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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을 때는 죽어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나이 먹어야 보이는 게 있어서 원고를 시작했다. 나 자신도 폭풍과도 같은, 때로는 죽고 싶을 만큼 절박했던, 남들과 비슷한 20대를 거쳐왔으니, 젊은 시절을 모르는 것도 아니기에 던지게 된 주제다. 이를테면 프란치스코 교황이 몇 년 전에 내놓았던 책 <세월의 지혜> 같은 류의 얘기, 늙음의 축복이나 지혜 같은 것들을 털어놓고 싶었다.
나이 먹으면 맨 먼저 보이는 건 역시 ‘죽음이다’. 체력은 40대 말에 한 번 꺾이고, 60대, 70대에 한 번씩 꺾인다고들 하지 않는가? 그러고 나서는 죽음이다. 선배들의 말이 생각난다. 70대가 되고 보니, 주위에 친구들이 보이지 않더라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말마따나, 죽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노년엔 죽음을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 그러면 삶은 더 장엄해지고, 더 중요해지고, 더 비옥해지고, 더 풍요로워지고, 더 즐거워진다. 이러니, 하루라도 빼먹지 말고 죽음을 생각하며 남은 생애의 끝을 향해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나이가 먹으면 ‘사람이’ 보인다. 애써 보려고 하지 않아도,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만 봐도 사람의 됨됨이가 짐작되고도 남는다. 아마도 반풍수쯤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과거에 만났던 사람들의 이해되지 않던 것도 그즈음이 되면 저절로 이해가 된다. 아, 그 사람이 이래서 그랬구나, 하는 식이다. 선입견일지도 모르지만, 경험치가 쌓여 자신도 모르게 판단하게 된다. 그래서 요즈음은 보이는 대로 보려고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가급적이면, 말도 시켜보고, 밥도 사주고, 그 사람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애써 노력한다. ‘애써’라는 표현을 나도 모르게 쓰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이 나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말마따나,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는 우를 범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노력할 수밖에 없다. 늙어서도 공부하고, 늙어서도 배워야 하는 이유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처럼 살아야 늙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은 ‘과거’다. 늙은 백성의 눈엔 지나온 과거의 발자취가 늘 밟힌다. 지나간 옛날의 추억 말이다. 나이 들어갈수록 부모가, 자식들이, 때로는 친척, 친구들의 얼굴이 더 밀도 있게, 선명하게 보인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잘못했던 일들, 힘겹게 자식 키우던 기억들, 직장 생활에서 막무가내로 나갔던 일들, 이를테면 인생의 회한 같은 것들이다.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기억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돈다. 그럼에도 지나간 일에 만약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젊을 때야 어디 과거 같은, 그런 게 보이겠는가? 오롯이 희망찬 미래만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걸 준비해야 할 터다. 그러니 주위가 보이겠는가? 나도 그랬다.
먹고살기에 바빴다. 하지만 노년이 돼서야 보이는 과거가 아집이 된다면, 그때부터 그 시간은 축제가 아니라 숙제가 될 터다. 성공하면 고집, 실패하면 아집이 아니다. 속물처럼 에고에 빠져서는 안 된다. 강요해선 안 되는 게 과거다. 라테는 곤란하다. 나도 모르게 틀딱이 돼서는 안 된다. 그저 가슴속에 간직한 채 기다리면 된다. 그들 역시 똑같은 회한의 시기를 거칠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에 진보가 어디 있겠는가?
무한 반복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 같다. 진보라니, 그런 개 풀 뜯어 먹는 소리가 어디 있나? 그런데도 우린 역사의 진보를 꿈꾼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으면 보이는 게 또 여유다. 중요한 게 하나도 없다. 여유를 가지고 길게 내다보자. 그러면 열릴 것이다.
24년 갑진년의 봄은 너무 빨리 떠나고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그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또 지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