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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사순절을 맞이하기 위해서 제천에 있는 도미니꼬 수녀원에 갔었다. 아직 이른 봄이라 밤공기가 찼다. 칠흑같이 검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이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정원에 세워진 예수님상이 더 하얗고 신비롭게 느껴졌다. 부활절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수난을 삼 일간 미사로 드리는 이것을 성삼일 미사라고 한다. 수도원에서 마련한 미사 시간에 맞춰서 기도를 드리러 갔는데 각 성당에서 드리는 미사보다 수도원에서 드리는 미사가 더 성스럽고 수녀님들의 청아한 기도 소리는 세속에서 물들고 지친 나의 마음을 깨끗하게 닦아내는 듯했다.
제천에서 3박 4일을 지내는 동안 짬짬이 봄나물을 캐러 나갔다. 쑥도 캐고 민들레도 캐고 엉겅퀴도 캐고 달래와 냉이도 캤다. 서울에서 사 먹는 것보다도 산골에서 직접 채취해서 먹으니 그 향이 더 진하고 맛도 더 좋았다. 다듬고 씻고 무쳐서 먹기까지 손은 많이 갔지만 이런 것이 힐링이고 시골살이의 맛이 아닌가 싶다. 매번 식사 시간이면 은은하게 음악을 켜 놓고 식사를 하는 것은 분위기도 좋고 기분도 좋았다. 음악을 좋아해서 기타를 치는 목소리 좋은 자매님이 함께여서 우아한 시간을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짬짬이 배론 성지 이곳저곳을 다니며 기도를 올리고 순교자들의 흔적을 답사하면서 그분들의 순교로 내가 이렇게 편하게 기도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성지 가운데로 개울이 지나가고 물은 촤르르 촤르르 물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낯선 마을을 정든 고향인 것처럼 산책하는 것은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는 시간이다.
그곳에 있는 동안 비가 가끔 내렸다. 저녁을 먹고 나서 차 한잔을 마시며 여유를 부리는 동안 빗소리는 가슴을 타고 내려가는 순교자의 말씀 같아서 가슴에 담아 두고 싶었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까? 혹은 절대자이신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까? 밤은 자꾸만 깊어가는데 순교자들의 깊은 뜻을 알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나 또한 목숨을 내놓을 용기도 없을 것 같아서 그 귀한 목숨을 내놓은 의로운 분들의 영혼의 영원한 안식을 위하여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이것만이 순교자에 대한 가장 좋은 선택이 될 것 같아서였다.
마지막 날에는 제천에서 가까운 원주 용소막 성당을 갔다. 그곳은 작지만, 강원도 유형문화재 106호로 지정된 성당이다. 그러니 얼마나 아름다운 건물이겠는가? 설레는 마음으로 내부를 보러 들어갔다. 안에서는 부활주일을 맞이하기 위한 대청소를 하고 있어서 자세히 볼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바깥으로 나가 유물관으로 갔다. 그곳은 수녀님이 책임지는 곳이라서 유물관에 있는 물건 하나하나를 설명해 주셨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었다.
유물관에는 선종완 신부님께서 사용하시던 물건들이 많이 있었고 어머니께서 사용하시던 물건도 있었다. 선종완 신부님은 원주에서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부르심을 받고 사제의 길을 걸어간 다재다능한 분이셨다. 유물관에는 유학하면서 그린 지도가 마치 대동여지도를 그린 김정호를 생각나게 할 정도로 성경에 나오는 지역들을 세밀하게 그린 지도들이 몇 개 걸려 있었다. 성모영보 수녀원도 설립하고 작사 작곡도 하며 구약성서도 번역한 16개 국어에 능통한 분이셨다. 한나라의 말도 완벽하게 알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독학으로 16개 국어를 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내가 제목을 집념이라고 한데는 큰 의미가 있어서이다. 지금 우리가 쉽게 읽고 있는 성경을 선종완 신부님께서 개신교와 공동으로 번역을 한 것이다. 1968년 성서공동번역 가톨릭 측 전문 위원에 위촉되어 1976년 구약성서 공동번역을 완역하였다. 16개 국어 중에는 로마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라틴어 희랍어 등등 이상한 글씨들을 어떻게 다 배웠는지 놀랍기만 하다. 그는 성서를 번역하기 위해서 등받이도 없는 회전의자를 만들고 반원형 모양의 책상을 입체 식으로 만들어서 회전하면서 책을 읽고 번역을 하나하나 하였다. 이렇게 개신교와 천주교가 함께 만든 공동번역 성서는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아서 오래 사용되지 못하고 각자 종교에서 필요로 하는 새로운 성경책을 다시 편찬하게 되었다. 개신교는 옛날 구어체 성경을 선호했고 천주교는 개신교에 지급해야 하는 인세 때문이라고 한다.
천주교에서는 성인품에 오르는 제도가 있다. 선종완 신부님께서 하신 업적은 많지만, 기적이 없어서 성인품에는 오르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의 업적이 인정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원주시 용소막 입구에는 선종완 신부님의 생가터가 양지바른 곳에 표지석으로만, 남아 있다. 나는 아까 제대로 보지 못한 성전에 다시 들어가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내부를 둘러보고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나왔다. 내일이면 부활절이다. 알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