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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자유시 참변 100주년을 맞이해서 카페에 올렸던 글을 다시 8편으로 통합하였습니다.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1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2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3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4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5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6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7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8편 (참고 인물과 간단한 해설)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통합본1~8까지중 제1편)
아무리 배가 부르고 적에게 쫒길 걱정이 없고, 죽을 위험이 전혀 없었을 때에도 옆에서 동료가 죽으면 한번도 묻어주고 후퇴해 본 적이 없었다.
-중일전쟁 참가-
아부지 시체에 손을 대면, 혹시 다른 사람이 이것을 보고 제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시간은 있었고 위험이 없었지만, 아부지 시체를 그냥 두었다. 시체는 없어졌지만 그 때 나를 죽이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1921년 자유시 사건 참가-
홍범도 장군이 부하들 먹일라고 돈 빌리려 다니던 모습을 생각하니, 그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눈물이 납니다.
-최봉설 (이명 : 최계립 등등)-
1920년 4월 6일 하바로프스크의 거리는 끔찍했습니다.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사방에 누워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불타고, 포장도로, 보도와 불에 타 버린 건물 사이에 총을 맞고 누워있는 수백명의 부상자들이 피를 흘리고 신음하고 있는데 도와줄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아무도 거리를 나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총알이 군인, 민간인, 노인과 어린이를 죽였습니다.
일본군은 특히 잔혹하게 조선인을 습격했다.
그들은 한국인 거주지를 포위했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불태웠다.
-1920년 연해주 4월 참변에 대한 러시아 신문 보도와 증언-
죽은 자의 시체가 거리에 누워 있고, 부상당한 사람들이 신음하며 주위에 숨어 있었습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에 인접한 거리는 시체로 가득 차 있었다.
자유시 사건 이후 익사자의 시체가 바르다곤 일대에서 계속 떠올라 발견되었다.
-1921년 흑룡주(아무르주) 자유시 거주 주민-
동족에게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없다.
-자유시 거주 주민-
‘공비 출현’ 소식에 무장을 갖추고 토벌에 나서보니, 공비(공산비적)가 아니고 호로군과 선비(즉 독립군 : 조선비적의 줄임말)가 출현한 것이었다. 1921년 자유시 참변이후 20년 이상이 지났는데도 죽지도 않고, 공산당마저 떠난 이곳에 소수의 유격대를 이끌고 유격전을 하러 오고 있었다.
-1945년 8월초 광복을 며칠 앞둔 간도 나자구 일대 주민-
1918년 시작된 일제의 시베리아, 만주 침략로
1915년경 수라제프카 구역에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 (고려인 마을)이 존재하였고, 이곳 주변에서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였다. 자유시 주변에는 수개 이상의 고려인 마을이 당시 존재하였다.
도시의 발전으로 기차역들이 다수 없어지고, 묘지 등도 외곽으로 이전 혹은 사라진 것으로 보여진다.
1910년대 수라제프카 마을, 자유시의 행정구역에 편입된 곳이나 제야강을 따라 자유시 도심보다 먼저 건설된 우크라이계 민족 마을이며, 수라제프카라는 지명도 우크라이나에 있는 지명을 따온 것이다.
상류의 마자나바는 마을 최초 이주자였던 '마자노프'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자유시 항구, 평소 유량이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을 합한 것보다 많아 보인다.
현재의 자유시 항구, 육상 교통의 발전으로 항구 기능이 거의 상실되었으나 시베리아 개척초기 교통의 중심지 기능을 하였다.
사할린주 니항 출신 독립군 부대의 이동로
목 차 (индекс)
자유시 참변의 대략적인 연표 | 10 |
근대 한국인들의 만주·시베리아 이주 | 19 |
1919년 3.1운동 | 57 |
니콜라예프스크 사건(니항 사건 = 니콜라옙스크 사건) | 61 |
만주·연해주에서의 독립군 | 139 |
봉오동 전투 | 151 |
청산리 전투 | 155 |
간도참변(경신참변) | 162 |
사할린주 출신 독립군과 만주 독립군의 아무르주 이동 | 164 |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 | 181 |
연해주 및 만주지방 독립군들의 러시아령 이동 | 200 |
사할린 특립 의용대 조직 | 236 |
이르쿠츠크파의 설득과 통합시도 | 265 |
안무 장군의 자유시 이동 | 287 |
사할린 부대의 자유시 이동 | 303 |
화해 시도 | 313 |
「고려혁명군정의회」에 대한 한국의 평가 | 320 |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 수 | 327 |
홍범도·안무·허영장 등의 연설 | 330 |
무장해제라는 핑계를 대고 기습공격 | 339 |
한국이 봤던 자유시 참변 | 343 |
수라제프카 지역 포위 | 347 |
러시아측 공격 기록 등 | 360 |
자유시 참변 희생자 | 368 |
참가자 진술들 | 375 |
탈출 | 386 |
독립군 학살에 대한 조사 | 405 |
1921년 러시아 대기근의 심화 | 409 |
간도·만주·연해주 지방 독립군들의 반발 | 411 |
포로의 처리 | 417 |
독립운동 단체의 규탄과 이르쿠츠크파 고려혁명군정의회의 반박 | 423 |
참변 당시 최고 지휘관에 해당하는 최고려의 진술 | 440 |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평화교섭 (일명 대련회담 등) | 441 |
고려혁명군정의회의 폐지 | 443 |
이르쿠츠크 독립군 2,000여명의 곤란 | 449 |
1921년 말에서 1922년 초쯤 자유시 참변 이후 만주·간도로 귀환한 독립군 | 456 |
1922년 8월경 아무르주 우수문 노역장에서의 석방 | 460 |
일제 침략군의 시베리아 철군 | 463 |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러시아령의 한인사회 | 467 |
몇몇 참고 인물과 간단한 해설 | 4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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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 6. 28. 발생한
자유시 참변의 대략적인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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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3. 1. 일부터 3·1운동 발생
1919. 4. 월경부터 1차 세계대전 처리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 독립 청원하였으나 실패
1919. 9. 10. 일경 (확실하지 않은) 이르쿠츠크에서 코민테른(제3 국제공산당 등으로 불려지기도 함) 지원금을 둘러싼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간의 분쟁이 있었다고 함. 러시아측 지원 자금을 둘러싸고는 수차례 다툼이 발생함
1919. 11월경 상해임시정부의 이동휘는 박진순을 모스크바 레닌정부에 파견하여 지원요청. 레닌정부는 금화 약 200만루블 정도와 독립군 부대 지원을 약속했다고 알려짐.
1920. 1월경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포고 1호 발표하여 독립군 활동 지원 요청
1920. 2. 7. 일경 아무르주 자유시에서 일본군이 철수 시작하고, 볼셰비키 군대(赤軍)에 의해 해방됨. 일본군은 3. 3. 일경 자유시에서 전원 철수함
1920. 2. 29. 사할린주 니콜라예프스크 항구가 평화적으로 해방됨 (박일리야, 리흥진 등 참가)
1920. 3월경 볼셰비키 정부가 이동휘와 상해임시정부 측에 자금지원(약 금화 40만루블 추정되며 무게와 환전 문제로 여러 차례 나누어 상해파 측으로 지원됨. 이동휘 등의 1921. 10. 16일자 보고서)
1920. 3. 12. 니콜라예프스크(니항)에서 중립조약을 어긴 일본군이 반자이 야간 기습 공격을 가함
1920. 4. 4.일경(혹은 4. 5. 일경)부터 일본군 연해주 한인 밀집지역을 공격, 4월참변 발생
1920. 4. 21.일경 일본군이 북위50도 이북의 사할린섬 북부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 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괴뢰정권 수립후 영구 점령 작업
1920. 4월경 상해파 이한영 등이 코민테른 자금 일부를 휴대하고 상해로 귀환(금화 100만루블은 잘못된 자료임)
1920. 5월경 만주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
1920. 6. 7. 일경 (6. 4일경이라는 소리도 있다) 홍범도, 안무, 허영장 등 봉오동 전투
1920. 7월경 중화민국, 미국, 영국 등이 러시아 내전을 틈탄 일제의 만주 동청철도 일대 점령과 사할린섬 북부 점령을 인정하지 않음을 발표
1920. 7. 9. 께르비에서 니항을 해방시켰던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과 동료들 다수 학살당함. 박병길이 일본군의 협조아래 트리피츤 체포·처형에 가담하였다가 자유시로 도주
1920. 7월 25일에서 7월 28일경 상해파 고려공산당 대표 박진순이 코민테른 대회에서 레닌과 만남
1920. 9월경 스바보드니(자유시)에서 한인보병자유대대 조직(대대장 오하묵, 군정위원 최고려)
1920. 9. 5일경 트리피츤 부대를 해산시키고 자유시의 보병 19연대에 편입시키기로 결정됨
1920. 9월부터 ~ 10월경 간도 훈춘사건(琿春事件 = Хуньчунь Инцидент) 발생. 훈춘의 일본 영사관 관련 건물이 공격받음
1920. 10월경 극동공화국(원동공화국)의 치타(※혹은 베르흐네우진스크=오늘날의 울란우데=일 수도 있다)에 한인부 조직 (오두제 : 박애, 계봉우, 김진, 장도정, 박창은), 한인부는 달뷰라(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 혹은 극동공화국의 산하기관으로 조직된 것으로 알려졌다.
1920. 10월경 상해파(이동휘 등)가 극동공화국 한인부 등에 독립군의 자유시로의 이동 지원을 요청. 상해임시정부와 볼셰비키의 협조가 있었음
1920. 10. 12. 일경 박일리야를 비롯한 한인 니항부대 (나중의 사할린 의용대로 확대됨) 자유시 도착
1920. 10. 15. 일경 박일리야 원동공화국 한인부가 있는 치타(혹은 베르흐네우진스크-오늘날의 울란우데)로 출발
1920. 10. 21. 일경 홍범도, 김좌진, 안무 등 청산리 전투 시작
1920. 10. 22. 일경 자유시에서 제19연대(과거 니항을 해방시켰던 트리피친 부대의 일부)가 군율에 복종치 않는다는 이유 등으로 2군단 및 오하묵의 자유대대 등이 철갑차와 보츠까레워 등의 지원군을 동원하여 포위한 후 해산시켜, 다른 연대에 편입시킨다. 한인 니항부대(제19연대 제3대대 = 박일리야 부대)는 오하묵의 보병자유대대에 편입됨
1920. 9월~10월경 상해파 한형권 등이 상해임시정부 명의로 러시아측에서 금화 40만 루블 정도를 수령함. 대한국민의회 등과 자금 분배를 둘러싼 갈등 고조되기 시작함. 나중에는 중국·조선내에서도 자금 분배를 둘러싼 문제 발생
1920. 11월경 극동공화국(원동공화국) 서울이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치타로 옮겨짐
1920. 11월경 연해주와 만주의 한인무장부대 자유시 집결 시작
1920년 말경에서 1921년초 원동공화국 정부에서 자유시 일대의 한인부대를 통솔키 위해 김민선을 한인 니항부대 대대장으로 임명하고, 박일리야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여 파송하였다. 그러나 한인 니항부대는 19연대가 해산될 때 자유대대에 편입되어 없어진 상태였다.
1920. 12월경 대한국민의회와 자유대대 등은 연해주의 독립군을 자유시로 집결토록 하바로프스크의 2군단과 교섭한다.
