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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 여행] 님그리워 밤새 눈물짓던 춘향사당.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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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는 넓을광廣, 찰한寒, 다락루樓로 누각 정면에 걸린 현판으로 신익성의 글씨이다. 넓고도 차가운 공간으로 해야
할 것이나, ‘광은 넓고도 넓은 우주공간을 의미하며, 한은 맑으면서도 차가운 은하수’를 상징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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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광한루 춘향사당.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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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원(廣寒樓苑)은 우리나라의 4대 누각의 하나이다. 누각의 모델로 삼은 것은 옥황상제가 살았
던 궁전인 [광한청허부]를 지상에 건설한 인간이 신선이 되고픈 이상향으로 삼았다. 예전부터 궁궐
에는 경북궁에 있는 경희루(慶會樓) 가 있지만 왕실의 소유로 왕족 외에는 아무나 사용이 불가능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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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지방에서는 남원의 광한루(廣寒樓), 평양의 부벽루(扶壁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밀양에는
영남루(嶺南樓)를 일러 ‘사대 누각’ 이라고 하였는데 그 중에서 광한루가 단연 으뜸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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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경회루(慶喜樓)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궁궐인 경복궁이라는 궁궐의 건물로 지은 곳이라면 지방의
누각 중에 북한 평양의 금수산 동쪽 청류벽에 우뚝 서 있는 부벽루(浮壁樓)가 있으나 이 누각도 한국
동란 당시 불에 타서 1957, 59년에 다시 불원한 것으로 애석하게도 길이 막혀서 아직은 가볼 수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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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진주 남강에 있는 촉석루(矗石樓) 역시 의기 논개가 촉석루 아래에 있는 의암(義岩)에서 왜장
을 끌어안고 순국한 곳으로 유명하나 안타깝게 6ㆍ25 당시에 불에 타버린 것을 1959년 5월경 복원한
것으로서 복원 역사가 그다지 길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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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 과 청허부는 하늘나라 월궁의 옥경에 들어서면 ‘광한 청허지부’가 있다는 신화적 전설을 상징하고, 계관은
달나라의 계수나무 신궁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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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제일루는 호남에서 제일가는 누각이란 의미로 광한루의 또 다른 별칭이다. 호수호湖, 남녁남南, 차례제第,
하나일一, 다락누樓의 한자를 쓰고 있다. 1855년 남원부사 이상억이 누각을 중수 하면서 걸었다. 현재의 현판
은 전민의원 조정훈(趙定勳)이 쓴 글씨라 전하며 금암봉의 금수정, 용성관의 현판글씨도 썼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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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경남 밀양 강변 절벽위의 영남루(嶺南樓) 역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조선 16경중의
하나이나 지금의 건물은 1844년에 다시 지어 복원 역사가 그리 길지 않아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
하고 있는 것은 매우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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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광한루는 1419년에 지어진 것으로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어 불에 타 버렸으나
1626년 복원한 건물로 거의 40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어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또 하나 광한루원은 정원으로서도 유명해 경복궁 경회루의 지원과 전남 담양군의 조광조의 제자이던
양산보가 낙향하여서 조성한 소쇄원과 함께 한국의 3대 정원을 대표할 만큼 우수한 조경양식을 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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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벽루(浮碧樓),
궁궐에는 경회루(慶會樓)가 있고, 지방에는 광한루(廣寒樓)와 더불어 평양의 부벽루(浮碧樓), 밀양 영남루(嶺南樓),
진주 촉석루(矗石樓),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누각이라 불려지는데 그 중 으뜸은 광한루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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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벽루(浮碧樓),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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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이렇게 아름다운 광한루가 역사속에서 한동안이나마 죄수를 가두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아는이는 많지 않을것으로 본다. 춘향문화의 대표작인 광한루가 일제강점기 때 감
옥과 재판소로 사용됐다는 사실이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부터 1928년까지 18년동안을 일제는
광한루에다가 임시재판소를 설치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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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남원의 토박이들도 잘 모른다고 하는 데 그 사용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기에 그
랬을 가능성이 높다. 판소리의 김정문 명창이 아편을 하였다는 죄명으로 1926년 남원 권번에서 체포
되어서 1개월15일동안 수형생활을 한 광한루 감옥 기록부와 광한루 누각 기둥의 빗장구멍이 이를 알
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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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영남루(嶺南樓)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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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영남루(嶺南樓)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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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촉석루(矗石樓),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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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정원의 사상적, 역사적인 배경은 무엇보다도 자연적 사고방식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즉, 도
교의 신선사상과 음양오행사상, 풍수지리사상이나 유교의 선비사상을 결합하여 자연에 대한 순응을
목표로 둔다. 가급적 인위를 가하지 않고서 자연을 그대로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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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득이 하게 인위를 가할 필요가 있더라도 자연이 살아서 숨 쉬는 것이어야만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평양의 부벽루는 대동강변에서 대동강을 내려다 볼 수 있고, 진주의 촉석루는 남강을 굽어보며, 영남
루는 밀양강을 내려다 보도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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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촉석루(矗石樓),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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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경회루(慶會樓)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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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경회루(慶會樓)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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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광한루는 섬진강을 내려다 보거나 요천을 내려보는 것도 아니고 여느 정자와 누각 과 상당히
다르다. 이는 이런 방식으로 세우려면 요천을 건너 금암봉에 세워야 하였건만 그러나 근처의 동헌과
