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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 여행] 광한루와 오작교의 화려한 야경.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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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廣寒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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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광한루원의 광한루와 오작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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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의 자랑 광한루(廣寒樓)!, 한반도에서 품이 가장 너른 어머니의 산이라 불리우는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은 남원(南原)은 예술이 살아 숨쉬는 고을이다. 춘향가와 흥부가 등의 판소리가 이 고을에 전
승되어온 이야기에 뿌리를 두었고, 내로라하는 수많은 명창들도 이 고을에 태를 묻었으니 판소리의
성지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고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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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도 유랑자는 구름따라 발길 닿는대로 예향으로도 불리는 남원 기행의 으뜸은 남원의 얼굴이자
남원이 자랑하는 광한루원(廣寒樓苑)을 찾았다. 남원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광한루원을 찾는 관광객
의 수는 한 해 1백 20만이 넘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있다. 춘향과 이도령의 로맨스가 깃든 광한루원.
또한 선조들의 이상향의 표현공간으로 달나라를 상징하는 광한루 누각에 올라 앞다투어 그 감흥을 시
로 남김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높이면서 누정문화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는곳이 광한루(廣寒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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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 때인 1675년 음력 사월초파일, 남원의 퇴기 월매와 성씨라는 양반 사이에서 태어난 성춘향
은 16세가 되던 단옷날에 사또 아들 이도령과 사랑을 맺는다. 하지만 이도령이 한양으로 영전해 가는
부친을 따라 떠나간 후 춘향은 후임 사또에 의해 온갖 고초를 겪게 되고, 죽기 직전에 암행어사가 된 이
도령이 찾아와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된다. 코흘리개 아이들도 알고 있는 춘향전의 스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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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과 이도령이 처음 만난 광한루원은 언제나 와서 둘러봐도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여 좋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광한루는 두 연인이 만났던 이런 늦봄이 최고다. 광한루원은 신선이 사는 이상향을 표
현한 공간이다. 광한루(보물 제281호) 앞 연못은 은하수요, 연못에 떠있는 섬들은 신선이 산다는 삼신
산(三神山)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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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바위 '석오': 화강암으로 만든 커다란 자라돌石鰲(거북돌石龜)이 있다. 이것은 삼신산(三神山)과 함께 광한루원이
천체를 상징하는 구성요소 중 하나로 신선사상에 연유하고, 남원 풍수와 연관된 지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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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앞에 춘향과 이도령이 신분을 초월한 만남을 이룬, 견우 직녀 전설이 서린 오작교가 있다. 광한루
라는 이름도 하늘의 옥황상제가 사는 ‘월궁 속에 있는 정자’와 같다는 데서 유래했다. 연못에 걸린 작
은 다리를 건너 영주산 대숲을 지나면 봉래산이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오작교가 지척인 방장산에 도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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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일품인 방장산 정자에 앉으면 마치 신선이라도 된 듯 시간 흐르는 줄 모른
다. 거두절미하고 누각에 남겨진 수많은 편액은 당시 선조들의 상상을 자극한 감성표현으로 나타나
며, 광한루를 찾는 사람들이 편액을 접하면서 그때의 느낌을 살펴볼 수 있어 흥미를 자아내게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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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섬의 영주산(瀛州山), 봉래산(蓬來山), 방장산(方丈山) 순서로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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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산에서 영주산 '영주각(瀛州閣)'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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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매년 늦봄 4월 초파일이면 남원골의 대표적인 명승지인 광한루원에서는 춘향을 기리는 춘향제
가 열린다. 1931년 춘향사당을 짓고 춘향 과 이도령이 처음 만난 것을 기념하는 단옷날 제사를 지낸
게 시초다. 당시 개성·진주·평양·동래·한양 등 전국 각지의 명기(名妓) 100여명쯤이 모여 춘향의 정조
를 지켜낸 일화를 기리면서 춘향제는 시작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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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제삿날은 춘향 의 생일인 음력 사월 초파일로 바뀌었다가 1999년부터는 양력 5월5일을 전후해
지내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춘향제를 빛내는 여러 행사 중에 전국 명창대회는 실력을 인정받는 명창
의 등용문으로 손꼽히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상현 국창이 첫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신영희, 안숙선 등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수많은 명창들이 이 대회 출신이라는 사실
에서 춘향제의 위상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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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섬 봉래산 :연못에는 완월정을 비롯하여 3 개의 삼신섬(三神島)과 오작교가 놓여있다. 삼신섬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인 한라산(영주산), 지리산(방장산), 금강산(봉래산)의 산신을 모셨다. 영주 산엔 영주각을 가운데
봉래산엔 대나무를 심고 방장산엔 정자를 세웠다 그리고 섬을 잇는 목교를 놓았다. 연못에는 연꽃이 자라고
잉어가 노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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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오늘의 주인공 광한루원(廣寒樓苑)의 유래 및 역사에 대해서 한번 짚어보자.
