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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25,13ㄴ-21
그 무렵
13 아그리파스 임금과 베르니케가 카이사리아에 도착하여 페스투스에게 인사하였다.
14 그들이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내자 페스투스가 바오로의 사건을 꺼내어 임금에게 이야기하였다.
“펠릭스가 버려두고 간 수인이 하나 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갔더니 수석 사제들과 유다인들의 원로들이 그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면서 유죄 판결을 요청하였습니다.
16 그러나 나는 고발을 당한 자가 고발한 자와 대면하여 고발 내용에 관한 변호의 기회를 가지기도 전에 사람을 내주는 것은 로마인들의 관례가 아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17 그래서 그들이 이곳으로 함께 오자,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다음 날로 재판정에 앉아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18 그런데 고발한 자들이 그를 둘러섰지만 내가 짐작한 범법 사실은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19 바오로와 다투는 것은, 자기들만의 종교와 관련되고, 또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
20 나는 이 사건을 어떻게 심리해야 할지 몰라서,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 그곳에서 이 사건에 관하여 재판을 받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21 바오로는 그대로 갇혀 있다가 폐하의 판결을 받겠다고 상소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황제께 보낼 때까지 가두어 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21,15-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상을 차려 아침을 먹이신 다음, 베드로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며 묻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5.16.17)
뭔가 이상한 질문입니다.
보통 일을 맡길 때면, ‘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잘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묻는데, 엉뚱하게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왜일까요?
이는 일을 ‘잘’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당신께서 맡기신 일은 ‘능력’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하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일’을 사랑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엇이 본질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나의 양들’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돌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 21,15.16.17)
그렇습니다.
당신의 양들이 맡겨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믿으시기에 맡기신 양들입니다.
이는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능력을 보고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과 사랑으로 맡기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 하심은 당신이 먼저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당신이 먼저 우리를 믿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세 번의 동문서답으로 대화를 끝내고 맙니다.
그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5.16.17)라고 고백할 뿐,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 이전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주님을 의심하고 세 번이나 부정했지만, 주님은 그가 배신할 줄을 알면서도 그를 믿으셨습니다.
그러니 비록 그가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는 ‘하느님의 신실하심’(헤세드)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믿음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끝내 이를 알아듣지 못한 베드로는 결국 양떼를 돌보지 않고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폴란드 소설가 센키비치의 소설 <쿼바디스>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지하교회에 숨어있던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나가던 중, 갑자가 한 줄기의 빛이 그를 향해 다가오자 그는 그 빛이 그리스도임을 알고 땅에 엎드린 채 묻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러자 빛이신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나의 양을 버렸으니,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지 않겠느냐?”
그제야 비로소 베드로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당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일’에 앞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요청받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유일한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의 일을 따르라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의 일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 다지기>
오늘 주님의 질문 곧 베드로에게 하신 질문은 질문을 자아냅니다.
주님께서 정말 이렇게 질문하셨을까?
왜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질문하셨을까?
세 번 질문하신 것은 세 번 배반한 것에 대한 사랑 확인 차원이라고 쳐도, 왜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냐고 물으셨을까?
정말 주님의 질문일까?
주님의 질문이라면 왜 그런 질문을 하셨을까?
주님의 질문은 베드로의 말대로 베드로가 사랑하는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다지기이고, 당신 양들을 맡기기 위한 사랑 다지기입니다.
당신의 질문에 베드로가 답할 때마다 내 양들을 돌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제자에게 당신 양들을 맡기시려는 계획인데, 그것도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기시려는 것입니다.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상처하고 홀로 아이를 키우던 내가 불치병으로 아이를 두고 죽게 되었습니다.
맡아줄 사람이 없으면 보육원으로 보내야 하기에 친지나 지인 가운데서 누구한테 맡기는 것이 좋을지, 그리고 누가 가장 나를 사랑하는지 생각할 것입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아이를 가장 잘 돌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물으신 것은 몰라서 물으신 것도 아니고, 짓궂으시기에 질문하신 것도 아니며, 베드로의 입으로 거듭 대답하게 하심으로써 사랑 다지기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냐고 물으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목자요 스승이신 주님 대신 주님의 모든 양을 잘 보살필 최고 목자가 되려면 다른 누구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하는데, 그렇게 사랑하는지, 아니 사랑하겠는지 사랑의 의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교황에게도 똑같은 물으실 터인데, 그러나 그것은 다른 누구보다도 더 당신을 지금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더 당신을 사랑할 의지가 있는지 다지기 차원에서 물으시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나한테는 묻지 않으실까요?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사랑으로 관계 회복을>
인간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그렇지만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약한 의지로 다짐과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선을 알면서도 오히려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철석같이 믿었는데 네가 그럴 줄 몰랐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배신을 당하면 큰 상처를 받게 되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를 쳐다보기도 싫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립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옛말이 있듯이 많이 놀라면 매사에 겁을 먹게 됩니다.
