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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20,28-38
그 무렵 바오로가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에게 말하였다.
28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양 떼의 감독으로 세우시어, 하느님의 교회 곧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피로 얻으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29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 양 떼를 해칠 것임을 나는 압니다.
30 바로 여러분 가운데에서도 진리를 왜곡하는 말을 하며 자기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꾀어내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31 그러니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
32 이제 나는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굳건히 세울 수 있고, 또 거룩하게 된 모든 이와 함께 상속 재산을 차지하도록 여러분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33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34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35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36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37 그들은 모두 흐느껴 울면서 바오로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38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오로의 말에 마음이 매우 아팠던 것이다.
그들은 바오로를 배 안까지 배웅하였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7,11ㄷ-19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
11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12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13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5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16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17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18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19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아버지의 영광의 현현을 위한 기도에 이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이 아버지께 속한 이들임을 재확인하면서, 제자들을 세상의 악에서 지켜주시고, 그들이 하나 되고 거룩해지기를 간청합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6절)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었고, 앞으로도 알려주겠습니다.”(26절)
“아버지”라는 이름은 하느님보다 그분의 속성을 더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낸다는 것은 아버지의 실체에 관한 모든 것, 곧 그분의 존재와 본성, 그분의 거룩함과 정의와 사랑, 그분의 능력과 보호와 신실하심을 드러냅니다.
사실 성경에서 기도에 대한 가장 처음 언급된 곳이라 할 수 있는 창세기에서도 그 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곧 아담의 셋째 아들인 셋에게서 에노스가 태어나자, “그때부터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창세 4,26)
또한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바칠 때도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1열왕 8,29) 하신 분께 기도를 바쳤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루카 11,2)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이름”(요한 17,11.12), 곧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공적 소명을 끝내시면서, 그 소명을 이어가게 될 제자들이 “하나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1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신적일치에 ‘하나’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곧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보호받고, 아버지와 당신의 하나 됨을 체험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하나 됨’은 그리스도란 이름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룬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실재로 초대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었습니다.”(사도 4,32).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유대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1코린 12,13)
그러나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말씀’, 곧 ‘진리’를 주셨고, 성령으로 제자들이 아버지께 속하게 되었지만(아우구스티누스), 세상은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미워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그들을 지켜주시기를 청하면서 기도하십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요한 17,17)
그렇습니다.
‘진리이신 말씀’을 행함으로서 우리 안에 ‘거룩함’이 더욱 자라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17)
주님!
깨끗하기보다 진실되게 하시고,
흔들리지 않기보다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
단지 함께 있기보다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사랑하되 행동하게 하소서.
또한 진리 안에서 거룩해지게 하시고,
제 안에서 거룩함을 드러내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한 이치>
오늘 복음은 제자들을 세상에 두고 떠나며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이 기도에서 주님은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에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한다고 하시면서도 제자들을 그 미워하는 세상에 보내시며 세상에서 빼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악에서 지켜달라는 기도를 하십니다.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 제자들을 왜 세상에 보내실까요?
더욱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세상에 왜 보내실까요?
그것은 미움받으라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면 속하지도 않고 미워하는 세상에 왜 보내십니까?
그러니 제자들은 미움받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해선 안 되고, 미움받을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들이어야겠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설마 미움받이가 되라고만 보내시겠습니까?
미움을 받더라도 뭘 하라고 보내시고, 미움을 받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뭘 하라고 보내시겠지요.
그렇다면 그것이 뭐겠습니까?
우리는 즉시 압니다.
우선 세상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역설입니다.
세상은 당신을 미워하고 제자들도 미워해도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고 그래서 더더욱 제자들을 그 가운데로 파견하시는 겁니다.
아무리 당신을 미워하고 제자들을 미워해도 세상은 포기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라는 말씀이고, 미워해도 사랑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러니 믿음 받아도 사랑을 주라는 것이고, 사랑 중에서도 최고의 사랑인 복음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이것이 세상과 주님 제자의 차이입니다.
세상은 미워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니, 사랑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사랑하지 않고 사랑치 못해도 제자들은 사랑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말씀이라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주님의 제자들은 세상과 달리 주님의 이 가르침을 깨닫고 받아들인 사람들이며, 그래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을 주는 것이 더 행복한 사람들이고, 미움받아도 사랑하는 것이 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고, 미움을 받아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받아야 하는 사람은 없는 사람이고, 줄 수 없는 사람도 없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줄 수 있는 사람은 가진 사람이고, 안 받아도 되는 사람은 이미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합니까?
