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1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2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3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4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5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6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7편
(통합본 2)
******************************************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니항사건 = 니콜라옙스크 사건)
(러시아어: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일본어: 尼港事件, 중국어 : 廟街事件)
******************************************
1920년경 사할린 주의 자연환경
(1861년경 러시아에서 농노 해방령이 내려졌지만 본토의 토지는 귀족이나 부르조아가 대부분을 가지고 있다 보니 러시아의 소작인과 노동자는 부르조아에 대한 반감이 큰 상태였다.) 러시아 공산혁명기 간 동안 시베리아에서 백군과 일본군을 격파하고 볼셰비키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부에서 승리외에도 일부 시베리아 특유의 환경에서 기인한다. 시베리아에서 강추위로 가을부터 봄까지는 사실상 농업과 야외활동이 불가능한 시기인데, 러시아 본토에서는 혁명전 공산주의자 등을 시베리아에 유배를 많이 보내었고, 초기 개척을 위해 이주해온 러시아계 민족도 러시아본토에서 귀족이라고 불리던 계층보다는 신흥 부르주아 계층과 소작농들이 이주해온 경우가 많았다. 부농도 다수 존재하였지만, 시베리아의 광활한 미개척지는 땅을 놓고 부농 소작농으로 구별된다기 보다는 누구나 개간하여 농업에 종사할 기회는 주어졌고, 또 광대한 평원, 숲, 아무르강에서 나오는 자원들은 본토와 우크라이나에서 농노에서 해방되었던 사람들이 기회를 찾아 이주해 오기에는 충분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이 황제, 귀족, 부르조아와 같은 편인 멘셰비키나 백군을 돕기는 힘들었고 더군다나 시베리아의 다양한 인종들도 한국계에게 익숙한 환경이었다. 러시아계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던 시기에 한국인들도 간도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장군이 녹둔도 둔전관을 하던 시기(1587)에도 한국에서는 아무르강을 “흑수강, 혹은 몽고 흑수, 까만강” 등으로 부르고 있었고 심지어 최근까지도 삼국시대에 쓰던 명칭을 사용했던 사람도 존재하였다.
1904년 동청철도(만주를 관통하는 노선)와 연결된 완전한 시베리아횡단노선 완공이외에도 1916년에는 러시아 영내만을 통과하는 노선도 완공되었다. 아무르강의 교통 요충지였던 니항, 하바로프스크, 블라디보스토크, 자유시(수라제프카 지역), 블라가베셴스크, 치타, 이르쿠츠크 등은 해상교통의 요지뿐만이 아니고 철도교통의 요지가 되어 서쪽에서 이주자가 증가하였고, 또 시베리아에서 생산되는 곡물 등이 서쪽으로 대량 운반되기 시작했다.
니콜라예프스크(尼港, Николаевск)의 위치
니코라예프스크는 시베리아 아무르강(흑룡강)의 하류에 있는 항구도시이다. 러시아가 아무르강의 일대에 출현한 후 최초로 바다와 접하는 항구였다.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보다 앞선 1850년경 개발되었으며, 대륙횡단 철도가 개설되기 전 아무르강 수상교통의 중요성은 블라디보스토크 못지 않은 것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만 하여도 1860년에는 밀림지대였고 호랑이가 득실거리는 곳이었다고 한다. 1872년 러시아의 극동함대는 니콜라예프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였지만, 시베리아횡단철도와 도로건설 이전시대의 러시아의 동시베리아 개발은 아무르강을 따라 이루어졌다고 해야 할 정도였다. (※ 1926년 이후 니콜라예프스크는 「니콜라예프스크 나 아무레」로 개명)
아무르강(※과거 한국에서는 흑수강으로 부름, 국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참조) 은 현재의 한반도에서는 볼 수 없는 큰 강이다.
아무르강은 평소 흐르는 물의 양만하여도 한국의 모든 강을 합한 것보다 큰 강으로, 하류부터 상류 몽고까지에는 오늘날에도 무게 수십톤까지 이르는 철갑상어, 바다사자, 돌고래류, 고래류, 연어류, 메기류 등 수산물이 넘쳐나고 호랑이와 곰과 같은 대형 동물들이 생활하고, 겨울의 강추위로 병충해가 적고 일부 화산토양과 퇴적층은 콩, 밀, 보리, 쌀 등의 최적 재배지이다.
이러한 아무르강이 바다와 접하는 항구가 바로 니콜라예프스크이다. 니코라예프스크는 아무르강 하구의 항구도시로 블라디스톡과 더불어 어업, 산업, 교통의 요지로 예전부터 중국인, 몽고인, 한국인, 러시아인, 일본인, 시베리아인 등이 거주하였다.
1차 세계대전으로 러시아의 식량난이 가중되자 교통의 요충지 니항에는 1896년경 설립된 일본인 시마다 상회 외에도 많은 거류민들이 상업 등에 종사하였고 영사관까지 설치되었다.
******************************************
참고자료
시마다 모토타로(島田元太郎 :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일본인. 1870년경 일본 나가사키현 출생 ~ 1945년경 조선 평양에서 사망) : 니항에서 시마다 상회를 운영하며, 화폐까지 발행했다. 당시 자원의 보고였던 사할린주와 니항의 일본 민간인 진출을 이끈 사람이다.
1920년경 니항사건 당시 니항의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으로 최고위급 밀정이었다. 생환한 여성들의 구제와 일본정부에 대한 보상소송에 앞장섰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침략에 동원되었던 조선인 여성이 일본으로 귀환했는지 여부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니항의 조선인 민회 주무였던 박병길 등에 대한 진술을 남겼다.
시마다 모토타로는 러시아 내전기 돈까지 발행할 정도로 경제권을 장악하였으나, 니항사건으로 상회까지 불탄다. 니항사건 기간중 일본에 있어 화를 피한 시마다 모토타로는 니항 사건 무렵 일본 정치인들이 시베리아, 유전, 탄광, 동청철도 침략에만 광분하고 파르티잔 토벌에만 열중하여, 니항의 일본인 포로 구출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에 비하여, 니항 사건에서 생환한 일본인 구제에 노력했다고 한다.
니항에서 생환한 유곽의 창기들은 일본에서도 냉대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중일전쟁이나 대동아 전쟁 시기, 강제 동원되었던 한국계 정신대, 위안소 피해자들은 일본계 유곽보다 낮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진술하는 사람이 드물다.
1920년 니항의 유곽에 있었던 조선 출신 여성도 박일리야 부대에 의해 해방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1920년경 니항에서 일부 한국계가 경제권을 장악하였던 일본인들에게 협조한 것은 사실이다. ......참고자료 끝......
******************************************
1918년 1월의 니항거주 일본인 수는 499명 정도이며, 상업, 어업, 식품가공업, 재봉업, 금세공 종사자, 유곽의 창기 90여명(조선인 여성 가라유키상도 다수), 가정부 등 61명, 기혼여성 100명 등으로 남녀비율은 거의 반반이었다.
니코라예프스크는 금광산업이 발전하였으며, 기본적은 도로망은 아무르강을 통한 수상교통이 기본이고, 겨울철에는 썰매길을 주로 활용하였으나 다른 시베리아 지역과 마찬가지로 겨울에는 교통이 두절된다. 요즘 같이 방한 장비가 잘 된 시절에도 시베리아에서 야간에 밖을 나다니다가는 얼어죽기 쉽다.
1917년 10월 혁명이후 볼셰비키의 시베리아와 니항 해방
니항에는 여러 개의 교육기관과 고려인 사립소학교도 하나가 있을 정도로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도시라 부를 만한 곳이었다. 여름철에는 세계에서 어민들이 몰려 인구가 증가하지만, 겨울철에는 주민만이 남게 되는 지역이다.
이러한 니항의 특성 때문에 오늘날 일본은 니항 사건 사망자수를 부풀려 왜곡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은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니항의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러시아 혁명기에 적군과 백군, 일본군 등이 모두 요충지로 생각하고 전투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1917년 2월 혁명이후 러시아 전지역에서는 공산주의자(볼셰비키)들이 득세를 하기 시작하였고, 시베리아 지역에서도 한인들도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는 시베리아 전역에 볼셰비키 정권을 지지하는 한인들이 나타났고, 조선내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심지어 1919년 3·1운동도 러시아 공산혁명과 1차 세계대전 종전의 영향 등을 받고 일어날 정도였다.
니항도 1917년 10월 혁명이후 볼셰비키들이 일시 장악하였다.
1918년 8월 2일경 일본군의 니항 점령과 시베리아 침략
볼셰비키 혁명이후 레닌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미국, 유럽, 일본 등이 러시아 내전에 참가하자, 내전기의 대기근으로 고통을 받고 있던 시베리아 지역에서도 희생자가 속출하였다.
러시아 내전에 백파를 돕기 위해 유럽, 미국을 중심으로 간섭하였다. 시베리아에서의 14개 국가 연합군의 표면적 간섭 이유는 체코군단 구원이라는 것이었는데, 연합군중 서부 시베리아를 침략한 일본군은 연합군의 시베리아 간섭 목적과는 큰 관계가 없는 교통의 요충지 니항(니콜라예프스크)을 시베리아 영구 점령과 내륙진출의 발판으로 삼기위해. 1918년 8월 2일경 침략하여 (10월 볼셰비키 혁명이후) 니항을 장악하고 있던 볼셰비키들을 몰아내고 완전 점령하였다.
당시 니코라예프스크는 행정구역상 사할린섬과 아무르강 하류지역을 관할하는 사할린주의 주도(州都)로. 1905년 러일전쟁 패전후 사할린섬 남부가 일본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일본군이 여러 가지 이유로 대피하지 못했던 노인, 어린이, 여성들을 학살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니항 주민중 상당수가 러일전쟁 패전후 1905년 일본의 사할린섬 남부에서의 학살을 피해 도망 온 사람들이었다.
주민중 친일파나 백파가 아닌 사람들은 일본군의 니항 침략을 무슨 이유에서든지 환영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니항의 일부 부유층들은 달랐다. 1918년 니항의 부르조아와 지배층 102명은 일본 천황에게 아무르주와 니항에 일본군을 보내 볼셰비키를 타도하라는 청원서까지 보냈다. 그리고 니항에 남아있던 볼셰비키와 지지자들을 색출해 살해하였다.
(※ 트리피츤에 의한 니항해방 이후, 일본 천황에게 청원서를 작성한 백파 인물들이 주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일제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니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일본군은 볼셰비키 처형 외에도 니항 시내에 기존에 없던 대규모 병영과 유곽(성매매업소) 등 각종 군사 관련 시설을 건설하며 영구 점령이 목적임을 분명히 하였다.
일본군의 니항 점령시점은 증언마다 조금씩 다르다. 김낙현(김학현)의 1967년도 ‘빨찌산 회상기’에 따르면 1918년 5월 어느날, 니항에 일본군함이 침입해 볼셰비키 혁명군과 소비에뜨 청사를 기습 공격하기 시작하여 볼셰비키 들은 타이가 숲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김낙현(김학현)은 주장에 따르면, 일본군들은 니항 점령후 볼셰비키 체포부터 시작하였다고 한다. 김낙현은 잠시 피했다가 왜적이 점령한 니항으로 돌아와 박병길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인 사할린 의용군(니항부대, 사할린주 출신 독립군 부대)의 조직
① 박병길 등이 사할린주 의용대를 조직했다는 설에 대하여
※ (박일리야의 반대세력으로) 니항사건 참가자인 김낙현이 1967년 쓴 「한국학자료총서5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홍범도편중, 김낙현의 파르티잔의 수기」에 따르면,
니콜라예프스크에서는 볼셰비키 혁명이후인 1918년 가을부터 박병길(박바실리, 박와실리)에 의한 고려인 민회와 청년회 등이 조직되었고, 니항사건의 수기를 남긴 리지택이 참여하였고, 그후 류소심(유조심), 전세화 등 수백여명의 고려인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1919년부터 사할린주의 주도이자 도회였던 니항과 아무르강 하류 및 사할린 섬 북부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적백내전이 전개되었다고 주장한다.
※ 이르쿠츠크파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 주장하기를
니콜라예프스크에서 고려인 사할린주 의용대 380여명을 조직하여 니항을 해방시킨 것은 박병길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박일리야를 「아편중독자, 학살범, 강도」로 깎아내리기 위해 조작한 것이 명백하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자료총서5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홍범도편」, 1995, 63쪽 등의)
리인섭, 김승빈의 주장에 따르면 박병길은 일본군의 1918년 니항 점령이후 일본인과 백파에 협조한 자였기 때문에 트리피츤에 의해 처형 대상자 명단에 오른 자였다.
그러나 박일리야의 비호를 받아 처형을 모면하였고, 께르비에서 트리피츤 처형에 가담하였다가 결국 자유시에 와서 군사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고 한다.
(일본인회 회장 시마다모토타로의 자료에는 박병길이 니콜라예프스크의 일본인 상점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소리도 있다.)
② 류소심과 박일리야 등이 사할린주 의용대를 조직했다는 설에 대하여
※ 이르쿠츠크파였던 최호림 등의 자료를 인용하는 자료에 따르면 「류소심이 조직한 부대는 1919년 12월경 아무르 강 하류 니항 주변의 금광에서 일하던 200여명의 노동자들이었다. 병력이 늘어 4개 중대로 편성하였다. 주요 간부는 류소심, 고명수, 임호(1885~1938), 김이노켄지 등이었다. 이 부대는 1920년 2월 29일 트리피츤 부대와 함께 니항을 해방하는 데 참여하였다.
트리피츤 부대에 의한 니항 해방(1920. 2. 29.) 이후에 니콜라예프스크에 거주하던 박병길(박바실리), 이지택(李智澤), 연지영(延志英, 혹은 엄지영) 등을 중심으로 한 청년들이 트리피츤 부대와 교섭하여 독립된 1개 중대를 편성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계, 중국계 파르티잔의 수가 자료마다 다른 것은 그들은 그 지역에 연고를 갖고 있던 사람들로 다양한 형태로 가담한 것도 한 이유로 보여진다)
③ 박일리야가 니항 사건에 참여한 시기
(리인섭 등의) 일부 주장에 따르면 트리피츤이 1920. 2. 29. 니항을 해방시킨 후 박일리야를 초청한 것이라고 한다. 류소심 등이 조직한 한인 파르티잔 부대는 러시아 파르티잔 사령부(트리피츤 부대 사령부)에서 사업할 수 있는 대표가 필요하여 당시 한인 원호촌(原戶村) 학교 러시아어 교사인 박 일랴 하리토노비치를 초빙하여 한국인 부대 대표로서 파견하였다고 한다.(이 부분은 러시아측의 기록과 많이 다르다.)
이렇게 조직된 고려의병대 대장(사령관)에는 사소프(Сасов-Беспощадный)가, 부관에는 박일리야가 임명되었다.
최근 한국 내에서 발행된 도서와 대학교 논문 등에 따르면, 독립운동사에 사할린 의용대, 사할린 군대, 니항군대로 불려지며 중요하게 등장하는 사할린 의용대의 구성에 대해서, 류소심·박일리야를 중심으로 하였고, 트리피츤(1897년 출생 ~ 1920. 7. 9. 사망) 부대의 니항 해방 이후 언제부턴가 박병길을 옹호하는 편과 박일리야 편이 대립하게 되었다는 부분에서는 모두 동의한다.
④ 김홍일의 주장
사할린 의용대 출신 독립군들과 함께 한 적이 있었던 김홍일(金弘壹. 1898~1980)은 이들과는 다르게 니콜라예프스크에 있던 한인 교사 박일리야가 이미 독립운동을 위하여, 한인 파르티잔을 조직하였다고 한다. 사할린 부대장 박일리야는 일찍부터 이동휘(1873~1935)씨가 세운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촌과 한인학교에서 배운 바 있어 그 자신 민족주의적인 성격이 강하며 만주에서 모여온 독립군단들과 항시 긴밀하게 협조했다고 한다.
⑤ 여러 가지 이야기가 대립되지만
러시아와 한국의 자료들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박일리야는 트리피츤의 니항해방 이전부터 트리피츤 부대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러시아측) 기록이 훨씬 신빙성이 있으며, 본 책은 박일리야가 트리피츤의 니항해방 이전부터 볼셰비키 혹은 트리피츤 부대와 관계가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박병길이 트리피츤과 협조해 니항을 해방시켰다는 것은 자유시참변을 일으켜 동료를 살해했거나 일본군들과 협조했던 사실을 감추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 오늘날 러시아 시베리아 연해주 일대에는 1920년대 러시아 내전시기 사망한 파르티잔군(赤軍, 볼셰비키), 백군(白軍)들에 대한 추모비가 많이 세워졌고, 제정 러시아 마지막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를 추모하는 분위기도 있지만, 예외적으로 동시베리아 니항과 아무르주 일대에서 일본 침략자의 앞잡이 노릇을 하다가 일본으로 도피해 호의호식을 하고 니항사건이 일제 침략군과 그들의 앞잡이 800~1,000여명이 볼셰비키를 기습공격을 했다가 전멸한 군사상의 패전이 아니고, 볼셰비키들에 의한 러시아 민간인 4,000~10,000명 학살극이라고 니항사건을 조작했던 러시아계 친일파에 대한 평가는 매우 좋지 못하다.
※ 니항 사건의 현장에 있던 독립군들도 사망자 수를 사람마다 다르게 증언하는 데, 1차·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각종 전투에서 적의 인원수를 파악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척후병, 첩보, 인공위성, 비행기 등의 다양한 수단을 통해 수를 파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장에서 일일이 숫자를 세지 못한 사람들은 축소되거나 과장된 표현을 쉽게 사용하였다. 이러한 것은 사진촬영 등을 통한 적의 숫자 파악을 하고 있는 오늘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1920년 니항사건 당시 (파르티잔) 트리피츤 부대는 여러 차례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사망자를 하나하나 숫자를 세서 확인한 러시아측의 일본계 사망자수가 약 900여명 이상이라는 자료가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돌석 의병, 후치령, 봉오동, 청산리, 자유시 사건, 중동로 사건, 봉천전투, 강교 사건, 노몽한 사건 등의 사망자 수가 자료 마다 다른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며, 현재의 세계 제1의 군사강국 미국의 전쟁 자료도 마찬가지이다.
독립군이 전사자 인원을 하나하나 숫자 센 것은 비교적 정확하지만, 급박한 전투 중에 그런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홍범도가 작성한 경술년(1910년경) 자금요청 편지 등을 봐도 독립군 지휘부의 가장 중요한 일중 하나는 병력과 자금 조달이었다.
일제 침략기 민족해방 전쟁 당시 실제 전투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척후병이라고 할지라도 이동중인 적의 숫자가 수십명을 넘을 경우, 정확한 인원수를 세서 확인해 보고하기는 힘들었다고 한다.
전투중 수백명을 수천명 수만명으로 과장하는 등의 표현은 한국 독립운동사 뿐만이 아니라 세계 전쟁사에서는 지금도 매우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과거 유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이지택, 최호림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최근에는 세계적인 사건인 ‘니항사건’을 친일파의 자료만 인용하여 일제의 침략주의 야욕이 빚은 결과가 아니고 민간인 학살이라고 허황된 주장하는 사람들이 한국에도 있다. 심지어 인터넷에 위변조된 서류도 가끔 올린다.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 목적
일본은 러시아 공산혁명직후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독일전 참전과 체코군단 구출이라는 간판을 걸고 시베리아도 침략하였으나, 실제 목표는 일본군이 지도하는 콜차크·시묘노프 등을 앞세운 허수아비 국가나 정권 수립, 바이칼호 동쪽 시베리아와 사할린섬 북부와 석유·만주·몽고·시베리아횡단철도 및 동청철도(중동철도)를 차지해보자는 침략주의 야욕이었다.
