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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1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2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3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4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5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6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7편
(통합본 4편)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달뷰라) 한인부의 계획
1920년 12월 21일경 치타에서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일명 : 달뷰라, Дальбюро ЦК РКП (б)) 소속 한인부는 비밀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참석 : 위원장 김진, 박창은, 장도정, 서기 : 박애, 계봉우 (상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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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일 최고 기관과 사령부를 통합 수립하기 위해. 1921년 4월 1일까지 중국과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모든 한국 독립군들의 대표 대회를 치타에서 소집하고, 그 아래에 군사 의회와 총사령관을 구성한다.
2. 러시아 극동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 독립군 부대들을 극동공화국 군부 총사령관과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Дальбюро ЦК РКП (б)) 산하의 한국 독립군 총사령관에게 직접 예속시킨다.
독립군 부대들의 대표와 책임 있는 지도자들로 구성된 임시 군사의회를 만들고, 독립군 부대들을 개편한 후,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더 안전한 장소로 옮기고, 훈련 후, 전투 지역으로 보낸다.
3. 100여명을 위한 사관학교 개설.
4. 독립군 부대들에서 정치 업무를 수행하고, 의용군을 모집하고, 지휘 요원과 정치 위원을 임명 및 해임할 권리는 담당 부서(Секции)의 손에 집중한다.
5. 중국과 한국의 독립군을 지원하고 특별 부대를 조직하는 데 필요한 자금. 50,000여명을 위한 무기, 장비, 제복 및 식량의 제공을 위해 극동공화국의 간부에게 청원서를 제출한다.
Док. № 31
Протокол секретного заседания корейской секции при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м бюро ЦК РКП (б)
г. Чита
21 декабря 1920 г.
Присутствуют: Ким Дин, Пак Чан Ын, Тян До Ден, Пак Ай, Ге Пон У.
Председательствует: Ким Дин при секретаре Пак Ай.
Вопрос о партизанских отрядах
Постановили:
Принимая во внимание, что партизанские отряды, находящиеся в Китае и на русском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 вследствие отсутствия связи и общего плана борьбы, а также и единого верховного органа и командования лишены возможности правильно вести партизанскую борьбу, Секция, считая необходимым сейчас же приступить к согласованию действий отдельных партизанских частей и ведения
в них партийной работы, постановляет:
1) в целях объединения и установления единого верховного органа и командования созвать съезд из представителей всех партизанских отрядов, находящихся в Китае и на русском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 к
1-му апреля 1921 года в г. Чите и создать в нем Военный совет и Главный штаб;
2) для урегулирования положения на русском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 а) подчинить отряды непосредственно Главнокомандующему всеми вооруженными силами ДВР и Корейской секции при Дальбюро ЦК РКП; б) создать временный Военный совет из представителей и ответственных руководителей партизанских отрядов и в) переформировав отряды, перевести их в более безопасные места во избежание дипломатических осложнений ДВР и после обучения переотправлять в район
военных действий;
3) открыть военно-инструкторскую школу на 100 человек;
4) право ведения политической работы в отрядах, вербовка добровольцев, назначения и отставания от должности командного состава и политических уполномоченных сосредоточить в руках Секции и
5) войти с ходатайством в Главный штаб ДВР об отпуске вооружения, снаряжения и обмундирования и продовольствия на 50 000 человек и средств, необходимых на поддержку партизанских отрядов, находящихся в Китае и Корее, и на организацию особых отрядов.
Подлинник подписали:
Председатель заседания Ким Дин.
Секретарь Пак Ай.
С подлинным верно:
Член корсекции Пак Ай.
РГАСПИ. Ф. 495. Оп. 154. Д. 39. Л. 30.
Машинопись, заверенная копия. Подписи-автограф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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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Протокол секретного заседания корейской секции при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м бюро ЦК РКП(б). 21 декабря 1920 г. // РГАСПИ. Ф. 495. Оп. 154. Д. 39. Л. 30. Машинопись, заверенная копия. Подписи-автографы
Док. № 31
Протокол секретного заседания корейской секции при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м бюро ЦК РКП (б) г. Чита 21 декабря 1920 г.
(※ 필자의 의견 : 이 무렵 달뷰라 소속 한인부의 계획은 그러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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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및 만주지방 독립군들의 러시아령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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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0월 9일 일본군 간도파병에 관한 중국 군벌·일본간 교섭이 성립되었다가 그달 12일경에 중국의 친일군벌이 이것에 대한 동의를 취소하자 일본은 자위상 부득이하다는 구실로 기존의 점령지외에도 간도에 대한 침략을 강행하였는데,
일제가 간도토벌로 부르는 이 공격의 목적은 독립군 토벌과 조선인 지원세력을 몰살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독립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러시아령으로 이동하였다.
러시아령의 첫 집결지는 이만이었다고 한다. (러시아측 기록에는 북만주 등으로 북상해서 아무르강 등의 국경을 넘어 이동해온 독립군도 있었다고 한다).
이만은 하바로프스크의 볼셰비키 군대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스파스크까지의 일본군과의 중간지대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공격을 피할 수가 있었다.
이만으로 향한 독립군 부대들은 러시아령으로 이동하기 직전에 만주 밀산(密山)에서 독립군의 통합부대인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일본군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각 부대별로 행군하여 러시아령으로 넘어 갔다고 한다.
이청천의 주장에 따르면, 이청천이 소속되었던 간도 안도현(安圖縣)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홍범도 등의 국민회군과 합작이 성립되었다고 하면서, 그것이 바로 ‘대한독립군’으로 불려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뒤이어 김동식(金東植)의 「광복단(光復團)」, 김혁(金赫)의 「흥업단(興業團)」, 신포(申砲)의 「야단(野團)」,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의 낙오소대인 「함희부대(咸熙部隊)」가 집결하여 총병력 약 8백여명이 이만으로 넘어 갔다고 한다.
그들은 국경 인근에서 러시아·만주 국경선과 동청철도의 일부를 백파와 합세해 점령한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 등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 김승학 편저 한국독립사 420쪽 등)
김홍일도 간도방향에서 러시아령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만주와 러시아 국경지역에서 일본군과의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이 무렵 블라디보스톡과 만주리간 동청철도(중동철도)를 일제 침략군과 러시아 백파가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령 연해주 일대의 독립군
또는 1921년 1월 26일경에 간도참변의 참화를 피해 홍범도, 서일 지청천, 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러시아령 이만에 도착했다는 소리도 있다.
이 무렵 러시아 내전 완충지대였던 연해주 이만 일대에는 일제의 간도토벌을 피해 한 때 김좌진, 구춘선, 서일, 나중소, 이범석 등 독립운동가들이 피난와 있었고 이들은 러시아 내전에는 관여하지 않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 역시 일제와 싸우는 볼셰비키를 적대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러시아 영내 진입시 볼셰비키가 요구한 무장해제 등에 응할 수 없어 아무르주(흑룡주) 자유시로 가지 못했던 독립군들도 이 무렵 연해주에 상당수 있었던 모양이다.
홍범도 장군 부대 등은 1921년 1월에서 ~ 2월경 연해주 이만 일대에서 무장해제후 기차 등을 이용하여 자유시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러시아 영내 진입시 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 요구는 독립군들이 쉽게 응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만주·간도 지방 독립군의 이동시기는 일제경찰 문서와 독립군 부대의 주장마다 날짜가 다르고 집합된 병력수가 다르다. (대체로 이만에 한인무장부대가 도착한 것은 1921년 1월에서 2월초이며, 이들은 그해 3월 중순까지는 이미 자유시로 이동을 완료하였거나 일부는 간도지방으로 돌아 가거나, 러시아령 연해주에 머물렀다.)
이르쿠츠크 파의 문건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19쪽 등에 따르면, 당시 자유시로 집결중인 한인무장부대의 동태를 다음과 같다고 한다.
“당시 노령 각 방면에서 고려의병대가 봉기하여 러시아 군대에 일부 편입된 것을 대한국민의 회에서 제2군단에 교섭 하여 자유시에 집결하게 되니. 1920년 11월경이다.
이와 동시에 북간도에서도 고려 각 의병대가 일본군대와 전투하다가 과부적중(寡不敵衆)의 세로 퇴각하여 노령으로 향한다는 보도가 있으므로, 대한국민의회장 문창범, 재무부장 한창해(韓滄海), 자유대대장 오하묵, 비서 박병길 4인이 동년 12월 초순경에 하바로프스크 제 2군단본부에 가서 간도 각 의병대가 노령으로 오는 사정을 그 군단에 교섭한 후 한창해로 하여금 요하(饒河)에 파송하여 의병대 임시주둔지에 관한 것을 준비하고 각 의병대에 인원을 파견하여 통래(通來)전쟁과 원로(遠路)에 피로하게 된 군심을 위안 겸 환영하며, 또는 제2군단에 교섭한 결과를 보고하고, 전로(前路)를 인도하여 자유시로 향하니. 1921년 1월 중순이라.”
러시아·중국지방(魯中兩領)의 각 의병대가 일선일후(日先日後) 집합되는 바, 최진동 군대는 동월회간(同月晦間), 안무 군대(安武軍隊)는 2월 초순에 우선 자유시에 도착하여 한인보병 자유대대의 명의하에 제반 공급과 지휘를 수(受)하고, 중로(中路)에서 미급하였던 각 군대도 동년 3월 중순까지 당지에 제제(濟濟)히 회집(會集)해오니,
회집된 의병대 명칭 및 영솔자 씨명은 다음과 같다.
이르쿠츠크파가 주장하는 1921년 3월 중순경 자유시 집결 독립군 부대 · 로시아령 각 의병대 ① 이만군대 김표도르, 박공서(朴公瑞),김덕보(金德甫) ② 다반군대 최니콜라이 ③ 독립단군대 박그레고리, 최파사 ④ 니항군대 임호, 고명수 (사실상의 실권은 박일리야가 가짐) ⑤ (本)자유대대 오하묵, 최고려,황하일, 전희서, 유수연, 류선장, 최주동(崔柱東) · 간도 각 의병대 ① 총군부군대 최진동,허재욱, 이택(李澤), 오병묵(吳秉默) ② 국민군대 안무, 정일무(鄭一武), 김광(金匡), 김규찬, 강석진(姜錫鎭) ③ 독립단군대 홍범도, 이청천, 이병채(李秉采) ④ 군정서군대 일부 자유시 도착 (※ 김좌진, 서일은 자유시에 가지 않았음에도 도착한 것으로 허위 작성) 이상 각 군대의 군인총수 1,900 여명 (출처 :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19쪽~20쪽). |
(※ 참고사항 : 오늘날 이르쿠츠크파의 노력만으로 독립군이 자유시에 집결하게 되었다는 것은 러시아측 기록이나 다른 독립군의 주장에 없는 명백한 조작임이 확인됩니다. 니항부대의 지휘관은 박일리야가 명백하고, 이르쿠츠크파가 자유시 참변의 거센 비난을 피하기 위해 조작한 부분이 엄청납니다.
심지어 문건 작성자와 일본에게 제공한 자 즉 이르쿠츠크파에 침투했던 밀정의 이름조차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김홍일이 인솔한 군비단(軍備團)군대의 만주 잔류부대가 이만에 도착한 것은 1921년 5월 10일경 이었는데, 김홍일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이 러시아령으로 넘어간 마지막 부대에 속했다는 것이다. 김홍일의 부대도 자유시로 이동하지 않았다.
1920년 11월경부터는 연해주의 한인무장부대들은 일본군의 1920년 4월 참변과 하바로프스크 남쪽의 대규모 공격에 따라 연해주를 떠나 자유시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독립군들의 자유시 집결과 러시아 볼셰비키 군
극동공화국(혹은 원동공화국) 적군(赤軍, 볼셰비키 군대) 2군단장 셰르셰프가 1921년 1월 3일 작성한 명령서를 보면, 자신의 구역으로 온 모든 한인 무장부대의 무장해제를 명령하였다.
회수된 무기들은 2군단의 보급부서로 보낸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 부대의 상당수는 관할 2군단에게 무장을 반납하게 된다.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들의 무장해제는 약속과는 다른 것이어서 독립군들도 쉽게 응하지는 않았다.
결국 무기 반납이 잘 되지 않았는지. 1921년 3월 9일에도 2군단에서는 독립군의 무기를 회수하고, 불응하면 러시아령 넘어오지 말게 하고, 떠날 것을 요구하라고 명령하였다.
나중에 자유시에 도착한 독립군들이 다시 소총 등을 지급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러시아 국경을 넘자마자 무장해제를 시키는 등 독립군들은 러시아 영토에서 볼셰비키의 허락 없이는 식량공급, 이동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없었고, 더군다나 무장을 갖춘다고 할 지라도 일본군을 단독으로 공격할 수 없었다.
이르쿠츠크파, 자유시 한인 보병자유대대, 원동(극동)공화국 군부의 결합 독립군의 러시아령 입국시 진행된 무장해제는 결국 오하묵과 최고려, 김하석 등의 이르쿠츠크파가 주로 20세 미만과 초반으로 구성된 불과 10%도 안되는 소수의 인원만으로도 자유시 일대에 집결한 독립군을 무장해제 시키고, 다시 무기를 지급하고, 식량을 지급하고, 군복을 지급하고 할 수 있는 막강한 권리를 가지다 보니, 이르쿠츠크에서 온 합동민족군대, 간도계 독립군, 상해파보다 우월한 지위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1920~1921년경 “신형 소총의 지급 등을 위해서 무장을 해제시켰다”는 러시아측의 주장은 전부 믿을 수만은 없다는 증거가 다양하게 나온다. |
1921년 1월 18일경 자유대대장 오하묵이 제2군단에 호출되어 하바로프스크로 떠나간 이후에도 자유시에는 만주와 연해주로부터 한인무장부대들이 계속해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 11월경 적군이 모스크바 아랫쪽의 크림반도를 해방시키자 백군 사령관 브란길(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Вра́нгель)은 뱃길로 유럽으로 망명하였다.
한인무장부대의 자유시 집결은 레닌의 노농정부가 극동혁명의 수행을 위하 국제군(인터내셔널 오트랴드)을 조직한다는 소문 등과도 관계가 있다.
국제군 창설은 전혀 근거가 없는 소문이었던 것은 아니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37쪽을 살펴보면)
1919년 11월경 이르쿠츠크는 백파의 세력하에 있었으나, 고려인들인 비밀리에 군사혁명단체를 조직하였고, 1920년 초에 이르쿠츠크에서 볼셰비키의 영향력이 커지자 합동민족(11개 민족)의 합동민족군대가 편성되어 백파를 격퇴하는데 참여하였으며, 백파군이 격파된 이후에 고려인과 중국인부대만 남게 되어 이르쿠츠크 주둔 5군단의 관할에 속했다.
