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성없는 남자’의 <줄거리>
‘특성 없는 남자’는 1930년대 합스부르크 왕국이 무너져가고 1차 대전이 발발하기 바로 직전 모든 전통적 가치관이 소멸되어가는 상황에서 비엔나의 한 특성 없는 남자가 ‘새로운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을 기록한 세밀한 보고서이다. 사람들이 병원에서 태어나서 병원에서 죽는 시대, 자본이 모든 가치를 빠르게 대체 하고 있는 시대, 군인이 더 이상 용맹함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 그냥 직업이 된 시대에 그는 산산이 부수어져 가는 시대를 단단히 묶어 줄 무엇인가, 아니 본인만이라도 열중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인 무엇인가를 찾아 ‘인생 휴가자’로써 세계를 세밀하게 관찰하기 시작한다.
‘특성’ 혹은 ‘어떠한 인상’ 이라는 것은 일상 세계 속에서 사회와의 관계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지만 주인공 울리히는 한 발짝 떨어져 나와 사회적, 도덕적 구애 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었기 때문에 ‘특성 없는 남자’가 된다. 특성 없는 남자의 무대는 카카니엔 왕국(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으로, 이 왕국에서는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의 즉위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대축전을 독일에서 준비하는 것을 보고, 이에 질세라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즉위 70주년 대 축전을 독일과 병행하여 대대적으로 계획하는 국가 대 국가의 경쟁사업인 ‘평행선 운동’이 추친 되고 있었다. 이 운동을 전 국민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지도 이념을 찾아 혈안이 되어 정치인들 문화인들이 모여 토의 하지만 구체적 계획은 나오지 아니하고 소모적이고 공허한 논쟁만 이어지자 이에 괴리감을 느낀다. 울리히는 평행선운동에 염증을 느끼고 경직된 현실에서 물러나고자 했을 때 아버지의 부고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동안 왕래가 없어 잊고 있었던 누이동생 아가테를 만나게 된다.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곧 파멸을 맞고 울리히는 또다시 새로운 중심을 찾아 떠난다. 이 소설은 무질이 20세 때 구성하여 64세에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1600페이지를 넘게 집필하였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이 시대의 중심을 잡아 줄 가치를 찾는 여정에서 결론이 나온다는 것은 어차피 무리이자 억지가 아니었겠는가. 저자의 죽음으로 소설 마무리하기는 아마도 세밀하게 고안된 계획일 수도 있다.
-특성 없는 남자의 집, 현대의 초상
소설 초반에 묘사되는 특성 없는 남자의 집은 이 소설의 구조와 종착점을 보여준다. 주인공 울리히는 평범한 집을 혐오했기 때문에 외곽의 성을 한 채 구하여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17세기 말이나 18세기 초 양식의 정원을 지나면 사냥 혹은 사랑을 위해 지었던 웅장하지 않은 작은 성이 나온다. 본관은 17세기의 것, 정원과 1층은 18세기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건물의 겉은 19세기에 개축하였고 조금 손상되어 있었다. 따라서 전체적인 인상은 서로 겹쳐 찍힌 사진처럼 약간 불안하였다 … 그의 집을 그가 손질하기 시작했을 때 성경에서 말하듯이 사실 그가 지금까지 기다리기만 했던 하나의 소중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그의 작은 유물을 자기 마음대로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가야 하는, 속이 후련한 상태를 맞이했던 것이다. … 현대인은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에서 죽는다. 그렇다면 그는 병원 같은 집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제안을 어느 훌륭한 건축가가 그에게 던졌으며 실내디자인의 다른 개혁가는 건물 내부의 벽을 고정시키지 말자고 제안했다. 그럴 것이 인간은 다른 인간과 더불어 살며 서로 신뢰하는 관계로 발전해야지 서로 떨어져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새로운 시대는 언제나 어느 순간이든 가능하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양식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성은 이미 세 가지 양식으로 보수된 상태였으므로 그런 현대식 요구를 다 수용할 여지가 없었으며 이것은 울리히에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뒤쳐진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그는 결국 집안 가구를 미래식으로 손수 디자인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육중한 인상의 의자를 생각했다가, 좁고 합목적적 가구가 생각이 났고, 콘크리트 양식이 떠올랐다가 갑자기 소녀같이 가냘픈 양식을 떠올렸으나 결국 디자인을 결정하는 대신에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것은 중심 없는 이동에 불과했다. 이것은 하나의 통일체를 형성하지 못하며 끊임없이 증식하는 현대의 특징이며 그 특이한 기하학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그는 결코 실현할 수 없는 방만 더 생각해 냈다.