이러한 상처를 치유 받고 여기에서 일어서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예수님과의 첫 만남 때 부르신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한 번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물으셨고 베드로는 세 번 반복해서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마르 14,29)라고 하였던 베드로가 맹세하고 저주하며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옛 상처에서 벗어나 주님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약한지를 아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상처 입고 좌절한 마음이 회복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십니다.
관계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깨어진 관계를 완벽한 관계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를 용서하셨고 베드로 또한 그분의 용서를 알고 믿었기에 배반하고도 제자공동체로 다시 돌아와 그들 사이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 그리고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6) 하고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고 파견하신 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네 방법이 아닌 내 방법으로 양들을 돌보아야 할 것이다.
너는 내 양 떼를 돌보며 네 영광이 아닌 내 영광을, 네 주권이 아닌 내 주권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슬퍼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제가 당신께 잘못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십니다. 당신과의 관계를 이제 당신이 판단하십시오.’ 하고 주님께 의탁한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세 번이나 배반하였던 베드로를 내치지 않고 당신의 사랑으로 죄책감과 수치심의 깊은 상처를 치유해 주시며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관계를 지속시켜가는 방법을 알려주셨으니 사랑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용서를 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멀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용서는 배신당한 사람이 하는 것이요,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처럼 품이 큰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아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요한 21,19) 하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른다는 것은 삶의 모든 자리에서 계속됩니다.
그리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혹 소원해진 사람이 있다면 주님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날 고해성사 때 신부님께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신부가 되신 지 얼마나 되셨지요?”
저는 ‘아직도 이 모양으로 사느냐?’ 는 소리로 들었습니다.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고해 신부님께서 “신부님, 기도하시면서 열심히 잘 사세요!” 하시며 격려하시는 말씀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과 사랑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기를 다시금 다짐합니다.
지켜지지 못할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진심을 담아...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반려동물 사랑의 위험성>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 양 떼를 잘 돌보라고 하십니다.
양은 인간보다 낮은 수준의 동물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양은 잡아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양들을 아무렇게나 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중해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에덴 동산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이 만드신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라 하신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듭니다.
우리가 사랑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인간을 먼저 사랑하려 노력하는 것이 맞을까요, 아니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려는 것이 옳을까요?
요한 사도는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도 사랑하게 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순서는 언제나 하느님 사랑이 먼저입니다.
요한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라고 하고, 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21)라고도 합니다.
곧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사랑의 지름길이라기보다는 하느님 사랑의 증거로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부모를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형제나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며 누군가를 사랑하려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해야 이웃을 사랑하게 되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이웃을 존중하지 못합니다.
리오나 헬름슬리(Leona Helmsley)는 압제적인 보스로서 악명 높은 미국 여성 사업가였습니다.
그녀는 연방 소득세 탈세 및 기타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비열한 여왕”으로 불렸습니다.
그녀는 자기 손자 둘에게는 한 푼도 유산을 주지 않았음에도 자기 반려견 트러블에게는 140억 원을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그녀가 말년에 외로울 때 자신을 위로해 고마운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요즘 반려견에 대한 인기가 매우 높습니다.
호텔도 반려견을 데리고 있을 수 있는 방을 따로 만들어야 장사가 될 정도입니다.
그리고 반려동물을 위해 소비하는 돈의 액수도 엄청납니다.
반려동물을 키우면 자녀에게도 정신적으로 도움이 되고 또 여러 이유로 이득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녀를 낳지 않으면서도 지나칠 정도로 반려동물에 집착하는 것을 보면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리오나 헬름슬리는 세금을 내지 않아서 감옥을 들락거려야 했고 자기 사람들에게는 매우 가혹하게 행동했습니다.
조금의 실수를 하더라도 바로 직원을 해고하였고, 직장을 잃고 싶지 않다면 엎드려서 구걸하라고 시켰습니다.