주님의 제자입니까?
받아야만 되는 사람입니까?
줄 수 있는 사람입니까?
받아도 헉헉대는 사람입니까?
줄 수 있어 행복한 사람입니까?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늘은 양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논리를 따르지 말고 하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세상에 발을 붙이고 있는데 천국을 살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게 말하는 것같이 쉬운지 아십니까? 정말 어렵습니다. 신부님은 자꾸 하늘을 보라고 하시는데 하늘을 보니 제가 땅에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땅에 있으니 땅의 처지대로 살아야겠습니다. 저도 먹고 살아야지 어찌합니까! 그래도 하느님은 이해하실 것입니다. 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실 테니까요!” 하셨습니다.
그 마음에 공감은 하지만 세상의 가치에 순응하거나 동화될 수는 없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하늘은 양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주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진리 안에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곧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면 세상이 그를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빛으로 나아가는 길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요한 1,5).
그러므로 두려워 마십시오.
지금 당장 힘에 겹더라도 반드시 빛의 진가는 드러나게 됩니다.
마치 연꽃이 흙탕물에서 피어나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것처럼, 우리 신앙인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요한 3,21)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1티모 2,4)
그리고 육화를 통하여 인간이 되신 진리인(요한 14,6)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이들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티모 2,15)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1요한 2,3-4)
우리가 비록 땅에 발을 붙이고 있지만 진리를 거슬러 살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험해지면 험해질수록, 어두워지면 어두워질수록, 믿는 이들이 진리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은 내가 빛나는 삶을 살지 못한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주님의 뒤를 이어 세상에 있으면서도 이미 천상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어둠을 탓합니다.
믿는 이들이 제대로 살지 못한다고 불평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모순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나만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못마땅한 것이 보이면 보일수록 더 많이 사랑하고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마음을 살지 못했음을 성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와 깊은 일치를 이루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거룩함으로 인해 제자들이 거룩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 거룩함을 잃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뽑아주시어 거룩하게 해 주셨으니 그에 걸맞은 거룩함을 살아야 합니다.
혹 죄에 떨어졌다면 주님의 자비에 온전히 맡겨드려 다시 거룩함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오늘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봅니다.
꿀단지 뚜껑을 열어두면 자연스럽게 벌들이 모여들듯이 나의 모습에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충만하여 빛을 드러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의 기도는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악에서 지켜 주소서.’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로 요약됩니다.
그 기도가 내 안에서 풍성하게 열매 맺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세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하면서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구원 사업의 대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박해자들’도 ‘모든 사람들’ 속에 포함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잃은 양’인 줄 모르는 ‘잃은 양들’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기도에는 끝까지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 의지는 ‘하느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마태 18,14)
모든 사람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에, 구원받기를 스스로 거부하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동안 하느님과 예수님을 안 믿고 죄 속에서 살았더라도, 너무 늦기 전에 믿고 회개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안 믿는 사람들과 박해자들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이들’은 ‘신앙인들’입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아버지의 말씀을(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그대로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믿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믿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박해했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요한 15,19)
안 믿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은 신앙인들의 삶이 그들의 삶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신앙인들의 삶이 안 믿는 사람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면 미움과 박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에 미움과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라는 말씀에서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제자들이(신앙인들이)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것은 양들이 이리 떼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과 같고, 미워하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더 큰 미움을 받을 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그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은 이리 떼 같은 그들이 양들로 변화되기를 주님께서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께서 그들의 회개와 구원을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이리 떼 가운데에서 양으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스스로 이리로 변해버리면, 또는 이리 떼 편으로 넘어가버리면, 육신의 목숨은 구하겠지만 영혼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이 신앙인으로 살기를 포기하는 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고, 그 결과는 멸망입니다.
이리 떼 가운데에 있는 양이 살아남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이리를 양으로 변화시키는 것인데, 그 변화는 양이 더욱더 양답게 살려고 노력해야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즉 신앙인이 더욱더 신앙인답게 살려고 노력해야만 안 믿는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들어 있는 “진리로 거룩해지는 것”이라는 말은 양이 양으로서 살아남는 방법이기도 하고, 이리 떼를 양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거룩하다.’ 라는 말은 ‘봉헌하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리로 거룩해지다.” 라는 말은 “진리를(복음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봉헌하다.”, 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헌신적으로 복음 선포 활동을 하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목숨을 바치신 일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면서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구원과 생명을 얻는 일이고, 악에서 보호를 받는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이고(요한 17,6), 그 이름은 ‘사랑’입니다(1요한 4,8).