는 멀어서 어쩔 수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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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광한루원은 바로 앞으로 섬진강의 지류인 요천이 유유히 흐르고 앞으로는 낮은 봉우리인 금
암봉이 덕음봉, 용두산에 인접하고 멀리로부터 지리산의 만복대, 와 정령치, 노고단, 반야봉이 시야
에 들어온다. 뒤편에는 교룡산이 받쳐주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하여 요천의 물을 누정으로 끌어들이고
광한루를 세워서 이를 보완하였고 신선사상을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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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군: 비석의 내용들은 대부분 흔하디 흔한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와 ‘선정비(善政碑)’들이다. 관찰사가 떠나가면서
백성들이 관찰사의 행적을 인정하여 세우는 것이나 그 중에서 실제 선정을 베풀어 진정에서 우러나와 세운 것은 몇 개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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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는 신선사상을 표현한 것으로 이런 신선정원 양식은 생성시기인 조선시대의 제도적인 원인에
기인해 유교문화가 지방으로 분산되면서 형성되었다. 창덕궁이나 창경궁과 같은 나라의 궁궐을 지으
면서도 자연에 순응하여서 거슬리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은 정자나 집을 지을 때 분합문을 달을 때도
열어놓고서 지낼 수 있게 하여 건물이 탁 트여 시원한 멋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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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원의 정원 역시 인공을 가하지 않고서 토양의 구릉을 자연 그대로 살려 만들었고, 드문드문 자
연석의 고인돌을 구릉에다 그대로 놓아두어서 작은 언덕의 공간으로 처리하였다. 현재 누원의 모습은
수차례 확장 사업을 거듭 하면서 차례로 근처의 부지를 매입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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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 성의안의 선정비: 그런데 특기할 만한 것은 부사 상안의의 비석인데 1611년 광해군 3년에 세워진 것이다. 그는 이곳
에서 1607년부터 1611년까지 남원부사를 지낸 인물인데 창녕성씨로 창녕에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한 뒤 정유난 때 홍의장군
곽재우 종사관으로 의병활등을 하였으며 전란이 끝난 후 전후 피해가 가장 컸던 남원부사로 근무하였다.
그런데 상부사의 아들 성이성이 나중에 암행어사로 되어 춘향전 설화내용의 이도령이라는 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
는 나중에 실존 인물로 밝혀진다. 춘향전은 성부사의 아들 성이성이 이후 두 번에 걸쳐서 암
행어사로 왔으며 그가 남긴 문집의 내용이 춘향전에 나오는 어사의 출두 내용 등이 그대로 라
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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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심문(丹心門) : 작자 의병장 조경남 장군의 고전소설 춘향전의 무대인 남원 광한루에 춘향이 사당이 들어서있다.
춘향사당의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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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원 앞에는 송강 정철(鄭澈)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만든 것으로 동서 100m, 남북 59m에
이르는 정방형의 호수와 호수 속에 있는 3개의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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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섬은 영주산으로 영주각이 있으며, 가운데의 섬은 봉래산이고, 오른쪽의 섬은 방장섬으로 육각
형의 방장정이 지어져 있는 등 동양사상속의 삼신산(三神山)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방장섬의 옆쪽
서편에는 광한루의 오작교가 4개의 무지개 형태로 된 홍예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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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제는 1931년을 시작으로 2019년 현재 89년의 역사를 가지는 향토 문화 제전 행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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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사당
오작교를 지나 광한루를 지나고 비석군을 지나면 그 옆쪽으로 자그마한 사당형태의 집이 보이는 데
바로 ‘춘향이의 사당’ 이다. 춘향사당은 춘향의 임향한 일편단심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춘향의 영정
각으로, 1931년 광한루의 동쪽,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 숲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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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춘향사(烈女春香祠):춘향전은 실존 인물을 각색한 고전 소설이다. 사당에는 열녀춘향사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춘향의 굳은 절개를 기리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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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춘향사(烈女春香祠)’김태석(金苔錫)이 전서체로 쓴 현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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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남원의 유지들이 주축이 되어 권번의 기생들 과 힘을 합하여 민족의식 고취 와 춘향의
절개를 이어받고자 설립하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춘향이를 기리기 위해 해마다 5월5일에는 광한
루 완월정에서 춘향제가 성대히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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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민이 애국가 다음으로 인지하고 있다는 춘향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랑이라는 시대적 테
마를 제공하고 있기에 충분하다. 이미 춘향과 남원은 둘이 아닌 하나로 한국 사회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고, 춘향 문화는 21세기 문화 콘텐츠로서 손색이 없는 소재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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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사당은 남원이 춘향의 고장임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남원을 상징하는 배롱나무(백일홍)와 곧은 절개를 상징한다는
대숲에서 광한루를 바라보며 북문의 동쪽 끝에 조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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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사당에 걸려있는 춘향이의 영정을 보고 있노라면 그네 뛰는 춘향’이가 연분홍 치마를 휘날리며
허공으로 다가왔다 멀어지는 광경을 상상해 하면서 감탄해 하게될 것이다. 한번쯤 춘향이가 되어 ‘향
단아, 그네를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서정주 시인의 ‘추천사’ 중에서) 하고 노래하고
싶은 건 대부분의 광한루를 찾은 모든 여인들이 가진 소망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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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전통적으로 주로 여성들의 놀이였던 그네에는 남정네들의 간장을 녹이는 은근함이 있다. 젊
은 여인들이 그네를 구를 때마다 연분홍 치마폭은 허공에서 부풀어 오르고, 저고리 고름은 바람에 나
부끼며, 빨간 댕기 꼬리는 이리저리 펄렁거리니 젊은 총각들의 가슴은 얼마나 설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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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영정 : 춘향 영정은 친일 논란이 있는 김은호(인천 1892~1979) 화백이 1939년 당시 조선권번의기생 김명애를 모델로
하여 제작했는데, 1955년 제작한 논개 영정도 이 춘향 영정과 아주 비슷하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김은호 화백이 춘향 영
정을 기초로 하여 논개 영정을 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여 2006년 1월 전북 장수군과 경남 진주시는 합동으로 친일 논란이 있는 김은호의 작품을 바꾸기 위해 논개 표준영정
제작 작가를 현상 공모하여.충남대 교수인 윤여환 화백의 작품으로 2008년 2월 교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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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영정:~ 친일 작가가 그린 전북 남원시 춘향사당의 '춘향 영정'이 철거된다는 희소식이다. 남원시는 "광한루원 ' 내 춘향 사당에
걸려 있는 이당 김은호 화백의 춘향 영정을 남원 유지들의 원성을 사자 강주수 화백의 작품으로 2020년 12월 31일 연말 안에 교체
할 계획"이라고 7월 28일 밝혔다는 ......
