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g짜리 과자 한 봉지에 온 나라가 들썩인다.
매장 진열대에 깔리기가 무섭게 동이 나버린다. SNS는 온통 이 과자 이야기로 도배돼 있다. 맛 한번 보기 위해 편의점과 마트를 수도 없이 다녔다는 ‘순례기’가 올라오는가 하면 어렵게 구한 귀한 과자 맛을 봤다는 ‘무용담’이 올라온다. 급기야 “생산이 중단됐다”는 식의 루머가 돌고, “이 과자는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 섞인 음모론까지 등장했다. 인터넷에선 웃돈까지 붙어 거래가 된다. 일부 상점에선 다른 상품 끼워팔기를 해 눈총을 받기도 한다. 이쯤 되면 하나의 사회현상이다.
도대체 이 과자가 뭐길래? 눈치챘겠지만 해태제과 ‘허니버터칩’ 얘기다. 감자칩 시장에서 만년 꼴찌였던 해태제과는 이 제품 하나로 연일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허니버터칩은 감자칩은 물론 스낵류 전체 매출 1위를 달성했다. ‘국민 스낵’ 새우깡도 제친 지 오래다. 9월 초부터 시중 판매된 허니버터칩은 11월 말 기준 누적매출액 130억원을 훌쩍 넘길 것으로 전망된다. 연말까지 200억원 매출은 가볍게 올릴 것으로 보인다. ‘반짝 인기’를 넘어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지금까지만 놓고 보자면 대박임엔 틀림없다. 경기 불황, 부진한 투자, 격화되는 경쟁, ‘대박상품’ ‘ 히트상품’ 부재 등 악재투성이인 요즘 비즈니스 환경에서 허니버터칩 성공 스토리는 성장동력을 상실하고 무기력증에 빠진 우리 기업들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허니버터칩 성공 요인은 5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① ‘작은 혁신’이 승부 갈랐다
‘감자칩=짠맛’ 공식 파괴
허니버터칩은 아이폰처럼 패러다임을 바꾸는 수준의 혁신 상품이 아니다. 좀 단순히 말하면 감자칩을 달콤·고소하게 만들어 내놓은 상품이다. 하지만 이 작은 차이가 시장에선 폭발적 반응을 불러왔다. 이른바 ‘작지만 의미 있는 혁신’이다. 감자칩 하면 어떤 맛이 떠오르는가. 열이면 열 ‘짭짤한 맛’이라 답할 것이다. 다른 제품 대부분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짠맛을 낸다. 허니버터칩은 아카시아꿀과 발효된 고메버터로 단맛과 고소한 맛은 더하고 짠맛은 조금 줄였다. 아무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누구도 시도해 보지 못한 혁신이자 발상의 전환이었다.
전미영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교수는 “혁신이라고 반드시 거창할 필요는 없다”며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사소한 것에서도 혁신을 만들어낼 수 있고 시장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셀카족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인 셀카봉 역시 일상의 소소한 면에 주목해 작지만 의미 있는 혁신을 이뤄낸 예”라고 설명했다.
스마트폰 제조업체들은 어떻게 하면 더 선명한 카메라 화질을 구현할지를 고민했고 모든 셀카족도 더 예쁜 셀카를 찍는 데 골몰해 왔다. 하지만 누구도 어떻게 하면 원거리에서 더 자연스럽고 다양한 모습의 셀카를 찍고 여러 사람이 함께 나오는 사진을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선 생각하지 못했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셀카봉 개발자는 여기에 착안한 것 같다. 복잡하고 첨단을 달리는 기계장치도 필요 없었다. 막대기 끝에 스마트폰 홀더만 붙여 놓으면 끝이었다. 단순했지만 파괴력은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다.
② 거인과 맞설땐 다른 기술로
‘달콤한 맛’ 역발상으로 승부
극진 가라테 창시자인 최영의(오야마 마스타쓰)는 젊은 시절 세계를 돌며 정상급 파이터들과 100여 차례 ‘맞짱’을 떠 모두 승리를 거둔 불세출의 무도인이다. 가라테는 물론 유도(4단)와 복싱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그는 헤비급 복서나 거구의 레슬러들을 상대할 땐 손기술이나 그래플링(메치기·꺾기·조르기 등의 기술) 대결은 피하고 서양인들에겐 낯설었던 발차기로 승부했다. 현란한 발기술을 구사하는 사바테(프랑스의 발차기 무술) 달인과 대결에선 예상치 못한 박치기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강자들과 맞붙을 때마다 상대가 더 우위에 있는 기술로 정면승부하는 대신, 적이 구사할 수 없는 차별화된 전술을 사용하고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싸움을 주도했던 것이다.
해태제과는 감자칩 시장에선 ‘만년 꼴찌’였다. 오리온 포카칩이나 농심 수미칩, 농심켈로그 프링글스 등에 밀리고 치어 시장점유율이 10%도 채 안 됐다. 하지만 국내 감자칩 시장은 연 2000억원의 큰 시장이다. 신장세도 일반 과자류의 2배인 연 7~8%에 달한다. 절대 놓칠 수 없는 시장이었다. 그렇다고 거인들을 상대로 엇비슷한 제품, 유사한 맛으로 정면승부를 펼쳐봤자 백전백패할 게 뻔했다. 그래서 택한 게 ‘단맛’이란 새로운 무기였다. 이것으로 전쟁의 프레임을 바꿔 버렸다. 자신만의 카테고리를 재창조했다.