‘우리처럼’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일치처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는 신앙인들이 모두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입니다.
만일에 하느님 밖에서, 또는 하느님 없이 인간들끼리만 하나가 된다면, 그것은 바벨탑을 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여기서 ‘기쁨’은 구원받은 상태를 뜻하는 말이고,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라는 말씀은 “이들이 구원을 받아서 하느님 나라에서 저와 함께 영원한 생명과 행복과 평화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라는 뜻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성화(聖化)의 여정 - “주님,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얼마전 구입한 세 권의 한국위인평전을 틈틈이 소중히 읽고 있습니다.
시기별로 평전 이름에 붙은 명칭이 마음에 듭니다.
이황 “퇴계평전-인간의 길을 밝혀준 스승”, 이이 “율곡평전-나라를 걱정한 철인-”, 정약용 “다산평전-백성을 사랑한 지성-”, 이중 한국 5천년사 최고의 학자를 꼽기로 하면 당연히 다산 정약용일 것입니다.
세 분들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로 해도 손색이 없는 참으로 진리를 사랑했고 백성을 사랑했던 분들입니다.
후손인 저희에게 안타까운 점은 한자로 된 이분들의 깊고 아름다운 글들을 직접 읽으며 배울 수 없다는 점이겠습니다.
어제 가톨릭 다이제스트 6월호 안표지의 잠언성 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유명한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입니다.
“질문을 잊지 않으면, 언젠가 그 답안에 살고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대로 사랑이신 하느님만을 찾는 우리 수도자들에게 딱 들어맞는 진리입니다.
참으로 늘 하느님을 끊임없이 물으며 살 때 언젠가 하느님 사랑 안에 살고 있는 자신을 만난다는 것이며 사실 우리 삶이 이미 그러할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 사랑 안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만나고 있으며, 이런 ‘만남의 기쁨’이 살게 하는 힘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도 어제에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계속되는 고별기도로 당대의 당신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를 향한 ‘제자들을 위한 기도’로 심금을 울리는 아름답고 진정성 가득한 기도입니다.
얼마나 하느님 아버지를 신뢰하고 사랑했으며 동시에 제자들을 끔찍이 사랑했는지 구구절절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대로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모범이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어제처럼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고별기도 중 감동적인 일부 대목을 나눕니다.
흡사 주님의 기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향한 기도입니다.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세상에 속화(俗化)되지 말고 세상을 성화(聖化)해야 할 세상의 소금, 세상의 누룩, 세상의 빛같은 수도원이자 우리 존재들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모두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사 비는 주님이십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뿐 아니라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러니 진리이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들을 사랑하고 공부하고 실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리이신 말씀과 하나됨으로 날로 성화되어 거룩해질 때 악에 대한 최고의 처방일 것입니다.
악(惡) 대한 최적의 처방은 착할 선(善)이 아니라 거룩할 성(聖)이라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거룩함의 불길속에서 불태워지는 악이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성화의 여정에 필수적 수행이 사랑, 기도, 말씀 공부와 실천임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웁니다.
새삼 사랑과 기도를 곁들인 렉시오 디비나 성독의 수행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말 그대로 성독의 선택, 성독의 훈련, 성독의 습관화입니다.
비단 신구약 성서뿐 아니라 성서의 성독의 수행은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 등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면서 관상의 삶도 실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오로는 둘이자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바오로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어제에 계속이어지는 바오로의 에페소 교회 원로들에 대한 작별인사는 구구절절 감동이요 살아 있는 교훈들로 가득합니다.
흡사 주님의 기도 분위기도 감지됩니다.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신자들을 사랑했는지 역시 경천애인의 모범인 바오로입니다.
바오로의 감동적인 고별인사 일부를 인용합니다.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내가 삼년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
이제 나는 하느님과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굳건히 세울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처럼, 완전히 진리의 말씀과 하나된, 즉 예수님과 하나된 바오로 사도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자신을 완전히 비워 주님으로 가득 채운 무욕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바오로입니다.
복음 말씀대로 진리로 거룩해진 바오로요 ‘성화의 여정’의 모범적인 분입니다.
마지막 대목이 감동적입니다.
기도와 사랑으로 이들 원로들과 혼연일체(渾然一體)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그들은 모두 흐느껴 울면서 바오로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말 그대로 사랑의 눈물, 기도의 눈물, 감사의 눈물, 남자의 눈물입니다.
