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는 것’에서는 어떤 위험도 나오지 않는 법이다???검은 백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유일무이한 이유는 과거의 관찰을 미래를 결정짓는 것, 혹은 미래를 표상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ㅡ 나심 탈레브의 《블랙스완》에서 인용
지난주에 이어 두 번째로 진행된 KBS심야토론의 목적은 국민에게 메르스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줄이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일관성을 지녔다. 정부방송으로서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는 국민의 지나친 불안과 공포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과학이니 전문가니 하면서 발언을 이어간 질병감염 관련 두 전문가의 발언들은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사회자가 박원순 시장의 긴급기자회견 후 서울삼성병원 의사의 상태가 갑작스럽게 악화된 원인을 묻는 질문에 질병관리본부장을 역임한 전병율의 발언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임은 현대의학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정설이다. 그는 문제의 의사 상태가 갑자기 악화된 것이 스트레스 때문이라며, 박원순 탓임을 분명히 했다. 그가 그렇게 발언할 수 있었던 것은 박원순의 긴급회견 내용을 반박한 의사의 발언이 진실이라는 전제 때문이다.
문제의 의사가 위독한 상태는 대한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전병율은 그가 진실만을 말했다는 근거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은 채 박원순에게 책임을 돌렸다. 의사의 반박이 진실이라면 박원순에게 책임이 있음은 분명하다. 서울시민이라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해도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메르스를 대란으로 키운 박근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의사의 반박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가? 설사 사실이라고 해도 의사로서 그의 행동이 완전히 면책되는 것일까? 그는 자신에게 가해진 세간의 시선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사려 깊지 못한 행태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었을까?
그는 삼성서울병원 의사가 갑자기 악화된 것이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의학적 증거를 의료진으로부터 전달받기라도 했단 말인가? 공개가 불가능한 개인의 의료정보를 그는 무슨 수로 확인했단 말인가? 그는 의사의 반박이 진실이고 박원순이 틀렸다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의도성이 엿보이는 사회자의 질문도 문제지만, 전병율의 발언은 천만 명이 넘는 서울시민의 안전과 생명을 책임져야할 의무가 있는 박원순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사실관계도 확인하지 않은 채 박원순을 비판한 그의 발언은 마녀사냥에나 어울릴 비약과 오류의 전형이었다.
사실 신종 전염병에 대한 공포는 금융위기의 작동방식과 동일해서 심리적인 저항선이 무너지면 과학이고 뭐고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보다 조금 높은 경험적 지식에 불과하다. 질병관리본부장을 했던 전문가라면 이 정도의 지식은 기본에도 속하지 않는다.
질병관리본부(사스 방역의 경험을 살려 노무현 대통령이 만들었다)를 비롯해 복지부와 방역당국의 무능력과 무책임 때문에 말도 안 되는 메르스 대란이 전 세계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는데, 최고의 전문가를 자처하는 자가 지상파에 나와 한다는 얘기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무엇이 과학이고 무엇이 전문적인 지식이란 말인가?
그렇게 잘났으면, 지금보다 방역체계도 의료시스템도 열악했던 12년 전에는 사스를 그렇게도 완벽하게 막아냈던 부처들이 지금은 왜 대란이 되도록 만들었는지 그것부터 설명해보라. 국민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 잘난 방역체계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서이고, 전문가들의 말과 다르게 감염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치료약도 백신도 개발되지 않은 신종 전염병이란 매일이 새로운 사태고 국면이다. 사우디의 사례는 참고자료는 될지언정 그것이 한국에서 똑같이 적용될 가능성이란 완전 제로다. 사우디와 한국은 완전히 다른 조건과 환경을 가지고 있고, 메르스 바이러스에 반응하는 국민의 유전자도 다르다.
전염병 방역의 첫 번째 단계가 무엇인가? 정확한 상황 파악이다. 지금까지도 상황 파악을 못해서 쩔쩔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국민이 각자도생을 모색해야 할 만큼 방역당국과 박근혜 정부의 대처가 엉망진창이고 기레기들의 보도가 권력 편향적이고 중구난방이어서 이 지경까지 온 것이 아닌가?
대체 대한민국의 방역 전문가들은 국가의 방역체계가 이렇게 망가질 때까지 뭐하고 있었단 말인가? 권위주의적 권력이 무서웠던가, 아니면 정부를 설득할 능력이 부족해서였던가? 일이 터지고 난 뒤에 방방 뜨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돈 냄새를 맡은 브로커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나심 탈레브가 《블랙스완》에서 “소양 없는 학위는 재앙을 낳는다”고 했는데, 이 땅의 학위 소지자와 전문가들의 경박한 행태를 보고 있으면 틀린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늘의 토론에서 시청자들이 일말의 믿음이라도 받았다면, 더는 도망갈 데가 없는 체념의 발로에서였을 것이다.
한 번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처음보다 수천수만 배나 어려운 법이다. 자기들끼리 만의 일방적인 토론에서 신뢰가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시청자와 국민을 우롱하는 일이다. 시청료 인상에 혈안이 된 KBS를 비판하는 일은 이제 신물이 날 정도이지만, 반성을 모르는 전문가라고 다를 것은 없다.
P.S. 노무현 대통령은 어떤 상황에서도 국민의 안전과 생명이 걸려 있으면 도망치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사스라는 신종 전염병을 최일선에서 막아내야 하는 방역당국과 의료진에게 분명한 목표를 제시했고 국민에게 협조를 구했다. 그 결과가 세계 최고의 방역모범국이었고, 한 명의 희생자도 만들지 않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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