광한루(廣寒樓)의 이름을 한자로 풀어보면 ‘넒은 광(廣)자’, ‘찰 한(寒)자. 넓고도 차다는 의미라고 해
야 할 것이나, ‘광은 넓고도 넓은 우주공간을 말하는 것이고 ’한‘ 은 맑으면서도 차가운 은하수를 상징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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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옥황상제가 사는 하늘나라에 벽옥경이라는 도시에 있는 삼청궁의 광한전에서 머무는 곳이다. 하
늘 나라의 천상의 세계를 땅의 세게인 이곳에 재현하여 세워 놓은 것이 바로 ’광한루‘ 라는 의미이다.
고로 지상과 천상의 세계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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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산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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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광한루를 돌아보면서 자세히 살펴보면 누각의 앞뒤에는 현판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호
남제일루(湖南第一樓)’, ‘계관(桂觀)’, ‘광한루(廣寒樓)’ 라고 이름을 붙인 편액이 세 개나 걸려있는 것
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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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제일루’ 라는 편액의 뜻은 말 그대로 ‘호남에서 제일가는 누각’ 이라는 뜻이며, ‘광한루’는 하늘
나라 월궁의 옥경에 들어서면 ‘광한 청허지부’가 있다는 신화적 전설을 상징하고, 계관은 달나라의 계
수나무 신궁을 상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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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정(方丈亭) :방장정은 1963년부터 시작된 광한루원 확장 정화계획에 의거 당시 남원군수 이화익의 창안으로
세워지게 되었는데 도편수 이한봉이 건축하였다. 방장정은 과거 문헌상 삼신도를 조성할 시기에는 방장정은 나
타나지 않고 다만 중국 원나라때 북경의 금원인 태야지원의 수산 정원에 보면 "태연지원은 금나라때 창설한 것인
데 원나라(1201-1367)때에 이르러 북해에 있는 강화도 중앙의 만수산위에 7칸의 광한전을 세웠고 동쪽의 산 허리
에는 방호정을 서쪽에는 영주정을 세웠다는 기록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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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정(方丈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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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작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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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에 걸려있는 ‘호남제일루’와 ‘계관’ 의 편액은 1855년 남원부사인 이상억이 누각을 중수하면서
손수 써서 걸은 것이다. 이 중 계관의 편액은 동학란이 일어나면서 없어졌으며 1930년대 광한루를 대
대적으로 보수하면서 남원유지인 강대형이 다시 써서 건 것이다. 정문에서 들어오면서 보이는 ‘광한
루(廣寒樓)’ 라는 편액은 신익성이 쓴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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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성은 광해군 때 인목대비에 대한 폐비 논의 당시 이를 반대하다가 인조반정 때 복권되었다. 그의
아버지인 상혼 신흠도 영의정을 지내고 한문학 의 4대가라서 그런지 글 과 글씨에 뛰어나서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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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廣寒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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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천상의 세계인 옥경(玉京)에는 옥황상제가 살던 천상의 궁전 「광한청허부」라는 궁전이 있고
그 아래 오작교와 은하수가 굽이치고 아름다운 선녀들이 계관의 절경 속에서 즐겼다고 하는 전설에
서 왔다. 이를 재현하여 지은 것이 바로 광한루원(廣寒樓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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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말하면 직녀가 베를 짤 때, 베틀을 고이는 데 사용하였다는 지기석을 호수 속에 넣고, 견우가 은
하수를 건너 직녀를 만날 때 사용한 배를 상한사로 이름 하여 호수에 띄워놓은 것이, 바로 오작교이다.