현재의 영정은 1939년 김은호 화백이 그렸다가 6·25전쟁 때 훼손되자 김 화백이 1961년 다시 제작한 실물 크기의 복사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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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령 또한 춘향이 그네 뛰는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것 아니겠는가. 하기야 춘향이 같이 어여쁜
여인이 그네를 타면 뉘라서 반하지 않을까. 그것도 꽃피는 봄 햇살 맑은 날 호남제일루라는 광한루원
에서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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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춘향사당 안에 전시되어 있는 춘향이의 최초 영정은 진주 사람인 강주수가 그려서 기증하고
1939년 가을, 이당 김은호가 그린 영정을 나란히 봉안하였으나 6.25동란을 겪으면서 훼손되어서 196
1년 기증받은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의 영정이 현재까지 봉안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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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엔 논란이 많다. 참고로 인천사람 이당 김은호 화백은 친일 논란에 휩싸여 있는 인물이어
서 장수 논개 영정처럼 이 또한 바꾸어야 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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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이의 붉은 입술과 붉은 치마를 연상케 하는 목백일홍(배롱나무,자미화)꽃이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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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寒樓 (광한루) ~계화 (桂花) 남원 기생.
牛郞一去無消息(우랑일거무소식)정든 견우님 가신 후 소식 없으니
烏鵲橋邊夜夜愁(오작교변야야수)오작교 다릿가에서 밤마다 시름겹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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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이! 춘향이! 또 다른 춘향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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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되엇든 춘향이는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실화다. 조선에서 누가 제일 잘나고 누가 제일 이름이
많이 났느냐 하여도 춘향이 처럼 소설로 노래로 또는 연극과 영화로 이름이 널리 전해져서 남녀노소
또는 유.무식.을 떠나서그 누구든 춘향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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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죽게 된 우리나라 사람들을 다시 살린 이충무공의 이름은 몰라도 춘향의 이름은 모를 사람이 없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무식을 깨워 주기 위하여 한글을 창작한 세종대왕은 몰라도 이 춘향이는 또한 모
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토록 미인의 힘이란 참으로 위대하고 예술의 생명이란 정말 장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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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나온 춘향이가 실화에 있느냐 없느냐 의문을 가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요, 또한 여태까지 세상
사람이 천하 미인이요 열녀라고 떠들어대는 춘향이를 지금에 와서 그가 미인이었느냐 아니었느냐 하
고 논란이 이는 것 또한 역시 실없는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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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제 춘향이를 꼭 실제의 인물로 생각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남원 땅에 가서
고적조사를 하고, 어느 해 여름에는 남원의 기생들이 군청에서 광한루를 수리하는 기회를 타서 마치
진주의 기생들이 의기 논개(義妓論介)의 사당(祠堂)을 지어 놓듯이 춘향각까지 지어놓고 춘추제향을
지내기까지 하게 된 바에야 이 춘향이를 미인이었느냐 하는 말을 쓰는 것도 과히 실없은 일이 아닐것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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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야 어찌 되었던 아직껏 이 세상에는 누구나 물론하고 춘향이는 그 소설에 써 있는 것과 마찬가
지로 천하의 미인이요 만고의 열녀로만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원부근에서는 그와는 정 반대되
는 한 이상한 전설이 지금껏 떠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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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설대로 말한다면 춘향이는 원래가 미인이 아니요 천하의 둘도 없는 박색 이었다는것. 시대는 역
시 춘향전에 나타난 조선의 19대왕인 숙종대왕 시대가 틀림이 없고 관기 월매의 딸인 것도 사실이었다.