그리고 원동에 진출하기 위해 준비하였다. 그리고 중국군 1개 대대와 고려인 1개 대대를 합한 약 6백여명으로 합동민족연대라고 하고 연대장은 최길래이가 선임되었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 따르면 여러 독립군들이 1921년 2월 초순에 우선 자유시에 도착하여 한인 보병대대 명의 하에 제반 공급과 지휘를 수령하였다고 적었고 ......(중략)......
“집합된 군대중 자유대대는 원래 주의자(主義者) 단결에서 조직된 군대니 무산혁명을 표준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고, 기타 각 군대도 세계대세에 각성이었든지 또는 이와 같은 각성은 없었을지라도 군국주의 포악무도한 일본을 적으로 삼는 우리의 잔약(殘弱)한 처지를 진실로 동정함에는 러시아 적군(赤軍) 그 밖에는 없음을 알았든지, 주의의 철저와 불철저는 변명할 것 없이, 이와 같은 집합을 유일한 기회로 인(認)하고, 자유대대를 인연하여 적색(赤色)의 기치 하에 동일한 적군(赤軍)으로 세계자본가를 대적하는 혁명군대의 군율에 복종하였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의 내용이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 정부의 문서들과 일치되는 부분이 많은 것은 당시 이르쿠츠크파와 아시아 공산혁명을 주도하였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극동공화국 군부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한국계 독립군 부대의 극동공화국내 자유시 일대의 집결에는 중국, 만주, 러시아, 일본 등에서 알려지기로는 레닌정부 혹은 극동공화국정부와 러시아령에 집결한 독립군부대 사이에 어떤 군사협정 혹은 묵시적 동의가 있는 것처럼 당시에 알려졌다.
실제로 볼셰비키 중앙정부와 상해임시정부 사이에는 레닌의 자금 지원과 독립군의 러시아령 이동과 러시아 적백내전에서의 백파 배척이 분명 있었다.
즉 볼셰비키와 상해임시정부는 어떤 형태의 협조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군사협정 문제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채근식 저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 공보처 발행)는 「1921년 2월에 치타(원동공화국의 서울은 1920년 11월경 베르흐네우진스크(=울란우데)에서 치타로 옮겨진다)에 있는 완충 정부수석 카라한(실제는 극동공화국 수반이 아님)과 공동작전 및 협조에 관한 협정이 성립되었다. 이 협정을 성공시킨 이면에는 일찍이 고국을 떠나 공산군에서 활약하고 있던 오하묵 장군의 공이었다.
이 군사협정에 있어서 독립군은 적계군을 도와 아직도 각지에서 활약하고 있는 백계군을 격멸할 것을 전제로 하고, 그 대상(代償)으로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조약에 서명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사실과는 많이 다른 이러한 여러 주장들에 비추어 볼 때 이르쿠츠크파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도 초기에는 한국에서 진행되었던 3·1운동을 지켜봤고 한국의 독립군을 지원할 의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② 기타 극동공화국과 문창범의 대한국민의회간에 조선독립의용군을 지원한다는 협약이 체결되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오늘날까지 정확한 협약내용은 주장하는 사람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독립군이 백파군 혹은 외국 침략군(일본군) 공격에 가담하고, 러시아 정부는 나중에 일본군을 물리치고 조선의 독립을 돕는다는 내용으로 알려졌다)
당시의 소문들과 오늘날의 러시아 정부 문서들에 따르면 대한국민의회와 이르쿠츠크파의 지휘하에 있었던 자유시의 한인 보병자유대대가 만주 독립군을 비롯한 독립군 부대의 자유시 이동에 노력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 레닌의 중앙정부든 (허수아비)극동공화국이든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 이든지 어느 정도의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자유시에 집결하게 된 독립군들은 ① 모스크바의 공산당 중앙위원회, 코민테른 본부 ② 러시아 볼셰비키의 (허수아비인) 극동공화국 정부와 군부 ③ 코민테른의 동양비서부와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달뷰라)내의 한인부 ④ 중화민국 북경정부와 만주 친일 군벌 ⑤ 체코군단, 중화민국, 미국 등 연합국 (일본은 제외) |
위의 국가들로부터도 어떻게든 지원를 받고자 했으며,
크게 ①상해파 고려공산당, ②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③만주·간도 잔류 독립군부대, ④상해임시정부, ⑤미국 망명자 등이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1921년 2월경은 오하묵이 상해파와의 군권 다툼 때문에 2군단본부에 호출되어 갔고, 군권을 차지하려던 상해파의 박애 등의 노력이 승리하여, 극동공화국 정부가 자유대대의 지휘권을 한인부 5두제의 일원인 박창은(총사령관), 러시아인 그레고리예프(참모장)에게 넘겨주었다.
하바로프스크 소재 제2군단 본부에 호출되었던 오하묵은 이것에 반발하여 극동공화국 정부와 담판하려고 치타로 갔다.
다반 군대
출처 : 리인섭 편저, 「회상기(아령과 중령에서 진행되던 조선민족해방운동)」
......박춘봉 회상담......
다반 파르티잔대. 30/I 1958년 박춘봉 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니콜라이 페트로비치) 회상담.
나는 1895年生 원동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 근방 다반촌(지금 Хабаровская область, Лазовский район, Р.Н.А село Александро-Михайловка, 하바로프스크 주, 라좁스키 구역, 알렉산드로-미하일로프카 농촌)에서 살았다.
(※위의 러시아 행정구역은 여러 차례 개편되거나 명칭이 변경되었다.)
1919년 말이였다.
내가 살던 다반촌과 안반촌(Кутузовск, 쿠투좁스크) 어간에는 러시아 사람들로 조직된 일본 기타 외국 무력 간첩자들과 백위파를 반대하여 일어난 붉은 파르티잔대가 있었는데 그 군대를 Соков(소코프)와 Ткачов(트카초프) 두 동지가 지도하였다. 우리 다반 주민들은 그들한테 무기와 식료를 비밀이 가져다가 도와주었다.
그들은 우리를 동정하였다.
그 후 일본 군대는 우리 다반 조선촌을 점령하고 파르티잔과 연락한다고 집을 수색하고 무죄한 주민들을 구타하고 검거하면서 우리가 조선 사람이니 독립운동을 한다고 볼셰비키와 관계있다고 별별 쟁탈을 하였다.
우리 촌중 조선 주민들은 모두 일본 놈들을 미워하였고, 놈들의 만행에 격분하였다.
그리고 조선서 일어난 3.1운동은 우리를 더욱 흥분하게 하였다.
우리 농촌에는 이미 제1차 세계대전에 전쟁에 참여하고 돌아온 최니꼴라이고(쟁바우)·김옥활 기타 이전 군인들이 있었다.
일본 군인들은 우리 다반촌 조선학교를 점령하고 한 달 남짓 유하다가 학교 집에 불을 달아 놓고서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로 향하였다.
그러나 일본 군대는 돌아가던 중도에서 러시아 파르티잔대 한테 조우전을 당하여서 전부대가 몰살하고 한 놈도 살지 못하였다.
그 후에 일본 군대는 또한 우리 농촌을 침입한다는 소식이 자자하였다. 당시 비밀리에 동작하며 러시아 파르티잔을 후원하던 조선 청년들은 내놓고서 무장을 하고서 5~6십 명이 러시아 파르티잔에 참가하였다. 그래서 조선 사람 중대가 편성되였는데 중대장은 최니꼴라이였다.
우리 군대는 러시아 사람들까지 천여명이 되었다. 우리는 각 러시아 농촌에 잠입한 흰파(백위파)들을 청산하면서 자주 극렬한 전투를 하면서 우수리 철도선 청룡정거장에 나왔다. (ст. Верная, 베르나야 역)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와 Неверская(네베르스카야) 어간에 있는 흰파(백위파) Калмыков(칼므코프)파를 반항하는 싸움에서 우리 조선 중대는 악전고투하여서 여러 날을 걸쳐 싸웠다. 최후에 전투는 극렬하여서 우리가 승리하였다.
당시 흰파(백위파) Калмыков(칼미코프) 무리들은 달아나다가 우리의 추격이 너무 심하니 가지고 가던 무기를 모두 우수리 강 얼음을 깨놓고서 얼음 중에다가 처넣고서 달아났다.
당시 그 전투에서 흰파(백위파)대장 Калмыков(칼미코프)란 놈이 직접 참가 지도하여서 나중에는 하도 시급하게 우리가 포위하고 습격하니 자기 처가 되는 여자를 우수리강 얼음궁에다 처 넣고서 저만 살겠다고 중령(중국령)으로 달아났다.
Калмыков(칼미코프)란 놈이 금방 중국 료하 지대 국경선에 당도하니 미리부터 그곳에서 흰파(백위파) Калмыков(칼미코프)를 지키고 있던 中국 조선 혼성 파르티잔 부대는 그놈을 사로잡아서 그 자리에서 우리 지도자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КИМ.А.П.Станкевич) 원수를 갚았다고 선언하고 처단하였다. ※-내의 참고 주해 이인섭이 씀.
이 전투에서 우리 동지 고순덕 · 김 Алексей(알렉세이) · 리세르게이 동지들이 전사하였다.
그 해 봄에 우리 다반 조선 중대는 300여명이였다. 우리 중대는 러시아 파르티잔대와 동행하여서 그들 지휘 밑에서 우수리강 청룡정거장에 고 · 김 · 이 시체를 안장하였다.
우수리 강을 건너서 Амур(아무르)주로 향하였다. 인 역(Ст.Ин)에 당도하였다가 Орликовка(오를리콥카)로 옮겨가서 우리 조선 중대는 7~8월경에 H.P.인민혁명군 제8연대내 조선부대로 편성되였다.
그 후 우리는 흑룡주 보치갈(오늘날의 벨라고르스크 추정)에다 근처에 옮겨가서 니콜라예프스크(니깔랍쓰크 : 니항)로 올라온 사할린 군대와 합하였다가 국민전쟁 시기에 한 번도 싸우지 아니하고 자유시에 있던 자유시 군대한테 창피한 자유시 사변을 당하고 해산 되었다.
우리 중대장 최니콜라이는 자유시에서 체포되여서 Иркутск(이르쿠츠크)로 들어가다가 감옥된 차량 장판을 궁글들고 도망하다가 두 다리가 끊어졌다.
그때 같이 도망하던 동지들은 최니콜라이 · 박그레고리 · 김이노겐지 · 박니콜라이 · 함빠싸 · 한권길 · 박춘봉이였다.
당시 한권길이는 부상된 다리를 앓다가 침대에다가 머리를 쪼아 자살하고 박그레고리·김이노겐지는 다시 체포되어 이르쿠츠크로 들어가고 박춘봉 · 박니꼴나이 · 함빠싸 세 동무는 당시 Чита(치타) 조선민회장 태(太)용서가 가만히 중명을 하여주고, 금전을 주워서 달아나다가 중노에서 김하경 동지를 만나서 흑룡주로 왔다가 박춘봉은 집으로 돌아갔다.
[김하경은 지금 Андижан(안디잔)에 있으며, 당시 상해서 왔던 사람이 전교사]
1959년 전원 13/i59 조선 노동당역사 연구소로 보냈음.
......박춘봉 회상담 하략......
이만 군대
출처 : 리인섭 편저, 「회상기(아령과 중령에서 진행되던 조선민족해방운동), 김표돌(여러 명의 동명이인 있음)」
(※ 리인섭이 정리한 자료는 누가 작성한 것인지, 누구에 대한 이야기인지 불분명한 부분도 있으며, 손으로 쓰여져 알아보기 힘든 글자도 있습니다.)
......김표돌 관련 자료......
이만 파르티잔대 1918년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 지도와 당시 원동인민위원 소비에트 외교 인민위원장이고, 하바로프스크 러시아 볼셰비키당 책임 비서이던 김알렉산드라 메들옴문니[Станкебиц(스탄케비치)] 지도하에서 조선인들 적위군(赤衛軍)이 러시아 적위군들과 같이 이만 시에서 시작하여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는 들어오는 기간에 싸우다가 다수가 전사하고 원동전폭이 흰파(백위파) 주중에 잠시 점령 되었을 때에 그 전쟁에 참여하였던 적위군 또는 사회당원들은 각처 조선 농촌에 잠재하여 있었다. 레□□□□하면 다반에는 류떼빤, 이만에 윤해 기타이다.
1919년에 3.1운동이 조선서 폭발되어서 연해주 조선인 가운데도 민족해방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수청, 소황령(소왕령) 신길동 등지에서 조선 파르티잔들이 일어났다.
일본 놈들은 각처 조선 농촌을 강점하고 혁명자를 감금, 학살 하였고 각처에서는 러시아 파르티잔 군대가 대대적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말 1920년 초이였다.
이만 근방에서 동작하는 러시아 파르티잔대에는 조선 사람으로 조직된 한 중대가 있었다.
그 중대장은 김표도르 동지였고, 그 간부 위원들은 박공서·김덕보 이였다. 당시 그 군대 인원수는 백여 명이였는데 Калмыков(칼미코프) 흰파(백위파)는 반항하는 전투에서 ст. Вяземск(뱌젬스크 역), Верная(베르나야) 및 Красная Речка(크라스나야 레치카)에서 싸워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다반 파르티잔대와 같이 동행하여서 흑룡강을 건너갔다.
1920년 여름에 이만 파르티잔 조선 중대는 러시아 파르티잔 부대와 함께 치타 방면 후바이칼 등지로 이전되어서 흰파(백위파) Семёнов(시묘노프) 잔당을 섬멸하는 전투에 참여하여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 이만 부대도 1920~1921년경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김표돌 관련 자료 하략......
1921년 1월 20일경 사할린 특별 파르티잔 (일명 사할린 의용대) 부대 편성
1920년 10월경에 극동공화국 공산당 원동부(일명 달뷰라)에 한인부가 설치되었다.
극동공화국 공산당내 한인부와 한인부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이동휘의 상해파 역시 독립군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15쪽에는) “그 무렵 러시아에 대한 외교상 권리로 말하면, 한인부 당국만으로서도 상당한 신임을 받게 되거든 더구나 박애는 김립과 한형권의 위조로 원동정부에 대한 상해정부 영사위임장을 가지게 되며, 또는 평소로 지분이 있는 원동정부 집정관 크라스나쇼코프(Краснощёков)에게 무상의 신임을 받게 되므로 크라스나쇼코프씨의 소개로 정군(政軍) 양계에 한인의 외교로는 박애면 그만이었고, 따라서 고려혁명도 당시 자기들 장악에서 될 듯한 당당한 기염(氣炎)을 뽐내는 터이다” 고 하였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25쪽에서는 당시 사정을
“한인부 당국은 자기들의 외교상 세만 믿고 대한국민의회 및 한인보병 자유대대 당국과는 일언의 협의도 없이 원동정부 군부에 교섭하여 박창은(한인부 5두중 1인)으로 총사령관, 그레고리예프(러시아인)로 참모부장을 임하여 자유시로 파견하는 동시에 니항군대의 명칭을 변경하여 사할린 의용대라 하고 그외 고려 각 의병대 및 한인자유보병대대 등 군대는 사할린 의용대의 관할을 받으라는 원동정부 군부의 명령을 가지고 일행이 흑하(黑河)에 도착하니. 1921년 1월중이었다.” 고 하였다.
