주 다급해졌다. 청사고에 의하면, "장열제(숭정)는 홍승주를 불러서 보위하게 하였다. 다음 해 봄, 홍승주를 계요군무총독으로 전보했다" 숭정12년(1639년) 봄에 숭정제는 부득이하게 홍승주를 계료총독에 임명하고 관외의 군무를 담당하게 한다. 숭정이 보기에 만청의 위협이 농민반란군의 위협보다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부득이 동쪽담장을 헐어서 서쪽담장을 메우는 식으로 홍승주를 농민반란집압업무에서 빼서, 관외의 청나라를 대응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홍승주는 숭정제의 이런 은덕을 배신한다. 송산에서 대패하고, 포로로 붙잡힌다. 동시에 포로로 잡힌 사람은 구민앙(邱民仰), 조변교(曹變蛟), 왕정신(王廷臣)등이 있었다. 청사고에 의하면, "승주, 민앙, 변교, 정신 및 여러 장수를 붙잡고, 항복한 잔졸이 3천이 넘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청태종은 구민앙, 조변교, 왕정신을 죽이라고 명령하고, 오로지 홍승주는 성경으로 호송하라고 지시한다. 청태종의 뜻은 분명했다. "황상은 홍승주를 거두어 쓰고 싶어했다" 처음에 홍승주는 두려움 없이 죽음으로 숭정제의 은혜에 보답할 뜻을 나타냈다. 일찌기 "목을 내밀어 칼날을 맞이하고자" 하였고, 시종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홍승주의 이런 행위는 완전히 살아남기 위한 지혜였다고 말한다. 이로써 자기의 가치를 높이려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설이 맞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는 청태종이 홍승주의 항복을 받아내는 이야기가 나온다. 청궁희에서 여러번 언급되고, 소설로도 쓰여졌다. 예를 들면, 홍승주가 여색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는 십수명의 미녀를 보내어주었다든지, 장비(후의 효장태후)로 하여금 직접
홍승주를 설득하게 하였고, 친히 인삼탕을 먹여주었다든지 하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바로 범문정이 홍승주의 항복을 권유한 일일 것이다. 청사고의 기재에 의하면, 청태종은 범문정에게 항복권유를 명한다. 범문정은 처음에 항복얘기를 꺼냈다가 홍승주가 큰 소리로 욕을 했다. 그러자, 범문정은 꾹참고 항복 얘기는 꺼내지 않고 그저 고금의 이런 저런 일들에 대하여 논의했다. 이야기하는 중에 서까래에서 먼지가 떨어져서 홍승주의 옷에 묻었다. 홍승주는 말하면서 그것을 털어냈다. 범문정을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홍승주는 죽지 않습니다. 옷도 아끼는데 하물며 자기의 몸이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음 날, 청태종이 친히 태묘로 갔다. 홍승주는 서서 무릎을 꿇지 않았다. 청태종은 이것저것 불편한데가 없는지 물으며, 홍승주가 옷을 ?게 입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자기가 입고 있던 담비가죽옷을 벗어서 홍승주에게 입혀주었다. 이때 홍승주는 눈을 크게 뜨고 한참을 쳐다보다가, 탄식하며, "진명천자이구나"라고 하고는 바로 머리를 숙이고 항복하였다고 한다. 청태종은 아주 기뻐서 "이제 길안내자를 얻었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리오"라고 했다고 한다. 길안내라라 함은 청나라가 중원으로 들어가는데 길을 안내할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때, 북경의 숭정제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숭정제는 홍승주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원래 홍승주가 변절할 것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다. 청사고의 기재에 의하면, "숭정은 홍승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16단에 제사를 지내고, 도성바깥에 사당을 만들어서, 구민앙과 나란히 놓았으며, 숭정제가 친히 제사를 지냈다. 나중에 홍승주가 투항했다는 말을 듣고는 제사를 그만두었다." 원래 숭정제는 홍승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3일간 조회를 멈추었고, 왕후의 규격으로 16단에 제사를 지내주었다. 7일의 제사 즉 5월 10일에는 친히 제사를 주재해서, "도홍경락문"을 써서 천하에 반포했다. 동시에 제사지낸 것은 피살된 순무 구민앙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제9단에 제사를 지낼 때, 홍승주가 항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숭정제는 깜짝 놀랐다. 홍승주의 인품은 숭정제때 아주 이름이 높았다. 홍승주가 가장 충성스럽다는 것이 보편적인 평가였다. 이처럼 충성스런 사람이 어찌 변절한단 말인가? 숭정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 제사는 슬쩍 중단되고 말았다. 여러해후, 청나라가 북경에 들어온 후에야 백성들은 비로소 홍승주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다. 놀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또 한가지는 지금까지도 논쟁이 있는 건이다. 홍승주가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비록 청태종이 후대했지만, 그는 관직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왜인가? 청사고에 의하면, "홍승주는 항복하고, 상황기한군에 예속외었다. 태종은 그를 후하게 대해주었지만, 태종이 죽을 때까지 관직을 명받지 않았다" 홍승주를 동정하는 사람들은 홍승주가 여전히 그의 품격을 드러낸 것이라고 한다. 즉, 명나라가 망하지 않고, 숭정제가 살아있는 한 그는 관직을 맡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그래도 절개를 지닌 인물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청나라조정은 홍승주와 같은 투항한 신하들에 대하여 여전히 경계하고 있었고, 안심하지 못했다. 이것이 청태종의 진실한 생각이다. 그가 중시한 것은 홍승주의 계책이어ㅆ고, 명나라의 정치군사에 대한 정보였다.
