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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1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2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3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4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5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6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7편
(통합본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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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연해주에서의 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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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포고
※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5, 不逞鮮人 등의 行動報告 및 軍務部 布告 送付에 關한 件」, 독립신문 대한민국 2년(1920) 2월 14일 1쪽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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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무부포고 제1호
충용한 대한의 남녀여 혈전의 시(時) 광복의 추(秋)가 래하였도다 너도 나아가고 나도 나아갈지어다. 정의를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철과 피로써 조국을 살릴 때가 이때가 아닌가
혼있고 피있는 대한의 남녀여 선조를 위하여 후손을 위하여 무도한 왜적에게 학살을 당하는 너의 부모 형제 자매를 위하여 최후의 희생을 공(供)할 때가 이때가 아닌가.
신성한 민족인 대한의 남녀여 사천여년의 조국을 일조(一朝)에 도이(島夷)의 야심에 충(充)한 이래로 과거 십년간 가장 가혹한 압박을 수(受)하여도 가장 치욕된 고통을 당하여도 오직 혈루(血淚)를 먹음고 구차히 잔명을 륜생(倫生)함은 피차(彼此) 금일을 대(待)함이 아닌가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장하여 이천만민족의 의용(義勇)을 합하여 이십세기 금일의 시대적 요구에 응하여 인도를 부르며 나아갈 때에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을 근심할가
네 앞에 독립이요 내 앞에 자유뿐이로다
그런대 우리의 충용과 우리의 피와 우리의 신성과 우리의 권위로셔 나아가 전(戰)하려면 전(戰)하여 승(勝)하려면 무기(武器)를 말하니보다 자금을 론하니보다 제일의 급무(急務)는 전투의 기초인 군인의 양성과 군대의 편성이다.
이것이 과연 우리의 정당한 요구요 필연(必然)한 사실이요 완전한 자각이라 하면 주저말고 고려말고 하루 바삐 나와 대한민국의 군인이 되며 나가 대한민국의 군인이 되여 이천만 남녀는 일인까지 조직적으로 통일적으로 광복군 되기를 서심려행(誓心勵行)할지어다
대한민국 2년 1월 일 (서력 1920년 1월 일)
군무총장 노백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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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무렵 여러 곳에 임시정부 성격의 단체가 있었으나,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자주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한 개 민족의 염원을 담아 1919년 3월경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대한국민의회, 서울에는 한성정부, 그리고 1919년 4월경 중국 상해 등에 보다 큰 규모의 임시정부 성격의 단체들이 만들어졌고, 이들을 통합하기 위한 운동이 있었다.
1919년 9월경에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상해의 임시정부는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를 선출하였다.
러시아령 연해주에 활동하던 이동휘는 여러 개의 임시 정부들을 통합한다는 차원에서 1919년 11월경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직에 취임하였다.
상해 임시정부는 기존의 독립운동가들이 하고 있었던 독립군 양성을 조직적으로 하고자 하였다.
대표적인 독립군의 근거지는 한민족이 많이 살고 있는 간도와 연해주였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을 몸소 확인한 조선인들이 3·1운동이후 자주독립국가 수립의 염원이 침략자를 상대로 한 무장 독립운동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간도와 연해주의 독립운동에 상해임시정부의 역할은 상당한 것이었다.
(※ 이르쿠츠크파에서 주장하는 독립군의 러시아 영토내로의 이동을 자신들이 주도하였고, 러시아 영토에서의 독립운동이 상당부분 오하묵, 최고려, 김하석, 문창범, 원세훈 등 이르쿠츠크파의 공적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자신들의 공로를 너무 심하게 과장한 것이며, 이르쿠츠크파의 대표적인 무장세력이었던 한인 보병자유대대는 독립군 사이에서는 “얼마우재” 부대라 불려지며, 일본군의 전투경험은 아예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도 현재까지 확인되는 전과는 없다. 따라서 이르쿠츠크파의 기록을 읽을 때는 상대방을 근거없이 학살범, 아편중독자, 무정부주의자, 강간범 등으로 죄를 덮어 씌우고 자신들의 공적은 높이는 것이 많다는 것을 명심하고 읽어야 한다)
국내와 해외에서 모금된 자금과 3·1운동이후 모여든 수천에서 ~ 수만명에 이르는 독립군들을 바탕으로 많은 독립군 부대들이 조직되었고 실제 무장독립 투쟁에 나섰다.
그리고 간도, 만주, 연해주의 독립군들은 국경을 넘어 국내의 일제 침략군까지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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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자주 언급하는「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 이란 무엇인가?
1922년 8월경에 작성된「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은 1923년 7월경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영사관에서 알 수 없는 경로로 획득한 이르쿠츠크파 혹은 일제 밀정의 문건이며(밀정이 일제에게 넘겨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외무성의 비밀문서 등으로 보관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게 되었습니다.
이르쿠츠크파를 미화하는 것 외에도 상대방을 악의적으로 매도하였으나 한국의 유명한 반공학자였던 김창순 등은 이 문건을 대부분 사실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잘못된 자료가 계속 떠돌기도 합니다.
또 이 문건은 자유시 사건을 주도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오홀라·슈먀츠키의 자료나 당시 시베리아를 침략한 일제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했는지, 자유시에 가지 않았던 김좌진, 서일, 구춘선 등이 자유시에 도착한 것으로 허위 작성하였고, 거짓말과 조작된 부분도 많습니다.
자유시 사건을 다루는 데 있어서 공격명령이 내려지는 과정을 알 수 있고, 참변을 일으킨 이르쿠츠크파의 일방적인 주장이 잘 담겨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러한 허위 주장을 인용하는 이유는 일부 사건의 발생 순서가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 정부 문서들과 일치되는 부분이 있어 참고하고자 합니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의 전반적인 내용은 최근 러시아 정부 문서 중 코민테른 원동비서부 전권대표 오홀라가 코민테른에 1921년 6월 이후 보낸 보고서(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4권 러시아편 I, 62. 한인혁명부대 혁명군사소비에트의 전권대표의 보고서」)에서 공개된 장문의 문서와 일치되어,
이르쿠츠크파의 한인보병자유대대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오홀라 등과는 교감을 한 후 사할린 의용대를 무장해제 및 지휘관(박일리야)을 사살하려고 한 것은 분명합니다.
또 공격부대였던 볼셰비키 군대 셰르셰프 장군 등의 보고서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 1921. 9. 30일의 이르쿠츠크파 군정의회 선포문,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록물,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신문, 국내의 신문 및 러시아 신문 등의 공격 이유와 날짜 등에서 일치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 문건에서 이르쿠츠크파의 입장에서 사할린 의용대에 대한 사살명령과 무장해제 명령을 내린 과정을 합리화하려고 하였으나, 오늘날 공개된 사실과 대조하여 보면 대부분이 조작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1) 박병길이 니항에서 독립군부대를 만들었고 1920. 2. 29. 평화적으로 니항 해방을 했다.
(2) 박일리야는 니항의 민간인 5,000여명을 학살한 두목이며, 무정부주의자·아편중독자다.
(3) 사할린 의용대가 먼저 자유대대를 공격하여 어쩔 수 없이 반격하였다.
(4) 사할린 의용대가 먼저 1명의 자유대대 측 병력을 살해하였다.
(5) 사할린 의용대 등은 러시아 주민을 약탈한 강도들이다.
(6) 사할린부대가 자유시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등등의 악의적인 거짓말(무고)을 일삼고 있으나, 대체로 박일리야 측을 친일파, 매국노라고 주장하지는 못했습니다. 박일리야 측은 이르쿠츠파를 과거 연해주에서 일제와 협력하는 등 경력이 불분명하고, 친일 매국노라고 소문난 자들도 있다. 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자유시사건 당시 자유시 일대에 집결했던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이러한 이르쿠츠크 파의 거짓말을 전혀 알지 못했으며, 단지 독립군 내부에서 흔히 있었던 군대 지휘권 다툼에서 발단된 것으로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이 문건은 자유시 참변 당시 독립군 학살을 명령하거나 유도한 장본인이 누구인지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 출처 : 1922년경,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발행,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자료편2. 1980) 및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외항일운동자료 일본외무성기록, 在露 反日鮮人團體 機密文書 送付에 관한 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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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쿠츠크(Иркутск)의 합동민족군대와 고려특립부대
동시베리아에서 한인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지던 무렵에 바이칼호 서쪽에서도 한인들이 혁명세력에 가담한다. (시베리아에서는 중국인, 몽골인, 기타 여러 소수민족들도 볼셰비키를 지원해 부대를 편성하였습니다.)
1920년 2월 7일경 백파인 콜차크가 이르쿠츠크에서 살해되자 이때부터 바이칼호 서쪽은 볼셰비키(혁명세력)들이 장악한다. 볼셰비키는 군대를 편성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합동민족군대 라는 국제군 편성이었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4쪽 등)
1920년 3월경에 이르쿠츠크 지방의 여러 민족이 볼셰비키에 호응하여 동양의 공산혁명에 가담하고자 적군의 군대 소집에 응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대략 11개 정도의 여러 민족이 참가하였다. 그보다 약간 앞서 이르쿠츠크의 한인들은 고려특립중대라는 이름의 소부대를 조직하였는데, 중대장은 박알렉세이였으며 대원은 35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신병이었으므로 초보적인 군사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합동민족군대가 출현하자 이 군대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적군 5군단 사령부의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고려특립중대를 창설한 간부들은 이미 볼셰비키당원이었으므로 이들은 볼셰비키당 안에 고려부를 부설하고 군대의 사상, 정치문제는 고려부에서 군사문제는 합동민족군대에서 담당하기로 하였다. 그 뒤 백파의 카벨리군이 북으로부터 내습하고 시묘노프(혹은 셰묘노프 : Семёнов Григо́рий Миха́йлович. 1890~1946)군이 남으로부터 공격하였기에 합동민족군대는 연대편제로 확장하여 출전하게 되었다.
이때에 고려특립중대는 병력이 약 35여명이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20여명의 당원 군인만이 참전하였다.
이 출전에서 승리한 합동민족군 사단은 이 지역의 평정과 더불어 사명이 끝난 것으로 간주되어 해산되었으나 고려특립중대와 중국인 부대만은 동양혁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존치한다는 방침에 따라 그대로 존속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고려특립중대의 병력은 70여명으로 증가되었고, 적군 제5군단본부가 이르쿠츠크에 주둔하게 되자 이 군단의 직속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적군 제 5군단은 해방지구의 한인 소부대들을 이르쿠츠크로 집결시켰다.
이들은 주로 이르쿠츠크 서쪽의 옴스크, 노보 니콜라예프스크, 크라스노야르스크에 산재했던 소부대들이었다.
곧 옴스크의 사관학교(러시아 공산당내 고려부 주동자가 설립한 사관학교) 졸업생 81명과 크라스노야르스크의 한인부대 40여명을 고려특립 중대에 통합함으로써 고려 특립대대가 만들어졌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37쪽 등)
1920년 6월경에 옴스크로부터 다시 30여 명의 한인 소부대가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여 고려특립대대에 편입되면서 병력수는 총 6백여명으로 증가된다. 이로부터 이 부대는 2개 대대로 편성되고, 여기에 중국군대 1개대대를 편입하여 합동민족연대라 일컫게 되었다.
연대장은 러시아로 귀화한 한인 최길래이였습니다.
l920년 7월에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러시아공산당내 고려공산단체 제1차 대표회의에서 선출된 고려공산단체 중앙간부가 이 연대에 군정위원을 배치하기로 하고, 군사상의 지휘는 종전대로 제 5군단이 맡게 되었다.
그 뒤 제 5군단에서는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이 연대를 해산시키려 했으나, 고려공산단체 중앙간부의 끈덕진 교섭으로 그 해말까지 자기 산하에 존치시켰다.
1921년 1월경에 코민테른(국제공산당)에서 동양혁명을 인도하기 위해 동양비서부(혹은 원동비서부, 극동비서부라고도 한다)를 극동공화국의 서울인 치타가 아닌 이르쿠츠크에 설치하자 이 연대는 그 동양비서부의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자유시로 이동하여 이르쿠츠크파의 임시고려군정의회에 속하게 된다.
자유시 한인보병자유대대(韓人步兵自由大隊) 조직
만주 동청철도를 활용해 흑룡강(아무르강)을 건너 블라가베셴스크 방향에서 자유시를 공격해 수년간 점령했던 일본군과 백파군대가 1920년 2월 7일경(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는 2월 17일경) 철수하자 볼셰비키(적군)가 자유시를 해방했고, 일본군은 1920년 3월 8일경 동쪽 하바로프스크로 철수 완료하였다.
이로부터 흑룡주(아무르주) 일대에는 공산당 지도 아래서 흑룡주 임시정부가 건설되며, 군권은 볼셰비키가 장악하였습니다.
이 무렵 러시아 내전을 피해 이르쿠츠크, 연해주, 사할린주 일대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이 자유시와 아무르주의 주도인 블라가베셴스크 일대로 이동해 오자, 피난민 중에서 다수의 젊은 청년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독립군과 파르티잔에 가담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중 상당수가 제대로 된 무기를 지급 받지 못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흑룡주(아무르주) 일대의 고려 주민들도 독립운동의 기회가 오자, 자유시에서 3·1독립선언 기념식을 거행하고 흑룡주 주민대회를 소집하여 최고려, 박주련, 이훈, 이영섭, 최군실, 김진보, 김인현 등의 발기하여. 1920년 3월 20일경에 자유시(알렉셰프스크, 스바보드니)에서 흑룡주 한인대회가 소집되고, 이 대회 결과 흑룡주 한인총회라고 하는 혁명기관을 조직하고, 한인군대를 모집하였다.
한인들중에는 재산을 혁명운동에 써 달라고 내맡기는 사람이나 군대에 응모하는 사람이 속출하였다고 하며, 총회는 약 4백명의 1개 대대를 단시일 안에 편성할 수가 있었다.
이 부대는 처음부터 적군의 제도를 따르게 되어 군정위원은 정치·문화를 담당하고 지휘관은 군사 부분만을 담당하였다.