1921. 1월경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에서 이르쿠츠크에 아시아의 공산혁명을 인도하기 위해 동양비서부를 설립하고 고려인 부대의 지도 권한을 코민테른 본부 등에서 동양비서부로 이관함(동양비서부는 1920년 9월경에 설치되었다는 소리도 있다). 극동공화국(혹은 원동공화국이라고도 한다)내에 있었던 한인부가 해체되고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원동비서부 혹은 극동비서부라는 명칭보다는 동양비서부가 적합한 명칭임)로 고려인 부대 지도권한이 이전되기 시작됨. (한인부는 해체 이후에도 일부 인물들이 수개월간 유지됨)
1921. 1월경 상해파가 재러군사위원회 조직, 상해임시정부측 이용이 경고문 발표
1921. 1월경 이용, 채영 등은 전한의병대의회 소집위원회 결성,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
1921. 1월경 (만주 밀산 일대에서) 독립군 러시아 연해주의 이만시로 집결 시작
1921. 1. 18. 일경 보병자유대대장 오하묵은 트리피친 부대였던 제19연대 해산 및 고려인 부대 등의 문제를 보고하라는 극동공화국 군부 명령에 따라 치타 등으로 보고차 이동
1921. 1. 20. 일경 극동공화국 총사령관 에이히(Эйхе)는 사할린특립의용대를 조직하여 체르니고프카(=과거에는 체르니곱스코예 라고도 불렀다.), 크라스나야라바, 마자나바로 이동해 주둔할 것을 명령함 (상해파가 이르쿠츠크파와 협의 없이 총사령관에 박창은, 참모장에 러시아인 그리고리예프 임명)
1921. 1. 28. 일경 ~ 혹은 2월경. 니항에서 자유시로 온 박병길이 독립군에 의해 처단됨(암살설도 있다. 박병길의 자세한 과거는 알 수 없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자유시로 온 것으로 보임. 일제의 밀정 여부는 확인되지 않음). 자유시 포병부대 지휘관 안드레예브도 트리피츤 지지세력으로부터 3차례 살해공격을 받았으나 나중에 도주하여 일본군으로 넘어감
1921. 2월경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에 슈먀츠키가 취임
1921. 2월초 안무 부대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아무르주(흑룡주) 자유시 도착
1921. 2월 중순경 (상해파) 박창은, 그리고리예프 자유시 도착
1921. 2월경 박창은 사면으로 한인부에서 그리고리예프를 연대장으로 군정위원장에 박일리야를 임명
1921. 3. 1. 고려공산당대회 개최 예정일이었나. 양파의 다툼으로 개최되지 않음(상해파는 치타, 이르쿠츠크파는 이르쿠츠크를 주장)
1921. 3월 중순경 상해파 장도정, 계봉우, 김진 등이 고려공산당대회 장소를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로 변경
1921. 3. 15. 일경 아무르주 마자나바, 크라스나야라바 일대에서 상해파 박일리야, 이용, 장도정 등이 전한의병대의회 개최, 전한군사위원회와 사할린특립의용대를 조직
1921. 3월경 상해파는 극동공화국 정부와 교섭하였으나 극동공화국 총사령관 에이히는 고려군대 군권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있음을 통보
1921. 3월경 총군부, 국민회군, 홍범도 부대, 군정서군, 이만군, 다반군, 박그리고리 부대 자유시 도착.
만주지방 및 연해주지방 독립군 부대를 중심으로 대한혁명군(대한독립군) 조직됨
1921. 4월경에서 5월경 중국 북경 일대에서 상해임시정부와 대립하던 측에서 독립군부대 통합을 위해 북경군사통일회의를 개최하였으나 실패
1921. 4월경 극동공화국 군부에서 계봉우, 김진, 박애, 이용, 장도정 등을 이르쿠츠크로 압송
1921. 4. 14. 일경 이르쿠츠크파는 극동공화국 군부에 임시고려군정의회 조직을 통보. 상해파인 계봉우, 박애, 김진, 이용, 김규면, 이한영, 임상춘, 한형권과 협의를 시도하였으나 실패
1921. 5. 2. 일경 이르쿠츠크파가 비밀리에 조직한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의 오하묵 일행 자유시 도착
1921. 5. 4. 일경 이르쿠츠크에서 고려공산당 제1차 대회 개최하여 5월 17일경 폐회.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이르쿠츠크파의 지도하에) 정식 고려군정의회 조직. 총사령관 까란다리쉬비리, 의원에 류동열, 최고려 등 임명
1921. 5. 12. 일경 예전 오하묵의 보병 자유대대가 크라스나야라바로부터 원래 주둔지 자유시로 이동
1921. 5. 13. 일경 이르쿠츠크의 합동민족군대 소속 한인부대가 자유시로 이동시작 (5월 28일경까지 최종 600여명 이동)
1921. 5. 18. 일경 치타에서 사할린부대로 가던 동림 체포. 상해파가 이르쿠츠크파측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고려군정의회 무력화 시도. 이 무렵 상해임시정부의 지원금인 금은화 약 3만루블 이상이 러시아 관청에 압수됨
1921. 5. 19 일경 까란다리쉬비리, 류동열, 최고려 이르쿠츠크에서 자유시로 출발 (독립신문 1922. 2. 27 일자)
1921. 6. 2. 일경 홍범도 부대 일부 수십 차례 주둔지 변경후 다시 마자나바에서 자유시로 이탈
1921. 6. 2. 일경 김홍일 단독으로 자유시 도착
1921. 6. 6. 일경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 까란다시비리, 류동열, 최고려 등이 코카서스(혹은 카자키, Казаки) 기병 600여명에서 900여명을 인솔해 자유시 도착. 정식 총사령관 선포 (대한혁명군측은 무장해제 명령에 대체적으로 불복)
1921. 6. 6. 일경 까란다리쉬비리와 통역사 최고려 등은 자유시 주둔 군인 전부를 모아서 설명
1921. 6. 9. 일경 안무 부대 마자나바 이탈후 자유시 도착. 일부 독립군의 주장에 따르면 안무 장군은 홍범도가 떠나자 수차례 자체 회의를 통해 일단 자유시쪽으로 이동하여 내분과 식량난 등을 해소할 목적으로 이동하였으며, 이르쿠츠크파를 지지하기 위해서 이동한 것은 아니라고 함. 안무 장군의 이탈로 사할린 의용대도 통합에 대한 압박이 가중됨
1921. 6. 14. 사할린부대 자유시 도착후 수라제프카로 이동. 사실상 고려혁명군정의회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임. 자유시가 한국 독립군들로 뒤덮임.
1921. 6. 15일경 까란다리쉬비리, 오홀라 및 3명 블라가베셴스크를 방문하여 체포되었던 김규면, 한운용, 박원섭, 마시욱, 주영섭, 안태국, 임상춘 등을 조사하고, 금은화 3만루블 이상을 회수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까란다리쉬비리 등은 6월 18일경 자유시로 돌아옴
1921. 6. 19일경 자유시에서 장교회의 개최(분대장 이상 간부) (※이 무렵 수라제프카에 주둔한 사할린 의용대의 무장해제와 공격을 반대한 합동민족군대 소속 고려인 간부 투옥)
1921. 6. 20일경에도 군회가 있었다 ※ 독립신문 1922. 2. 27 일자에 따르면 1921. 6. 20.일경에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1921. 6. 21. 그리고리예프, 박일리야 등 장교 7인이 김하석, 오하묵, 최고려를 축출하면 고려군정의회에 복종하겠다는 혈서 제출
1921. 6. 22. 일경(※ 1921. 6. 20일날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까란다리쉬비리, 최고려 등이 독립군 3천여명을 자유시에 집합시켜 전군의 통합을 촉구.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66쪽에 따르면 최고려가 고려혁명 분열을 막기 위해 분란을 일으킨 자신이 독립군이 쏜 3천발의 총알을 맞고 죽겠다고 하자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하였으나, 현장에 있던 독립군들은 최고려나 까란다리쉬비리가 누군지 조차 제대로 몰랐고, 당시 연설을 하여 화합을 유도한 사람은 홍범도 장군 등이었다고 한다.
홍범도는 과거 의병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이야기하며, 갑자기 “김유신 장군이 삼국을 통일하실 적에”라는 연설을 하여 자유시 군관학교 운동장에 모인 독립군들에게 울음 바다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날 다시는 서로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홍범도가 이순신, 사명당, 최무선, 김방경, 이종무, 박제상 등의 유명한 장군 이야기를 안하고 왜 갑자기 김유신 장군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21. 6. 24일경 독립군 부대 편제 개편을 둘러싼 갈등이 다시 발생
1921. 6. 25일경 까란다리쉬비리, 류동열 등 수라제프카에서 사할린부대 장교회의 개최
1921. 6. 27일경 수라제프카에 주둔중이던 사할린 의용대의 연대장인 그리고리예프 사면서 제출. 27일 자정이후부터 공격 개시
1921. 6. 28. 전날 한밤중부터 시작된 기습공격으로 수라제프카 일대에서 자유시 사건 발생. (사망 수백여명, 포로 등 천여명 이상)
1921년 후반기부터 포로로 잡힌 독립군 다수가 이르크추크 등지로 압송중 사망, 일부는 만주·연해주 일대로 탈출, 이동휘·만주지방독립군 단체·상해임시정부 등의 항의로 결국에는 포로생활을 하던 독립군 대부분 석방됨
1921. 10. 16일경 상해파 측이 러시아 지원 자금의 사용처 등을 보고
1921. 11. 28일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동휘, 홍도, 박진순, 통역사 김아파나시 4명이 레닌과 면담하여 독립군 석방을 탄원.
1921. 11. 월경부터 워싱턴회의에 한국 독립 문제 제기하였으나 실패
1921. 12. 9일경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ЦК РКП(б))는 자유시의 포격·총격 사건을 수사할 것을 지시. 당시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사실상 볼셰비키의 최고 명령기관이었음
1921. 12. 18. 일경(혹은 12월 20일경)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와 바이친스키 형식적인 퇴진 발표
1922. 1월경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의 지도자 레닌, 코민테른 총비서 사파라프(Сафаров),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 김규식, 여운형, 구오남, 홍범도, 일본대표 센카타야마(片山潜), 중국대표 왕, 인도대표 등의 만남이 있었고, 한국측 통역사는 최고려였음
1922. 4. 22. 일경 코민테른 상임위원회 한국문제위원회가 이르쿠츠크 대회에서 제명된 모든 당원 복권, 박진순·박애·최고려·김규식 퇴진, 두세력의 통합을 위한 3개월의 휴식기간 결정
1922년 10월 25일경 블라디보스토크의 일본군은 철군.
내전 승리가 확실해지자 볼셰비키는 병력 감축, 고려인 부대 대부분 해산
1925. 1. 20일경 일소기본조약(日蘇基本條約) 체결. 일본이 사할린섬 북부의 석유·석탄 채굴권 등을 획득, 니항사건에 대한 배상요구를 중단함.
1925년 5월경 일본 군인은 사할린섬 북부에서 철군하였으나, 일본이 점령했던 사할린섬 북부의 석유, 석탄 광산은 1944년에서야 소련측으로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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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인들의 만주·시베리아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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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쇠락
자급자족의 농촌이 기반이었던 조선은 후기에 들어서서도 사회의 모순은 줄어들지 않았고, 민중들의 삶은 여전히 힘들었습니다.