다른 연합군은 러시아 레닌정부와 강화조약을 맺은 독일이 서부 전선에만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볼셰비키(공산당)가 주장하는 세계혁명을 막아보는 것에서 출발했지만, 1918년 말 독일은 내부에서부터 무너지며 연합군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고 체코슬로바키아도 독립국이 되면서 체코 군단을 구출한다는 명분도 없었다.
이에 따라 연합국 측은 일본을 제외한 영국, 미국을 중심으로 반 볼셰비키주의를 천명한 후 러시아 백군을 지원하였으나 백군의 붕괴로 곧 철군하였고, 일본은 만주, 요동, 시베리아, 사할린 등에 대한 영구점령과 일본내 사회주의 침투방지를 목표로 하고 이에 가장 적극적으로 침략하였다.
따라서 연합국은 그들이 지원하는 반혁명 파인 백군에 의한 러시아 통일을 목표로 하였지만, 반볼셰비키의 중심이었던 콜차크(Колчак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의 옴스크 정권은 일년만인 1919년 11월 14일경 완전 붕괴되었다.
러시아의 1919년 겨울은 만성적인 식량부족이 더욱 가중되었다. 오직 러시아 영토점령이나 부르조아 체제 유지만을 목표로 하였던 일제 침략군과 콜차크 정권은 이를 전혀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백파(일본군과 콜차크 등)의 승리 가능성은 이제 사라진 것이다.
그후 니항을 점령했던 일본군 병력의 대부분은 다른 지역 점령을 위해 이동하였다. 니항사건 무렵인 1920년 1월경에는 일본군은
니항의 일본군 및 일본 거류민 수 (1920년 1월경) · 육군 제14사단 미토(水戸)보병 제2연대 3대대 병력 : 290여명 (1918년경 건립된 일본군 병영 주둔, 대대장 이시카와 소좌) · 육군 헌병대 : 15명 (아무르강변 주둔) · 해군 무선대 : 40명 (일본 영사관내) · 일본군 총병력 : 약 415명 정도 (자위단, 재향군인 포함) 여기에 일본영사관 영사이하 300~600여명의 일본 거류민들이 니항에서 상업, 어업, 광업, 위안소 유곽(가라유키상 여성 90여명중 조선인 여성 다수) 등에 종사하며 머무르고 있었다. · 일본군과 일본거류민의 합계 : 약 750명 ~ 900여명 정도이며 (※ 일본 거류민의 수는 자료마다 다르다. 니항사건의 최종 일본인 생존자는 수십여명이다.) |
도시 내의 러시아 백군은 수는 자료마다 다르며, 백파 무장병력 약 300~500여명으로 추산되었고 당시 겨울철 니콜라예프스크의 등록 인구는 대략 1만 2천여명 정도로 추정된다.
러시아 백군의 콜착크 정권이 무너지며 반 혁명 세력이 급속히 세력을 잃어가자. 1920년 1월부터 2월에 걸쳐 볼셰비키 세력은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의 반혁명 세력을 차례로 물리치고 시베리아의 주요 지방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미 대세가 볼셰비키에게 기울어졌음을 파악한 연합군은 대부분 철수를 시작했고 일본과 함께 시베리아 개입 세력의 다수를 차지하던 미국 또한 1920년 1월 9일, 시베리아로부터의 철군을 일본에 통보했다.
동시베리아 주둔 일본군에게 1920년 1월 17일경 육군 대신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내린 지시는, 지금까지 백파(백군)측에 가세해 민간인과 볼셰비키들을 대량 학살해온 일본군에게 내전에서 중립을 선언하고 시베리아에 계속 주둔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군과 백군의 대량학살을 경험한 러시아와 동시베리아 주민들은 일본군의 사할린섬 북부, 시베리아 등의 러시아 영토내 주둔을 허용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볼셰비키(공산주의 정부) 정부의 기본적인 목표는 제정 러시아의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지, 사할린섬 북부 할양이나 시베리아 할양, 동청철도(중동로철도) 양도, 일본이 만든 허수아비 정권, 일본 밀정들의 자유로운 활동보장 같은 것은 내부적으로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최초 독립군의 이동에 호의적이었던 이유도 기본적으로는 함께 국제군(의용군) 등을 창설하여 침략자 일본군과 백파(백군)를 몰아내자는 것이었다.
1919년 8월 25일경 중국 북경정부 소속 강방함대의 도착
만주에서는 주경란(朱慶瀾) 일파가 물러나고. 1919년 7월 19일경 관성자사건(寬城子事件)이 발생하였다. 1919년 8월 5일경 장작림(張作霖)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한 길림성 독군 맹은원(孟恩遠 : 1856~1933)이 물러났다.
이제 만주의 동북3성은 사실상 친일파 장작림이 완전 장악하였다.
1919년 8월 25일경 중국·러시아 국경선인 아무르강과 지류인 우수리강, 송화강의 경비 등을 위해 니항에 도착한 중화민국의 강방함대(군함 4척에서~5척)가 러시아 백군인 콜차크 세력과 일본군의 방해 때문에 상류로 가지 못하고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월동을 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과 중국 북경정부는 협력관계에 있었으나, 중국은 강방함대의 아무르강 일대 자유 항해를 일본 군함처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고 신문에서 보도하고 있었다.
니항의 화교상공회의소와 일본 영사도 같은 연합군 소속인 강방함대를 열렬히 환영하였다.
1919년 10월경 하바로프스크와 니항간 통신용 전선을 트리피츤 부대(파르티잔)가 차단하였다. 이제 니항과 외부와의 연락은 일본 해군의 무선소에 주로 의지하였다.
1919년 11월 2일~11월 3일경, 하바로프스크 지역의 아나스타시예프카(Анастасьевка) 마을에서 아무르 지방 볼셰비키(파르티잔) 부대 지휘관 회의가 열려 빠른 시간 내에 아무르 강 하류 지역에 부대를 파견하여 해당 지역을 회복하도록 할 것이 결정 되었다.
이들의 주요 목표 중엔 사할린섬과 마주 보고 있는 니항도 포함되었다.
1919년 11월 10일경 트리피츤은 약 35명의 파르티잔들과 니항을 해방시키기 위해 하바로프스크 인근에서 출발하였다.
니항 인근 마을들이 차례로 파르티잔들에 의해 해방되고 있었지만, 백군의 미약한 반격은 완전한 실패하였다.
트리피츤 부대가 니콜라예프스크로 접근하자 백파들은 천여명 이상의 병력을 파견하였으나, 그들은 반란을 일으켜 트리피츤 부대에 합류하였다. 트리피츤 부대는 곧 1,400여명의 부대가 되었으며, 자원자가 계속 증가하였다.
당시 니코라예프스크는 일본 육군 제 14사단의 관할이었지만 주력은 하바로프스크에 있었고, 일본의 학살을 경험한 주민들이 대부분 볼셰비키 편으로 돌아섰고, 하바로프스크와 니항간의 교통은 볼셰비키계열의 파르티잔(빨찌산) 활동으로 이미 1919년 말 무렵부터 거의 통행이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최근 일본 일부가 주장하는 트리피츤 부대의 규모는 약 4,300여명(러시아계 파르티잔 3,000여명, 조선인 1,000여명, 중국인 300명 정도)이고, 일제시대 일본군 참모본부(参謀本部)가 편찬한 西伯利 出兵史에서는 조선인(朝鮮人) 400~500여명, 중국인 900여명 정도라고 한다. 1960년대 한국의 이지택의 진술이 일본에서는 사실로 간주되어 조선인 파르티잔이 1,000여명이라고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오늘날 공개되는 러시아측 기록은 조선인 부대중 군사교육을 받았던 사람은 소수이며 총 조선인 부대는 대략 400여명 정도로 본다. 그들중 상당수가 소총으로 무장하였다. |
1919년 12월 일본군과 중국군의 중립선언
1919년 12월초부터 니항 주변에 트리피츤을 중심으로 하는 볼셰비키(파르티잔)가 출현하자, 니항 시내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과 중국 북경정부 소속의 강방함대는 즉시 중립을 선언하였다.
트리피츤의 파르티잔 부대는 투항하고 도시를 넘길 것을 요구하였다.
(※ 당시 니항에 도착한 중국 강방함대는 북경정부 소속이었으며, 당시 장작림 등의 악명 높은 친일파가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 봉천의 친일마적 소속이 아니었다)
1920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페트라파블로프스크가 백파인 콜차크 군으로부터 해방되었다.
(※ 1919년 1월경 인구조사 : 1920년 니항지역의 등록 인구는 대략 겨울에는 1만 2천여명이고 여름에는 최대 2만 5천여명으로 추정되며, 일본인은 러일전쟁 이전부터 아무르강 하류의 어업 중심지인 니항에서 상업, 어업 등에 종사하면서 살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의 혼란으로 1918년경에만 물가가 10배 이상 급등하자, 극동의 러시아인들은 루블화보다 자체발행지폐, 금화, 보석, 일본돈, 달러, 파운드, 중국돈으로 환전해서 가지려고 하는 경향이 더욱 증가하였다.
1920년 니항에는 약 2,107개의 건물이 등록되어 있었으며 그중 1,200여개 정도는 주거용이었며, 17개는 석재건물이었으나 대다수는 나무로 대충 건축된 건물이었다.)
니항사건 당시의 총 니항시 주변의 거주인원은 내전을 피해온 사람, 결빙으로 체류하게 된 영국인 등 외국인으로 인하여 인구수는 자료마다 다르다. 대략 그중 중국인 2,300명 이상, 일본인은 군인 포함 총 731명 ~ 900여명 정도, 고려인은 약 916명 정도, 그 외의 시베리아 부족도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실제 거주 고려인은 적군에 협조한 박일리야(박윤천, 朴允天, Пак Илья Харитонович) 부대 등을 포함하면 더 많은 수였다.
다만 니항사건이 전개된 니항 도회지역만을 봤을 때 거주자수는 러시아계 6천여명, 백군 300 ~ 500여명, 일본군 415명, 일본계 거류민 500여명 정도를 합한 7천여명으로 러시아에서 주장하기도 한다.
니항 시내에서 러시아 루블화는 가치를 상실하여, 러시아인끼리의 거래에서도 루블화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며 금화, 자체발행지폐, 보석, 일본돈인 엔화, 중국돈, 달러화, 물물교환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자 일본인 거주자의 상업은 내전기에도 위축되지 않고 있었다.
일본군까지 니항에 주둔하여 정치적 안정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1920년 1월 23일 파르티잔 부대의 니항 해방 시작
1920년 1월경 이르쿠츠크에서는 러시아 중앙정부(레닌정부) 등에 의해서 일본군과 볼셰비키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극동지역에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는 방향을 제시하였다.
수년간의 내전으로 러시아내에서도 빠른 내전 종식을 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1월 20일 트리피츤을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들은 니항 우측으로 약 13킬로미터 떨어진 츠니르라흐(Чныррах) 요새를 차단하고 니항의 포위를 완료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파군은 약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트리피츤 부대는 니항 외곽의 마을, 광산 등에서 수많은 지원자가 합류하여 수천명(약 3천명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대략 5개 연대의 병력이 편성되었다.
1920. 2. 29. 니항 해방 당시 고려인(한국인) 사할린 의용대 구성 | 주요 인물 |
박일리야의 주요 지지세력 | 박일리야 등 300여명 이상 (거의 모든 남성들이 니항 방어에 동원됨) |
니항(니콜라예프스크) 해방에 참여한 부대 | 박일리야, 류소심, 임호, 고명수, 김완욱, 손병렬(혹은 송병렬), 김학, 김제문, 채국성, 이다물, 이와실리, 최진일, 연지영(혹은 연지언, 혹은 엄지영 : 류소심의 사위), 리흥진(ЛИ ХУН ЧИН, 니항에서 전사), 허재녕(한국계 추정, ХЕТТЕНЕН) |
박일리야 장군에 협조했으나 반대로 돌아선 인물들 (박일리야 측은 박병길이 일본군의 니항 침략시 백파와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고 주장) | 박병길, 이지택(리지택), 김낙훈, 김낙현(김학현) 등 약 100여명 미만. ※이지택(리지택), 김낙훈, 김낙현(김학현) 등이 니항사건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며, 박일리야에 대해서는 매도하는 주장을 함. |
일본군과 일본거류민 무장세력은 800~900여명, 일본군에 협조하는 백군은 300~500여명이 니항에 있었으면, 그들은 니항의 부르조아 등으로부터 자원 입대자를 보충할 수 있었다.
(※ 이 책에서는 1920년 1월의 니항 일대 등록 인구수를 대략 1만 2천여명으로 추정한다.)
비교적 정확한 수는 중국 군인으로 중국 강방함대는 4척에서~5척의 군함과 중국군 234여명이 당시 니항에 있었다.
파르티잔 부대의 공격이 있자, 1월 24일과 26일, 니항 점령 일본군 미야케(三宅) 해군 소좌와 부영사가 각각 해군 군령부장 및 외무 장관에게 육전대(해병대)의 파견을 요청하는 무선을 보냈고 일본 정부와 일본군에선 이들을 구조하기 위한 병력의 파견 검토가 시작되었다.
한편, 1월 24일, 니콜라예프스크를 완전히 함락시키기 위해 약 3,000여명으로 구성된 러시아 혁명세력(적군) 사령관 트리피츤(Тряпицын, Яков Иванович)은 일본군에 사절을 보내 도시의 양도를 요구했지만, 일본군 수비 대장은 이를 무시하고 백군에게 사절의 신병을 인계하였고 백군은 인수받은 사절을 즉각 처형하였다.
아무런 응답을 듣지 못하자 적군(赤軍)은 일단 도시를 정찰 해보기로 결정했고, 1월 28일, 적군의 정찰병 8명이 니항 입구, 도시에서 약 13km 정도 떨어진 소수의 일본군 수비대가 주둔하고 도시를 관측할 수 있는 츠니르라흐(Чныррах)요새 인근 산기슭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대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1월 29일경 요새와 니항간의 통신용 전선이 절단되었다.
트리피츤 부대에는 류소심(혹은 유소심, 유조심), 박일리야 등 200여명의 한국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 대부분의 러시아측 기록은 박일리야가 니항 해방에 가담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 1920년 2월 4일 하바로프스크에 있던 일본군 상급부대 사령관이 러시아 내전에서 중립을 선언하였다. 이미 시베리아의 콜차크 정권은 붕괴되었고, 내전에서의 볼셰비키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어제까지 콜차크와 함께 동시베리아 지역에서 학살과 괴뢰정권 수립에 획책하던 일본군이 철수를 하지 않고, 갑자기 중립을 선언한 것이다.)
니항에서 대치가 계속되던 2월 4일경, 일본 육군 제 14사단장 시라미즈아와(白水淡) 중장에게서 니항 수비대에 적이 먼저 공격 하지 않는 한, 선제공격을 금한다는 새로운 무선 명령이 내려졌고, 현지 주둔 일본군은 소수의 병력으로는 도시를 둘러싼 방어선 전체를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다음날인 2월 5일, 200여명의 일본군 등이 츠니르라흐 요새를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2월 6일 저녁까지 츠니르라흐 요새 전체를 볼셰비키가 장악하였다.
2월 7일경 일본군이 주장하기로는 츠니르라흐 요새를 장악한 볼셰비키가 일본 해군 무선전신소를 포격하였다.
1920년 2월 12일경 니항의 일본 해군은 무선 전신소(※ 군사용 무선 전신소는 니항 외곽 츠니르라흐 요새 인근에 지어져 있었으며 높이 약 35미터의 탑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것을 일본군이 점령하여 장거리 무선통신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1918년 니항 점령후 일본군은 무선 송수신소의 일부 장비를 현대적으로 교체하였다)를 파괴하였고 니항의 일본군과 외부와의 연락망은 모두 차단되었고 무선 단절 직전의 마지막 교신으로 사태의 위급함을 파악하게 된 일본 육군은 당장 니항에 대한 증원을 검토했지만, 인근에 주둔한 모든 일본군 지휘관들이 현지 볼셰비키(파르티잔)의 준동으로 빼 줄 병력이 부족해 본토에서 증원 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1920년 2월 7일 이르쿠츠크에서 백파(백군)의 지도자였던 콜차크가 살해되었다.
누가 봐도 러시아 내전은 공산주의(볼셰비키, 적군)의 승리로 가고 있었다.
미국, 영국, 중국 등 시베리아 간섭 연합군들은 이제 서둘러 철수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의 시베리아 침략의 목표는 영토 확장에 있다보니, 학살을 일삼다가 콜차크 사망후 판세가 불리해지자 혼자 중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또 공격을 감행하여 1920년 3월 12일 니항에서부터 시작하여 볼셰비키와 이에 동조하는 고려인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였다.)
2월 13일, 일본 육군은 홋카이도에 주둔한 제 7사단에서 증원 부대를 차출하여 증파하기로 결정하였지만, 이 시기 일본 해군이 사할린섬 북부의 알렉산드라프스크(Александровск)에서의 파르티잔 준동에 대처하기 위해 전함 미카사(三笠)와 쇄빙선 미시마(見島)를 보내본 결과, 니코라예프스크는 유빙에 완전히 차단되어 함의 접근과 상륙이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받았고 결국 증원 병력의 파견은 연기되고 만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니항의 러시아인 시장과 지방의회 대표들은 일본군에게 보내는 트리피츤의 서신을 검토하고 시민의 안전과 도시의 안전보장을 조건으로 적군과 협상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적군 측으로부터 시민의 안전과 일본군 및 일본거류민에 대한 안전을 보장한다는 전갈이 있었지만, 백군(白軍)에 대한 처우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협상에 긍정적인 시민 대표 측과는 달리 시내에 주둔한 백군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했고, 이제 최종적인 결정은 일본군의 판단에 맡겨지게 되었다.
오늘날 일본측 주장에 따르면 2월 23일, 볼셰비키(적군, 공산주의자, 트리피츤부대)의 무선 통신을 통해 일본 육군 제 14사단장 시라미즈아와(白水淡) 중장에게서 니항 일본군 수비대장 이시카와(石川光儀) 소좌 앞으로 “적군 부대가 일본 거류민에게 해를 가하거나 일본군에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 한, 지금까지의 경위에 구애받지 않고 평화적 해결에 만전을 기하라”는 행동 지시가 도착했다.
오늘날 1920년 3월 12일 니항에서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우발적이었거나 트피피츤의 학살을 견디다 못해 한 것이라고 일본은 말하지만,
3월 12일 이전에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는 증거는 제시조차 못했다. 니항에서 중립선언후 갑자기 기습공격하는 것은 러시아내전의 평화적 해결이 아니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시베리아, 사할린섬 북부, 동청철도(중동철도), 만주를 장악하겠다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 전술에서 일어난 것이다.
1920년 2월 28일경 일본군과 파르티잔의 휴전
니항을 포위한 볼셰비키는 2월 25일 경고 포격을 가하였다. 곧 도시에 여러 개의 백기가 게양되었다. 일본군과 트피피츤 부대의 회담이 시작되었다. 일본측 기록에는 파르티잔을 통하여 일본군 사단장의 지시를 받은 일본군은 2월 26일부터 휴전 협상에 들어가 2월 28일에는 적군 부대와 합의를 하였는데,
합의의 대체적인 골자는 일본군과 적군 양군이 도시의 치안을 유지하며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하는 것이었으나, 문제는 시내에 남아있던 백군의 처리에 대한 것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양측이 주장하는 바가 달랐다.
이때 일본군은 적군 정부의 이념에 동의하지 않는 백군 병사는 일본군과 일본 영사관의 보호를 받으며, 해빙과 함께 출국 할 권리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적군은 거절했고, 어쩔 수 없이 일본군은 이를 제외한 합의에만 도달하기에 이른다.