즉 광한루원은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가에 월궁을 상징하는 광한루와 지상의 낙원인 삼신산이 함께
어울려 있는 우주관을 표현하고 있는 천상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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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명월속에....송강이 애인 자미에게 지어준 시문이다.
恢拓銀河弄明月(회척은하농명월) 은하연못 크게 넓혀 밝은 달과 노닐고
栽培塢竹挹淸風(재배오죽읍청풍) 둑위에 대를 심어 맑은 바람을 들였네
一年南國巡宣化(일년남국순선화) 한해남녁관찰사로 일할적에
只在淸風明月中(지재청풍명월중) 청풍명월속에서 지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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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 앞 연못에는 지상의 낙원을 상징하는 연꽃을 심어서 장식하였다. 옥황상제 딸 직녀 와 견우가
옥황상제에게 죄를 지어서 은하수에 가로 막혀서 만나지 못하고 떨어져 살다가 일년에 칠월칠석날 단
한 번만 만난다는 사랑의 다리인 ‘오작교’를 연못 위에 다가 설치하였는데 돌다리는 4개의 무지개 모
양의 구멍이 있는 홍예로 양쪽의 물이 통하게 되어 있는, 한국 정원의 대표적인 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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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가 건설된 것은 조선 초 세종 당시 명재상으로 유명하였던 황희(黃喜)로부터 비롯되었다. 고려
왕실의 족보를 관정하던 전중감의 황공유(黃公有)가 무신란 으로 이의방이 집권하자 이를 피하여 남
원으로 낙향 하였고, 황희의 6대조인 황감평이, 일재(逸齋)라는 작은 서실을 지어서 책을 벗 삼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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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登廣寒樓 (등광한루)김병연 (蘭皐 金炳淵 김삿갓.金笠 1807~1863)
·千里筇鞋孤客到(천리공혜고객도)지팡이와 짚신뿐인 외로운 나그네가 천리 길 찾아드니
四時茄鼓衆仙遊(사시가고중선유)신선들은 사시장천 장구 치며 노는구나
銀河一脈連蓬島(은하일맥연봉도)은하수와 봉래섬이 한 줄기로 이었으니
未必靈區入海求(미필영구입해구)구태여 바다의 용궁을 찾아 무엇하리오
南國風光盡此樓(남국풍광진차루)남국의 경치는 이 광한루에 다 모였는가
龍城之下鵲橋頭(용성지하작교두)용성 아래의 오작교 머리에 섰네
江空急雨無端過(강공급우무단과)마른 강에 소나기 퍼 붓고 지나가니
野闊餘雲不肯收(야합여운불긍수)들판 적신 남은 구름 거치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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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廣寒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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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주변에서 글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그 후에 황희(黃喜)
가 판 한성부사로 재직당시 양녕대군의 폐출반대를 주장하다가 처음에 교하로 유배되었으나 후에 고
향이던 남원부로 유배되어서 3년 9개월 동안을 남원에 머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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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419년에 황감평이 지은 서실이 너무 적어서 헐어 버리고는 그 자리에다가 정자를 새로 짓고는
광통루(廣通樓) 라고 이름하면서 광한루의 역사가 비롯 되었다. 황희는 당시 죄인으로 귀양을 온 몸
으로 어떻게 정자를 지을 생각을 하였을 까?, 당시 상황을 재현 하여보자. 남원을 보면 남원의 산수를
돌아보면 요천의 물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흐르면서 남원부를 감싸고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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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요천물은 '여뀌'가 지천으로 피어 요천으로 하였고 요천바닥을 보면 다른 도시와는 달리 기암
괴석으로 아름다움을 연출하여 맑은 계류에 하천가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야생화 와 대나무와 백사장
의 향연과 펼쳐진 너른 들을 만들어 내고 밤이면 대나무가 부딪쳐 만들어내는 소리와 계류 소리가 조
화를 이루면서 운치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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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가까운 산에 떠오르는 달 경치를 바라보면 시흥이 없는 사람도 저절로 풍유를 즐길수 있는 자연
몰입에 빠져들수 밖에 없을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는 조용히 벼슬길에서 벗어나 한적한 삶을
관조(觀照)하려 하였던 황희의 마음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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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1434년 남원부사 민여공(閔汝恭)이 중수하면서 오늘날의 규모를 이루었다고 한다. 1437년 남원
부사인 유지례(柳之禮)가 단청(丹靑)을 하여 새롭게 하였다. 또한 1444년 정인지(鄭麟趾)가 조세에
