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7년, 내가 여섯 살 나던 해였다.
어느 겨울날 아침상에는 노란 좁쌀밥과 짠김치, 물김치 그리고 구수한 숭늉이 올라 있었다. 문풍지 사이로 뽀얀햇살이 들어와 김이 모락모락 피오오르는 좁살밥 위를 평화롭게 비추었다. 촌 겨울 의 아침상은 통상 10시경에차려졌다. 아침겸 점심이었다.
형들은 한참 먹을 나이라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밥을 해치우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궁둥이에 손을 대고 입으로 방귀 소리를 낸 후 거무튀튀하고 투박한 손을 내 밥그릇 위에 갖다 덮었다. 나는 숱가락을 내팽개치고 발버둥을치며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형들에게 눈을 흘기며 매 성미를 잘 알면서 그런다며 나를 달랬다. 내가 그치지 않자 어머니는 내 밥그릇을 가지고 부엌으로 나갔다가 다시 가져와서는 밥을 바꾸어 왔으니 어서 먹으라고 했다. 나는 밥을 검사해보고는 나를 속였다며 신경질을 더 부렸다.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풀기 없이 부서지는 조밥을 커다란 바가지에 넣고 내가 보는 앞에서 씻어주었다. 김치쪽을 물에 헹궈서 밥숟갈에 올려주면 그제서야 몇 술 먹고는 말았다. 오돌오돌한 조밥이 어린 나에게 맛이 있을 리 없었다.
■ 육사에서는 학과공부보다는 위인전과 고전 명작들을 읽는데 50% 이상의 자습시간을 사용했다.
좋은 책을 빌려다 놓으면 주말이 무척 기다려졌다. 매 10 페이지를 읽을 때마다 나는 저자가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려 했는지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다시 10페이지를 읽고나면 한없는 상상력이 나래를 폈다. 읽는 시간보다 상상하고 요약하는 시간이 길었다.
이러한 훈련은 훗날 복잡한 사회현상에서 줄거리를 찾아내고 나의 전공인 응용수학을 깊이있게 음미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는 훌륭한 교사가 없었다. 그러나 내게는 분명 훌륭한 교사가 있었다.
그 교사는 바로 책 속에 들어 있었다.
나의 육사 시절, 사관학교 화장실 소변기 밑에는 언제나 소변방울이 떨어져 냄새가 났다.
금요일마다 염산으로 청소를 하려면 위험하기도 했지만 독한 염산 냄새 때문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화장실 사용에 대해 주의를 준다는 것은 좀스런 일로 치부되었다. 그래서 사관학교 창설이래 화장실의 고통은 계속돼왔다.
어느 날 나는 교실로 향하기 위해 집합해있는 하급생들에게 엎드려! 일어서!라는 얼차려를 반복시켰다. 머리끝까지 긴장한 채 용수철 처럼 기합을 받던 하급생들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상상만 분주했다. "귀관들!" 나는 천천히 입을 열면서 엄숙한 표정으로 생도들을 좌우로 둘러보았다. "무슨 심각한 지시가 떨어질까 아니면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까!" 생도들의 눈망울이 나를 뚫어지게 주시했다.
"화장실에 가거든 한발짝 더 앞으로 전진하라. 그리고 최후의 한방울까지 철저히 관리하라". 겁을 잔뜩 먹고 있던 하급생들의 입이 한참 후에야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화장실의 고통은 사라졌고 "최후의 한방울론"은 두고두고 나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 월남전에서 나는 중위를 달자마자 포병 대대 상황실에서 포병화력을 지휘하는 사격지휘 장교가 됐다.
각종 정보 부대에서 전파돼오는 첩보내용이 날마다 수십 쪽의 상황일지를 채웠다. 다른 장교들은 상황일지를 한번 쭉 훑어보는 것으로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나 나는 기록병들로 하여금 모든 상황을 지도위에 점으로 표시하게 했다. 초저녁 상황은 초저녁 상황판에, 밤중 상황은 밤중 상황판에 표시하도록 했다. 이렇게 표시된 점들이 모이자 각 시간대 마다 베트콩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포병사격을 퍼부었다.