서구의 산업혁명과 민주주의의 시작은 조선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압록강과 두만강 등의 국경주대 주민들은 일찍이 중국, 몽골 등과 교류가 있었고 잦은 흉년과 세도정치, 부정부패가 이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강을 건너 만주 혹은 연해주로 몰래 이주하는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아무르강(흑룡강)의 명칭
조선 초기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 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등을 보면 두만강·압록강 건너편인 북쪽에 몽고 흑수로 표기된 강이 흑강, 흑룡강, 아무르강이라고 부르는 강이며, 평안도·함경도·만주 주민들은 까만강, 혹은 까망강, 몽고 까망강 등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 강은 오늘날의 몽골 공화국에 있는 강이 아니고, 현재에는 흑룡강 혹은 아무르강이라고 널리 불려지지만 삼국시대 혹은 고대시대의 “흑수”라고 불려졌던 강의 다른 명칭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명칭은 한국어 명칭을 한문으로 표현함에 따라 발생하는 문제로, 조선 세종대왕 때 한글이 창제되었음에도 문맹률이 높고 널리 보급되지 않아 발생한 문제들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두만강변 녹둔도에서 둔전관을 하던 시대나 조선후기 연암 박지원 등이 중국을 다녀오며 연행록을 쓰던 시대에 사용되는 명칭을 조선시대 후기에도 여전히 사용하였습니다.
이 명칭 역시 고려시대에 쓰던 명칭을 그대로 써 온 것이며, 발해 부여 시대에 사용하던 명칭이었으나, 중국에서 요동지방은 만주로, 흑수 혹은 흑강은 흑룡강으로 바꿔서 사용함에 따라 바뀐 이름이 오늘날 사용되게 된 것 뿐입니다.
자연자원이 풍부했던 과거
산업혁명 이전의 한국내의 산과 들은 미개간 된 곳이 있었고, 화전민도 있었습니다.
생산력이 떨어진 농경지를 휴작하여 돌려짓기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또 산에는 호랑이, 표범, 멧돼지, 늑대 등의 덩치 큰 동물이 광범위하게 살고 있었고, 낙동강 상류지역에 까지 “뚜구리” 등으로 불려지는 메기와 비슷하게 생긴 물고기 혹은 철갑상어류 혹은 돌고래, 바다사자 종류로 불리워지는 거대한 물고기가 존재하여 송아지까지 잡아먹는 경우가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올 정도였습니다.
실제 큰 강이 아님에도 석기시대에 만들어진 울주군 반구대에는 작은강 하구에도 큰물고기와 고래와 돌고래 등이 드나드는 풍족한 자연환경이 그려져 있습니다.
농경기술의 부족으로 가뭄, 홍수에 취약하였으나 상대적으로 산, 들, 강에는 당시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농업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구문명과 중국의 충돌
1839년 아편전쟁 등은 중국에 섬기던 조선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각종 호란을 일으킨 만주족을 멸하자는 생각은 사라지고, 청나라를 배우자는 실학운동까지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국과 러시아 등의 중국 국경 침입으로 1860년 북경조약(北京條約 : 베이징조약)이 체결되면서 홍콩섬 등이 영국에 넘어가고, 연해주 지방이 러시아로 할양됩니다.
그리고 조선은 제정 러시아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직접 국경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령 연해주로의 이주 시작
1860년 북경조약과 연해주의 할양
1858년 애혼조약(愛琿條約 : 아이훈조약)으로 아무르강(흑룡강) 이북지역을 중국(청나라)이 러시아에 넘겨준 데 이어. 1860년 러시아 외교관들은 중국 정부가 북경조약(露淸北京條約)에 서명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영국·프랑스 군이 중국에 가한 패배를 이용합니다.
북경조약으로 중국은 우수리강 일대의 연해주지방과 남부 하바로프스크 지방의 광대하고 인구 밀도가 낮은 영토를 러시아에 할양했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가 한국과 약 14km의 짧은 국경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1861년경부터 연해주 개발을 위해 인두세와 토지세를 면제해주는 등의 정책을 실시하여 이주를 장려하였습니다.
한국인의 러시아 영토로의 이주는 1863년 9월 21일자 러시아 국경감시소에서 작성한 문서에 한국인 13가구가 연해주에 있다는 기록 등에서부터 나타납니다.
동학란, 1876년 강화도 조약
외세에 대한 위기의식과 세도정치의 폐단과 생활의 궁핍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경주의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한 이래,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그 세를 떨치게 되었습니다.
1864년 혹세무민 등의 이유로 창도자 수운 최제우 처형후에도 제자들을 중심으로 교조신원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1894년 동학운동과 1919년 동학교도의 3·1운동 주도 등은 과거의 악습을 폐지하고 새로운 시대로 가려는 의지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리고 1876년 2월 27일(고종13년 음력 2월 3일)경 강화도조약으로 불려지는 조선과 일본과의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만주에서 발흥한 청나라
조선시대에 세워진 청나라는 만주에서 발흥한 왕조였습니다.
조선중기 이후에 명나라 대신 만주족·몽고족의 청나라에 사대를 하게 된 조선왕조는, 사신을 보낼 때 몽고족의 원나라 시대부터 요동지방의 대도회였던 봉천(오늘날의 심양)을 거쳐 연경(북경)으로 이동하였고, 조선 사신들은 연행기라는 기록들을 작성하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만주족이 중국까지 장악하고 중국 본토로 이주하게 되자, 간도지방과 오늘날의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인구는 매우 적었습니다.
1658년경 청나라는 자신들의 발상지인 만주 등에 대한 봉금령을 내려 만주로의 한족 이주를 억제하였으나, 러시아가 동시베리아로 진출할 무렵부터 순차적으로 해제하였습니다.
간도·만주·러시아로의 이주 시작
한국인의 국외 이주가 활발히 시작되던 시기는 세도 정치(勢道政治) 아래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심해졌고 전국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이리하여 고종(高宗) 4년(1867)경에는 간도 지방에서는 이미 한국인에 의한 토지 개간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1870년경부터 1910년경 동안 만주의 여러 지역에서 황무지 개간과 벼농사를 위해 조선인의 이주를 환영했습니다.
(※ 본 책에서 시간부족 등의 문제로 높임말과 평문을 섞어쓰게 되었습니다.)
청나라(만주족)의 만주 이민 정책
청나라 초기 만주지역에는 중국 내부와 같이 수십에서 수백여개의 현(縣) 단위 행정구역 위에 성 등의 행정구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 봉천부라는 관청을 중심으로 행정조직이 운영되다가, 조선시대 후반부터는 길림성, 봉천성(오늘날의 요령성), 흑룡강성 등이 생겨나고 그 아래에 수십에서 ~ 수백여개의 현(縣) 단위 행정구역이 생겼다.
이성량(李成梁 : 1526년경 출생 ~ 1615년경 사망) 등은 명나라 시기 조선을 깔보던 자라고 예전 자료에 가끔 나오며,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공부상서 김간(金簡 : ? ~ 1794년경 사망) 등과 같이 조선과 관련된 인물은 조선이 중국을 섬기던 시기에는 매우 드물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후에도 1912년 청왕조 멸망할 때까지 일제에 적극 협조하거나, 고려인의 만주·간도 이주를 강하게 저지하지는 않았다.
1884년 조선·러시아(아라사)의 조약체결
1884년에는 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어 조선과 러시아는 정치·경제적으로 더욱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연해주 첫 이민자의 대부분은 한국 북부지방의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그들의 고향 생활은 먹고살기 힘들었다.
땅이 충분하지 않았고, 비료가 필요 없는 비옥한 토지는 더 적었다.
부패한 탐관오리들과 양반·지주들은 피지배계층인 농민들로부터 엄청난 세금을 징수했고 때로는 수확량의 50%에 달했다.
공식적인 세율은 훨씬 낮았지만 징수된 것의 상당 부분이 탐관오리의 주머니에 들어갔고 농민들은 각종 민란 등에 가담하면서 잘못된 지배체제에 저항을 강화하였다.
한국 북부지방 농민 가족은 강과 산으로 이루어진 국경을 넘어 거의 자유롭게 만주, 간도나 러시아 영토로 이동할 수 있었고, 만주, 간도, 러시아 극동 지역의 한국 마을 수가 증가했다.
러시아의 한국인 이민 환영
처음 러시아 관리들은 한국인 이민을 환영했다.
한국인 정착민들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광막한 땅을 개간하고 많은 수확을 거두어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시베리아와 만주라는 거대한 무인지경의 원시림 지역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국인의 이주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아직 건설되지 않은 1900년까지 특히 중요했으며 극동 지역에는 러시아 서부지역이나 유럽지역에서 온 농민이 거의 없었다.
제정 러시아 관리들은 한국 농민들의 노고와 그들이 개간한 땅의 엄청난 수확량, 새로운 한국 정착민들의 정직성과 준법성을 보고서에 열정적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이 있었다.
제정 러시아 정부는 한국인의 영토내 정착이 결국 한국인으로부터 러시아 영토에 대한 한국 고대시대 영토 회복의 기초가 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한국 이민자들은 중국에서 온 이민자들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대우 받았다.
그 결과 중국계 혹은 한국계 이민자에 대한 정책은 일관성이 없었다.
시베리아 지역의 최고 군사·행정 책임자인 총독의 개인적인 견해에 따라 좌우되기도 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시베리아 지역의 한인 사회는 빠르게 성장했다.
풍부한 토지와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정직한 행정으로 간도·만주·연해주의 매력이 너무 강했고 당시의 기술로 국경을 봉쇄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 그리고 국경봉쇄를 시도하지 않았다.)
연해주 지방의 한인 사회
한국 이민자 정착의 주요 중심지는 한국과 경계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해삼) 지역과 연해주, 아무르주 지역이었다.
연해주 지방의 도시중에는 한국 정착민은 전체 인구의 90%를 가까이 차지하는 곳도 있었다.
1900년대 초에는 극동 지역에서 많은 한국 학교가 운영되고 한국인 신문이 출판되고 출판사가 운영되었다.
또한 독립군들에게 러시아는 간도·만주와 더불어 정치적 이민의 중심지가 되었다.
1905년 이후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사실상 한국을 장악했을 때에는, 러시아령내의 홍범도 등 독립군들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서 러시아 영토를 떠나, 간도·만주·한국 땅으로 이동했다.
그후 일본군에 의해 패배한 독립군의 일부가 러시아 영토로 피신했다.
대한제국의 정규군 일부도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에 반대하고 러시아 영내로 왔다.
러시아는 간도·만주처럼 독립운동과 반일운동의 중심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 문화의 중요한 중심이 되었다.
1910년 이후 한국에서 일제에 의한 토지약탈과 한국인의 해외 추방, 일본어와 일본인을 우선시하는 교육 등을 실시되었고, 다수 일본인들이 한국내 쓸만한 땅을 약탈하고 한국내로 이주하자 한국인 소작농들의 간도·만주·연해주 이주는 더욱 심화되었다.
중국령 만주의 혼란상과 친일파의 등장
그러나 간도·만주 일대에는 청나라(1636년경부터 1912년까지 존속) 말기부터 한족(漢族)이 쇄도하였고, 만주에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후 일본군(관동군)이 일부 주둔하고, 중국계 친일파(장작림, 장종창 등)와 마적단이 서서히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여, 만주의 혼란상은 한마디로 말하면
“폭력이 우선이고, 주먹 센 놈이 법이고 진리다” 였으며
한국인 사회의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1895년 청일전쟁 무렵의 만주 인구
1895년경 만주 인구 대략 500만여명중 한족(漢族)은 이미 200만여명에 달했다.
청나라의 1895년경 청일전쟁 패배 후, 청나라와 러시아의 협의에 따라 1897년 만주를 횡단하는 중동로 철도(동청철도)가 건설되기 시작했고, 요동반도로도 남만주 철도(1898~1903, 하르빈과 여순간)가 개통되었다.