이리하여 군정위원에는 전희서(田希瑞 = 혹은 정희세), 대대장에는 승훈(承勳), 참모장에는 안훈(安勳)이 취임하였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4쪽 등)
이 때의 흑룡주 한인총회는 이 부대를 적군에 내맡기지 않고 독자적으로 유지할 생각이었으나, 주민의 경제력은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으리만큼 강한 것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군량과 피복은 한인사회에서 공급하기로 하고, 무기는 흑룡주 임시정부에서 공급받기로 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하바로프스크에 주둔하고 있었고, 치타는 시묘노프의 백파군이 점거하고 있었다.
1920년 2월에 문창범 등의 대한국민의회가 아무르주의 블라가베셴스크로 이전하여 왔다.
1920년 4월경 동시베리아에는 볼셰비키 정부의 허수아비 국가인 극동공화국(=원동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20년 7월 1일 흑룡주 한인총회는 제2차 대표회의를 소집하여 대한국민의회를 따르기로 결의하고, 고려인 군대를 대한국민의회에 인도하였다.
얼마 뒤, 일본군이 하바로프스크에서 철수하였고 친일파인 시묘노프의 백파군도 치타에서 패퇴한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 따르면 대한국민의회에서는 고려인 부대에 대한 일반 교육의 급무를 위하여 원동정부(혹은 극동정부) 제2군단에 교섭하고, 볼셰비키 정부와 일본사이의 한국인 독립군 부대의 존재에 관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 2군단의 특립대대로 편입하여 관할을 받게 하고, 다만 정신상으로만 대한국민의회 군무부에서 지도하기로 하였다고 주장한다.
어째든 특립대대로서의 한인부대는 1920년 9월에 간부진용을 개편하여 한인보병자유대대(韓人步兵自由大隊)라 일컫게 되었다.
대대장에는 오하묵(吳夏默), 군정위원장에는 최고려(崔高麗)가 임명되었다. 오하묵은 당시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제2군단 제6연대장 겸 블라가베셴스크 지역의 수비대장으로 있다가 이를 겸한 채 한인보병 자유대대장으로 옮겨왔다고 알려졌다.
(※ 그러나 러시아 극동에서 상당히 알려진 책인,
1974년 아기예프(АГЕЕВ А. В.)가 쓴 「아무르지역 파르티잔(Амурские партизаны. Хабаровск. 1974)」에 오하묵의 활약상과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최고려는 대한국민의회의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이 대대의 군정위원장으로 배치되었다.
이 무렵 스바보드니 지역은 볼셰비키가 완전 장악하였고, 스바보드니의 고려인 부대 역시 의무적으로 공산주의 교육을 받으며, 각 중대마다 군대내 정치를 담당하는 세포조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 참고 인물 : 한인보병자유대대의 대대장 오하묵(Огай Христофор Николаевич. 1895~1937)은 러시아 연해주 출생으로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였고. 1914년경 1차 세계대전에 제정 러시아군으로 참전하였다. 시베리아의 한인사회에서는 그가 장령(장군)계급까지 진급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최종 계급은 여단장 혹은 연대장 정도였다. 1918년경 1월 22일경 김철훈과 함께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지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1920년 7월 7일경에는 이르쿠츠크공산당 고려부의 발기로 전로한인공산당 제일대표원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이 조직은 기본적으로 이르쿠츠크 지역을 중심으로 한 시베리아 일부와 바이칼 연안의 러시아 공산당 조직 산하에 있는 일부 한인 공산주의 조직들의 중앙기관에 불과하였다. 1921년 5월에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을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일본군과의 교전기록은 명확하지 않으나 1921. 6. 28. 자유시 사건 당시 사할린 의용대와 한몸처럼 움직이는 대한혁명군(일명 대한독립군)을 공격하도록 무정부주의자, 강도, 학살범 등의 누명을 씌웠고, 실제 사할린부대 공격에도 앞장섰다. 1921년 7월경 독립군의 일부가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자 독립군 부대 여단장을 지냈다. 오늘날 러시아 스바보드니시의 기록에서는 소련군의 연대장급 이상의 장교를 지낸 것으로 확인되어, 한국계 러시아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출세한 인물로 평가된다. |
1918 ~ 1921년경 자유시 참변과 관련된 러시아령의 독립군 단체들
독립군 부대명 | 주요 인물 | 활동지역 | 기타 |
(1) 혈성단 | 채영, 김청남, 강국모, 한희진, 허용하 등 | 니콜리쓰크-우수리쓰크 수이푼쓰크 | 1920년경 ~ 1921년경 활동 |
(2) 다반군대 | 최니콜라이, 김억활, 이두일(리둥일), 이와실리, 백수동(박수동), 김안드레이, 박춘봉 등 | 다반 일대 | 1918년경부터 “한인사회당” 창립시기에 조직. (상해파계) |
(3) 의군부 | 허영장(허근), 김종헌, 김재규, 김학, 강응렬, 김석종, 이춘섭, 남해룡, 안알렉산드라 등 | 만주, 노령 | 1919년경부터 만주와 노령 |
(4) 철혈광복단 | 최계립, 임국정, 한상호 등 | 간도, 노령 | (다수 사형 집행) |
(5) 독립단 | 조맹선, 박그레고리, 최파사, 전응호 등 | 중국, 노령 | 백두산 일대, 연해주 고로치크꼬프 |
(6) 제1이만 군대 | 김덕보, 박공세, 김표돌, 황하일 등 | 이만 일대 | 1920년 초부터 |
(7) 제2이만 군대 | 윤덕보, 김덕은, 김찬, 임표, 이용, 한운용(한운룡), 김일수 등 | 이만 일대 | 1920년 여름경부터 1921년 여름까지 백두산 장백현에서 「군비단」군대가 수십 차례 남만주, 북만주를 거쳐 수천 리를 걸어서 이동해 온 군대 |
(8) 안수청 군대 | 신용걸, 한창걸, 강백우, 이승조, 박경철, 고상준, 박영, 임한준, 김식(김신) 등 | 수청 일대 | 수주허, 홍더허, 올긴스크 지방으로 이동하여 온 「신민단」군대가 그 지방인 부대들과 합동하여 “한인사회당” 「안수청 군대」라고도 활동 |
(9) 솔밭관 군대 | 유진규(이해산,류진규), 김달하, 신우여, 최찬식, 허승환, 이범진(이해룡), 유학관 등 | 추풍 솔밭관 일대 | 1921년부터 훈춘지방에서 이동하여 온 「신민단」군대 일부도 합세 |
(10) 창해청년단 | 김규면, 정재관, 김경천, 정순철 등 | 소성 일대 | 1921년경 우수리스크 지방 |
(11) 니항부대 | 박일리야, 채세윤, 최진일, 고명수, 임호, 김완욱, 송병렬(손병렬), 김학, 김제문, 채국성, 이다물, 이와실리, 고창률, 리흥진 등 | 아무르강 하류 니항(니콜라예프스크) | 1919~1921년경 활동. 부대장 사소프는 트리피츤과 함께 사형됨. 일본인과 일한 적 있는 박병길을 1921년 초 처형함 |
(12) 외수청 군대 | 김정하, 김려하, 김병하 등 | 수청 일대 | |
(13) 자유대대 | 오하묵, 최고려, 김하석, 전희세, 유익정 등 | 자유시 일대 | 1920년 초 자유시 일대로 피난온 고려인 등을 중심으로 조직 |
(14) 합동민족연대내 고려특립부대 | 최길래이, 박알렉세이, 안경억, 신춘식 등 | 이르쿠츠크, 옴스크 | 1919년 11월경부터 이르쿠츠크, 옴스크, 크라스나얄쓰크, 베르흐네우진스크(울란우데), 오호츠크 일대 고려인으로 조직 |
러시아 내전의 무기 부족과 볼셰비키 군대의 일방적인 주장
러시아의 역사를 살펴보면,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 전선에 나가는 군인들에게 지급할 소총도 부족하여 개탄한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러시아 내전 무렵 일본과 싸우고 있던 볼셰비키 혹은 극동공화국 군대와 연합할 목적으로 러시아로 이동하는 독립군을 입국시 무장 해제시켰으나, 자유시에서 신형 소총 등을 지급했다는 볼셰비키 군대의 일방적인 기록은 함부로 믿을 수는 없다.
자유시 일대의 한국계 독립군들은 소총, 총알, 무기, 식량, 보급품 지급대상에서 나중 순위였으며, 다수의 독립군들은 비무장 상태였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자유시에 모인 사할린 의용대 등 독립군들에게 1921년 자유시 참변 이전 수개월 동안 식량지원이 없었다.
독립군들의 대응책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 간도, 연해주 일대의 독립군들은 최소 수천여명 이상 ~ 수만여명이었음에 틀림없다.
만주, 연해주, 사할린주의 독립군 부대는 대체로 자신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주고 무장 투쟁을 지원해줄 수 있는 쪽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1) 중국의 반일 혹은 중립 세력 (손문, 주경란, 풍옥상, 장개석, 곽송령, 소병문 등)
(2) 러시아 볼셰비키 중앙 정부 (혹은 이들의 지도를 받는 극동공화국)
(3) 상해임시정부 (상해파 이동휘 계)
(4) 이르쿠츠크 파 (대한국민의회, 고려혁명군정의회)
(5) 미국의 독립운동가 (윌슨 대통령이나 미국 정부는 일본과 더 가까웠음)
들과 협조하려고 하였으나,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다툼은 생각하던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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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鳳梧洞)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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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등 독립군의 국내진입 유격전에서 여러 차례 패배한 일본군은 1920년 6월경 두만강을 건너 간도의 독립군과 근거지를 공격하였다.
독립군의 대표적인 승리로 알려진 봉오동 전투는 함경도 온성에서 두만강 건너편인 봉오골에서 1920년 6월 7일 발생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주장에 따르면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명을 내었고 독립군측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이라고 「독립신문 1920. 12. 25.일자」에 보도되었다.
(※ 6월 4일경부터 발생하였다는 자료도 있다. 봉오동 전투는 인터넷과 많은 책에서 다루고 있으므로 이 책에서 상세히 언급하지 않습니다. 또 전투 중 하나하나 사망자 수를 표시하면서 세지 못하고, 대충 추정하여 과장된 전과가 알려질 수도 있습니다.)
리인섭 편저「회상기(아령과 중령에서 진행되던 조선민족해방운동)」등을 보면 수기를 남긴 김재규는 최진동 군대 270여명, 의군부 허영장 군대 5백여명, 국민회 안무 군대 200여명, 홍범도 군대 700여명, 신민단 군대 70여명, 무산 쪽 군대 수십명을 합한 천여명이 회합하여, 형식적으로 총군부를 조직하였고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 중국지역이여서 외교의 편리를 위하여 최진동을 총지휘관으로 선출하였으나, 실제로는 홍범도와 허영장이 전투를 지휘하였다고 한다.
왜적이 출현하자 봉오골 10여리에 살던 조선여인이 「일본이 오오」라고 소식을 전하였고, 삿갓을 꺼꾸러 세운 듯한 봉오골의 산봉우리 산의 등떼를 따라 독립군이 포진하였고, 제일 첫봉우리에는 신민단 군대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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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인섭 편저,「회상기(아령과 중령에서 진행되던 조선민족해방운동)」 중 의군부 김재규 수기를 살펴보면,
김재규의 수기
제일봉에서는 극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따금 신민단 군인들 러시아 총소리가 한두 방씩 나더니 그만 끊어지고 잠잠 하였다. 왜놈들은 반자이 하고 육박전에 대들었다.
10개에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소리가 그치였다.
안개는 차츰 거두고 태양이 희미하게 비치였다. 봉오꼴 가운데 첫 봉 신민단 군인들 총소리를 들은 왜놈들은 자우산에서 그 총소리를 듣고서 러시아 총소리가 나니 물론 독립군 총소리라고 간파하고 그곳에다가 모든 사격을 내리고 나중에는 총 소리가 그치니 탄환이 진한 것을 알아 마치고 단병 접전에 대여 들면서 좌우편에서 일시에 제가끔 몰사격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깊이 패인 나무뿌리 웅덩이에 은신한 신민단 군인들에게는 총알이 미치지 못하고 덮어 놓고서 상대방만 향하고 날아다니는 일본 탄환은 상대방에 있는 일본 장졸을 잡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그 나무뿌리 있는데 와서 8명의 영웅들에 포탄까지 맛을 보고서야 왜놈들은 저희 왜놈들끼리 싸웠다는 것을 알아 마치고서 다 죽고 남은 놈들은 높은 봉을 끼고 있는 좌우 골짝 그 근방으로 미친 개무리처럼 군율도 계획도, 전략도 없이 덤비게 되었다.
바로 그때에야 우리 사령관 홍범도는 덤비는 왜놈들에게 “일제 사격 !” 하고 군령이 내리였다. “이곳에 일제사격! 저 봉에서 일제사격 !” 따따따~~~ 생생하고 규모있게 요란이 나는 총소리는 되는 대로 덤비는 사무라이 놈들을 신통히도 찾아가서 명중탄 하나씩 먹여 주었다.
왜놈의 신체는 모든 싸움터에 질서 없이 개죽음처럼 너무 질펀하였다.
이 전투에서 그 지방에 살던 조선 농민 18명이 죽었다.
한 집에서는 7명이 다 왜놈들의 총살을 당하였는데 어린 아이 하나가 7곳이나 경상을 당하고 살았다고 한다.
그 전쟁에 참여하였던 왜놈 수백여 명에서 살아서 달아난 놈이 불과 18명이라고 한다.
수많은 전쟁품을 얻고 신민단 군인 죽은 시체를 봉오꼴 승지짝 첫 봉 그들이 싸우던 곳에 장래를 지내였다.
......김재규의 수기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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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인섭 편저, 「회상기(아령과 중령에서 진행되던 조선민족해방운동)」 중 홍범도 부대 이종학의 수기를 살펴보면
이종학의 수기
그날 아침 훤히 동이 트자 어떤 조선 여자 한 분이 우리 보초선에 당도하여 일군이 오오하고 기혼하여서 쓰러졌다. 그 여자는 발을 벗고 달려와서 발이 전부 피 못시였다.