극동공화국 사령관 에이히는 1921년 1월 20일자 명령서로 자유시 인근에 집결한 모든 한인들을 통합하여 빨리 사할린특별파르티잔 부대를 편성하고, 주둔지는 체르니고프카(Черниговка, 과거에는 「체르니곱스코예」라고도 불렀다), 크라스나야라바, 마자나바로 정하며 부대장에 박창은, 참모장에 그리고리예프(러시아인)를 임명하였다.
에이히(혹은 에이헤, Эйхе Генрих Христофорович. 1893년경 출생 ~ 1968년경 사망) 극동공화국 사령관 재직 1920. 3. 17.일경에서 1921. 1. 21. 일경까지 1921. 2. 21.일경에서 1921. 4. 29. 일경까지 |
이것은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이 러시아측 공식 기록과 일치되는 부분이다.
극동공화국의 한인부는 1920년 10월경 설치와 동시에 외교권을 행사하였으며. 1921년 초에는 극동공화국내 전 한인 독립군 부대의 관리에 관한 권한을 일부 행사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이르쿠츠크파인 대한국민의회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 김창순·김준엽 공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권」, 청계연구소, 1986 에 따르면)
1920년 12월 10일자 일본의 대판조일신문(大販朝日新聞) 등은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의 부하들과 레닌정부 및 코민테른의 관리들 사이에 정치군사문제에 관한 어떤 기본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는 등의 보도를 하였다. 여러 가지 증언과 언론보도에 비추어 봤을 때, 이동휘 등의 상해파가 독립군의 이동과 행동에 대하여 러시아 정부 혹은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달뷰라 산하) 한인부와 협상을 하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김홍일의 주장에 따르면. 1920년 7월경에 상해임시정부 대표 한형권과 러시아정부 사이에 독립운동 지원에 관한 협정이 다음과 같은 4항목으로 체결되었다고 주장한다.
㉠ 러시아정부는 한국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한다. ㉡ 한국임시정부는 점차적으로 공산주의를 채택한다. ㉢ 러시아 정부는 연해주와 만주 각지에 있는 한국독립군을 시베리아로 집결시켜 훈련할 것을 허가하며, 이에 소요되는 장비 및 보급을 부담한다. ㉣ 한국독립군은 러시아 영토 안에 있는 한 소련군사령관의 지휘를 받는다. |
김홍일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협상에 따라 독립군이 러시아령으로 이동하여 국제군 결성의 하였다고 한다.
러시아령인 아무르주의 독립군 조직과 편성에 관해서는 1920년 3월부터 1920년 9월까지 한인 보병자유대대가 창설되어 개편되기까지 오하묵, 최고려 등의 이르쿠츠크파인 대한국민의회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독립군이 아무르주의 자유시 일대로 집결하기 시작하는 1920년 10월경에 달뷰라에 한인부가 설치되면서부터 자유시 일대의 독립군 지휘 권한은 대한국민의회에서 상해파(이동휘, 상해임시정부, 상해파 고려공산당)로 이전되는 등 변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후 1921년 5월경부터는 이르쿠츠크파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결합하여 군권과 공산주의운동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대립하게 된 상해파의 공산당 달뷰라의 한인부의 인물들을 감옥에 투옥시키는 등의 분란을 일으킨다.
1921년 1월 상해파의 한인군사위원회 조직
1921년 1월경에 이용, 장기영, 채영 등이 극동공화국 한인부와 합작하여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대한국민의회 및 자유대대의 간부들과는 대립이 격화되었다. 박일리야는 상해파인 한인군사위원회에 가담하였다.
이용(李鏞. 1888~1954년경 서거)은 헤이그 특사였던 이준(李儁)열사의 장자이다. 1920년경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북간도 일대의 동로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일제의 간도학살 등으로 1920년경 러시아령으로 넘어갔다. 1921년 1월경 전한군사위원회 결성을 선포하고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자유시 사건이후 1921년 7월경 탈출하여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45년 이후 북한에서 활동했다 |
이용은 1920년 5월에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동로군(東路軍 : 간도)사령관에 임명되어 10만원 상당의 공채를 간도 대한국민회장 구춘선(具春先)에게 전하고, 4만원 한도의 금전을 융통받아 명월구(明月溝)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사관양성에 힘쓰다가 일본군의 간도침략으로 1920년 말에 러시아령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1921년 1월경에 러시아령 시베리아에서 이용이 한인군사위원회(韓人軍事委員會)의 결성을 선포하고 경고문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이동휘 및 상해파, 그리고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와 협조하여 한 것이다.
한인 군사위원회 경고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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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문(警告文)
구주(歐洲 : 유럽)대전의 결과로 세계의 추(趨)는 급전직하의 개(槪)로 변환(變幻)하여 온갖 마력을 휘장(揮張)하던 군국주의는 이미 악운이 진(盡)하고 소양(小羊)같은 약국들은 비로소 귀망(鬼網)을 탈하고 양심적 자유, 평등, 박애의 지상천국을 건설하여서
20세기의 광화(光華)가 되고저 하나니 이는 상상이 아니라 사실이니 구주 각 소약국이 힘을 합하여 군국주의의 본존(本尊)인 독일을 좌절하고 그 여심(餘心)은 전(轉)하여
군국주의의 괴뢰인 일본을 타파코저하는 전운이 점차로 태평양상에 농결(濃結)함을 보아 족히 증거(證據)하리로다.
아. 아.
이는 상(常?)노 대세의 소추(所趨)이오.
천의의 소사(所使)이니, 무삼 권능 무삼 강력이 능히 이를 저지하며 만집(挽執)하리오. 다만 전일의 강국은 과거의 적악(積惡)을 뉘우쳐서, 그 마심(魔心)을 자계(自誡)하고 낭자(曩者)의 약국(弱國)은 과거의 끽고(喫苦)에 감(鑑)하여 양심적 이상국을 건설하여서 세상에 광영이 되기를 노력치 아니치못할 운명에 제회(際會)하였도다.
이때를 당한 우리들은 각각 다할 바 책임을 생각하라.
이천만 동포가 우리모국에 대하여는 성패간 각 그 책임을 단부(但?負)함은 췌언(贅言)할 바 없거니와 특히 중아(中俄) 양령에 교거(僑居)하는 우리 2백여만의 동포는 이 지귀지위(至貴至危)한 빈기(牝?機)에 제하여 과연 여하한 천직을 다하여야 가히써 조선 백대(祖先 百代)의 위령을 위(慰)하며 자손만년의 복지를 계(啓)할까 생각하라.
아. 아.
2백만의 교류(僑留)하는 동포여 이는 지자(智者)의 언(言)을 대(待)치 아니하여도 동양의 대세와 모국의 형편에 감(鑑)하여 명백하니 즉 국(國)을 실(失)하던 그날부터 선각(先覺)의 사(士)들이 중아(中俄, 중국과 러시아) 양령 동포에 대하여 교육과 군사상 계획으로 그 뇌(腦)와
그 심(心)을 다하던 바 양이(兩?以)가 그 아니뇨.
그러나 이시(伊時)에는 군국주의자들의 악운이 오히려 성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거니와 내금(乃今)엔 세계가 공명(共明?)하고 상천(上天)이 조우(助佑)하사
모국 광복의 최후승리를 기하는 의용군을 마음대로 편성할 호기와 지대(地帶)를 득하고 그 희(喜)를 같이하기 위하여 자(玆)에 장래의 실행사항(實?行事項)을 경포(警佈)하오니 광영 가득한
중아(中俄, 중국과 러시아) 교류동포여 노력할지어다. 2천만 동포여 협력할지어다.
1. OOOO 본위원와의 밀약한 사항
갑. 본 OO세력 범위내에서는 한인군대의 편성을 무제한으로 승인하고 무기, 피복, 식량은 본OO의 능력있는 데까지 무제한으로 공급하며
을. OOO세 범위(勢範圍)에서는 한인군사위원회 이외에는 여하한 단체를 물론하고 군권을 허여치 아니함.
2. 본 위원회에서 현방 상시(常?施?)하는 방침
갑. 사관학교를 OO지(地)에 설하고 제1차로 학생 5백명을 모집함
을. 현방(現方) OOOOO세력범위에 있는 한인군대 및 한인으로 편성된 지방대를 우선 정리통할 함. 단(但) 지방대가 없는 곳에는 수의(隨?宜) 증설함
병. 제1회사관학생이 졸업하는 즉일 위시하야 제일 1사단을 편성함.
정. 제2, 제3 이상의 사단은 사관양성의 원수(員數)를 따라 추차 증설함.
무. 사단편성하기 전이라도 필요와 경우(境遇)을 수(隨)하여 소규모의 군대를 불구하고 출전함
대한민국 3년 1월 일 (서력 1921년 1월 일)
한인군사위원회 위원장 이용
동위원 채영, 한운용, 장기영, 박원섭, 박영, 주영섭, 박마트베이, 장도정, 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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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한인군사위원회 위원장 이용 등의 경고문 끝......
이 경고문(발표문)을 보면 상해파인 한인군사위원회 위원장은 이용이었고, 내용은 러시아 볼셰비키와 협조하여 러시아령에서 독립군 부대를 편성한다는 것이다.(「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23쪽 등)
달뷰라내 한인부와 상해파가 자유시 일대의 독립군 조직을 위해서 어떤 약속 혹은 협약을 체결하였고, 그후 대한국민의회(이르쿠츠크파) 측에서는 상해파로 기울어지는 독립군 지휘권을 가지기 위한 치열하게 반목하게 된다.
양파 간의 독립군 지휘권을 놓고 계속해 협상은 진행되었다.
대한국민의회 군무부장 김하석이 이용 및 채영과 회담하는 자리에서 “두 사령관은 대한국민의회와 상해임시정부 사이의 내정에 개입하지 말고 코민테른이 주재하는 한인사관양성기관에 투신할 것을 권고” 하자
이용과 채영은 “김하석군이 대한국민의회를 탈퇴하면 무슨 의견이든지 들어 주겠다”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김하석의 말을 살펴보면
김하석 : “우리가 혁명사업을 진실로 기성(期成)하려면 무력을 충분히 준비하여 혈전으로 진행하여야 될 것이오만 그렇지 못하면 독립 만세성으로 부르짖은 과거 양년 성적에 더 지나지 못할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현금 우리 군계(軍界) 사정을 돌아보건대 기백명씩의 오합지졸로 아무개 군대 아무개 군인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을 통솔 또는 지휘할 만한 장교가 전무하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고 장차로 우리가 군대를 운전함에 대하여 현재 그 수효만으로 될 것이 아니며, 또는 금명년(今明年)의 단촉(短促)한 시간에서 혁명을 완성함도 절대 불가능할 것이라.
우리의 혁명전도가 그러할진대 이용, 채영군으로 말하면 사관지식(士官知識)이 있으니, 그 기능에 따라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기백명, 기십명의 후진사관을 양성하는 것이 대업장래를 진성(眞誠)으로 위함이며, 또 군벌적 주권을 장악하랴 할지라도 이에서 더 큰 자기들의 토대가 없을 것이니, 아무쪼록 대한국민의회와 상해정부의 내홍은 간섭할 것 없이 국외에서 사관이나 많이 양성함이 어떠할까.
만일 이것을 원한다 하면 현금 동양혁명을 인도하는 동양비서부가 이르쿠츠크에 설립되었는 바, 비서부 계획에서 사관학교를 설치하려고 사관과 다수의 학생을 입송(入送)하라 하였으니, 제군의 기능과 이 기회가 진실로 기우(奇遇)가 아닌가. 그런즉 지금 속히 입거하여 제반시설을 준비 하는 것이 일을 처리하는 바른 규칙이러니와 공사간 만전의 책(策)이라.”
이용의 답 : “그것은 전신하기도 어렵고, 또는 절대로 상해정부를 봉대할 주견(主見)이고 국민의회로 더불어 대한 혁명을 도모할 수 없다. 만일 김하석이 국민의회에서 탈퇴하면 무슨 의견이든지 채용하겠노라.”
양파 사이의 분쟁은 당시 한국 독립군부대 문제에 관하여 러시아내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었던, 레닌, 코민테른 본부, 동양비서부, 달뷰라(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 극동공화국 정부, 극동공화국 군부 등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이 무렵 상해파나 이르쿠츠크파는 러시아측의 지지가 바뀌면 독립군의 군권을 잃어버렸다.
마치 조선왕조시대에 임금이 관리들의 벼슬을 떼었다 붙였다하는 것으로 보기는 힘들고, 러시아도 당시의 혼란상이 극에 달해서 공산주의 내부에서도 한국 독립군 문제에 대해서는 정확한 방향을 잡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공산주의계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1917년 10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후 러시아와 소련의 지지에 따라 지도자가 수시로 바뀌었고, 독재권력의 눈 밖에 난 사람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은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군들이 러시아 공산당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3·1운동 이후 2차 세계대전 발생시까지 사실상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한 국가가 소련, 중국, 미국 밖에 없는 형편이었고. 1920년 무렵의 중국은 방조하는 수준이었으며, 만주의 악질 친일파인 장작림은 독립운동 탄압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일제와 같은 편으로 시베리아에 볼셰비키를 타도하기 위한 군대까지 파견하고 있었다.
1921년 자유시 사건 무렵 러시아의 지원은 독립군들에게 가장 큰 희망이었던 것이다. 자유시에 모인 독립군들은 독립군끼리 다툼을 피하고 일제를 공격하기 위한 원조를 기대하였으나, 러시아 공산당은 독립군 지원 목적을 자주 바꾸었다. 당시 러시아 공산당은 공산혁명의 성공에도 버거운 형편이었다.