조선과 만주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 벌인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후, 제정 러시아는 1908년경부터 60만명 극동이주 계획 등을 추진하였고, 청나라는 일본, 러시아, 미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만주 진출에 대응해 자신들의 영토를 지키고자 만주로의 한족 이주를 장려할 수밖에 없었다.
한족의 만주 이주 초기에는 산동, 하북, 하남 출신들이 많이 이주하였다.
그 결과 만주의 인구수는 청나라 말엽에 이미 조선의 인구수를 추월하였다.
1905년경 러일전쟁 종전 직후의 만주 상황
러일전쟁이 지속되던 시기, 1905년 1월. 시민들의 평화적인 시위를 용납하지 못한 짜르 러시아는 비무장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하여 수백여명을 사살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되어 황제 지배체제가 위기에 빠진다.
러시아 내부에서는 볼셰비키, 멘세비키 등의 혁명세력이 강화되고 있었다.
(※ 일설에 의하면 러시아 혁명세력의 일부가 러일전쟁 기간중 일본의 돈까지 받아 먹었고, 1차 대전 때는 적국인 독일의 지원도 받았다는 소리가 분명 있다.)
러시아 극동에 위치하여 죄수들이나 유배 오거나, 혹은 농노에서 해방된 사람들, 우크라이나 지역 하층민들, 조선에서 일제를 피해 살기위해 탈출한 사람들이 이주해 오던 시베리아, 사할린섬에서도 혁명 운동에 동조하는 자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당시 시베리아의 특성상 광활한 대지에 사람이 드물게 존재하는 지역인지라, 짜르 러시아는 못살아서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로 이주한 조선인들까지 받아들여 타이가 개간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1905년 포츠모스 조약으로 러일전쟁은 종전
러일전쟁은 결국 1905년 9월경 미국의 중재로 종전된다. 1905년 9월 5일경에 합의된 포츠머스 조약(Treaty of Portsmouth : Портсмут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포츠머스 조약 주요 내용......
1.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영향권을 인정한다.
(※ 1905년 11월의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 상태가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대략적으로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등이 모두 한국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인정한 것이다.)
2. 러시아의 요동반도의 관동주 조차지와 남만주철도의 일부(장춘 여순간 철도)를 일본에 양도한다. 당시 만주의 핵심 철도중 하나인 동청철도(블라디보스토크와 만주리 간의 철도)와 북만주의 대도회가 된 하르빈 일대에 대한 짜르 러시아의 지배권은 인정된다.
3. 회담 무렵 일본이 무력 점령한 사할린섬의 북위 50도 이남과 인근 섬들을 일본에 할양한다.
(※ 북위 50도 이하 사할린섬 남부의 주민에 대한 추방과 학살이 있었다고 한다. 동해의 독도만 이 때 일제로 넘어간 것은 아니다.)
4. 어디까지나 일본측 주장에 따르면 러시아는 동해, 오호츠크해 및 베링해 일대의 어업권을 일본에 양도한다.
(※ 동해, 오호츠크해, 베링해의 어업권과 쿠릴 열도, 각종 도서 등에 대한 소유권을 놓고는 이후에도 여러차례 다툼이 있었다. 오호츠크해 어장과 베링해 어장, 사할린섬 일대의 가스전 등은 오늘날 한국 어민과 기업들까지 진출하고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어장과 자원의 보물섬이다.
아무르강(과거명칭은 흑수강 혹은 몽고 흑수) 하구에는 무게 수십톤에 이르는 범고래까지 출몰하는 지역이다.)
5. 양측 모두 만주지역 도로의 상업적 사용을 인정한다.
6. 전쟁 포로를 교환한다.
......포츠머스 조약 주요 내용 끝......
우리가 만주라고 부르는 곳은 과거 부여, 요, 금, 원, 후금이 있던 지역인데,
청나라 말엽의 잦은 영토 분쟁에 이어
서구 제국주의 국가중 일본과 러시아의 이권다툼은 러일전쟁으로 일단 정리가 된 것이다.
만주에 대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 지속과 일본의 독점 견재
물론,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이 남만주의 일본 지배권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러시아가 청나라 혼란기 차지했던 만주를 최소한 나눠 갖자는 것이지 일본이 독점하게 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광대한 면적과 비옥한 토지, 석탄, 삼림, 오호츠크해의 어장, 사할린섬의 석유와 석탄 등을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양보할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가 아니었다.
당시 기술부족으로 석유를 제외한 천연가스의 활용도는 낮았다.
그 무렵 기술의 부족으로 중동 산유국뿐만이 아니라 시베리아와 사할린주에서도 그냥 버렸던 천연가스는 주요 자원이 아니었고, 활용도도 낮았다.
사할린섬과 만주의 석탄, 철광석, 삼림, 어류의 활용도가 더 높았다.
사할린섬의 유전을 활용했던 일제 역시 대동아전쟁시기에도 사할린섬의 천연가스를 액화, 비료화, 플라스틱 원료화, 화약으로 제조하는 기술 등이 부족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 지금에 이르러서는 메탄가스를 주성분으로 하는 천연가스의 활용도는 원유 못지 않다. 일제의 북사할린섬 점령시기 일본으로 수출된 석유의 양이 2차대전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할 정도의 양이지만 어류, 석탄, 삼림 등의 다양한 자원이 일제 시베리아 침략시기 유출되었다)
한국인 이민자 수
1880년까지 러시아령 연해주 지방에는 21개의 한인 마을이 있었고, 이 지역의 한인 인구는 6,700여명에 이르렀다.
(※ 이 무렵 연해주의 러시아 농민은 8,300여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1901년까지 약 3만명의 한국인이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살게 되었다.
(※ 인구수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조선총독부 등의 자료에 따르면) 1910년경 만주 거주 한국인은 대략 10만 9천여명이었다.
연해주(프리모르스키) 지방에서는 1910년 러시아인 17,000여명일 때, 한국인이 52,000여명 이었다.
러시아측 자료에 따르면 1917년경 러시아 영토에는 10만여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농민이었다고 한다.
1921년경 간도에는 30만 7천명 이상이 거주중이었다.
그들중 대다수는 일제와 친일파들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보다 나은 삶을 찾아왔거나 아니면 살해와 투옥을 피해 탈출해온 사람들이었다.
(※ 1945년 해방 전까지 일본인의 한국 내로의 이주가 증가하자 한국인의 간도·만주·러시아·일본·아메리카 등지로의 반강제적 이주는 더욱 증가하였다.)
※ 대략적인 수치이며, 일제와 러시아의 기록 등을 주로 참고하여 사실과 다를 수 있음 | 연해주·러시아령 | 만주·간도 |
1880년 | 6,700여명 | |
1894년 | 만주 65,000여명 | |
1898년 | 23,000여명 | |
1901년 | 30,000여명 | |
1907년 | 46,000여명 | 71,000여명 |
1910년 | 52,000여명 | 만주 109,000여명 |
1917년 | 8만~10만여명 | 220,000여명 |
1921년 | 간도 307,000여명 | |
1924년 | 15만여명 | 330,000여명 |
1937년 | 17만~23만여명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
일본 제국주의의 친일파 육성과 만주·시베리아 침략 시도
일본 역시 대만, 조선, 만주, 중국, 남양군도, 쿠릴열도, 사할린섬은 국력을 기울인 그들의 침략 방향이었고 양보하기 쉬운 곳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은 러일전쟁부터 1918년 러시아 적백내전, 1931년 만주사변까지 이어지게 된다.
1907년 1월 11일경 청나라 농공상부 상서인 재진, 민정부 상서인 서세창은 동3성의 정세를 보고한다.
당시 만주에서는 장춘 남부와 북부를 경계로 일본 세력권과 러시아 세력권으로 나눠지고 있었다. 또 잦은 전쟁과 마적 및 비적 떼의 출현으로 황폐화된 지역도 많았다.
아무르강, 우수리강, 두만강 등을 경계로 하는 국경지역의 분쟁도 끊임이 없었고, 그것은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1907년 4월 20일경 청나라는 성경(봉천)장군이 동3성 총독 겸 동3성 장군사무를 맡게 하였고, 서세창이 처음으로 동3성의 총독 겸 장군사무를 담당하게 된다.
당시 중국 동북지방은 일본과 러시아 등의 패권 다툼이 한창이었고, 만주 역시 계속해 침식당하고 있었다.
4월 29일경, 동3성 총독 서세창은 육군 3개 진이 동3성에 있고, 2진, 4진, 5진에서 보병, 포병, 기마대를 동원해 2개의 혼성여단을 구성하고 있다고 보고한다.
8월 7일경, 동3성 총독 서세창, 봉천순무 당소의, 봉천 주재 미국 총영사가 양해각서에 서명했으며 해리만은 새로운 신민둔(신민툰) 철도 건설에 투자하기로 했다.
그러나 미국의 금융공황으로 인해 영국 기업인들이 대신 투자하도록 초청되었다.
8월 12일경 아베 모리타로 일본 대리공사는 이 사실을 외무부에 통보하고 항의했다.
청나라는 만주에 대한 개방 정책을 가속화하고, 이곳을 여러 나라의 중요한 무역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은행, 철도, 도로, 토지개간, 광업 등에 막대한 외채를 빌리기로 한다.
1907년 10월 13일경, 청 정부는 동3성 총독인 서세창이 동3성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처리하기 위해 수천만 달러의 외채를 빌릴 수 있도록 허용한다.
10월 26일경, 호북 안찰사 양정분이 원세개와 혁광이 사익을 탐하고 나라를 해친다는 이유로 탄핵했고, 청 정부는 서세창, 양사양, 진기룡 등의 공허한 말과 명성을 얻으려는 시도를 질책했다.
서세창 등은 만주의 상업항 개항, 국채 차입, 타국과의 연결, 철도 건설 등의 조치를 취했으며, 명목상으로는(뒤로는 일본 돈을 받아 먹었는지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일본과 러시아의 중국 동북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중국 동북 지역 진흥 정책을 시행한다.
1909년 원세개는 (청나라 마지막 임금인 선통제의 아버지인) 섭정왕 재풍에 의해 파직되었다.
서태후가 죽은후, 1909년부터 1911년까지 청나라의 실권자는 선통제의 생부인 섭정왕 재풍이었다.
만주에 친일 마적 출신 군벌의 등장
그러나 이 무렵 만주에는 마적출신들이 혼란한 만주정세를 활용하고, 일제의 만주침략에 협조하며 폭력과 술수를 앞세워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바로 중국의 혼세 말세에 등장한다는 혼세마왕 혹은 일제의 개였다.
(※ 이 무렵 만주에서 문제가 된 인물들은 미제의 개, 혹은 영국의 주구, 볼셰비키의 앞잡이는 아니다.)
그들 역시 만주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을 강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러시아 극동 지역은 한국인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한국어로 문학을 출판하고 교육 활동을 수행하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곳 중 하나였다.
제정 러시아의 한인 정책 변화
그러나 1907년 이후 차르 러시아 당국은 일본과 우호 관계를 구축하는 과정을 밟았고 러시아 영토에서 너무 격렬한 반일 활동을 억제했기 때문에 대놓고 일제와 무장투쟁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니항, 사할린섬 등지에는 한국인외에도 일본인, 중국인, 미국인, 유럽인, 시베리아 민족 등 다양한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1904년에서~1905년의 러일전쟁의 패전을 잊지 않았고, 당시 많은 한국인들이 러시아편을 들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한국인들의 반일활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 1909년 안중근은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의 도움을 받아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사살하였다.
이러한 상대적인 자유는 러시아에 대한 반일 저항의 많은 지도자들을 끌어 들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대부분 빈곤과 일제의 억압에 의해 러시아로 쫓겨 난 한국 동북부지방 빈곤한 농민이었다.
