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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청철도 호로군 (2)
본 자료는 만주 동청철도(중동철도) 호로군만을 다루며 중국 다른 지역의 철도경비대 호로군을 다루지 않습니다.
친일군벌과 독판 포귀경의 동청철도(東清鐵道 : 東清鐵路 : 중동철도) 점유와 중화민국의 기술력, 경영력 부족
1920년 6월경 북만주 동청철도는 (만주의 친일군벌 장작림의 부하에 해당하며 전임 길림성 독군 맹은원(孟恩遠)을 내쫓고) 새로 길림성 독군이 된 포귀경(鮑貴卿, 1867~1934) 휘하의 군대가 점령한 이래, 포귀경이 동청철도 독판과 호로군 총사령(護路軍總司令)이 되어 러시아 혁명세력인 공산주의 동조자를 모조리 내쫓고 동청철도 이사 대다수를 중국 측이 차지한다.
맹은원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의 러시아 백파 정부도 황금알을 낳는 만주 동청철도 경영권을 유지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러시아 본토와 수도인 모스크바는 공산당 볼셰비키가 차지한 상태였고
동청철도와 연해주로 쫓겨온 러시아 백파 군대는 미군, 영국군, 중국군이 러시아 적백내전 간섭에서 철군한 뒤에는 오직 일본군의 무력 지원만을 바라고 있는 처지였다. (일명 ‘괴뢰국가 건국’ 계획)
어미 잃은 삐아리(병아리) : 연해주와 동청철도의 백파 군대 실상
(※실제 러시아 백파와 일본군의 온갖 선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군하자마자 연해주의 주요 도시는 하루나 이틀 만에 볼셰비키가 해방시켰다.
대기근이 휩쓸던 시베리아에서 공산당도 잘한 것이 별로 없었지만, 시베리아에서의 일본군과 백파 군대의 만행은 이를 능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파 측 소설가 라비치(Лович Яков Львович)가 쓴 소설 <적:Враги>, 일본 시인 이오키 료조(五百木良三)의 저작물을 보면 백파 군대야말로 선량한 구세주고 볼셰비키는 악마 그 자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친일백파 소설가나 하는 소리일 뿐이었고, 일본군 없는 연해주의 백파 군대는 어미 잃은 삐아리(병아리)였다.
적백내전에서 오락가락하던 체코 군단은 특이하게도 연해주를 떠나면서 독립운동에 나선 식민지 민족에게 무기를 팔고 떠났다고 한다.
체코군단의 목적은 아예 공산주의 확산방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일제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러시아 혁명 성공과 중국의 5.4운동, 미국 영국 중화민국의 러시아 적백내전 철군 압력으로 인해 수년간의 교섭에 마지못해 나선 상황이었다.
1900년대 초반 황금알을 낳던 만주의 철도들
당시 만주를 횡단하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인 동청철도와 남만주철도는 증기 엔진와 인력을 주로 활용하던 시대 상황상 건설비용과 유지비용도 컸으나, 그 수익이 막대하였기에 어느 나라도 양보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러시아 적백내전 혼란기 손쉽게 점유한 만주 친일 군벌이나 교섭에 나선 중화민국 북경정부(북양정부) 역시 철도를 유지하기에는 기술력, 경영력이 당시에는 부족했다.
철도 개통과 경영은
당시 산업기반이나 중공업이 발전하지 못했던 중화민국이나 만주 친일 군벌이 미국, 영국, 일본, 제정 러시아를 따라갈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관련 국가들간 협상에 따라 동철철도의 중화민국 측 관리자인 동청철도 독판(督辨)도 자주 교체되었고 명칭도 변경된다.
(※동청철도와 만주내의 철도를 둘러싼 국제적 분쟁은 수십년간 계속되었고 1945년 소련군이 만주를 점령하고 1952년 동청철도를 중국에 반환하고서야 동청철도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1922년경 중화민국과 공산주의 소련의 장춘 이북 철도와 동청철도의 공동 관리
1921년에도 만주 동청철도 문제는 미국, 영국, 중화민국, 소비에트 러시아의 중요 관심 사항중 하나였다.
중화민국 북경 정부는 새로 건국된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협상해 동철철도 주변 11km 이내을 동성특별구로 지정하고 하르빈시의 백파측 권한과 철도 노선을 인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청철도를 둘러싼 볼셰비키와 만주로 쫓겨난 러시아 백파 간의 갈등도 지속되고 있었다.
동청철도 직원의 다수는 러시아계로 근래 러시아 역사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소련 건국 초기에는 대략 50% 정도가 러시아 백파를 지지하였다고 한다.