그에게 실권을 쥐어줄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만일 숭정제에 대하여 미안한 감이 있어서라면, 그것은 전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섭정왕 도르곤이 북경에 들어올 때, 홍승주는 이미 말을 타고 아주 공을 많이 세웠다. 숭정제가 막다른 골목에 몰려, 매산에서 목을 맬 때, 홍승주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는 도르곤을 도와서 천군만마로 북경을 포위하였다. 그가 미안해 했다고? 그럴 가능성은 없다. 도적(남명)을 체포하고, 평정했다. 나중에 다시 초,월,전,검제성경략을 맡아서 서남을 평정했으니, 모두 그의 공이다" 이에 이르러 그는 공로가 크게 되었다. 그러나 불쌍한 점은 청나라의 주군은 여전히 홍승주에 대하여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도도의 후임으로 남경에 있을 때, 밀고사건을 겪게 되고,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한다. 한번은 남명 노왕의 부하로부터 온 항복권유서신사건이고, 또 한번은 승려인 함가의 사건이다. 후자는 승려가 지니고 다니던 반청복명의 서신초고일 뿐이었다. 다행히 도르곤이 여전히 홍승주를 중용하여 더 이상 추궁받지 않았다. 홍승주는 청나라에 대한 공이 컸지만, 상을 받지는 못했다. 순치18년(1661년) 정월에 순치제가 죽고 강희제가 죽위한 후 홍승주는 그만 쉬겠다고 상소를올린다. 조정은 논쟁을 거쳐 3등아달하하번(경차도위)의 세습작위를 내리고 끝낸다.
또 하나의 일도 홍승주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건륭황제는 청나라건륭41년 12월 초3일에 조서를 내려, 국사관에 <<명계이신전>>을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그는 명청의 교체기에 홍승주등 명나라말기의 신하들은 바람의 흐름을 보고 의탁해왔는데, 당시 청나라는 "천하통일의 규모를 생각하여 부득이 그대로 임용하였고, 이로써 인심을 안정시키고, 순과 역을 분명히 했다. ...이들은 승리국의 관료로서, 나라가 어려운 때를 만나서, 그 주인의 위기에 도움을 주지 아니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살기를 구하여 항복한 것이니 어찌 완벽한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이는 분명히 청나라에 항복한 명나라신하들을 멸시하는 내용이었다. 건륭은 충군을 기준으로 삼았으므로 청나라에 항복한 명나라신하를 모조리 "이신(貳臣, 두 황조를 섬긴 신하)"으로 불렀다. 충군사상에서 보면 이들은 절개를 지키는데 문제가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홍승주 등은 모두 청사고의 <<이신전>>에 들어가게 된다.
홍승주는 은혜를 저버리고 절개를 지키지 못했으므로, 그의 친구들도 이를 부끄럽게 여겼다. 이에 관련된 이야기도 적지 않게 전해진다. 한가지 작은 에피소드를 소개하기로 한다. 홍승주가 청나라조정에서 관직을 지낸 이후 한번은 음력 곡우(穀雨)때 친구와 바둑을 두었다. 그 동안에내왔고 시녀가 차를 보내왔고, 손님이 마셨다. 마시니 향기가 입과 코에 가득했다. 그래셔, "차향이 좋다고 싶었더니 원래 우전차(雨前茶, 곡우이전에 난 새순으로 만든 차로 최고급차임)이군" 그러자 홍승주는 바로 대구를 내었다.
"일국기평, 차일기호망곡우(一局棋枰, 此日幾乎忘穀雨)"
바둑을 한 판 두다보니, 이 날이 곡우인지도 거의 잊어버렸네.
그러자, 친구가 아랫구를 말했는데, 아주 의미가 깊다.
"양조영수, 타년하이별청명(兩朝領袖, 他年何以別淸明)"
두 왕조의 영수인데, 이후 어떻게 청(淸)과 명(明)을 구분할 것인가?(청명은 곡우처럼 절기이기도 함)
또 어떤 사람은 예전에 홍승주가 썼던 대련을 가지고 풍자하기도 하였다.
군은심사해의(君恩深似海矣)!
신절중여산호(臣節重如山乎)?
임금의 은혜는 바다처럼 깊구나!
(그런데) 신하의 절개도 산처럼 중한가?
강희4년(1665년) 홍승주는 병사하니 향년73세이다. 홍승주는 북경시 해전구 차도구에 묻혔다. 그러나, 그의 묘지는 지금은 찾아볼 수가 없다. 현재는 그저 석사자 한 쌍만 전해질 뿐이라고 한다. 홍승주와 같이 극히 총명한 사람도 결국은 이런 결말을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