저도 며칠전 울컥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 행사 때마다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그 전문을 나눕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광주의 비극을 주님 안에 어떻게 승화(昇華)하여 체화(體化)할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과제이겠습니다.
오늘 주님의 고별기도와 바오로의 고별인사가 참 감동적이요 깊은 깨우침을 줍니다.
바로 진리로 거룩해진 삶, 성화의 여정에 충실하고 항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주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나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레위 19,2)
날로 주님을 닮아 거룩해지는 성화의 여정, 그대로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과 통합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거룩해지는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도 어제에 이어 예수님의 대사제의 기도(복음)와 사도 바오로의 고별사(제1독서)가 계속 이어집니다.
기도를 드리려고 말문을 열 때,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에 그분의 속성을 덧붙여 부르곤 합니다.
그분의 무한한 속성 중 어떤 이름을 붙일지는 기도하는 이가 닥친 현실이나 지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용서를 비는 기도 첫 머리에는 "자비하신 하느님"을, 전쟁을 앞두고 "만군의 주님"을, 아플 때 "치유하시는 주님"을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요.
"거룩하신 아버지"
(요한 17,11)
오늘 예수님은 아버지의 거룩함에 기대어 당신의 마음을 쏟아내고 계십니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본성입니다.
인간과 구별되는,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하느님의 고유함인 동시에, 하느님을 닮아야 하는 그분 백성에게 요구되는 덕목이기도 합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요한 17,16)
인간의 언어에서 거룩하다는 것은 성별되고 봉헌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 목적이 아닌, 하느님만을 위해 따로 떼어진 존재의 특성을 가리키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누차 강조하십니다.
그들의 존재는 근본도 목적도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요한 17,17)
우리는 언제 거룩함을 느낍니까?
전례 중 분향 연기와 성가에서 거룩함을 느낄 수도 있고, 특정한 복장이나 몸짓에서 거룩함을 감지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각자의 심성과 체험에 따라 다양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통회하는 영혼, 회심하는 영혼에게서 진정한 거룩함을 봅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처럼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살신성인의 희생 앞에서 매우 강렬하게 거룩함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말씀인 "진리"로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주십사 청하십니다.
생각을 들추고 골수를 쪼개는 말씀이야말로 만나는 이를 회심으로 이끌어 거룩하게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친히 실행하셨고 우리에게도 명하신 "가장 큰 사랑"을 실천하려는 원의를 품게 만들지요.
진리를 만난 이들은 주님께로 방향을 돌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가장 큰 사랑에까지 도전하고 싶어하게 됩니다.
교회 역사에서 무수한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궤적이 이를 증명하고, 일상 안에서 숨은 희생을 봉헌하고 산화한 이름 없는 의인들의 자취 역시 종교와 상관없이 거룩하고 또 거룩합니다.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사도 20,28)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교회 원로들에게 이처럼 당부합니다.
양 떼를 보살피라는 말보다 자신을 잘 보살피라는 말이 앞서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목자가 먼저 거룩해져야 양들이 거룩해질 수 있으니까요.
사도 바오로가 선교 현장에서 보여주었던 삶의 태도, 즉 탐욕을 부리지 않고 모든 면에서 본을 보여주려고 애쓴 노력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9)라고 하신 말씀과 부합하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전적으로는 아닐지라도 내게 맡겨진 양 떼나 이웃, 가족, 친지, 지인들, 넓게는 내가 속한 사회와 이 세상의 거룩함에 얼마간 책임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교회를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피로 얻으신 교회"(사도 20,28)라고 일컫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몸을 씻어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깨끗하게 하셨음을 의미하지요.
또 교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죄와 악으로 부정했던 존재를 당신 피 값으로 속량하시어 흠도 티도 주름도 없게 하시고 다시 당신 것으로 삼으신 신부입니다.
머리이시고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라는 가장 큰 사랑으로 거듭난 교회는 그래서 거룩합니다.
가장 큰 사랑이 회심을 불렀으니, 거룩함이 거룩함을 부르고 거룩하게 한 것이지요.
하느님의 말씀이고 예수님 자신인 "진리"와 접촉한 영혼은 회심하지 않을 수 없고 예수님처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니, 거룩함에게서 거룩함으로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거룩함은 특정 장소나 의복, 의례처럼 눈에 보이는 표지에서뿐만 아니라, 드러나지 않게 세상 곳곳에 스며들어 선한 영향을 미치는 이름 없는 회심자들,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을 통해서도 확장되고 있지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끄시기 위해 손을 내미시는 진리의 말씀을 부여잡고, 다가오시는 말씀에 머물러 매일 매일을 충실히 채워나갑시다.