주경란(朱慶瀾) 선생의 중동철로 호로군 총사령 및 동성특별행정구 행정장관 취임
주경란(1874~1941) 선생은 과거 1914년경 흑룡강 성 장군(사또 : 장군·도통·통령은 청나라 관직품계가 유사함)을 했던 사람인데, 손문(孫文) 등과도 친분이 있었고 중화민국 정부에 의해 1922년 동성특별행정구 행정장관에 취임하였다.
우측 주경란 선생
주경란 선생은
철도변의 토지 주권을 회복하고,
백파계 잔당과 비적·마적 진압,
러시아 피난민 보호,
러시아 대기근에 식량지원 등을 통해
상인들의 무역을 보호하고 중동철도의 중국 권리를 확대하려고 했다.
주경란 휘하 호로군에는 중화민국의 자주독립을 지키고, 영토를 지키고, 일제의 중국·만주침략을 저지하려는 군인들이 모여들었다. (1930년대에는 김좌진 등도 동청철도 주변에 거주)
그들은 반봉사건, 중동로 사건, 만주사변, 중일전쟁, 노몽한 사건이 벌어지자 만주의 친일군벌 장작림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주경란은 1924년 10월경 친일파 장작림의 내전에 반대하고 사임했다.
1924년경 중화민국 북경정부는 소련과 합동 경영에 동의하고, 구역내의 종주권을 중국이 가진다는 조건하에 동성특별구를 특별행정구역으로 인가했지만
만주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친일군벌 장작림과 일제는 백파 잔당까지 무장시켜 ‘적화방지, 공산주의 확산방지 (일명 뺄갱이 공비 토벌, 조선비적 토벌)’ 명목으로 북사할린섬이나 연해주, 시베리아에 까지 이권을 확충하려고 있었기에
양자간 철도를 둘러싼 갈등은 지속될 수밖에 없었고
반대세력, 마적, 공산주의 동조자, 각종 비적단들로부터 동청철도를 경비할 부대를 확충할 수밖에 없었다.
중화민국과 소련의 중동철도(동청철도) 공동관리
1924년 5월 31일 북경에서 중국과 소련간에 미해결 사건의 해결을 위한 협정이 체결되었으나, 다수는 실제 이행되지 않았다.
연합국과 중화민국·일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24년 11월경 외몽골이 소련 공산당의 지원으로 결국 중국으로부터는 독립한다.
세계혁명을 부르짖던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었고, 중국에서는 군벌간 내전이 더욱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중화민국과 만주의 실력자인 장작림이 새로 건국된 소련을 인정하고 협상에 계속해 나서고,
소련 측이 중동철도 국장(동청철도 장관)을 맡게 되자, 중동철도의 백파계 러시아인 종업원 다수는 해고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미국 등지로 이민을 떠났다.
동청철도(중동철도) 특별구역 폐지
1925년 3월경에는 친일 군벌 장작림은 실력을 행사하여 중동철도 특별행정구를 폐지하고, 완전한 중국 주권(실제로는 장작림과 일제가 장악) 아래 두겠다고 선언하고, 철도 경비대인 호로군은 길림성, 흑룡강성의 독판들이 분장하게 되었다.
이때 동청철도 호로군 사령에는 길림성 독군 장작상이 임명되고 장환상과 만복린이 부사령에 임명되었다.
호로군 사령은 그뒤 수차례 교체되었고, 하르빈을 기준으로 좌우 2개 구역으로 나눠진다.
소련의 반발이 엄청나자 독판 장작상은 하르빈에서 소련측 중동철도 장관(중동철도 국장)과 협상에 나서야 했다.
소련도 중동철도와 하르빈쪽에 볼셰비키 군대를 북만주로 출동시켜 만주의 백파 잔당을 견제하고, 중동철도의 백파계 직원 전원을 해고하려고 하였다.
곽송령(郭松齡) 선생의 동북국민군과 반봉사건
장작림의 동북군 휘하로 중국 내륙으로 진출해 있던(일명 제2차 직봉전쟁 第二次直奉戰爭)
곽송령 선생
곽송령(1883~1925) 선생은 이 무렵 소련의 지원을 받던 본토의 유명 군벌 풍옥상(馮玉祥), 이경림(李景林) 등의 지원을 예상하고, 그 외 만주의 장작림 반대세력의 협조와 흑룡강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소련 볼셰비키 동조자들의 지원을 믿고,
1925년 11월 22일경 친일군벌 장작림의 하야를 권고하고, 장작림을 타도하려고 결국에는 반란을 일으켰다.