여기서 잠깐 춘향의 실체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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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과 이도령 사랑 이야기는 오랫동안 구전되다가 판소리로 전해져 춘향가가 되었고, 소설로도 씌
어졌다. 그런데 춘향전의 구전설화는 매우 다양하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만 해도 백제왕으로부터 절
개를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는 지리산녀 설화를 비롯해 박색 설화, 김우항 설화, 노진의 설화, 성이성
설화, 양진사 설화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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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에서 성이성 설화가 실존 인물로 판명됨에 따라 가장 그럴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춘향전은
여러 설화들이 씨줄과 날줄으로 복합적으로 얽혀 이루어진 명작이라는 점엔 틀림이 없다. 암튼 이런
저런 설화 중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춘향이 추녀였다는 박색 설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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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그 사연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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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언이 지은 해동염사(海東艶史)에는 춘향은 아주 박색이고, 춘향의 몸종인 향단이의 용모가 훨씬
빼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춘향은 삼십이 넘도록 통혼하는 사람조차 없었는데, 어느 날 요천에서 빨래
를 하다가 이도령을 보고는 상사병에 걸리고 말았다. 춘향 어머니 월매는 계책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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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령을 광한루로 유인해 예쁘게 단장한 향단이로 하여금 이도령에게 술을 권하게 한 것이다. 그리
곤 술 취한 이도령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 춘향과 잠자리를 하게 하였다. 월매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도령에게 정표(情標)를 달라고 하자 이도령은 소매 속에 있던 비단 수건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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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이도령은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갔고, 춘향은 이도령을 기다리다 못해 광한루에서 목을
매어 자결하고 말았다. 그녀를 불쌍히 여긴 남원 사람들은 이도령이 떠난 고개에다 장사지내고, 춘향
의 영혼이 편히 쉬도록 자갈로 덮어 두었다고 한다. 이것이 현재 춘향이고개라고도 불리는 박석고개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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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이러한 설을 타고 박석고개 주변에는 춘향의 이야기가 유래하는 지명이 여럿 전한다. 오리정은
이도령이 한양으로 떠날 때 이곳까지 따라온 춘향이가 눈물로써 보낸 곳이라 한다. 또 오리정 북쪽으
로 500m 지점에는 춘향이 이몽룡과 이별한 후 슬픔을 이기지 못해 신고 있던 버선을 벗어 던져 버린
곳이라는 ‘춘향버선밭’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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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우리나라에 예향(藝鄕)이란 타이틀을 단 도시가 적지 않지만, 남원은 정말로 예향(藝鄕)중 예향
이다. 앞서 얘기한 춘향전을 비롯해 흥부전, 변강쇠전 등 우리가 잘 아는 고전 외에도 정유재란 때 남
원성이 함락되자 일가족이 생이별을 하여 중국·만주 등을 떠돌다 천신만고 끝에 남원에 돌아와 온 가
족이 상봉한다는 홍도전(紅挑傳)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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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서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실린 만복사저포기(萬福寺楮蒲記)의 무대도
된다. 남원의 양생이라는 노총각이 만복사에서 부처님과 저포놀이(나무로 된 주사위 같은 것을 던져
승부를 다투는 놀이)를 해 이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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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탑돌이를 나온 처녀와 인연을 맺고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지만, 나중에 이 처녀가 난리
통에 원통하게 죽은 처녀 귀신이었음을 알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그녀의 명복을 빌며 혼자 일생을 마
쳤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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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춘향전과 달리 남자의 정절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춘향이에 대한 이야기는 밤샘을 해도 다
못할 정도로 무궁무진 하지만 유랑자 또한 피곤 한지라 춘향이에 대한 이야기는 예서 접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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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미인도 성춘향 영정은 고전적인 영정 제작 방식이 아닌 우리 민족에게 친근한 전통적인 녹의
홍상(綠
상징으로 빛을 발휘하고 또한 자리잡고 있다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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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의 탄생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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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중앙일보(2014.9.25자)의 계서당 및 춘향전 관련기사다.
'춘향전'속 이도령 '이몽룡'은 실존인물이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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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룡은 실존 인물이었다
이러한 주장을 한 대표적 인물이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였던 설성경 교수인데, 그는 성이
성의 8대 후손 종진(鍾震)이 1863년(철종 14)에 펴낸 『계서일고(溪西逸稿)』와 성이성의 4대손 교와
(僑窩) 성섭(成涉,1718∼1788)이 지은 필원산어(筆苑散語) = 교와문고 3권의 내용을 기초로 하고, 다
른 여러 자료를 면밀하게 검토하여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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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와문고」는 성이성의 4대 후손 성섭이 지은 책으로 그동안 일부분이 「필원산어」라는 이름으로
전해져왔으나, 창녕 성씨 가문의 사위였던 故 이휘교(영남대 중문과) 교수가 3권짜리 전권을 보관하
고 있다가 발견되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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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이 실존인물 성이성(成以性,1595~1664)을 모델로 창작했다는 설성경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두 가지 자료가 있는데, 첫째는 『계서일고(溪西逸稿)』에 실려 있는 <호남암행
록>의 한 대목이다. 호남암행록에서는 53세 때 두 번째 호남 암행어사로 나간 정해년(1647년~인조2
5년) 11월 5일부터 12월10일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는데, 내용은 12월 1일에는 날이 밝자 길을 나섰다.
10리도 못가서 남원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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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으로 가면서 부사 송흥주(宋興周)가 마중하였고, 진사 조경남(趙慶男)의 집에 자리를 마련하였다.
조진사는 어렸을 때 송림사에서 학제를 하던 사람이었다. 기묘년(1639년)에 남원을 암행할 때만 해도
살아계셔서 광한루에서 같이 묶었는데 조경남이 죽고, 첩의 아들 조묵 형제가 나와서 인사 하였다.