그 후에 알아보니 그 여자는 당시 모드미 솔밭이라는 지방 사는 여자인데 그 전날 밤에 일본 군인이 자기 집에 와서 유하였는데 새벽에는 파수 보던 놈 까지 잠을 드니 그 여자는 가만히 물동이를 가지고 물 길러 가는 모양으로 물가에 나왔다가 일본 군인들이 뒤를 아니 따르니 가만히 달려와서 “일본이 와요” 하고 흥분에 넘쳐서 기혼하였던 것이다.
이 통보를 접한 사령관 홍범도는 전쟁 준비하라는 명령을 각 부대에 전하였다. 망탑(望塔)은 봉오골 가은産 맨 마지막 3골 어구 가운데 봉에 있었다. 일본 군대는 일시에 자우방면에서 침입하여서 망대(望坮)를 향하고 돌입하여 우리 망대(望坮) 있는 데다가 사격을 시작하였다.
우리도 마주 사격을 시작하였다.
잠시 후에 홍범도 대장은 사격을 그치고 북쪽을 향하여 차츰 높은 봉으로 오르라는 명령을 전하였다. 그러나 봉오골 어구에서 좌우산(左佑山) 첫봉(峰)에 있던 신민단 군인 8명은 말하기를 우리는 다른 군대 군인이니 그 명령에 불복하고 자비로 행동한다고 하고 그냥 그 자리 나무뿌리가 빠진 웅덩이에 자리 잡고 엎드려서 사격을 계속하였는데 그들 총은 러시아식이여서 총소리가 유표하였다.
전투를 시작하자 청청하던 날 상공에는 시커먼 구름이 한 장 떠돌더니 삽시간에 뇌성벽력이 진동하며 주먹뎅이 같은 우박이 박으로 내리 부어서 지척을 분별치 못하였다.
총소리인지, 기관총 소린지 우뢰와 벽력소리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홍범도 사령관은 외인산 고지에서 자리를 아니 떠나고 전쟁을 지도 하였다. 왜놈 군인들은 러시아 총소리가 나는 곳을 향하여서 좌우편에서 서로 있는 힘을 다하여 장총·기관총 기타 있는 무기를 다 사용하여서 몰 사격을 퍼부었다.
몇 시후에 우박이 그치니 겨우 정신을 차려서 분간하게 되었다. 사격 소리도 그치고 좀 사면이 잠잠 하였다.
그때에야 왜놈들은 저의 끼리 서로 사격한줄 알게 되자 미친개 모양으로 봉오골 좌우에 있던 조선 농촌에 흩어져서 되는 대로 사격을 시작하였다.
홍범도 장군은 자기 있는 산 앞에 들어오는 왜놈들을 향하여 따꿍 따꿍 따꿍 연 3방을 놓았다. 왜놈 3놈은 따꿍 소리와 같이 쓰러졌다. 이 따꿍 소리는 당시 몰 사격을 놈들에게 퍼부으라는 암호였다.
사면에서는 기관총 소리와 흡사한 일제 사격소리와 같이 되는대로 덤비던 사무라이 놈들이 이리저리 쓰러지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였다.
장군탑 근방 홍범도 장군을 옹호하던 헌병대에서는 따꿍따꿍따꿍하는 연발 사격 3방이 터졌다.
이것은 놈들 추격하지 말고 앉은 자리에서 명심하여 사격하라는 암호 명령이었다. 이산에서 저산에서 이 골목에서 저 골목에서 불시에 터지는 따꿍따꿍따꿍 소리는 왜놈들을 걸어서는 달아도 못나게 하였다. 놈들은 거의 죽고 몇 놈이 이리저리 기여서 잔명을 보존 하였다.
봉오골 삼거름 왼쪽 어구에는 수백 명 사무라이 놈들 썩어진 시체가 있었다.
......이종학의 수기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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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靑山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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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시베리아 침략 시기, 일본군의 만주 동청철도 장악 및 만주 친일군벌 장작림 군대의 공격으로 독립군들은 근거지 유지가 어렵게 된다.
일제가 ‘제2의 니항사건’이라고 선전하던 1920년 10월초의 간도 훈춘사건 이후 일본군이 1920년 10월 7일경 또 국경을 넘어 간도의 독립군을 공격해 오자, 독립군 부대들은 백두산 일대의 만주 산악 지대로 대피하였다.
이때 동원된 일본군의 병력은 조선 나남 주둔 19사단 병력과 서울용산 주둔 제20사단 병력 일부, 시베리아 침략 제14사단 일부 등 많게는 1만 5천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위시하여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국민회군, 신민단, 의군부, 광복단, 의민단 등의 부대가 근거지를 이동하여 1920년 10월 초순에는 화룡현(和龍縣) 이도구(二道溝), 삼도구(三道溝)의 청산리(靑山里) 일대로 모이게 되었다.
청산리전투는 1920년 10월 21일경부터 10월 26일경까지 백운평(白雲坪), 완루구(完樓溝), 천수평(泉水坪), 어랑촌(漁郎村) 등에서 벌어졌다. 김좌진, 홍범도, 안무 장군 등이 주도하여 일본군을 격파하였다고 한다.
(※ 한국과 북한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과 한국내 독립운동사를 다룬 대부분의 책에서 언급되고 있음으로 이 책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으며, 청산리 전투 이후 1921년 자유시 참변에 참여한 인물들의 주장을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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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인섭 편저, 「회상기(아령과 중령에서 진행되던 조선민족해방운동)」중 청산리전투 참가자 이종학의 수기부분을 살펴보면
이종학의 수기
하루는 행군 명령이 내리였다. 때는 1920년 5월경이였다. 우리 군대는 행군하여 노투거우를 몇 10리 두고 가로막힌 산 이쪽에 가서 휴식하라는 명령이 내리였다.
얼마 동안 휴식한 후에 다시 행군하라는 명령이 내리였다.
앞으로 행군할 길은 두 가지로 갈라졌다. 왼쪽으로 가면 길이 탄탄대로이고 한 2~30리 질러가니 어둡기 전에 노투거우에 당도 할 수 있고, 右(우측)쪽으로 가면 험한 산협이고 또는 밤중에야 신지에 당도하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오른쪽 험한 길로 행군하라는 것이다.
대대장·중대장들이 번갈아 홍범도 앞에 가서 기척하고 경례를 하고 서서 왼쪽 길로 행군하자고 성화를 쳤다. 각 부대는 모두 정돈되고 행군 준비를 모두 하였다.
홍범도 장군은 왼쪽으로 가는 것이 좋다는 대대장에게 향하여 아무 설명도 없이 명령하고 답변하자 전군은 말없이 오른쪽 길에 대들었다.
우거진 산림, 길에 깔린 조약돌, 이따금 떠러진 낭, 요리조리 돌아치는 산꼴비탈, 사면에서 흘러내리는 샘물소리는 우리 행군을 포위하였다.
한곳을 당도하니 앞에는 절터 밭이 보이고 산허리가 널찍하고 앞에는 봉이 두루뭉실하고 사면에는 샘물이 많이 있는데 우리 앞 경리부대는 자봉침, 인씨기 기타를 말에 당나귀·노새에다 싣고서 두루뭉실한 봉 아래 산길을 지나서 행진하고 있었다.
홍범도 장군은 휴식명령을 주더니 오늘 우리 군대가 행진하는 것을 유심히 보는 놈이 있으면 모두 체포하여 오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기는 단지 총 잘 놓는 포수로만 조직한 보호대(헌병대)를 거느리고 두루뭉실한 산봉(山峰)에 올라가 은신하고서 망원경으로 사면을 살피였다.
우리는 모두 샘물에 들어가서 세수하고 물 마시고 하는데 샘물마다 물 바가지, 심지어 밥감주까지 있었다.
모두 좋다고 쉬는데 모두 산허리에 올라서 쉬라는 명령이 전달되었다. 우리는 모두 산허리에 올랐다.
이때였다.
즐펄밭에서 ‘따꿍’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홍범도 장군은 앞에서 일어나는 흙은 홍범도 곁에 있는 군인의 얼굴에 뿌리우면서 정신을 혼미케 하였다.
홍범도 장군의 기병 총 소리가 ‘따꿍’하자 아차 처지였구나 하고 흙에 쓰러져 눈을 비비는 (헌병)이 어깨에 멘 총을 꽉 잡아 당기니 총 혁대가 끊어지며 잡히는 일본식 장총소리가 따꿍 하자 왜놈이 자빠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왜놈들은 기관포 사격을 치는 대로 산봉우리에다 대고 하였다.
홍범도 장군은 일본 총으로 무장한 중대 최상만 2中-소隊를 자기를 따르라고 명령하고 앞을 향하였다. 소대는 뒤를 따라서 일본 놈들이 매복한 즐펄밭 오른편 산곡에 가서 은신하고서 그 바른편 산위에 있는 왜놈 부대를 향하여 몰 사격을 개시하였다.
놈들도 대응하였다. 바로 이때였다.
질펄밭 웅덩이에 매복하였던 왜놈들은 홍범도 장군 있는 데로 기여들며 기관총질을 하였다. 우리 군대는 일제 사격을 계속하니 마치 기관총 사격인 듯 하였다. 날은 흐리고 안개가 또 끼기 시작하였다.
홍범도 장군은 사격을 그치고 슬그머니 본지로 돌아왔다. 그러나 전투는 왜놈끼리 계속되었다. 얼마 후에 전투는 끝이 나고 전투하던 마당에는 사무라이의 개죽음 밖에 없었다. 왜놈들은 갈 곳이 없었다. 우리 소대장 김상만은 왼쪽 귀 뿌리에서 피가 흘렀다. 홍범도 장군은 그의 귀에 약을 발라 주고 나서 “참 내 군인들은 모두 왜놈 잘 잡는 용사들이야. 참 감사합니다. 또 승리입니다.”
여러 장관들은 또 다시 장군 앞에 가서 경례하고 전투하던 마당을 수색하고 전획물을 거두자고 의견을 올렸다. 장군은 거절하였다. “아니되오 또 말하오. 우리는 파르티잔이요 그리고 지대와 시기를 알아야 되오. 우리가 전투하는 어간에 왜놈들은 용정 수비대요, 천보산 수비대요 우리는 죽지 말고 독립하여야 되오. 통지하여서 이 산을 사면으로 올라 살 것이요. 그리고 우리는 지금 무기가 남아서 땅에다 장치하지 아니하였소. 그리고 우리가 이전에 전투한 장소를 수색하다가 부상한 놈들에게 우리 군인들이 상하던 일이 아니 생각나오.”
그러나 다시금 여러 장교들은 수색을 요구하였다.
그러니 장군은 정색하고 “명령”이요 하니 모두 잠잠하였다.
산을 넘어서 명월구(明月溝)로 행진하게 준비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또 장교들은 노투거우 조선(예수교)촌에 가서 소와 도야지를 잡고 연회를 차린 것을 먹고 가자고 청들었다. 그러니 또 정색하고 “명령이요 행군하오.”
모두 말이 없었다. 오던 길로 돌아섰다. 그곳에서 명월거우는 산길로 170리라고도 하고 130리라고도 한다. 그 후에 알아보니 앞서가던 치중 경리부는 우리를 따라왔다.
그곳에서 살며 포수 노릇하던 동지들이 앞을 서서 행진한다. 밤은 캄캄한데다가 안개까지 자욱하였다. 그러나 계속하여 행진하다가 새벽녘에야 좀 산간(間)에서 휴식하였다.
홍범도 장군은 언제든지 그러한 때에는 쉬지 아니하고 돌아다니면서 자비로 순회하였다. 한 곳에 가니 젊은 군인 2명이 누워서 자지 아니하고 “에구 쌀쌀해서 못 견디겠다. 빨리 어느 촌에 가서 토장에다가 도투고기를 넣고 북실북실 끓이고 조밥을 한 그릇 먹었으면 좋겠다.” 장군은 못들은 것처럼 가만히 다른 곳으로 갔다.
조금 있다 행군하여 그 산 밑 조선촌에 들어갔다. 금방 들어서자 그 촌 주민들은 우리를 뜨겁게 환영하였다.
장군은 지방 주민들을 청해 놓고서 자비로 돈을 내여 놓으면서 이 돈으로 도야지를 몇 놈 잡고 조밥을 하고 토장에다가 도야지 고기를 내고서 부실부실 끓여서 군인들을 먹이라고 명령하였다. 보통 어느촌에 가면 지방 주민들이 집집이서 각 집에서 자기네 소원대로 음식을 하여 주어서 먹던 것이 그 날 아침은 일제하게도 토장에 도투고기를 부실부실 끓이고 조밥이였다.
벌써 오래전부터 홍(홍범도) 장군과 같이 파르티잔에 다니던 사람들은 조밥을 먹으면서 “또 어느 청년이 장군이 못 듣는가 하고 토장에 도투고기를 끓이고 조밥을 먹고 싶다.”고 한 모양이라고 하였다.
홍범도 장군 듣기에는 군인들이 무엇을 먹겠다고 하나 가지고 싶다고 하지 아니하였다. 만일 그런 말만 하면 꼭 소원 성취를 시켜주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를 누구든지 엄하다고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무 친절한데서 감복하여 무조건 복종하였다.
그리고 우리 장군은 하루 앞일을 내다본다고 모두 숭배하였다.
명월구에 도착
촌중에 들어서니 그 촌이 예수교 촌이었다. 일반 주민들이 모두 나와 환영하는데 여학생들이 대열을 지여서 우리 행진하는 좌우에 서서 “언제나 언제나 두만강 건너가 만나리” 하고 우리를 환영하였다.
우리는 천지가 진동하게 독립만세를 불렀다.
주민들도 독립만세, 학생들도 독립만세, 군인들도 독립만세, 독립만세 천지였다.
태극기는 펄펄 날리었고, 양고라파에 발을 맞춰 행진하는 각 부대는 배가 고프고 곤한 태도가 없었다.
점심을 먹고 퍽 쉬여서 그 이튿날에는 각 근방 지방의 주민들이 모두 와서 大연을 배설하고 여러 가지 체조를 각 부대에서 거행하였다.
2~3일 간 명월거우에서 유하다가 행군 준비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지방주민들은 가지 말고 그곳에서 유하면서 쉬라고 만류하였다.