정착민들은 주로 북동부(함경도, 평안도) 사투리 등을 사용했는데, 이는 서울의 언어와 약간 달랐다.
그리고 남부 지방에서 동학교도 토벌, 일제의 의병 토벌, 사살령 등을 피해 탈출해 온 사람 등 다양한 한국인들이 연해주에 거주하게 된다.
제정 러시아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1914년 7월경 제국주의 국가 사이에 패권을 놓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1914년 8월경에는 제정 러시아가 독일과의 전쟁에 참전하였다.
제정 러시아의 참전 초기 전국적인 동원령에도 불구하고 전선에 배치되는 군인들에게 줄 소총까지 부족하였고, 시베리아의 소수민족인 고려인까지 동원하였다.
그 넓은 농토에도 정치가 엉터리라서 식량부족과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국민생활이 곤궁해졌다.
결국 같은 연합군의 일원이 된 일제로부터 대량의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극동에서 수입하여야만 했고, 중국으로부터도 50만여명의 노동력을 지원받았다. (영국과 프랑스에는 중국인 약 14만여명 이상이 지원되었다. 그중 약 2만여명이 죽었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미국·일본의 경제발전 그리고 중국 경공업·식품산업의 호황
원세개의 북양정부는 처음에는 중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중국 북양정부는 1917년 8월경 독일에 선전포고한다.)
그러나 제국주의 국가간의 세계적인 전쟁으로 중국 역시 어부지리를 기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중국으로 수출되는 외국 상품과 자본은 급감하였으며, 전쟁 당사자들은 중국의 인력과 경공업 제품, 생활용품 등을 필요로 하기 시작한다.
비록 1차 세계대전 기간중 중국의 중공업 발전은 더뎠지만, 새로운 공장과 광산이 설립되었으며, 수출이 급증하였고 특히 제사, 제분, 성냥, 제지, 담배, 시멘트, 착유, 설탕정제의 경공업부터 석탄채굴, 철강, 안티몬, 텅스텐 등의 중공업도 1차세계대전 기간에 크게 성장하였다.
(※ 물론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 되자마자 수입은 급증하고 수출이 급감하였고, 외국의 경제 침략이 지속되자 1922년경부터 중국 경제는 불황에 다시 빠지기 시작한다.)
1차 대전 동안, 북양정부는 유럽에 대한 노동자 지원외에도 러시아 적백내전에 소수의 군대를 파견하였고 러시아 볼셰비키에 대한 경제봉쇄 동참, 일본군의 만주 동청철도·시베리아 출병과 점령, 조선인토벌 방관 등 일제와 연합국에 적극 협조하였다.
그러나 전쟁기간중 경제호황으로 세계1위의 경제대국이 된 미국의 대통령 윌슨은 14개조의 제안을 하였으나, 결국에는 제국주의 국가의 이권 보장에만 그치게 되었다.
제1차 대전이 종전된 후에도 독일이 점유했던 산동반도의 교주만, 교주철도, 청도, 광물, 해저케이블은 중국에 반환되지 않았고 일본에 넘어갔다.
이것은 결국 중국에 침입한 제국주의자와 친일 매국노에 대항하기 위한 1919년 5.4 운동이 일어나는 한 원인이 된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제정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 개선
러일전쟁 패전이후 일본과 러시아의 사이는 좋지 못했으나 1907년경부터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하여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여 제정 러시아와 일본이 같은 연합군이 되자 관계가 급격히 개선되었다.
러시아의 니항(니콜라예프스크), 블라디보스토크, 사할린섬, 만주 하르빈 등에는 식량과 전쟁물자를 공급하려는 일본인들의 거주가 늘어나고 영사관 등이 개설되어 러시아내 반일세력인 독립군의 활동이 제약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1917년 2월경 ‘2월 혁명’이 발생하여 로마노프 왕조가 망하고,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그해 10월 공산주의자인 레닌이 주도한 ‘볼셰비키 혁명’이 발생하며, 제1차 대전 연합국에서 이탈한다.
1919년 제1차 대전이 종전된 후 베르사이유 조약에 러시아 볼셰비키 정권은 초청되지 못했으며, 연합국의 볼셰비키 봉쇄와 러시아 적백 내전 간섭은 강화되고 있었다.
1916년 원세개 사망후 만주상황
1917년 손문은 광주 일대에서 군사정부를 세웠고, 곽송령은 손문에게 귀순하여 이후 광동성·감숙성 변방독판참모, 광동성 경위군 영장(대대장)으로 임명됐다. 나중에는 소관 강무당의 교관으로 옮겨졌다.
손문이 이끄는 호법운동이 실패하자 곽송령은 광주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으며, 봉천으로 돌아가 동3성 육군강무당에서 전술교관으로 복무했다.
이 무렵 만주의 대도회 봉천은 군벌이 된 장작림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강무당에서 공부하고 있던 (장작림의 아들인) 장학량을 만난다.
장학량의 추천으로 곽송령은 장작림에 의해 참모장 겸 제2연대장(단장)으로 임명된다.
북만주의 대도회 하르빈에 중국 군벌군도 일부 입성
1917년 12월경에는 러시아 혁명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한 (만주 동청철도의 러시아 백파 장령) 하르바트(Д. Л. Хорват = 일명 호르바트)의 요청으로 만주 군벌군이 북만주의 대도회이며 동청철도의 거점인 하르빈에 입성한다.
(※ 이 무렵 북만주 최대의 도시가 된 하르빈에서 1909년 일본의 거물 정치인 이등박문이 사살되기도 하였다.
중국은 1922년 12월경 중동로(동청철도) 연선을 별도 행정단위인 동3성 특별행정구로 지정한다. 그러나 그후에도 수십년간 동청철도를 둘러싼 분쟁은 계속된다.)
일제의 지원을 등에 업은 장작림의 만주 장악
1919년 7월 19일경 관성자사건이 발생하였고, 1919년 8월 5일경 장작림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한 길림성 독군 맹은원(孟恩遠, 1856~1933)이 물러난다.
이제 만주의 동북3성은 사실상 일본을 등에 업은 장작림이 완전 장악하게 된다.
1921년 장작림은 곽송령을 제8여 여장으로 임명하고, 장학량이 이끄는 제3여단과 함께 사령부를 조성했다.
러시아 시민권 혹은 중국 국적 획득 시도
일제가 한국을 침략하고 민족말살 정책을 펼치자 더 많은 한국인들이 간도·만주·러시아 지역 등으로 이주하였다.
상당수는 가족과 함께 러시아로 떠났다.
이민자들은 러시아 시민권을 얻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러시아 시민권을 더 쉽게 얻을 수 있도록 상당수 한국계 이민자들은 기꺼이 러시아 정교회(로마 카톨릭교와 유사한 종교)를 신앙으로 채택했다.
러시아 시민권을 얻은 사람들은 자녀 교육, 땅을 얻고, 상업 등 사업을 하는 것이 더 쉬웠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러시아인들의 농토를 임대해 농사를 짓거나 노동자로 일해야 했다.
부유한 한국인들은 러시아어를 배우려고 노력했고 가능하면 아이들을 러시아 학교에 보냈다. 1917년까지 러시아 대학 졸업생들은 이미 한국인 정착민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교육을 받은 한국인들은 한국 사회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으며 대부분의 한국인은 러시아 극동지방에서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며 고립된 방식으로 계속 살았다.
일제의 친일파와 밀정 양성
그리고 일제는 일본영사관 설치지역에 ○○조선인회, ○○조선인 민회 등을 조직하여 수천여명 이상의 친일파를 양성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관계계선 목적은 어디까지나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수도인 모스크바에서도 “빵과 우유를 달라”는 시위가 연이어 일어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곡물, 수산물 등의 수입과 전쟁물자 조달이었지,
일본의 만주지역 이권 보장, 어업권 보장, 사할린섬 남부와 쿠릴열도의 영구적 할양 등은 아니었다.
일본은 이러한 기회를 활용하여 만주와 러시아령에 친일파를 양성하여 독립운동가를 탄압하였고, 일본 상인의 무역활동, 가라유키상 등을 빙자하여 이와 함께 대규모 간첩·밀정 파견 등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 결과 러시아 영토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동휘, 홍범도, 최재형, 안중근 등에 대한 자료가 일본 기록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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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과 적백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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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러시아의 대략적인 한인 정책
제정 러시아는 1917년 2월 혁명으로 붕괴될 때까지 일제 침략자와 같이 한국인들에 대한 말살 정책을 펼친 적이 없었기 때문에,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 이후 벌어진 러시아내전에서 러시아령 거주 한국인의 상당수도 러일전쟁 때부터 같은 편이었던 백파(白軍)와 차르정부를 지지하였다.
1921년 6월 28일 벌어진 자유시 사건(자유시 참변)의 원인 중 하나도 한인들이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이후 볼셰비키(적군 : 赤軍)을 지지하였는지 아니면 백파를 한 때 지지하였는지를 놓고도 심각한 대립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7년 10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이후의 한인 사회
1917년까지 한인 사회는 이미 러시아 연해주 전지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은 러시아와 세계뿐만이 아니라 고려인과 연해주, 만주 거주 고려인들에게 심각한 변화를 가져왔다.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군주제가 폐지되는 혁명이 발생한데 이어.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불려지는 공산혁명이 발생하여 레닌 등 공산주의자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적군과 백군으로 나뉜 러시아는 1917년부터 1923년까지 유럽, 극동, 몽골 등에서 내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과정에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1917년 12월경부터 만주지방의 대도회중 하나인 하르빈에서 중국 정부와 백파 러시아 장군이 볼셰비키 세력을 단속하기 시작하였다.
내전기간 동안 대부분의 한국인은 볼셰비키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물론 러시아 정교회를 믿던 한국계나 제정 러시아의 교육을 받은 한국인들 중에는 러시아 백파(白波)를 지지하는 한국인들도 다수 있었다.
그러나 백파가 러시아에 간섭한 외세중 특히 일제와 함께 한국계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자 대놓고 백파를 지지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새로운 사회주의 사상의 등장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이후 러시아 중부와 극동에서 볼셰비키들(공산주의자들)은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의 평등, 형제애, 자유라는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사상(공산주의)으로 권력을 잡았다.
이러한 공산주의는 즉시 일제와 그들을 피해 만주, 시베리아에 머물던 한국 젊은이들을 사로 잡았고, 이미 1918년경 러시아령 연해주와 아무르주에는 다양한 한국인 무장 조직이 출현하여, 모국 독립, 일제와 친일파 타도를 목적으로 하였다.
당시 일제의 한민족 말살정책을 반대하고 약소 민족과 억압받는 자의 해방을 부르짖는 최초의 공산혁명에 동조하지 않고,
한인 사회가 다른 입장을 취하거나 러시아 내전에서 중립을 유지한다면 매우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레닌과 볼셰비키의 약속
레닌으로 대표되는 볼셰비키는 소수 민족과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차별을 종식하겠다고 입으로는 분명 약속했다.
한국인은 러시아 시베리아 접경지역의 민족으로 항상 본심에서는 연해주와 만주·간도는 아주 먼 옛날 자기 조상들의 고향으로, 심지어 강조차도 러시아나 중국의 명칭이 아닌 “까망강, 까만강(黑水)”이라고 부르며 삼국시대에나 쓰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한민족의 자세를 이해하는 일제, 중국, 만주 친일파, 러시아 당국은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볼셰비키는 무인지경의 광활한 연해주와 시베리아의 땅을 대지주가 아닌 가난한 한국인 소농(小農)에게도 균등하게 나누기를 원했다.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볼셰비키의 연합 이유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토지약탈, 노동력 착취, 강제징용, 정신대, 위안부 강제동원 등을 통한 민족 말살(몰살) 정책의 희생자였다.
