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식물원 (외 2편)
박연준 1 식물은 물결치는 밤의 머리카락 묶을 수 없다 목 뒤로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 작고 굵은 것을 잉태해, 밤이 말한다 비탈길을 타고 도망가, 뱀이 말한다 모든 것에 스민 후 재빨리 사라지렴, 비가 말한다 2 머리를 바짝 묶어 올린 여자아이 목 뒤로 들어갔다 나온다 그녀의 주변부가 된다 목 뒤로 삐져나온 잔머리카락, 그런 게 되고 싶다 아무렇게나 늘어진, 가느다란 인생 고요의 일부 누워 팔랑이는 것 요 위로 떨어지는 몇 가닥 당신의 무의식 3 시 쓸 때 내 얼굴엔 밤, 비, 뱀이 내리고 층층나무 열한 그루 사이를 옮겨 다니며 숨는 사람 가느다래지느라 서 있을 필요도 없는 밤, 비, 뱀
탈피 중인 뱀의 노래 나무 아래서 나는 신발을 벗었지 나무 아래서 나는 발가락을 벗고 무릎을 벗고 나무 아래서 나는 허벅지를 벗었지 나무 아래서 허리 아래를 벗고 배꼽을 벗고 나무 아래서 나는 가슴 두 장을 벗고 모가지를 벗고 나무 아래서 나는 머리통마저 벗어버렸네 그러자 나는 홀 나는 결 나는 강 나는 멀 나는 공 나는 굴 나는 월 나는 쥐 나는 게 나는 별 나는 별 나는 적 나는 메 나는 중 나는 중 나는 억 나는 저 나는 재 나는 목 나는 치 나는 쉬 나는 길 나는 길 나는 길 나는 길 흐르네 나무 아래서
파주, 잠든 파수꾼 지켜야 할 푸른 요새를 두고 당신은 잔다 성실하기도 하지, 당신의 무책임! 새로 돋은 이파리들에게 이름을 붙여줄까 온종일 해도 끝나지 않겠지 끝나지 않으므로 살 수 있는 미명未明의 날들 들판에서 뛰노는 쥐 떼에게도 이름을 붙여줄까 이름을 부르면 띄엄띄엄 잡힐 수 있도록 태양은 뜨거운 덫. 당신은 태양을 베고 조는데 이파리들아, 이파리들아 달아나거라 모가지를 친친 묶은 초록 실을 풀어줄까 파수꾼의 오수午睡를 부어줄까 한 가닥 한 가닥 핏줄을 풀고, 이파리를 날아오른다면 나무를 밀치고 동시에, 날아오른다면! 잠든 파수꾼 부르르, 몸을 떨겠지 지키지 못한 것은 꿈속으로 도망간 것 잠이 녹색 파도라면 파도는 은색 잠
―시집 『밤, 비, 뱀』 2019.8 ---------------------- 박연준 / 1980년 서울 출생.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밤, 비, 뱀』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장편소설 『여름과 루비』, 산문집 『소란』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모월모일』 『쓰는 기분』 『고요한 포옹』 『듣는 사람』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