우리는 떠나서 8월에 왈니거우에 당도하였다. 그곳에서 김좌진 군대가 합하자고 왔다가 아니 합하고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그 후 장군은 청산리로 가자고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행진하다가 샘물꾸팡에서 전투가 터졌다는 급보를 들었다. 대포소리와 기관총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슨 싸움인 것은 알 수 없었다. 급히 정찰병을 보내고 우리는 전투를 준비하고 휴식하였다.
홍범도 장군은 이제는 속히 독립하겠다고 하면서 반기였다. 총소리를 들으니 필경 왜놈들과 중국 관병들과 싸우는 모양이니 우리는 중국 군대와 합하여서 전쟁을 하여 승리하면 빨리 독립한다고 말하니 군인들도 활기를 펴고 기다리었다. 이윽고 왜놈과 전투하는데서 한복판에 들었던 군정서 군대가 전투에서 요행 빠져서 찾아왔다. 이것은 4중대였다. 그리하여 그 중대는 우리와 합하였다. 우리는 퇴진하였다.
왈리거우 산중에 들어서니 눈비가 퍼붓는다. 의복이 또 흠뻑 젖었다. 모두 춥다고 하니 이천호 중대장이 말하기를 비가 아무리 와도 뼈는 아니 젖으니 관계치 아니하라고 하여서 모두 웃었다.
일군이 청산리는 퇴진하였으니 주의하라는 명령이 내리었다.
우대영창 전투
9월 14일 달밤이었다. (※아마 음력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물을 건너고, 산을 넘고 넘어서 대목이 무성하고 청암절벽이 하늘에 걸린 산간 바위산 가운데 들었다. 마른 나무를 어디서 사방에다 우둥불을 질러 놓고서 젖은 의복들을 말리었다.
가지고 오던 감자를 구어서 대강 요기를 하였다. 우둥불 자리에서 하루 종일 얼던 몸이 훈훈하니 잠들이 들었다. 그날 밤 당번은 조한명이였다.
깊은 산꼴이라고 마음 놓고서 당번도 잠이 들었다. 나도 잠들었다.
잠결에 따꿍 하는 소리가 적막한 산간을 요란하게 굴었다.
나는 놀래 깨였다. 우리들도 누구인가 총을 놓았다. 일전 사격을 그치라는 장군의 명령이 내리자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고 우둥불자리에 우뚜둑 우뚜둑하고 귀밑이 씽씽 하고 지나가는 탄환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윽고 적군들 있는 후방에서 일제 사격소리가 들리었다.
왜놈들은 그곳을 향하여 사격하노라고 발광을 하였다.
이것을 장군께서 빨리 자기 보호(헌병대)를 거느리고 적군을 그곳으로 유인하고 산간에 있는 군인들을 구원하려는 전술이였다. 왜놈들은 그곳을 향하여 기관총 사격을 하느라고 정신을 잃었다. 이때에 산골 강물에 감태가 낀 돌을 디디고 건너다가 절칵절칵 하고 넘어져서 물 병아리 되는 군인들은 부지기수였다.
큰 부대가 장군을 따라서 떠나 안도현을 경유하여 장군은 아령(俄領, 러시아령)으로 들어갔다.
이 전투에서 우리 군인 6명이 죽었다.
나는 산봉우리로 올라서 날을 밝히고 나니 본진을 잃었다. 그 근방에서 나 같은 2~3십명이 모여서 내가 영솔하고 안도현으로 향하였다.
6명이 죽은 시체는 6일후에 그 근방 주민들이 가서 묻었는데 쥐란 놈들이 귀를 뜯어 먹었다고 한다.
......이종학의 수기 하략......
이상은 리인섭 편저 「회상기(아령과 중령에서 진행되던 조선민족해방운동)」 중 이종학의 수기부분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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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참변(경신참변, 庚申慘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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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웨일즈·김산 지음,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아리랑」, 동녘, 2020. 의 135쪽을 살펴보면. 1920년 만주지방의 독립군은 약 4,000여명으로 겨울 내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따뜻한 옷도 입지 못한 채 왜놈들과 싸워 겨우 1,000여명이 살아남게 되었으며, 왜적은 2,000여명 가까이 사살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김산이 알고 있던 안동희 목사와 그의 아들 2명, 부인 등이 모두 죽고, 왜적은 훈춘사건의 보복으로 만주지방에서 6천명 이상의 조선인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
3·1 운동 이후 일제는 만주의 친일 중국 군벌들과 협조하여 독립군 토벌작전을 감행했으나, 만주 거주 조선인들의 저항과 일부 중국 군대의 비협조로 처음에는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1920년 10월 초쯤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마적인지 혹은 일본에 불만을 품은 반일단체 소속인지 불분명한 사람들이 간도 훈춘현(琿春縣)의 일본영사관 관련 건물을 공격하여 몇명의 일본인이 죽자, 일제는 이를 빌미로 제2의 니항사건이라며 일본군을 동원해 간도일대의 조선인들을 대량 학살했다.
(※ 당시 만주를 장악한 악명 높은 친일파 장작림은 마적출신으로 일제의 지원으로 동북3성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장작림(1873~1928)은 조선총독 재등실(齋藤實) 등과 결탁해 조선인 탄압에 앞장섰으나. 1928년경 일제에 의해 살해되었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한국 독립에 우호적인 레닌정권이 들어서고, 3·1운동이후 만주일대에서도 독립군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러시아 흑룡강 하구의 니항사건, 만주지방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 등에서 일본군의 패전까지 발생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러시아 내전시기 동시베리아를 침략한 일본군과, 동청철도(중동철도)일대 및 만주를 침략한 일본군을 동원하여 무자비한 조선인 학살을 전개했다.
3~4개월에 걸쳐 수많은 한인 마을을 불태우고 재산과 식량을 약탈했으며, 특히 조선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했다. 연길현(延吉縣) 의란구(依蘭溝)에서는 30여호의 전 주민을 학살하고 마을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다.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간, 간도 일대에서 현재 확인된 학살 피해자만 해도 3,469여명에 이른다.
그외 확인되지 않은 숫자와 3~4개월에 걸쳐 학살된 수를 합하면 적어도 수만 명이상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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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주 출신 독립군과 만주 독립군의 아무르주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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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의 러시아 이동
1918년 9월 18일 시베리아 아무르주 자유시(스바보드니)를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이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스바보드니시의 유명한 볼셰비키인 파포프도 백파와 일본군의 공격으로 이 무렵 사망했다.
(※ 파포프, 블라디미르 바시례비치(Владимир Васильевич Попов)는 스바보드니시의 유명한 볼셰비키로, 께르비에서의 트리피츤 동료들의 학살 사건을 조사하였던 베즈드닌(Безднин(комиссар)) 등과 함께 자유시 일대에서 볼셰비키 활동을 하였다.)
일본군의 공격으로 스바보드니시 옆의 제야강에서 증기선 무드레츠(Мудрец)가 침몰하고 러시아인 수백여명이 학살당했다. (이 지점에 1957년경 추모비가 건설되어 있다.)
일본군은 수라제프카와 자유시 일대에 3,000여명이 주둔하였다.
1920년 2월 4일경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아이훈조약 愛琿條約을 맺었던 아이훈에 인접한 러시아 도시)를 점령중이던 일본군이 중립을 선언하였다.
1920년 2월 7일경 자유시가 다시 볼셰비키에 의해 해방되었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는 2월 17일 해방되었다고 기록됨)
일본군은 3월 3일경에는 아무르주 자유시에서 전원 철수하였다고 한다.
일본군은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에서도 철수하기 시작하다.
1920. 9월경 스바보드니(자유시)에서 한인보병자유대대 조직된다. (대대장 오하묵, 군정위원 최고려)
고려인 니항부대 및 과거 트리피츤 부대의 아무르주로의 출발은 1920년 9월경이었다고 한다.
극동공화국 아무르주에서 온 베즈드닌은 1920년 9월 5일경 트리피츤 부대를 해산해 아무주의 자유시의 19연대로 편입할 것을 명령한다. (※ 출처 :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й Республики) Безднин, приказом № 1 и 05.09.1920 года распустил Ревштаб партизанской армии и принял от Командующего армией Андреева И.Т. все дела Ревштаба21)
트리피츤 사망후 그를 지지했던 많은 파르티잔들이 이탈하였고, 아무르주 자유시의 제19연대에 편입하는 사람은 절반도 되지 못하였다.
1920년 10월 12일경부터 독립군 사할린주 출신 의용대와 트리피츤 부대가 자유시에 도착하였다.
1920년 11월경부터 1921년 3월 중순에 걸쳐 독립군, 간도 독립군, 이르쿠츠크의 고려인부대 등이 자유시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르쿠츠크파와 자유대대 계열에서도 한국인들을 모집하여 자유시에 집결하였다.
사할린주 출신 독립군 부대의 자유시 도착
사할린 부대는 께르비(Керби, 오늘날의 도시이름은 「실로 이미니 빨리느 아시펜카」, Село имени Полины Осипенко,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서남쪽으로 직선거리 약 300킬로미터. 자유시에서 동북쪽으로 직선거리 588킬로미터 정도)에서 타이가 숲과 강을 따라 육로로 자유시 방향으로 이동하였고, 니콜라예프스크에서 대피한 민간인들은 대부분 아무르강을 통해 블라가베셴스크 등으로 이동하였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등의 주장에 따르면, 사할린주 출신 고려인 의용대의 선발대중 일부가 흑룡강을 거슬러 상류방향으로 올라가다가 일본군과 전투후 1920년 8월경에 흑룡주의 인에 도착하였다.
(이것은 니항에서 하바로프스크 사이의 아무르강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군 병력을 고려했을 때 불가능한 것이다. 비무장 민간인을 가장하였을 가능성은 있다. 또는 야코프 트리피츤이 친일파에 의해 살해되자 하바로프스크와 인 지역의 다른 파르티잔 부대에 가담하려고 했다가 한국 독립군들이 러시아측의 협조 아래 아무르 주에 집결하는 것을 알고 다시 자유시 일대의 한국 독립군 부대에 합류하고자 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3명의 대표(고명수, 선우정? 등)를 블라가베셴스크의 대한국민의회에 파견하여 께르비에서 출발한 사할린주 의용군의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자기들을 오하묵(吳夏黙)의 한인보병자유대대(이하 「자유대대」라 약칭)에 임시 편입하여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측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없으며, 이르쿠츠크파의 기록들은 자신들이 러시아령에서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고 주장합니다. 또 당시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던 지역인 아무르강 일대를 전투를 하면서 거슬러 올라갔다는 등 허위 진술도 분명 있습니다. 러시아측 기록에는 박병길이 사할린 의용대를 조직하였고 지휘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이에 자유시의 한인 보병자유대대에서는 도로상으로 700킬로미터가 훨씬 넘는 께르비와 중간쯤의 스토이바(Стойба)방향으로 대표 5명을 파견하여 식량공급 등 니항군대의 자유시 도착을 도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측 기록은 이러한 식량보급을 한국계 이르쿠츠크파에서 주도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러시아측에서 피난민과 트리피츤의 잔존 부대를 위해 보급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의 주장은 허위로 작성된 부분이 많으며, 특히 이르쿠츠크파의 잘못으로 보일 수 있는 부분은 모두 허위로 작성되어 있습니다. 문건 자체가 다른 사람이 조작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는 가정하에 아예 처음부터 엉터리로 쓴 것입니다)
최근 공개되고 있는 러시아 정부의 기록에는 께르비에 모였던 러시아계 파르티잔들(과거 니항을 해방시켰던 트리피츤 부대) 뿐만이 아니라 한국계 사할린부대의 자유시로의 이동과정에서 지나가는 곳마다 식량부족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박일리야 부대는 식량 등을 구입할 수 있는 금화(금으로 만든 루블화)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소리도 있다. 다만 적합한 가격이 지불되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오늘날의 러시아 기록을 대조해 보면, 조선인 니항부대가 이동과정에서 자유시의 자유대대쪽에서 식량지원 등을 받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시베리아나 만주 지방 독립군 중에는 평소 식량 조달의 방법으로, 자연환경을 이용해서 사냥과 물고기잡기, 약초 채취를 많이 했다고 한다. 먹는 문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중요한 문제이다. 사할린부대의 자유시로의 이동기간이 여름철이므로, 사냥과 물고기 잡기, 열매채취가 가능한 계절이나 장기보존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
당시에는 일제 침략군과 백파라는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었을 뿐, 누구도 자유대대와 니항군대 간의 대립은 예상하기 힘들었다.
일본군의 협조 아래 트리피츤의 체포와 처형을 도왔던 박병길은 트리피츤이 죽을 무렵부터 박일리야와 대립하였고, 께르비에서 단신 혹은 고명수의 선발대와 동행하여 자유시에 도착하였다.
박병길이 찾아간 곳은 한인 보병자유대대였다. 대한국민의회와 자유대대 쪽에서는 박병길을 대한국민의회와 자유대대에서 비서에 임명하였다.
(※ 보통 공산주의 국가에서 ‘비서’라는 호칭은 한 개 부서의 최고 지휘자·책임자를 의미한다.)
비서에 임명된 박병길은 「박일리야를 아편중독자이며 무정부주의자로 니항에서 민간인 학살을 일으켜 일제의 보복을 불러온 강도」인 것으로 자유대대 쪽에 이야기했다고 한다.
대한국민의회는 한인 니항부대의 선발대를 자유대대에 소개하는 동시에 극동공화국 군부에 연락하여 이 군대를 자유대대의 1개 중대(중대장 고명수)로 임시 편입할 것을 알선하였다고 주장한다.
한편 트리피츤 부대와 함께 움직였던 고려인 니항군대(고려인 사할린 부대)의 대부분은 흑룡주에 들어서면서 극동공화국의 제2군단 제19연대 제3대대로 편입되었다.