러시아 극동(원동) 지역에서 볼셰비키의 적은 백파와 동맹자인 일본 침략군이었으며, 이는 볼셰비키와 한국인들을 공동의 적을 가진 동지로 만들었다.
특히 북경의 친일파외에도 장작림으로 대표되는 친일파가 서서히 득세를 하고 있던 만주와는 달리, 국적을 따지지 않는 볼셰비키 이념을 한국인들을 큰 열의를 가지고 받아 들였다.
나아가 토지의 균등분배와 생존권 보장은 볼셰비키 세력이 미치는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의 열망과 일치하였다.
새로운 이념이 등장한 혁명
이것은 한국 역사상 농업의 시작, 청동기의 전래, 새로운 기술의 전래, 다른 민족의 도래, 철기의 전래, 불교의 전래, 유교의 전래, 산업혁명, 각종 법과 제도의 정비를 가져왔던 역사시대에 기록된 것과 같은 새로운 혁명의 시작이었다.
과거 러시아 영토에서 한국인은 이러한 이상적인 사회정의와 원칙에 따라 토지를 획득하거나 재산를 획득한 적이 없었고,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국가적 이념 아래에서 노동자로 일한 적도 없었다.
연해주에서의 무장 독립운동의 시작
볼셰비키에 한국인들은 당연히 협력하였으나, 러시아에서는 1917년경부터 일본과 미국·영국·유럽 등 연합국의 간섭이 계속되었고, 내전과 대기근은 러시아 혁명기의 사회혼란을 가중시켰고,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혹은 자본주의, 일본 제국제주의, 러시아 제정 왕조 등의 이념에 따라 시베리아에서 싸움을 벌였고,
거의 대부분의 한국계는 일제와 협조한 콜차크 등 백파와 대립하게 된 것이었다.
이것이 연해주에서의 한국 무장 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
1918년 4월~5월경 이동휘, 박진순 등이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볼셰비키 혁명 시기 연해주의 혼란상
청일전쟁(1894~1895), 의화단 사건(1899~1901) 기간 러시아의 만주 침략, 러일전쟁(1904~1905) 등으로 만주에서는 마적떼가 들끓고 폭력과 주먹 센 놈이 법인 시대가 전개되자 한국인의 러시아 이주는 가속되었다.
러시아에서 1917년 2월 혁명과 10월의 레닌 등에 의한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령 시베리아는
[러시아계 친일파, 볼셰비키, 멘셰비키(меньшевики), 사회주의혁명당(Партия социалистов-революционеров. 고려인은 「에세리당」 이라고 부름), 무정부주의자, 입헌민주당(Конституционная 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시베리아 자치파, 볼셰비키군(붉은 군대와 여러 지지자들로 구성된 군대), 백군] 등의 약육강식의 혼란 시대가 도래하였고,
거기에 체코 군단의 반란과 일본의 시베리아·만주 침략, 14개국 연합군의 시베리아 침략 등의 무력 간섭, 러시아 대기근이라는 식량부족 사태가 겹쳐져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실로 과거에 경험하기 힘든 대흉년의 시기였다.
일제의 친일파 양성 목적
1918년 2월경부터 일제는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던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의 일본 거류민들을 중심으로 의용 자경단을 조직하여 백파(반혁명세력)를 지원하기 시작하자, 한국인들이 누구를 지원해야 하는 지는 분명해지기 시작하였다.
백파와 러시아계 친일파를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일제의 본심은
시베리아·만주·사할린·쿠릴열도 등의 영구 점령이었으며, 이르쿠츠크까지 점령하고, 콜차크의 백파가 시베리아 지역을 한 때 장악하자 그들에 협조하는 러시아인과 중국인·조선인 등도 많았다.
러시아령의 한인사회도 백파 지지자들과 볼셰비키 지지자 등으로 분열되었다가, 백파가 일제 침략자와 작당하자, 일제에 대한 적대감이 큰 한인사회는 더 이상 백파를 지원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1918년 볼셰비키의 곤란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 직후에도 식량 문제인 빵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러시아의 1차 세계대전 참전이 계속되었고, 볼셰비키 정부도 자본가·귀족 계급의 대토지와 재산을 무상몰수, 균등분배, 무상분배, 평등한 생존권, 공정한 기회 보장과 같은 공산주의 이념에 부합하는 개혁을 이룩하지 못하자 반볼셰비키 진영은 레닌정부의 약점을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1918년 1월 12일 일본 군함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하였다.
볼셰비키와 독일의 타협, 러시아의 1차 세계대전 철수
1918년 3월 3일 레닌의 볼셰비키 정부는 전쟁중이었던 독일과 휴전 및 영토일부 할양을 포함하는 브레스트 조약을 맺었고 3월 15일 조약이 비준되자, 러시아는 1차 세계대전에서 철수하였다.
1차 세계대전에 연합군의 중요한 일원이었던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 성공 이후 독일과의 사실상 평화조약을 맺고, 독일 등에게 영토할양과 이익을 보장하자,
러시아내에서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은 러시아의 영토상실과 배상금 등으로 러시아의 권리가 침해된 것으로 느끼기 시작하였다.
1918년 반볼셰비키 운동과 러시아 내전 발발
이들은 외국의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캐나다 등의 지원을 받아 반볼셰비키 운동을 강화하기 시작한다.
1차 세계대전 참전 후유증을 전혀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경작지는 급감하였다.
볼셰비키 정부는 1918년 여름부터 당면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일부 토지의 재분배와 식량 조달계획을 시행하자 러시아 전역에서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운동이 격화되었다.
연합군들의 러시아 간섭 전쟁
연합국들은 러시아가 1차 세계대전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사할린주·흑해 등의 유전·광산·산림·공장·농장 등의 국유화, 러시아내 외국인 재산 국유화, 차르 정부의 외국 채무 승계 거부 등으로 경제적 손해까지 발생하자,
볼셰비키의 이러한 행동을 세계 공산화 방지 등을 위해서 러시아 내전에 간섭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연합국들의 러시아 서부 무르만스크 점령
1918년 3월 6일 영국군, 프랑스군이 러시아 서부지역의 중요 항구인 무르만스크에 도착하였고 미국 윌슨 대통령은 러시아의 1차 세계대전 참전을 도울 수 있다고 발표하자 러시아는 식량과 무기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연합국은 곧 무르만스크를 점령하였다.
러시아 내부의 볼셰비키 적대 세력(백파)과 연합군에 의해 러시아 내전 간섭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국, 영국, 프랑스는 당장 프랑스와 독일 국경지역의 서부전선에 배치된 군대를 러시아 백파를 지원하기 위해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니항,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캄챠카, 이만, 하바로프스크, 블라가베셴스크, 치타, 이르쿠츠크, 만주 하르빈, 동청철도 등의 동시베리아 지역에 동원할 수는 없었다.
연합국들이 러시아 내전에 일본이 참전하도록 요청
그들은 1918년 3월 15일경 연합국의 일원이었고 동지였던 일본, 중국 등에 러시아 간섭 전쟁 참전을 요청하였다.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 개시
일제는 청일전쟁 무렵부터 만주와 시베리아, 사할린주 일대에 시마다 모토타로를 비롯한 수천여명 이상의 간첩들을 보내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자 극동을 점령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였고, 1918년 4월 5일 일제(日帝) 시베리아 침략군(일본의 용어로는 ‘시베리아 출정군’)의 시베리아 파견 선발대 1백여명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다.
1918년 5월경 일본 군함들이 아무르강 하구에 정박하여 볼셰비키가 장악하고 있던 니콜라예프스크(尼港, Николаевск, 니항)을 위협하였다.
(※ 니항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르쿠츠크파 김낙현이 쓴 ‘파르티잔의 수기’에 나오는 내용이며 수기는 1967년경 쓰여져 니항 사건의 순서가 틀리는 부분이 있다. 김낙현은 니항사건의 안드레예브를 진실한 공산주의 혁명가로 묘사하고, 이지택, 박병길은 영웅으로 묘사하지만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측 기록과 대조하면 대부분 허위다.)
중화민국과 일본의 연합
1918년 5월 16일경에서 ~ 5월 19일 사이 중화민국 정부와 일본간에 독일·오스트리아 등 공동의 적에 대응하기 위해 공동 군사협정이 체결된다.
체코 군단의 반볼셰비키 반란
1918년 5월 26일경. 볼셰비키가 무장 해제시켜 대륙횡단철도를 통해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프랑스로 귀국시키려 했던 체코군이 반란을 일으켜 첼랴빈스크를 점령하였다.
체코군의 반란은 시베리아 지역과 볼가강 지역에서 반볼셰비키 세력인 백군(백파) 통합에 기여하였다.
1918년 6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의 볼셰비키들이 체코군과 백파의 공격으로 전복되었다.
체코군단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체코로 귀국하면서, 한국 독립군들에게 무기를 팔고 떠나 독립운동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연합군의 러시아 적백내전 간섭과 블라디보스토크 점령
1918년 8월경에는 일본군(시베리아에 많을 때는 약 7만 3천여명)과, 미국군 약 5천명(나중에는 증원되어 약 9천여명), 영국군 8백여명, 이탈리아군 1천4백여명, 1백여명의 프랑스군 등의 연합군이 대륙횡단철도로 귀국하려는 체코군단을 구원하고 러시아내전에 간섭하기 위해 두만강 너머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항(해삼항) 점령하였다.
중화민국 북경정부 소속 군대도 러시아 내전 간섭에 참가하였다.
(※ 러시아내 거주 다수의 중국인들은 볼셰비키 측에도 가담하였다.)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처형
1918년 7월 16일에서 ~ 7월 17일경 볼셰비키 지지자에 의해 예까쩨린부르크에서 러시아 전황제 니콜라이 2세가 가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적군과 백군 모두 피에 대한 보복을 주저하지 않고 있었다.
볼셰비키도 대대적으로 병력을 모집하였다.
일본군의 사할린주 니콜라예프스크(니항) 점령
일본군은 1918년 8월 2일경 연합군의 시베리아 출병 목적과는 별 관련이 없는 교통·어업·광업의 중심지였던 아무르강(흑룡강) 하류의 니항(니콜라예프스크)을 공격하여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1918년 9월 5일경 러시아 동시베리아의 대도회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도 일본군이 점령하였다.
1918년 9월경에는 러시아 백파와 연합한 일본군의 선봉부대가 치타에 도달해 볼셰비키를 제거하기 시작한다.
일본군은 결국 바이칼 호수 좌측의 이르쿠츠크까지 진군한다.
1920년 7월경 자바이칼 지방에 주둔한 일본군만 약 3만여명이었다. 콜차크가 죽은 후 일본군은 1920년 10월경 치타 및 자바이칼 지방에서 철군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료
제1차 세계대전(1914년~1919년)이 일본, 미국, 영국 등 연합군의 승리로 1918년 11월 11일경 종료되었다.
일본군의 연해주·아무르주 침략과 대규모 민간인 학살
시베리아 대륙횡단 철로, 아무르강, 만주와 하르빈을 등을 경유하여 시베리아 침략에 나선 일본군에 의해 아무르주도 공격을 받는다.