니항 주둔 일본군 지휘부의 요구조건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1. 일본군 시라미즈아와 중장의 선언을 엄격히 준수한다. 2. 모든 포병과 무기를 일본 사령부에 넘긴다. 3. 도시에 들어가는 파르티잔의 수를 제한한다. 4. 볼셰비키가 체포한 일본인과 러시아인 모든 포로들을 석방한다. 5. 하바로프스크와 니항 츠니르라흐 요새 사이의 전신 및 우편 통신을 복원하고 특정 시간의 무선 통신을 니항 일본 사령부에 보내준다 6.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발생한 손실을 보상한다. 7. 일본군 시라미즈아와 중장의 선포에도 불구하고 츠니르라흐 요새 총격은 왜 행해 졌는가. 8. 왜 도시에 경고 없이 발포하였는가 9. 볼셰비키 부내든 어떤 순서로 도시에 들어가고 새로운 정부를 만들고 싶습니까? 10. 개인, 주택, 재산, 공무원, 공무원, 군인, 정부 기관의 모든 시민 및 직원의 완전한 불가침을 요구한다. 11. 과거의 완전한 망각을 요구한다. 12. 볼셰비키 니항 정부의 견해에 찬성하지 않는 모든 장교 및 군인은 일본 사령관 및 영사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며, 해빙되면 방해 없이 떠날 수 있고, 니항을 떠날 때까지 제복을 입을 수있는 권리가 있다. 13.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이 일본군의 보호를 받고 자유롭게 니항을 떠날 권리가 있고, 새 정부에 협조하지 않는 모든 시민들에게 적대적 행위를 하지 말 것 14. 적대 행위가 재개되는 경우, 정치적 투쟁에 참여하지 않는 모든 여성과 어린이는 자유롭게 도시를 떠날 수 있는 권리가 허용되어야합니다. 작성자 : 1920년 2월 26일. 이시카와 세이가 소좌(소령) |
일본군의 요구조건에 대한 볼셰비키(트리피츤 부대)의 답변은 대략 아래와 같다.
1. 우리는 시라미즈아와 중장 선언문에 명시된 내용을 엄격히 준수 할 것을 약속합니다. 2. 일본군의 중립성 및 국제 영토법 준수는 선언문 1항에 근거하여 허용되지 않는다. 3. 제 4항과 관련하여 상대방이 위반하지 않는 한 국제법을 항상 준수함을 선언한다. 5. 일반적으로 주민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러시아와 시베리아 영토 전역에 우편 및 전신 통신이 존재한다. 일본의 무선 송신 명령 요건은 선언 1항의 첫 부분을 위반하는 것이다. 6. 기존 국제법에 근거하여 질서가 성립된 후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보상을 제공해야합니다. 7. 및 8. 백군과 일본군이 국제법을 위반하고 파르티잔 사절을 살해한 것을 경고한다. 9. 새로운 니항 정부를 구성할 의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적군의 진입 순서는 협상 결과에 따라 달라집니다. 10, 11, 12 및 13. 러시아(소련) 인민위원회의 법령은 이러한 점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습니다. 14. 답변은 추가 협상의 결과에 달려 있습니다. 작성자 : 파르티잔 사령관 트리피츤, 참모장 나우모프(Наумов) 등 |
일본군과 볼셰비키들의 협상결과. 1920년 2월 28일 니항 시민 대표단과 적군 대표가 합의 문서에 서명했고, 백군의 사령관 메드베데프 대령은 이날 밤, 일본군 본부를 방문하여 감사의 말을 전한 이후 집에 돌아가 자살했으며 참모장 스레즈킨과 장교 2명도 그의 뒤를 따라 자살했다고 한다.
1920년 2월 28일 일본군과 볼셰비키간의 평화조약 합의문서의 대략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합의문 1920 년 2 월 28 일. 니항 일본 사령부의 대표자와 볼셰비키 대표자(트리피츤 등)는 다음 조건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적군 대표가 제시한 다음 요구 사항을 무조건 이행합니다. 1. 일본군 사령부 시라미즈아와 중장 선언의 무조건 이행. 2. 니항시의 백군 무장부대 완전히 해체하고 모든 무기와 장비를 적군에게 넘긴다. 3. 볼셰비키가 도시에 들어가기 전의 일본군의 지위는 볼셰비키가 도시에 들어가도 유지된다. 4. 위의 사항을 이행하면 일본군은 모든 백군을 볼셰비키에게 넘겨주고 지정된 일본군 주둔지에 머물러야 합니다. 일본군 주둔지는 공동으로 협의후 해결한다. 니항 전선의 적군 대표들은 일본군 사령부의 요구조건 조항에 대한 가능하다고 답변한 사항을 이행할 것을 약속합니다. 양측은 이 조약을 정확하고 파괴할 수 없도록 이행할 것을 약속하며 서명합니다. 서명자 : 일본군 대표들 볼셰비키 대표들 (트리피츤 등) 니항 시민 자치 단체 대표들 백파 군대 대표 니항 지역 노동 조합 대표 |
1920년 2월 29일 파르티잔의 니콜라예프스크 해방
1920년 2월 29일(2월 28일 해방되었다는 자료도 있다) 오전 10시경 볼셰비키(적군, 공산주의자, 파르티잔)가 니항 시내에 진입하였다.
볼셰비키가 주력이지만 이들 중에는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 혁명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여 도시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과 백군을 무장 해제시키기를 원했다.
도시의 거의 모든 주민들은 혁명적 구호가 새겨져 있는 붉은 깃발과 현수막을 들고 볼셰비키 군대를 환영했다.
트리피츤은 말을 타고 들어왔으며, 트리피츤 부대는 부대를 이루어 줄을 이루어 질서정연하고 엄숙하게 도시를 행진했다. 무질서한 약탈자라고 생각하는 니항 주민은 없었다.
특히 노동자 계급 주민들과 고려인들은 볼셰비키의 입성을 진정 환영하였다.
볼셰비키가 니항을 쉽게 해방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니항 주민의 열렬한 환영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수백명 이상의 고려인이 니항에 거주하고 있었고, 볼셰비키 군대에는 유소심, 박일리야(박윤천)를 중심으로 최소 수백여명 이상의 고려인이 참여하고 있었다.
니항의 고려인에게 니항 해방은 곧 3·1운동과 마찬가지인 민족해방이었다.
곧이어 러시아 전역에서 평화적인 니항 해방을 축하하는 전보와 온갖 종류의 칭송이 쏟아졌다.
그러나 니항에는 최소 731명에서 900여명에 이르는 일본군과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숨어있는 백군과 백군 지지들도 수백명에 달했다.
그들은 과거 일본 천황에게 볼셰비키 타도를 청원하였고, 일본군이 니항을 침략하자 일본에 협조해 볼셰비키와 동조자들을 죽였다.
그러나 그들(백파)도 볼셰비키 환영행사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군들은 볼셰비키들에게 우정, 호기심, 예의를 갖추고 대했다. 일본 장교와 병사들은 양복과 외투에 붉은 리본을 착용하여 볼셰비키에 대한 호감을 분명히 표시하였다. 일본군 장교들은 볼셰비키 지휘부(트리피츤 등)의 단골손님이 되어 자주 만찬을 하고, 가끔씩 함께 같은 장소에서 취침하기도 하였다.
일본군은 무장상태로 니항 시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식료품 배달 등 일본인에 대한 특권이 그대로 인정되었다. 일본인들은 모두 매우 친절하였다. 심지어 일본인과 볼셰비키의 평화를 위한 가부키 공연도 상연하였다. 거의 매일 일본군 장교들이 볼셰비키 지휘소를 방문하여 평화조약에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리고 일본군들은 트리피츤의 리더쉽을 칭송하였다.
일본군은 아무르강 항해가 가능해져 니항을 떠나기 전까지 평화롭게 공존하기로 맹세하였다.
일본군과의 2주간의 평화가 계속되자 니항을 해방시켰던 파르티잔 연대중 전투력이 뛰어난 부대가 사할린섬 북부로 이동되었다. 니항을 해방시킨 파르티잔 지도자중 한명은 사할린섬 북부 볼셰비키군대의 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트리피츤에 대한 일본측의 악의적은 모독은 많지만, 트피피츤의 조카(Наталья Михайловна Герасименко)의 증언에 따르면 트리피츤의 적대세력(일본군, 백군 등)은 니항 해방후 트리피츤은 “그의 애인(레비제바)을 위해서 우유 목욕을 마련했다, 따라서 니항 시민들은 우유를 약탈당했다.”고 트리피츤을 무고하였지만,
트리피츤의 조카는 “실제로는 부상당한 파르티잔과 고아원들의 아이들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고 증언하였다.
이러한 부분은 트리피츤이 누명을 쓴 것이 분명해 보인다. 심지어 트리피츤이 “고아원을 보내라”고 전보 보낸 것을 “고아원을 독살하라”고 지시했다는 유언비어도 있었다.
극심한 추위와 러시아 대기근에 따른 식량부족에 시달렸던 파르티잔들은 2월 29일, 혁명 집행위원회를 개최, 병영과 빈집 등 숙식장소 확보, 백군 병사를 비롯하여 자산가 계급에서부터 주택과 물품 징발을 시작하였다.
일본 침략군에 의존해 상권, 어업권, 유곽(가라유키상 성매매업소) 등 경제권의 상당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인 거류민과 백파들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기 시작했다.
김낙현이 1967년에 쓴 수기에 따르면, 당시 니항을 점령한 파르티잔들 중 고려인 파르티잔 부대의 총지휘관은 박일리야였으며, 고려인 파르티잔 연합부대의 총인원수는 700~750명에 달하여, 니항 점령후 전부 병영에 있지 못하고 몰수한 민가에 분산 배치되었다고 한다.
(※ 오늘날 니항해방에서의 고려인 파르티잔의 수는 자료마다 다르기 때문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수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아마 니항 해방을 니항 거주 고려인 중 일제 밀정과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환영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리고 일본군의 재공격을 앞두고는 거의 모든 주민이 도시 방어에 동원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대다수는 소총으로 무장하지 못했습니다.)
니항 사건이후 군사상 패전사실은 숨기고 일본거류 민간인과 러시아계 민간인 학살이라고 오늘날까지 주장하는 일본의 자료에 따르면
“트리피츤이 이끄는 파르티잔들은 2월 28일경 니항 해방 직후부터 백군과 제정 러시아 군인과 관료 출신은 물론 민간인까지 총 수천여명을 체포하였고, 그 중 200에서 ~ 400여명을 처형하였으며 국유화에 의한 몰수라는 미명하에 폭력과 약탈을 자행했기에, 당시 도시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정치적 중립은 지키더라도, 치안유지에 책임이 있는 이상, 도시 시민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에 참견한다는 자세였으므로 이에 대한 항의가 빗발쳤으며 그럴 때마다 적군 측은 이는 내정에 관한 문제이므로 외국군은 참견하지 말라고 하였다” |
고 한다.
그러면서 일제와 백파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 주로 구트만의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오늘날 러시아에서도 A.Y.구트만[이명 : 굿맨]의 책에 나오는 수십여명이 죽은 사실은 인정한다.)
“1920년 3월 11일까지 니항의 교도소와 기타 구금 장소는 500명에서 700명까지 체포된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끔찍한 고문으로 살해되었고, 감옥은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은 모두 채웠졌습니다. 살해되고 불구가 된 사람들은 아무르강 얼음속으로 버려졌다. 체포, 수색, 재산 몰수, 살인, 강간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볼셰비키들은 칼과 도끼로 자르고, 강간하고, 강탈하고, 망치로 살해하여, 여성의 배를 찢고, 아기의 두개골을 부셨습니다.”......(일본으로 도주한) 구트만의 책 하략......
그러나 3월 12일 일본군의 파르티잔에 대한 기습공격전 이전에 민간인 수천명을 체포해 구금할 시설도 없었으며 그것을 목격한 니항 주민은 없었다.
오직 일본인과 니항사건후 일본으로 도망쳤던 러시아인과 친일파들만이 그러한 만행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최근에는 미국 하와이 대학교 교수였던 존 J 스테판도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의 대표적인 국욕사건으로 선전된 니항사건은 일본과 러시아계 친일파들이 많은 기록을 남겼고, 사할린섬의 유전과 광산, 어장 등은 제정러시아 시대부터 국제적 기업들의 이권과 관련된 곳이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시베리아 침략시 먼저 사할린섬 북부의 유전을 점령하였고, 파르티잔의 니항 해방 이후에도 사할린섬 북부의 파르티잔을 공격한 후 나중에 니항을 재공격하였으며, 사할린섬 북부 유전지대는 1944년까지 점유하였다.
오늘날 일본에서 자주 인용되며 2020년에 책이 다시 출판된 구트만(이명 굿맨 : 1889~1950, Гутман Анатолий Яковлевич)은 러시아 내전시기 볼셰비키를 타도하기 위해, 니항 사건 등을 볼셰비키의 일방적 학살로 조작하는 글을 쓰는데 앞장선 자이다.
구트만은 「1920. 3. 12. 일의 일본군의 기습 공격은 니콜라예프스크의 볼셰비키를 전멸시키려는 것이 아니었고 단순히 무장해제를 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파르티잔 부대가 주민 1만여명을 학살했다」는 등의 허위 주장을 하였고, 파르티잔에 가담한 조선인들은 친일파 1~2명 정도를 처형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니항 해방 직후 시기적으로도 통일전선을 일단 중요시 하는 공산주의 특성상 니항 해방후 바로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은 일본 특유의 조작이고, 일본군의 기습공격이 실패한 후 식량분배에 반대하였고 일본군의 공격에 동참하였던 민간인 처형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
일본군의 공격 이전에 니콜라예프스크의 혁명위원회는 체포되었던 사람들중 죄가 없거나 경미한 사람들을 3월 12일 소비에트 회의를 기념하여 3월 12일 오후에 석방될 예정이었다.
백군이 수감되었던 감옥의 경비대들도 교체될 예정이었으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다.
1920년 3월 9일 일본군의 츠니르라흐 요새 무선송수신소 사용허가
트리피츤은 일본군을 너무 믿었다.
일본군은 트리피츤 부대의 허가하에 츠니르라흐 요새의 무선 송수신소를 사용할 수 있었다.
처음에 일본군은 하바로프스크와 러시아어를 사용해서 말했지만, 3월 9일에는 암호화된 무선 전보를 사용하였다. 이 당시 무선 전보들은 톰스크의 기록보관소에 있다고 한다.
아마 일본군의 3월 12일 공격은 하바로프스크에 있었던 일본군 상급부대에서 무선으로 승인이 되었을 것이다.
3월 10일에는 일본군 장교의 제안으로 본부에서 연회가 열려, 일본군 최고 지휘관, 영사, 통역, 여러 장교가 참석하여 다음날 아침까지 잔치가 개최되었다.
3월 11일 점식 식사후 트리피츤은 츠니르라흐 요새로 떠나 저녁 10시에 니항으로 돌아왔다.
3월 12일에는 사할린주의 소비에트 회의가 주도인 니항에서 예정되어 있었다.
사할린주의 주요 볼셰비키 지도층의 참석은 당연한 것이었다.
트리피츤이 그러한 중요한 회의 전날 일본군과 술을 마시고 만취상태였다는 것 역시 일본측과 반대세력의 악의적인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트리피츤은 나중에 3월 12일 밤 자신은 만취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술도 먹지 않았다고 말했다. 트리피츤이 3월 12일 일본군의 공격을 예상하지 못한 것만은 분명하다. 공격전 양측은 합의를 완전히 지키고 있었다.
니항의 볼셰비키는 일본군의 공격을 사전에 알아차릴 수 없었다.
1920년 3월 12일 일본군과 일본거류민의 반자이 야간 기습 공격
오늘날 일본측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도시를 완전 장악한 적군 사령관 트리피츤은 일본군 수비대 병력을 무장해제하기로 결심하였고, 3월 11일 야간쯤, 그는 반혁명에 의한 희생자 장례식을 3월 12일에 개최할 예정이므로 일본군 지휘관들은 이 행사에 참석할 것은 물론, 그날 정오까지 일본군이 보유한 모든 무기를 넘기고 무장을 해제하라」고 일본군 사령부에 통보하였다는 것이다.
일본측의 주장은 한마디로 말하면 트리피츤이 평화조약을 모두 어겼다이다.
그러나 일본군과 볼셰비키가 평화조약을 준수했다는 트리피츤 쪽 주장이 설득력이 더 있다. 트리피츤 부대가 요구한 것은 「니항 일본군의 무장해제가 아닌 하바로프스크 전선의 볼셰비키들을 위해서 니콜라예프스크의 무장 해제된 백군이 보유했던 300~500정의 소총을 등을 요청한 것이였으며, 3월 12일까지 답변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평화조약에는 처음부터 볼셰비키의 적이었던 백파의 무장허락이 전혀 없었다.
백군의 무장 해제된 무기의 양도를 요청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볼셰비키가 평화조약을 일방적으로 위반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볼셰비키가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일본인에 적대적인 고려인, 중국인 등을 모아 부대를 편성하였다는 부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러시아령 연해주 지역에서의 중국인들은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로 시베리아 주둔 러시아군이 독일과의 전쟁을 위해 유럽쪽으로 동원되고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광범위하게 러시아 영토내로 이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1차대전 종전 무렵에는 약 50만여명 이상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러시아 영토내에 있었다고 한다.
니항 사건 당시 참여한 고려인 파르티잔들도 일본 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해서 가담한 것이며 일본군과의 타협을 위해서라고 주장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볼셰비키나 트리피츤 측의 주장처럼 소수의 일본 간첩들이 볼셰비키에 같은 편인 것처럼 숨어서 침투한 것도 사실이다.)
고려인 파르티잔 부대는 니항사건 종료 무렵에는 거의 모든 고려인 남성들이 니콜라예프스크 방어에 편입되어 대략 400여명에 달하게 됩니다.
일본 측이 볼셰비키로부터 평화협정을 위반한 무장해제를 요구받았다고 주장한 다음날인 3월 12일 현지시간 새벽 3시경, 일본군은 목조로 지어진 볼셰비키 사령부(본부)를 기습했고 파르티잔 보초들은 살해되었다.
일본군은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공격하고 볼셰비키(트리피츤 부대) 사령부에 불을 질렀다. 일본군은 최소 20채 이상의 볼셰비키가 입주해 있던 건물들을 불태웠다. 트리피츤은 다리에 총격을 2번 당하여 동료들에게 자신을 쏴달라고 할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
트리피츤의 참모장 나우모프는 일본군의 공격으로 본부 건물에서 전사했다.
11명의 파르티잔 간부가 볼셰비키 본부에서 공격과 화재로 죽었다. 파르티잔 지도부가 본부를 떠나 외곽으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포위한 일본군으로부터의 사격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
기습공격으로 일본군은 니항시내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수일간의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파르티잔 전사자도 120명에서~141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일본군에 의한 볼셰비키 부상자도 최소 250~500여명이었다.
니항을 점령한 일본군의 3월 12일 기습공격은 중립선언을 파기하고 동시베리아 전역에서 볼셰비키를 대대적으로 기습공격하기 위한 계획의 사전 연습에서 비롯되었다고 오늘날 러시아가 주장한다.
당시 니항 주둔 일본군이 상급부대의 지시를 받고 볼셰비키들을 전멸시키려고 기습 공격을 했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
당시 일본군의 무장병력은 이시카와(石川正雅) 소좌의 육군 병력 290여명에 해군 병력, 예비군·자경단원을 합쳐 약 400여명 이상이었고 이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 파르티잔 부대의 사령부와 경비대가 숙소로 쓰던 건물, 감옥을 각각 공격하였으며 소수의 해군 병력만이 영사관에 남았다.