일제가 대규모 병력으로 시베리아를 침략할 때는 “한국인 독립군 등과 연합하여 일제 침략자와 백파 타도”가 제일의 목표였으나, 러시아 내전기의 극심한 대기근과 경제상황, 국제정세는 한국 독립군에게 호의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박일리야의 자유시 복귀와 오하묵의 소환
이 무렵 극동공화국 서울에 갔던 박일리야는 자유시로 돌아왔는데, 니항부대(훗날의 사할린특립의병대)가 자유대대에 편입되어 군사훈련과 공산주의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을 본 후 박일리야는 블라가베셴스크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뒤 니항부대의 지휘권을 회복하기 위해 자유대대 간부들을 규탄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규탄 내용은
“오하묵은 과거 백파에 가담하였고, 최고려는 군인을 태형하고 니항군인을 참살하려고 10월 22일 한밤중에 철갑차를 출동시켜 제19연대를 포위하고 위협하였다는 것, 자유대대의 비서 박병길은 과거 일제에 협조하고 트리피츤 부대 간부 학살에 가담하였음에도 니항군대를 분열시키기 위해 최고려 등이 그를 자유대대의 비서로 포섭하였다는 것, 또 이르쿠츠크파는 상해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라는 것” 등등이다. |
박일리야와 다툼이 생기자 자유대대의 간부들은 박일리야의 잘 알고 있는 박병길로 하여금 박일리야의 비행을 폭로하게 하였다고 한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의 주장에 따르면, 박병길은 박일리야가 과거 니항에서 콜차크(백파)기관에 정탐으로 근무하던 사안과 트리피츤의 무치적 행동을 찬조하여 이르는 각 지방 촌락에 이르러 약탈하던 불법행동을 일일이 보고하였고, 박병길에 대한 박일리야와 한인 니항부대의 감정이 악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니항사건과 관련된 한인 니항부대의 행적에 대해서 최호림, 이지택,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등의 주장과 박일리야, 김홍일, 리인섭, 이범석 등의 주장이 대립한다.
결국 박병길이 1921. 1. 28. 일경(혹은 2월경) 박일리야 측 독립군들에게 처형되었다는 것은 오늘날 공통된 의견이다.
오늘날 한국의 몇 명과 일본에서 주장하는 박일리야의 범죄혐의는 다양하다. 주로 ‘니항의 4,000명~1만여명 민간인 학살범, 약탈자, 강도, 아편중독자, 살인자 같은 인상, 강간범’이다.
박일리야도 니항해방과 께르비 철수, 자유시 도착까지 수천명 이상의 니항주민과 한인 사할린부대 등을 이동시키는 과정에서 식량문제 해결에 어려움이 있었음을 부정한 적은 없다.
니항의 러시아계 파르티잔 부대와 고려인으로 구성된 사할린부대가 자유시로 이동한 지역의 지방 기관들이 독립군의 이동에 협조했던 러시아계 주민들에게 배급과 식량지원을 하지 못했다면 러시아 대기근의 시기 해당 지역 주민들이 더 많은 고통을 겪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박병길과 이르쿠츠크파 등이 고발하자 러시아 관헌은 박일리야를 체포하였다가 며칠 뒤에 석방하였다고 한다.
석방 배경에는 치타에 있는 상해파 한인부의 석방운동도 있었을 것이지만 러시아 수사기관은 그 배경이 한국계 독립군간의 다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3,000만여명의 기아민이 발생되었다는 대기근 시기라는 것은 전 세계와 러시아 관리들이 모두 알고 있었으며, 독립군의 자유시 이동의 이유도 대략이나마 알고 있었기에 러시아 아무르지방의 행정관청들은 대체로 어느 일방을 두둔하지는 않았다.
(자유시 일대의 러시아 관청들이 오하묵, 최고려 등의 자유대대를 더 밀어주었다고는 말하는데 아마 당시 러시아인들이 봤을 때는 동일한 민족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이르쿠츠크파의 오하묵은 자유시 일대의 고위장교로 있었다고 주장하는 고려인이었다. (※ 오하묵이 자유시 일대에서 어느 정도 군사상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근래 확인한 바 명확하지 않습니다. 과거 이르쿠츠크파에서 과장한 점도 다소 있습니다)
그리고 극동공화국 치타에 있던 상해파의 박애는 상해임시정부의 영사였다.
오늘날 공개된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면, 당시 박일리야와 이르쿠츠크 파는 서로를 비방한 것은 명백하다.
러시아 극동공화국의 입장에서 볼 때에 박애 등의 한인부는 모스크바 중앙정부의 레닌과 깊은 관계에 있는 유명한 한국의 독립운동가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일파이며, 또한 극동공화국에 주재하는 상해임시정부의 외교기관이기도 하므로 무시할 것이 아니었다.
극동공화국과 달뷰라는 양파간 다툼을 해결하기 위해 오하묵에게 2군단 본부에 출두하여 니항 군대와의 다툼에 관한 진상보고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오하묵이 박병길을 대동하고 자유시를 떠나려고 할 때 니항 군인 몇명이 진정서를 제출하여 박병길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오하묵은 2군단 본부 방문시 박일리야의 반대편인 박병길을 대동하려고 한 것인데, 출발 무렵에 니항 군인들이 박병길의 처벌을 요구한 것은 난처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1921년 1월 18일경, 오하묵이 니항부대를 흡수하고도 의식주 문제조차 해결해주지 못하니 니항 부대원의 요구를 함부로 거절하지 못하고, 박병길을 자유시 지방수비대 유치장에 수감하고 돌아와서 해결을 하겠다고 이야기하고 자유시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1921년 1월 28일경(혹은 2월경. 정확한 날짜는 미상) 박병길의 죽음
수감된 박병길은 오하묵이 없는 동안에 처형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한인 니항부대 쪽에서 박병길이 과거를 문제 삼아, 일본군과 백군에게 협조하였고, 께르비에서 트리피츤을 직접 체포하였고 동료들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불법적으로 학살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사할린부대 내부에서 형식적인 재판을 하고 총살한 것이라고 한다.
다만 이르쿠츠크 파의 주장에서는 박일리야 일파가 박병길을 몰래 살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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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쿠츠크파 일부와 친일파의 주장
※ 1920. 2. 29. 니콜라옙스크에서 380여명의 독립군 부대를 조직해 평화적 해방에 가담한 사람은 박병길이었고, 트리피츤과 4,000여명에서 1만여명에 이르는 대규모 민간인 학살에 가담한 사람은 박일리야이며, “박일리야는 무정부주의자, 백파 밀정, 아편중독자, 강도였다.
일본이 저지른 1920년 4참 참변은 니항사건의 보복에서 시작된 것이다.
독립운동가 최재형선생은 니항사건 때문에 살해되었고, 간도참변과 자유시 참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도 니항사건 때문에 일어났다.”
가 그들의 대략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오늘날 거의 모든 러시아측 기록에 니항의 조선인 의용군이 친일파외의 민간인을 처형했다는 자료는 전혀 없다.
일본의 인터넷 자료, 김홍일, 오광선, 리인섭 등 대부분의 독립군 주장은 “당시 박병길과 이지택이 러시아 말를 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외지인이었으며, 3.1운동 이후에도 니항에서 일본인, 친일파들과 일하는 등 경력이 의심되는 점이 있다.”
그리고 러시아측 기록에는 이지택(남한에서 화요파 독립운동가로 활동), 김낙현 등이 아예 등장도 하지 않는다.
니콜라옙스크 항구의 고려인 사회의 핵심 인사였던 류소심과 박일리야는 니콜라옙스크 사건, 자유시 사건 등과 관련하여 러시아 기록에 자주 등장한다.
※ 러시아계 친일파인 A.Y.구트만의 책에는 트리피츤에 의한 니항해방 이후에 조선인 독립군들은 일본계 민간인 학살에 참여하지 않고, 군기가 엄격하고, 몰수, 징발, 약탈 등에 참여하지 않은 부대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오날늘 공개된 러시아의 모든 기록들에서 박병길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한 때 친일단체 조직자였다는 증거는 있습니다.
소설가 박경리, 반공학자 김창순 등 일부에 의하여 박병길이 마치 니콜라예프스크에서 독립군부대를 조직해 트리피친과 함께 니항을 해방시켰다는 기록도 있으나 오늘날 이런 것은 대부분 조작된 것으로 확인된다.
1920년 니콜라예프스크의 일본인회 회장 시마다모토타로의 자료도 일제시대 조선총독을 지낸 재등실(사이토마코토)의 일기류와 마찬가지로 앞에서는 독립운동을 부르짖으며 뒤에서는 일제에 협력하였던 조선인들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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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길의 죽음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대립되지만,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 정부의 문서와 여러 가지 증언들을 살펴보면 박병길이 께르비에서 트리피츤을 직접 체포하고 처형하는 데 협조한 것이 명백하다.
트리피츤에 대한 평가가 정반대로 엇갈리다보니 박일리야와 박병길은 서로를 심각하게 비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일치된 의견은 박병길은 안드레예브(Андреев Иван Тихонович)와 분명히 협조하여 니항을 다시 해방시켰던 트리피츤과 동료들을 기습하여 체포하였고, 결국에는 트리피츤 등을 처형했고 이 과정에서 재판도 받지 않은 트리피친의 지지자들도 학상당했다는 것이다.
박일리야의 주장은
트리피츤과 그의 부인, 동료들은 께르비에서 안드레예브(Андреев), 리아도르스키, (트리피츤 등을 학살하고 사할린섬으로 도망친) 백파 등과 같은 볼셰비키에 침투한 백파와 러시아계 친일파 등의 무고를 당해 억울하게 학살당한 것이다. 그들중 상당수는 재판 받지 않았음에도 '무정부주의자'라는 어이없는 이유로 살해되었다. 니항(니콜라예프스크)에서 트리피츤과 사할린 의용대 등에 의해 주로 사살된 사람은 파르티잔 부대를 기습 공격한 일본군과 일본 거류민, 그리고 과거 1918년경 일본 천황에게 니항을 공격해 볼셰비키를 타도하라고 청원서를 보냈던 니항 주민 102명중 일부와 1918년 8월 2일경 일본군의 니항 점령시 니항에 남아있던 볼셰비키와 지지자들을 색출해 살해하였던 러시아계 친일파 등이 인민재판 등을 거쳐 적법하게 처형되었다. |
는 것이다.
니항을 불태우고 께르비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다수 어린이들의 사망한 것은 러시아 내전기의 식량부족, 의약품 부족 등으로 인한 것이며, ‘친일파가 주장하는 트리피츤 부대의 니항 민간인 수천명(대략 6,000여명 이상) 학살은 일본군, 백군, 친일파가 볼셰비키를 타도하고 시베리아, 사할린섬 북부와 유전, 간도, 동청철도 등을 영원히 점령하기 위해 조작해낸 거짓말이다’라는 것이 박일야 측의 주장이다.
박병길이 사할린부대에서 재판을 받고 총살형이 집행된 것인지, 아니면 살해된 것인지는 주장마다 다르나,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 따르면 1921년 1월 28일경 사망한 듯하다.
도심 주택수는 1,200여채 미만에, 도심 인구 7천여명 정도이며, 미등록인구를 포함한 여름철 최대 1만 5천여명 이상의 도시인 니콜라옙스크(니항)가 불탔다고 모든 주민이 사망한 것은 아니다. 1950년 6.25 사변에 서울이나 평양, 원산, 함흥 등의 대도시가 니항보다 더 파괴되었으나 주민의 1/3에서 1/2까지 죽은 것은 아니다. 또 나폴레옹 전쟁 때 모스크바 등이 모두 불탔으나 주민들이 모두 죽은 것은 아니다. 니항의 감옥은 1,500명이 수용될 만한 건물도 아니었으며, 생환한 일본 여성도 그런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일본 여성의 기록에는 100명도 수감되지 않았다고 나온다. 오늘날 러시아측 기록은 트리피츤 부대에 의해 처형된 사람이 수십명을 넘기 힘든다고 한다. 1920년 니콜라옙스크 항구 주민중 가족이나 이웃 주민의 조상이 트리피츤 부대에 의해서 죽었다는 사람은 없다. 오직 친일파들이나 하는 소리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하라 테루유키, 존 J 스테판, 이오키 료조, 아나톨리 야코블레비치 구트만(이명 : 굿맨), 라비치, 에치, 예밀야노프 등과 이들의 조작을 짜깁기하는 사람들이다. |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과 재러학자 리인섭의 자료 등에 따르면 니항의 조선인 민회 서기를 했던 박병길은 1920년 2월 29일 트리피츤 부대에 의한 니항해방이후에도 일제에 협력한 혐의 등으로 처형대상자가 되었으나 박일리야에 비호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박병길은 박일리야의 고종여동생 홍마리아의 약혼자였다는 소리가 있다.
자유시에서 박병길이 수감되자 홍마리아는 외사촌오빠 박일리야를 찾아가서 약혼자 박병길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는데, 이 때에 박일리야는 “이번에는 용서하겠노라”고 약속을 했으나, 박일리야가 없는 사이 사할린부대원에 의해서 박병길은 처형되었고, 홍마리아는 박병길의 뒤를 따라 자살하였다고 한다.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발행 「한국학자료총서5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홍범도편」 97쪽에 따르면, 김승빈은 박병길이 1921년 2월경 박일리야측에게 암살된 것이 아니라, 군인들에게 공개적으로 총살을 당했다고 한다.
니항사건의 수기를 남긴 1920년 니항의 일본인회 회장 시마다 모토타로(島田元太郎 :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한국학자료총서5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홍범도편」의 98쪽, 리인섭의 「망명자의 수기」에 나오는 최진일이 회상한 것 등에 따르면 박병길은 1918년 니항을 점령한 일본군과 백파에 협조하였고. 1920. 2. 29. 니항 해방후 백위파 군대 명부를 확인해 보니 박병길은 에세리(사회주의혁명당) 당의 당원이었으며, 처형 대상자에 오르자 박일리야에게 사정하여 처형을 모면하였으나, 결국 살아 남은 백파(에세리)들과 협조하여 께르비에서 트리피츤 등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결국 파르티잔에 들어와서도 몰래 반혁명 행동을 하다 탄로나 군인들이 유치장으로 달려가 박병길을 잡아내어 공공연하게 총살한 것이라고 한다.
(※ 이것은 ‘친일파이자 일제 밀정인 박병길이 독립군에게 처단되었다’는 말이다.)
러시아 내전과 대기근의 시기 독립군은 자유시 일대의 아무르주에서도 지역 주민들로부터 결코 환영받을 만한 처지가 되지 못했으며, 러시아 적군의 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요구와 부대개편, 지휘권 문제 등을 가지고도 심각한 다툼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자유시 일대에 집결한 독립군의 대부분은 일제타도와 민족 해방을 위해 일제와 앞잡이들의 분열책에 넘어가지 않으려 했었다.
항상 독립군 간의 대화와 교육에 노력하였고 실제 그렇게 하였다.
그러나 연합군의 시베리아 간섭으로 인한 레닌의 볼셰비키 정부와 일본간의 교섭에서 한국독립군의 러시아 영토내에서 무장 투쟁이 문제가 되었고, 독립군과 러시아 적군에도 백파와 일제의 간첩과 밀정들이 침투해 분란을 조장하니 독립군과 볼셰비키 내부에서도 러시아 내전종식·일본 침략군 격퇴를 위한 방법을 놓고 다툼은 격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 침략자의 분열책
독립군 간의 지휘권 문제가 다툼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중 하나는 일제의 분열책이다.