1919년 1월 11일경 일본군이 아무르주 마자나바(※ 독립운동관련 자료에는 마자노프, 마자노보, 마사노프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러시아어의 발음법칙 때문이다.) 일대에서 어린이, 여자, 농민 등 포함한 대피하지 못한 사람 300여명 이상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당시 마자나바 마을은 중심지가 불타 주민들은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으로 대피해야 했으며,
일본군 철수후에도 파괴된 마을이 복구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도 마자나바 학살 현장은 위령비를 중심으로 한적한 농촌이다.
러시아 간섭전쟁과 내전으로 인한 대기근 발생
1919년 1월경 볼셰비키에 의해 러시아 전역에서 농민들의 남은 식량을 고정가격으로 압수하는 제도가 시행되었으나, 하이퍼 인플레이션 시대에 이것은 몰수를 의미하였다.
볼셰비키에 의한 강제적인 식량 분배 정책에도 불구하고 일부지역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아사자까지 발생하였고, 내전으로 인한 경작지 감소로 농민들도 식량이 몰수되면 굶주리고 파멸되는 경우가 있었다.
일본군의 하바로프스크, 우수리스크, 블라가베셴스크, 자유시, 이바나프카 일대 민간인 학살
일본군은 동시베리아 지역 대륙횡단 철도, 만주 동청철도, 아무르강 등을 따라 교통 요충지들과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간도 토벌 때부터 이어지는 일본군의 주요 목표는 시베리아의 영구 점령과 특히 한국계 항일 세력의 몰살이었다.
1919년 3월까지 일본군은 아무르주 이바나프카(Ивановка, 이바나프카에서는 수차례 학살을 감행), 마자나바 일대에서만 공산주의 동조하는 마을을 파괴하라는 지시에 따라 900명 이상을 학살하고, 30여명을 산채로 불태웠다.
그러나 아무르강 하류의 니항의 일본군은 1920년 3월 12일 트리피츤의 파르티잔 부대를 공격했다가 반격을 받고 전멸하였다. (니항사건)
일본은 니항의 일본 수비대가 전멸한 후 1920년 4월경부터 연해주 일대에서 대규모 민간인 학살극을 자행하고 1920년 4월 22일경 사할린섬 북부와 유전 등을 추가 점령을 하였다.
(※ 1922년 10월 25일경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1924년부터 사할린섬 북부에 대한 협상이 시작되어 1925년 소련·일본간 국교 수립시 사할린섬 북부를 반환하였고.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후 사할린 섬 남부와 주변 섬들도 소련에 양도하였다.)
동시베리아 아무르주 자유시와 블라가베셴스크 일대의 내전
러시아령에서 1921. 6. 28. 자유시 사건 직전 독립 운동가들의 분열 원인중 하나는
내전·대기근·외세침략이 겹쳐진 볼셰비키의 한국계에 대한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었던 정책 때문이다.
아무르주 일대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 1918년 1월부터 볼셰비키가 득세하였으나. 1918년 9월경 일제와 백파의 공격으로 붕괴되었다.
극동의 대도회 하바로프스크도 1918년 8월~9월경에 백파가 점령하였다.
1920년 초반까지 블라가베셴스크와 자유시 일대는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과 친일 백파 괴뢰정부의 손바닥에 있었다.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이 무렵 차르 러시아 장교였던 오하묵이 볼셰비키에 가담하여 전설적인 활약을 하였다고 하는데 오하묵이 어디에서 어느 정도의 활약을 했는지 확인하기 힘들며, 일본군 측 기록과 한국·중국·미국 등의 신문 보도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 이 무렵의 주요 반일 사건 등은 미국 뉴욕시에서 발행되었던 뉴욕타임스 라는 신문에도 자주 보도되었다.)
파르티잔 부대들은 교섭과 전투를 통해 1920년초 자유시와 블라가베셴스크 일대를 탈환한다.
이후 극동공화국이 수립되자 극동공화국의 영역이 되었다.
한국계 독립운동 부대들과 피난민들이 아무르주의 주도(州都)인 블라가베셴스크 보다 더 안전한 자유시 일대로 피난하기도 하였는데, 아무르 강변에 위치한 블라가베셴스크는 중국령 흑하시와 마주보고 있고,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과 백파군은 친일파가 장악한 만주 혹은 아무르강을 따라 쉽게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동휘 선생의 연해주·만주·간도에서의 독립운동
독립운동가 이동휘는 볼셰비키와 손을 잡고 1918년 초 노령에서 한인사회당을 창설하였으며, 그 때부터 레닌과 관계가 있었다.
이동휘는 1995년 한국에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을 때에도 논란이 많았으나, 독립운동사에서는 상해임시정부, 연해주, 만주, 간도, 러시아 본토, 국내 등지에서 이동휘의 독립투쟁만큼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동휘는 구한국의 무관 출신으로 일찍이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걱정하다가. 1906년 군대를 사직하고 교육과 대한자강회 등의 활동에 힘썼다.
일제가 침략하자,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되었다가 1912년경 북간도로 탈출하였다.
1913년경에는 로령 연해주로 이주하여 군사학교를 설립을 추진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간도 왕청현 나자구 일대로 이동하여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이 때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구춘선, 김규면, 이용, 계봉우, 임병극, 홍범도, 이범윤, 장재관, 신채호, 한형권 등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1916년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이리저리 피난하였다.
1917년 10월초 러시아 무산혁명 발생으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였다.
1918년 4월경 하바로프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 김규면, 김립, 류동열, 리인섭 등과 한인사회당이란 정당을 만들어 볼셰비키를 지지하고 독립전쟁에 나섰다.
같은 해 크라스나쇼코프 등과 한국인 독립군 부대를 조직하여 일제·백파와의 전쟁에 가담하였다.
1918. 9월경 일본군이 시베리아 하바로프스크를 점령하자, 다수의 독립운동가들과 피난을 떠나거나 숨어서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이동휘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 3·1운동이 발생하자, 연해주·만주·간도 일대에도 독립 운동이 활발해졌다.
1919년 8월 이동휘는 김립과 같이 상해에 도착하여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가 되었다.
1920년 모스크바에 열렸던 제2차 제3국제 공산당 회의에 한인사회당이 참석하여 승인되었다.
이 무렵 이동휘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좌익·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의 거목으로 평가되기 시작한다.
이르쿠츠크파, 일부 민족주의자 등과 대립하여 다툼이 있었고. 1921년 6월 독립운동사의 비극이었던 자유시 참변으로 지원하던 사할린부대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기도 하였으나, 이후에도 연해주·만주 일대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 출처 : 이영일저, 「이동휘 선생」, 1981. 8. 1.)
1936년경 조국독립인지, 무산혁명인지를 부탁하고 연해주에서 작고하였다고 한다.
1995년 한국에서 논란 끝에 해외에서 작고한 사회주의자 계열로는 거의 처음으로 독립유공자 훈장이 수여되었다.
상해파 고려공산당 약사 |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약사 |
·1917년~1918년 초경 전로한족회 중앙총회 조직 (연해주) ·1918. 4월경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 선발대 블라디보스토크 도착 | |
·1918. 4월~5월경 하바로프스크 일대에서 한인사회당 창당 ·1919. 4월경 한인사회당 대표자 대회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1919. 4월경 상해임시정부 조직 1920. 8월경 제3국제공산당 2차대회 참가하며 고려공산당이라는 명칭 사용 ·1920년 12월 21일경 치타의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달뷰라) 소속 한인부(상해파)는 통합 독립군 단체 조직을 결정 | ·1918. 1월경 김철훈, 오하묵 등 몇 명이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이르쿠츠크 볼셰비키내 한인지부 조직 ·1919년 초 일부 인사들이 대한국민의회 조직 ·1919. 9월경 김철훈, 오하묵 등이 전로한인공산당 조직 ·1920. 1월경 이르쿠츠크 공산당내 고려부 조직 |
·1919. 8월경 ~ 9월경 한인사회당 박진순 등이 모스크바에서 금전지원을 약속 받고 전로한인공산당(나중의 이르쿠츠크파)과 금전관련 분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음 (오늘날까지도 확인하기 힘든 소액으로 추정됨) | |
1920. 3월경 이르쿠츠크에서도 합동민족군대 조직 (고려인 포함 11개 민족) | |
·1920. 3. 1. 일경 일본군이 물러난 아무르주 자유시 일대에서 최고려 등이 피난온 고려인들과 자유시 고려인들을 모아 흑룡주 고려주민대회 소집 제의했다고 주장은 하지만 러시아측 기록에는 최고려가 주도했다는 내용은 전혀 없고, 자유시 일대로 피난 온 한인들로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된 것은 사실임 | |
·1921. 3월경 마자나바 일대에서 상해임시정부와 극동공화국 등의 지원을 받아 사할린특립의용대 조직 ·1921. 5월경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개편 | ·1921. 5월경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지원으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개칭. 정부성격의 고려혁명군정의회 조직 |
1921. 6. 28. 자유시 참변 발생. 상해파 등이 자유시에서 연해주 등지로 탈출 | |
·1922년 말경 코민테른이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해체 ·1922. 12. 30일 한국에서 소련이라고 불렀던 국가 수립 ·1922년 말경 볼셰비키에 의해 연해주의 독립군 부대 해산됨 ·1923. 2월경 블라디보스토크에 고려국(꼬르뷰로) 활동 개시 |
자유시 참변과 관련되었던 1919년에서 ~ 1921년경 만주·간도 일대 독립운동 단체
※ 출처 : 1920. 6. 16. 일자 고경(高警) 제16,900호. 「최근 간도지방 불령선인단체 무력준비상황(國外情報(間島地方 不逞鮮人團體의 武力 준비상황과 首腦部의 所在地)」 등
부대명 | 주요 인물 | 활동지역 | 기타 |
(1) 대한군정서 | 서일, 현천묵, 김성, 김좌진, 나중소 (서로군정서 일부 포함) | 주로 왕청현 등 간도 | 소총 1,200자루 |
(2) 대한독립군 | 홍범도, 박경철 | 연길현 명월구 등 | 소총 200자루 |
(3) 대한군무독군부 | 최진동, 박영 | 왕청현 등 | 소총 200자루 |
(4) 대한의군단 | 방위룡(방우룡), 허근, 김종헌, 김연원 | 왕청현 등 | 소총 400자루 |
(5) 광복단 | 이범윤, 김성윤, 홍두극, 김백우, 김성극, 김성원, 황만실 | 왕청현 등 | 소총 150자루 |
(6) 신민단 | 김성배, 유봉득, 김준근, 이흥수 | 왕청현 등 | 소총 150자루 |
(7) 대한 국민회 | 구춘선, 안무, 강구우, 김규찬, 김동합, 한중진, 양도헌, 마룡하, 박혁춘 | 간도, 연길현 등 | 소총 400자루 |
(8) 대한의사부 | 김리근, 최정국, 박창준 | 왕청현 등 | 소총 160자루 |
(9) 대한노인단 | 이승교, 정치윤, 김치보 | 연길현, 노령 | 소총 60자루 |
(10) 공의단 | 엄준, 심룡운 | 만주 | 소총 40자루 |
(11) 흥업단 | 김창일, 서관일 | 장백현 등 | 소총 50자루 |
(12) 군비단 | 이희삼, 박동규, 윤덕보 | 장백현 | 수십자루 |
(13) 태극단 | 임석우, 박대성 | 임강현 등 | 수십자루 |
(14) 야단 | 오석영, 윤좌형 | 간도 | |
(15) 노농회 | 조응순, 권중선 | 간도,연해주 | |
(16) 농무회 | 김기형, 김직묵 | 간도 | |
대원 최소 3,000여명 이상 | 소총 3,000자루 이상, 기관총 9정 이상 등 |
위의 표 외에도 만주·간도·연해주 일대에서 독립투쟁에 나선 사람들은 많았다. 1919년 3·1운동 이후 조직된 독립군 부대들은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명칭과 주둔지를 자주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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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의 독립운동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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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경 러시아의 레닌은 30여 국가의 대표가 모스크바에 모인 자리에서 코민테른(다른 이름 :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제3인터내셔날, 제3국제공산당)을 결성하였다.