이 과정에서 무장이 가능한 유곽의 일본인 여성까지 포함한 모든 일본계 민간인과 자경단원이 참여하였고, 시내에 숨죽이고 있던 백파들이 중립선언 이후 파르티잔 공격에 동참하였기 때문에, 초기 습격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병력 수에 있어 열세인 일본군은 이틀에 걸친 시가전에서 점차 소모되어갔고 지휘관 중 볼셰비키 사령부를 노렸던 일본군 대대장 이시카와 소좌가 전사했으며 과반수 이상을 잃은 일본군은 산개하여 건물에 숨어들어 농성전을 벌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군은 점차 열세에 몰렸고, 3월 13일경에는 아무르 강에 정박해있던 중국군의 포함 이수(利綏) 등도 파르티잔 측에 가담, 일본군의 영사관 건물 주변에 항복 권유용 포격을 개시하였고, 츠니르라흐 요새에서 가져온 대포의 포격에 영사관에서 북쪽으로 떨어져 있던 일본군 병영건물의 일부가 파괴되었으며
파르티잔 부대가 경비하던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백파 장교들을 구조하려다가 실패하고 살아남은 고토(後藤) 대위 휘하의 생존 병력들이 이 무렵 중국 군함에 지원요청을 했다가 거절당하자 중국 군함을 공격했다가 전멸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때 중국 군함의 포격지점이 일본군 병영, 일본 영사관이었는지 아니면, 단순 경고용이나 항복 권유용 포격만 한 것인지는 일본군, 파르티잔, 고려인들의 주장이 많이 다릅니다.
또, 츠니르라흐 요새의 구식 대포가 어느 정도 활약을 하였는지는지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처음에는 주요 지점들을 점령하였으나, 니항 외부에서 증원된 파르티잔 병력에 의해 일본군과 백파군인 등은 차례차례 진압되었고 마침내 3월 14일 새벽경, 파르티잔 부대는 일본군의 마지막 거점인 일본 영사관을 포위, 이시다 토라마츠 영사대리 부영사를 생포하기 위해 항복을 권유하였습니다.
※근래 확인한 바 중국 군함이 일본영사관 건물에 직접 포격을 가하지는 않았고, 항복권유용 위협 포격을 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이시다 토라마츠(石田虎松) 영사대리 부영사 가족의 사망
파르티잔 부대가 시내의 일본군 잔존 병력을 제압하고 일본 영사관을 포위하고 항복을 권유하자
일본측 주장으로는 영사관의 이시다 토라마츠(石田) 영사대리 부영사는 영사관 앞 계단에 나와 “영사관과 거주민은 국제법에 의해 보호되며 영사관은 치외법권지대”라고 설득했지만 이미 일본군과 거주민의 기습공격으로 이성을 잃어버린 적군 병사들의 사격으로 영사는 부상을 입고 영사관 내부로 들어갔다고 한다.
일본측 주장에 따르면 일본영사관 내에서 집단자결을 시도해 화재가 발생하였고, 영사관을 방어하던 해군 무선대, 이시카와(石川光儀) 소좌 및 미야케(三宅駸吾) 소좌의 지휘를 받던 일본군 잔존병력, 이시다 부영사와 그 가족, 영사관 내에 피신해 있던 일본인들이 모두 사망했다.
※ 일본 영사관 하인의 주장에 따르면 이시다 토라마츠 영사대리 부영사는 처자식을 먼저 죽이고 불을 질러 자살하였다고 합니다. 아마 반자이 기습공격 실패시 일본 거류민들끼리 광기어린 집단 자살을 하기로 이미 결정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일본측 주장에 따르면, 일부 일본군 잔존 병사들이 영사관에서 민간인들과 함께 영사관을 탈출, 아무르 강에 정박해있던 중국 감시선에 도움을 요청하고자 접근하자 이를 자신들에 대한 공격으로 착각한 중국 군함에서 발포하였고, 민간인들이 쓰러지자 일본군 병사들이 중국 함대에 돌격, 전원이 전사하였다고 한다.
(※ 1920년 6월 9일 동아일보 기사 등. 중화민국은 일본과 함께 1차 세계대전 연합군의 일원이었고, 시베리아 간섭도 일본과 연합하여 중화민국 군인도 일부 참여하였다. 일본과 같은 편이었던 중화민국 북경정부 소속 강방함대의 말로는 강방함대는 일본군을 공격한 것이 아니고, 단지 무기대여에 의한 함포사격이었다고 한다.
강방함대는 볼셰비키 편을 든 것이 아니었고 일본군 편을 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무렵 중화민국은 친일파인 장작림(봉천마적) 군벌들과는 달리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것도 방치하였다.)
오늘날 일본에서는 야습에 가담했던 니콜라예프스크의 일본 거류민 대부분이 파르티잔 부대의 항복 권유를 거절하고 집단자살했다고 본다.
니콜라예프스크의 볼셰비키 혁명 위원회는 1920년 3월 14일 (일본군의 공격에 대처하기 위하여) 약탈, 음주, 유언비어 살포를 금지하였다.
3월 14일 니콜라예프스크의 파르티잔 부대는 하바로프스크와 무선통신을 복원할 수 있었다.
하바로프스크 혁명 사령부와 연락하자 하바로프스크의 일본군 사령부가 니항 분쟁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일본군이 처음부터 니콜라예프스크의 이시카와 소령부대와 함께 기습 공격을 계획하였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니콜라예프스크의 파르티잔들은 니콜라예프스크의 상황을 알리고 교전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일본군이 동의하면 유혈사태를 중단하는 데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투는 계속되었다.
결국 하바로프스크 혁명 사령부는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일본군 사령부에게 요청해, 야마다 사령관이 확인한 니항 일본군 잔존자들의 저항을 종식하라는 명령서를 니콜라예프스크의 볼셰비키들에게 보냈다.
일본 영사관이 전소된 후, 생존한 일본군은 수비를 위해 병영에 남아 있던 병력과 시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벗어나 돌아온 약 80여명이었고 당시 일본군 병영으로 피신한 여성을 포함한 민간인 13명 정도가 더 있었으며 아무르 강변의 제 2육군 병원 분원에, 분원장 우치다(内田)와 의무병 8명, 환자 18명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이때 일본군들이 병영에서 농성 중임을 인지한 적군 부대는 일본군 병영을 향하여 야포 공격을 가했고 중국 함대도 이에 가세, 본부 건물은 파괴되었지만, 병영에 틀어박힌 100명 정도의 일본군은 가와모토(河本) 중위의 지휘하에 나흘째 이를 견디고 있었다고 한다.
(※ 일본측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 군함의 함포와 츠니르라흐 요새에서 가져온 대포가 함께 포격을 하였다고 합니다.)
3월 14일경(일본측 주장에 따르면 3월 17일경 저녁) 파르티잔 측에서 전령을 보내와 하바로프스크에 주둔 중이던 제 12여단장 야마다 시로(山田四郎) 소장과 스기노(杉野) 영사의 명의로 발송된 전문을 제시하였고, 여기에는 하바로프스크의 혁명군 사령부와 시베리아 주둔 일본군 사이에 협의를 갖고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원치 않는 충돌이 발생했기에 즉각 이를 중지하도록 러시아 적군과 일본군의 공동 명의로 전투 행위의 중단을 권고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 전문을 받아 본 병영내의 일본군 지휘관 가와모토 중위는 3월 15일경(일본측 주장은 3월 18일경), 여단장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부하들을 설득, 전투 중지를 명령했고 니항 주둔 일본군 최상위 계급자가 된 우치다 육군병원 분원장이 시내 주둔 일본군 전원의 무장 해제를 결정, 민간인을 포함하여 병영에서 농성하던 병력, 그리고 군의관과 의무병 전원이 적군 부대에 의해 체포, 수감되며 니콜라예프스크에서 발생한 일본군 기습공격은 제압되었다.
(※ 러시아 측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이 항복한 것은 3월 15일 12시경이었다고 한다. 러시아 측 기록은 병영에서 항복한 약 132명을 제외한 일본군과 일본거류민은 전멸했다고 한다.
3월 12일 일본군의 공격날짜는 일치하지만, 오늘날 일본측의 기록은 날짜와 희생자 수 등에 있어서 러시아측 기록과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이것은 아마 일본측이 니항사건에 관계된 러시아측 기록을 보지 못한 채 관련 자료를 작성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러시아의 기록은 3일만에 일본군의 공격은 완전 제압되었으며, 일본군과 일본주민 약 900여명중 약 132명만이 생존하였다고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 하바로프스크 혁명위원회는 일본군과 공동으로 니항 지역의 전투 중지 요청을 현지 혁명위원회에 발송함과 동시에 현지의 상황 설명을 요구했고 이에 따라 니항 혁명위원회는 모스크바를 비롯 이르쿠츠크, 치타,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 페트라파블로프스크 등 각지에 장문의 성명서를 타전했다.
이 성명서 내용의 골자는 “니항 볼셰비키 군대의 반격은 일본군에 의한 선제공격에 따라 발생한 피치 못할 한 사건이었으며 평화 협정 체결 이후 붉은 군대에게 반격을 가한 일본군의 배신행위와 범죄의 본성이 명확하게 노출되는 것이다.”라는 것으로, “일본인 거류민 전원이 무장”, “막사에 농성 중인 약 130여명의 일본군이 항복했기에 포로로 사로잡았고 무장한 일본인의 대부분이 전사했다”고 보고하고 있으며 파르티잔 측의 사망자는 50여명, 부상자는 100명 이상으로 서술했다.
(당시에는 파르티잔측도 자신들의 정확한 피해를 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2024년 오늘날 일본의 인터넷과 기록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일본 측에서 니항 혁명위원회의 전문을 처음 접한 곳은 페트라파블로프스크의 일본 영사관으로 이들은 이 전문을 접한 것은 1920년 3월 18일경이 이었으며, 이 때 니콜라예프스크에서 파르티잔 부대의 일본인 거주민의 학살을 알고 1920년 4월 참변을 일으켰다고 거짓말하지만, 니콜라예프스크에서의 백파계 민간인 학살과 반란에 적극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인에 대한 처형이 일어난 것은 1920년 5월부터이다.
3월 21일에는 니콜라예프스크 혁명위원회의 전문이 블라디보스토크 지역 신문에 실렸고 그것을 본 일본 해군 제 5전대 사령관이 해군성에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이상 사태 발생이라는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그러자 일본 외무성에서는 각 방면의 정보를 수집하여 파르티잔에 의한 니항해방이라는 사건이 분명해 지자 조속한 추가 파병이 파견이 결정되었는데
(※ 이미 일본군은 니콜라예프스크의 일본군이 3월 12일 공격을 가할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선 이미 2월에 대기하고 있던 제 7사단에서도 공격부대를 편성, 니항 건너편인 사할린섬 북부의 백파 콜차크 정권과 결합한 일본 석유회사 호쿠 신카이의 직원들을 보호한다는 구실 등으로 알렉산드라프스크(Александровск)항구 일대부터 공격하여 점령하고, 해빙을 기다려 니항 재공격을 준비하였다.
일본 당국은 새로운 정보 수집을 계속함과 동시에 제 7사단에서 보병 1개 연대를 더 빼내어 츠노카즈스케(津野一輔) 소장의 지휘 아래 북부 연해주 파견대라는 공격 부대도 조직하였다.
중화민국 북경정부(북양정부) 강방함대의 역할
러시아측에서는 니항에 있던 중국 강방함대가 일본군을 도와 소총 등을 일본군 쪽에 지원했다고 주장하지만, 대체로 강방함대의 함포사격은 일본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것이 틀림없다.
중국 강방함대(군함 4척에서~5척)가 일본군을 향해 포격을 가한 사건에 대해 1920년 6월, 일본군이 니콜라예프스크 재점령한 후, 유력한 증거로 활용되던 코다(香田) 일병의 일기와 체포된 러시아 적군 병사의 증언을 바탕으로 함포사격 사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6월 8일경, 중국해군 길림흑룡강 방면 사령관 왕숭문(王崇文)이 일본군 제 12여단장 이시카와 지로 소장을 방문, 자기 휘하의 군함들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그 진실이 곧 판명날 것이라 대답했다.
일본군 측의 주장에 따라 중국 군함에 의한 포격이 일본군의 병영 공격과 일본 영사관 잔존 병력 공격에 사용되었는지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중국 측은 이첩(利捷, 구독일 해군 오터)의 함장이던 진발(陣抜)의 증언을 바탕으로 중국 함대의 전투 참여는 인정하지만 직접적인 포격이 아니라 파르티잔군에게 함포를 빌려줬다고 주장했다.
진발의 증언 등에 의하면 중국 함대와 니항의 2,000여명 중국인들은 러시아 백군과 일본군에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니콜라예프스크를 파르티잔이 해방시키면, 그들과 협력 관계를 가지고 싶어 했다.
3월 12일 야간 일본군이 기습하여, 트리피츤 부대쪽에서 일본 영사관을 공격하는 대포 2문을 빌리고 싶다고 하자 함선 강형(江享)의 함장 겸 소함대 영장 진세영(陳世栄, 혹은 陳季良)이 3인치 현측 함포 1문과 다른 감시선 이천(利川) 함에 탑재되어 있던 기관포 1문과 포탄을 빌려줬다고 주장했다.
니항 사건 이후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은 죽었지만, 진세영은 중일전쟁에서 활약하고 해군 상장까지 승진하였다.
일본 정부는 북경의 중화민국 정부에 공동 조사를 제의, 중국측은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고 함포사격을 할 이유가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1920년 9월, 양국의 조사위원(중국측 왕홍연 등, 일본측 화도 영사, 산내 해군대좌, 다문(多門二郎) 육군대좌 등)이 니항에서 중국 함대의 전투 참여를 확인했고 자세한 조사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양국 간에 중국 감시함의 직접 가담 또는 간접 가담 여부에서 사실 인식에 큰 차이가 있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10월 26일, 공동 조사 결과에 따라 북경주재 오바타유키치(小幡酉吉) 공사는 중국 정부에 대해 중국 정부과 중국 감시선 함장의 유감 표명, 관계 장교의 처벌, 이 사건으로 사망한 일본인 유족에 대한 위자료 지불을 요구하였고 중국 정부는 공동 조사 보고서에서 “육상 교전”을 “무기 대여”로 변경하고 보고서와 공문서의 비공개를 조건으로 이를 수락했다고 주장한다.
당시 중화민국 강방함대의 지휘관으로 트리피츤 부대에 무기를 빌려준 진세영은 한 때 철직되어 불이익 처분을 받았지만 이후 이름을 바꾸어 임무에 투입되었으며 문호(文虎)훈장을 수여받고 장령으로 승진했고 나중에는 중국해군 제 1함대 사령관 등의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이렇게 니항에서 트리피츤 부대의 무장 해제에 불복한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전투는 거의 대부분의 일본군이 섬멸되고 생존자가 항복하며 끝나는 듯 하였다.
그러나 한국 독립운동사에 4월 참변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시베리아 침략이 실패로 끝나게 되자 일본군의 연해주일대에서 스스로 한 중립선언을 파기하고 민간인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을 다시 감행하자 다르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고려인 파르티잔 김낙현의 주장에 따르면 러시아 내전에서 일제가 지원했던 백파가 불리해지지자 일본 침략군들은 일본으로 귀환하지 않고 시베리아의 영구점령과 일제의 괴뢰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중립선언을 자기 맘대로 하였다.
그후 동시베리아에서 러시아 볼셰비키와 강화조약을 하겠다고 한 날인 1920년 4월 4일 밤부터 연해주에서 일본군들이 또 배신하고 공격을 개시하여 시베리아의 여러 도시들을 점령하였다는 불안한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의 조직적인 대량학살, 강간, 약탈 소식이 전해져 니항의 파르티잔들은 모두 분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러시아 측에서는 1920년 3월 12일 니항의 일본군 기습공격도 현지 부대의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고, 이미 봄이 오는 시기였으므로 볼셰비키에게 기울어져가는 승리를 뒤집어,
시베리아 점령이라는 본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시범으로 공격을 가한 것이며, 내전에서 중립을 지키는 척했다가 기습했을 때의 볼셰비키측의 반응을 살펴봤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박일리야(=박윤천=朴允天) 장군의 니항사건에서의 역할
(러시아혁명과 1919년 3·1운동 이후) 러시아 거주 고려인들의 활발한 독립투쟁의 성과는 공산주의계 민족해방운동사에 중요하게 기록된 1920년 2월 29일경 니항해방으로 나타나 3월 12일 이후에는 (니항을 무력으로 침략했다가 중립선언후) 기습공격까지 가한 일본군을 전멸시키고 일본 무장 거류민까지 무장 해제시키는데 일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니항사건후 트리피츤 부대의 간부들이 촬영된 사진에는 한국인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모든 일본, 러시아, 중국, 한국의 신문보도까지 일본군과 일본거류민의 피해상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박일리야가 주도한 고려인 파르티잔 부대는 니항사건 당시 주력이 아니었고 트리피츤 휘하의 일부(약 200여명)만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고려인이 니항이 볼셰비키가 해방한 이후에서야 입대후 무기를 지급받은 자도 다수인지라, 큰 역할을 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박일리야의 반대세력이었던 최고려, 오하묵, 김하석, 김낙현(김학현), 리인섭, 이지택 등이 최근 공개된 모든 기록들에서 박일리야가 최고 지휘자로 있던 고려인 공산당계 부대가 니항 사건 당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1920년 5월 2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니항에는 중국계 파르티잔 1천여명, 한국계 파르티잔 700~800여명이 있다고 보도하여 박일리야의 역할이 결코 작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1차 세계대전 연합국으로 참전했던 다수 국가가 러시아 공산혁명후 러시아 내전에 간섭하여 시베리아에 간섭하였으나. 1904년 러일전쟁이후부터 상호 적대감이 있던 일본만이 러시아 영토에 대한 야욕을 또 드러내어 중앙시베리아의 대도회 이르쿠츠크에 이르기까지 백파와 합세해 점령하였으나, 수천킬로미터에 달하는 점령지를 학살과 공포라는 잔악한 수법만으로 결코 관리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결국 러시아 민족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결국 1920년 3월 교통의 요지인 니항의 일본군은 트리피츤이 지휘하는 러시아 파르티잔과 이에 동조한 중국, 고려인 부대의 반격에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이어지는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와 함께 독립군의 승리가 확실하다.
1920년 3월 22일경 니항의 고려인 의용대와 트리피츤 부대의 활동 합의
3월 22일 트리피츤 부대와 고려인 파르티잔 부대간의 합의 내용에 따르면
㉠ 고려인 니항 의용병은 자원하여 활동
㉡ 백군과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고려인 파르티잔부대와 러시아 파르티잔 부대의 이해 일치
㉢ 일본군과의 전투를 위해 고려인부대를 무장
㉣ 고려인 파르티잔은 볼셰비키 지휘하에 둔다
등을 합의하였다.
이에 구성된 니항의 고려인 의용군(파르티잔) 부대는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약 430여명이며 4개의 중대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러시아측 기록에도 일본군과 전투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싸웠다고 한다.
최호림의 기록에 따르면 “니항의 고려인 파르티잔 부대는 다른 부대보다 나은 군복, 무기, 식량을 공급받았다. 그래서 트리피츤은 고려인 병사들의 큰 신망을 받게 되었다.” 고 진술하였다고 한다.
3월 23일에는 혁명위원회는 니항 내에서 주류 판매 및 제조를 금지하였고, 음주도 금지하였다.
3월 27일 모든 수색과 체포는 니항의 경찰권 등을 가진 곳에서 허가를 받고 적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선포되었다.
1920년 4월 1일 희생자를 위한 장례식
4월 1일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희생자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얼어붙은 땅을 파기위해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여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희생자를 위한 무덤을 준비했다.