동북국민군 지도부 상당수는 장작림 일파의 행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어제까지 장작림 군대로 복무하던 하급 병사들은 자세한 실상을 알지는 못하고, 대다수 상관의 명령에 따라 가담하게 되었는데
대략 7만여명의 동북군(친일파 장작림 휘하 부대)이 곽송령의 반란에 가담했다.
곽송령은 11월 30일 산해관으로 사령부를 이동하고 진황도에 주재하는 일본 무관에 ‘동북국민군(東北國民軍)’이 만주로 진주할테니 일본군은 엄정 중립을 지켜줄 것을 요청했다.
곽송령의 반란 소식은 중국, 만주 전역에 곧 퍼져나가 평소 친일파들에 불만을 품고 있던 만주·몽골의 몽골족 외에도 식민지배를 받던 민족의 독립운동세력까지 이에 호응했다.
곽송령군은 12월 7일에는 금주를 점령한다.
평소 반일 성향이 장작림 직계부대보다 강하던 호로군 중에서도 곽송령에게 협조하겠다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마치 곽송령의 동북국민군이 연전연승하며 순식간에 만주를 장악하려고 하자,
이에 일본군이 곽송령에 접근해 장작림 타도에 협조해 줄테니 이권을 장작림과 마찬가지로 보장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장작림 군과의 전투에서 승기를 장악하였으며 평소 일제를 경계하던 곽송령이 일본의 요구를 거부했다.
일본은 다시 장작림에 접근해 비밀조약을 체결하였고, 장작림은 일본의 만주와 몽골에서의 이권을 보장하고 장작림 지원을 약속했다.
이에 일본군 백천(白川)사령관은 동북국민군에 대해 수차 경고하였다.
장작림 지원에 나선 일본군의 출병과 철도 도로 봉쇄로 곤경에 처한 동북국민군은
12월 24일경 신민둔 일대에서 오준승, 장작림 군대의 공격을 받고 패배하였다.
만주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일명 관동군 등)의 장작림 지원이 없었다면 곽송령이 패배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곽송령과 부인은 신민둔 백기보(오늘날의 新民縣白旗堡)에서 처형되었다.
이 때 다수의 동철철도 호로군과 조선인 독립운동가들도 곽송령 군대 지원에 나섰으나 곽송령은 이미 처형되었고, 동북국민군 장교 일부는 신민둔(新民屯)에 있던 일본영사관 분관을 방문해 봉천의 길전(吉田)총영사 통해 장작림에게 화의타협을 제안하기도 했고, 혹은 다른 군벌군에 귀순하거나 동북군에 도로 복귀하였다.
일본군은 곽송령의 추도식 행사까지 금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부 군사부위원 김인순, 독립군 박영(김좌진 등과 독립운동함) 일파는 곽송령의 잔당 당경현(唐景顯) 등과 협조를 계속하고 있었다.
혼세마왕 장종창과 더불어 중국의 대표적인 친일파 장작림에게 염증을 느끼고,
곽송령의 동북국민군에 협조를 약속했던 사람은 호로군 간부외에도 많았던 것이다.
동북군
동북군
북만주의 친일 군벌의 약화를 틈탄 소련의 진출시도. 조선 비적단에게 대량 무기 공급은 없었다.
중국 혼란기
친일 군벌 장작림은 일본과 일본군(일명 관동군 등)의 지원으로 휘하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근거지 만주를 떠나 중국 본토로까지 확장 진출하여 중국 내륙의 유명 군벌들과 치열한 세력다툼을 하고 있었다.
장작림 군대가 중국 내륙에서 고전할 무렵,
소련의 북만주와 내몽골 일대의 몽골족 독립운동가, 친일 장작림 군벌에 반대하는 지방 군벌군, 마적단과 조선 비적단을 무장시켜 중동철도를 장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하지만,
오늘날 공개된 소련측 자료에 따르면
조선 비적단(일명 독립군)에게 대량의 무기를 공급하여 만주의 친일군벌과 조선의 일본군을 공격케 하는 일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
1929년 중동로 사건
만주의 친일군벌 장작림이 1928년 죽은 뒤,
만주의 실권자가 된 장학령은 국민당 정부에 형식적으로 귀순했다.
장학량은 중국으로 망명한 백파 잔당의 말을 믿었고, 세계적인 반공활동에 기대를 걸고 중동철도의 소련측 시설들의 점유를 시도하였고 1929년 소련측 인물들을 체포하였다.
1929년 중동로 사건 당시 주요 전투지
1929년 7월 7일 북경에서 장개석을 만나 중동철도를 강제로 탈환하겠다고 말한다.