트리피츤의 부대가 원동공화국 아무르주에 도착하여 제2군단 제19연대가 되면서, 고려인 부대는 제3대대로 편성된 것으로 보인다.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자료총서5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홍범도편」, 1995, 398쪽 김낙현 저 ‘빨찌산의 수기=파르티잔의 수기’에서는 19연대 2대대로 편입되었다고 주장한다. 김낙현의 수기가 기억이 오래되어서 틀리는 부분도 있지만, 아예 거짓으로 작성한 부분이 상당히 있다. 사실과 거짓말을 가려서 읽어야 한다.)
고려인 니항 부대의 대대장은 임호였다. (훗날의 사할린 의용대 혹은 사할린특립의용대로 개칭)
제19연대는 극동공화국정부의 방침에 따라 자유시로 향하고 있었다. 트리피츤을 처형한 안드레예브도 스바보드니에 도착한다.
1920년 10월 12일경에 한인 니항부대(사할린주 출신 의용대)가 자유시에 도착하자 그곳의 자유대대는 전부대를 출동시켜 군례(軍禮)로서 성대한 환영식을 거행하였다. 10월 13일경에 자유대대 쪽에서는 니항부대의 간부일동과 회동하여 군사회의를 개최하고 앞으로의 단결과 혁명성취를 다짐하였다.
이 회합에는 쌍방의 대대장을 위시하여 분대장 이상의 장교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1920년 10월 14일경에 니항군대의 실권자인 박일리야가 자유대대 본부를 방문하고, 오하묵, 최고려, 황하일(黃河一), 유수연(兪洙淵) 등의 자유대대 쪽의 수뇌들과 군사상의 협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박일리야와 최고려의 자유시에서의 첫 만남에서 형식상은 서로 간에 자유대대와 사할린주 출신 의용대를 통합하려고 하였고 지휘권을 양보하여 통합을 시도하였다.
박일리야가 식량문제와 겨울을 어떻게 날 것인가는 하는 중요한 문제 이외에도 군사상의 문제를 논의하려고 자유대대를 방문하자 자유대대의 군정위원장 최고려는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과거 문화운동만을 전력하던 그 시대에도 별별 파당이 분립하여 빈번한 충돌이 없지 않음은 우리가 공지하는 바 사실이며, 또는 유감이 막대한 그 여습(餘習)으로 기분의 파랑이 쉬지 못한 차제에,
마침 시세를 인연하여 우리가 대업을 목적하고 아니치 못할 무기적 행동에 각각 착수한 것이 또한 사실이라. 그러면 대업을 표준하는 동시에 구일(舊日)사회 악습이 혹이나 군계에 파급될 것을 예방함은 물론이고, 따라 군벌적 수립이 시대와 처지에 절대로 부당함을 자각하여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원리상으로 말할지라도 현재 양 군대를 연합통일하여 일치한 명의하에서 동일한 주의와 동일한 방침으로 기본대(基本隊)를 완전히 조직하여, 군인들로 하여금 정신적 혁명사상을 주입하여 일정한 궤도로 운전하고야 우리 잔약한 처지를 불구하고 혁명의 진취를 도모하려니와,
만일 그렇지 못하고 군대의 명의상 분열로 인하여 나의 군대니 너의 군대니 하고 일반 군인들의 심리를 분열시켜 각개의 군벌을 그리거나 파당을 옹호하게 되면 이 화단(禍端)이 과거 문화운동 당시의 충돌에 비할 것이 아니며,
역시 우리 혁명 전도는 어찌될 것인가, 이에 더 불행은 없을 것으로 아노니, 그러므로 우리가 군사상에 대하여 신중히 처리할 것이며, 원만히 토의할 필요가 있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髙麗革命軍隊沿革)」 7쪽에서 인용)
최고려의 이 설득은 사할린주 출신 의용대가 니항에서 이동중 트리피츤과 지지자들의 처형으로 힘이 약화된 상태에서 장거리 행군으로 이미 탈진하였고 자유시에 도착하여 자유대대 측의 지원을 요청한 상황에서 최고려가 답변으로 한 말인지라, 일단 수긍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과거 의병전쟁시기 등의 독립운동의 경험상 지휘권문제 등을 쉽게만 생각하면 모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최고려의 설득하는 말은 결코 쉽게 해결되지 못할 일을 쉽게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험의 부족에서 나온 말장난에 불과한 것으로 나중에 확인된다.
자유대대와 니항군대의 통합 부대 구성은 볼셰비키 정부와 각 독립군 부대들 간에도 그 필요성에 따라 제기된 문제였다. 일제라는 침략자를 상대로 소규모 유격대가 아닌 연대, 사단 급의 독립군 부대를 조직하려면 지휘체계와 보급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髙麗革命軍隊沿革)」에 따르면 최고려의 주장에 대하여 박일리야는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기는 원래 사회상 경력이 부족하고, 또는 군사상 지식은 더욱 어두우니, 군대에 대한 교육과 인도에 자기의 능력으로는 감당치 못할 것이며, 또는 자기는 사할린주 한인으로 니항사건후 생활이 갈 때가 없어 흑룡주로 이주한 한인의 대표로 원동정부 국민대회 소집에 응하여 오늘(本日)로 치타에 향하겠으니 군대를 관할하라.”
(그러나 사할린부대는 실제로는 자유시에 있는 동안 줄곧 박일리야의 지도에 따라 움직였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 인용) 자유대대의 최고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니항군대(사할린주 고려인 의용대)가 지금 러시아 제2군단 제19연대 제3대대로 임하니, 군율상으로는 물론이고 다만 정신상으로도 자유대대에서 관계키 불가능하니, 박군이 이와 같이 한인군대로 하여금 동일한 지도하에 집중하려는 진정한 의의가 있고 보면 지금 치타행을 중지하고 직접으로 제 2군단에 교섭하여 이에 대한 승락을 득한 후, 일반군인에게 이유와 진의를 설명하고, 양군대의 군인심리를 우리와 같이 협동적으로 융화시키는 것이 니항군인의 신임상에도 없지 못할 것이며, 또는 박일리야군이 군정위원장으로 근무하는 것이 지휘자 책임이 그러하고 양군대의 요절(要切)한 융화책에 대하여서도 하나의 방침이라.”
이에 대하여 박일리야는 자기는 앞에 말한 주민대회 소집에는 신의상 꼭 참석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치타에 갔다오는 동안만 임시 군정위원으로 배치하여 달라고 하였다.
니항 조선인 의용군 부대장인 박일리야의 치타행
최고려는 박일리야의 치타행을 적극적 만류하였다.
그러나 박일리야는 다음날(10월 15일)에 치타로 갔다고 한다. 아마 박일리야가 치타로 간 것은 극동공화국의 서울격인 치타에는 이동휘계의 한인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르쿠츠크파 독립운동가들과는 다른 의견을 가진 치타의 한인부에 가서 사할린주 출신 의용대의 활동방향을 의논하고 싶었을 것이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 따르면, 박일리야는 치타로 가기에 앞서 사할린 부대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고 한다.
“우리 군대의 장래가 금번 나의 치타행에 전연 관계가 있으니 군인 일동은 그동안 여하한 풍파와 변동이 있을지라도 백절불굴하는 정신으로 잠시 쉬데(姑息), 나의 전보 및 서신 또는 왕환(往還)할 때까지 기대하기를 바라노라.”
박일리야와 사할린 출신 고려인 의용대는 이미 니항을 해방하고 일제 침략군을 격퇴하였으나 대규모 공격에 어쩔 수 없이 께르비 등으로 대피하여 수개월~수년을 함께 한 사이기 때문에 사할린주 고려인 의용대가 박일리야가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 자유시의 얼마우재 부대로 불려졌던 자유대대와 박일랴가 대립한다면 누구편을 들 것인지는 쉽게 예상되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고려나 박일리야는 처음에는 원만하게 독립군 통합을 논의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니항의 러시아계 파르티잔 부대와 박일리야가 지휘하는 사할린주 고려인 의용대의 자유시 이동은 이미 모스크바의 볼셰비키 정부, 극동공화국 정부, 극동공화국 군부,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본부와도 이미 합의가 된 것으로 보여진다.
1920년 10월 이후 달뷰라내 한인부(상해파)의 개입
박일리야가 1920년 10월 15일에 스바보드니(자유시)를 떠나 치타(※ 극동공화국의 서울은 베르흐네우진스크(오늘날의 울란우데)에서 1920년 11월경 치타로 옮겨졌다. 1920년 10월경이면 베르흐네우진스크를 방문한 것일 수도 있다)에 도착한 것은 10월 20일경이었다.
1920년 10월경에 극동공화국내 있던 공산당 상급기관인 달뷰라(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부=원동부)내에 한인부가 설치되었다.
한인부는 오(五)두제 간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박애, 계봉우, 김진, 장도정, 박창은이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10쪽에 따르면,
1920년 10월경에 (달뷰라(Дальбюро ЦК РКП(б),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인) 원동부내 한인부가 조직됨에 그 당국은 오두제(五頭制)로 박애(박마트베이), 계봉우, 김진, 장도정, 박창은(박이완) 등이었다고 한다.
한인부가 조직된 주지와 목적은 고려군중에 대하여 공산주의를 선전하여 장차 무산혁명을 인도하려는 기관이다. 그러한 기관의 당국자인 박애, 계봉우 등은 주의(主義)상 절대의 적(敵)이 되는 상해정부(상해정부가 공산주의에 적이 됨은 그 정부헌법이 증명함)를 봉대(奉戴)하고 당국자 전수(全數)가 당원이며 야체이카가 조직된 대한국민의회에 대하여는 악수(握手)는 고사하고 도로혀 박멸의 책(策)을 연구하여 그 수단인 바 무주의(無主義) 몰지각한 무리를 금전으로 매수하여 거짓말과 망설로 일반 사회에 악선전을 몰두하여 우리사업상 만반지장을 주었으며 아직도 어떠한 악의를 쓸런지 신중히 생각하도록 단련을 받은 대국자(對局者)도 추측키 어렵다.
이러한 한인부 당국자들은 진실로 상해정부를 봉대함이 아니고 상해정부의 국무총리 이동휘와 국무원비서장 김립을 봉대함이니
그럼으로 국무총리와 비서장 두사람을 봉대하자면 첫째 대한국민의회를 박멸치 않고는 자기들의 야심적 행동에 장애됨을 깨달음이라 그것은 원래 상해정부가 부적법으로 성립되였다고 대한국민의회에서 세상에 성토하는 동시에 이동휘와 김립 두 개인에게도 무주장·무정견·무신의하게 상해정부에 취임한 것을 비공식으로 토죄(討罪)하였던 것이며 금일까지 절대 배척하던 바이라 이에 대하여 반감을 가진
이동휘 일파가 대한국민의회를 박멸하려고 도모하던 차 난회(難會)의 기우(奇遇)가 있었으니 즉 이외로 금화 40만루블(혹은 40만원)의 거액이 자기들 사탁(私橐)에 들어옴으로써 금전만능으로 대한국민의회를 박멸하는 것 뿐만 아니라 고조에 달한 야심이 고려혁명계 주권을 장악하려하여 자기들 패당의 세력에 지배를 받지 아니하는 혁명기관을 함부로 배제하여 그나마 사위자(事爲者)를 기탄(忌憚)하고 악분자를 매수하여 로령 일대와 상해 일국(一局)에 대한 시설이 고려혁명을 위한다 함은 몽중함어(夢中諴語)에 불과하고 순수한 정신이 파당 수립에 철저하였다.
원래 이동휘가 상해정부에 취임할 때 대체상(大体上) 시국의 문란을 고려하지 않고 개인 사분(私分)상 몇십년 동고하던 동지의 신의를 무시하고 다만 국무총리의 지위를 잃을까 두려워한 것으로 취임함은 이와 같은 중대한 지위를 반연(攀緣)하여 자기의 야비한 허욕을 도모려던 것이 하행(何幸)으로 고려혁명계 약간의 생맥이 발휘됨인지 대국의 추세가 자기의 임의에 벗어나니 이에서 잃을까 두려워하던 국무총리와 지위도 울타리와 같이 보게 된다.
먼저는 어떤 마음이고 그리고 후에는 어떤 마음인지 모든 거짓말은 세인이 다 짐작하는 바이어니와 졸지에 이승만의 위임통치를 성토하고 위해 위에 퇴거할 때에 자기의 진퇴가 식식(湜湜)한 행동인 것을 자인하고 응당히 자기가 자기를 성토한 줄은 깨닫지 못하였으리라.
그뿐 아니라 위해위(衛海威)에 퇴거한 것은 상해정부를 자기들 파당의 건물로 인수할 가하는 계획이니 전후 설계가 비서장 김립의 주책(籌策)이라 그 증거는 위해 위 이동휘에게로 가는 김립의 서신을 상해정부에서 압수한 결과 발견되고 동시에 김립은 상해정부에 대하여 전후 모계(謀計)를 자복한 후 부득이 이동휘로 하여금 이승만에 대한 성토를 최소하고 다시 취임하니 이번 취임은 야심적 국무총리가 아니고 속죄상으로 국무총리가 되였나니 그럼으로 김립은 이상의 죄목에서 비서장의 면직을 당할 때에 이동휘와 김립의 두사람 사정(私情)에도 국무총리의 권리가 있지 못하여 수족과 같은 김립으로 상해시상에 무사(無事) 방황객이 되였을 뿐이였었다.
이때에 박진순(朴鎭順), 이한영(李漢英), 박애(朴愛) 등이 코민테른 제2차대회에 사회당으로 참가하고 코민테른에서 우선 다소 금전을 얻어서 파견된 이한영은 상해에 도착하여 이동휘, 김립 등으로 더불어 전(前)사회당을 공산당으로 변경하고 김립과 계봉우로 하여금 대표를 선정하여 로령으로 파견하되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과 협의(이한영이 모스크바에서 상해로 나가는 동시에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에서 이괄(李括)을 함께 상해에 파견하여 호상 연락을 하기로 협의한 일이 있다고 하였음)하여 전(全)고려공산당을 완전히 조직하도록 도모한 후 모스크바에 가서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에 역시 완전한 연락을 얻기로 위임장을 지니고 원동정부 소재지이던 베르흐네우진스크에 당도하여 박진순, 박애, 한형권 일행을 봉착하니 1920년 가을이라.