광한루를 찾아가니 늙은 기생(老妓) 여진(女眞)과 늙은 서리(老吏) 강경남(姜敬南)이 성이성을 맞이
하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기생들을 모두 내보내고 시중드는 소동과 서리와 함께 눈 내리는 광한루 난
간에 나와 앉아 소년시절을 회상한 것을 기록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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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色萬野(설색만야)흰 눈이 온 들을 덮으니
竹林階白(죽림계백)대숲이 온통 희도다
奶思少年事(내사소년사)어릴 때 소년시절 일을 회상 하고는
深夜不能寢(심야불능침)밤 깊도록 능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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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성경 교수는 “늙은 기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밤잠을 설쳐가며 소년 시절을 회상했다”는 것은
비록 성이성이 직접 옛 연인을 말하지는 않았으나, 앞 뒤 정황으로 보아 틀림없이 “옛 연인을 그리워
한 대목이라고 판단된다”라고 주장했다. 또 옛 연인은 기생이었음이 분명하고, 그 중에서도 관기(官
妓)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즉 옛 연인이 성이성과 이별한 뒤 연정을 지키려다가 관기 사회의 규제 때
문에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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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성이성의 4대손인 교와(僑窩) 성섭(成涉)이 지은 『필원산어(筆苑散語) = 교와문고 3권』』
에서 자신의 고조 성이성이 남원 땅에서 행한 “암행어사 출두사건” 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 고조가 암행어사로 호남에 갔을 때 암행하여 한 곳에 이르니 호남 12읍의 수령들이 크게 잔치
를 베풀고 있었다. 한낮에 암행어사가 걸인 모양으로 음식을 청하니, 관리들이 말하기를 ‘객이 능히
시를 지을 줄 안다면 이 자리에 종일 있으면서 술과 음식을 마음껏 먹어도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속히 돌아감만 못하리라 하였다.
.
곧 한 장의 종이를 청하여,
樽中美酒千人血(준중미주천인혈)노래 소리 높은 곳에 백성의 원망소리 높더라
盤上佳肴萬姓膏(반상가효만성고)술동이(두루미)속의 맛난 술은 천 사람의 피요
燭淚落時民淚落(촉루낙시민루락)소반위의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농 떨어질 때 백성들의 눈물이 떨어지고
歌聲高處怨聲高(가성고처원성고)노래 소리 높은 곳에 백성의 원망소리 높더라
라고 쓰기를 마치고 내놓으니, 여러 관리들이 돌려가며 보고는 의아해 할 즈음 서리들이 암행어사 출
두야를 외치며 달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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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관리들은 일시에 모두 흩어졌다. 당일에 파출시킨 자가 여섯이나 되었다.” 고 기록하여 놓았는
데, 소설 춘향전의 내용은 ‘樽中美酒’를 ‘金樽美酒’로, ‘ 盤上佳肴 ’를 ‘玉盤佳肴’로, 바꾸어 놓았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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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樽美酒千人血(금준미주천인혈)금동이 의 맛좋은 술은 천사람 의 피요.
玉盤佳肴萬性膏(옥반가효만성고)옥쟁반의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燭淚落時民淚落(촉루낙시민루락)촛농 떨어질때 백성들의 눈물이 떨어지고.
歌聲高處怨聲高(가성고처원성고)노래소리 높은 곳에 백성의 원망소리 높더라
설성경 교수는 소설 춘향전은 작가가 미상인데 실제로는 남원지방의 의병장이었던 산서(山西) 조경
남(趙慶男,1570~1641)이 창작 했다고 발표를 하였는데, 그 이유는 산서 조경남의 ‘속잡록(續雜錄)’에
실려 있는, 광해군 때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 장군 조도사(趙都司)의 광해군난정기시(光海君亂政譏
詩)를 인용하여 춘향전을 지었다는 것으로 詩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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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香美酒千人血(청향미주천인혈)맑은 향기의 맛좋은 술은 천 사람의 피요.
細切珍羞萬姓膏(세절진수만성고)곱게 썬 진귀한 음식은 만백성으로부터 짜낸 기름일세.
燭淚落時民淚落(촉루낙시민루락)촛농 떨어질 때 백성들의 눈물이 떨어지고,
歌聲高處怨聲高(가성고처원성고)노래 소리 높은 곳에 백성의 원망소리 높더라
.
□성이성 - 이몽룡 배경의 유사점
춘향은 조선시대 1596년 음력 4월 8일에 태어나 17세기에 사망한 광해군. 인조 때의 실존 인물이며,
또 춘향의 연인 이도령 역시 본래 이름은 청백리 (溪西) 성이성(成以性,1595~1664)으로 광해군. 인조
때의 실존 인물이다. 실존인물 성이성은 남원부사로 부임한 아버지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案義)
의 아들이고, 아버지를 따라 전라도 남원에 머무르는 동안(12세~16세) 같은 또래의 기생 춘향을 사귀
었다. 아버지가 동부승지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남원을 떠나야 했다. 이는 이몽룡이 춘향과 헤어지는
대목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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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성의 아버지 성안의 남원부사의 송덕비
남원 광한루 안에 있는 성안의 부사의 송덕비는 이몽룡 실존설을 증명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이며 그
는 남원에서 가장 오랜 재임기간을 보낸 부사로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가 바로 이도령으로 알
려진 성이성이다.
다만 당시 유교 양반사회의 특성상 양반과 기생의 사랑 이야기가 광대들의 입에 오르내리자 춘향전
에서는 성이성을 이도령이라는 인물로 이름을 바꾸어 등장시킨 것 같다. 즉 춘향전은 춘향과 성이성
등 실존 인물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고사나 설화가 가미되어 집필된 당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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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원에 있는 부사 성안의(安成義)의 선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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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몽룡이 아닌 이몽룡으로 왜 성을 바꾸었을까?
춘향전에서는 성씨 성을 몽룡이 아닌 춘향이에게 붙여주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성이성의 내
력에 대해서 공개를 거부하고 숨기기만 하던 성씨 문중이 최근에 들어 이몽룡이 성이성을 모델로 했
음을 인정했다. 즉, 그 후손들이 기생과 사랑 놀음에 빠진 조상을 부끄럽게 여겨 공개를 막았던 것이다.