관한 토지 품등의 문제로 도순찰사로 전라도에 내려와서는 이 곳 남원을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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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는 광통루에 주변 경관의 빼어남을 감상하고 “호남의 승경으로 달나라에 있는 구전 광한청허부
(廣寒淸虛府)가 바로 이곳이 아니던가” 라고 감탄하고는 ‘광한루(廣寒樓)’ 라고 고치게 하여서 오늘
날까지 이 이름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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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廣寒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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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에서 방장섬을 바라보고 한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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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작교(烏鵲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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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는 이 누각에 올라서 감상하다 “오~호 호남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은, 나의 고향의 경승을 감상
하게 되면 나의 고향보다 나은 곳이 없고, 더욱이 이곳 광한루보다 나은 곳이 없더라<용성지(龍城誌)>”
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명나라 장수인 유격장군 심유경이 회의를 주재하였던 장소로도 사
용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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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광한루에 서면 자연경관에 빠져 무아지경에 이른다. 몰아 일제의 세계에 빠져 누구나 감흥에 빠
지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오랜 역사를 거치다 보니 글깨나 한다는 선비치고 이 누각을 찾은 사람이
라면 이곳에 올라서 시를 읊조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광한루의 누정시(樓亭詩)는 누각에 걸려 있는
편액의 수만도 80여 점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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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廣寒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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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에서 방장산을 바라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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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액의 내용은 주로 광한루의 아름다운 풍광을 찬양한 시와 누정기, 중수기 등으로 약 200 여수의 시
문이 전하고, 조선시대 전기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가장 대표적인 편액을 든다면 점필재
김종직·상촌 신흠·옥봉 백광훈·백강 이경여·송강 정철·천장 송대빈 등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선현들
이 남긴 수많은 시가 문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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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누정기는 황희의 아들 황수신이 공무차 근처에 왔다가 세조에 청을 하여 광한루에 올라 아버
지 황희와 이곳에 유배와서 살던 때를 그리면서 지은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시가 이곳에서 지어졌다.
《용성지》에는 수많은 선인의 시가 실려 있으며 ‘광한루의 추월(秋月)은 남원 8경의 하나로 꼽힐 정
도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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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1년인 1455년 7월에 정몽주선생의 증손녀 사위이던 이석형(李石亨)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
여 1년여 동안 재직하면서 관할 지역을 두루 돌아보면서 민정을 시찰하던 때, 남원 광한루에 올라 지
은 시를 소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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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형(李石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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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丈山前百尺樓(방장산전백척루)방장산 앞에 백척 높은 누각 있으니,
丹梯高架碧山頭(단제고가벽산두)붉은 층계 높은 시렁에 산머리가 푸르네.
水連平野煙光合(수련평야연광합)물은 들녘에 이어져 안개 빛과 만나고,
雲捲遙岺雨色收(운권요잠우색수)구름 걷히니 먼 산봉우리 비를 거두네.
臨水却疑天上坐(임수각의천상좌)물가를 내려보니 되려 하늘에 앉는 듯하고,
倚風還似月中遊(의풍환사월중유)바람불어 돌아보니 달 속에 노니는 듯하네.