나중에 수집한 베트콩 포로 문서에는 "한국군 포에는 눈이 달렸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중위 때, 나는 월남에서 포병화력을 지휘하는 사격통제 장교였다. 한국에서 고문관을 지냈다는 미군 소령이 내게 복종을 강요했다. 한국에서는 장군들도 자기에게 꼼작 못했는데 중위가 왜 말을 안듣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내 병사들의 자존심을 자극해 그 친구 발뒷꿈치 모래 사장에 집중사격을 시켰다. 내게 큰 소리를 치던 그는 체면도 내던지고 삼쌀개 처럼 달아났다. 병사들은 달아나는 그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나의 상관은 내게 큰일을 저질렀다고 겁을 잔뜩 주었다. 미군이면 꿈벅 죽는 그런 선배 장교들이 정말 못나보였다. 그 다음날 미군 중령이 내게 찾아왔다. 겁을 잔득 먹고 있는 나의 상관 앞에서 그 미군 중령은 오히려 내게 정중히 사과를 표시했다.
■ 30살 때, 나는 임시 대위로 월남에서 포대장을 했다.
어느 날 오후 늦게 내 병사가 헌병초소에서 C-레이숀을 빼앗기지 않으려다 헌병에게서 뺨을 맞고 들어왔다. 내가 분을 참지 못해 할 때, 상사와 중위들이 나를 위로했다. "포대장님 너무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쫄병들은 원래 다니면서 헌병에게 얻어 맞고 다니게 돼 있습니다". 그 말에 나는 더욱 더 화가 났다. 덩치가 좋은 병사 열명을 뽑아 완전 무장을 시킨 후 트럭에 태우고 어두 컴컴한 길을 40분간 달려 갔다. 중간에 베트콩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내 병사를 때린 헌병을 끌어내 내 병사에게 용서를 빌도록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가 빼앗으려 했던 것보다 더 많은 C-레이숀을 주었다.
"앞으로 C-레이숀이 필요하면 내게 전화하라, 만일 내 병사에게 손을 또 한번 대면 그 때엔 주먹과 무력으로 다스릴 것이다". 전쟁터에서 존중돼야 할 전투병들이 옷이나 깨긋히 다려입고 지내는 헌병 따위에게 뺨을 맞고 다닌 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까불던 헌병들이 그날 전투병들의 맛을 톡톡히 본 것이다. 그후 그 초소를 지나는 내 부대 차량들은 언제나 기분좋게 프리패스됐다.
초급 지휘관은 매월 1회씩 병사들 한사람 한사람을 불러 신상면담을 하도록 규정돼 있었다.
나는 일에 바쁜 병사들을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병사들이 보내는 편지를 읽기로 했다. 병사 개인별로 신상기록 파일을 만들어 놓고 그들이 보내는 편지를 요약해 놓았다. 그들의 편지는 지휘관이 직접 읽도록 규정돼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그 일을 주임상사 등에게 맡겼다.
병사들에게 오는 편지는 보낸이의 주소와 이름만 기록했다. 이러한 기록의 한 개 한 개는 별로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들이 쌓여지면 신상면담이라는 형식적인 방법으로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깊은 내용들이 시의적절하게 파악될 수 있었다. 병사들의 고민도 즉시 즉시 파악됐다.
어느 한 운전병이 면허증 갱신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것이 포착됐다.
옛날의 면허증은 지금처럼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닌데다 갱신기간을 넘기면 면허증이 송두리 채 날아가 버렸다. 그 병사의 면허증은 파월기간중에 갱신기간이 걸려 있었다. 나는 경남 도지사에게 앙청하는 편지를 썼다. 도지사로부터 약속장이 담겨진 편지가 날아왔다. 귀국해서 도지사의 편지를 교통운수과에 제출하면 문제 없이 해준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당번병을 시켜 그 편지를 병사에게 전달했다. 내가 직접 전달한다는 건 매우 쑥스런 일이었다.