이것이 성도령이 이도령이 된 사연이다.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 의병장, 춘향전의 작가로 추정
연세대 국문학과 설성경 교수의 <춘향전의 비밀>에서 저자는 고정관념을 깨고, 춘향전의 원 작가를
실명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가 산서 조경남을 <춘향전> 원작가로 제시했던 근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산서 조경남은 남원에서 70평생을 살았기에, <춘향전> 핵심공간인 남원과 광한루에 얽힌 사건과
상징적 의미에 정통하였다.
②산서는 임병양란 때의 국내외 역사를 57년간 잡록체 일기로 남길 정도로 엄청난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다.
③산서는 이도령 모델인 계서 성이성의 스승이며, 암행어사가 된 그를 광한루에서 만나 함께 보냈고,
이부사 모델인 부용당 성안의 부사와도 교류하였다.
④산서는 남원 기생 춘향의 비극적 사건과 그 사건으로 인하여 생긴 신원(伸寃) 설화의 내력을 알고
있었다.
⑤산서는 <춘향전>의 꽃인 <금준미주 시(金樽美酒 詩)>를 자신의 일기인 <속잡록> 속에 소개하였
고, 그 내용은 <연려실기술>에 인용되었다.
⑥<춘향전>의 구성이나 주제를 볼 때, <금준미주시>는 원작가의 창의력과 강력한 비판의식이 아니
고는 표현하기 어렵다. 또 이 시는 <춘향전>의 역사적 전개에서 변하지 않은 대표적인 구절이다.
⑦산서는 성리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상당한 문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학제에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고, 진사에 급제했다. 그는 다수의 한시 문을 창작하였다.
⑧산서는 순국한 의병장 조헌의 수제자이며, 그 자신도 임병양란 때 적과 맞서 싸우며 왜병을 직접
격퇴한 무패의 의병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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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주장은 작품 내적 요소와 외적 요소를 함께 고려한 결과이다. 먼저 작품 내적 요소에서는 <춘
향전>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인 <금준미주 시>를 찾아 시의 원천을 추적하였고, 작품 외적 요소에서
는 남원 고을을 거쳐 간 부사들 가운데 임기를 제대로 채운 부사를 검토하고, 나아가 남원 부사가 남
원 고을에 재임할 당시 그 아들의 연령이 청소년 시기에 해당하며, 그 아들이 훗날 암행어사가 되어 다
시 남원으로 내려온 인물이 존재하는지를 고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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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계 소설은 모두가 작자 미상이라고 되어 있었으며, 지금까지 <춘향전>도 당연히 미상으로 생
각해 왔다. 그런데 조경남 작가설은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찾아 볼 수 있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
은 조경남 작가설이 사실인가 거짓인가가 아니라 <춘향전> 뿐만이 아니라 모든 고전소설을 다양하
고 새로운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재해석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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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국문과 설성경 교수
30여년 가까이 ‘춘향전’의 문학적 가치와 뿌리를 연구해온 연세대학교 국문과 설성경(58.사진) 교수가
최근 펴낸 ‘춘향전의 비밀’(서울대학교 출판부)은 ‘춘향전’에 관한 기본 상식을 허문다. 8종의 판본과
이본(異本)만도 80종이 넘는 ‘춘향전’은 그동안 천민 광대들이 설화를 엮어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는
데, 설 교수의 주장은 다르다.
.
“‘춘향전’을 읽다 보면 양반들의 생각이 많이 들어가 있는 수작(秀作)임을 곧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광대와 같은 민중들이 아니라 어쩌면 잘 알려진 작가가 쓴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설 교수는 한국 최고의 문학작품이 작가 미상이라는 것을 납득할 수 없어 박사논문을 쓰고 난 후부터
연구에 착수했다고 말한다. 각종 문헌을 찾아 헤맨 결과, 임진왜란과 병인양요를 기록한 ‘난중잡록(亂
中雜錄)’의 저자 조경남이 원작가임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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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잡록(續雜錄)’ ‘역대요람(歷代要覽)’ ‘소견록(逍遣錄)’ ‘병옹자전(病翁自傳)’을 쓴 조경남의 문집과
그의 제자 성이성(1595∼1664)이 쓴 ‘호남암행록(湖南暗行錄)’이 결정적인 단서였습니다. 조경남의 문
집에 자신의 대표작이 ‘춘향전’임이 기록돼 있고, ‘호남암행록’을 통해 이도령의 모델을 찾았습니다.”
.
설 교수에 따르면 이도령의 모델은 남원부사로 재직한 성안의(成安義)의 아들 성이성이다. 실제로 성
이성은 호남 암행어사였으며 1639년, 1647년 두차례 남원을 찾았다는 사실이 ‘호남암행록’에 기록돼
있다. 이런 관계를 토대로 조경남이 당시 설화로 전해 내려오던 기생 이야기와 젊은 암행어사 성이성
을 접목시켜 ‘춘향전’을 창작한 것이라고 설 교수는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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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조경남이 ‘속잡록’에 인용한 시 금준미주(金樽美酒)가 ‘춘향전’의 암행어사시와 같다. 이 책에서 설
교수는 조경남의 ‘원춘향전’(1640년)이 이도령 중심의 이야기였으나 18세기에는 춘향 중심으로 바뀌
었고 19세기에야 이도령-춘향 중심으로 발전해왔음을 밝힌다. 이러한 판본 가운데 가장 정제된 결정
판은 대중들이 가장 즐겨 읽어온 완판 84장본 ‘열녀 춘향수절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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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의 최고 권위자였던 스승 고(故) 김동욱 교수의 학설과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깨뜨리는 연
구결과를 발표한 설 교수는 “‘호남암행록’을 이미 오래전에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턱밑에 숨어 있
었던 비밀을 이제서야 밝혀냈어요. 이번 발견이 고전 문학의 뿌리를 찾아내는 연구를 촉진시키는 계
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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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00.05.15 연세대학교 학보 ‘연세춘추 1392호’에 실린 설성경 교수의 춘향전에 관한 글의 전
문이다.