人間自有淸虛府(인간자유청허부)인간들 스스로 청허부에 살면서도,
何用區區世外求(하용구구세외구)어찌 굳이 세상 밖에서 찾으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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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작교(烏鵲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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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사숙재(私淑齋) 강희맹은 세종의 처조카(姨姪)로 시·그림·글씨에 뛰어났던 인물이다. 세종 때
의 안견·최경 등과 더불어 3절(三絶)이라고 불린 강희안의 동생이다. 그는 세종 29년인 1447년 별시문
과에 장원 급제한 뛰어난 문장가로, 세조 때 《경국대전》성종 때 《동국여지승람》등을 편찬에 참여
할 정도로 학식과 문필이 뛰어났던 인물인데 여름에 올라도 가을을 느낀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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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廣寒樓);~강희맹(姜希孟,1424~1483,조선전기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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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名南國廣寒樓(지명남국광한루) 명승으로 이름 난 남녘 땅 광한루
六月登臨骨欲秋(유월등림골욕추) 유월에 올랐어도 뼛속은 가을이네
桂影忽來天宇區(계영홀래천우구) 갑자기 달 떠오르니 하늘 세상 여기로세
朱欄曲處過牽牛(주란곡처과견우) 붉은 난간 굽은 곳에 견우성이 흐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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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작교(烏鵲橋) :선조15년(1582)에 남원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수리하면서 다리를 새로놓고 오작교라 부르게 됐다. 그
이후 광한루는 정유재란때 불타 1626년 복원됐지만 오작교는 처음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오작교는 길이 57m, 폭 2.4m,
4개의 홍예경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존하는 연지교중 국내에서는 규모가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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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월랑이다.: 월랑은 상하 2층으로 되어 있는데 하층은 5단, 상층 5단의 층층계단이 있고 양측 난간에는 칸살을 설
치하였으며 현관 옥상의 자그마한 지붕은 본관의 높고 큰 지붕과 조화를 이루어 누각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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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작교(烏鵲橋) 소설속의 주인공 춘향이 건넜던 오작교를 밟으며 사랑이 이루어 진다는 속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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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맹은 더위가 시작되는 유월에 남원에 내려와 광한루에 오른다. 요천의 물결이 유유히 흘러가고
강변에는 꽃이 우거지고 나무숲을 이루어서 속세를 떠난 선계의 풍광을 만들어냈다. 밤이 되니 강물
과 숲이 내는 서늘한 냉기가 마치 가을과 같은 분위기를 만든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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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물결 위에 춤추는 달빛이 하늘을 그려낸다. 난간 끝에 화사한 달빛은 견우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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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광한루는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선조 15년인 1581년 이곳에 호
수를 만들고 호수위에 세 개의 섬(三神山, 三神仙島)을 만든다. 삼신산은 중국의 신화에 나오는 산으
로 신선이 살고 있다는 섬으로 불사약이 있다고 하여 진시황이 서복을 보내어 구하여 오게 하엿다는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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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작교(烏鵲橋):오작교를 밟으면 부부 금실이 좋아진다는 전설이 있고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이 어린곳 이기에 많은 사람
들이 찾는 곳이다. 처녀가 아닌 사람이 다리를 건너면 다리가 무너진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처럼 광한루와 오작교는
전설 과 사랑이 어우러져 있어, 춘향이가 단오날 그네를 뛰는 것을 광한루에 올라앉아 이도령이 보고 첫눈에 반해 사랑
이 싹트기 시작 한것처럼 사랑하는 연인들의 다리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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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산은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이라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봉래산은 금강산산을, 방장산은 지리산
을, 영주산은 한라산을 말한다고도 한다. 세개의 섬에는 봉래(蓬萊)산, 방장(方丈)산, 영주(瀛州)산 3
신산이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 ‘속미인곡’에서 ‘천상백옥경’에 관해 읊은 것을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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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섬 세 개가 사다리 형으로 된 예쁜 다리로 연결되어 었어서 각기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봉
래와 방장 두 섬에는 각각 백일홍과 대나무를 심었으며, 중앙의 봉래섬에는 푸른 대나무를 심어서 춘
향이 이도령을 향한 일편단심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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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쪽 오작교 옆의 영주섬에는 작은 정자인 연정을 세웠으며 호수에는 연꽃을 가득하게 심었다.
