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산 전투
평양에서 철수한 우리 부대는 상원-수완-신계-연천을 거쳐 38선 이남인 동두천에 도착했다. 후퇴하는 과정에서는 연천 부근에서 인민군 패잔병들과 교전을 했을 뿐이었다. 동두천에 도착한 우리 부대는, 한탄강변에 防禦(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중공군의 인해전술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1951년 1월1일 중공군은 우리의 좌측 서부전선 쪽의 고랑포에서 임진강을 건너 우리의 후방인 의정부를 점령했다. 결국 우리는 전투도 해보지 못한 채 한탄강 방어선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의 大공세로 유엔군과 국군은 서울도 포기하고, 全 전선에서 37도선까지 후퇴하게 되었는데 우리 부대는 충청북도 진천군의 광혜원으로 후퇴하였다. 광혜원에서는 신병 보충으로 부대 정비를 하고 나서 용인 방면으로 수색작전을 하고 있을 뿐 모처럼의 휴식이었다. 나는 중대서무로 6·25 이후 8월분까지 중대원 봉급 중에서 전사자와 실종자 등 지급할 수 없었던 돈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중대장과 상의해서 그 돈으로 소를 사서 중대원들에게 영양보충을 시켰다(1950년 9월 이후는 봉급 신청조차 할 수가 없었음).
3월이 되자 우리 부대도 38선을 향해 北進(북진)을 시작했다. 중공군의 春界(춘계) 공세로 전선은 밀고 밀리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4월이 되면서 全 전선에서 아군이 북진을 거듭해 38선을 넘게 되었다. 우리 부대도 춘천을 거쳐 38선을 넘어 화천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사창리로 진입했는데 중공군 부대의 기습을 받게 되었다. 우리 부대(7연대)보다 먼저 사창리에 진입한 2연대가 북쪽 고지를 확보하려다가 그 고지에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의 기습을 받아 무너져 내려 우리 부대 병력은 미처 차에서 다 내리기도 전에 敵의 공격을 받게 되어 남쪽 산을 넘어 가평 쪽으로 후퇴했다.
우리 사단(6사단)의 사창리 敗戰(패전) 때문에 진격 중이던 我軍(아군) 전선이 다시 남쪽으로 밀리고 우리 사단은 홍천강 남쪽 용문산까지 후퇴하여 방어진지를 구축, 결사 항쟁을 준비하게 된다. 사창리 패전의 시발이 된 2연대는 용문산 북쪽 3개 고지에 1개 대대씩 四周(사주)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전원 玉碎(옥쇄)를 각오한 방어태세를 갖추었고 사단 주력은 용문산 주봉 능선을 따라 主저항선을 설치, 철조망과 지뢰를 매설하고 전투 상황이 벌어지면 主저항선 50m 후방에 독전대를 배치, 후퇴하는 자는 무조건 사살할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5월 하순에 접어들자 중공군 대부대는 그들의 장기인 야간공격을 해왔다. 우리 2연대의 사주 방어 高地(고지)들을 하나도 점령하지 못한 상태에서 용문산 主저항선을 공격해 왔다. 갈고리 장치를 한 긴 장대로 우리의 線(선) 지뢰의 뇌관줄을 긁어당겨 폭발시키며 올라왔지만, 조명지뢰가 여기저기서 폭발하여 그들의 병력이 노출되어 우리의 총탄세례의 효과만을 더했을 뿐이었다. 일부에서는 긴 줄에 소시지를 매단 것 같은 爆藥(폭약)장치로 우리의 철조망을 폭발시켜 끊어놓은 곳도 있었지만, 그 구멍으로는 인해전술 병력을 넣어 공격할 수는 없었다.
중공군 시체에서 금니 빼던 美軍들
중공군 大부대가 우리의 저항선을 뚫지 못한 상태에서 날이 밝자 우리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主저항선과 중공군의 퇴로 쪽에 있던 사주방어 고지들에서 일제히 반격이 시작되자 중공군은 홍천강 쪽으로 도망을 치게 되었다. 이때 공군 제트기가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유엔군의 화력戰 앞에 비참한 패배를 기록한 용문산 전투였다. 우리 6사단은 도망치는 敵을 계속 추격, 화천 발전소의 저수지 쪽으로 몰고 갔다. 청평과 춘천 부근의 敵도 유엔군의 공격으로 총 후퇴를 하게 되었다.
화천 발전소의 저수지로 퇴로가 막힌 중공군이 저수지 남서쪽에서 구만리 발전소로 통하는 꼬불꼬불한 저수지 통로에서 무질서하게 몰려서 후퇴하는 것을 우리 부대는 저수지 서쪽 山능선에서 사격을 하고 공군 제트기가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이래서 그 10리길이 중공군의 시체와 그들이 갖고 나온 노새, 당나귀 시체로 가득 메우게 되었다.