코민테른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지원을 위해 결성되어 코민테른을 통해 당시 약소국, 식민지 국가들의 무장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편의를 제공하기도 했다.
제1회 코민테른 대회는 대체로 창립 선언만 하였다.
하지만 1년 후의 제2회 코민테른 대회(1920년 7월)에서는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 독재를 선언하고, 비합법 조직의 병행, 군대·농촌·노동자 조직, 의회에서의 활동, 식민지 독립, 민주적 집권주의, 각 당의 중앙위원회는 코민테른 대회와 집행 위원회의 결정에 복종할 것 등의 구체적 가입 조건을 규정하고, 세계 혁명을 목표로 운동을 전개했다.
(코민테른은 1943년 스탈린에 의해 다른 조직으로 대체되며 해산된다.)
러시아 적백내전과 한국인들의 활약
1917년 10월 혁명이후 시베리아 지역의 러시아인들 중에는 정치적 이념에 따르거나 기아를 피해 몽고, 중국, 중국, 터키 등 국외로 탈출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도시지역에서 식량과 연료를 구하지 못하여 농촌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수두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 한국인들 중에서도 볼셰비키 지지자들이 출현하였다.
1918년 1월경 동시베리아 하바로프스크에서 극동인민위원회 외교인민위원이 된 김알렉산드라(Ким 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1885~1918)도 있었다.
김알렉산드라는 1918년 9월 16일경 하바로프스크가 점령되었을 때 일제와 백파들에게 죽음을 당했지만 러시아 내전 무렵에는 최소 수백 명의 한국인이 볼셰비키당(공산당)에 참여했다.
1920년 초까지 대략 3,700여명에 이르는 한국계 볼셰비키가 있었다. 또한 수천 명의 한국인이 적군(赤軍)에 입대하거나 볼셰비키를 위해 싸웠다.
일제가 시베리아, 만주, 간도를 침략하자 한국인 중 많은 젊은이들이 일제를 맞아 자발적으로 싸웠다.
대표적인 인물은 박일리야, 홍범도, 한운용, 이용, 한창걸 등이 있다.
1919년 11월 14일경 볼셰비키(공산주의, 파르티잔)가 콜차크 백군의 수도 옴스크를 해방시켰다.
1920년 2월 콜차크는 한 때 동지였던 체코군에게 체포되어 볼셰비키에게 넘겨져 처형되었다. 러시아 내전에 관계된 체코군단은 1918년 2월부터 우크라이나 부근에서 출발하여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약 9,700킬로미터에 이르는 대륙횡단 기차여행을 통해 온갖 사건에 휘말린 후 1920년경까지 대략 6만여명이 체코로 귀환할 수 있었다.
1920년 가을부터는 러시아 내전에서 볼셰비키의 승리가 확실해지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부터 식량 부족에 허덕이던 러시아에 1920년경 대기근이 발생하였으며 1921년 봄까지는 극심한 화폐가치 하락과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러시아 내전기 기아로 죽어간 사람이 대략 수백만여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는 러시아의 1차 대전 사망자와 러시아 내전 사망자보다 많은 것으로, 외국 구호기관에서도 러시아에 식량을 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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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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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 : 독립을 위한 비폭력 평화 시위의 시작
(※ 출처 : 주로 강만길 저, 「고쳐 쓴 한국 현대사」, 창작과비평사, 2006, 54쪽 ~ 72쪽에서 참고)
일제 식민지시대의 본격적 민족해방운동은 3·1운동을 기점으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3·1운동은 러시아 혁명, 제1차 세계대전 종결과 함께 미국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되어 일본 동경의 유학생들의 2·8선언이 먼저 나오고 뒤이어 서울에서 종교계를 중심 한 민족대표들이 독립을 선언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민족자결주의는 주로 유럽 패전국의 식민지 문제에 적용하기 위한 원칙이었을 뿐, 뒤늦게 참전하여 전승국의 대열에 끼인 일본의 식민지 조선의 독립문제에 도움을 줄 만한 것은 아니었다. ‘민족대표’의 일부도 이 점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있었던 것 같으며,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그들에 의해 하나의 기회로 활용되었다.
‘합방’ 후 의병전쟁의 남은 병력과 애국계몽운동계의 독립전쟁론자들이 만주지방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준비하는 동안 애국계몽운동계의 국내 잔여세력은 대규모 독립운동을 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조선총독부는 이들을 탄압하기 위해 소위 안악사건, 105인 사건을 만들었다. 그 때문에 민족해방운동 대열이 상당한 타격을 받았으나 이후에도 비밀결사 등을 통해 기회를 기다리다가 1차대전 종결 후의 민족자결주의 선포를 하나의 기회로 이용했다.
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애국계몽 운동계 국내세력의 독립선언이 일시에 전민족적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식민통치 10년이 전체 조선민족의 생존을 그만큼 위협했기 때문이다.
우선 자산가 계급에게도 일본의 식민통치가 준 타격은 컸다. 문호개방 이후 일부 선진적 민족 자본가층이 형성되어갔으나 화폐정리사업과 ‘합방’ 후의 회사령 등에 의해 다시 큰 타격을 입었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특히 중소지주층과 자작농층이 입은 타격은 컸다.
이 때문에 아직 예속되지 않은 민족 자본가층과 지주증이 식민지 경제구조의 정착과정에서 그 진로를 봉쇄당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농민들의 경우 사정은 더욱 절박했다. 조선왕조 후기 이래 점진적으로 발달해오던 농민적 토지소유가, 많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행되어 1918년에 끝난 토지조사사업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극히 일부의 지주층을 제외한 조선 농민 전체가 식민통치 10년의 피해를 깊이 입고 있었던 것이다.
평화시위의 확산과 의의
약 2백만명으로 추산되는 시위 참가자 중 공식 집계만으로도 7,500여명이 피살되었고, 4만 6천여명이 검거되었으며 약 1만 6천명이 부상했다. 또한 49개처의 교회와 학교, 715호의 민가가 불탔다.
3·1운동은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운동이 되지 못하고 비무장 독립운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첫째, 이 운동은 대외적으로는 항일운동이요 대내적으로는 공화주의 운동이었다.
둘째, 3·1운동은 무장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은 만주지방에서 준비되고 있던 무장항쟁의 불심지를 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만주·연해주에서의 독립투쟁
‘합방’을 전후한 시기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불가능하게 된 의병부대들이 간도와 연해주 지방으로 옮겨갔고, 애국계몽운동 계열의 인사들도 대거 이 지역으로 옮겨가서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그 결과 3·1운동을 계기로 서간도지방에 30여개, 북간도지방에 40여개의 민족해방운동 단체들이 성립되었다. 이들 중에는 서간도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과 같이 복벽주의 노선의 단체도 일부 있었으나 같은 지방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暑)와 같이 그 중요 단체의 대부분은 상해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공화주의 노선의 단체였다.
국토가 완전 식민지로 되어 국내에 해방구를 갖지 못한 조건 아래서, 1860년대부터 교포사회가 형성되었고 특히 ‘합방’을 계기로 이 주민이 급격히 증가했던 간도 및 연해주 지방이 독립전쟁 기지의 적지로 인식되었다.
간도지방에 설치된 독립전쟁 기지 중 대표적인 것의 하나는 신민회 중심의 애국계몽운동 계열 인사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해 건설한 서간도의 삼원보(三源堡)기지였다. ‘합방’ 직후 이곳으로 이주한 이동녕(李東寧 : 1869~1940) · 이상룡(李相龍 : 1858~1932)과 이회영(李會榮 : 1867~1932) · 이시영(李始榮 : 1869〜1953) 등은 경학사(耕學社)란 항일단체를 조직하고(1911) 군사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1913년에 신흥학교)를 설치했다.
경학사는 부민단(扶民團) · 한족회(韓族會)로 발전했다. 한편으로 군정부(軍政府, 뒷날의 서로군정서)를 두어 운영한 신흥학교는 3·1운동 때까지 1천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3·1운동 후에는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되어 1920년 8월에 폐교될 때까지 약 3천명의 독립군을 양성했다.
이밖에 신민회계의 이동휘가 중심이 되어 훈춘현(琿春縣)의 사도자(四道子) 부근에서 3천여명 이상의 독립군을 러시아제 무기로 무장시켜 양성했고 밀산(密山)의 산속에 무관학교를 세웠다. 주변의 6,500호 교포사회로부터 의연금을 거두고 구한국군 장교들을 교관으로 하여 교포청년 1,500여명을 훈련시키며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서일(徐一 : 1881〜1921) 등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김좌진(金佐鎭 : 1889~1930)을 교장으로 한 사관연성소를 두고 4백여명의 독립군을 양성했다. 의병장 출신 홍범도(洪範圖 : 1868〜1943)의 대한독립군도 연길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양성했다.
이 시기 간도·연해주 지방에 있는 이들 독립전쟁 기지는 민정(民政)조직과 군정(軍政)조직을 함께 갖추고 있어서 실질적으로 하나의 독립된 자치적 정부조직을 방불케 했다.
한족회의 민정조직을 예로 들면 중앙의 행정조직은 총장(總長) 밑에 서무사장(庶務司長)과 학무(學務)·재무(財務)·상무(商務)·군무(軍務)·외무(外務)·내무(內務) 사장 등을 두어 중앙정부적 조직을 갖추었다.
또한 교포사회를 근거로 지방조직도 갖추었다.
...... 이상은 강만길 저, 「고쳐 쓴 한국 현대사」, 창작과비평사, 2006, 54쪽 ~ 72쪽에서 주로 인용함 ......
만주·시베리아에 한국 독립운동에 호의적인 인물들의 등장
이 무렵 러시아령 연해주, 만주의 조선인 수는 모두 합해도 50만여명 미만으로, 중국계·러시아계·일본계 등이 본격적으로 만주와 시베리아에 진출하자 만주·시베리아에서의 무장 독립운동 한계가 분명해졌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과 시베리아에서의 러시아 적백내전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일제의 중국영토 및 러시아령 시베리아 침략과 잦은 민간인 학살과 겹쳐 곽송령, 소병문, 장전구, 마점산, 장옥정, 주복성, 공헌영, 리두, 주경란, 왕덕림, 이작형, 진세영(진계량), 풍점해, 정초(친일변절), 주제청, 야코프 트리피츤, 세르게이 라조 등과 같이 한국 독립운동에 우호적인 인물들을 만들었다.
흑하사변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대체로 이르쿠츠크파의 주장을 맹신하거나, 자유시 참변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흑하사변'이라는 용어는 자유시에서 일어난 사건을 고의적으로 축소해 내기 위해 이르쿠츠크파가 창조해 낸 용어이다.
쉽게 말하면 서울에서 일어난 사건을 100km 이상 떨어진 '대전 참사', '강릉 사변' 이라고 쓰는 것이며, 직선거리로만 132km 이상 도로상 거리로는 150km 이상 떨어진 세 개의 도시를 헷갈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하루 동안의 참변이었지만, 장갑함 장갑열차 장갑차 대포 포병까지 동원된 대규모 군사작전이며, 러시아 적백내전 당시 시베리아에서 이 정도 군대가 한꺼번에 동원된 군사 작전이 몇건 되지 않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