금화 40만 루블의 상해파 지급
상기 일행중 박진순, 박애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前)사회당 명의로 제3국제공산당에 참가하였던 차 한형권은 상해정부 외교관 명의로 로시아 의회정부에 가서 박진순 일파와 협동 교섭한 결과 로시아 의회정부에서 고려혁명을 위하여 우선 금화 40만루블(혹은 40만원)의 적지 않은 금액을 이네들에게 지불하였다.
※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 정부문서인 1921년 10월 16일자 「이동휘, 박진순의 수행한 업무와 금전적 지원 지출에 대한 보고서」를 살펴보면 출처 : 러시아 국가 사회 정치 역사 기록 보관소(РГАСПИ). Ф. 495. Оп. 135. Д. 59. Л. 3-10. Копия, машинопись заверена Г.Н. Войтинским, подпись-автограф. http://docs.historyrussia.org/ru/nodes/48193-otchet-li-don-hvi-i-pak-din-shunya-o-prodelannoy-rabote-i-o-rashodovanii-denezhnoy-subsidii-napravlennyy-narkomu-inostrannyh-del-g-v-chicherinu-16-oktyabrya-1921-g#mode/inspect/page/1/zoom/4 상해파 측으로 최소 금화 40만루블이 지급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 계속 인용함)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지어다. 의회정부로 말하면 유럽대전의 해독(害毒)과 자국의 무산혁명에 만반파괴를 겪어 무(無)하고 세계경제에 봉쇄를 당하여 자국의 경제상 위기가 극도에 달한 의회정부의 금전이다.
그러면 금전의 출처는 세계혁명을 후원하는 의회정부이고 용처는 고려혁명장(場)이니 이억만 로시아의 동정이오 이천만 고려의 소망이라.
이에 대하여 우리의 적이 되는 일본인이라도 군국주의자가 아닌 이상에는 사탁(私橐)에 넣을 계획은 아니할 줄로 아노라.
그러나 김립 일파의 야욕에는 금전의 출처와 용처는 족히 고려될 것 없고 다만 적지 않은 금액이 약간의 만족일 뿐만 아니라 교묘히 자기들 일파의 손안으로 들어옴을 매우 행운으로 생각하는 동시에 이르쿠츠크까지 갈 것도 아니다.
고려공산당과 연락을 취하고 보면 자기들 계획에 방해가 될 것이다.
처음부터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과 협의하려 하는 것도 이만한 금전이 수입되기 전이며 이와같은 기회를 반연하려는 방침이며 상해정부를 자기들이 임의로 장악치 못함도 이만한 금전이 없었음이니 이로부터는 고려공산당은 아무쪼록 지장을 주어야 될 것이며 상해정부는 장악할 수가 있다.
금전이면 이에 더한 세력이 없음을 자신하며 또 로령일대에도 고려사회기관을 좌우할 것이 긴급한 문제가 된다.
그러나 자기들에게 장애되는 대한국민의회를 박멸치 아니하면 안될 것이고 따라서 원동지대에 일부(一部)의 수립(樹立)을 경영함에는 역시 기관 조직이 없지 못할 것이다.
(※ 상해파를 지원하는 달뷰라 내의 한인부로 추정되는)
당국에서 동아총국(東亞總局)이란 것을 조직하니 즉 기관의 범위는 동양무산혁명을 좌우할만한 배포에서 당국 주뇌(主腦)는 박애, 계봉우, 권화순, 조응순, 장도정 등이 되고 로령에 대한 제반설계는 자기들 주책이 가급되는데까지 약정한 후 김립, 한형권 등은 치타로 와서 자기들 계획과 같이 동아총국이란 기관을 설치하려고 원동부(달뷰라 추정)에 교섭하니 해당 원동부에서는 이러한 기관은 달뷰라(이명 : 달이비료) 이상의 범위를 포함하였다하고 승인치 아니함에서 소감되고 다시 주선하여 원동부내 한인부 당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박애는 원동정부(극동공화국) 집정관 크라스나쇼코프와 평소로부터 지분(知分)이 있었던 터이라 그럼으로 한인부 오두제에 자기의 일파가 전점(專占)하고 한인부를 이용하여 만반의 악의를 신장(伸張)하는중 김진, 장도정, 박창은 등은 자래로 상해정부를 반대하던 자로서 금화 40만루블(혹은 40만원)에 류연탄타(流涎呑唾)하고 졸지에 매수되여 상해정부를 봉대한다는 것으로 표어(標語)를 삼았나니라.
그러나 상해에서 김립 일파가 상해정부를 흔들려하다가 필경은 승리치 못하고 로령에서도 박애 일파의 수단이 여의치 못함으로 김립의 주책이 다시 변경된다.
그것은 로령일대가 자기들과 적대되고는 상해정부를 임의로 장악할 수 없음이니 이어서 국민의회와 조화책을 강구하였다. 그 증거는 김립이가 상해에서 원세훈에게 대하여 국민의회와 조화를 토의할 시에 자기가 국민의회에 대하여 전자(前者) 전투적 방략을 지휘함이 있었다.
그간에 어떠한 정도까지 흔단(釁端)이 일어났는지도 알 수 없으니 이것이 유감이나 자기의 서신이 한인부에 가게 되면 그 전쟁은 해결될 줄로 자신하노라 하였더라.
(※ 이상은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 인용함, 일부 표기는 현대적으로 변경하였습니다.)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인 달뷰라의 부설기관으로 설치된 한인부 내의 박애(박마다베이)는 1918년 6월에 이동휘와 더불어 한인사회당을 창설한 동료이자 이동휘의 특사로서 모스크바를 왕래했던 사람이다.
김진과 장도정은 이동휘가 상해로 떠나간 뒤의 시베리아에서 한인사회 당을 조직하고 이동휘의 기반을 유지하려 했었으며, 계봉우는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의원(議政院議員, 간도출신)으로서 이동휘에 의하여 시베리아에 파견되었었다.
박창은은 위의 4명과 합류하여 한 때 상해파를 지원하였다.
1919년 8월말경에 이동휘가 상해임시정부로 가자 속칭 노령파(대한국민의회, 이르쿠츠크파)는 이동휘를 배신자라며 성토하기 시작하였다.
노령파는 러시아령에서의 독립운동 최고지도기관이 대한국민의회인 것으로 자부하고 이동휘파와의 대립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알려지기로는 이동휘 1935년 1월 31일경 연해주 해삼지방 신한촌에서 죽으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조선의 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소. 동무들은 반드시 고려소비에트공화국을 성립하시오.” |
상해파측에는 장도정 등의 한인사회당이 있었고, 달뷰라의 한인부는 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박애는 상해임시정부의 주치타 영사도 겸했으며 극동공화국의 수상 크라스나쇼코프(Краснощёков)와는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1918년 6월경의 이동휘 등의 한인사회당 결성대회에 귀빈으로 참석한 사람이 크라스나쇼코프였는데, 박애도 창당 멤버였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당시 극동(=원동)공화국 정부와 원동부는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박일리야가 극동공화국의 서울인 치타(혹은 베르흐네우진스크=오늘날의 울란우데)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상해파의 박애 등 5명이 한인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때 한인부의 박애 등이 이르쿠츠크파가 자유시의 한인 보병자유대대를 장악하고 있으며, 자유시에 도착한 한인 니항군대까지도 자유대대나 러시아인부대에 편입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난 후, 박일리야가 한인 니항부대의 자유대대 편입을 우려하니, 이미 이동휘의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을 잘 알고 있었던 박윤천(=박일리야)과 상해파의 관계가 더욱 강화되었던 모양이다.
이 무렵부터 한인 니항부대와 상해파의 결속은 강화된다.
최고려 등의 자유대대 간부들이 박일리야의 치타행을 만류한 것도 이동휘의 상해파 및 한인부와 박일리야의 협력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가 생기기 전에 러시아령내의 한국 독립군 지휘권을 행사하던 달뷰라 측에서 나중에 자유시에 집결하는 한인 군대의 총대장으로 김민선을, 군정위원장으로 박일리야를 임명하게 되며, 자유시 일대의 독립군 부대 지휘권은 이르쿠츠크파에서 (상해파인) 한인부와 박일리야에게 넘어가게 된다.
김민선은 자유대대장 오하묵과 마찬가지로 귀화인이며 러시아에서 성장한 청년으로서, 1차대전 때에 출전한 경력도 있었다고 한다.
김민선과 박일리야는 1920년 11월초에 치타(혹은 베르흐네우진스크)를 떠나 자유시를 향해 출발하였다.
트리피친 부대(제 19연대)의 무장해제와 니항군대의 자유대대 편입
1920년 10월 22일경 자유시에서는 아무르주 일대를 관할하는 러시아 볼셰비키군대, 한인 보병자유대대(대대장 오하묵), 시민의회와 공산당군회(共産黨郡會, 어리이꼼발트)에서 협의하고 트리피츤의 제19연대(제2군단 제19연대, 박일리야의 한인 니항부대는 19연대 3대대)를 무장해제하였다.
제19연대(과거 니항을 해방시켰던 트리피친 부대의 일부가 자유시에 도착하여 재편성되었던 부대)가 군율에 복종치 않는다는 이유 등으로 2군단 및 오하묵의 자유대대 등이 철갑차와 보츠까레워 등의 지원군을 동원하여 포위한 후 해산시켜, 다른 연대에 편입시킨다.
그리고 과거 트리피츤 부대의 일부가 다른 연대에 편입된 것이다.
니항 주민들중에는 자유시까지 따라온 사람들도 많았다.
트리피츤 부대의 해산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피해자가 나왔는지 정확한 것을 현재 알 수 없으나, 당시 러시아 내전기 반란혐의나 무정부주의자로 처벌된 사람들은 결국 1930년대 대숙청 시기 적대세력으로 간주되어 다수 처형된 것으로 알려진다. 운이 좋은 사람들이 강제노동수용소나 굴라그 등지로 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무렵 박일리야는 자유시에 없었다고 한다.
과거 트리피츤 부대였던 제19연대는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과 최근 한국에서 갑자기 사실이라고 인용되는 최호림의 주장 등에 따르면, 자유시에 도착한 트리피츤 부대는 “강도, 아편중독자, 강간범, 금광의 뜨네기 노동자, 무정부주의자들로 주로 구성된 자들로 과거 트피치츤의 지휘하에서 그 엄정한 군율에 복종치 않고 지방 인민에게 악폐를 끼치고 일반 군계에 풍기를 문란케 한 점”이 있었다고 한다.
또 이르쿠츠파와 최호림 등의 기록이 주장하기를 제19연대가 자유시 구역을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10월 22일에 이 사안을 치타(혹은 베르흐네우진스크) 극동공화국 정부와 제2군단에 직통전보로 보고한 결과 보츠카료프카(Бочкарёвка)에 주둔한 수비대 800여명이 출동하여 제19연대를 포위하였고 한다.
자유시 북서쪽에 위치한 쉬마노프스크(Шимановск)에서도 장갑열차가 수라제프카 지역으로 동원되었다고 한다.
※ 보츠카료프카(Бочкарёвка)는 오늘날에도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중요한 기차역중 하나이다. 자유시에서 남동쪽으로 직선거리 60킬로미터쯤에 위치하며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블라가베셴스크로 가는 철로의 교차점이다. 여러 차례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서 오늘날의 명칭은 벨라고르스크(Белого́рск)이다. 벨라고르스크 인근에 1921년 당시 수라제프카 무장해제를 명령한 볼셰비키 군대 2군단장이었던 셰르셰프의 이름을 딴 셰리셰바(Серышево)라는 도시가 있다. 오늘날 스바보드니시(자유시) 수라제프카 구역에도 셰르셰프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아마 자유시 셰리셰바 거리에서 독립군들이 순국한 모양이다. |
(※ 김창순·김준엽 공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권」, 청계연구소, 1986 등의 책에 따르면)
포위를 당한 제19연대는 자기들의 비행을 조사하는 대로 자백하였고, 이 결과는 치타(혹은 베르흐네우진스크)정부에 보고되었다. 이 보고를 접한 치타정부는 검사원을 파송하여 사안을 검사한 결과 현지 기관들의 요구대로 제19연대를 해산하고 이 사건에 무관한 군인만으로 타 연대에 편입하는 동시에 제3대대 즉 한인군대는 제2군단의 명령으로 한인보병자유대대에 편입시켰다.
한인 니항부대는 오하묵의 한인보병자유대대에 편입되어 인원이 증가된 대대병력이 되었다.
그리고 이르쿠츠크파에서 주장하기를 군사적 조련 또는 주의적 문화운동에 전력하는 무렵에 박일리야와 김민선(金敏先) 일행이 자유시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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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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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파 고려공산당
오늘날 독립운동사를 다루는 사람들이 알고있는 1921년 자유시 참변의 공통된 원인중 하나가 초기 한인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입니다.
비슷한 능력과 독립운동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에 초기의 대립은 심각한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김홍일저 대륙의 분노 등에 따르면)
......김홍일의 주장......
구한국의 군인 출신 이동휘는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로 일본과 가까워졌던 제정 차르정권이 전복되고 1917년 10월 공산혁명으로 레닌의 볼셰비키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 극동(혹은「원동」이라고도 한다)방면 선전원과 연락이 되어 1918년 6월경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1919년 4월경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시 한인사회당 대표대회를 개최하고 당대표로는 박진순, 박애, 이한영 세 사람을 뽑아 모스크바로 파견하여 코민테른에 가맹토록 하였으며, 이동휘는 중국땅에 설립된 상해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그는 레닌의 지원을 기대하는 뜻에서 한형권을 임시정부 대표라는 명목으로 모스크바에 파견하였다. 그 때 레닌은 한형권을 맞이하여 대사 대우로 공관을 내주는 등 우대를 하면서 일체의 경비까지 부담해 주었다고 한다.
그 무렵 레닌의 태도와 그가 쓴 책들을 살펴봤을 때, 레닌이 한국공산당에게 아시아 및 원동혁명의 중요한 역할을 기대한 모양이다.