‘춘향전에는 한국인이 겪은 삶의 곡절과 꿈이 그려져 있기에 이 작품을 민족예술의 꽃이요, 얼굴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부끄럽게도 춘향전의 원작가와 창작 시기를 밝히지 못한 채 문학사의 미
궁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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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새천년을 시작하면서 연세 신국학의 이름으로 춘향전학의 신기원을 마련하게 됐다. 춘향전을 한
국의 고전에서 아시아의 고전, 세계의 고전으로 격상시키려는 새천년 문화예술연구 사업의 하나로 출
간된 필자의 『춘향예술의 역사적 연구(연세대 출판부 펴냄)』에서는 춘향전의 원작가는 산서 조경남
이고, 창작 시기는 1640년이라는 혁신적 연구 결과를 내놓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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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직후의 남원부사들은 빈번히 교체됐다. 당시 남원부사 중에 부용당 성안의 부사 등 몇몇 부
사만이 제대로 임기를 채웠다. 즉, 남원부사로 충분히 재임하다 선치한 수령으로 평가받고, 승직하여
간 부사는 성안의 부사가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남원에서 4년간 재임한 후 전남 광주목사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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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사의 아들 계서 성이성은 남원에서 12세부터 16세까지의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후 그는 출세하
여 암행어사가 돼 두 차례 남원을 암행한다. 1차인 1639년 책방도령일 때 학제 스승인 진사 조경남과
함께 광한루에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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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로 온 1647년에는 스승 조경남이 사망한 후였기에 조경남의 집에서 그 자제들을 만난다. 그날 밤
눈보라를 헤치고 광한루에 가서 늙은 기생 여진과 아전 강경남을 만난 후, 광한루에서 홀로 보내면서
소년시절의 추억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 추억은 스승 조경남의 문하에서 공부하던 추억, 1차 암행어사로 왔을 때 스승 조경남과 나누었던
탐학한 관리, 소년시절의 로맨스, 사별한 스승에 대한 연모 등이었을 것이다.
.
춘향전 어사 출도 대목의 ‘금준미주’시는 당시로서는 과격한 수위의 비판을 담고 있다. 그야말로 폭탄
발언의 성격을 지닌 한시다. 이 시는 그 자체로서는 과격한 내용을 지니고 있지만, 그 사건이 자리한
절묘한 위상 때문에 오히려 작품성을 높여주는 구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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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시는 춘향전 미의식의 극점을 이루고 있기에 후대의 개작가가 삽입한 것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주제의 현실비판성, 구성의 기묘함, 부패와 탐관의 의미 확산 등은 원작가의 몫으로 보아야
하는데, 이 한시는 조경남이 자신의 『속잡록』 1622년 2월 3일 기사에서 소개했다. 광해군 15년, 명
나라 장수 조도사가 우리나라에 와서 정치가 혼란한 것을 보고 읊은 것임을 조경남은 주석에서 소개
했다. 이 내용은 의미가 강력하기 때문에 이긍익이 『연려실기술』 23권 광해난정 조에서도 재인용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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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서 조경남을 1640년에 춘향전을 창작한 대문호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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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조경남은 춘향전의 핵심 공간인 광한루의 역사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진사 출신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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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조경남은 『난중잡록』, 『속잡록』을 남겼는데, 이들은 임병양란에 얽힌 국내외의 사실을 57
년간에 걸쳐 일기 형식의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전란사만이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의 제반 상
황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잡록은 『조선왕조실록』의 사초로도 활용됐을 정도로
기록에 있어서의 역사적 객관성과 신빙성을 공인받았다.
.
셋째, 조경남의 잡록을 보면, 그는 폭넓고도 세밀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조건을 갖춘 그는
남원의 기생 춘향에 얽힌 사건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특히, 춘향이야기가 그 이후
남원지역에서 신원설화로 강력하게 전승됐기에 그는 기생 춘향의 신원설화화 과정을 알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
넷째, 조경남은 이도령 모델인 성이성과는 긴밀한 사제 관계였다. 그는 암행어사 성이성으로부터 존
경을 받았음이 성이성의 일기에서 확인된다. 그러므로 그는 춘향전 인물 구성의 중요 인물인 이도령
모델이 된 성이성을 가장 잘 아는 문인이다.
.
다섯째, 조경남은 춘향전의 백미인 ‘금준미주’시에 정통한 인물로서, 이 시를 국내의 문헌에 최초로
소개하였다. 특히, 그는 이 시가 가진 주제를 광해난정을 풍자한 것으로 해석했으며, 이 기록을 광해
난정의 최극점인 인조반정 직전의 일기에 담았다.
.
여섯째, 조경남은 상당한 문장력이 있었으며, 우국충정이 깊었던 인물이다. 그의 문장력과 인품은 그
문하에서 성장한 성이성에게 감화를 끼쳤을 수 있고, 이는 성이성이 일찍 급제하고 암행어사가 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
일곱째, 조경남은 조국과 고향이 왜적에 짓밟힐 때 몸을 던져 항거한 의병장이다. 따라서 그는 누구
보다 선악 포폄의 관점에서 필치를 발휘할 수 있었기에 남원에서 일어난 ‘열녀와 충신의 이야기’를 작
품화하기에 적절한 문인이다.
