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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뉴욕 첼시 지역의 한 갤러리. 이곳은 과거 공장 지역이었으나 오피스 빌딩과 갤러리가 들어서면서 크게 변했다. /조선일보 DB
작년 여름 한 선배가 내게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얘길 꺼냈을 때, 나는 이 책에 대해 할 말이 거의 없었다. 자기의 '똥차'를 아우디로 바꿔주는 남자의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며 '이렇게까지 잘생기면 법의 제재를 받지 않을까' 하고 푸념하는 여자에 대해 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2012년 7월 미국의 출판사 '랜덤하우스 빈티지'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출간 석 달 만에 2100만부 팔렸다고 발표했다. 미국 독서 인구의 25%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숫자다. 끝내주게 재미있는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가 미국에서 2000만부 이상 팔리기까지 3년이 걸린 것을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인 셈이다. 망한 출판사의 전직 대표이기도 했던 선배는 내게, 한국 소설에 없는 게 몇 가지 있는데 그중 가장 심각한 건 섹스신이란 말을 농담처럼 떠들었다. 그러니까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면 바로 이 '야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부터 '오 이야기'까지 외설 시비를 불러일으킨 소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내게 야함을 가르쳐준 첫 남자는 '미키 루크'였다. 이 남자는 자신보다 더 야해 보이는 금발의 '킴 베이신저'와 함께 에이드리언 라인 감독의 영화 '나인 하프 위크'에 출연했다. 이 영화를 통해 나는 적어도 '벗었을 때'와 '입었을 때'에 생기는 간극이 클수록 더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에게 아름다운 시계를 선물하면서 "엘리자베스, 12시마다 이 시계를 보면서 당신을 애무하고 있는 나를 상상해줄 수 있겠어?"라고 말하는 남자에게 빠져들지 않을 여자는 없다.
'나인 하프 위크'는 9주일 반 동안의 일을 그린다. 미술계에서 성공적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 여자와 직업을 알 수 없는 부유하고 매력적인 남자가 우연히 뉴욕의 차이나타운에서 마주친다. 그들은 서로에게 강한 성적 매력을 느끼고 빠져든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온화했던 남자는 서서히 침대 위에서 매질을 시작하고, 여자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한다. 여자는 그렇게 수갑에 묶인다. 바닥을 기고, 남의 물건을 훔치며, 남자가 원하는 대로 입고, 애인이 다른 여자와 섹스하는 걸 지켜본다.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자아와 몸이 분리되기 시작한다. 강한 쾌락에 도취된 몸이 어떻게 스스로를 파괴하는지 이 영화는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원작은 1978년 엘리자베스 맥닐이라는 필명으로 출간한 소설 '나인 하프 위크'다. 원작을 읽어보지 않았던 나는 '그레이' 열풍이 불던 작년 여름, 문득 이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래전 소설이지만 꽤 흥미로웠다. 특히 영화에서는 사뭇 이해되지 않았던, 남자의 무리한 요구를 별수 없이 들어주는 여자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그가 내게 해준 일들…. 먹여준다. 모든 먹을거리 장보기와 식사 준비와 설거지를 도맡아 했다. 그는 아침에 옷을 입혀주고 밤에는 옷을 벗겨주었다. 내 세탁물을 그의 것과 함께 세탁소에 가져갔다. 어느 날 저녁 그는 내 구두를 벗겨주다가 뒤축을 갈아야 한다며 다음 날 구두 수선소에 가져갔다. 그는 끝없이 읽어주었다. 신문, 잡지, 살인 사건 추리소설, 캐서린 맨스필드의 단편소설들, 집에서 작업하려고 가져온 내 서류들까지. 사흘에 한 번씩 내 머리를 감겨주었다. 내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려주었는데, 처음 두어 번은 솜씨가 형편없었다. 어느 날 그는 눈이 돌아가게 비싼 '켄트 오브 런던' 머리 브러시를 사 왔고, 그날 저녁 그 빗으로 날 때렸다. 멍이 다른 것보다 훨씬 오래갔다. 매일 밤 그 브러시로 내 머리를 빗질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말은 그토록 많은 것을 해준 '그'에 비해 '내'가 스스로를 묘사한 이 문장이다. "내가 한 일,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만의 커리어를 중시하는 이 시대에 잘생긴 남자가 여자를 아이처럼 돌봐주며 명령하고, 심지어 성적 노예로 다루는 이야기에 여자들이 빠져드는 이유는 뭘까. 매 순간 독립성을 요구받고, 그것에서 오는 피로감이 누적된 여자들의 심리를 부검해보면 그 속엔 누군가 나 '대신' 결정해주는 것에서 느끼는 편안함과 보호받고 싶은 인간 심리가 널려 있다. 사실 이런 심리 과정은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과정과 놀랍게도 비슷하다. 가령 희대의 살인마 '찰스 맨슨'의 추종자들이 어떻게 그에게 '세뇌'당했는지를 보는 것과도 비슷한 셈이다.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자존감이 약한 사람에게 말을 세심히 해주고 관심을 기울여준 후, 자기에게 넘어오면 조금씩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죄책감을 느낀 사람이 고민을 털어놓지 못해 가장 친한 사람들과 연결된 고리가 하나둘 끊어지면, 심리적으로 더 깊은 단절감을 느낀 사람은 자기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 사람에게서 점점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공범자가 되어 죄의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역시 자신의 육체가 파탄 날 지경이 돼서야 남자 주인공 존에게서 벗어난다.
소설과 영화에 등장하는 곳은 갤러리가 많은 첼시와 차이나타운의 음습한 골목들이다. 첼시호텔은 '존'의 일그러진 욕망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또 이곳은 영국의 펑크 록 그룹 '섹스 피스톨스'의 멤버인 시드와 애인 낸시가 투숙했던 곳으로, 낸시는 그곳에서 피범벅이 된 채 의문사했다. '나인 하프 위크'의 소설 판형은 주머니나 작은 핸드백에 들어가는 4×6 변형으로, 옛날 을유문고의 판형과 비슷하다. 나는 이것이 들키고 싶지 않은 여자들의 욕망을 제대로 구현해낸 판형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던 날, 트렌치코트 주머니에 '나인 하프 위크'를 넣고 걷다가, 문득 첼시호텔에 투숙하는 상상을 했다. 영화 '시드와 낸시'의 가장 유명한 말이 떠올랐다. '죽기엔 너무 젊고 살기엔 너무 타락했다.' 이 문장이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타투 문구라는 건 최근에 알았다. 고목처럼 늙어버린 '미키 루크'의 최근 얼굴은 몇 년째 보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