볼셰비키 혁명 직후 러시아는 일본 제국주의나 중국 군벌들과는 관계가 개선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은 황국 중심의 군국주의가 한창 판을 치고 있는데 비하여 한국은 바야흐로 망국의 비운을 안고 사람마다 비분강개하는 분위기가 충만한데다가 해외에 사람들이 많이 흩어져 있어 그들은 일어, 중국어에도 대부분 능통하니 세계 정세에도 민감할 것이란 점을 고려하여 레닌은 아마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조선과 대만에 대한 일제의 식민 지배가 지속되면서, 일제의 기본 목표가 민족말살임이 드러나게 되었고, 한민족과 대만 민족의 저항이 거세지게 되었으며, 조선에서는 1919년 3·1운동이후 무장 독립투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하여 한형권은 모스크바에 주재하고 있으면서 전로노무자대회에서 임정 대표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1920년 7월에 열린 세계공산당(코민테른) 대회에 한형권을 상해임시정부 대표로, 박진순은 공산당 대표로서 각각 참석하여 원동혁명을 위해서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해 줄 것을 소비에트 러시아에 호소하였다.
1920년 7월에 임시정부를 대표한 한형권과 소비에트 러시아 사이에는 독립운동 지원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고 알려졌으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고 김홍일은 주장한다.
첫째.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한다.
둘째. 한국 임시정부는 점차적으로 공산주의를 채택한다.
셋째. 연해주와 만주 각지에 있는 한국 독립군을 시베리아로 집결시켜 훈련할 것을 허가하며 이에 소요되는 장비 및 보급을 부담한다.
넷째. 한국 독립군은 소비에트 러시아 영토내에 있는 한 러시아 사령관의 지휘를 받는다.
대체로 이러한 골자로 된 협약에 따라 그 후 구체화된 것이 그 국제군 형성의 동기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1920년 가을경에 한형권은 코민테른으로부터 받은 독립 원조금 금화 60만 루블 가운데 일단 금화 20만 루블은 모스크바에 두기로 하고 나머지 금화 40만 루블 정도를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치타에 가서 상해 임정의 이동휘가 보낸 김립에게 그 자금을 전해 주기 위해서였다.
한형권이 치타에 이르자 그 곳에는 이미 이동휘가 보낸 김립이 와 있었다.
한형권은 김립을 통하여 그 동안의 상해 임정 소식을 듣고 그 금화를 전한 후 다시 이동휘의 지시에 따라 나머지 금화를 가지로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김립은 한형권에게서 받은 그 자금을 가지고 외몽고의 북경을 거쳐 1920년 12월경에 상해에 돌아왔다.
3·1운동 직후 독립운동계에 있어서 금화 60만 루블이란 막대한 자금이었기 때문에 이동휘는 그 자금을 가지고 1921년 1월 10일 상해에서 한인사회당 대표대회를 열고 고려공산당이라 개칭한 후 그 위세를 살려 당세를 더욱 확대하였다.
이것이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김홍일의 주장에 따르면) 그 후 김립이 가져온 돈이 상해 바닥에 풀리게 되자 아마 그 때 그 곳 젊은 사람치고 다소나마 그 돈을 안 써 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일부 인사들은 그 돈을 사생활에 사용하여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김홍일의 주장에 따르면) 이동휘는 돈의 여세를 몰아 본국 조직을 확대하기 위해 사람을 파견하고 일본 공산당도 지원해 주는 등 위세가 당당했다. 그러나 이처럼 돈이 풍부하게 돌아가자 일부 인사들의 사생활은 호사가 지나쳐 끝내 공금횡령에 대한 시비로까지 크게 번져 결국 우리 나라 독립운동의 분열을 부채질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 이동휘는 방대한 조직망을 꾸미기에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무렵 시베리아에서 소련 적군이 시묘노프의 친일 백파 지방정권을 타도하자 시묘노프(셰묘노프)는 만주로 도망치고 시베리아 치타(※ 극동공화국의 첫 번째 서울은 베르흐네우진스크(오늘날의 울란우데)였고 나중에 치타로 옮겨졌다)에 원동 정부(러시아명 부펠, 극동공화국 정부)을 세웠다.
그 원동공화국 정부내의 최고 책임자는 크라스나쇼코프(Краснощёков)였는데, 그는 모스크바로부터 파견되어 온 사람이었다.
이러한 동시베리아 정세의 변화에 따라 이동휘는 박애, 정도정(혹은 장도종) 등을 극동공화국의 서울격인 치타에 파견하여 볼셰비키 조직(달뷰라 추정) 내에 설치된 한인부를 관장하였던 것이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시작. 양파의 대립
......김홍일의 주장에 따르면......
그러니 이들 상해파에 대립되는 이르쿠츠크파 공산주의자들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었다. 사실 그들 이르쿠츠크파는 상해파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1918년 정월(1월)경에 이르쿠츠크 지방에 살고 있던 한인 2세들인 김철훈, 남만춘 그리고 오하묵 등이 모여 따로 공산당 조직을 만들었다.
그들은 1919년 9월 5일경 이르쿠츠크 일대의 소련 공산당 지부내에서 (이르쿠츠크에서) 김철훈, 한안드레이, 최고려, 오하묵, 박이노겐치 등이 모여 전로한인공산당을 조직하였으니, 이것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시작이다.
(김홍일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 가운덴 제정 러시아 사관학교 출신인 오하묵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1920년의 시묘노프 잔당 토멸 당시에 이미 파르티잔을 조직하여 적군과 연합 공격한 바가 있었으며, 그 후에도 계속 천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적군을 도와준 탓으로 소련 공산당 지부에서는 그를 신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당지부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차차 당세를 넓히는 한편 본국과 중국 각지에도 사람을 보내어 집요하게 자파조직을 꾀하는 등 대단한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 때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얼마우재라고 불렀다. (마우재란 러시아 사람을 가리키는 뜻이며 얼은 그들이 이세(二世)이기 때문에 붙여준 중국식 말임)
그들은 이르쿠츠크 당지부와의 긴밀한 유대를 기회로 치타 정부의 혼란을 이용하면서 당무관계로 코민테른 원동서기국(혹은 「동양비서부」라고도 한다) 책임자인 슈먀츠키(Шумяцкий)가 원동공화국(=극동공화국)의 서울격인 치타로 가는 것을 중도에 맞아 그를 이르쿠츠크에 주재케 하는데 성공했다.
이리하여 원동공화국의 서울인 치타에 설치할 예정이던 소위 코민테른 원동서기부는 결국 이르쿠츠크파의 뜻대로 그들의 권내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 코민테른 원동서기부( = 극동서기부 = 동양비서부 :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го секретариата Коминтерна в Иркутске)를 ‘동양비서부’라고도 합니다. 이 무렵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기관이었던 코민테른 내부에 약 1년간 존속했던 부서인 동양비서부가 관할한 지역이 극동 지역을 넘어섰기에 ‘동양비서부’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달뷰라(다른 이름 : 달비라)’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혹은 ‘극동공화국’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슈먀츠키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에다가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달뷰라, 혹은 달이비로.Дальбюро ЦК РКП(б))의 구성원을 겸임하였기에 헷갈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후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간의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졌다.
(김홍일, 리인섭 등이 주장하기를) 상해파는 이르쿠츠크파를 “공산주의 운동의 정통을 무시한 반당적인 무리들, 이르쿠츠크파의 일원을 과거 백파에 있었던 자, 친일 매국노라고 소문나서 이르쿠츠크로 도망온 자들”이라고 비난하면서 모스크바 중앙정부에 대하여 그들의 활동을 저지시켜달라고 호소하는가 하면,
이르쿠츠크파에서는 상해파를 가리켜 “민족 자본주의적인 기회주의 공산주의자들”이라고 공박하며 코민테른 동양비서부(혹은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го секретариата Коминтерна в Иркутске, 「원동비서부, 혹은 극동비서부」라고도 한다)와의 유대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이와 같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양파 간의 추잡한 세력 다툼을 옆에서 지켜본 코민테른 동양비서부(혹은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Дальбюро ЦК РКП(б))의 당국자들은 화해를 유도하는 자, 한쪽 편만을 드는 자 등등 다양하게 갈라져 있었다.
동양비서부(혹은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의 당국자들은 곧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표들을 각각 초치하여 극동혁명에 있어서의 한인들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조속히 양파 간 조직을 일원화할 것을 종용했다.
그 때 그 대책의 일환으로 동양비서부(혹은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의 당국자들이 내놓은 안이 바로 1921년에 고려공산당 대회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결정이 있자 각자 당세확장을 위한 양파의 싸움은 더욱 가열되어 중상모략이 증가하였다. 양파는 총회에서 제각기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각 지방의 대표자 인선에 이르기까지 대립을 빚었다.
......김홍일의 주장 중략함......
1921. 6, 28.일 발생한 자유시 참변 이후에도
시베리아와 만주, 중국은 물론 심지어 국내에까지 양파 간의 분쟁이 번져갔다. 당시 국내에서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이르쿠츠파와 가까운) 화요회, ML당, 서울파, (화요파와 가까운)남로당, 북로당, (상해파와는 큰 관계가 없는) 동북항일계, 연안파, 소련파, 주체사상파 등으로 공산주의 운동이 갈라져 대립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간의 파벌다툼과 내분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한국에서도 이에 관련되었던 수십만명이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반공정권의 보도연맹 집단학살 등에 관계되어 죽었다.
자유시 집결
분산 배치
양력 1917년 10월의 러시아 공산혁명(일명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자 러시아령으로 이동한 독립군이 일본의 시베리아 침략군,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등의 러시아 내전에 간섭한 연합국에 대항해 러시아 공산주의자에게 협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20년 가을부터 1921년 6월까지 자유시와 수라제프카(자유시 시청에서 남쪽으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수라제프카 기차역이 있고, 기차역 우측에서 1킬로미터 쯤 떨어진 곳에는 자유시 항구가 있다. 자유시항은 아무르강의 지류인 제야강의 대표적 항구이다) 마을에 집결한 독립군이 모여 국문, 러시아어, 한문과 함께 군사지식, 군가와 러시아 노래를 배운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은 러시아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1921년 6월 자유시에는 수라제프카에 주둔했던 사할린 군대(니항군대라고도 한다) 등을 포함한 모든 독립군이 모였는데, 자유시 주민들의 목격담과 기록에 추정되는 병력수는 6천명에서 7천명 정도로 적게 잡아도 6천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 자유시 일대에 모여든 독립군의 숫자는 자료마다 다르다. 대략 3,000여명에서 ~ 7,000여명이다.)
자유시에 거주하던 한국계 주민들도 사할린주 니항 등지에서 피난 온 사람들과 기존의 번화가이던 발샤야 거리 부근의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 마을과 수라제프카 구역 좌측의 카레이스키 파셜록 주민들을 합하면 최소 수백명에서 수천명까지 있었던 모양이다.
또 연해주와 만주, 서쪽 시베리아에서 모여들고 있었던 독립군을 합한다면 이것보다 더 많은 병력이 러시아령에 넘어온 상태였다.
1921년경 자유시 주변의 도시들
겨울철에는 강추위로 야외활동이 곤란하며 제야강, 실림자강, 아무르강 및 대륙횡단 철도를 따라 아래와 같이 도시가 위치한다.
(1) 블라가베셴스크 : благовещенск, 블라가베쉔스크 혹은 블라가베쳰스크라고도 한다. 아무르주(Амурская область)의 주도(州都)이다. 제야강을 따라 자유시 남쪽으로 직선거리 약 135킬로미터 아래에 위치, 제야강과 몽고에서 발원한 아무르강의 합류지점으로 중국령 흑하시(黑河市)와 마주보고 있다.
(2) 자유시 : 러시아어로 스바보드니(Свободный)라고도 불린다. 1912년 7월 30일경 시내에 최초의 건물이 만들어졌다. 1917년 4월 알렉셰예프스크(Алексеевск)에서 러시아어의 ‘자유’를 의미하는 ‘스바보드니’로 개명되었다.
(3) 수라제프카 : Cypaжевкa, 우크라이나 출신 주민들에 의하여 자유시(스바보드니)보다 먼저 만들어진 아무르강의 지류인 제야강변의 항구 마을이다.
자유시 항구로 불려졌다. 자유시 중심부에서 약 3~4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한다. 행정구역은 자유시의 일부분이다.
철도와 도로교통의 발전으로 여객선 항구역할이 감소되었다. 도심은 가로 약 4킬로미터 세로 약 4킬로미터 정도의 크기이며. 1921년경 벽돌공장, 제분소, 양조장, 도축장, 기차역과 항구 관련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1928년 (한국과) 아무르강 대홍수로 수라제프카 마을 우측의 항구와 미하일로-체스나코프스카야 기차역에서 제야강 방향이 침수되었다.
1921년 무렵 항구였던 발샤야 거리(혹은 볼쇼이 거리)가 최대 번화가였으며, 발샤야 거리 부근에 한국인 거주지인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 마을이 있었다.
스바보드니의 한국인 집단 거주지는 항구쪽의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와 농업을 하던 수라제프카 좌측의 카레이스키 파셜록 등 2개소 이상이었다.
(4) 바르다곤 : Бардагон, 수라제프카 마을에서 남서쪽으로 직선거리 약 7킬로미터 정도 하류에 있는 마을이다. 자유시보다 먼저 건설되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도로교통이 발전되자 제야강변 항구로서의 역할이 감소하였다. 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사건 당시 수라제프카에서 제야강 갱변(강변)을 따라 탈출하던 사할린 의용대가 다수 수장되었다고 하며, 박일리야 등 일부는 바르다곤 방향(남쪽)으로 도주해서 중국땅으로 탈출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5) 사벳스키 : Советский, 수라제프카 마을에서 서쪽으로 약 4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북동쪽 1킬로미터 지점에 (자유시) 러시아인의 공동묘지가 있다. 1937년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전까지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마을이다. 과거에 카레이스키 파셜록(корейский посёлок), 혹은 쌀마을, 콩마을 등으로 불려졌으나 지금은 러시아인들이 사는 마을이다.
자유시의 행정구역이다.
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사건 당시 수라제프카를 탈출한 독립군 약 300여명이 공동묘지 근처로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수라제프카에서 동료들이 죽자, 적군(赤軍, 소련군)에게 스스로 항복하였다고 한다. (※ 공동묘지가 여러개 있어 독립군이 탈출한 방향의 공동묘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사벳스키 마을 공동묘지(Корейского посёлка кладбище)가 옆에 있었는데 1937년 중앙아시아 이주 후 묘지를 관리해 주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한다.