이 날도 거의 모든 주민들과 중국인, 한국인이 일본군과 백군과 함께 볼셰비키 공격에 협조했다는 누명을 쓰지 않기 위해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장례식에는 현수막이 설치되고 한국계 파르티잔들도 모두 착석하였다. 고려인들도 일부 일본군의 공격으로 전사한 것이다. 12시에 트리피츤이 들것에 실려 도착하였다. 그는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았으며 들것과 썰매를 타야만 하였다.
트리피츤은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약해진 상태였다.
혁명 노래들이 울리는 가운데 연사들은 혁명 희생자를 추모하며, 볼셰비키의 적을 위협하였다.
4월 1일부터 볼셰비키의 신문들이 발행되기 시작했고, 영화상영도 다시 시작되었다.
4월 7일경에는 인민법원 재판소 구성을 위한 선출방법을 논의하였다.
4월 9일경 일본군의 사할린섬 북부인 알렉산드라프스크 공격에 대비하라고 트리피츤이 명령하였다.
일제의 조직적인 고려인 학살과 1920년 연해주 4월 참변
일본은 니항사건에 이어 불리해져만 가는 전세를 뒤집기 위해 1920년 4월 4일부터 또 중립선언을 파기하고 러시아령 연해주의 주요 도시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령에 있던 고려인들도 공격 목표가 되었다.
일제는 1920년 4월 4일부터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하바로프스크, 우수리스크, 이만, 스파스크 등 고려인 거주지역도 습격하였다. 극동의 중요도시중 하나인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의 신한촌의 경우 300여명을 살해했다고 하며, 우수리스크에서는 러시아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최재형 등이 살해되었다.
극동 신문(Красное Знамя (Владивосток))에 나온 기사를 보면
“4월 6일 하바로프스크의 거리는 끔찍했습니다.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사방에 누워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불타고, 포장도로, 보도와 불에 타 버린 건물 사이에 총을 맞고 누워있는 수백명의 부상자들이 피를 흘리고 신음하고 있는데 도와줄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아무도 거리를 나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일본군의 총알이 군인, 민간인, 노인과 어린이를 죽였습니다.”
미국 개입군의 사령관인 윌리엄 그레이브스(William S. Graves, Уильям Сидней Грейвс)는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적대적으로 점령하고 거리에서 무분별한 총격을 가해 인명을 앗아간 것”이라고 증언했다.
훗날 극동공화국 총리가 된 표트르 니키파라프(Пётр Никифоров)는 이렇게 회상했다.
“일본군은 특히 잔혹하게 조선인을 습격했다.”
세르게이 라조(연해주의 파르티잔)의 아내 올가(жена Сергея Лазо Ольга)는 “그들은 한국인 거주지를 포위했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불태웠다”고 회상했다.
하바로프스크에서만 볼셰비키 400명이 사망하고 1,200여명이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일본의 자료에 따르면 8,480명 정도를 무장해제 시켰다고 하지만, 러시아측 자료는 연해주에서 약 7천여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한다.
4월 참변은 3·1운동이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고려인에 대한 일본군의 조직적인 대량학살, 강간, 방화, 약탈 등의 시작으로 니항사건과 청산리 전투 이후인 1920년 10월부터 시작된 간도참변(혹은 훈춘참변, 경신참변)으로 살해된 고려인 수까지 포함하면 최소 수만명을 넘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일본은 또 니항사건의 손해배상을 받는 등 해결을 요구한다며 1920년 4월 22일경 사할린섬 북부도 추가 점령하였다. 콜차크 백파와 결탁하여 사할린섬 북부 유전지대의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도 있었다.
일제와 친일파는 니항의 일본 민간인 학살이 먼저라고 조작
오늘날 일본 일부의 주장에 따르면, 트리피츤의 공산계열에 의한 니콜라예프스크의 러시아 백파계 민간인 학살은 1920년 4월 일본군에 의한 연해주 민간인 학살(4월참변) 이전인 1920년 2월 29일 니항 해방일 혹은 1920년 3월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주장에 따르면 「니콜라예프스크의 파르티잔들은 1920년 3월부터 민가에 무작위로 침입하여 학살을 자행하였는데, 백파에 협조한 혐의가 있는 자들은 아내에서 창기까지 여성은 물론, 아이에게까지도 용서가 없었고 3월 12일부터 3월 16일까지 5일간에 살해된 일본인과 러시아인의 수는 1,500명에 달했으며 러시아인 600명은 대부분 기업가와 지식인층으로 도시에서 가장 존경받던 계층이었다」고 일본측은 주장하고 있다.
물론 당시 현장에 있던 고려인 파르티잔들의 기록은 이런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3월 12일부터 자신들을 공격한 일본군과 백파를 사살한 것은 대체로 전부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니항 주둔 일본군의 외부와의 무선통신은 완전히 차단되었다고 하면서 트리피츤의 민간인 학살을 1920년 4월부터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 일본 본국에서 알았다고 하는 것은 일본 특유의 거짓말이다. 일본인 거류민에 대한 처형이 있었다는 것을 안 것은 니항을 일본군이 재점령한 1920년 6월 이후의 일이며, 동시베리아에서 일본군의 고려인, 러시아인 대량 학살이 일어난 것은 1920년 4월 4일경부터였다.
오히려 니항 주둔 파르티잔들은 일본군의 연해주 민간인 학살 사실을 전해 듣고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포로로 체포하고 있던 일본계와 친일파를 거의 전멸시켰다고 보는 것이 말이 된다.
일본은 줄기차게 오늘날까지도,
「니콜라예프스크에서의 대참사를 알게 된 일본군은 이때까지 유지하던 적군과의 타협적인 태도를 버렸고 1920년 4월 4일 밤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일본군 보초가 외부로부터 사격을 받은 것을 계기로 일본군은 연해주에서 군사 행동을 일으켜 적군의 무장 해제를 요구했고 블라디보스토크 적군 등은 이를 받아들이기도 하였다」고 주장하지만,
니콜라예프스크에서는 중립선언을 스스로 어기고 기습공격에 나섰던 일본군과 무장하여 공격에 동참했던 일본 거류민들만이 주로 사살된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니콜라예프스크에서 트리피츤을 제거하기 위해 중립선언을 어기고 기습공격과 살인을 저지른 일본군과 이에 협조한 거류민만 다수 살해된 상태였음에도 일본군은 이것을 핑계로 1920년 4월부터 대량학살을 시작한 것이다.
일본의 시베리아 침략사를 보면 니항사건 이전인 1918년 시베리아 침략 초기부터 체코군단 구출 및 러시아내전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만을 점령하겠다는 다른 간섭국(미국, 영국, 프랑스, 이태리, 체코, 폴란드, 중화민국, 그리스 등)과의 약속을 어기고, 니항, 하바로프스크, 치타, 이르쿠츠크, 스파스크, 이만 등의 동시베리아 일대를 점령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민간인 대량 학살을 감행하였다.
특히 아무르지역의 자유시(스바보드니), 마자나바, 이바나프카 지역 등지에도 일본군은 작은 피해에도 특유의 야만성을 발휘하여 민간인, 여자, 노인, 어린이 등에 대한 대량학살을 주저해 본 적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20년 4월 6일에는 하바로프스크에서도 일본군이 적군의 무장을 해제하였으며, 4월 29일, 일본은 블라디보스토크 임시 정부와 러시아 무장 단체는 일본군 주둔지 및 우수리 철도 간선 및 스챤 지선에서 30마일 거리에 침입 할 수 없으며 시내의 러시아 함선, 병기, 폭탄 기타 군수 물자, 병영, 무기 공장을 일본군이 압류한다는 조건하에 강화 협정을 맺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일본군이 볼셰비키군을 무장 해제한 1920년 4월 6일, 모스크바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 양해하에 동부 시베리아 일대에 극동 공화국(Дальневосто́чная респу́блика : ДВР)이 수립되었는데 이들은 독립적인 민주 국가를 자칭하며 일본을 포함한 연합국 측에 승인을 요구했다.
(※ 일본군의 하바로프스크 점령을 1920년 5월로 기록한 책도 있다)
당시 소비에트 정권은 국내 행정기구 및 경제기구의 혼란과 폴란드와의 사이에 고조되고 있던 전쟁 기운으로 시베리아의 영구 점령과 백파의 괴뢰국가 수립을 노리던 일본과의 전쟁은 피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과거 러시아제국 영토의 여러 곳에서 생겨난 자치국에 볼셰비키를 전파하고, 극심한 식량난과 대기근 문제를 해결해야할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따라서 시베리아 지방의 일본군과의 마찰을 최대한 회피하기 위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표방한 완충 정권의 수립을 구상하였고, 알렉산드로 크라스나쇼코프(Краснощёк Абра́м Моисе́евич 혹은, Краснощёков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1880년 출생 ~1937년 사망)를 수반으로, 사회 혁명당 등의 협력을 얻어 1920년 4월 6일 이를 성립시키고는 국가명을 극동 공화국이라 정했다.
(※ 극동공화국은 베르흐네우진스크(오늘날의 울란우데)에 성립되었다. 1920년 10월부터는 치타, 트란스 바이칼, 아무르 주, 프리모르스키, 캄차카, 사할린섬 북부도 극동공화국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콜차크의 반혁명군과 싸운 볼셰비키 군대 지도자 블류헤르(Блю́хер)가 이 나라 군대의 첫 번째 사령관이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실제로는 볼셰비키의 영향력이 강한 괴뢰국가였고 일본군과의 갈등도 계속되었다.
(※ 이후 일본이 사할린섬 북부를 제외한 지역에서 철군하자 이 허수아비 국가는 소련에 통합되었다.)
따라서 극동 공화국은 시베리아에서 적군과 일본군 및 백군 사이의 완충 지역이 되어 일본군의 철군을 재촉하려던 목적으로 만들어진 허수아비 국가에 불과하였다.
1920년 4월 10일경 니콜라예프스크의 파르티잔 부대들은 상급부대에서 지시를 받지 못하자 일본군대와 해군을 위한 군사기지 건설을 막기 위해 주민들을 일단 께르비로 대피시키고, 니항과 하류쪽으로 13킬로미터 떨어진 츠니르라흐 요새를 파괴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니콜라예프스크에는 4월 20일경부터 하바로프스크에서의 일본군과 적군 사이의 전투 소문이 닿기 시작했고, 이후 하바로프스크에서 적군이 무장 해제 되었다거나 해빙이 되면 일본군 구원부대가 확실히 니항으로 올 것이라는 등, 자세한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야만적 학살과 하바로프스크에서 적군의 무장 해제, 극동 공화국의 수립 등의 소식은 교통의 요충지인 니항 주둔 파르티잔에게 즉각적인 대책을 세우도록 하였다.
일제의 사할린 섬 북부 공격
4월 21에서 22일경 사할린섬 북부의 알렉산드라프스크항에 일본군 파견대가 상륙하여 파르티잔들을 물리치고 쩸스토우측 백군계 정권을 다시 수립하였다. (1920년 5월 5일자 동아일보)
일본군 약 1개월 이상 유전과 석탄, 목재 등 자원의 보물섬인 사할린섬 북부의 파르티잔 토벌에 집중하였다.
사할린섬 북부의 애국지사 짜프카(Цапко, Александр Трофимович. 1884년경 출생 ~ 1920년 5월경 사망)는 1920. 5. 17일에서 ~ 5. 20일경 일본군에 의해 살해된다.
4월 24일경에는 볼셰비키 부대내 도박, 음주를 금지하였다.
그리고 니항의 볼셰비키 부대내에서 트리피츤과 대립하는 공산주의자들이 표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4월 27일경 런던 주재 일본대사관은 “일본인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군대를 파견한다”고 발표하였다.
4월 28일경부터는 부자들의 주택 건물의 국유화를 위한 토론이 열렸다.
곧 상인들의 곡물 재고가 몰수되었다. 식품에 관한 배급시스템이 도입되었다.
5월 2일경에도 니항의 인플레이션과 화폐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금융위기를 쉽게 해결할 수 없었다. 수차례 화폐개혁 등 조치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루블화(지폐)는 러시아 전역에서 뿐만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치를 상실하고 있었다.
1920년 4월 22일 트리피츤의 오호츠크 전선 사령관 임명
일본군의 공격이 진압된 직후인 3월 개최된 회의들에서 트리피츤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니항 볼셰비키 군대의 지휘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4월 22일 트리피츤은 극동공화국 총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오호츠크 전선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지휘하에 있떤 부대는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으로 개편되었다.
4월 23일 회의에서 과반수 이상을 득표를 한 트리피츤은 니항해방에 동참했던 그의 정치적 반대자(몇몇 볼셰비키)들을 즉시 체포하였다.
김낙현의 수기 등에 따르면 먼저 아무르 강 중류 하바로프스크로부터 내려오는 일본군과 백파군의 선박을 저지 격침하기 위해서 강에 수뢰와 장애물을 설치하기 위해 고려인 파르티잔 부대외에도 민간인까지 동원했다.
니항을 방어하기 위한 자금도 없어서 트리피츤의 니콜라예프스크 혁명위원회는 새로운 소련 지폐를 찍어내려고 했으나 루블화와 마찬가지로 가치를 상실하였고, 니항시내 금융과 상권의 핵심이던 중국 상인들은 이를 받으려 하지 않아 결국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금화나 외국돈으로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김낙현의 수기 등에 따르면. 1920년 5월 17~18일부터 일본군의 군함이 아무르강 상류에서 니항으로 접근하는 것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니항 접근로에서 최초 2개 대대 이상 병력의 일본군과 니항 파르티잔간의 교전이 시작되자, 니항 파르티잔들은 일본 군함의 함포사격 등을 견디지 못하고 하류 니항 방향으로 후퇴를 시작했다
볼셰비키(공산주의자, 적군)들의 니항 철수
5월 8일 니콜라예프스크의 혁명위원회는 18세 이상 35세 사이의 전체 남자들에 대한 동원령을 내렸다.
5월 13일 사할린 지역 집행위원회는 군사혁명 사령부를 구성하였다.
5월 14일 일본군함의 아무르강 하류 봉쇄가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수상정찰기를 동원하였다.
니콜라예프스크의 부대는 서쪽과 남쪽 동쪽의 일본군으로부터 포위되기 시작하였다. 전주민이 니항 방어에 참여하였으나 속으로는 내전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지키려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니콜라예프스크의 식량부족과 탄약부족은 일본군과의 장기전을 할 능력이 없음을 니항 볼셰비키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도시와 요새에서 일본군과의 장기전을 주장하는 볼셰비키들도 있었다.
아무르강이 해빙되기 시작하고 기온이 올라가자. 1920년 5월 20일, 중국 영사와 중국 북경정부 소속 강방함대, 그리고 중국인 거류민들은 전 재산을 가지고 아무르 강 약간 상류로 이동을 준비하였다.
(※ 아무르강의 해빙시 하류에는 위로부터 떠내려 오는 얼음 등을 피하기 위해 배를 육지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5월 21일 밤 니콜라예프스크의 중국 영사(장문환)는 트리피츤으로부터 시내거주 중국인의 대피를 제안 받고, 이에 동의하여 미국, 중국인, 러시아인, 영국인, 폴란드 인 등을 니콜라예프스크에서 38킬로미터 떨어진 마가(Маго)마을로 대피시켰다.
(※ 마가는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서쪽으로 직선거리 약 38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마가는 미국, 중국인, 영국인들도 대피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20년 6월 초 일본군이 상륙하여 총격과 처형을 시작하였다.)
니항주재 중국영사와 중국인, 그리고 중국인을 따라나선 민간인 대피를 마친 강방함대의 일부는 1920년 5월 20일경 하바로프스크와 하르빈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대규모 대피는 5월 23일 시작되어 5월 30일쯤 끝났다.
트리피츤 등 지도부는 시민들을 증기선을 이용하여 께르비 마을로 대피시키고, 니항시를 파괴하기로 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신들과 행동을 같이 하지 않거나, 수감되어 있던 트리피츤을 반대한 공산주의자, 백파, 체포되어 있던 129명의 일본인들에 대한 처형이 시작되었다.
마가로 대피한 주민들에 대한 일본군의 학살도 기록한 사람이 있다. 영국인 광산 엔지니어 G. Dyer는 회고록에서 1920년 6월 2일 일본군이 “마을 광장에는 러시아인 30명, 중국인 5명, 한국인 5명이 줄을 섰습니다. 그들은 볼셰비키와 무관한 니콜라예프스크의 오랜 거주자였지만 일본군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Dyer는 그밖에도 마가(Маго) 지역에서 일본군의 더 많은 학살이 계속되었다고 주장한다.
트리피츤 부대(공산주의자, 볼셰비키, 적군)의 친일파 처형
독립군의 일원이었던 아무르주의 한인 보병자유대대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의 문서인 「재로고려혁명군연대연혁」 6쪽 등에서는 니콜라예프스크에서 트리피츤 부대가 5,000명을 학살하였다고 주장하였지만, 이 재로고려혁명군연대연혁은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고 당시 일본의 4월 참변 이유로 주장한 거짓말을 인정해준 것에 불과할 뿐이다. 결국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은 박일리야 측을 ‘강도, 무정부주의자, 학살범’ 등으로 매도하여 사살명령을 내린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박일리야 지자들은 연해주에 있다가 아무르주나 이르쿠츠크로 이동후 「재로고려혁명군연대연혁」을 작성한 대한국민의회의 일부(일명 이르쿠츠크파)는 ‘연해주에서 일제와 백파에 협조하여 많은 비행을 저질러 고려인 동포사회에서 친일 매국노라고 알려지자 고려인이 적게 살고, 쉽게 볼셰비키에 가입할 수 있는 이르쿠츠크나 아무르주로 이동해온 정체가 불분명한 자들’이라고 한다.
(소련 붕괴후 2021년 현재의 러시아 연방이, 제정 러시아를 좋게 평가함에 따라. 1918~1922년 러시아 내전기에 백파를 지지했던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백파와 연합하였던 일제 침략자와 앞잡이들까지 현재의 러시아나 한국에서 좋게 보지는 않는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자료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1920년 4월 동시베리아지역에서의 일본군의 대대적 공격과 학살(4월 참변)을 전해들은 트리피츤 부대는 니항 시내에 일부 생존하였던 일본인 거류민 처형이 시작함과 동시에, 감옥과 군 교도소에서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의 처형하였다.
트리피츤 부대는 탄약을 절약하기 위해 죄수들의 손을 묶고 뒤뜰에서 도끼 등으로 머리를 치고 총검으로 찌르고 칼로 베어 살해했으며 시체는 마을의 쓰레기장에 버려지거나 아무르 강 얼음 속에 던졌다고 한다.
오늘날 일본과 친일파시스트들의 각종 도서 등은 니항 일본군 참살의 원인은 오직 트리피츤과 협조했던 볼셰비키와 박일리야 장군에게 있다고 거짓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로 주장한다.
「1920년 3월 12일경 무장해제에 저항하며 궐기한 일본군의 저항 당시 살아남은 사람들과 이전에 이미 수감 된 적이 있었지만 마을을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이 다시 투옥되었고 차례로 처형되었다. 그 대상은 변호사와 은행가에서 우체국 직원과 무선국원까지, 유대인, 폴란드인은 물론 영국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80세의 노인에서 1살짜리 유아까지 대상에 대한 아무런 제약이 없이 무차별 살해되었으며 학살이 시작된 21일부터 24일까지 약 3,000명 이상 6,000여명의 니콜라예프스크 주민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종적으로 니항주민 1만에서~1만2천여명 이상이 학살되었다.」
다만 니항사건 당시 사살되거나 처형된 일본계는 일본군 포함 700여명에서~ 900여명 이상인 것은 당시 관계되었던 러시아, 일본, 중국 외에도 최고려, 오하묵, 김낙현(김학현), 이지택 등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 한국 독립운동 기록도 대부분 니항 주둔 일본 침략군이 전멸했다고 하며, 봉오동 청산리 전투 등과 같이 대표적인 독립운동으로 보기도 한다.)