작업을 끝낸 인부들에게 일을 마음에 안 들게 했다고 대금을 내지 않았고, 이 외에도 가족에게도 가혹했다고 합니다.
반려견에게는 그렇게 잘하면서 가족이나 사람들에게는 왜 그렇게 매몰찰까요?
어쩔 수 없습니다.
부모를 사랑해야 형제들이 반려동물보다 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면 형제들의 가치가 반려동물보다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리오나 헬름슬리는 16세에 학교를 가만두고 독립하여 자신의 이름을 몇 번이고 바꾸었습니다.
부모에 대해 알려진 바는 얼마 없지만 부모가 준 이름을 바꾸려 한 것은 부모와 인연을 끊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형제도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엔 더 심해져서 손주들보다 개가 더 사랑스럽게 된 것입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로, 어떤 사람은 반려동물에게는 한 달에 100만 원 이상을 쓰면서 형제가 홀어머니를 모시는 데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한 푼도 보태주지 않습니다.
어머니보다 개가 더 소중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녀를 낳기보다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반려동물을 키우고 사랑하는 이들로서는 화가 날 말 같지만, 자칫 우리가 사람에게 신경 쓰는 것보다 동물에게 더 신경 쓰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의 자녀들은 인간들입니다.
단돈 몇 푼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음을 알면서도 반려동물에게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면 당연히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아끼시는 인간을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쏟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은 반려동물을 키우고 또 가장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어쩌면 이것이 당신을 사랑하면 당신 양 떼를 잘 돌보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상관없이 살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을 철저히 살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겠나이다!>
언젠가 재활용 물품을 가지러 갔을 때였습니다.
저와 다른 형제가 트럭을 몰고 갔습니다.
저는 아파트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열심히 건진 물건들을 나르고 있는데, 그 형제는 식곤증이 몰려왔는지 신나게 떠들다가 세상 편한 얼굴로 남의 집 거실에 누워 세상 편히 자고 있었습니다.
코까지 골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씩씩대는 제가 영과 지혜로 충만하신 자매님께서 충격적인 말씀을 제게 해 주셨습니다.
“저 신부님이 신부님보다 훨씬 하늘나라에 가까이 계시네요.”
오늘 우리는 기쁨의 사도 필립보 네리(1515-1595) 신부님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필립보는 필립비서 4장 4절을 평생에 걸친 좌우명으로 삼으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얼마나 마음이 관대하고 착하던지 당시 로마시민으로서 필립보 부오노(Fillippo Buono-선량한 필립보)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답니다.
필립보의 탁월한 인품과 쾌활한 성격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게 했습니다.
특히 아이들이 그를 죽기 살기로 좋아하고 따랐답니다.
그는 오랜 세월을 아이들과 어울려 정신없이 놀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많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정신이 하나도 없는 필립보에게 물었습니다.
“아이들이 잠시도 쉬지 않고 이렇게 지독하게 떠들어 대는데 괜찮습니까?”
필립보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아닙니다. 아이들이 죄만 짓지 않는다면 제 등 위에서 장작을 패도 괜찮습니다.”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여 사제가 되기에 충분한 지적 능력과 자격을 갖춘 필립보였지만 겸손한 마음에 사제의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 후 13년간 평신도 사도로서 기도와 사도직에 적극 뛰어들었습니다.
영적으로 탁월했고, 덕스러웠던 필립보를 눈여겨본 고해 사제는 그에게 늦었지만 사제의 길을 가도록 권했습니다.
1551년 36세의 나이에 사제로 서품된 필립보는 사제가 된 후에도 언제나 겸손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했습니다.
뛰어난 유머감각으로 사람들에게 늘 기쁨을 선사했습니다.
이렇게 영성적이고 친절한 사람, 재미있으면서도 깊이가 있는 사람이었던 필립보였기에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들끓었습니다.
필립보는 당대 지위고하, 남녀를 불문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레오 11세 교황님께서는 필립보와 이야기하는 것을 생의 가장 큰 낙으로 삼으셨답니다.
클레멘스 13세 교황님이나 그레고리오 14세 교황님께서는 필립보로부터 받은 가르침과 교훈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셨습니다.
가롤로 보로메오와 이냐시오 성인도 필립보와 친밀한 우정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임종 직전 병상에 누운 필립보는 벽에 걸린 십자고상을 손짓하며 이렇게 말하곤 했답니다.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저처럼 고통을 참으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이 미천한 저는 이런 호화스러운 자리 위에서 친절한 사람들의 간호를 받으며 쉬고 있습니다.