나는 저수지 서남쪽 유천리에는 토금광 굴이 있다는 것을 1949년 연대 수색대 시절에 알고 있었기에 중대원들과 수색을 했더니 토금광 굴마다 중공군이 숨어 있었다. 우리는 이들을 포로로 잡았는데 300명이 넘었다. 이들 중에는 우리에게 옛 국부군(대만 장개석 군대를 지칭) 시절의 수첩을 보이며 자기는 팔로군(공산군)이 아니라고 하며 억울하게 끌려 나왔다고 하는 자도 몇 명 있었다. 중공이 옛 국부군 출신들을 인해전술의 소모품으로 내보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우리 부대가 300여 명의 포로를 잡게 되어 중공군의 포로 총 수가 1만 명을 넘게 되었다고도 했다.
미군 공병대가 불도저로 유천리와 발전소간의 도로에 있던 중공군 시체들을 저수지 쪽으로 밀어내어 도로가 개통된 뒤 나는 시체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이 도로를 통과한 적이 있었다. 도로에서 저수지 수면까지의 사이에 중공군 시체가 널려 있었는데 美軍 몇 명이 그 썩은 시체들을 뒤지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서 자세히 보았더니 뺀치로 시체 속의 금니를 빼고 있었다. 우리가 뭐냐고 고함을 질렀더니 “프리젠트(선물)…”라고 했다. 시체서 뺀 금니로 선물을 만들 모양이었다. 사람의 시체에 임하는 동·서양의 차이를 느꼈다.
금성천 전투에서 당한 부상
중공군의 인해 전술이 유엔군의 막강한 火力(화력) 앞에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공산군 측이 휴전을 제의해왔다. 우리 6사단은 밴플리트 장군의 美 9군단 소속으로 화천 동북방 북한강 줄기 서쪽을 따라 금성 방향으로 이어지는 고지들을 점령하며 서서히 북진하던 7월 초,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크게 실망하여 온 몸에서 맥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전쟁에서 이겨서 고향에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온갖 어려움과 고통을 참고 싸웠는데 휴전이라니…’ 앞이 막막했다. 휴전 회담이 시작된 탓인지 7~8월 여름 동안은 전투가 거의 없어서 우리 중대는 모처럼 개울가에 내려와 목욕도 하고 전쟁으로 불타 없어진 산골마을에서 들개처럼 돼 버린 개들을 잡아서 보신탕을 끓여 먹기도 했다.
이때 몇 달 동안 심하면 1년 내내 머리 한 번 제대로 감아보지 못했던 병사들이 무거운 철모 속에 눌려있던 머리를 개울서 감게 되었는데 너나 할 것 없이 머리칼이 많이 빠지게 되었다. 이것을 본 종군 기자들이 군대에 납품된 비누가 나빠서 머리칼이 많이 빠진다고 봐 ‘탈모비누사건’으로 보도하기도….
여름이 가고 9~10월이 되자 금성 돌출부로 불리던 우리 전선에서는 다시 전투가 시작되어 우리 대대는 금성천과 금강천이 갈리는 북쪽 지점에 있는 800 몇 고지를 중공군과 백병전 끝에 점령하게 되는데 나는 이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나는 오른팔과 어깨에 수류탄 파편창을 입었으나 심하지는 않았다.
1952년 3월 충북 청주에서 제대
나는 육군병원에서 1949년 겨울 춘천 도립병원에서 관통 총창 골절이 된 왼발을 제대로 뼈를 바르게 접착시키지 못해 활처럼 휜 것을 再수술을 해서 바로잡으려 했으나 발이 더 짧아진다고 하기에 포기하고 제대를 결심하고 한강 이북은 제대가 되지 않아 전우의 주소인 충청북도 청주시 주소로 제대 신청을 했었다.
1952년 3월 명예 제대식이 끝나자 제대증의 기재사항 중 잘못된 것이 있으면 신고하라고 해 “나는 단기 4263년생인데 4261년생으로 잘못됐다”고 신고를 했더니 육군본부 관계관이, “지금 사회에는 나이를 늘리지 못해 환장을 한 사람들이 많은데 2년 늘어난 것쯤…” 나중에 확인했더니 내가 1948년 제주에서 단체로 입대할 때 당시의 군대는 만 20세가 돼야 하는데 나는 만 18세여서 20세로 만들어 입대시킨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군대에 나가지 않으려고 나이를 늘리는 사람이 많았다지만 나는 군대에 들어갔기 때문에 나이가 두 살 늙어버렸다.
나는 38선 이남에 戶籍(호적)이 없었으니 제대증 나이를 공식나이로 할 밖에 없었다. 기재사항을 확인한 제대증은 모두 회수되어 주소지에 도착한 뒤에 교부한다고 했다. 부산에는 상이군인 제대자가 너무 많아서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다.
다음날 아침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조치원역에서 내려 화물자동차로 청주의 병사구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2시쯤이었다. 나는 제대증을 받아들고 갈 곳이 없어 중앙공원에 들어가 큰 은행나무 옆에 멍하니 서 있었다. 돈도 한 푼 없고, 나 혼자만이 이 세상에서 내동댕이친 외톨이가 된 것 같았다. 막막했다.