1920년 5월 24일에는 항복 이후 수감되어 있던 일본 육군 병사 및 군속 108명, 해군 병사 2명, 일본인 민간 거류민 12명을 합해 총 122여명이 아무르 강변에 끌려나와 처형되었고, 병원에 수용되어 있던 일본군 병사 17명도 전원 처형되었다.
현재까지 트리피츤이 5월 24일 파르티잔 제1연대장에게 처형명령을 내린 문서가 남아있다.
이 과정에서 감옥에 수감되었던 일본인중 한명은 감옥 벽에 5월 24일 오후 12시라는 낙서를 남겨 학살시간을 명확히 기록하였다.
한편, 당시 하바로프스크에 주둔하던 일본군 주력은 니콜라예프스크의 일본인 거류민과 병사들의 생명을 확보하기 위해 협상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트리피츤은 협상할 생각이 없었다.
일본군은 협상하고자하는 뜻을 전하고자 해군 항공기를 사용, 니항 상공에서 삐라를 뿌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일본은 니콜라예프스크에서의 수천명에 대한 학살이 10일간 계속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이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속임수였다.
1920년 6월 당시의 한국내 몇몇 신문조차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니항사건 당시 상류로 대피한 러시아계, 중국계, 한국계와 다른 외국인들의 숫자와 니항사건후 외곽과 주변 마을로 귀환한 인원들을 종합하여 결론 내려보면, 니콜라예프스크에서 학살당한 사람은 일본군과 일본군에 협조했던 거류민, 백군, 백군에 협조했던 러시아인들이 주로 처형되며 이 과정에서 여자, 어린이, 노인들과 볼셰비키였으나 트리피츤에 정치적으로 반대했던 자도 일부 살해된 것이다. (트리피츤이 처형을 명령한 자는 대략 40여명이다.)
도시의 파괴는 5월 28일에 시작되었는데 먼저, 아무르 강 건너편 어장을 소각하고 30일에는 제재소를 방화, 5월 31일에서 6월 3일경까지 온 도시가 불길에 휩싸였다. 하류쪽으로 1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츠니르라흐 요새의 무기들도 부분적으로 폭파되었다. 요새에 있던 해안포용 화약들이 건물 폭파에 활용되었다.
트리피츤은 일본군이 머물 수 없도록 석조건물들만 파괴를 명령했으나 볼셰비키들이 민간인 주택까지 완전 파괴했다는 주장도 있다.
러시아 내전기에는 아무르주의 블라가베셴스크도 파괴하여 일본군에게 사용되지 않게 한다는 계획이 있었으나 실행되지 못해 블라가베셴스크는 파괴되지 않았다고 한다. 트리피츤의 명령이 일부 파괴였으나 전체 파괴가 이루어졌을 수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목조 주택을 방화하면 하루면 충분히 잿더미가 되는 것인데, 힘들게 10일씩 태워 일본 비행기나 이미 접근한 일본군에게 노출시킬 필요가 당시에도 없었다.
최진일 진술을 보면 니콜라예프스크의 파괴 원인에는 일본군의 공격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 본대에서는 트리피츤 대장 지휘 하에서 도시를 사수하였으나 나중에는 도시는 대포사격 화재로 모두 불에 타고 할 수 없이 전 주민들까지 수만 명이 떠나서 2~3월 만에야 께르비라는 농촌을 경유하여 흑룡주로 오게 되었다.”
※ 러시아의 기록은 오늘날 일본이 주장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트리피츤에 대한 평가도 다르다. 트리피츤을 니항을 평화적으로 해방시키고 일본군을 전멸시킨 애국자로 보기도 하며, 무정부주의자로 백파측 민간인을 학살하고 니항을 약탈하고 중국으로 도망치려다가 처형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러시아에서는 트리피츤 부대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를 3천~6천여명으로 인정하는 문서는 없다. 1921년 극동공화국 군사령관을 지낸 블류헤르(Блю́хер Васи́л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한국 독립운동사에도 자주 나오는 블류헤르와 동일한 인물이다.)와 같이 트리피츤의 죽음을 후회하는 사람도 있다.
니항를 파괴하고 몇몇 주민을 학살한 이유에 대해서는, 트리피츤을 처형하고 일본군쪽으로 도주하였던 바라비요프(П.Я. Воробьёв)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는데 “도시를 파괴한 이유는 이후 이 지역에 세워질 반혁명 정부의 구성 가능성을 막는 것이었다.
또한 마을 주민이 남아 있으면, 그들 대부분은 일본군에 의해 반혁명 정부를 만들어낼 것이 확실했지만 만약 마을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으면 일본군은 겨울철에 머무를 수 없으니 떠나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니항 사건 전체의 일본인 희생자는 일본측 주장으로는 군속을 포함한 육군 관계자 336명, 해군 관계자 44명, 외무부 관계자(이시다 토라마츠 영사대리 부영사와 그 가족) 4명, 신원이 밝혀진 민간인 347명으로 총 731명으로 되어있지만 민간인과 관련된 내용은 영사관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관련 서류가 전부 없어졌으므로 실제 사망자는 이보다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 6월 3일경 일본군의 니항 점령
일제는 1920년 2월 중순경부터 아무르강의 교통요충지 니콜라예프스크의 점령을 유지하고자 육군·해군 혼성부대 파견을 시도하였으나 기후불순으로 4월 21일(일본측 기록으로는 4월 19일경)경에야 사할린섬 북부의 알렉산드라프스크항(Александровск)을 점령할 수 있었다.
얼음이 녹고 날이 따뜻해지자 1920년 5월경 일본 해군은 니항을 다시 점령하기 위해 출발하였고, 아무르강 상류쪽의 대도시인 하바로프스크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육군 제 14사단 역시 병력을 모아 해군 임시 파견대의 감시선 3척의 호위를 받아 5월 14일 하바로프스크를 떠나 5월 25일경 일본군 다문지대(多門支隊)와 합류하였고, 6월 3일 니콜라예프스크에 진입하였다.
그러나 도시는 초토화되었고 일본인은 전멸에 가깝게 죽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존한 일본인과 약 500여명에서~2천여명의 피난민과 백파 지지자 등이 일본 측에 귀순하였다.
(※D. Slavinsky 가 쓴 책에 따르면 1921년 일본군 재점령후 러시아 적십자사 대표단이 니항주변에서 10,000명의 주민이 살해되었고 6,000구 이상의 매장되지 않은 시체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적십자사 대표단보다 일찍 니항을 재점령한 일본군과 일본 언론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사진기록을 남겼지만 6,000구의 시체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당시 블라디스보톡에서 니항을 방문했던 러시아 기자도 그러한 시체를 목격하지 못했다. 당시 한국의 언론들도 그러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다만 아무르강의 해빙으로 방치되어 있던 시체들이 모두 바다로 수몰되었을 수도 있다.)
방화 및 폭발로 죽으면 사망자의 수조차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지만, 파르티잔들이 시체를 방치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만주사변이나 중일전쟁 주요 전투에 참전했던 중국군의 증언과 독립군의 증언을 들어보면 주요 전투에서 동료를 시신을 묻어준 기억이 전혀 없었다고 답했고, 오히려 일본군이 동료들의 시체를 묻어주곤 했지만, 일본군도 급박하면 방치가 기본이었다고 한다.
1920년 러시아 내전기 일본군의 시베리아 점령후 농경지 방화, 주택방화, 가축 도살, 민간인 학살 등은 시베리아를 영원히 점령하는 것을 기본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체코군단 구원이나 러시아 내전의 평화적 해결과 백파 보호 등의 그럴싸한 명분을 인정하는 역사가는 일본을 제외하고는 현재 없다.
다만 니항사건에서 보다시피 중립선언을 스스로 파기하고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을 살해하려다가 실패하였고, 일본 거류민까지 무장하여 일본군과 합세하여 파르티잔들을 기습 공격한 사실을 부인하지는 못하고 있다.
“일본이 체코군과 백군을 구원하고 러시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니항을 점령하였고, 니콜라예프스크에 나타난 파르티잔의 학살과 무장해제 요구에 부득이 1920년 3월 12일 일본인 거류민과 합세해 저항한 것이다”는 주장한 일본의 인터넷과 기록, 그리고 간혹 친일파들 사이에서나 줄기차게 인용되는 이론이다.
니항이 파괴후, 일본군이 1920년 6월 다시 침략하였을 때, 께르비로 대피하지 않았던 니항주민중 일부가 파괴되지 않은 주택들로 돌아 왔다.
그러나 집에는 “외국인을 위한 사무실”이라는 표지가 있었고 일본군들은 러시아인의 입주를 허용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점령한 땅에 머무르기를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점령한 사할린섬 북부는 도시의 이름과 거리의 이름까지 변경되었다. 모든 기관들은 일본인들이 운영하였다.
일본군이 재점령한 1920년 6월에도 일본군을 열렬히 환영하는 사할린주의 (러시아계)주민들은 많았다. (주로 백파계의 러시아인들이 환영하였다.) 1920년 6월 16일에는 700명의 승객과 소금을 실은 증기선 올레그(Oleg)가 니콜라예프스크에 도착하였다.
1920년 7월 3일 일본은 니항사건 때문에 일본군이 러시아 극동(연해주 지방 등)을 점령했다고 발표하였다.
1920년 7월경 니항을 점령한 일본군과 백군이 주변에서 체포한 볼셰비키를 처형하는 것을 목격한 목격자가 있다.
니항을 점령한 일본군은 암군강 상류까지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다. 1920년 8월 4일쯤 마지막 전투가 있었다.
그러나 1920년 10월 1일까지도 일본군은 니항을 군사기지로 만드는 데 실패하였다.
주택부족 등에 시달린 일본군은 겨울에 니항주민 일부를 일본군이 점령한 사할린 섬 북부로 이동시킬 수밖에 없었다.
께르비로 민간인 피난
니콜라예프스크의 파괴로 갈 곳이 없어진 니항 민간인들 중 5,452명 정도가 께르비(Керби, 오늘날의 도시이름은 '실로 이미니 빨리느 아시펜카' : Село имени Полины Осипенко,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서남쪽으로 직선거리 약 300킬로미터. 자유시에서 동북쪽으로 직선거리 588킬로미터 정도)에 도착했다. 그 중 2,351명이 어린이였다.
작은 니콜라예프스키 광산(Николаевском находилось)에는 3,216명이 있었고 그중 1,355명은 어린이였다.
민간인중 일부는 나중에 아무르강에서 배를 타고 상류인 하바로프스크와 블라가베셴스크로 이동한다.
니콜라예프스크에는 평소 수백척 이상이 어선들과 군함, 군용 무선통신시설, 츠니르라흐 요새의 포대를 갖춘 극동의 주요항구였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여성과 아이들을 중심으로 3,500여명 이상이 증기선 등의 배를 통해 상류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일부가 하바로프스크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 중 일부가 도로를 통해 수백킬로미터 이상을 행군하여 사망자가 많았다. 고아들의 다수는 블라가베셴스크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다고 한다.
자유시(스바보드니) 뿐만이 아니라 당시 아무르주의 주도였던 블라가베셴스크와 마자나바 인근에도 다수의 고려인이 살았으며 자유시에서 남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470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에는 1871년 4월경부터 한국인 315명 정도가 농지 개간을 위해 이주되어 고려인 마을(사만리(四萬里) 혹은 사말리 라고 불려졌다고 함)을 만들었다고 러시아 기록에 나타난다.
1879년 사만리의 고려인은 624명에 달했다고 한다.
계봉우가 작성한 기록 등에 사말리(사만리)가 나온다.
친일파의 반란과 1920년 7월 9일 트리피츤 처형
1920년 6월 19일경 연해주에서 일본군을 대하는 분위기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연해주 인구의 대다수는 니항사건은 일본군이 일으켜 놓고 다시 패전을 이유로 닥치는 대로 학살을 일삼으니 연해주에서는 일본군과 함께 온 일본인들에 대한 반감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시베리아에 숨어있던 백계(백군 지지자) 러시아인뿐만이 아니라, 빠른 내전종식과 중립적 자세를 취했던 대부분의 러시아인들도 이제는 일본군의 만행을 용인해 줄 수 없었다.
트리피츤을 따르는 핵심 주력은 약 600여명이었으며, 트리피츤은 니콜라예프스크의 도시민을 전부 대피시키고 석조건물은 폭파하고 목조건물은 방화하여 파괴하였다.
물론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주택들은 파괴를 면했다.
트리피츤의 반대세력에 따르면 트리피츤의 살인, 강간명령 등에 반대하는 공산당원들도 몇명이 이 과정에서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트리피츤의 반대세력에 따르면) 트리피츤은 약탈품을 발동선과 짐배에 싣고 께르비로 일본군의 학살을 피해 대피하였으나, 그곳에서 일본으로 나중에 도주하는 안드레예브와 일부 볼셰비키 그리고 박병길 등의 반란군에 의하여 핵심 부하 약 200여명과 7월 7일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김낙현과 이지택의 주장에 따르면 트리피츤은 무정부주의자이며 강도단의 일원이었는데, 아무르주 정부에서는 트리피츤에게 니항을 약탈하고 파괴하는 등의 강도적 행동을 중지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께르비에서) 트리피츤은 강탈한 금화, 보석 등을 가지고 중국으로 도망을 준비하고 있었다.
트리피츤의 부대가 여러개로 나누어져 다른 곳에 주둔하였기에 트리피츤의 경호대가 소규모인 틈을 타서 기습공격하여 참모부가 있는 기선 암군호를 경비하는 경호대를 무장해제시키고 트리피츤을 체포하였고, 나머지 추종자들은 순차적으로 체포하였다고 한다.
오늘날의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안드레예브 등은 일본군 점령지를 일본군의 협조 아래 무사히 통과하여 트리피츤과 동료들을 기습 공격했으며, 이 때 박병길이 트리피츤을 직접 체포했다고 한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이미 그 당시에도 안드레예브(Андреев), 압친니코프(А. Овчинников), 바라비요프(П.Я. Воробьёв), 비첸카(Биценко, 이명 : 비첸코) 등은 일제와 일제 앞잡이들과 내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트리피츤의 부하들은 트리피츤이 체포되자 큰 충돌 없이 항복하였다고 한다.
새 군사혁명지도부가 선출되었는데, 그 사령관은 안드레예브(Андреев Иван Тихонович), 군사위원은 트리피츤 살해 후에 공산당 상급부서에 의해 아무르주에서 께르비로 온 베즈드닌(아무르주 자유시에서 블라디미르 파포프 등과 함께 활동한 적이 있다), 고려인 파르티잔 대표는 박일리야였다.
(※ 박일리야 장군이 께르비에서도 고려인 파르티잔 대표로 선출된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안드레예브의 후손 등은 오늘날까지도 안드레예브가 당시 시베리아를 침략한 일본군 혹은 미군의 첩자라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안드레예브는 트리피츤을 처형한 후 수차례 암살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실제 독립운동사에는 암살이 성공한 사례가 다수 있다.
엄순봉 의사의 친일파 처단, 문학빈 장군의 친일파 처단, 홍종우 의사의 친일파 처단, 안중근 의사의 이등방문 사살, 윤봉길 의사의 백천의즉(白川義則) 등 처단, 김상옥 의사와 남자현 의사의 의거, 심용준 선생의 밀정 처단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 도대체 오늘날까지 정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안드레예브는 누구이며 그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트리피츤 처형에 결정적 역할한 안드레예브(Андреев Иван Тихонович. 1884년 출생~1933년 사망)는 니항사건 무렵 독립유공자 박병길의 동료였으며, 1차 세계대전에 제정 러시아군으로 참전한 자로. 1917년 2월혁명 이후 니항으로 돌아와 볼셰비키에 가담하였다.
안드레예브의 존재는 소련시대 철저히 감춰져 역사학자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18년 8월 일본 침략군이 아무르강 일대의 츠니르라흐 요새와 니항을 공격하기 전에 요새의 총기를 사용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 부분이 안드레예브가 일본군이나 백파(白派, 혹은 백군)의 간첩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1920년 3월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열린 사할린주의 노동자 회의에서 집행위원회 위원이자 파르티잔 간부로 선출되었다.
1920년 5월경 일본군이 2만여명의 병력으로 사할린주와 주도(州都)인 니항을 공격하자, 트리피츤은 도심을 불태우고 일본인을 기다리기 위해 숨으려는 자를 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트리피츤은 감옥에 있던 백파군대 잔당들과 몇 명의 볼셰비키도 처형을 지시했다. 트리피츤이 처형을 명령한 사람은 대락 40여명 정도로 알려졌다.
1920년 6월 1일 츠니르라흐 요새의 무선 통신국은 「니항을 파괴하고 무선통신국을 파괴한다」고 송신하였다. 니콜라예프스크의 볼셰비키들은 2주간의 행군 끝에 암군강 유역에 있는 께르비 마을로 대피했다. 일부는 배를 이용하여 대피하였다.
안드레예브는 일본군의 협조로 1920년 7월경 트리피츤과 동료의 체포를 주도하였다. 1920년 7월 9일 트리피츤과 동료 23명 이상이 처형되었다. 안드레예브는 트리피츤 처형 사건을 보고하기 위해 아무르주의 블라가베셴스크로 갔다. 그리고 그는 자유시(스바보드니)에서도 포병부대 책임자로 일했다. 블라가베셴스크 등에서 (트리피츤의 처형을 반대하는)무정부주의자 등의 암살위협에 시달렸다.
1922년경 안드레예브는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사할린 섬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였다. 일본군이 철수하자 사할린섬에 머물 수 없어 1925년경 중국 상해로 갔다가 1933년 사망했다.
위에서 보다시피 안드레예브의 경력은 소련시대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당시 그가 어떤 사람인지 한국인들은 파악할 수 없었고, 한국내에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트로츠키(Тро́цкий Лев Дави́дович)와 같은 사람과도 행적이 많이 다르다.
안드레예브가 단지 폭력과 학살을 견디다 못해 트리피츤과 동료들을 처형했다면 그들보다 더 많은 학살을 일삼은 일제와 백파의 편으로 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 외에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 행동하다가 일제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을 수도 있다.
그가 일본, 미국, 백파의 간첩으로 볼셰비키 혁명을 좌절시키고 돈을 노리고 범죄를 저지른 것인지는 한국에서는 확인하기 힘든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1917년 러시아 혁명기, 혼란한 당시의 시대 상황상 일본의 간첩과 러시아·중국·한국인 친일파들이 공공연히 시베리아·만주·중국·몽고 등지에서 간첩활동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본군 정보원과 간첩들은 이 무렵 시베리아에 약 4천여명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 참고자료 :
일제의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1864~1919)는 돈으로 러시아인을 매수하여. 1905년 러시아 피의 일요일 사건(Кровавое воскресенье) 등을 유도하여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전을 유도한 첩보기관의 우두머리로 있던 자였다.
조선에 와서 통감부와 총독부의 헌병사령관과 경무총장으로 있으면서 각종 사건을 날조 조작하여 조선인과 독립군을 탄압하고 친일파와 일제 앞잡이를 양성한 자이다. 이러한 일제 침략자의 사주를 받고 얼마나 많은 친일파와 앞잡이들이 양성되었는지 모른다.
최근 공개된 일제의 자료를 보면 어지간한 독립군의 문서들은 모두 일제가 당시 확보하고 있었다. 그만큼 독립군 내부에 일제 앞잡이가 많았다는 것이다.