얼마나 염치없는 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것을 원하는 사람은 진정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오늘을 철저히 살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겠나이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 사도가 자기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세 번이나 말한 일은(요한 18,17.25.27), 분명히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로 한 일이고, ‘큰 죄’를 지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리 떼 가운데에서 혼자 있는 양”과 같은 처지가 된 상황에서(마태 10,16), 겁에 질려서 엉겁결에 한 일이기 때문에 온전한 자유의지로 한 일이 아니라, 의지가 많이 약해진 상태에서 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시는데, 그 질문에 대답하는 일은 온전한 자유의지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권고할 수는 있지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신 것은 사랑이란 전적으로
자신의 자유의지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서 능동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질문을 듣고 슬퍼한 것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회개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후회’가 아니라 ‘회개’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에, 그는 자기 죄를 뉘우치기는 했지만, 즉 후회했지만, 회개하지는 않고 자살해버렸습니다(마태 27,3.5).
후회와 뉘우침은 회개의 시작일 뿐이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과 죄의 고백과 보속까지 해야 회개가 완성됩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의 대화를 고해성사로 생각할 수 있는데, ‘성찰, 통회, 정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직후에 이루어졌다고 생각됩니다(루카 22,62).
그러면 ‘고백’은 언제 이루어졌을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만 따로 나타나셨을 때(루카 24,34; 1코린 15,5), 베드로 사도 쪽에서 먼저
자기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라는 말씀은 베드로 사도에게 주신 ‘보속’입니다.
용서는 이미 하셨고, 베드로 사도가 보속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보속은 ‘벌’이 아니라, 죄 때문에 생긴 상처를 치유하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죄는 주님의 사랑을 배반한 죄이고, 그 죄의 상처는 사랑으로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양들을 돌보라는 보속은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보속입니다.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형제들에 대한 사랑 없이 주님만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가짜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1요한 4,20)
주님에 대한 사랑은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써 실현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만일에 배반자 유다가 그렇게 자살하지 않고 진실하게 회개하면서 돌아왔다면,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
물론 주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셨을 것이고, 아마도 보속도 베드로 사도와 같은 보속을 주셨을 것입니다.
오늘날 고해성사 후에 실행하는 보속들이 지은 죄에 비해서 너무 가볍고, 너무 형식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보속을 너무 가볍게 형식적으로 조금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회개도 미완성이 되고, 보속도 미완성이 되어버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고해사제가 정해 준 보속보다 더 많이, 또 더 큰 것을 행하라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인데, 그래도 그것으로도 부족합니다.
잊어버리고 있는 죄들이 있을 수 있고, 죄가 아니라고 착각하는 죄들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경우에 따라서 평생 보속을 해야 하는 일도 생기는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으니, 연옥에서의 보속이 필요하게 됩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주신 보속을 충실하게 실행하면서도, 순교할 때까지 평생, 날마다 울면서 통회와 보속을 실행했다고 전해집니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라는 말씀은 박해가 없을 때 순교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라는 말씀은 베드로 사도가 십자가형으로 순교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네가 원하지 않는”이라는 말씀은 “누구나 죽음을 원하지는 않지만, 하느님을 위해서 기꺼이 순교를 받아들이는”으로 해석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바치신 기도에 연결됩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마태 26,39)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은 최후의 만찬 때 하신 말씀,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요한 13,36)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이제 베드로 사도가 순교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따라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 성인(聖人)들의 공동체>
일기쓰듯 하는 강론입니다.
밤에 일어나 자비의 집 숙소를 나서니 반가운 봄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가뭄으로 메말랐던 대지가 봄비에 촉촉이 젖고 있었습니다.
저절로 참 많이 나눴던 “봄비”라는 짧은 자작 애송시가 생각났습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 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
- 2005.5
2005년도 이맘때쯤 그러니까 18년 전 쓴 시입니다.
세월은 그렇게 빠르게 지납니다.
앵두꽃 하얗던게 엊그제 같은데 한 수도형제는 어제 빨갛게 익은 앵두를 다 땄습니다.
빨간 앵두하니 27년전 써놨던 “고백’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믿음의 뿌리 있어
희망의 나뭇잎
사랑의 열매다
사랑합니다.
마침내 빨간 열매로 사랑을 고백하는
앵두나무
초록빛 나뭇잎
희망 사이로 수줍게 살며시
얼굴 내밀고
사랑을 고백하는
빨간 앵두열매들
부끄러워 빨갛게 물들었네”
- 1997.5.30.