이 고요하고 소박한 발걸음이야말로 하느님의 거룩함과 맞닿아 있다는 걸 잊지 맙시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성지순례 중에 버스기사가 순례자들에게 자주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빨리빨리”였습니다.
한국 순례자들이 하는 말을 듣고 따라했다고 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빨리빨리’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인들에게 내재되었던 감성은 ‘절망과 좌절’이었습니다.
‘Korea Time’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이 말은 한국인은 약속을 잘 안 지킨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있었습니다.
암표가 성행했고, 새치기도 일상이었습니다.
만원버스에 시달리다보면 질서를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 외국에 나가도 한국인들은 금세 표시가 날 정도였습니다.
고성방가와 무질서가 외국인들의 눈에 보였습니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가난했고, 문화적으로 취약했고, 먹고 살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교실이 부족해서 2부 수업은 물론 3부 수업까지 했습니다.
농촌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밑바닥에서 삶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연탄가스 중독도 심심치 않게 전해졌습니다.
어느 날 들불처럼 일어난 것이 있었습니다.
‘새마을 운동’입니다.
‘근면, 자조, 협동’이라는 구호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일어설 수 있다는 의식을 고취하였습니다.
아침이면 새마을 노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고, 우리의 경제는 매년 성장하였습니다.
더 이상 외국 담배, 외국 물건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고속 성장의 이면에 공존의 그늘이 있었지만 한국은 더 이상 게으른 사람이 사는 나라가 아닙니다.
한국은 더 이상 좌절과 절망을 품은 사람이 사는 나라가 아닙니다.
한국은 디지털 시대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중교통은 쾌적하고, 깨끗하고, 편안합니다.
외국의 버스기사도 ‘빨리빨리’라는 한국말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대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지만, 사람이 시대를 선도하기도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받는 것도 필요하지만 신앙은 근본적으로 받은 것을 나누는 겁니다.
저는 성격이 급하고, 일을 시작하면 바로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 저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저의 뜻대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제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함께 일을 하고 있는 직원들은 저와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제가 보지 못하는 것을 정확하게 보고 있으며, 제게 부족한 것들을 많이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지혜를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서로의 입장, 서로의 이익만 보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부부도 서로만을 바라보면 갈등과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자라온 환경, 성격, 취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기보다는 같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가정의 행복, 자녀의 교육, 앞날에 대한 희망입니다.
본당에서도 그렇습니다.
많은 단체들이 있습니다.
각 단체들이 서로를 바라본다면 때로 갈등과 다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각 단체들은 같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곳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문제들을 풀어갈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느 젊은 형제님의 불만을 듣게 되었습니다.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했는데, 자신이 하는 일이 거의 허드렛일이라는 것입니다.
‘겨우 이런 일을 하려고 비싼 학비를 내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가?’라는 회의가 든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배운 것을 토대로 회사에 기여하고 싶은데, 허드렛일만 하니 자기 능력을 보일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까요?
일본 교토에 ‘일본 전산’이라는 초소형 정밀모터 제조업체가 있습니다.
연간 매출이 3,000억 엔(한화 3조 원 정도) 이상으로 아주 탄탄한 기업입니다.
이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많은 이가 매년 지원합니다.
소위 스펙이 좋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지원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회사는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무조건 1년 동안 화장실 청소를 시킨다고 합니다.
이 회사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청소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신제품을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청소처럼 아주 간단한 것도 못 하는 사람은 다른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철학입니다.
결국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해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회사에서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찮은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 때, 그만큼 필요한 사람도 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비슷합니다.
사회 안에서의 지위가 성당 안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길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자존감을 세우는 것은 주님보다 더 윗자리에 오르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도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고 합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노력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는 주님만을 탓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명령대로 행동하는 ‘종’처럼 주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요한 17,11)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를 이룬 것처럼, 우리가 하나 되어야만 진리로 거룩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 됨을 위해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겸손이었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만이 하나의 가능성을 만듭니다.
자기만을 따르라고 하고, 자기 원하는 것만 하는 곳에서 서로 ‘하나’ 될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안에서, 또 교회 안에서도 허드렛일이란 없습니다.
제자의 발을 닦아주시면서까지 주님께서 왜 종처럼 행동하셨는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처럼 겸손의 마음으로 자기를 낮춰서 최선을 다할 때, 주님의 뜻이 이 땅에서 펼쳐질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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