유명한 독립운동가 한용운도 1911년경 만주, 시베리아에 갔다가 일제 앞잡이로 의심받아 독립군에게 권총 사격을 당했으나, 죽지 않고 살아났다고 한다. (물론 당시 독립군이 한용운을 사살했다면 독립운동으로 봐야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일제 앞잡이들이 만주나 시베리아 있었는지 정확한 숫자 파악은 되지 않으나, 만주에 있었던 김좌진, 안무 장군의 경우에는 죽을 때까지 친일파들의 모략에 시달렸고 결국 일제에 의해서 죽었다고 한다.
단 홍범도는 예외적으로 죽을 때 자신의 양딸 박영식을 불러다 놓고 「평생 왜적에게 안잡히고 제명에 죽으니 기쁘다」고 말하고 서거하였다고 한다.
......참고자료 하략......
일본이나 중국 등지에 보존되어 미공개된 기록들의 확인해 언제가 안드레예브의 정체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이렇듯 트리피츤을 사형에 처한 과정이 당시에도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트리피츤은 일제 침략자와 백파 등의 모략에 의한 희생자라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께르비에서 트리피츤을 체포하기 위해서 피난민들의 동의를 받으려고 하자, 피난민들의 의견은 나누어졌고 소란이 나타났다. 그렇기 때문에 볼셰비키내의 정치적 반대자에 의해 트리피츤의 체포와 처형은 기습적으로 일어났다. 거의 즉결 처형에 가깝게 트리피츤과 동료들은 처형되었다.
트리피츤이 안드레예브 등(리아도르스키, 박병길 등)에게 체포된 직후 블라가베셴스크에 있는 군사재판소로 압송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트리피츤이 체포되자 트리피츤 계열에서 반란을 일으켜 반대세력들을 공격한다는 소문이 께르비에 나돌았다. 트리피츤의 반대세력은 신속한 처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러시아 기록에는 박병길(박바실리)가 트리피츤 체포에 기여를 하였다고 하며, 김이노껜지(김낙현)도 께르비에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김낙현의 수기도 상당부분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최호림의 주장에 따르면 박일리야는 당시에도 트리피츤의 처형을 반대하였고, 처형을 주도한 사람들을 습격하려고 하였다고 말했다.)
군사혁명사령부 결정과 주민들의 요구에 따라 파르티잔, 주민대표들, 군사혁명사령부 대표들로서 인민재판소가 선거되어 3일 동안 트리피츤과 동료들을 재판하였다.
곧 103명을 회원으로 하는 재판이 열렸으며, 대부분 트리피츤에게 적대적이었거나 적이었던 사람들로 재판부가 구성되었다. 이 103명 법정의 러시아측 기록은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
오늘날 한국내에는 일제 강점기에 설치되었던 법원 재판기록이나 교도소 투옥기록이 남아 한국의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북한의 재판기록과 중화인민공화국, 몽골인민공화국의 재판기록을 열람할 수 있다면 니항사건의 진실은 더 상세하게 밝혀질 수 있다.
만주지방에서는 수십년만에 청왕조, 중화민국, 봉천군벌, 괴뢰만주국, 소련군점령기,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시기를 거치며 많은 기록이 없어진 것은 사실이나, 법원 재판기록이나 교도소 투옥기록은 일부가 상세하게 남아 있다.
니항사건과는 별 관계는 없으나 언제가 “김좌진 암살범 재판기록”, “주아무개(周某)씨 투옥기록” 등이 공개되어 니항사건과 독립운동사의 알려지지 않은 기록들이 언젠가는 공개되기를 기대해 본다.
재판 결과 트리피츤과 레베제바를 비롯한 23명 정도가 주민 참석 하에 1920년 7월 9일 처형되었다(23명 외에 사형선고를 받지 않았음에도 처형된 파르티잔도 다수 있었습니다. 또 트리피츤의 동료들에 대한 처형 과정에 대해서도 오늘날 러시아 역사학계에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스말야크의 기록 등에 따르면 150여명 이상의 트리피츤 지지 파르티잔들은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로 압송되던 중 하바로프스크 등지로 탈출해 다른 파르티잔 부대에 편입되었다고 합니다. (※ 김낙현의 주장은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측 기록과 다른 허위주장이 상당히 많습니다.)
트리피츤과 동료의 재판 기록
트리피츤과 동료의 재판에서, 다리를 절며 재판에 참석한 트리피츤에게 반대세력이 주로 질문한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무정부주의자 혹은 개인주의자 인지 여부 (트리피츤은 무정부주의자임을 인정했다고 한다)
(2) 일본군이 살해된 이유와 일본인 거주지가 불탄 이유 (당시 중상을 입은 상태였기 때문에 답을 해줄 수 없다)
(3) 일본 민간인을 살해한 이유 (트리피츤은 무고한 민간인은 죽이지 않았다고 답변함)
(4) 민간인 지역이 파괴된 사실과 대량학살을 아는지 여부 (민간인 학살은 없었으며, 사망자수는 모른다고 답변함)
(5) 여성과 어린이가 살해된 이유 (자신도 왜 죽었는지 잘 모른다고 답변)
(6) 강간에 참여했는지 여부 (부정함)
(7) 개인 감정으로 공산주의자들을 처형했는지 여부 (한 때 동료였던 일부 공산당원의 처형을 인정함)
(8) 유죄인정 혹은 자백여부 (사형 당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
트리피츤과 공범들의 재판에서는 트리피츤에 협조했던 무정부주의자가 아닌 (트리피츤을 도왔던)볼셰비키도 다수 처형되었다.
트리피츤의 주요 범죄혐의는
1920년 5월 22일부터 6월 2일까지는 니콜라예프스크에서, 그뒤부터 께르비로 대피한 1920년 7월 4일까지 사할린지역(당시에는 니항이 사할린주의 행정구역) 내에서 민간인과 그 가족을 근거 없이 체포하고 처형을 허용했다,
(1) 5월 27일 트리피츤과 친하지 않았던 다수 공산주의자를 충분한 근거 없이 처형을 명령하였다
(2) 같은 기간 농촌지역에서 민간인과 그 가족의 대량살상이 가능할 수 있는 명령을 내렸고, 부하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었다. 살인·폭력 등에서 트리피츤은 그에게 부여된 권한을 넘어선 행동을 하였다. 트리피츤의 월권행위로 다수의 살인 등이 실제로 일어났다.
(3) 니항지역의 적군 사령관으로 소련정부의 정책에 벗어난 행동(방화·파괴 등)을 하였다. 공무원에게 압력을 가하여 니항 민간인의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신뢰를 추락시켰다. 또 전 세계가 이 과정을 지켜봤고 소련 정부의 권위에 타격을 입힐 수도 있었다.
트리피츤의 재판과정에서 께르비에 있던 볼셰비키 지휘층(안드레예브 등)이 트리피츤 체포와 처형에 적극 가담한 것은 분명하다. 트리피츤 지지자들은 사형 판결에 불복하였으나 트리피츤과 일부 동료들은 3일 만에 처형되었다.
판사는 재판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트리피츤에게 개인적 살인혐의를 적용하려고 하였고 트리피츤은 니항 혁명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일부 명령을 내린 것을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 (나중에 일본으로 도주한) 판사는 트리피츤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던 것이다.
(※ 오하묵, 최고려에 따르면 박일리야는 트리피츤 처형이 항상 잘못된 일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께르비에서 트리피츤의 체포와 처형을 주도한 안드레예브도 자신은 항상 일본군이나 미군의 간첩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고 하며, 트리피츤 처형 후 수차례 살해 공격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트리피츤과 박일리야의 관계
트피리친에 동정적인 한국계의 대표적인 인물이 박일리야다.
니항사건에 참가했던 한국계 파르티잔들의 일부는 수기 등 증언기록을 남기면서, 박일리야가 트리피츤과 함께 일본 민간인 학살에 적극 가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박일리야는 단 한번도 무고한 일본 민간인을 살해하거나 일본군을 먼저 기습한 사실이 있다고 인정한 적이 없다.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박일리야가 했던 주장들을 살펴보면 박일리야는 「일본군의 반자이 기습공격을 받고 반격했고 자신들이 일본 영사관에 도착했을 때 일본인들은 항복을 거부하였고, 광적인 집단자살과 방화로 모두 죽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박일리야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하자면 「나는 니콜라예프스크의 일본 민간인 학살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일본군편에서 니항사건 도서를 출판한 A.Y.구트만(일명 ‘굿맨’ : ГУТМАН А. Я. 혹은 Anatoly Yakovlevich Gutman)의 책에는 고려인 파르티잔이 처형한 친일파는 1~2명 정도로 보이나, 근래 한국에서는 구트만의 백파군대 소설조차 읽어보지 않고 짜깁기하여 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과거 한국내에서 자유시 사건(혹은 자유시 사변, 자유시 참변)을 다룬 책들에게서 박일리야를 「아편쟁이, 무정부주의자, 강도, 학살범, 트리피츤의 동조자」 등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일본측 자료만을 참고할 수 밖에 없었고, 니항사건과 관련된 러시아·중국측 자료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당시 니콜라예프스크에는 중국인들이 한국인, 일본인들보다 많이 살았으며, 중국측 기록은 오늘날까지 공개되는 것이 거의 없다.
박일리야의 학살자로 조작하는 사람들은 김하석, 오하묵, 최고려 등으로 박일리야와 대립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기록에서는 일본에 협조하지 않는 자도 간첩 등으로 기록한 경우가 많았다.
다만 증언록 등이 스탈린에 의한 대숙청 후에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그들도 누군가를 밀고할 수 밖에 없어던 사정이 있을 수 있다.
자유시로의 독립군 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홍범도, 안무 , 김좌진, 이동휘, 이용 등은 대부분 그러한 주장(자신들이 친일파거나 간첩이라는 최고려 등의 거짓말) 자체를 전혀 인정한 적이 없었다.
1921년 마자나바에서 안무 장군은 박일리야 장군과 같은 방을 사용하였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즉, 안무는 러시아 땅에서 일어난 그 유명한 니항사건의 전개과정을 박일리야로부터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 안무 장군 같은 분이 왜적이 1920년의 4월참변, 간도참변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그 중요한 사건을 박일리야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았을 가능성은 없다.
매사 신중하고 또 신중하였던, 안무 장군은 그런 것을 확인해 보지 않을 정도로 허술한 사람은 결단코 아니다.
안무 장군은 다른 독립군들과 달리 박일리야 장군으로부터 직접 니항사건의 진실을 들은 사람이었다.
안무 장군과 박일리야의 개인적인 관계가 좋았던 나빴던 것에 관계없이 1921년 6월 28일을 수라제프카의 박일리야를 따르던 사할린 의용대가 무참히 죽고 무장해제 되자 다시 만주로 돌아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중략......
그리고 자유시의 독립군들은 니항해방을 일본군 전사자수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봉오동 청산리 싸움과 함께 마찬가지인 독립군의 승리로 보았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박일리야 장군의 주장을 살펴보고, 그리고 반대세력의 주장 등을 확인하여 박일리야가 학살자의 누명을 쓴 것은 아닌지, 박일리야를 동조하였던 사할린 의용대와 간도 독립군이 억울하게 1921년 6월 28일 수라제프카 지역에서 누명을 쓰고 살해된 것은 아닌 지 살펴본다.
민간인 희생자 수
니콜라예프스크에 있었던 일본인 생존자와 볼셰비키를 피해 일본으로 달아났던 백파 러시아인, 혹은 소련에서 박해 등을 받아 미국 등으로 망명했던 전직 러시아 볼셰비키(소련의 배신자)들은 니항사건의 전개과정(1918년 일본군의 점령에서부터 1922년 일본군의 니항 철수 때)의 학살당한 사람의 수가 대기근으로 인한 사망자 및 백파에 의해 살해된 사람을 제외하고도 최소 4,000여명에서 ~ 최대 13,000명 이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다수의 끔찍한 사망자 사진들을 책과 인터넷에 증거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백과사전들에서 대표적인 니항 학살의 증인으로 적고 있는 구트만과 같은 친일파도 학살당한 수백여명의 민간인 사진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일본인 사망자수 731명~900여명 정도는 당시의 볼셰비키와 한국 독립군들도 아무런 다툼 없이 모두 인정하였다.)
그리고 니항 사건후 생존자 수를 확인해보니 학살당한 사람이 3,000명에서~12,000명이라는 수가 도저히 나오지 않자, 니콜라예프스크의 인구를 늘려잡아 사건 당시 니콜라예프스크에는 최소 2만명 이상 있었다고 되지도 않은 거짓말을 해댄다.
(1920년 앞과 뒤의 니콜라예프스크의 인구 조사는 그런 거주자 수가 없었고, 내전의 공방이 벌어진 한가운데였던 니콜라예프스크에서 갑자기 1920년에만 최소 2배 이상 3배 정도의 인구증가가 있었다는 헛소리가 된다.)
사건 당시 니콜라예프스크에 있었던 사람으로 확인된 한국계는 박일리야, 이지택, 김낙현(김학현) 등 수백명이다. 그들중 민간인 희생자수를 수천명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오늘날의 러시아와 1921년 니항사건에 참여했던 사할린주 출신 의용대, 자유시 집결 독립군 중 사할린 의용대에게 사살명령을 내렸던 자들 이외에는 니항 민간인 사망자가 3,000~6,000명이라고 인정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고, 이 책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일본군과 무장 일본인, 이에 협조했던 백군 등의 사망자가 1,000여명 이상인 것은 분명하다.
여기다가 러시아 대기근으로 인한 사망자를 포함하는 문제까지 고려한다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된다고 할지라도 사망자수는 항상 논란이 될 것이다.
1919년경 니콜라예프스크의 인구 (대략)
트리피츤이 해방시킨 니항지역의 정확한 인구 정보는 없다.
· 남성(군인과 아이 포함) 4,917명,
· 여성(어린이 포함)은 3,795명 정도였으며
아마 계절노동자, 중국인, 일본인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중국인 한국인중 러시아국적을 취득한 자는 주민수에 포함되었다. 니콜라예프스크에는 한국인 이 운영하는 소학교가 있었다고 러시아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 니항사건이 발생한 도회 지역의 인구가 7천에서 8천여명 정도라는 것은 시베리아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도 타당하다. 그러나 니항 도회의 인구를 1만여명 이상으로 보기에는 다른 지역에 비하여 주택수와 면적이 작다.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서 대피한 인원
트리피츤이 니항을 불태운 후 께르비 등으로 생존해 대피한 민간인 수는 아래와 같다.
· 께르비 마을 대피 민간인 : 5,452명 (어린이 2,351명 포함)
· 니항 주변의 광산 대피 민간인 : 3,216명 (어린이 1,355명 포함)
· 중국인 대피 인원 : 약 2,000여명
(니항주재 중국영사와 강방함대 등으로 대피)
· 백파계 대피 인원 : 최소 약 500여명 이상 (일본군의 니항 재점령후 아쓰토라한호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대피시킨 인원만 500여명. 1920년 8월 10일 조선일보 기사에서 인용, 최소 2천여명이라는 설도 있다)
· 모든 공산주의계 파르티잔 : 3,500명 (러시아, 한국, 중국 등 모두 포함)
대피인원 합계 : 12,668여명이다. (중국인 대피인원 2천여명 제외)
단순 계산만으로는 일본과 친일파 백군(볼셰비키중 배신자들도 나중에 일본과 동일한 민간인 대량 학살이 있었다고 주장)의 주장은 속임수이며, 니콜라예프스크의 모든 민간인들은 대피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민간인 학살은 있었다.
오늘날 학살자수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은 트리피츤이 해방시킨 니콜라예프스크에 사람이 도대체 몇 명 있었는지 알 수 없고. 1918년 니항을 침략한 일본군과 백군은 얼마나 학살했으며. 1920년 2월 29일경 니항을 해방시킨 파르티잔이 얼마나 처형했는지 정확한 숫자가 없기 때문이다.
(트리피츤이 직접 처형을 명령한 사람은 대략 40여명 정도이다.)
또한 께르비나 사할린섬 북부 혹은 사할린섬 남부, 블라디보스토크 외에 니항 주변의 타이가 숲으로 일본군과 백군, 적군을 피해 도망간 민간인은 얼마나 되는지, 이 과정에서 추위와 기아로 사망한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일단 민간인 사망자중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최대 2,000여명 존재했던 중국계는 학살에 의한 피해는 없었다고 봐야한다. 니항 사건 당시 북경정부 소속 강방함대는 4척 이상의 군함과 중국군 최소 234명 이상이 타고 있었다.
(※ 당시 니콜라예프스크에는 중국계 어선 등이 수십에서~수백척 있었다.)
민간인 사망자가 1천여명을 넘기는 힘들어 보인다.
최초 트리피츤은 니항을 포위하고, 백군에 대해서는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일본군 침략군에 대해서는 무장해제만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행위를 볼 때 트리피츤이 최초 일본군 전멸이나 일본 거류민 몰살을 목표로 니항을 해방시킨 것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민주적 절차를 거쳐 혁명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니항을 침략한 일본군과 백군과도 협상하였다.
니항 해방후 트리피츤이 백파 지지자를 체포하여 처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숫자가 100명을 넘기는 힘든다. 대략 사형이 선고된 사람들중 70여명에서 수십여명이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법정이 수행되었다. 그들은 약 70명의 사람들을 처형했고, 과거 볼셰비키를 학살하였거나, 백파 자위대, 백파 간첩 등 과거 볼셰비키 학살에 연루된 광적인 사람만을 처형하였다.
또한 노동자의 복수로 자본가나, 백군 계열에 대한 보복도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일본군의 기습 공격전 감옥에 갇힌 나머지 백파 지지자들은 사면을 받았다.
일본인 여성과 민간인이 일본군의 3월 12일 공격에 동참하지 않고 해빙을 기다려 니항을 떠났더라면 니코라예프스크는 그렇게 파괴되고 희생자가 많이 나올 수도 없었다.
2월 29일 니항 해방 직후 트리피츤의 동조자들이 모두 전문 인간 도살꾼이라는 증거는 지금까지 어디에도 없다.
트리피츤은 일본군의 기습공격에 의한 동료의 잔인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학살과 복수를 명령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트리피츤은 처형될 때까지 「일본군을 반격하는 과정에서 자신은 부상으로 상황을 제대로 지휘할 수 없었다. 또 자신은 무고한 민간인 학살을 지시한 적이 없다」고 최후까지 주장하였다.
일본군은 트리피츤과 친해진 후 볼셰비키에 협조하는 척한 후 공격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교활한 공격은 모든 것을 완전히 가로 막았고 모든 후속 죽음이 전적으로 일본인의 사악한 술수에서 벌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트리피츤 부대 지도부의 살해와 패배, 볼셰비키의 살해는 니항을 해방시켰던 볼셰비키의 복수심을 증폭시켰다.
아시다시피 독립운동사에서 반란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피는 피, 죽음은 죽음으로 처벌되었다. 일본군의 배신 행위로 학살과 공격에 가담했던 일본 민간인은 국제 전쟁 법의 적용을 벗어났던 것이다.
실패한 일본군과 백파의 사악함은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니콜라예프스크에서 그들과 어떤식으로든 연결된 일제 거류민, 러시아계 백파 지지자들에게 무자비한 공포와 죽음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일본군과 공격에 동참했던 일본인들의 사망자 숫자는 비교적 정확하다.
일본측 주장 731명에서부터 러시아측 주장 900여명까지 대략 731~900여명의 일본인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 참고인물
안드레예브(Андреев Иван Тихонович. 1884년 출생~1933년 사망)
트리피츤 처형에 결정적 역할을 한 안드레예브는 1차 세계대전에 제정 러시아군으로 참전한 자로. 1917년 2월혁명 이후 니항으로 돌아와 볼셰비키에 가담하였다.
제정 러시아 짜르군대(백파군대)에서 근무했던 안드레예브와 가족들.
안드레예브는 박병길, 리아도르스키 등과 함께 일본군의 협조로 1920년 7월경 트리피츤과 동료의 체포를 주도하였다.