봄비가, 빨간 앵두나무가 상징하는 바 성인입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일상에서 반갑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성인들입니다.
두 분의 익명의 성인을 소개합니다.
어느 성인처럼 살아가는 의사가 전하는, 퇴근 후 방문하여 치료해준 자매님의 아들인 교구사제가 성인입니다.
“알츠하이머와 파킨스 병으로 투병중인 어머님을 평생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고 계시는 신부님을 뵐 때마다 ‘사랑’을 정말 제대로 실천하고 계심에 감탄과 존경심이 저절로 생겨나네요.”
또 저보다 1년 후배로 초등학교 교장으로 은퇴한 후 요양원에 있는 남편을 간병하려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그 요양원에서 일하는 성녀같은 70대 초반의 자매님이 보내준 사연도 생각납니다.
“요양보호사 6개월째 제가 돌봐드리던 어르신들중 3분이 선종하셨습니다.
가슴 아픈 일은 임종을 알림에도 가족 누구도 오지 않고 화장장으로 온다며 그리로 어르신 시체를 보내라 합니다.
제가 세수부터 대소변에 전신목욕도 해드리고 죽드시는 식사도 떠드리고 말벗하면서 침대에서 내려오려 발버둥치는 순간 포착해 안아서 올려드리며 정성을 쏟으신 분입니다.
그분이 입으시던 옷, 안경, 성경책등 유품 챙겨 박스에 보내려 하니 가족은 그저 다 버려달라고.
80세로 허망하게 가신 제 어르신 가여워 한참동안 울었습니다.
가족이 어떤 의미인지, 죽음은 무얼 말하는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런 분들이 평범한 듯 하나 일상의 비상한 성인들입니다.
제게는 70대 후반에도 주방장 소임의 책임을 다하는, 또 70대 초반에도 젊은이 못지 않게 일하는 영원한 현역의 농장장 수도형제가 성인입니다.
각자의 일터에서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는 수도형제가 성인입니다.
부단히 자신을 겸손하게 합니다.
그러고 보니 수도공동체가 흡사 성인들의 공동체 같습니다.
부단히 자신을 겸손하게 합니다.
유난히 성인이 많은 한국 가톨릭 교회입니다.
절의 자산이 노승과 노목이라 했지만 교회의 최고의 보물이자 자산은 성인입니다.
주님을 그대로 드러내는 주님을 닮아 참나를 살았던 성인입니다.
지난 수요일 베드로 광장에서 일반 청중을 위한 교황님의 훈화가 참 각별했으니 바로 박해시대 한국 교회에 대한 소개와 온통 성 김대건 안드레아에 대한 찬탄과 격찬의 강론이었습니다.
다섯부분에 대한 강조였습니다.
1. 복음을 위한 위대한 시련.
2. 항구히 그리스도를 따름.
3. 복음을 완전히 살았던 분.
4. 위대한 한국인의 증거.
5. 모든 추락으로부터의 부활.
교황님께서 얼마나 한국교회 대해 애정과 관심을 쏟고 있는지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은 성인들의 나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자부심입니다.
기념, 기억하라고 있는 성인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 살라고 선물로 주신 성인들입니다.
어제 베다 성인에 이어 오늘은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입니다.
다양한 꽃들처럼 크기, 모양, 색깔, 향기가 다 각기 고유한 꽃들처럼 성인이 그렇습니다.
똑같은 성인은 없고 주님을 닮을수록 고유의 참나의 성인입니다.
필립보 네리 성인에 대한 감동적인 생애를 일부 소개합니다.
착하고 명랑한 성격에 유머 감각까지 겸비한 소년 필립보는 ‘착한 필립보Filippo bono’로 불렸습니다.
필립보가 활동하던 당시의 유럽은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속해 있었습니다.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이어 교회의 분열이 뒤따릅니다.
1517년 마르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교회의 분열은 가톨릭 교회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고, 그리스도 교회는 가톨릭, 루터교, 개혁교회, 영국 성공회 넷으로 갈라집니다.
바로 로마의 사도라 부르던 필립보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던 때가 이 무렵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을 하느님께 이끌고자 준 많은 충고중 일부만 나눕니다.
“젊은이들이여, 선을 행할 시간이 아직 있으니 그대들은 복되다.”