세 개의 섬 중 가운데 섬이 방장산으로 이 도령을 향한 일편단심 성춘향의 절개처럼 대나무가 울창하
다. 그런데 정철은 48세에 이곳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1년여에 걸쳐 중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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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南原東軒韻(차남원동헌운-남원동헌시에 차운하다)허종 (許琮 1434~1494) 조선 성종 때 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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客裏方知事事艱(객리방지사사간)나그네 되니 일마다 어려움을 이제야 알겠으니
人生何術駐紅顔(인생하술주홍안)인생이 무슨 재주로 젊은 홍안에 머무를 수 있으랴
行伸懶脚尋芳草(행신나각심방초)걷기 게으른 다리 끌고 가며 꽃다운 풀밭 찾고
坐點吟頭數亂山(좌점음두수난산)앉아 쉬면서는 머리 끄덕여 가며 어지럽게 늘어선 산봉우리를 세어 보네
夢枕已?身一世(몽침이암신일세)이 몸의 한 세상 꿈과 같음을 이미 깨달아
醉鄕那得屋三間(취향나득옥삼간)취향에서 초가삼간이나마 어찌 구하려나
朝來驟雨非無意(조래취우비무의)아침부터 내리는 소나기 뜻이 없는 게 아니니
借我忙中半日閑(차아망중반일한)바쁜 속에서도 한나절 한가로이 쉬라는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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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작교(烏鵲橋)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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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당시 남원 관아에 동기(童妓) ‘자미(紫薇)’ 라는 여인에게 머리를 얹어주었다. 송강이 자미를
사랑하자 그녀를 ‘송강의 여자’ 라는 의미로 ‘강아’ 라고 하였다 하는데 송강은 얼마 안 있어 도승지가
되어 서울로 향하며 이도령 처럼 그녀에게 시 한수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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詠紫薇花(영자미화) 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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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園春色紫薇花(일원춘색자미화) 봄빛 가득한 광한루원에 자미화 곱게 피면,
纔看佳人勝玉釵(재간가인승옥채) 옥비녀보다 더 고운 미인을 겨우 보게 되네.
莫向長安樓上望(막향장안누상망) 광한루에 올라서서 장안을 향해 보지 말거라.
滿街爭是戀芳華(만가쟁시연방화) 거리에 모든 이들 다투는 것은 아름다운 네 모습 사모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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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하는 봉래·방장·영주섬을 만들어 봉래섬에는 백일홍,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고, 영주섬에는
‘영주각’이란 정자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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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정(方丈亭)산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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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2년경 남원부사 장의국(張義國)이 재임 중에 광한루를 고쳐서 짓고 오작교를 축조하였다. 그러나
1597년경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면서 왜군(倭軍)들이 남원에 침략하여 남원성 전투를 벌이면
서 광한루도 애군에 의해 불타 없어진 것을 1599년 남원부사 원신이 광한루를 재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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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너무 초라해 1626년에 남원부사 신감(申鑑)이 본래의 규모로 중건하였다. 인조 16년(1638년)
에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2,000평의 경내에는 남원의 뱃길로서 이용되는 요천의 물을 끌어들
여서 성춘향과 이몽룡 두 사람간의 사랑의 소재가 된 시설을 조화롭게 연출하여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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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정(方丈亭)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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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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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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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에 들어서 1963년경에 광한루원 경역을 확장하고 정비하였으며, 1795년인 정조 19년에 남원부사
이만길이 영주각을 중수하였다. 1879년인 고종 16년에 남원부사 이용준이 광한루 월랑을 증축하였다.
1971년에는 오작교 옆에 있는 담을 헐어서 남쪽경역을 확장하고 완월정 및 정문 청허부를 신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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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서쪽 경역을 확장하고 월매집, 춘향관, 서문 등을 신축하였으며, 2008년 1월에 명승 33호로
지정되었다. 광한루원은 우리 조경문화를 상징하는 음양오행사상과 풍수지리사상의 토대 위에서 자
연의 순리를 존중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결합하여 지은 누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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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작교(烏鵲橋)는 잘 알려진 전설로서 직녀는 옥황상제 의 손녀로서 길쌈을 잘하고 부지런하여 상제
님이 매우 사랑하여 은하수 건너편의 하고(河鼓)라는 목동(견우)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직녀와 견우
는 신혼의 즐거움에 빠져 직녀는 길쌈을 짜는 것을 잊고 게을리 하다서 옥황상제의 눈에 벗어나게 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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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는 두 사람이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다시 떨어져 살도록 하고 한 해에 한 번 칠월칠석에만 같이 지
내도록 했다. 은하수로 인하여 칠월칠석에도 서로 만나지 못하자, 지상의 까마귀와 까치들이 이를 애
석히 여겨 하늘로 올라가서 머리를 이어 다리를 놓아 건널 수 있도록 다리가 되어주었다. 즉 ‘까막까
치가 놓은 다리’로서, ‘오작교(烏鵲橋)’라 불렀다고 하는 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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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夜登廣寒樓 (야등 광한루-밤에 광한루에 올라)김집 (金集 1574~1656) 조선 효종 때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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烏鵲橋邊月 (오작교변월) - 오작교 다리 가에는 달이요.