일제는 식민지배를 위해 친일파와 밀정을 지속적으로 양성하여 왔고 한국 독립군의 분열과 대립을 최대한 조장하기 위하여 온갖 거짓말과 이간책만을 일삼아 왔다. 일제의 최종 목표는 앞잡이들을 앞세운 한민족의 말살(몰살)을 통한 식민지 확장과 일본의 번영이었고, 평화로운 공존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마찬가지다.
자유시 사건 당시에도 독립군 주변에는 일제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한 자는 수없이 많았던 것이다.
자유시 독립군 부대에 대한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 달뷰라의 지도
1921년 2월초쯤부터 봉오동 전투를 주도한 안무 휘하 독립군부대와 연합한 독립군들이 잇달아 북만주 혹은 연해주에서 아무르주 자유시 일대에 도착하니,
이 무렵에는 대한국민의회(이르쿠츠크파)와 사할린부대(상해파)의 대립이 노골화되고 있었다.
특히 1920년 당시 행정구역상 사할린주의 주도(州都)였던 니콜라옙스크에서 일본인과 일한 적이 있었던 박병길이 1921년 1월 28일경(혹은 2월경. 날짜 불확실) 자유시에서 니항부대에 의해 죽었으며,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과 결탁하는) 자유시 포병부대 지휘관 안드레예브 등에 의해 과거 트리피츤 부대였던 제19연대가 해산되며, 한국 독립군 내부에서도 상해임시정부 지지파와 대한국민의회 측의 대립은 심각해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일명 달뷰라 혹은 달비로), 코민테른 본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극동공화국 정부, 극동공화국 군부, 자유시(스바보드니시) 소비에트 등에서 독립군 지도 방침을 자주 바꾸니, 독립군 부대간의 혼란상은 해결은 커녕 더욱 심각해 지고 있었다.
독립군이 무장투쟁과 관련하여 직접 마주치는 극동공화국 군부 총사령관도 몇달마다 바뀌니, 라핀, 에이히, 블류헤르, 셰르셰프, 까란다리쉬비리 등등 새로운 군대 지휘관이 등장할 때마다 독립군들의 지도 방법이 바뀌었고,
달뷰라나 극동공화국의 간부들도 바뀔 때마다 독립군을 대하는 방법이 또 바뀌게 된 것이다.
러시아 내부의 혼란상도 심각해 모스크바에서도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사파라프, 몰로토프 등등이 저마다 무슨 방침을 내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르쿠츠크파의 군권 상실과 박일리야의 지휘권 획득
자유시일대에 집합한 독립군 부대의 지휘권을 둘러싼 군권 다툼에서 처음에는 대한국민의회 쪽(오하묵의 한인보병자유대대)에 유리하였다.
처음에는 자유시에 온 니항군대를 이르쿠츠크파에서 흡수한다.
그러나 상해파(박애의 한인부 등)의 극동공화국 등에 대한 외교활동에 따라 오하묵은 한국계 독립군 부대들의 군권 문제 때문에 2군단 본부에 호출되어 갔다.
이러한 가운데 독립군 부대들이 속속 자유시에 집결하게 되었고, 이 부대들은 일단 이르쿠츠크파의 지휘하에 움직이게 되었다.
(※ 김창순·김준엽 공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권」, 청계연구소, 1986 등에 따르면)
상해파와 친밀한 극동(원동)공화국 한인부 및 한인군사위원회는 니항군대의 지휘자였던 박일리야와 협력하게 되었다.
한인부에서는 극동공화국정부가 김민선을 대대장으로, 박일리야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자유시에 파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하묵 등이 현지 러시아 기관들과 결탁하여, 니항군대를 흡수해 버렸으므로, 이러한 처사는 명령 불복종 및 불법 행위라고 규탄하면서 극동공화국정부에 대하여 오하묵 등의 처벌을 요구한 것이다.
오하묵 등이 제2군단 본부로부터 자유시의 군사 진상을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고 하바로프스크로 호출되어간 이유는 그런 것 때문이었다.
......이르쿠츠크파의 주장......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 따르면 상해파의) 한인부 당국은 자기들의 외교상 세력만 믿고 대한국민의회와 한인 보병자유대대당국과는 한마디의 협의도 없었다고 한다.
상해파는 원동정부(극동공화국) 군부에 교섭하여 박창은(한인부 5두 중1인)으로 총사령관, 그리고리예프(러시아인)로 참모부장을 임하여 자유시로 파송하는 동시에 니항군대의 명칭을 변경하여 사할린 의용대라 하고 그외 고려 각 의병대와 한인보병자유대대 등 군대는 사할린 의용대의 관할을 받으라는 원동정부 군부의 명령을 대동하고 일행이 블라가베셴스크(「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는 흑하로 잘못 작성됨)에 도착하니 1921년 1월 말경(晦間)이었다.
......이르쿠츠크파의 주장 하략......
블라가베셴스크 지방에는 상해파의 한인부와 연락이 있는 블라가베셴스크(흑하 부근)지방공산당내 고려부에서 근무하는 임상춘, 최태열 몇 사람과 이용, 장기영, 채영, 김민선, 박일리야 등으로 합세하여 2월 중순에 자유시에 도착하여 군대를 관리하려 하였다.
박창은 사퇴
총사령관에 임명된 박창은은 일반 군대를 소집하고 자기가 총사령관의 직임으로 왔으니 자유시의 일반 군인들은 명령에 복종하라 하였다.
한인 보병자유대대와 이르쿠츠크파에서 주장하기를 한인부의 5두제중 박창은은 군사상 지식과 사회상 경험이 없음을 일부 군인도 아는 바이며 또 어려서 구상유취(口尙乳臭)를 겨우 면한 일개 경박(輕薄) 청년이었다고 한다.
일반 군인들의 태도가 불온하게 되자, (아마 이르쿠츠크파 한인보병 자유대대에서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박창은은 마음을 바꿔 곧바로 블라가베센스크로 돌아가 총사령관 사면서를 한인부와 원동정부(극동공화국) 군부에 제출하였다.
(그후 박창은은 상해파에서 이르쿠츠크파인 대한국민의회 쪽으로 파를 바꾸어 비서로 일했다고 한다)
박창은의 사면서을 접한 한인부에서는 다시 원동정부에 교섭하여 참모부장으로 파견하였던 그리고리예프를 연대장, 박일리야로 군정위원장을 지정하여 다시 사할린 의용대(니항군대)와 각 의병대를 관할하라 명령하였다.
이 명령을 받은 박일리야와 그리고리예프는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하는 바 주둔지를 변경하여 마자나바로 정하고 한인보병자유대대에 편입된 니항, 다반 군대를 우선 이주시켰다.
(※ 마자나바는 자유시의 동북쪽으로 직선거리 약 60킬로미터, 도로상으로는 70킬로미터 이상 되는 한인촌락과 러시아인으로 구성된 마을, 호수는 수백호에서~수천호 정도인 농촌,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는 150호라고 마을 규모를 축소하였으나, 실제로는 주변의 주택들을 합하면 몇배에서~10배 정도의 크기였다. 당시 야간에는 자유시의 불빛이 마자나바에서도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고 한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는 간도계 독립군들이 마자나바 이동에 반발하였다고 하지만, 상해 임시정부 및 이동휘 등과 깊은 관계가 있었던 만주·간도지방 독립군들이 반발한 것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만주 연해주 지방 독립군들의 대응책
만주, 연해주 지방 독립군들의 태도는 중립적이었다.
다만 주택, 의복, 무기, 식량, 훈련 등의 문제에 대하여 각 독립군 부대에서 간도와 연해주일대에서 이동해 올 때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르게 먹고 자는 문제조차 해결되지 못하자 각 독립군 부대에서는 군대 대표를 선정하여 원동정부 군부와 주둔지, 식량, 무기, 훈련, 주거 등의 문제를 완전히 교섭하기로 결정하였고,
1921년 2월 27일에 대표 6인(자유대대의 김하석, 최고려. 총군부의 김표돌. 국민군에 김규찬, 강석진, 김광)을 파견하였다.
이때부터는 자유대대 쪽에서 일방적으로 러시아 지방 행정기관 등과 교섭하거나 군대에 대한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불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하묵은 1921년 1월 18일에 군부명령에 따라 군대사정의 보고로 치타에 체류중이었다)
자유대대는 자유시 일대에 근거지가 있어, 식량과 주택 등의 보급에서는 다른 독립군부대를 회유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으나, 독립군 부대들이 대표단을 구성하여 식량, 주택, 무기, 훈련 등의 문제를 원동공화국 정부 및 군부와 교섭하기로 하자, 자유대대의 주도권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 주장하기를 상해파인 박일리야와 (러시아인 부대장) 그리고리예프는 이 지방 러시아 수비대에 교섭하여 일부 군대에 3일간 식료를 단절하기도 하였다고 주장한다.
자유시 일대에 집결한 독립군에게 식량, 무기 공급이 원활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간도에서 온 독립군들은 자유의 사정이 자신들이 듣고 있던 것과 다르게 전개되자 박일리야 등의 상해파외에도 치타 쪽에 보낸 대표와 (이르쿠츠크파 및 대한국민의회의)오하묵 등의 연락을 기다리면서도 기아의 곤란 등의 문제로 마자나바 등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당시는 러시아 대기근의 시기였고,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하였다고 알려졌다.
현재 공개된 러시아 정부와 군관련 문서에 따르면, 당시 독립군 부대를 분산 배치하려는 박일리야와 그레고리예프의 주장이 맞다.
미투리, 홋바지를 입은 독립군이 무슨 수로 시베리아의 강추위를 견디며, 러시아 정부·원동공화국 정부·군부에서 식량보급도 안해주는 데 자유시에만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인가?
이 시기 오하묵의 한인보병 자유대대와 이르쿠츠크파는 독립군의 기본적인 먹고 자고 싸우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해파나 상해임시정부가 러시아 측의 허가 없이 독립군 부대를 만주나 한국 북부지방으로 진출시켜 일제와 싸울만한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독립군 주둔지 문제
러시아 대기근 시기 자유시(스바보드니) 한곳에 장기간 주둔하는 것은 한곳의 농민에게 피해를 가중시키는 일일 뿐이었다.
그러나 자유대대에서는 장교와 군인 일동이 반항하면서 “우리 군대 대대장과 군정위원장이 군대사건으로 인하여 치타에 갔으니 좌우간 회보를 접한 후에 이주하겠다” 하니 박일리야와 그리고리예프는 위협의 수단으로 자유대대의 기관포 2문, 마차와 대대본부 문부(文簿)를 압수하고 임시 대대장 서리 황하일 기타장교들을 포착(捕捉)하여감으로 이에서 군인들은 어찌할 수 없으므로 역시 명령대로 자유시를 떠나 크라스나야라바(자유시 동북쪽 도로상 거리 약 30킬로미터의 러시아인 항구마을)에 이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르쿠츠크파의 주장에 따르면, 니항과 다반 양군대가 자유대대를 포위하고 기관포를 사면에 걸고 무장해제를 강박하니 자유대대는 그와 같은 무리한 강박을 당하면서도 일시의 분개를 참는 것은 유혈의 충돌을 면키 위해서였고 별양(別樣)의 항거가 없이 무장해제를 당하니 니항군인 중 몇십명은 박일리야의 명령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자유대대 무장해제만으로 만족치 못하여 내복과 신발을 강탈하며 또는 군인을 난타하여 불구자가 몇십명에 달하고 자유대대군인 전수(全數)를 처벌하기 위하여 지방수비대에 인도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지방 러시아인 수비대와 오하묵 등이 조직한 한인 보병자유대대는 아는 사이였고, 부당한 처벌을 시행치 아니하고 중립적 태도를 지켰다고 한다.
그들은 박일리야의 편을 들지 않고 한인보병자유대대의 주둔지 이전에 간섭하지 않았고 자유대대 군인들을 체르니고프카(자유시 동북쪽 12킬로미터 거리의 러시아인 촌락)에 주둔시키고 이 러시아인 수비대에서 임시로 지휘와 기타 공급을 (니항부대, 다반부대, 만주·간도지방 독립군보다 우선하여)제공하였다.
한인보병 자유대대는 박일리야와 그리고리예프의 명령에 마지못해 따라야 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 주장하기를)사할린 의용대에서 자유대대 비서장 류선장을 포착하여 포살하려는 중에 그때 홍진수, 최태열, 장기영 등이 과거 개인상 정분으로 인하여 극력 주도한 결과 미결에 있었다.
그러던 중 자유대대장 서리 황하일은 사할린 의용대에 포착되어 간 후 박일리야에게 외면상 얼마간 긍종(肯從)하는 태도를 보임에서 그 군대에 잠시 연대장대리의 지위를 얻었던지라 이 기회를 타서 생명이 경각에 있었던 류선장을 풀어주었다가 이 사건으로써 황화일은 연대장의 면직은 물론이고 즉시 구금되였다가 방면되었다고 한다.
박일리야는 이 무렵 자유시 일대의 독립군 군권을 장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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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특립 의용대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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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때 조직된 사할린 특립 의병대는 ‘사할린 의용대’, 혹은 ‘사할린 특립 의병대’ 등으로 불려지기도 하며, 박일리야 등을 주요 지휘관으로 하고 사할린주 니콜라예프스크 출신 독립군(일명 ‘니항부대’ 혹은 ‘고려인 사할린부대’)과 만주, 간도, 시베리아 지역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며 자유시 및 아무르주 일대에 집결했던 여러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여 조직되었습니다.
1921년 3월 15일경 전한의병대의회 (마자나바, 크라스나야라바) 개최
......각종 독립운동 관련 자료에 따르면......
극동공화국 서울 치타의 한인부 잔존 인원(상해파)과 사할린주 출신 의용대의 주도로 1921년 3월 15일경부터 연해주와 서·북 간도에서 이동해 온 한인 군대 대표자들이 참석한 전한의병대의회(全韓義兵代議會)가 자유시 북동쪽에 있는 마자나바(마자노프)에서 개최되어 전한군사위원회 와 사할린특립의용대를 조직하였다.
사할린특립의용대의 명칭은 1921년 1월에서 ~ 3월경(러시아측 기록으로는 1921년 1월 20일경 명령하였다) 당시 원동공화국 총사령관 에이히의 명령(제 37호 등)으로 허가된 것으로 보여진다.
병력수는 박일리야가 사실상 지휘하던 독립군 니항부대를 비롯하여, 홍범도, 안무 부대 등 당시 자유시 일대에 도착하였다가 마자나바로 이동한 독립군 약 1,700여명에서부터 ~ 1,900여명 이상이며 피난민이나 비무장 독립군은 제외한 수로 보입니다.
※ 관련된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1921년 3월 15일 크라스나야라바 마을에서 달뷰라(Дальбюро) 주도로 제1차 한민족 파르티잔 대회가 열렸으며, 참석한 대표들은 왜적과 백파들에 대한 무자비한 투장의 필요성에 대해서 연설하였으며, 자유시 주변에 집결한 모든 독립군 부대를 단일 지휘하에 놓기로 하였다.