(6) 크라스나야라바 : Красноярово, 자유시에서 제야강을 거슬러 올라가 직선거리로 북동쪽 24킬로미터쯤 떨어진 곳
(7) 마자나바 : Мазаново, 자유시에서 제야강을 거슬러 북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60킬로미터 떨어진 곳, 제야강에 의한 상습 침수지대에 위치한다. 한국 독립운동사에는 “마자노보 혹은 마자노프”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1928년 아무르강 대홍수로 도시의 대부분이 침수되자 8킬로미터 상류의 보다 높은 지역인 나바키예프스키 우발(Новокиевский Увал)로 마을의 일부를 이동하였다. 1919년경 일제(日帝) 침략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곳이다.
(8) 푸짜찌나 : Путятино, 마자나바에서 북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22킬로미터 위의 제야강 상류 마을이다.
(9) 보츠카료프카 : Бочкарёвка, 과거 여러개의 명칭이 있었다. 자유시에서 남동쪽으로 직선거리 60킬로미터쯤에 위치하며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블라가베셴스크로 가는 철도와의 교차점이다. 여러 차례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서 오늘날의 명칭은 벨라고르스크(Белого́рск)이며 철도교통의 요충지이다.
(10) 트로이츠코예 : 블라가베셴스크에서 자유시(스바보드니) 방향인 이바나프카(Ивановка)군 지역에 위치하며, 발해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자유시에서 제야강 상류지역인 쉬마노프스크 지역에서도 고대의 석성(石城)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11) 사말리(혹은 사만리, 四萬里) : 자유시(스바보드니)에서 남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470킬로미터 지점의 아무르 강변에 위치한 고려인 마을이었다.
1871년 4월경 한국인들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자유시(스바보드니), 마자나바, 바르다곤 등보다 먼저 마을이 생겼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었다.
높은 산과 강으로 나누어지는 한국의 복잡한 지형과 다르게 자유시 일대는 수천킬로미터에 걸친 시베리아 평원에 위치하며, 수백킬로미터 까지도 평소 조망할 수 있는 환경이며, 자유시의 약간 높은 언덕에서는 수라제프카 마을과 20킬로미터 떨어진 크라스나야라바, 60킬로미터 떨어진 마자나바의 불빛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겨울철에도 독립군이 분산 배치된 민가의 굴뚝 연기를 쉽게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제야강이 두껍게 얼어붙어 야외활동과 수상교통이 마비된다. 1921년경에는 썰매도 광범위하게 활용하였다.
1920년초 니항사건(尼港, 니콜라예프스크) 당시 포위된 일본군을 구원하려는 하바로프스크 주둔 일본군이나 사할린섬과 일본 본토 주둔 일본군이 출동하지 못한 것도, 아무르강과 사할린섬 부근 오호츠크해의 결빙과 추위가 원인이었다.
시베리아의 겨울은 독립군도 야외활동이 불가능하였지만, 마찬가지로 일본군과 협조하였던 백군, 미국 등 연합군, 참전군도 활동이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자유시(오늘날의 러시아 아무르주에 위치한 도시로 러시아어 명칭은 스바보드니 혹은 스보보드니, 알렉셰프스크로 불려진다)는 러시아인 이주 초기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타이가 숲이었으며, 첫 이름은 알렉셰프스크(Алексе́евск)였고 1912년 대륙횡단 철도가 부설되자 몇 년만에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수라제프카(Cypaжевкa) 지역에 위치한 자유시 항구는 스바보드니 시내보다 먼저 건설되었으며, 제야강(혹은 나선이강 등으로 불려짐) 항해의 중요한 항구 역할을 하여 왔다.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 이후에 한국어로 자유를 의미하는 스바보드니(Свободный)로 개칭하였다.
오늘날 스바보드니시(자유시)에는 러시아 내전기의 승전기념비 등이 여러개 설치되어 관리되고 있다.
스탈린 시대에는 강제수용소가 설치되어 수십만명이 수용되기도 하였으며, 오늘날에도 주변에 바스토치니 우주로켓 발사장과 대규모 천연가스시설이 건설된 교통과 시베리아 지역의 군사적 요충지이다.
러시아 내전기인 1918년 9월경부터 자유시는 시베리아 대륙횡단 철도 주변 도시중 볼셰비키(공산당)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자유시 근방의 마자나바(=마자노보=마사노프=마자노프라고 불림), 크라스나야라바, 뿌쨔찌나, 예까쩨리노브까 등에 분산 배치되기 시작한 독립군의 도착 시기는 1920년 10월경부터 1921년 6월까지 지속되었다.
1920년 10월 12일경 한인 니항 부대(사할린 주 출신 독립군)가 도착했을 무렵부터 낮에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제야강이 얼기 시작하였으며, 11월과 12월의 대낮의 날씨가 영하 20도에 이르고 밤에는 영하 30도 이하까지 떨어지는 날이 많자, 11월 이후부터 1921년 2월까지 문밖에 나가 야외 활동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 무렵 독립군에게 중요한 것은, 겨울을 피해 없이 나는 것과 식량과 무기의 조달이었다.
아울러 기초적인 국문(한글), 한자, 러시아어 교육이 병행되고 있었다. 자유시와 수라제프카 마을은 겨울철 제야강의 두껍게 언 얼음을 깨거나 우물의 얼음을 깨지 않으면, 밥 짓고 세수할 물조차 구하기 힘든 지경이었으며, 갑자기 불어난 독립군에 군불 땔 장작조차 부족한 경우가 허다하였다.
요즘같이 전기와 석유로 난방을 하는 시대에도 한파가 오면 집에서 얼어죽기도 하는 곳이 시베리아이다.
자유시 남쪽 3~4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수라제프카 기차역과 자유시항구에서 증기 기관차용 및 선박용 나무와 석탄조차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다면 치타나 이르쿠츠크나 하바로프스크,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할 기차, 선박의 연료조차 제대로 보급하기 힘든 지경이었다.
겨울철 시베리아의 집밖은 보통 영하 20도 이하의 기온으로 어설프게 방한복을 입고 한시간만 돌아다녀도 얼어 죽을 수 있다.
원래 한국 북부지방이나 만주 연해주에서 태어난 독립군들이 많다고 하지만, 낯선 곳에서 식수와 식량 조달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과거처럼 제야강 일대의 평원에서 사냥을 하거나 물고기를 잡는 것도 낯선 환경 속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유시의 환경
말이 독립군 대 부대를 조직하기 위한 집결이지, 주변 상황상 제대로 된 훈련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거기다 볼셰비키군은 러시아 땅에 오자마자 무장해제부터 무조건 요구하니,
몇 명되지도 않은 일천한 자들의 종파간 권력 투쟁에 휘둘리게 된 것이다.
독립군 대부분은 그들이 누구인이지 몰랐고, 정체조차 파악할 수 없었고,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러시아의 대기근 시기 식량조달은 볼셰비키의 지원이 없다면 현지조달을 주로 해야 하는데, 박일리야의 사할린주 출신 부대와 일제와의 전투를 우선시하는 대다수 독립군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6개월 이상 식량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았고, 이질과 괴혈병이 유행했다.
일부 독립군에게는 군사훈련이나 약속된 식량배급과 자금, 무기, 피복 공급은 아예 없고, 금화조차 가져오지 못한 부대들은 러시아인 민가에 들어가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르주의 러시아계 농민들은 독립군을 “강도떼”, “도둑떼”, “제2의 사무라이”, “제2의 홍후자(紅胡子, 마적, 홍후즈)”이라고 부르며,
러시아 관청과 볼셰비키 부대에 한국계 독립군이 강도짓을 하고 있다고 고발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1920년 가을이 지나고 서리와 눈이 내리는 시기, 독립군의 활동은 수개월간 식량조달, 마실 물을 구하고 땔 나무조달, 국문교육 등에 집중하고, 박일리야와 오하묵 등의 지휘권 다툼에 대해서는 그냥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질·괴혈병, 식량부족과 추위, 잦은 부대이동으로 러시아 주민들의 불만이 증폭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자유시 일대에 집결한 독립군의 대부분은 현재의 러시아 볼셰비키든지 과거 차르 러시아 관리였던지를 따지기 보다는 식량, 옷, 난방, 무기조달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과 특히 지방의 볼셰비키(공산당)들과는 원만히 지내려고 노력하였다.
결국에는 자유시에서의 독립군 생활상은 일본군과 친일파, 장작림 등에게 쫒겨다니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고 만주나 한국보다 낫다고 할 수 없었다.
3·1운동이후 만주와 간도, 한국내에서는 많은 독립군 단체가 생겨나 한국인 상대로 자금도 지원받았다.
3·1운동의 무자비한 폭력진압과 간도학살과 경신년 대학살이 진행됨에 따라, 일제의 말살정책을 눈으로 확인한 한국인들의 독립군에 대한 지원이 늘어났다.
과거의 의병활동 시기, 밥숟가락 뜨는 집에서 미처 의병에게 줄 돈과 식량을 준비하지 못했으면, 마을에 들어가기 전에 조총 한방을 쏘면,
알아서 대부분 의병활동을 지원했으나. 1910년 망국 이후에는 일제에 협조하는 자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최종적으로 1930년대에는 성씨마저 일본식으로 바꾸고 일본어로 교육을 받고, 어린이마저 일어를 사용하니 일본화가 진행되었다고 봐야 한다.
독립군 문학빈 장군과 리영희 교수의 외조부
한국 독재 시대 상당히 알려진 인물중에 리영희 교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주장하기로는 자기 외할아버지가 최봉학(崔鳳鶴)이라는 사람인데 압록강에 인접한 평안도 벽동군에 살았다고 한다. 최봉학은 벽동군의 부자였는데 1929년경 초겨울쯤 유명한 독립운동가 문학빈에 의해 처단되었다.
(※ 문학빈은 이 무렵 만주 일대에서 오동진, 심용준(심룡운), 심만호 등과 더불어 상당히 알려진 독립운동가였으며 김좌진과 마찬가지로 호로군 쪽과도 상당한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2010년경 이후에서야 중화인민공화국의 관련 자료를 통해 추정해 볼 수 있었는데, 1948년경 중국 내전이 격화될 무렵 문학빈의 소식은 끊어졌다. 문학빈 장군 같은 사람도 고향으로 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혼란기 후손이 못나면 한 치의 묻힐 곳도 없었을 것이다)
리영희의 주장에 따르면, 문학빈은 자신의 외조부 최봉학과는 아는 사이였고, 어느날 찾아와 바로 머리에 총구를 대고 돈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었고, 무슨 이야기까지 하면서 독립운동에 쓸 돈을 달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빈 측의 주장에 따르면 일제 앞잡이 단체 간부를 지낸 적이 있는 최모에게 지난 과거의 행동을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며, 당시 시대 상황은 밥숟가락 뜨는 자들 중에서는 돈을 몇 번이고 달라고 해서 안주는 자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리고 어느날 독립군에게 줄 돈을 준비하지 못한 것을 발각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처단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신문 등에도 보도가 되었는데, 과연 국경지방에 사는 밥숟가락 뜬다는 소리를 듣는 데 독립군에게 줄 돈을 준비 못했다는 것이 그 무렵 가능한 것이었는지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다.
일제 밀정에 대한 독립군의 처벌
폴란드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소(Auschwitz Birkenau German Nazi Concentration and Extermination Camp : 1940~1945)의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어봤을 때,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자간의 지켜야 할 법은 「동료 유태인 죄수의 음식을 훔쳐 먹지 않는다. 동료의 의복을 훔쳐 입지 않는다」 인데, 빵 한조각을 훔쳐먹는 죄를 저지르면 동료 유태인들에 의해 즉결 처형되었다고 한다.
3·1운동, 4월참변, 간도학살의 시기 아무리 악질 친일파라고 할지라도 만주 인근에서 독립군의 요청을 거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심지어 유명한 친일파 이완용(1858~1926)도 3·1운동 계획을 사전에 알았지만 이를 일제에 밀고하지 못했다고 한다.
1910년 망국이후 혹시 한가닥이라도 나은 점이 있을까 기대하였던 일제의 식민지배는, 조선민족의 말살을 기본 목표로 하다 보니, 이미 만주·간도·연해주·한국 국경지방의 한국인 사회에서는 3·1운동 이후 독립군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나아가 한 개 민족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할 법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는 매국노 이완용도 3·1운동을 밀고 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만주·러시아에는 이완용보다 더 악질적인 친일파도 많았다.
그러나 러시아인이 다수인 자유시, 마자나바, 크라스나야라바 일대에 집결한 6,000명에서 ~ 7,000여명의 무장 혹은 비무장 독립군에게는 이러한 한국 독립군의 법이 적용될 수는 없었다.
그곳은 공산주의 혁명 성공을 위한 러시아 볼셰비키의 엄격한 법이 적용되는 곳이었다.
독립군이 이동해 주둔한 자유시와 마자나바 지역은 러시아 내전 때 침략해온 일본군에 의해 학살을 경험한 곳으로, 수백에서 ~ 수천명 이상의 고려인들이 거주하였지만, 러시아 대기근 시기 집결한 독립군은 주민에게 좋게만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결국 독립군들은
만주 친일군벌과 친일파, 일본군의 눈치를 보던 것에서 새로운 상전인 러시아 볼셰비키와 적군(赤軍)의 눈치도 살피게 된다.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을 환영하는 러시아 백파계 주민들
시베리아을 침략한 일본군. 일본군 없는 백파군대는 어미 잃은 삐아리 였다.
시베리아를 침략한 일본군
시베리아를 침략한 일본군
일본군과 합동 작전을 벌이는 러시아 백파군대
백파 군대와 일본군군.
일본군을 환영하는 러시아계 주민들
1920년 연해주 4월 참변 당시 끌려가는 조선인들
한운용 선생
연해주 수청지방(수찬지방) 독립군
연해주의 독립군
자유시에 가지 않은 김좌진 장군
만주의 참의부 독립군
사할린주 니항 출신 독립군들 : '침략자에게는 죽음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