“육신을 돌보는 데 지나치게 마음을 쓰지 말라. 교만을 미워하라. 자주 기도하라.”
“유혹을 받게 되면 그 즉시 주님께 매달려라.”
“하느님을 등지는 사람은 쉽사리 유혹에 빠진다.”
“악습의 온상인 게으름을 경계하라.”
동료사제들과 오라토리오 수도회를 설립한 성인에 대한 평가와 임종시 모습도 감동적입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유머 감각 풍부한 성인”이라고 칭했고,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매력넘치는 인품을 지닌, 사람을 저절로 끌어들이는 능력을 지닌 성인 사제”, 또 “교회 역사상 가장 명랑한 성인”으로 평가받은 성인의 생애 마지막 5년 동안 심한 병고에 시달릴 때, 성인은 벽에 걸린 십자가를 가리키며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고통을 참으시며 십자가에 못박혀 계시는데, 이 비천한 몸은 이런 호사스런 자리에서 친절한 사람들의 간호를 받으며 쉬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염치없는 노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것을 원하는 자는 참으로 해야 할 일을 모르는 자입니다.”
1595년 5월26일, 성인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축복하고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숨을 거두었고, 모든 이들은 “성인께서 돌아가셨다. 위대한 성인께서 돌아가셨다” 소리쳤다 합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도 인상적입니다.
복음의 주인공은 베드로이고 사도행전 독서의 주인공은 바오로입니다.
두 성인 사도는 교회의 양대 기둥입니다.
오늘 말씀의 분위기에 어른거리는 두 사도의 머지 않아 맞이할 순교의 죽음입니다.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세 물음과 답은 동일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은 자기를 세 번 배반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을 확인받자, “내 양들을 돌보아라.” 말씀하신 후, “나를 따라라” 명하십니다.
아마 얼마 안남은 동안 베드로는 자나깨나 “너는 나를 사랑 하느냐?” 이 말씀을 좌우명 삼아 주님 사랑에 온힘을 쏟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가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말씀입니다.
그동안 계속됐던 사도행전 제1독서도 내일이면 끝납니다.
오늘 바오로는 카이사리아에서 심문을 받고 이어 로마로 압송될 것이며 로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담대히 선포하다 마침내 순교의 월계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의 좌우명은 무엇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다음 둘임에 분명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필립1,21ㄱ)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2티모4,7)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고유의 참나의 성인이 되도록 이끌어 줍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복음은 사랑 고백에 관한 요한복음의 아주 유명한 부분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세 차례 물음에 베드로가 응답하는 대목이지요.
그런데 미사 초입의 입당송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시어"라고 문을 열고 있네요.
복음에 나올 베드로의 사랑 고백보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먼저임을 일깨우며 미사를 시작하는 듯합니다.
예수님과 제자의 사랑에 들어가기 전에 제1독서를 먼저 훑어봅니다.
카이사리아의 신임 총독 페스투스의 눈에 비친 사도 바오로 관련 이야기로 그의 말이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
(사도 25,19)
제3자의 눈에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열정의 사도 바오로의 문제가 딱 그 정도입니다.
지극히 객관적이고 무미건조하고 냉랭하기까지 한 그의 보고에는 온도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어떤 온기도 물기도 배제된 견해일 뿐이지요.
누구라도 아직 하느님과, 예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한 상태라면 페스투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분명 다르게 이 사안을 보고 또 서술했겠지요.
복음에서 느껴지는 온도는 독서의 그것과 매우 다릅니다.
밤새 헛그물질로 지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음식으로 아침을 막 들고 나서의 대화이니 이미 애정과 충만한 만족감, 감사가 넘치는 중입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5.16.17)
세 번의 물음이 예수님을 세 차례 부인한 베드로의 과오를 기워갚도록 하신 배려라는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그 과정이 베드로의 미안함과 죄의식을 치유할 수 있다면 예수님은 그리 하시고도 남으실 분입니다.
추궁이나 보속의 부여가 아니라, 사랑으로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려는 의도일 테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의 단순하고 담백한 질문에 비해 베드로의 대답은 좀 복잡합니다.
그냥, "예, 사랑합니다 주님!" 하면 좋겠는데 자꾸 앞뒤로 부연 내용이 붙습니다.
당신이 이미 아시지 않느냐며 길어지는 대답은 즉각적인 사랑의 고백이라기보다 자칫 말대꾸 같이 느껴질 위험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하다"라는 동사보다 "알다"라는 동사에 더 강세가 부여되어 힘도 좀 빠집니다.