앙리 르페브르의 고민도 같은 맥락에 있었다. 재빠르게 소비 사회로 변하는 프랑스의 60년대, 상품으로 가득한 현대세계의 일상성에서 르페브르가 천박한 유행의 시대를 넘기 위해서는 양식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또 혁명을 ‘축제’로써 일으키자고 제안하였다. 축제는 구성원들의 감각을 바꿀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하지만 축제는 단발적이고 산발적이다. 매일 매일이 축제라면 그것이 축제이겠는가.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감각이 필요하지 어떤 양식으로의 회귀가 필요한 것은 아닐 테다.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회귀했던 러시아 혁명기의 미술은 결국 구태의연한 키치가 되어 버렸다. 순간적 안락을 주는 복고주의를 경계하고, 중심 없는 이동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아나콘다 뱃속을 찢고 나오려면 지금 도시세대에게 필요한 감각이란 무엇일까.
울리히가 밤길에서 맞닥뜨린 건장한 세 남자와 싸움을 벌인다. 그는 세 남자가 부랑아가 아니라 ‘자기와 같은 평범한 시민이며, 분명히 그들에게 계속 밀착돼온 억압에서 해방되어’ 적대감을 드러내 보인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오늘날 무수한 다수는 또 다른 무수한 다수를 향해 지속적으로 적대적인 입장에 있다. 자기자신의 범위 밖에서 사는 사람들을 뿌리 깊이 불신하는 것은 오늘날 문화의 한 본질이 된 것이다. 그래서 독일인이 유대인을, 또한 축구 선수가 피아노 연주자를 이해하지 못한 채 서로를 가치없는 인간으로 여기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사물이 단지 경계를 통해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결국 자신의 주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적대적 행위를 통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43쪽)
무질은 자신의 고국인 카카니엔을 설명하면서도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남아프리카나 동아시아를 향해 배들이 출항했지만, 그렇게 자주는 아니었다. 세계경제도, 세계권력을 향한 열망도 없었다. … 군비를 지출했지만 단지 열강들 중 가장 약한 나라에 머물지 않을 정도만을 유지했다. … 단 하나의 잘못된 점이 있다면, 그들이 고귀한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에 의해 뒷받침받지 못한 천재나 개개인들의 창조적인 동기들을 건방진 행동이나 불손함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 카카니엔에선 천재가 무뢰한이 되는 경우는 있어도, 다른 곳에서처럼 무뢰한이 천재로 둔갑하지는 않았다.’(55쪽)
<특성 없는 남자>는 1, 2권이 발표된 뒤 정권을 잡은 나치에 의해 판매금지가 된다. 무질은 스위스로 이주해 소설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으려 애쓰다 1942년 결국 미완성인 <특성 없는 남자>를 두고 세상을 떠난다. 1999년 독일의 신문 ‘디 차이트’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독일어 소설 1위로 <특성 없는 남자>를 꼽았다. <특성 없는 남자>는 줄거리가 울리히와 등장인물들의 사유를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사건의 빠른 전개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한없이 지루한 여정일 수 있겠다. 그러나 무질의 광대무변한 사유를 따라 독자 스스로의 사유세계로 침잠해보는 것도 그 나름의 책 읽는 맛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