나는 병사들의 어려움을 뒤에서 생색내지 않고 여러 건 처리해 주었다. 내가 그들에게 생색내지 않듯이 그들도 생색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 병사들은 나를 귀신이라고 불렀다. 포대장이 비록 그들을 감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어디에선가 꿰뚫어 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취임시에 내개 들어내 놓고 반항하던 간부들이 불과 2-3개월이 지나자 과분하리 만큼 내게 충성을 다했다. 내가 내 사무실을 나가는 바로 그 순간 나를 본 병사들이 봉화 전달 식으로 주임상사에게 나의 거동을 알렸고 포대 귀퉁이에서 병사들과 함께 했던 나이 50이 넘은 상사는 땀을 있는대로 흘리면서 먼 거리를 달려와 차려 자세로 거수 경례를 했다. 나는 인구 150명의 조그만 부대에서 일종의 카리스마가 돼 있었다.
■ 나는 한국 나이 37세에 박사과정을 치르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시스템 수학의 기초과정부터 시작해서 박사 논문까지 끝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첫학기부터 중압감으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이는 나의 위장병을 더욱 악화시켰다.
반팔로 1년을 지낼 수 있는 지중해성 기후였는데도 무릎과 발이 시리고 쩌릿해서 차라리 다리가 없는 편을 선택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뒷골이 무거워 지고 나른해서 잠만 쏟아졌다. 몇 차레 한국 교포로부터 침을 맞긴 했지만 부담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한 차례에 20달러씩 지불하는 것도 커다란 부담이었지만 가는 데 20분, 오는데 20분, 침맞는데 20분이라는 시간은 더욱 더 감수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침술사에게 사람하나 살려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가 싸준 침뭉치를 가지고 그가 가르쳐 준 요령에 따라 배, 손 그리고 발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 배에 꽂는 실침의 수는 30개 내외였다. 침을 맞으면 체력이 소모됐다. 가누지 못할 만큼 몸이 까부러졌다.
나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여 2층 계단을 내려와서는 비틀거려지는 몸을 가누며 뛰기 시작했다. 3년을 하루 같이 뛰었다. 뛰고 나면 지쳤던 몸에 생기기 돌았다. 박사과정이 끝난 시점에서의 내 건강은 그때까지의 내 일생 중에서 가장 건강했다.
비가 와도 뛰었고, 새벽 두시가 돼도 뛰었다. 매일 같이 뛴다는 것은 체력 향상에도 도움이 되지만 나태해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하루를 거르면 열흘을 걸르게 된다. 열흘을 거르지 않기 위해서는 하루를 거르지 않아야 했다.
뛸 때에는 반드시 생각할 거리를 미리 준비했다.
뛰면서 수많은 수학 이론을 터득했다. 뛰면서 수학문제 푸는 과정을 칠판에 표시한다면 칠판 한 두 개쯤은 수학기호들로 빼곡히 들어찼을 것이다.
이러한 훈련은 상상력과 논리력을 훈련시키는 데 있어 최고의 방법이었다.
그러는 동안 생각하는 습관이 길러졌다.
■ 새로운 이론을 공부할 때마다 나는 3~5권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같은 이론이라 해도 이를 다루는 석학들에 따라 시각을 달리 하고 다루는 요령 및 기법을 달리 한다는 것은 학문의 희열을 느끼게 해주었으며, 이 희열은 주말 공부를 위한 충분한 에너지원이 되었다.
남들은 교과서 하나도 다 소화할 시간이 없는데 그렇게 많은 책을 언제 다 보느냐고 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학문이 주는 희열을 알지 못한 채 성적과 학위만 딸 뿐이다.
처음부터 큰집으로 시작하면 큰집을 지을 수 있었다.
이러한 공부 방법은 수학에 대한 해석력을 낭만적이라 할만큼 매우 풍부하고 화려하게 길러주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 내가 만든 수학공식, 세 개의 정리, 알고리즘은 각기 나의 성을 따서 [Jee's Formula], [Jee's Theorem], [Jee's Algorithm] 으로 인용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