피난민統(통) 사무장이 되다
공원에서 멍하니 서 있는 내 모습을 지켜본 한 점쟁이 영감이 나를 불러 자기 돗자리에 앉으라고 하기에 나는 “돈이 한 푼도 없다”고 하자 “돈은 안 받을 테니 이야기나 좀 하자’며 나를 잡아끌었다. 그 영감이 내 신수를 봐주겠다고 하기에 ”신수는 볼 것 없고, 나는 오늘 군대에서 제대를 했는데 고향이 이북이라 당장 갈 곳이 없다“고 했더니 ”걱정 마오 저기 보세요“라며 손으로 공원 한 쪽에 있는 한 건물을 가리켰다. 그 건물은 軍事(군사)원호처였다. 나는 곧 군사원호처로 갔다. 육군 중령이 앉아 있었는데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부분이 절단된 분이었다. 그는 내 사정을 듣더니 나에게 쪽지 한 장을 주면서 남문로 1가에 있는 석일여관으로 가라고 했다. 그 쪽지는 3일 동안 숙박시키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여관에서 저녁을 먹고 잠을 자기 시작했다. 다음날도 아침, 점심, 저녁을 먹고는 잠만 잤다. 3일째 되던 날 아침 여관집 주인에게 인사를 했더니 傷痍(상이) 군인회에 한번 찾아가 보라고 하기에 나는 그곳을 찾아갔다. 상이 군인회에는 나와 처지가 비슷한 제대군인 10여 명이 합숙하고 있기에 나도 거기에 끼었다.
상이 군인회 합숙원들은 모두 관할 洞(동)에 있는 피난민통에 등록되어 피난민 배급을 받고 있었다. 때문에 나도 피난민 등록을 해야 되므로 관할 동인 남문로 2가의 피난민 통장을 찾아갔다. 피난민 통장은 황해도 분이었는데 나를 등록하자마자 “사무장을 좀 맡아달라”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나는 갓 제대를 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사양을 했더니 알고 모르고 할 게 아니라 전쟁으로 어려운 때인데 피난민을 위해 손잡고 함께 일하자고 하기에 수락을 했다.
사무장이 하는 일은 식량 배급 관계서류를 작성하고 구호물자가 나오면 말썽없이 잘 나누어 주어야 하고 날마다 집단 수용건물과 관내를 돌며 살펴야 했다. 특히 30여 세대가 집단 수용된 일제 때의 낡은 목조 2층 건물은 각 세대마다 살펴야 했다. 하루는 이 낡은 건물 속을 이 집 저 집 인사를 하며 돌고 있었는데 2층 구석의 한 거적문을 열며 “안녕하세요”라고 소리치며 얼굴을 들이밀었더니 방에 있던 부인이 내 목을 두 손으로 거머쥐며 악을 쓰다 아기를 낳았다.
나는 놀라서 사람들을 불러 산모와 아기를 돌보게 하고 청주시청 사회과로 가서 산모에 대한 특별배급과 출산용품 등을 받아 온 적도 있었다. 나의 피난민統(통) 사무장 생활은 휴전협정으로 서울 수복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청주 바닥에서 인사를 주고받을 사람들이 많아서 보람된 일이었다.
취재 記者가 되다
서울에 올라온 나는 38선을 함께 넘고 제주에서 같은 중대 戰友(전우)인 소설가 곽학송 씨의 도움으로 <민주여론>의 취재 기자로 입사했다. <민주여론>은 타블로이드 8면인 주간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는데 편집담당은 詩人(시인) 이형기였고 취재는 나뿐이었다. 일간 신문들도 대판 2면을 내던 때여서 타블로이드 8면을 내는 주간신문은 쉽지가 않았다. <민주여론>은 당시 최고의 기업체로 꼽히던 조선방직의 강일매 사장이 社主(사주)였다.
나는 주로 유명인사와 정치인들의 원고 청탁과 기획물 취재를 하고 때로는 정치인들에게 보내는 강일매 사장의 심부름도 했다. 주간신문 취재생활이 익숙해지고 마음도 안정될 무렵이 된 1954년 봄 친구 곽학송 씨가 자기 여동생과 결혼을 하라고 하며, 그 여동생과 만나게 했다. 나는 어차피 결혼은 해야겠는데, 서로 처지가 같고 잘 아는 사이가 좋겠기에 결혼 약속을 하고 결혼 날짜까지 1954년 4월4일로 결정을 했다. 결혼식 청첩장을 내자 <민주여론>에서는 강일매 사장의 이름으로 광목 세 통을 주며 결혼 때 쓰라고 해 나는 그것을 장모님에게 전달했다.
휴전 직후인 당시는 광목이 꽤 값이 나갈 때여서 신혼용 이부자리를 만들고 일부는 팔아서 생활용품도 마련했다. 광목 세 통이 나의 결혼에는 큰 밑천이 되었다. 내가 결혼한 지 2~3개월이 지났을 때 편집담당이던 이형기 詩人이 일간신문 기자로 자리를 옮기게 되어 내가 편집담당이 되었다. 편집담당으로 활자호수와 배수비율 등을 익히며 紙面(지면) 제작을 1년 넘게 하다가 나도 일간신문 기자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테러사건을 당한 <대구매일신문>의 서울주재 기자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