(사할린특립의용대 조직의 지도 기관이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달뷰라)인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Дальневосточного секретариата Коминтерна в Иркутске)인지 코민테른 본부인지, 아니면 레닌 정부인지 극동공화국 정부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러시아측 기록도 관련되는 부서간의 다툼이 있다보니 1921년 3월 15일 사할린특립의용대 조직의 지도 기관이 틀리게 기재된 경우가 많습니다.)
※ 참고자료 :
자유시 참변 당시 직접 독립군을 공격하거나 지도한 러시아인 오홀라, 슈먀츠키, 셰르셰프, 최호림, 오하묵, 최고려, 이지택,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문건 작성자들의 주장은 오늘날 러시아 기록 및 일본 자료와 대조하여 검증한 바 허위로 작성하고, 한국 독립군을 살해하려고 무고한 점이 많습니다.
다만 이를 인용하는 것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 초기 당시 중요한 역할을 한 이르쿠츠크파 라는 조직의 창설 내력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였기에 인용합니다.
그리고, 과거 국내외 자료부족으로 한국에서 자주 인용되었던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문건 작성자도 일제 밀정으로 변절했거나 나중에 일본에 협조헸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1921년 2월경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의 등장
이 무렵 아시아 혁명과 한국 독립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레닌 등의 지원으로 코민테른 내부 조직 개편으로 동양비서부가 생겨나고(코민테른의 내부조직은 자주 변경되었습니다) 슈먀츠키(슈먀츠키 바리스 자하라비치 : Борис Захарович Шумяцкий. 1886년 11월경 출생 ~ 1938년 7월 29일경 처형되었으며 1956년 2월 22일경 구소련에서 복권됨)가 동양비서부장이 된다,
1921. 6. 28. 일경 러시아 시베리아 아무르주(흑룡주) 자유시 참변 무렵의 슈먀츠키의 직책은 아무르주 자유시 일대의 독립군 지도를 담당하였던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 혹은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장,
달뷰라(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의 간부, 극동공화국 5군단 혁명군사위원회 위원, 러시아 외무 인민위원회 시베리아국 위원, (러시아 공산당의 허수아비 국가였던)극동공화국 외무부 장관 등을 지내는 바람에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달뷰라(혹은 달비로, 달이비로, 달비료), 달뷰라 산하 한인부, 극동공화국, 극동공화국 군부, 극동공화국 5군단, 코민테른,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이르쿠츠크 파간의 관계를 해석하게 하는 데 어려움을 주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러시아 공산 혁명 이후 최고 권력자에 근접해 있어, 러시아 권력 투쟁에도 관계된 인물이었으며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사파라프, 몰로토프 등과 더불어 1921. 6. 28일 발생한 자유시 참변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러시아계 인물이므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자료는 단순 참고용으로 작성되었으며, 역사적 사실이나 학자들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1886년 오늘날의 시베리아 지방 부랴트 공화국의 수도인 울란우데(과거 명칭 :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가난한 집 자식으로 출생 1896년 크라스노야르스크로 이사 1905년경부터 볼셰비키 단체에 가입 1906년경 차르 러시아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은후 탈출 1906년경 시베리아 울란우데 공산주의 단체 간부, 신문 등 발행 1907년경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 1912년 아르헨티나 망명 1917년 2월혁명 이후 크라스노야르스크 소비에트 회원 1917년 8월경 상트 페쩨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활동 1917년 10월경 시베리아 및 몽골 담당 대표로 파견됨, 이르쿠츠크에서 백파계 반란 진압 1919년 8월부터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극 위원 1920년 6월부터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달뷰라, 혹은 달비료, 달이비로) 의장 및 극동공화국 외무부 장관 1920년 7월부터 (러시아 공산당의 허수아비 국가인) 극동 공화국 장관 회의 의장, 10월부터 시베리아 혁명위원회 부의장 1920년 12월부터 예니세이 지방 집행 위원회 의장 1921년 2월부터 극동 외교 인민위원회의 승인 등을 받은 이르쿠츠크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일시적으로 러시아령내 한국계 독립군 부대의 지휘권을 위임받은 일명 코민테른 원동서기국 국장) 1921-1922년에 (극동공화국내) 제5군단 혁명군사위원회 위원 1921. 6. 28. 자유시 참변 당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자유시 참변의 러시아측 최고 책임자로 지목됨.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자유시 참변 때문에 1년 정도만에 폐지됨 1922년 1월부터 1925년 1월까지. 페르시아(이란) 주재 전권대사 및 무역대표 1926년 말부터 공산주의 동방 노동자 대학 총장 1928년 말부터 볼셰비키 전 연합 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아시아국 선동선전부장 1929년 3월부터 우즈베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중앙통제위원회 위원 1930년 11월 21일 영화촬영 국가위원회 의장 1933년부터 영화 및 사진 산업의 본부장 1936년부터 소련 예술 업무 위원회 부위원장 1938년 1월 17-18일 밤. 반혁명 테러 조직 구성 및 간첩 혐의로 체포됨 1938년 7월 29일경 총살당함 1956년 2월 22일경 복권 |
슈먀츠키는 1921년 6월 28일 전후에 아시아 공산혁명을 선도하기 위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으로, 중국, 몽골, 한국, 인도,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페르시아, 일본 등의 공산주의 전파 및 확산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슈먀츠키는 단순히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명령을 수행한 것으로만 볼 수 없으며, 러시아 공산당내의 최고 권력층과도 관련된 상당한 지도권을 가진 자였으며, 자유시 참변이후에 책임자로 지목되어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와 상해파, 만주지방 독립운동단체 등의 항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슈먀츠키는 1921년 한국계 독립군 부대들을 지도하며,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이르쿠츠파 계열을 의견을 일방적으로 수용한 바 있었으며. 1917년 러시아내 볼셰비키 혁명 성공 이후 러시아 내전이 발생하자 중국, 인도, 페르시아, 일본 등의 공산주의 혁명을 지도함에 있어서도 비타협적이고 일관성 없는 정책들과 민주적 절차 등을 무시하고 신상필벌에 소홀했다고 비난받기도 하였습니다.
1917년경 시베리아 지역은 원래 러시아 서부에서 농노에서 해방되어 온 사람들이 대다수 거주하였습니다.
또 시베리아 주민들중 다수는 러시아내의 귀족과 부르조아 계층, 러시아계 친일파 등에 대한 반감이 있었으며, 고려인 중국인 시베리아 민족 등 여러 민족들에 대한 차별대우로 인한 반감, 러시아계 민족들의 높은 문맹률, 식량난 등으로 볼셰비키들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는 아시아 각국들의 공산주의 혁명을 인도하는 요직에 앉아 볼셰비키 내부에서 벌어진 스탈린,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사파라프, 몰로토프 등의 권력 다툼에까지 관계하여, 자신이 책임졌던 아시아 중국, 몽골, 베트남, 라오스 등의 공산혁명 성공에도 일부는 기여하였으나,
아시아권 공산주의 계열의 종파간 투쟁 발생, 폭력행위 만연, 권력투쟁 조장에 관계되어 중국, 한국, 이란, 베트남, 아프카니스탄, 인도 등지에서 불필요한 민간인 희생이 있었습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는 1921. 6. 28. 자유시 참변이 바로 슈먀츠키 등의 지도하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르쿠츠크파의 반격 : 새로운 통합 임시정부, 새로운 최고 국가기관인 고려혁명군정의회 조직 시도
이르쿠츠크파는 1921년 1월경부터 3월경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의 지도하에 원동공화국 군부와 연합하여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나중에는 정식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하여 전체 한인 의병대를 통합하려 하였다.
이로써 1921년 상반기에 전한군사위원회(상해파)와 고려혁명군정의회(이르쿠츠크파)라고 하는 두개의 한인 군사조직이 러시아령에 설립되었다.
또 1921년 5월 4일경 이르쿠츠크에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설립되어 상해파 고려공산당과의 대립이 격화된다.
1921년 3월초 이르쿠츠크파가 조직하려던 고려혁명군의 구성
상해파에 대항하여 이르쿠츠크파가 조직한 고려혁명군은 다음과 같다고 알려져왔다.
고려혁명군의 주요 간부들은 고려혁명군정의회 회장 겸 총사령관 까란다리쉬비리, 사령관 대리 오하묵, 위원에는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 전권위원인 오홀라(=오홀라 마르트? 야코블레비치), 최고려, 류동열, 후보 위원 김하석, 서기 최성우, 정치부장 채동순, 사관학교장 이청천, 사관학교 군정위원장 최호림, 정치학교장 채그레고리, 참모장 유수현, 제1연대장 전희세, 제2연대장 최메포지, 제3연대장 황하일 등이었다.
(※ 이르쿠츠크파인 최호림은 이것과 관련된 기록을 남겼다)
주도권 다툼 : 분열된 양파 고려공산당 창당 대회
......김홍일의 주장......
(김홍일의 주장에 따르면)
이동휘계의 상해파는 대한국민의회와 결탁한 이르쿠츠크파와의 치열한 분쟁으로 결국 1921년 3월에 소집될 예정이었던 총회는 할 수 없이 5월로 미룰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1921년 3월 당시의 추세로는 상해파가 우세하였기 때문에 이르쿠츠크파가 농간을 부린 것이다.
또한 총회 소집 장소도 치타로 하자는 주장이 나돌던 판이라 이르쿠츠크파 측에선 마땅치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르쿠츠크파가 주장한 대로 총회는 1921년 5월경에, 그리고 장소는 이르쿠츠크에서 개최하게 되었으니 우선 첫 단계에서 이르쿠츠크파가 승리한 셈이다.
이르쿠츠크파는 그 여세를 몰아 코민테른 원동 책임자인 슈먀츠키(Шумяцкий) 를 업고 대회 참가 대표에 관한 자격 심사를 하자고 제의했던 바, 동양비서부(혹은 달뷰라) 당국자가 그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결국 이르쿠츠크파의 일방적인 심사가 진행되었으니 사실 그 대회의 승패는 사전에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때문에 나 보고 먼저 시베리아에 가서 기다리라던 노백린은 물론 이동휘도 화가 나서 끝내 대회 참가를 거부했다. (※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가 달뷰라의 간부를 겸임한 적도 있다.)
그리하여 대회는 누구나 예상했던 대로 이르쿠츠크파의 압도적인 승리로 막을 내림으로써 박애와 장도정 등엔 반당이란 죄명을 씌워 징역형을 선언하고 기타 상해파 인사들에게 구류 처분을 내렸다.
대회에서 결정된 당명인 고려공산당의 정식 대표로는 한명세와 남만춘 그리고 장건상 등을 선발하여 그들을 모스크바에 파견시켰으며, 또한 대회에서의 결정에 따라 소련의 까란다리쉬비리(Каландаришвили)와 최고려 그리고 류동열 등 세 사람을 군정위원으로 선임하여 국제군을 직접 지휘하도록 자유시로 파견하였다.
사태가 그런즉 상해파는 대회에서의 참패로 맥이 풀린 데다가 그 위에 가장 중요한 군사력마저 속절없이 반대파에게 빼앗길 위기에 봉착했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들은 모스크바의 중앙정부에 대해 대회가 불법이라고 통보하고 무효를 주장하였던 바 모스크바 당국에서는 동양비서부(혹은 달뷰라=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의 책임자를 교체했다.
(※ 김홍일의 주장은 틀린 부분이 있는데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가 교체된 것은 1921. 6. 28. 자유시참변 이후 독립군들의 반발 때문이다.)
이상 말한 것이 자유시 사건을 발발케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직접적인 원인은 사할린부대와 자유대대간의 충돌 사건이다.
......중략......
(※ 김홍일 자서전. 대륙의 분노 116쪽에서 계속 인용함)
당시 소련 정부측에서는 독립군들의 연해주 진출을 적극 방지하지 않으면 안될 그런 딱한 입장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소위 그 니항사건 이후 즉 1920년 가을부터 열렸다가 1921년 10월경에 결렬된 대련회의에서 일본군이 그들의 철병 조건의 하나로 시베리아 한인 독립군의 해산을 강경히 요구한 바가 있었고 또한 소련정부 주재 중국 북경 대표인 카라한과 일본 공사 방택유길(芳澤有吉)간에 어업협정을 맺어 앞으로 다시는 니항사건과 같은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여 어로 활동을 보장해 줘야 한다는 데 합의를 본 탓이다.
그 협정의 체결석상에서 일본 대표 방택유길이란 자는 니항사건의 도발자는 분명히 한인 독립군들이라고 생떼를 쓰면서 시베리아 영내의 한인 무장부대들을 즉각 해산시키라고 소련측에 강경히 요구했던 것이다....(중략)
러시아령에 있는......
그 때 군정위원회를 통하여 전독립군부대들을 무장해제시켜 이르쿠츠크로 강제 이송키로 결정을 본 것이다.
(※ 김홍일의 주장은 근래 공개되는 사실과 다른 점이 있으나, 오늘날 한국에서 유사한 주장이 인용되고 있어 참고하려고 올리는 것입니다. 최근 갑자기 자유시 참변과 관련하여 사실인 것으로 인정되는 이지택, 최호림,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의 주장들은 2000년 초반까지는 한국에서 주류 이론이 아니었으며, 김홍일과 이범석 등의 주장들이 더 신뢰성 있는 자료로 인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김홍일의 주장 하략......
러시아령 독립군 부대의 지도권을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로 이관
한인 보병자유대대 및 간도·만주·연해주 지방 양 의병대 대표로 김하석(金夏錫), 최고려, 김규찬(金奎燦) 등 6명이 1921년 2월 27일에 자유시를 출발하여 치타에 도착한 것은 그해 3월 8일경이었다고 한다.
(※ 6명은 간도 총군부 및 국민군 등의 대표와 한인보병자유대대의 대표라 한다.)
(※ 필자가 자유시참변과 관련하여 주로 참고하는 구술 진술을 남긴 某(아무개)선생도 이 무렵 양파 다툼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당시에는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지 않았으나. 1920년대 연해주와 1930년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중국 신문 등에는 자주 보도된다.)
이들은 상해파인 한인부의 간부 박애와 회담하였다. 그러나 박애와 김하석, 최고려 등은 합의를 하지 못한다.
김하석과 최고려는 자유시에서 벌어진 여러 가지 사건들을 설명하고, 어지러운 국면을 원만히 수습하도록 협의하자고 제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회담에서도 군대의 통합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조국 독립의 목적은 동일하나 파당이 많은 양대 파의 다툼이 있던중, 당대회 소집이 일치한 명의 및 방법으로 동일한 장소에서 되지 못하고 동양비서부에서는 이르쿠츠크, 달뷰라의 한인부 잔류 인물과 상해파에서는 치타를 주장하였고, 3월 1일에 당대회를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각 지방 공산당 조선인 대표들은 쌍방의 소집에 각응하여 치타에 40여명이 집중되었다.