7월 10일 장학량 군대가 중동철도의 주요시설을 점령하고 소련측 고위 인사를 국외로 추방했다. 연말까지 대략 1,689명의 러시아인이 추방되었다.
7월 14일 소련군은 국경에서 항공기를 동원한 군사시위를 전개하였다.
소련군 비행기
7월말부터는 소련군이 국경을 넘는 공격을 가했다.
동북군은 대략 27만여명이었으나, 북만주와 국경 일대에서 소련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대략 6만에서~7만여명이었고,
만주의 러시아 백파 군대 잔당이 수만여명이었다고 한다.
8월 장학량은 동원령을 내렸다.
소련군은 10월 12일경부터 주로 3방향에서 북만주와 길림성을 본격적으로 공격하여,
11월 북서쪽 만주리를 점령하고 철도를 따라 11월 24일경 호륜패이 지역의 해랍이(海拉尔, 하이라얼)까지 진격했다.
소련군은 대흥안령 산맥에서 진격을 멈추고, 북만의 대도회 하르빈까지 점령하지는 않았다.
중국군은 대략 1,690명이 전사하고, 실종자 외에도 수천명이 부상하고, 6,900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17여 여장 한광제(韓光弟)와 단장(연대장)이 전사하고, (중동철도 합만지방 호로군 사령 겸 15여) 여장 양충갑(梁忠甲)이 포로가 되었다.
소련측 자료에는 중국군 포로가 9,500여명이라고 하며,
전사자 수도 양측이 주장하는 수가 다르지만 장학량군의 대패였다.
소련군내 부랴트 혹은 몽골계 기병
소련군 포함
일설에 의하면 동북군의 사상자는 2만여명에 이르렀다고 하며, 민간인 피해도 상당했다.
당시 흘린 피로써 영토를 방어했다는 중국 측의 대대적인 충렬 선전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이 대승했다는 것을 세계가 의심치 않았다.
형식적으로 통일된 중국은 여전히 허약한 나라였던 것이었다.
중국 정부는 1929년 11월 말 소련에 중동철도 통제권을 돌려주고, 백파 군대를 무장해제하고 추방하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양측의 포로는 교환되었다.
12월말부터 소련군은 중국령에서 철군하였다.
결국 소련은 중동로 사건(中東路事件)을 통해 무력으로 중동철도(동청철도)의 소유권과 운영권을 회복했다.
이 무렵 만주에는 여러 개의 철도가 부설되었고, 중동철도의 경영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직원들에 대한 해고도 일어난다.
1930년 1월 1일경에는 중동철도 직원이 대략 25,473명이었지만 1931년 1월 1일경에는 직원이 약 16,089명이었다.
1935년 3월경 소련은 교섭 끝에 중동철도를 일본(만주국)에 매각했다. 일본(만주국)이 접수한 후 중동철도의 이름은 또 변경된다.
참고문헌
동아일보 1920. 6. 21. 자 보도. 동청철도의 궁경
조선일보 1920. 12. 20. 자 보도. 봉곽 양군
동아일보 1925. 12. 2. 자 보도. 조선인의 반봉
조선일보 1926. 4. 23. 자 보도. 카라한 이하 필경 경질 실현?
동아일보 1926. 5. 5. 자 보도. 대외몽고 적노 적극활약
조선일보 1926. 2. 23. 자 보도. 봉천계 대동요
조선일보 1926. 4. 10. 자 보도. (봉직전의 오패부, 곽송령에게 과당한 동정을 표한) 만주 조선인의 곤경
조선일보 1926. 6. 1. 자 보도. 정의부의 무기 문제
조선일보 1930. 3. 28. 자 보도. (곽송령의 잔당이 계획한 장학량 전복음모) 장씨 전복 음모로 동북일대에 저기압
(만주의 친일파, 미국 이주) 라비치(Яков Львович Лович), 『적(Враги)』, 가공의 인물을 통해 만주·연해주·사할린주에서의 백파군대와 일본군의 활약상을 기술하고 볼셰비키의 만행을 폭로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만주의 친일파 ‘시묘노프(셰묘노프)’의 활약상을 기술한 Борисов Б. Дальний Восток : атаман Г. М. Семенов и его борьба за освобождение России от большевиков. — Вена, 1921, 62쪽.
중국측 중동로사건 자료 https://kknews.cc/history/eygm5p4.html
https://kknews.cc/history/r8grykr.html
첫댓글 중동철도를 둘러싸고 소련과 중국의 무력충돌이 있었군요 소련은 교섭 끝에 일본에 매각했군요
예.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