뉴질랜드 분유회사 폰테라의 중국시장 진출 성공기가 비슷한 예다. 네슬레 등 글로벌 대기업들의 각축장이 돼 버린 중국 유아 분유시장에 후발주자로 진입하게 된 폰테라는 유아용 분유로 정면승부를 벌이는 대신 칼슘 함량을 늘린 성인용 분유, 임산부 및 수유기 여성용 특수 분유 등 차별화된 혁신 상품으로 먼저 승부수를 띄웠다. 이의 성공을 바탕으로 이후 유아용 분유로 품목을 확대하는 데도 성공했다.
③ 역시 ‘입소문’이 무섭더라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유튜브를 통한 입소문으로 전 세계적 대히트를 쳤다. 바이럴 마케팅(입소문 마케팅)은 기업들이 외면할 수도 없고 외면해서도 안 되는 가장 효율적 마케팅 수단으로 떠올랐다. 허니버터칩 성공의 결정적 요인 중 하나도 SNS 등을 통한 입소문이었다. 출시 한 달 만인 10월부터 인스타그램을 중심으로 2만건에 달하는 관련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11월 들어선 소유진, 소이, 강민경, 박지윤 아나운서, 유희열 등 유명인들이 인터넷이나 라디오 등에서 허니버터칩을 언급하면서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은 허니버터칩 글들로 그야말로 ‘도배’됐다. 제품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사실 해태제과가 이 같은 바이럴 마케팅을 치밀하게 기획한 건 아니다. 대부분 일반 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글을 올렸다. 해태제과 관계자는 “파워블로거나 SNS 등을 활용한 마케팅을 준비하고는 있었지만 무서운 속도로 입소문이 다 퍼져 버려 우리가 뭔가를 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입소문 마케팅의 위력을 새삼 재확인한 셈이다.
송지혜 베인&컴퍼니 파트너는 “기업들이 바이럴 마케팅에 좀 더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며 “다만 고객들이 열광할 만한 상품성 없이 SNS 마케팅만으로 승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④ 줄 서서 사고 싶게 만들라 소비자들의 갈망을 이끌어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 중 하나는 희소성 전략이다. 쉽게 구할 수 없고 수량이 한정돼 있다고 느끼면 딱히 필요 없는 물건도 괜히 갖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다.
허니버터칩이 ‘SNS 스타’로 떠오른 건 쉽게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편의점이나 마트 어디를 가도 찾아보기 힘든 제품이 되니 소비자들은 애가 탔다. SNS에 허니버터칩을 ‘득템’했다며 우쭐대는 글이 올라올 때마다 ‘도대체 무슨 과자길래…’ 하는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출시할 때마다 품절 대란을 겪는 대표적 상품이 애플 아이폰이다. 가격 하락을 막기 위해 국가별로 물량을 조절하고 출시 일정도 조정한다. 사전예약을 해야만 물건을 제때 받을 수 있다는 공통 인식이 생겨나며 저절로 다른 스마트폰들과 차별화됐다.
수요에 맞춰 공급을 늘리지 않는 ‘몸값 높이기’ ‘신비주의’는 때에 따라 꽤 쓸모 있는 전략이다. 물론 지금도 해태제과는 문막공장을 하루 3교대 24시간 풀가동하며 생산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급량을 더 늘리고 싶어도 늘리지 못한다. 하지만 제품이 큰 인기를 끌면서 의도하지 않게 ‘희소성’ 마케팅을 펼친 셈이 됐다.
전문가들은 기업들이 자사 제품 인기가 높아졌다고 무작정 공급 물량을 늘리려는 유혹을 어느 정도 통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임채운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허니버터칩 인기는 품귀 현상과 입소문에 기반하고 있다”며 “무리하게 공장을 증설하거나 가동력을 지나치게 높인다면 그저 흔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과자가 돼 인기가 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반짝 인기를 타고 공장을 증설했다가 제품 인기가 시들해지며 회사도 손해를 본 꼬꼬면 사례를 참고해야 할 것”이라 조언했다.
⑤ 상품성은 기본…R&D·시장조사 허니버터칩 성공에는 의도하지 않았던 바이럴 마케팅 성공, ‘비의도적’ 신비주의 마케팅 등 ‘운(運)’도 많이 따른 게 사실. 하지만 제품의 상품성이 떨어졌다면 인기는 일찌감치 사그라졌을 것이다. 결국 소비자들을 사로잡은 것은 ‘맛’이었다.
뛰어난 맛은 치밀하고 과감한 연구개발(R&D)과 투자, 철저한 시장 조사에서 나왔다. 허니버터칩 연구개발 기간은 약 2년이었다. 다른 과자 개발 기간의 두 배에 달하는 기간을 연구하고 투자했다. 무작정 연구개발만 한 게 아니라 선발 경쟁사와 차별화한다는 뚜렷한 목표를 세웠다.
전 세계에서 200종이 넘는 감자칩을 모조리 사들여 일일이 맛을 보고 분석했다. 이 중 일본 가루비의 행복버터칩과 해태의 신당동떡볶이를 벤치마킹하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달콤한 맛과 고소한 맛을 잘 배합한 ‘한국적인 단맛’을 찾아냈다.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블라인드 테스트는 전국 남녀노소 1000명을 대상으로 했다. 보통 과자 테스트 표본은 주고객층인 20대 여성 100명 남짓이다. 송지혜 파트너는 “허니버터칩 개발 과정에서 해태제과는 무작정 연구개발에만 매달린 게 아니다”며 “시장 지배 기업들과 차별화한다는 정확한 지향점을 갖고 명확한 타깃을 설정해 놓은 뒤 과감하고 치밀하게 R&D를 진행해 성공을 거둔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