그런데 상해파와 달뷰라 한인부 잔류인물들은 대회 소집장소를 블라가베셴스크로 변경하고, 한인부 관련자였던 계봉우, 김진, 장도정 등은 치타에 온 대표들을 대동하고 고려 공산당대회 소집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군사대표회를 소집하려고 블라가베셴스크로 향하였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르쿠츠크파에서는 즉시 박애에게 사실임을 질문하니 사실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 간혹 아무르주의 주도인 블라가베셴스크(Благовещенск)를 ‘흑하’로 잘못 기재한 자료도 있다. 이범석도 자신의 자서전 우등불에서 ‘흑하시가 블라가베셴스크이며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곳’이라고 하지만 3개의 도시 모두 다른 곳이다. 중국령 흑하시와 러시아령 블라가베셴스크는 다른 도시이며, 두 도시 모두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자유시가 아니다.
중화인민공화국 흑하시와 마주보는 러시아령 아무르주의 주도인 블라가베셴스크는 1921년경 전혀 다른 도시였다.
더군다나 자유시(러시아명 스바보드니)는 블라가베셴스크와는 다른 도시이다. 자유시 참변을 일으킨 자들이 참극을 축소하기 위해 전혀 다른 도시의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
흑하사변’이라고 하면 전세계적으로 중국과 러시아 간의 잦은 국경분쟁으로 흑하시나 애혼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가르킬 가능성이 크다)
상해파에서는 공산당대회에 관하여는 계봉우와 김진에게 군사대회에 관하여는 장도정에게 책임을 각단하여 파송하였다함으로 군대 대표들과 공산당 대표들은 당대회에 관한 문제와 각 독립군부대에 대한 처리를 위하여 특별당원회를 개하고 상해파 및 한인부측으로는 박애, 박밀양, 최성우를 이르쿠츠크파측으로는 이성, 김철훈 등이 당에 대한 양측의 보고를 경하고 전후 호상충돌상 숙시숙비는 오는 당대회의 판결에 부하기로하고 다만 당대회소집에 통일의 방책과 군대에 대한 응급문제 2대 안건을 아래와 같이 결정하였다고 한다.
1. 공산당대회 소집에 대하여 동양비서부와 한인부가 각자 주창을 제하는 내용은 우리 지방당원들이 이해키도 난하고 또는 상당한 이유가 당대회에서 판명되려니와 다만 주의상 혁명단체로 볼지라도 당기관을 각자 설립하라함은 원칙에 벗어날 뿐만 아니라 혁명전도에 막대한 불행의 조짐이니 일반당원은 이와 같은 이유로 동양비서부와 한인부에 건의하여 쌍방의 조화를 도함이 원만한 방침이라고 결의하고 공산당대회 조화책에 대하여 대표 5인을 선정하되 김하석, 엄윤, 최고려, 최성우(당시 한인부 책임비서)로 이르쿠츠크에, 선우정으로 블라가베셴스크에 파송하기로 하고, 우선 한인부 당국의 박애는 전보로 블라가베셴스크에 파견한 장도정, 김진, 계봉우 등을 소환할 것, 상해에 대하여는 서신 또는 전보로 이 사유를 통지할 것으로 선정 또는 결정한 것으로 보여진다. 2. 군대 응급문제에 대하여는 (러시아 공산당의 허수아비인)원동공화국 군부에 교섭하기로 결의하고 교섭대표로 박애, 오하묵, 최고려, 김표돌 이상 4인으로 하였다. 그리고 총사령관은 오하묵, 군정위원장은 최성우로 선정하여 해(該)군부에 교섭할 것이고 완전통일에 대하여는 또한 당대회 및 장래 군사대회에 부하여 하기로 결의했다고 한다 |
합의에 따라 군사 교섭대표는 극동공화국(원동정부) 군부 총사령관 에이히(Эйхе)를 면회하고 여태까지의 경과보고를 한 뒤에, 앞으로의 방침을 하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극동공화국 총사령관은 자주 바뀌었지만 당시의 총사령관은 우선 박애를 향하여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박애는 어떠한 주의와 무슨 방법으로 사위(事爲)를 진행하려 함인지 요령을 이해치 못하겠노라.
기왕에는 김민선(金敏先 : 김인노겐치 미하일로비치)이 아니면 고려군대를 운전치 못한다 하였고 그 다음에는 박창은과 그리고리예프가 상당하다 하였고, 오하묵은 절대로 부적당하다고 비방하며 또는 누차 보고까지 있음으로 나의 짐작에는 오늘날 주의변으로 군대를 지휘함에 대하여 어느정도 불만한 점이 있을까하는 의아가 있었을 뿐이였고 오하묵이는 군계에 경험이 있는 장교로 군사상 상당한 지식이 있음은 박군의 소개로서 처음 아는 것이 아니며,
고려군대 장교들을 자기 임의로 좌우하고 지금 와서 오하묵이가 상당하다 하니 박군의 말은 참으로 신종(信從)치 못할 뿐 아니라 고려군대에 대하여 어떠한 낭패를 끼칠는지 모를 것이다.”
그리고 그밖의 대표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려군대의 다소분쟁은 자기들 내막 여하에 관한 바이어니와 현금 고려군대를 함부로 처리하다가는 고려혁명계에 대하여 막대한 책임을 담(擔)할 것이니, 금번 요구에 경솔히 응종(應從)키도 불능할 뿐 아니라, 의회정부 중앙명령에 고려혁명에 대한 원조상 제반 주책(籌策)과 지휘는 국제공산당에서 직접 관계하게 되어, 국제공산당지부로 설립된 동양비서부가 이르쿠츠크에 있는 바 고려군대에 대하여서도 그 비서부에서 인도하게 되었으므로 본 군부에서는 처리와 인도할 권리가 없음이다.” (극동공화국 군부 총사령관 에이히의 말이라고 함. 에이히는 고려군대 군권은 상급부서의 합의하에 동양비서부로 이관되었다고 주장한다) (※ 일부 글자를 오늘날 표현으로 변경하였습니다.) |
이르쿠츠크파의 주장에 따르면 극동공화국 군대 총사령관 에이히는 (한때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 달뷰라 산하) 한인부의 일원이었던 박애를 이렇게 비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극동공화국의 군부총장 에이히(Эйхе)는 극동공화국이 아닌 모스크바 공산당 정부 혹은 달뷰라의 명령에 따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로 고려군대 지도권이 넘어갔으므로, 동양비서부의 지도하에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판의 협의와 대화를 통한 군대통합, 주둔지 문제 등을 해결하고, 독립군 부대의 교육을 시키고, 만일 일본군과의 전투는 극동공화국외에도 모스크바의 중앙정부, 코민테른, 달뷰라 등과도 상의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보여진다.
에이히는 후임으로 극동공화국 군부 총사령관이 되는 블류헤르와는 달리 이 시기 양파의 화합을 주장한 것으로 보여지며, 특정 파를 지원하고 이르쿠츠크파에게 독립군의 군권을 넘겼다고 볼만한 행동은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달뷰라(러시아공산당 극동국)라는 공산당 기관 역시 등장하여 독립군 부대의 지도에 나서니,
이 무렵 독립군 부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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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극동공화국 군부 (나중에는 동양비서부와 결탁하여 이르쿠츠크파를 지지하였고, 자유시 참변 당시 2군단 휘하 부대 등을 동원해 기습한다. 군대 총사령관이 자주 교체되었다.)
(2)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가 이르쿠츠크파를 지지)
(3)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레닌이 상해임시정부 주로 지원)
(4) 달뷰라(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 :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가 간부를 겸임하였다. 모스크바 공산당 중앙의 지시를 극동공화국에서 지도하였다.
(5)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 본부 (지노비예프, 사파라프가 상해파와 상해임시정부를 지지)
(6) 극동공화국 정부 (행정수반인 크라스나쇼코프가 상해파 지지)
(7) 달뷰라 소속 한인부 (한국계로 구성되었다. 상해파를 지지하였으나 해체되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로 한국계 독립군부대 지도권을 넘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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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지도를 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김홍일의 저서, 리인섭의 기록들, 오광선 증언, 이청천 증언, 홍범도 증언, 안무 증언, 이범석 자서전, (이르쿠츠크파에 대한 일방적인 기록을 남기고, 독립운동 행적이 불확실한) 최호림의 기록, 러시아 내전기 중국 참전군 기록 등등을 살펴봤을 때 러시아측 지도 기관이 자주 바뀌며, 러시아측 지도 기관내부에서 고려군대의 지도 방향을 둘러싼 잦은 변경과 다툼이 있었다.
볼셰비키들은 처음에는 일본군과의 전투를 도와 주겠다고 하여 만주·연해주지방 독립군의 러시아령으로의 이동이 시작되었으나, 시베리아를 침략한 일제와 볼셰비키와의 교섭이 시작되자, 중립적 태도를 보이다가 1920년 4월 참변이후 일제의 공격이 강해지자, 다시 독립군들을 지원하였다.
당시 독립군들도 간도 토벌 등으로 이동할만한 곳을 찾아야 했던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 시베리아를 침략해 괴뢰 정부를 수립한 일제와 극동공화국 혹은 모스크바 공산정부와의 교섭은 계속되고 있었다.
일제도 시베리아에서의 반일 파르티잔 활동의 강화와 미국·체코군 등 연합군의 철수, 한국내에서의 3·1운동으로 인한 세계 민심의 변화, 중국의 5·4운동으로 인한 일제의 만주·대만·중국본토에 대한 침략정책 고발, 다른 연합군은 철군을 하였으나 침략주의 야욕을 버리지 못하다가 결국 1920년 2월 29일경 니항사건 등에서의 일제 침략군 일부가 반자이 기습공격 실패로 전멸, 동시베리아에서 잦은 민간인 학살로 인한 돌이킬 수 없는 러시아계 민족의 반발, 친일파와 백파들의 만행으로 인한 러시아·중국·한국 민중의 거센 반발로 계속 볼셰비키와 교섭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과 극동공화국간 1920년부터 시작되어~ 1921년 8월 21일경 열린 대련회의(大連會議) 본회담 등으로 러시아측과 일본과의 교섭이 계속 진행되었음에도, 러시아령 한국 독립군 부대에서는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간의 다툼이 쉽게 해결되지 않고,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이 양파의 싸움은 레닌정부 및 극동공화국 정부 등과 연계를 갖고 있는 이동휘파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Дальневосточного секретариата Коминтерна в Иркутске)에 기반을 두고 있는 문창범, 김하석 등의 이르쿠츠크파(대한국민의회, 한인보병자유대대 계열)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었기에 극동공화국 군부에서도 독립군 부대 관리에 주의를 기울여 왔음을 오늘날 공개되는 러시아측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러시아령 독립군 부대 지휘권의 동양비서부 이관과 이르쿠츠크파의 군권장악
한국 독립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레닌 등이 1919년경 코민테른을 설립하였고, 이 무렵 코민테른 내부에 서양비서부에 맞먹는 아시아 혁명을 인도할 동양비서부를 설립하여 아시아 혁명과 한국 독립운동에 관심을 기울이자, 러시아 공산당 중앙·혹은 달뷰라·극동공화국·극동공화국 군부가 한 때 가졌던 러시아 영내 한국 독립군 지휘권은 사실상 동양비서부로 넘어간 상황이었다.
극동공화국정부 군부 총사령관 에이히(Эйхе)로부터 “앞으로 한인부대의 관리를 코민테른 기관에서 맡게 되었다”는 대답을 듣게 되자 자유시에서 온 한국 대표들은 곧 이르쿠츠크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를 찾아갔다.
(※ 김하석 등만 갔고, 상해파인 박애는 이들과 행동을 같이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리인섭의 주장에 따르면 박애는 이 무렵 타협적인 자세가 부족했다고 한다.)
김하석 등은 동양비서부 당국자와 회담하는 자리에서, 지금까지 군대 문제와 관련하여 한인부에만 문제가 있고, 흑룡주에서 벌어진 군사정세(각 부대의 역사, 분열의 원인, 충돌의 현상 등)를 일일이 보고하고 이에 대한 지도방침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한 동양비서부 당국자의 의견은 아래와 같았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당국자의 말. 아마 슈먀츠키로 추정된다) 고려혁명계 자체상 충돌이 다단(多端)이나, 대부(大部)에 취(就)하여 노골적으로 말하면, 국민의회와 상해정부와의 통일이 되지 못한 데서 생겨난 화단(禍端)이 군계(軍界)에까지 문란하게 된 터이니, 이 화단을 피하여 군대를 운전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즉 이상 양기관의 지배를 받지 말고, 국외에서 특립(特立)으로 고려군정의회(高麗軍政議會)를 조직하여 그 군대를 불편불의(不偏不倚)하게 혁명의 전도에 진행을 취하는 것이 상책(常策)이다. |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방침에 따라 이르쿠츠크에서는 곧 군정의회의 조직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것은 1921년 3월 중순경이었다고 한다.
동양비서부 제안에 대하여 대표 일동 (이르쿠츠크에서 조직된 합동민족군대내 한인군대 대표도 출석하였다고 한다)은 이의(異議)가 있었는 바 친자 출석한 대표 기개인은
“고려의병대 일부의 대표인고로 전고려혁명군대 군정의회를 조직함에 대하여는 권리도 없고 또는 장래 책임문제가 될 것이라” 고 거절하였다.
(※ 상해파, 사할린 의용대, 만주 독립군 등의 동의 없이 자유시 일대와 러시아령에 집결한 독립군부대를 지휘할 수 있는 조직을 러시아 공산당의 힘을 빌려 만드는 것이 독립운동라는 문구 아래 단 한번이라도 총을 들어봤던 독립군이라면 화를 불러올 것임을 단번에 알았던 것이다. 상해파 혹은 이르쿠츠크파 누구든지 동료의 반대가 있을 것이 명백한 조직을 결코 만들어서도 안되고 인정해 줄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로 인하여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서 고려부(이르쿠츠크파로 구성됨)와 일주간을 계속 토론한 결과 군정의회를 조직하기로 낙착되었다고 한다.
(※ 결국 만주지방 11개 독립군 단체의 자유시 사건 성토문에서는 고려군정의회가 비밀리에 조직되었다고 규탄하였다.)
(※ 김창순·김준엽 공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권」, 청계연구소, 1986 등에 따르면)
군정의회를 조직하기 위하여 준비위원회가 소집되었는데, 여기에는 동양비서부, 자유시에서 온 6인 대표, 합동민족연대 대표들이 열석했을 뿐이고, 상해파 한인부에 있었던 상해파 대표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 대표들 중에서 반대가 있자, 동양비서부에서는 고려부와 1주일간이나 토의를 계속한 끝에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臨時高麗革命軍政議會)’를 조직하기로 최후 결정을 보았다고 한다.