.
이런 이유가 합당하다면, 이제 우리는 더이상 춘향전을 ‘작가 미상’의 작품으로 버려둘 수는 없다. 조
경남과 같은 탁월한 작가를 춘향전의 원작가라면, 우리는 춘향전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고, 춘향
전을 세계의 고전으로 올려놓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성이성(成以性,1595~1664)
본관이 창녕으로 아버지는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낸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安義)이고, 어머니
는 예안김씨로 백암 김륵의 종손녀로서 김계선의 딸이다. 자는 여습(汝習)이며, 호는 계서(溪西)이다.
.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업에 열중하였는데, 백부인 진사공이 늘 “이 아이는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킬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12살 때 남원 부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다가 우복 정경세를 찾아보았
는데, 정경세가 기특하게 여겨 “자식이 이와 같으니 이는 그대가 평생토록 걱정이 없다고 할 것이다.”라
했다한다. 그는 자라면서 학문에 더욱 증진하여 김굉필(金宏弼)·이연경(李延慶)의 학통을 이은 강복
성(康復誠)의 문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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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인조 5)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부정자를 시작으로 하여, 1635년(인조 13) 정언·부수찬·부교
리를 거쳐 이듬해 지평을 지냈다. 1637년(인조 15) 헌납이 되어 윤방·김류·심기원·김자점이 나라를 그
릇되게 이끌고 충성스럽지 않다고 그 죄를 논하기도 했다. 특히 사간을 역임하는 동안 직언으로 일관
하여 주위의 시기를 받아 승진이 순조롭지 못하기도 하였다. 외직으로는 진주·강계 등 네 고을을 다스
렸는데, 진주 부사 때는 어사 민정중이 그가 선정을 베푼다고 보고 하여 표리(表裏 : 옷감)를 받았고,
강계를 다스릴 때에는 삼세(蔘稅)를 모두 면제해주어 1660년 평양감사 임의백이 관서활불(關西活佛:
관서지방의 살아있는 부처)라고 칭송하기도 하였다.
.
그는 암행어사를 4회(43세 경상도진휼어사, 호서암행어사, 45세 호남암행어사, 53세 호남암행어사)
를 하였으며, 근면, 검소, 청빈으로 이름이 높아 조선시대 215명중의 한명인 청백리로 녹선 된 후 부
제학으로 추증 되었고, 저서로는 『계서유고(溪西遺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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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 성이성이 문과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시험의 답안지가 규장각 소장 문헌에 보관되어 있으
며, 성이성 이 조정으로부터 암행어사 직을 명받고 암행어사 출두 시 얼굴을 가리고 그 직분을 행했
다는 얼굴가리개 사선(紗扇)이 그의 13대 후손 성기호 씨에 의해 현재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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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의(成安義,1561∼1629)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자는 정보(精甫)이며, 호는 부용당(芙蓉堂)이다. 어려서부터 정구(鄭逑)에게
서 수학을 했다. 1591년(선조 24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선조 25, 1592년)이 일어나자 의병
5,000명을 모집하여 왜적과 싸웠다.
.
1597년(선조 30년) 지평, 남원부사를 역임하였고, 1612년(광해군 4년) 광주목사(光州牧使)에 있을 때
소송(訴訟) 처리를 소홀히 다루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으로 복직되어
사성을 역임하였고, 1628년(인조 6년) 우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나아가지는 못했다. 후
에 이조판서, 대제학이 추증되었고, 저서로는 『부용당일고』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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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충신인 두문동 72현중의 한명인 성만용의 7대손으로서, 증조의 이름은 익동(翼仝)이고, 조부
의 이름은 윤(胤)이고, 부친의 이름은 궤(?)인데 모두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모친은 장연(長淵)
노씨(盧氏)이니 호조참의 사영(士英)의 따님으로 내력이 오랜 집안에서 태어나 유덕한 가문에 배필
이 되어 부인과 어머니의 역할에 모두 그 마땅한 도리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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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년(1591)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오른 후,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 곽재우에게 종군하여 정인홍등과
화왕산성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고, 상배(喪配)하자 퇴계의 아들과 사돈인 경상우도관찰사 백암(栢巖)
김륵(金?)이 형의 손녀를 시집보내 백암공의 종손서가 되었고, 임진왜란 때 성안의는 가족들을 창녕
에서 처가가 있는 영천군(榮川郡: 현재의 영주) 이산면으로 피신시키면서 자연히 창녕에서 영주로 오
게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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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성의 아들 5형제 중 맏아들이 닭실 입향조 충재 권벌(權?)선생의 후손인 석계(石溪) 권석충(權碩
忠:1606(선조39)-1634(인조12)의 딸<창설재 권두경(蒼雪齋 權斗經)의 고모>와 혼인을 하자 친정에
서 닭실마을(유곡)과 가까운 가두들(가평)에 계서당(溪西堂)을 건립하는데 도움을 주어 후손들은 자
연히 봉화에서 살게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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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www.namwon.go.kr/tour/index.do?menuCd=DOM_0000010010070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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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전북 남원시 천거동 187-31
전북 남원시 요천로 1447
(지번)천거동 78
*운영시간 안내 : 063-625-4861 대표번호
하절기:04월~10월 / 오후 6시 이후는 무료입장
매일 08:00 ~ 20:00
동절기:11월~03월 / 오후 6시 이후는 무료입장
매일 08:00 ~ 20:00
(참고: 18시 이후는 무료입장, 야경사진 찍을수 있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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