廣寒樓下塘(광한루하당)광한루 아래에는 연못일세
山開一面爽(산개일면상)산은 한쪽으로 시원하게 벌여 있고
牕納半天凉(창납반천량)반공중의 시원한 기운 창으로 스며드네
夜色連空遠(야색연공원)밤경치는 저 멀리 하늘에 이어졌고
川光入望長(천광입망장)냇물 빛도 저 멀리까지 바라보이는구나
徘徊耿無寐(배회경무매)이리저리 거닐며 잠 이루지 못하여
風露濕衣裳(풍로습의상)밤이슬에 옷 촉촉하게 젖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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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상의 옥황상제의 손녀인 직녀가 칠월칠석날 견우를 만나듯《춘향전》의 주인공 성춘향과 이몽
룡이 5월 5일날 오작교에서 만나서 사랑을 이루었던 곳이다. 그래서 인지 몰라도 소설속의 주인공 춘
향이 건넜던 오작교를 밟으며 사랑이 이루어 진다는 속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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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오작교를 건너면 부부라면 사랑이 더욱 굳어지고 새로 만난 사람은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마음
으로 이 다리를 건너니 청춘남녀만뿐 아니라 누구나 건너고 싶어 하는 다리이다.? 오작교는 평교이
나 교각의 형태가 원형의 형태로 된 홍예로 된 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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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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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형태로 된 평탄한 노면으로 호수에다 직녀가 베를 짤 때 베틀을 고이는 돌 지기석(支機石)을 넣
었고 견우가 은하수를 건널 때 쓰는 배인 상한사(上漢沙)를 띄워서 오작교를 상징하고 광한루앞에는
사방으로 돌자라가 월궁이 떠내려가지 않게 업고 있어서 지킴이의 기능을 수행해 전체적으로 우주의
세계, 달의 궁전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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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2년 남원부사이던 장의국은 광한루를 수리하면서 다리를 새로 놓고 오작교라 이름하였다. 그 이
후 광한루는 정유재란 때 불타 1626년 복원되었으나 오작교는 처음 모습 그대로 이다. 오작교는 길이
57m, 폭 2.4m, 4개의 홍예로 이루어져 있고 연지교 중 국내에서는 규모가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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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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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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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판에는 ‘오작교를 1년에 한 번 이상 건너면 부부 금실이 좋아지고, 자녀가 복을 받는다’고 쓰여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오작교를 오고 가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재미 있는것은 처녀가 아닌
여성이 다리를 건너면 다리가 무너진다는 소문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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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에서 나와 남쪽 입구로 이어지는 길을 걸으면 연못 한 가운데에 있는 삼신산으로 들어간다. 다
리를 건너면 바로 ‘영주각’이 있다. 이곳이 영주산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원래의 영주각은 관찰사 정
철이 주도한 광한루 확장공사시 건립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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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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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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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www.namwon.go.kr/tour/index.do?menuCd=DOM_0000010010070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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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전북 남원시 천거동 187-31
전북 남원시 요천로 1447
(지번)천거동 78
*운영시간 안내 : 063-625-4861 대표번호
하절기:04월~10월 / 오후 6시 이후는 무료입장
매일 08:00 ~ 20:00
동절기:11월~03월 / 오후 6시 이후는 무료입장
매일 08:00 ~ 20:00
(참고: 18시 이후는 무료입장, 야경사진 찍을수 있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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