고려부라는 것은 동양비서부의 부설기관으로서, 이르쿠츠크파 전로고려공산당의 별칭이라고 알려졌다.
동양비서부에서는, 정식군정의회는 고려공산당대회가 끝난 뒤에 조직하기로 하되, 우선은 임시군정의회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3개월 이내에 군대를 통합하여, 극동공화국 영역을 벗어나기로 방침을 세웠다고 주장한다.
곧 고려의병대의 근거지는 두만강과 압록강 상류부근 길림성 안도현(安圖縣), 무송현(撫松縣) 등의 밀림 지대에 두고 한만국경지대를 유격대식으로 출몰하면서 전투를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1921년 3월경 이르쿠츠크파의 임시 고려군정의회 조직
1921년 3월 중순에 이르쿠츠크에서 조직된 임시고려군정의회(臨時高麗軍政議會)의 구성과 병력은 다음과 같다고 알려졌다.
◇ 임시 고려군정의회의 구성 의장 1인 까란다리쉬비리 (러시아인) 의원 2인 김하석, 채성룡 총사령관 까란다리쉬비리 부사령관 오하묵 임시참모부장 유수연(兪洙淵) ◇ 병력 제 5군단내 코카서스(혹은 카자키) 기병 600여명 제 5군단내 합동민족연대(한인부대) 600여명 정치장교 16명 (이르쿠츠크 공산당정치학교 제1회 졸업생) |
까란다리쉬비리는 코카서스 지방의 그루지아(조지아)출신으로 러시아어로는 “까란다리쉬비리”라고 발음되나, 그루지아어 등으로는 다르게 발음되거나 다른 이름도 있었던 모양이다. 까란다리쉬비리는 소련시대인 1973년 영화(Каландаришвили. “Сибирский дед“. Фильм 1973 г.)로도 만들어진 적 있었던 볼셰비키 혁명시기 파르티잔의 영웅으로 옴스크에서 치타까지의 전선 일대에서 백파군을 격퇴한 용장이었다.
또한 까란다리쉬비리는 여태까지 한인의 어느 파에도 가담한 일이 없기 때문에 공정을 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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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 등장한 까란다리쉬비리의 총사령관 선정 이유
까란다리쉬비리를 총사령관으로 선정함은 몇가지 이유가 있으니
첫째는 동양비서부의 정견과 같이 불편불의를 취함이니 이것은 이상 각 기관의 내막을 상찰(詳察)할지라도 상해정부에서나 대한국민의회에서 선정한 장교이면 하시 인물을 물론하고 현장에 있는 군대를 통솔키 난할 것이니 그럼으로 국외의 입장에서 다만 고려혁명의 진취를 목표하고 일반군인을 통일하려하는 것이며
둘째는 까란다리쉬비리는 원래 로시아 의회정부에 대공을 공헌한 의병대 수령으로 의병식 전투에 경험이 풍부한 장관이니라.
다시 말하면 백전노장이라 과거 1920년도에 일본군대와 백파 시묘노프군이 시비리(치타로부터 옴스크까지)를 점거한 것을 까란다리쉬비리가 의병대장으로 코카서스 기병 3천여명과 보병 수천명을 영솔하고 일제 침략군대와 시묘노프군을 연해주로 격퇴하였으며 따라 일본군대의 전투적 방식을 당지로 분철한 것이며
셋째는 원동정부 지대에서 군대를 출동 또는 주둔 등 제반 동정에 대하여 로시아 의회정부의 후원을 원만이 득할 것이니 즉 의회정부의 신임과 원동정부의 신임에 하시 군벌을 물론하고 감히 흔동치 못할 까란다리쉬비리의 굳은 지위를 겸하였으며 또는 자기가 맹언하기를 로시아의 무산혁명은 성공되였으니 이로부터는 동양혁명에 피를 흘릴터 임으로 우선 동양혁명에 도화선이 될 만한 고려혁명에 헌신하여 고려의병대와 흥망을 같이 하려하고 자기가 다년 전선에서 친이 영솔하였던 코카서스기병 6백여명을 인솔하고 자원하였다.
그런즉 우리가 원수(怨□)를 대항하려고 실성이 되도록 부르짖고 힘이 있는 데까지 뛰면서 세계를 둘러보자.
까란다리쉬비리와 같은 동무가 몇이나 될 것인가. 면황 내정외세가 이와 같이 급박한 처지와 소우(所遇)에 난회(難會)의 장관(長官)이 아닌가. 까란다리쉬비리가 총사령관에 선임된 것은 이상의 사유이니라.
(※ 일부 글자를 현재의 표기방법으로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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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까란다리쉬비리의 일대기를 그린 구 소련에서 1973년 제작된 영화 https://youtu.be/I_YP4wxH80A
부사령관 오하묵과 임시 참모부장(혹은 참모장) 유수연은 이르쿠츠크파인 자유시의 한인보병 자유대대 소속이며 (두 사람은 1921년 1월 18일경에 같이 극동정부 군부를 같이 방문한 적이 있다), 이르쿠츠크에 와서 새로운 군사조직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결국 총사령관만 유명한 까란다리쉬비리를 데려다 놓았을 뿐이며, 나머지 간부들은 상해파나 만주·연해주·이르쿠츠크 합동민족군대 소속이 없었다.
심지어 간도 지방의 유명 독립운동 단체 소속 간부도 한명 없었다.
1921년 4월 14일경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대리 오하묵, 의원 김하석(채성룡은 공산당대회에 참석키 위하여 체재) 참모부장 유수연 등은 정치학교 필업생 16인과 간도군대 대표들을 대동하고 이르쿠츠크를 출발하여 3일후 치타에 도착하여 원동정부 군부 총사령관 에이히를 면회하고 임시고려군정의회를 조직함과 장래행사 등 상세는 동양비서부의 소개서로 교부하고 고려 각 의병대로 하여금 임시고려군정의회에 인계할 것을 해 군부의 명령으로 제2군단에 송달케하였다
그리고 당지 (달뷰라 소속 잔류) 한인부 당국자이던 계봉우, 박애, 김진(동양비서부 설립된 후 한인부는 철폐되고 단 문부를 청정키 위하여 시일이 지연되였음) 기타 이용, 김규면, 이한영, 임상춘, 한형권 일파를 상면하고 임시군정의회의 조직된 사정을 설명하고 장래에 대하여는 아무쪼록 협동적으로 우리의 사업을 진행할 것이고 과거의 숙시숙비는 서로 연계할 것이 없다는 것으로 사세이연(事勢理然)케 말하였다.
그러나 피일파가 이와 같은 협의는 원래 원치 아니하거니와 더욱히 동양비서부와 임시고려군정의회를 모해중임으로 좌고타언(左顧他言)하고 냉락(冷落)한 동정을 암시함으로 하등의 대답을 듣지 못하였다고 한다.
치타에서 이르쿠츠크파가 임시고려군정의회의 조직경위와 자유시의 독립군 부대 지휘권이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에 이관되었음을 통고하였다고 주장한다.
전후의 사정을 살펴봤을 때 상해파가 그것에 동의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상해파는 심지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그들의 지원을 받은 임시고려군정의회의 권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모스크바 등지에서 레닌과 사파라프, 지노비예프 등의 협조로 상해임시 정부의 외교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한형권, 이한영 등이 (허수아바 국가인) 극동공화국 서울 치타에 모여서 상해파 주도로 고려공산당 결성을 시도하고 있었으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혹은 달뷰라 등의 여러 간부직을 겸임했던 슈먀츠키 등의 지지가 이르쿠츠크파로만 향하자,
상해파가 한 때 획득했던 자유시 일대의 독립군 부대의 지휘권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달뷰라, 극동공화국 군부 등의 명령서 한두장에 이르쿠츠크파로 넘어가는 상황이 다시 연출되었다.
상해파의 제2차 재러군사위원회 조직과 상해파 간부 체포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지도부가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여 코민테른의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의 지도하에 임시고려군정의회를 조직하던 무렵인
1921년 3월 중순경부터 이용, 박일리야, 장도정, 계봉우, 김진 등은 사할린 의용대가 주둔하는 마자나바에 와서 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1921년 1월에 이용을 위원장으로 하여 조직하였던 재러군사위원회가 극동공화국 군부 총사령관의 허가를 얻어 아무르주 자유시 일대로 이동해온 독립군부대와 이르쿠츠크파 한인보병자유대대 등까지 포함하여 조직된 것이다.
(사할린특립의용대의 조직은 앞선 장에서 언급하였습니다.)
제2차 재러군사위원회 라는 것이다.
재러군사위원회(혹은 한인군사위원회)는 명예회장으로 레닌, 트로츠키, 크라스나쇼코프(Краснощёков),이동휘 등을 추대하고, 군사위원은 이용, 채영, 한운룡, 장기영(張基永), 박일리야 등 15인을 정하였다고 한다.
이 무렵 상해파는 볼셰비키에서 지원된 자금과 동포들의 기부를 바탕으로 자유시 등을 포함하는 동시베리아 일대에 독립군 기지 건설을 시도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르쿠츠크파 역시 혁명계 어떠한 결사에서 던지 명예회장일망정 레닌, 트로츠키 그 동무를 절대로 환영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용이 교섭대표가 되어 (허수아비 국가인)극동공화국과 한인부대의 지휘권에 대한 교섭을 시작하였다.
달뷰라와 동양비서부의 지도를 받은 극동공화국 군부쪽에서는 한인부대에 관한 관할권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있다고 하자, 상해파에서는 한국 독립운동에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이르쿠츠크파의 고려군정의회가 영향을 끼칠 수 없도록 해산시키거나 무기력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상해파 인물들의 체포
이에, 극동공화국 군부에서는 1921년 4월경에 계봉우, 김진, 박애, 이용, 장도정 등을 체포하여 이르쿠츠크로 압송해 버렸다.
이용은 약 5천원 상당의 금화를 휴대하고(이르쿠츠크파가 주장하는 금액임) 탈출하여 한인농가에 피신하였다가 1921년 7월 하순경에 연해주로 탈출하였다고 한다.
압송된 박애, 김진, 장도정, 계봉우 등은 이르쿠츠크파에 체포되어 군사재판을 받았다.
5월 18일에 고려군정의회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합동으로 조직된 임시고려군사혁명 법원(臨時高麗軍事革命法院)은 박애 등을 혁명의 방해자로 규정하여 군사재판을 하게 되었는데, 박애 등은 징역형,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구류처분을 내렸다고 알려져 왔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98쪽을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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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혁명군대에 대한 군사상 범죄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조직되는 바 1921년 5월 18일에 정식 고려군정의회와 동양비서부의 합의로 임시 고려군사혁명법원을 조직하니 체제는 위원제를 취하였다.
1. 박애, 김진, 장도정, 계봉우 등에 관한 사건
위 4인은 고려혁명군대를 선동하여 분열과 충돌을 야기하였으며 또는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에서 조직한 고려혁명 군정의회를 반대하는 등 사실이 현로(現露)되었음으로 원동공화국 총사령부에서 박애, 김진, 계봉우(장도정은 이르쿠츠크에서 구착) 등을 포착하여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의 처분하에 압송하니 해 비서부에서는 고려군사혁명법원을 임시로 조직케하고 위원은 김철훈, 이성, 채성룡 3인으로 선임하여 심리한 결과 사실은 아래와 여하다.
(1) 고려혁명군대의 단결을 방해함
(2)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가 설립되는 동시에 로시아 공산당에 명령하여 한인부는 이미 해산하였는데 위 일파는 한인부 명의를 잉자(仍藉)하고 자기들 야심적 수단을 진행키 위하여 비서부의 정책을 반항한 사실
(3) 소위 군사위원회란 것을 조직하여 원동정부 군부에 승인을 요구하였으나 해 군부에서는 부인하고 이르쿠츠크에서 조직된 고려군정의회에 복종하라 하니 당석에서 선언하기를 우리는 고려군정의회를 부인할 뿐 아니라 군대내에 폭동을 일으켜 고려군정의회와 혈전하겠노라 한 사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하여 위 4인을 반혁명죄에 처하니
박애로 징역 8년
김진, 장도정, 계봉우 등으로 징역 5년에 선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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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재판은 나중에 모스크바 레닌정부나 코민테른 본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상해임시정부 및 상해파 이동휘 및 다른 독립군 부대 등의 엄청난 반발에 의해 곧 무효화된 것 같다.
구금되었던 상해파 독립운동가들은 곧 동시베리아 지역에서 활동을 재개한다.
(이르쿠츠크파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김창순·김준엽 공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권」, 청계연구소, 1986,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공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등의 자유시 사건 부분에서 인용함)
이르쿠츠크파 임시 고려혁명 군정의회의 활동
임시고려군정의회는 5월 2일경에 자유시에 도착하였다. (정확한 날짜는 아닙니다)
도착하여 보니 자유시의 군대들은 마자나바와 크라스나야라바에 분리 이동되었고, 지방수비대에 인도되었던 자유대대 병력에 대해서는 다시 무장을 갖추어 체르니고프카(우크라이나·러시아인 마을)에 주둔시키고 식료 기타 일체를 공급하였다.
그리고 오하묵, 김하석은 자유대대의 무장해제 및 지방수비대 인계의 사유를 사득(査得)키 위하여 수비대 및 시민의회와 지방공산당, 한인의회 제 기관을 방문하고 당시 사유의 상세를 탐문하였다.
5월 3일경에 원래의 자유대대 주둔지에 왕하여 일반 군인을 소집하고 고려군정의회의 조직된 이유와 장래 진행책을 설명하였다고 한다. 자유대대의 군인 일동은 그간 사할린 군대의 위협에 무장해제를 당한 것과 제반 잔혹강박에 참고 견디던 진말을 분개한 눈물로 호소하였다고 한다.
5월 4일경에 하바로프스크 제2군단에 대하여 임시고려군정의회가 당도하였다는 것과 사할린 군대를 본 임시고려군정의회에 인계하라는 것을 직통전보로 알렸다고 한다.
1921년 5월 4일에서 5월 17일경에 이르쿠츠크에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과 달뷰라의 간부직 등을 겸임하였던 슈먀츠키 등의 지도하에 상해파를 배제한 채, 제1차 고려공산당 대표대회가 개최되었다.
파르티잔의 영웅이었던 까란다라쉬비리 (혹은 까란다리쉬비리)
파르티잔의 영웅이었던 '까란다리쉬비리', 요즘 이르쿠츠크에 콜차크의 동상이 세워지자, 이르쿠츠크에 묻혀 있는 까란다라쉬비리를 다시 평가해보자는 반발도 있다고 한다. 러시아에 비록 콜차크의 동상이 1개 세워져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개가 세워져 있는 것이며, 레닌 동상 등과는 비교가 안되는 것이다.
까란다라쉬비리 (혹은 까란다리쉬비리) 의 장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