또 "사랑하느냐"(love)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좋아한다"(like)로만 응답을 합니다.
두번째도 똑같이 응답하자 이번에는 예수님이 강도를 낮추어 "좋아하니"(like)로 물으시어 베드로의 자신없는 사랑고백의 눈높이에 맞추어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왜 그렇게 자신 없어 했는지 영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죄 중에 있을 때, 주님 앞에 서기에 합당치 못하다고 느낄 때, 죄의식과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모를 때, 원죄 이후의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 눈을 피해 공간적으로 숨지는 못하지만, 변명과 딴청과 실없는 말로 숨어버린 경험이 있다면, 즉답을 피해 빙빙 말을 돌려본 적이 있다면 지금 베드로의 심정을 알고도 남을 겁니다.
그래서 더 짜안~ 하고요.
하지만 사랑 여부를 묻는 이들 사이에는 적어도 온도가 있습니다.
관계가 있고 연대가 있지요.
이미 유형 무형으로 맺어진 끈끈한 결속이 있습니다.
그러니 제3자나 관람자가 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사랑하는 이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본 이라면 상대의 사랑스런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올 때까지의 몇 초의 시간이 얼마나 길고 답답하고 긴장되는 초조한 순간인지를 잘 알 겁니다.
사랑을 묻는 이의 진심에는 기대가 묻어 있고, 좀 격하게 표현하자면 구걸에 가까운 바람이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니까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직설적으로 물으시는 이 순간은, 창조주께서 피조물에게 사랑을 기대하고 청하고 더 나아가 구걸하기까지 하는 어마어마한 순간입니다.
구약의 역사 내내 당신과의 사랑에서 등을 돌린 이스라엘로 인해 상처받고 분노하다가, 사랑이라는 본성 상 제풀에 꺾여 다시 그들을 품어 주셨던 하느님께서, 백성을 위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된 당신 아들의 입을 빌어, 특별히 믿고 아꼈지만 당신을 부인했던 수석 제자에게 다시 겸손히 사랑을 물으시는 참으로 아름답고 따사롭고 감미로운 현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 21,15.16.17)
세 번 "사랑"을 물으시고, 세 번 어징쩡한 "응답"을 들으시고, 세 번 "양들을 돌보라"고 당부하십니다.
당신을 향한 사랑이 당신 양들을 위한 사랑으로 옮아가야 함을, 당신과의 사랑의 관계가 양들과의 사랑의 관계로 이어져야 함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사랑은 멈춤 없이 고이지 않게 흘러야 하고 번져나가야 하니까요.
"나를 따라라."
(요한 21,19)
이처럼 완전의 숫자 3만큼의 횟수로 세 차례씩 질문과 응답과 당부가 오고간 뒤 비로소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관심사가 베드로에게 부여될 "직무"에서 베드로 "개인"에게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내가 맡기는 내 양들을 잘 돌봐 달라는 부탁, 당부 명령에는 사명과 책임이 깔리기 마련이라, 거기에 집중하다 보면 자칫 상대방 인격과 존재 자체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옅어질 수도 있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가서야 "따름"을 언급하신 건 그만큼 중요한 문제라서 그랬을 겁니다.
질문과 응답과 당부를 거친 뒤에 비로소 깨우칠 수 있는 본질이 담겨 있기에 그럴 겁니다.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예수님의 시선은 "양"에서 "베드로"의 인격으로 옮아갑니다.
주님과 그는 "나"와 "너", 즉 "I"와 "You"의 관계로 마주하며, 진정한 관계 안에 머물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도직 현장, 사목 현장, 봉사 현장에서 주님이 맡기신 양들을 위해 정신없이 헌신하며 주님의 당부를 수행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일이 중요하고 양들의 안위가 우선이어도 주님 앞에 머무르며 "나"와 "너"의 관계로 마주해야 하는 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을 양들과 일에 대한 열정을 증명하는 단계로 그쳐서는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눈부신 성과와 양들의 칭송이 쏟아져도 여기까지는 아직 미완의 단계일 뿐, 주님을 따르는 것은 그 이상의 차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다른 것을 다 내려놓고 사랑으로 주님 앞에 머무르며 스스로를 전부 바쳐드리는 자기 증여와, 앞서 가신 그분의 운명을 나도 받아들이겠다는 수용과, 나를 비워낸 자리에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분을 담겠다는 자기 비움의 과정입니다.
