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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노자(老子)는 춘추시대 초나라의 철학자로 전해지고 있다.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시호는 담(聃)이다.
허난 성 루이 현 사람으로 주왕을 섬겼으나, 뒤에 관직을 버렸다. 그는 중국에서 우주의 만물에 대하여 생각한 최초의 사람으로, 그가 발견한 우주의 진리를 '도'(道)라고 이름지었다. 그 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을 '도교'라고 하며, 그는 우주 만물이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이치가 곧 '도'라고 설명하였다.
산동성 노산과 장수성 당정에 있는 노자의 동상 / 하남성 링바오시 한구관에 세워진 노자의 대형금동상
노자의 실체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에서 노자로 상정되는 인물이 3인이 있다고 하였다. (老子 韓非列傳). 첫째로 이이(李耳, 자는 담(聃=老聃)를 들었다. 그는 초나라 사람으로 공자가 예(禮)를 배운 사람이며, 도덕의 말 5천여 언(言)을 저작한 사람인데 그의 최후는 알지 못한다고 한다. 다음에 든 사람은 역시 공자와 동시대의 노래자(老萊子)로서 저서는 15편 있었다 한다. 세 번째 든 것은 주(周)의 태사담이라는 사람으로 공자의 사후 100년 이상 경과한 때에 진(秦)의 헌공과 회담하였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노자는 은군자(隱君子)'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노자라고 하는 이는 은자로서 그 사람됨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후세에 노자라고 하면 공자에게 예를 가르쳤다고 하는 이이(李耳)를 생각하는 것이 상례이나, 이이라고 하는 인물은 도가의 사상이 왕성하던 시기에 그 사상의 시조로서 공자보다도 위인(偉人)이었다고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전설일지도 모르겠다.[모호한 표현]펑유란(馮友蘭)은 노자가 전국시대의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이에 근거하여 노자가 실존인물이라고 가정한다면 최소한 도덕경 죽간본(BC 300년경) 이전일 수밖에 없으며 한비자(BC 280~BC 233)가 도덕경을 인용 하였으므로 한비자보다 앞선다. 또 도덕경에는 유가사상을 비판하는 내용이 많은데 이는 백서본(갑본은 전국시대 말기, 을본은 한나라 초기) 이후가 반유가적인 것이며 죽간본은 덜하다.
노자의 사상
도는 성질이나 모양을 가지지 않으며,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으며, 항상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우주 만물은 다만 도가 밖으로 나타나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우주 만물의 형태는 그 근본을 따지면 결국은 17가지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사상이다. 그의 사상은 그의 저서 <노자 도덕경> 속에 있는 '무위 자연'이라는 말로 나타낼 수 있다. 사람이 우주의 근본이며, 진리인 도의 길에 도달하려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무위 자연' 사상이다. 즉, 법률·도덕·풍속·문화 등 인위적인 것에 얽매이지 말고 사람의 가장 순수한 양심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며 살아갈 때 비로소 도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후세에 '도교의 시조'로 불리고, 그 사상은 '노장 사상' 또는 '도가 사상'으로 발전하여 유교와 함께 중국 정신 사상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어제의 이야기)
회의를 마치곤 서둘러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오늘 옛 생도시절 15훈육대의 연말 송년회 행사가 있는데, 초등학교 모임과 중복된 관계로 미리 동기생 송년회 행사에는 회 한상자를 미리 보내어 참석 못하는 것에 대한 사과와 양해를 구하고자 함이었습니다. 하여 동기회 총무님께 물어 물어 길을 헤메다가 겨유 오늘 저녁 모임장소인 여의도의 약속장소인 식당을 찾았고 식당 주인에게 회감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편한 마음으로 또 하나의 특별 스케줄인 친구 생일축하 자리에 참석해 멋진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이어 발동이 걸려 노래방에까지 갔다가 야심한 밤 사당역에서 지하철이 막 끊어질 시각 막차를 타고 경복궁 역에 도착했고, 역시 아슬 아슬하게 북악터널 방향으로 가는 1711번 마지막 버스로 귀가할 수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숨돌릴 틈도 없이 빠듯하게 여러가지 아름다운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든 아주 보람있는 하루였습니다.
참고사항
중국 고대의 사상가이며 도가(道家)의 시조이다.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 『노자도덕경』이라고도 불리우는 『노자』는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상당히 발전한 무렵부터 한(漢)대까지의 도가 사상의 소산(所産)이다. 『노자』의 중심 사상은 인의(仁義) 등 도덕이나 지혜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인민을 지배하려고 하는 유가(주로 맹자)에 대하여, 도덕ㆍ지혜를 버리고 지배의욕을 버리고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의하여 지배하려고 하는 정치사상과, 동일하게 무위무욕(無爲無欲)으로 남에게 겸양하는 것에 의하여 성공ㆍ보신(保身)하려고 하는 처세술이다. 이들에 대한 근거로서, 현상의 배후에 불가지(不可知)의 실재(實在)인 도(道)를 설정하여, 우주생성설과 음양의 자연학을 도입하여, 세계는 도(道)로부터 나오고 '도'에 의하여 생성ㆍ사멸의 운동을 한다고 하는 객관적
중국의 고대 춘추시대 중기부터 전국시대 초기까지 살았다. 시기를 추정하면 대략 기원전 570년부터 479년 사이가 된다. 노자가 살았던 시대는 계급 질서, 생산 관계, 세계관 등이 가장 밑바탕부터 통째로 변하던 혼란의 시대였다. 중국 한(漢)나라 때 사마천이라는 역사 학자가 쓴 『사기』에 의하면 초(楚)나라 고현(苦縣) -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녹읍(鹿邑) - 여향(厲鄕) 곡인리(曲仁里) 사람으로 성은 이(李)씨고 이름은 이(耳)이며 자는 담(聃)이다. 그는 무너져 가던 주나라에서 황실의 도서관장을 지냈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예(禮)를 물었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공자보다는 대략 열 살 혹은 스무 살 정도 연상이었던 같은데, 기타의 다른 행적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이유에선가 주나라를 떠나야 했던 것 같고, 그 국경을 넘으면서 국경지기에게 설파했던 간략한 내용이 『도덕경』이라는 책으로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후에 일어난 도교에서는 이런 사실을 더욱 신비화해서 노자가 그 때 국경을 떠나 인도로 가서 불교도들을 교화시켰다고 주장하나 분명한 근거는 없다. 노자의 아들은 이름이 종(宗)이고 군인의 길을 걸었으며 은간(殷干)이라는 영지에 봉해졌다. 이렇게 노자와 그 아들의 경력을 볼 때, 지식과 권력에 가까이 있었던 집안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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