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립성 저혈압 (외 1편)
윤성관
일어서려고 하는 순간 머릿속 퓨즈가 예고 없이 끊어지며 세상은 암전(暗轉)되고 뿌리 뽑힌 채 말라가는 나무 사이를 엉금엉금 기어 숲을 헤쳐 나오면 침대 머리맡에서 슬픔이 물끄러미 내려다보곤 했어 추워도 곁불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더워도 그늘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은 채 두 다리 꼿꼿이 세워 살아온 생, 어느 날 새 한 마리가 진화(進化)의 열쇠를 훔쳐 날아간 뒤 볏짚이 되어 드러누운 채 텔레비전 속 세상을 배회하는 동안 더 이상 새들을 찾으려 하지 않았어 또렷이 느낄 수 있어 퓨즈를 이어보려는 미련을 잠재우며 침대 아래로 무럭무럭 뻗어가는 슬픔의 뿌리를
명동성당을 지나며
붉은 벽돌이 비를 맞으며 오들오들 떨고 있다 집회 장소로, 술집으로 손목을 끌던 사람들은 밤비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기억하지 않을 말과 구호가 난무하던 거리는 고양이도 까마귀도 울고 갈 뿐 바닥에 드러누운 전단지의 빨간 전화번호가 선거 벽보 속 얼굴처럼 섬뜩하다 최루탄에 쫓기던 사람들의 피난처, 울분이 스크럼을 짜고 함성이 종주먹을 내질러 어둠을 걷어낸 듯 보였지만, 살기 위해서 살아보려고 눈 감고 귀 닫는 사이 세상은 돌이킬 수 없이 허물어졌다 타락한 자는 타락을 모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속이 텅 빈, 철탑 꼭대기의 십자가는 대신 울어 주기에 너무 늙어버렸다 눈감은 자여, 촛불은 비를 멈추게 할 수 없다 얼어붙은 땅을 녹일 수도 없다 매립된 진실에서 꽃이 피길 기다리지 마라 깜깜한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낡은 구두들이 눈을 껌벅거리며 명동역 지하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깨어 있는 자여, 밤에도 우리는 깨어 희망 한 움큼 쥐고 어깨를 결어야 한다 그리고 바라보아야 한다 침몰했던 진실이 드러나는 날 어둠의 정수리를 뚫고 심장으로 내리꽂히는 정의의 시퍼런 창(槍)을 ―시집 『다소 낭만적인 질문』 2024.10 ------------------------ 윤성관 /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 졸업. 2020년 《애지》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호박꽃이 핀 시간은 짧았다』 『다소 낭만적인 질문』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