그분을 따르면서 우리는 그분을 우리 안에 담고 물들어 갑니다.
결국 그분이 되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는 오늘 베드로와 함께 주님의 사랑 질문과, 부족한 응답과, 주님의 당부를 거쳐 따름으로 초대를 받습니다.
따름은 추종과 닮음과 동일화로 이어지는 신비의 길입니다.
일치의 여정이지요.
우리 꼴을 다 아시고도 사랑을 구걸하시고 따름이라는 곁자리를 내주시는 주님께 빙 돌리지 말고 주저없이 사랑을 외쳐 고백하는 날 되시길 기도합니다.
그 사랑이 비록 아가페적인 사랑이 못되고 "당신이 참 좋아요"라는 우정의 고백이어도 상관 없으니까요.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부르클린 교우들과 함께 필라델피아 랭커스터에 있는 대형 극장에서 공연을 보았습니다.
작년에는 다윗을 보았고, 올해는 모세를 보았습니다.
3,0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극장은 입추에 여지없이 꽉 찼습니다.
5월의 날씨로는 제법 쌀쌀했지만 작년에도 보아서인지 많은 분들이 함께 했습니다.
저는 공연에 앞서 버스 안에서 모세와 예수님에 대해서 공통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모세하면 떠오르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갈대 바구니에 누여서 강물에 떠내려가는 아기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물에서 건져 올린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히브리인이라는 정체성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히브리 여인의 모유를 먹으면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셨지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집트라는 화려한 장소를 떠나 광야에서 목자가 되어 40년을 지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나가 40일 동안 단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모세는 ‘떨기나무’ 아래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집트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모세는 말 주변이 없다고 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을 잘 하는 형 아론과 함께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기도를 마치신 후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모세를 환영하였지만 어떤 이들은 모세를 의심하였습니다.
이집트의 생활에 만족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였지만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권위를 잃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열 가지 재앙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마음이 완고했던 파라오는 10번째 재앙이 와서야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도록 하였습니다.
10번째 재앙은 모든 이집트의 맏배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맏배가 무사하였습니다.
양의 피가 재앙을 대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징과 이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재앙이 아니라 치유를 주셨습니다.
눈먼 이는 눈을 떴습니다.
중풍병자는 걸었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해졌습니다.
죽은 소녀가 다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대신하셨습니다.
모세가 기도를 하니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렸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치니 샘이 솟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마음으로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요르단의 느보산에는 모세의 구리 뱀을 형상화한 지팡이가 있습니다.
모세는 그곳에서 저 멀리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지만 갈 수 없었습니다.
공연의 마지막에 모세의 지팡이는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로 변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언제가 하느님의 아들이 올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들어 올리신 십자가로 사람들이 구원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모세는 느보산의 어느 골짜기에 묻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힘들어하는 분이 계십니다.
고인이 계속 생각나면서 지금 함께하지 못함이 너무 슬프다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세상에 홀로 버려졌다는 생각에 생활 자체가 점점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혼자일 때 편안한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받았을까요?
대부분 남을 통해 받습니다.
그래서 생(生)의 철학자라는 호칭을 받는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원래 오직 자기 자신과 완전히 융화할 수 있다.
친구와도 애인과도 완전히 융화될 수는 없다.
개성이나 기분이 다르다는 사소한 차이 때문에 언제나 불협화음이 일어난다.
그 때문에 진정한 평화이자 완전한 내면의 평정, 즉 건강 다음으로 이 지상에서 가장 중요한 재화는 고독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으며, 철저한 은둔 상태에서만 지속적인 평정을 가질 수 있다.”
함께 하지 못함 자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만, 함께 해도 불행하다고 말할 사람입니다.
혼자라는 상태에서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만이 함께일 때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처지가 갑자기 180도 바뀔 수 있을까요?
그렇게 바뀌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허황한 망상가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지금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변화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혼자 있는 고독이 두렵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지금을 행복의 길로 연결해주는 순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모두 다락방에 숨어서 벌벌 떨었습니다.
예수님의 부재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첫 마디가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시몬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묻습니다.
그리고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라고 하시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나를 따라라.” 였습니다.
언제나 함께하시는 주님이지만, 직접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지금을 받아들이면서 행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지금의 내 모습이 행복을 만듭니다.
어떤 특별한 상황이 행복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의 내 모습을 어린양을 돌보는 사랑의 삶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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