1920년 7월 9일 트리피츤과 동료 23명 이상이 처형되었다. 안드레예브는 트리피츤 처형 사건을 보고하기 위해 아무르주의 블라가베셴스크로 갔다. 그리고 그는 자유시(스바보드니)에서도 포병부대 책임자로 일했다.
블라가베셴스크 등에서 (트리피츤의 처형을 반대하는)무정부주의자 등의 암살위협에 시달렸다. 1922년경 안드레예브는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사할린 섬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였다. 일본군이 철수하자 사할린섬에 머물 수 없어 1925년경 중국 상해로 갔다가 1933년 사망했다.
......참고인물 하략......
니항사건에 관계자에 대한 평가와 조사
일부 역사학자들은 트리피츤의 처형은 니항 혁명위원회보다 일본군과의 계속되는 전쟁을 두려워하던 상급기관인 소련 공산당 지휘부의 비밀 명령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라고도 한다.
니코라예프스크는 주변을 제외한 도심이 사실상 완전 파괴되었고, 니항이 파괴되지 않았다면 따라오지 않았을 중립을 지켰던 주민들이 트리피츤을 따라 피난길에 오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추위, 식량부족, 의복부족, 주택부족은 피난민들의 생활을 궁핍하게 하였고, 이 과정에서 부모를 잃은 어린이 노약자들이 극심한 식량 부족 등으로 죽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공산주의 상급부대의 지시가 전혀 없이 트리피츤이 혼자 결정하고 혼자 명령한 것이라고는 오늘날 생각되지 않는다.
(※ 그리고 볼셰비키 상급기관은 시끄러운 문제를 모두 트리피츤과 몇 명의 사람들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처형을 지시했을 수도 있다. 니항사건의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트리피츤의 처형은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진행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록들은 트리피츤은 볼셰비키 상급부서 지시에 따라, 니항을 평화적으로 해방하였으나, 3월 12일 일본군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반격하였고, 이 과정에서 트리피츤은 부상을 당했다. 볼셰비키가 일본군을 사실상 전멸시키자 봄이 오면 재공격해올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일본군과 공격에 협조하였던 백군 지지자들, 일본 거류민들을 위주로 학살을 한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그리고 도심을 완전 파괴하여 어쩔수 없이 강제 피난길에 오른 민간인들도 다수 사망하였고, 이 과정에서 트리피츤과 대립하였던 공산당원도 다수 처형되었다.
다만 이러한 행동이 상급기관의 지시를 어기고 트리피츤이 주어진 권한을 넘어선 학살을 방치하였다는 부분에서는 동조하지 않는 역사학자가 오늘날까지 많다.
트리피츤에게 학살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역사학자들은 「트리피츤이 니항을 평화적으로 해방시키려고 하였으나 트리피츤이 보낸 사절을 일본군과 백군이 먼저 잔인하게 살해하였고, 니항을 평화적으로 해방시킨 볼셰비키를 전멸시키 위해 협조와 중립을 지키는 척 한 후에 기습공격으로 볼셰비키들을 살해하려다 실패한 일본군이 사실상 전멸되자, 니항을 탈출한 일본인, 백군, 친일 러시인들이 트리피츤의 부대에 의해 일방적인 민간인 대량학살이 일어났다고 조작했다」고 생각한다.
그 뒤 1920년 3월경 하로프크스크의 볼셰비키 상급부서에는 니항사건의 진실을 일본군과 합동조사를 제안하였으나 일본군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 3월말 하바로프스크에서 특별위원회가 충돌상황을 조사하기 위해서 니콜라예프스크에 도착하였다. 일본군 대표는 참여거부로 조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니콜라예프스크의 볼셰비키들은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사건당시 국제 조사위원회를 소집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러면서 니콜라예프스크의 볼셰비키들은 일본군의 공격은 각본에 따라 미리 계획된 행동이었다고 오늘날까지 주장한다.
니콜라예프스크에 있었던 고려인 파르티잔의 주장도 이와 같다.
그리고 일본군이 니항사건을 핑계로 1920년 4월 연해주에서 대대적인 공격과 학살을 감행하였다.
모스크바의 레닌정부는 일본군이 1920년 연해주에서 다시 4월 참변을 일으켜 대대적 공격을 가해오자, 대기근과 수년간 지속되는 일본과의 전투를 서둘러 종결하기 위해서 동시베리아에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극동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일본군의 철수를 위해서는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일본군을 전멸시킨 트리피츤을 희생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볼셰비키인 척하며 트리피츤 휘하에 침투해 있던 안드레예브와 같은 일본 간첩들이 일본군과 트리피츤 처형을 내통하였다.
그리고 께르비에서 무정부주의였던 트리피츤이 니콜라예프스크에서 모든 처형명령을 내린 것으로 일부 볼셰비키를 조종하였고, 트리피츤을 께르비에서 갑자기 체포하여 제대로 된 재판 없이 3일만에 서둘러 처형하였다는 것이다.
※ 니항 사건이 민간인 대량학살이 맞다면,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된 1920년 3월 12일부터 일본군은 볼셰비키와 합동조사를 하는 것이 맞고, 께르비에서도 형식적 재판만을 하고 트리피츤을 처형할 것이 아니라, 니항사건의 최고 책임자로서 구체적 증거와 증인을 바탕으로 학살사건 민간인 희생자 수 등을 조사하고 처형하는 것이 상식적이라는 것이다.
1920년 7월 6일경 (블리디보스토크) 조사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니항 도심의 주택중 100채 정도가 파괴를 면했다고 하며, 니항 시내 건물은 35개 정도만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니콜라예프스크는 초토화되어 있었다.
러시아 공산혁명 직후의 대기근 당시 수백만명 이상이 아사한 것으로 알려졌을 뿐, 아무르 지역이나 동시베리아 지역에서 얼마나 아사했는지는 정확한 자료가 없다.
자기 자식 잡아먹는 녹두영감 이야기나, 흉년에 이웃끼리 자식을 바꿔 잡아먹는 이야기를 허투루 들을 수 없는 대기근이었으며, 실제 해방운동사에는 쌀 한줌에도 살인이 나는 경우가 기록되어 있다.
니항사건 당시 한국 언론의 보도
1920년 6월 23일자, 7월 9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5월 25일경 니항 일본인 참살의 원인이 일본군에 의한 (트리피츤 부대의) 파르티잔 대장 암살의 보복에서 비롯되었고, 백파의 패전이 확실해지자 미국 등 연합군이 시베리아에서 완전 철군을 준비하고 러시아 내정에는 더 이상 간섭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일본만 4월 참변을 일으키고 동시베리아에 병력을 증파하였고 나아가 동청철도와 시베리아 철도 관리권까지 노리니 러시아에서 좋게 생각할 수 없다고 보도하였다.
또 다른 열국들이 이제는 모두 일본의 침략주의를 경계한다고 하였다.
1920년 7월 3일자 조선일보는 니항사건에서 생존한 일본여자는 16명이라고 하였으며. 1920년 7월 7일자 동아일보는 중국 강방함대의 포함이 같은 연합군인 니항의 일본군을 포격한 것은 사실무근(허위)라고 보도하였다.
1920. 7월경 중화민국, 미국, 영국 등이 일제의 만주 동청철도 점령과 북사할린섬 점령을 인정하지 않음을 발표한다.
1920. 8월경 러시아 내전 간섭에서 완전 철군한 미국은 일본군의 북사할린섬 점령과 시베리아 주둔을 비난하고, 캘리포니아주내에 일본인 토지 소유를 금지시킨다.
고려인 사할린주 의용대 께르비에서 자유시로 출발
께르비에서는 안드레예브 일파의 임시군사혁명사령사령부가 권력을 장악하였고, 8월 2일 소비에트 대회(노동자대회)가 열렸으며, 8월 16일 대회는 인민혁명위원회를 선출하였고 이것이 민간권력을 모두 장악하였다.
인민혁명위원회는 13명중 4명이 공산주의자였다. (고려인 대표는 박일리야임. 박병길 아님)
트리피츤 처형후 께르비에 있던 고려인 파르티잔 부대(일명 사할린주 출신 의용대)들은 아무르강의 해상교통을 이용하지 못하고, 주로 육로를 통해서 자유시 방향으로 이동한 것은 러시아 정부의 기록을 비롯한 모든 기록들에서 일치된다.
김낙현의 일방적인 주장에 따르면, 니콜라예프스크의 고려인 파르티잔중 박병길(전직 니항 歸化 鮮人 民會 주무 추정)은 흑룡주 정부와 먼저 협의하기 위해 출발하였고, 김낙현 등이 니항부대를 지휘하여 밀림을 뚫고 자유시까지 1200~1300킬로미터를 무서운 험로를 돌파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수천여명의 피난민도 함께 아무르주와 자유시 일대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의 침략을 받지 않은 지역을 통과하였기에 식량지원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측 기록은 이러한 식량보급을 한국계 이르쿠츠크파에서 주도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러시아 혁명세력측에서 피난민들과 트리피츤의 잔존 부대를 위해 보급하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고려인 니항부대 및 과거 트리피츤 부대의 아무르주로의 출발은 1920년 9월경이었다고 한다.
극동공화국 아무르주에서 온 베즈드닌은 1920년 9월 5일경 트리피츤 부대를 해산해 아무르주 자유시의 19연대로 편입할 것을 명령한다. (※ 출처 :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й Республики) Безднин, приказом № 1 и 05.09.1920 года распустил Ревштаб партизанской армии и принял от Командующего армией Андреева И.Т. все дела Ревштаба21)
트리피츤 사망후 그를 지지했던 많은 파르티잔들이 이탈하였고, 아무르주 자유시의 제19연대에 편입하는 사람은 절반도 되지 못하였다.
그들중 상당수는 하바로프스크 등 시베리아 지역의 다른 파르티잔 부대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트리피츤 부대의 지휘부 일부도 생존하여 다른 동시베리아 지역에서 활약하기도 하였습니다.
김낙현의 주장에 따르면 니항부대는 아무르주에 도착하여 제19연대 제2대대로 편성되었다고 한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에서는 3대대로 편입되었다고 기록) 대대장은 임호가 임명되었다고 한다.
니항 볼셰비키중 니콜라예프스크의 고려인부대는 곧 아무르주의 주도인 블라가베셴스크와 자유시 일대에 도착하였다.
이 과정에서 트리피츤 처형을 주도한 안드레예브도 도착하였다.
안드레예브가 1921년 6월 28일 자유시참변 무렵 자유시에서 맡았던 역할에 대해서는 (포병지휘관을 지냈다는 것 이외에)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현재까지 없다.
일본군의 니항철수와 사할린섬 북부 반환
이 무렵 니항과 주변에 와 있었던 조선인 노예 노동자와 조선인 여성 가라유키상에 대한 자료는 매우 희박합니다.
1922년 7월 일본은 사할린섬 북부를 제외한 러시아령토에서 철수하기로 하였다. 1922년 9월 25일 니항을 점령했던 일본군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일본군은 사할린섬 북부를 점령하여 주변의 어장, 석유, 석탄, 목재를 대량 획득하였다.
1922년 10월 1일에서~2일경 니콜라예프스크의 권한은 러시아로 귀속되었다.
일제 철수후 니항으로 귀환한 사람들중 일부는 회고록에서
“트리피츤은 실수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니항이 불에 타지 않았다면 주민들은 대피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달랐을 것입니다. 트리피츤은 일본 간첩들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습니다.”
고 주장한다.
1921년 6월 28일의 자유시 사건이후 오홀라가 코민테른에 보고한 문서에 따르면, 자유시 사건 당시 수라제프카에 주둔한 사할린 의용대를 무력으로 무장해시키고 간부(박일리야)를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4권 러시아편 I, 62. 한인혁명부대 혁명군사소비에트의 전권대표의 보고서」, 오홀라가 코민테른에 1921년 6월이후 보낸 보고서)
고려인 니항부대(훗날의 사할린 의용대)는 니항사건의 전과정을 지켜봤기 때문에 민간인 5천명 이상이 정말 학살되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기록을 대조해보면 박일리야는 누명을 쓴 것이 명확하다.
누군가 없는 죄를 만들어 박일리야를 사살하라고 지속적인 모략을 계속한 것이었다.
러일전쟁(1904~1905) 패전후 제정 러시아는 사할린섬 남부와 쿠릴열도, 남만주철도 등을 일본에 할양하였다.
러시아 내전기 레닌정부는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과 공산주의 정권수립과 안정을 위해 농민들로부터는 곡물 징발, 자본가의 재산 몰수하였고. 1918년 독일과 강화조약(Брест-Лито́в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을 맺으면서 러시아 영토의 일부를 할양해 주고 배상금을 약속해 러시아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니항 사건 무렵 볼셰비키 상급기관이 시베리아의 일본군과 연합군의 빠른 철수를 위해 트리피츤, 박일리야 등을 무정부주의자, 니콜라예프스크의 학살범, 강도 등으로 죄를 뒤집어씌워 처형을 비밀리에 명령하였다고 하여도 특별히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26년 니콜라예프스크의 러시아어 명칭은 니콜라예프스크에서 「니콜라예프스크 나 아무레」로 개명되었습니다.
일본군은 1925년 5월경 사할린섬 북부에서 철수하였으나, 일본이 점령했던 석유, 석탄 광산은 1944년에서야 소련측으로 이전하였다. 사할린섬 북부를 떠날 때 일본인은 많은 광산을 침수시키고 파괴하였으며 주택도 파괴하였다고 한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후 러시아는 사할린 섬 남부와 쿠릴열도 일부를 다시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할린섬(일본명 화태도) 남부에 일제 식민지시절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되어 착취당했던 수만여명의 한국인들이 일본이나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할린섬 남부에 남아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였다.
니항사건(니콜라예프스크 사건) 관련 참고문헌과 간단한 해설
(1) 일제 참모본부 편(参謀本部 編), 「시베리아 출병사(西伯利出兵史 : 大正七年乃至十一年)」, (大正13年印刷の複製 限定版) 新時代社, 1972
(2) 일본육군 장령 출신 菅原佐賀衛, 「시베리아출병요사(西伯利出兵要史)」, 偕行社, 1925
(3) 니항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 시마다모토타로(島田元太郎 :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니항사변 회고 자료(尼港在住の実業家で日本軍への協力者). 니항사건 이후 순난자비 건립 및 가라유키상 유곽 운영
(4) 니항사건에서 처자식을 죽이고 자살한 이시다 토라마츠 영사대리 부영사 石田虎松(Исида Торамац) <尼港事件のときの尼港副領事>관련 기사
(5) Hosoya Chihiro(1920년생~2011년 사망), “ORIGIN OF THE SIBERIAN INTERVENTION, 1917—1918.” / The Annals of the Hitotsubashi Academy, vol. 9, no. 1, 1958, pp. 91–108. // JSTOR. (дата обращения 21.03.21)
(6)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만주의 친일파 ‘시묘노프’의 활약상을 기술한 Борисов Б. Дальний Восток : атаман Г. М. Семенов и его борьба за освобождение России от большевиков. — Вена, 1921. 62쪽.
(7) (친일파) A.Y.구트만(혹은 ‘굿맨’ : ГУТМАН А. Я.), 「니콜라예프스크의 죽음(ГИБЕЛЬ НИКОЛАЕВСКА НА АМУРЕ, 영문도서명은 ‘니콜라예프스크의 파괴’)」
(Английский перевод: Gutman, Anatoly. Ella Lury Wiswell (trans.); Richard A. Pierce (ed.) The Destruction of Nikolaevsk-on-Amur,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 Limestone Press, 1993. — ISBN 0-919642-35-7.) : 한국 독립군이 약 1~2명의 민간인을 처형했다고 주장함.
(8) 에치(В. Эч), <사라진 도시(Исчезнувший город)>, 블라디보스토크, 1920. 70쪽. 일본군 점령지를 방문해 볼셰비키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
(9) 이르쿠츠크파 문건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 (1922년경,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발행,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자료편2, 1980) 및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외항일운동자료 일본외무성기록, 在露 反日鮮人團體 機密文書 送付에 관한 件)
(10) (친일파) 예밀야노프(К. А. Емельянов), <지옥의 사람들> (A.Y.구트만과 라비치의 백파군대 소설에도 자주 등장함)
(11) (만주의 친일파, 미국 이주) 라비치(Яков Львович Лович), <적(Враги) : 소설 이름임>, 가공의 인물을 통해 만주·연해주·사할린주에서의 백파군대와 일본군의 활약상을 기술하고 볼셰비키의 만행을 폭로
(12) 강동진, 「일본근대사」, 한길사, 1985 (※ 일본군 북사할린섬 점령선언을 1920년 7월로 기재. 북사할린섬 공격은 1920년 4월부터 시작되었고 파르티잔 토벌후 1920년 7월 점령을 선언한 것임. 점령선언과 공격은 다른 것임)
(13) 김홍일, 「대륙의 분노 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 (니항사건을 일제의 터무니 없는 생떼라고 주장)
(14) 아무르 주(州) 마자나바 군(郡), 고쉬 전투(Гошский бой) 관련 자료
(15) 윌리엄 시드니 그레이브스(William Sidney Graves), 「아메리카의 시베리아에서의 모험 1918-1920(America’s Siberian Adventure 1918-1920)」 (일제의 시베리아에서의 만행과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진술)
(1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7, [니콜라예프스크에서의 朝鮮獨立示威行列 請願 拒否의 건], (在ニコラエウスク領事代理 副領事 石田虎松), 1919년 04월 03일
https://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haf_006_1640
(1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8, [國民의 聲이라는 週刊新聞의 발행에 관한 건], 石田 (領事代理), 1919년 05월 05일
https://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haf_007_0100
(1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8, 朝鮮新聞 再刊에 관한 건, 石田(니콜라예프스크領事代理 副領事), 1919년 10월 20일
https://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haf_007_0830
(19) 세르게이 프치츤(С. Птицын), <니콜라예프스크에서 20일간. 유격대원의 회고록>, 하바로프스크, 2013. 208쪽. 니항사건 참여자 회고록
(20) 드니프로프스키(Днепровский С. П.), <골짜기를 지나 언덕을 넘어>, 하바로프스크, 1956. 232쪽. 소련 공산주의 입장에서 니항사건을 기술
(21) 루빔 프라예르만(Р. И. Фраерман), 「황금색 수레국화(Золотой Василек)」, 1976. 400쪽. 근래 러시아의 유명작가로 니항사건 참여자
(22) 리피킨(Левкин Г. Г.), <그랬지만, 현실과 함께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르 지리 학회, 하바로프스크, 1999.
(23) 유리 제코타프(Юрий Жекотов) 저, 「그 슬픈 아무르의 날들 Те печальные амурские дни.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시의 역사 연구」, 2016~2017년경 출판. 총104쪽~108쪽 분량. (일본의 민간인 학살과 조선인 노예 노동을 기술)
(24) 주코프스키-주크(И. И. Жуковский-Жук), <레비제바와 트리피츤 : Н. Лебедева и Я. Тряпицын (Партиз. движение в низовьях Амура)> Материалы и документы, 1922, 101쪽
(25) 스말야크 저, 「아무르강 하류 비극의 발자취(내전 МЕЖДОУСОБИЦА)」, 하바로프스크 지역 전승 박물관, 2009
(26)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
암군강 주변의 추모비. 께르비 마을의 명칭은 오늘날 변경되었다.
께르비 암군강 주변의 추모비
께르비에서 피난도중 친일 반란군의 공격에 의해 살해된 야코프 트리피츤.
오늘날 러시아에서 그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나오고 있다.
께르비의 트리피츤이 묻혔던 곳. 공산주의 시대에 시신이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제야강 주변 자유시 참변의 현장 모습.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던 수라제프카 마을
오늘날 러시아에 남아 있는 니항사건 추모비 중 하나.
니항사건 추모비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