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비노를 중심으로 문 대표 사퇴론은 현재진행형이다. 메르스 사태로 관심 밖으로 밀려나긴 했지만, 박주선·조경태 의원 등 비노 중에는 여전히 ‘친노 패권주의’에 반감과 분노를 나타내는 세력이 적지 않다. 재·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천정배 의원을 중심으로 한 호남발 신당 창당론도 끊이지 않고 있다.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호남신당’이란 의제가 거리낌없이 나오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호남에 반(反) 문재인 정서가 만연하고 있다는 반증일까.
4·29 재·보선에서 천정배 후보를 지원했던 ‘원조 친노’ 염동연 전 의원에게 호남 민심의 실체를 물었다. 그는 신당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 실패는 첫 단추 잘못 꿴 것”
2002년 4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노무현 후보와 염동연 캠프 사무총장, 유종필 언론특보가 회의를 갖고 있다. |
—노무현 정권 탄생의 일등공신인데, 지금의 친노와는 꽤 거리가 있습니다.
“친노는 언론이 붙인 이름 아닙니까? 그게 친노무현이 아니라 친문(문재인)이죠. 친노 중에 노무현 어려울 때 도와주거나 함께한 사람 한 명이라도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고 싶습니다.”
—문재인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이 ‘제일 친한 친구’라 했고, 노무현 정권의 첫 민정수석이며 이후 대통령비서실장까지 지냈는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첫 민정수석, 그게 제일 문제였다는 겁니다. 노무현 정권이 왜 실패했습니까. 첫 청와대 인사에 문제가 있었던 겁니다. 노무현을 대통령 만들겠다고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미래를 그려 온 사람들을 옆에 두지 못하고, 막차 탄 사람들을 데려다 놓는 바람에 모든 일이 어긋나기 시작했어요.”
선거전이 한창이던 2002년 11월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기자회견을 통해 “나라종금이 퇴출 위기에 몰리자 정·관계 로비에 나섰고, 노무현 후보의 측근인 염동연, 안희정 등이 금품을 받았다”고 주장했고 검찰은 즉시 조사에 착수했다.
대선이 끝나고 인수위원회가 활동하던 2003년 초까지 나라종금 사건은 전 언론을 뒤흔들었고, 염 전 의원과 안희정 충남지사는 공식적으로 인수위나 청와대에 참여하지 못하고 조용히 지낼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선거전이 한창일 때, 언론과 여당에서는 노무현 후보가 후보 정무특보인 염동연을 정권의 첫 정무수석으로 임명할 것으로 예상해 왔다.
—당시 대통령이 뭐라고 하던가요.
“당선 며칠 뒤에 당선자가 나와 안희정, 이광재를 저녁 먹자고 불렀어요. 청와대로 데려가 일을 해야 하는데 나라종금 사태가 잦아들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희정이와 나는 ‘우리가 청와대 들어가는 것이 대통령에게 도움이 안 될 것 같으니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럼 정무수석은 누굴 시켜야 하냐고 하더군요. 나를 정무수석으로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유인태를 시키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정권 초기 인사에 깊숙이 개입한 셈이군요.
“워낙 당선자와 막역하다 보니 늘 하는 얘기가 그거(인사) 아니겠습니까. 특히 나는 빅3(검찰총장, 경찰청장, 국세청장)가 중요하다고 강조했고, 그 셋은 지역안배를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김각영 검찰총장처럼 임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공직자는 그냥 둬서 ‘민주당 2기 정권’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점, 또 친북·반미 정권 아니냐는 미국의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 한승주 고려대 총장을 중용해야 한다는 점 등 중요한 인사는 다 논의했습니다.”
롯데호텔에 線 인사委 있었다!
—당시 여당에 공식적인 인사위원회가 있지 않았습니까.
“대선 직후 당이 인사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김태랑 최고위원이 위원장을 맡고 이상수, 이미경 등 선수(選數)가 꽤 있는 의원들로 구성했는데, 나도 위원으로 들어갔죠. 국회의원도 아닌데 실세라고 알려져 있다 보니 그리된 거죠. 근데 그 위원회는 명목상의 위원회고 사실 대통령이 따로 만든 인사위가 있었어요. 김원길, 문희상, 신계륜, 정동채, 유인태, 그리고 나까지. 대통령이 믿는 사람만 모아 놓은 거였습니다.”
—‘비선’이네요.
“비선이라 하긴 좀 뭐하지만… 언론에 한 번도 알려진 적이 없습니다. 소공동 롯데호텔에 방을 빌려 놓고 보안을 철저히 했지요. 정권 창출하고 나면 이런저런 곳에 보내야 할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공직은 물론 산하 공기업까지 인사 및 추천을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최고 실세들만 딱 모였던 거라고 할 수 있죠.”
—문재인, 이강철 등의 이름은 없었군요.
“이강철은 여러 이유로 대통령이 깊이 신뢰하지 않아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근데 세 번째 모임을 하던 날, 문재인이 떡하니 나타난 겁니다. 당선자가 문재인을 데려와서 ‘부산에서 활동한 문재인 변호사를 올라오라 해서 이 모임에 정규 멤버로 참석토록 했다’고 말하더군요. 나는 문재인 실물을 그날 처음 봤어요. 몇 년 전부터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는 있었는데 선거기간에도 본 적이 없고 사진으로만 얼굴을 알고 있었습니다.”
—기분이 유쾌하진 않았겠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대통령이 그렇게 몇 번이나 도와달라고 할 때 모른 척하고, 심지어 대통령이 되더라도 절대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던 사람이 당선되고 나니까 딱 나타난 겁니다. 이중적 태도라는 생각이 안 들겠어요? 어찌나 화가 나던지. 대통령한테 ‘이 모임 더 하면 언론에 노출될 것 같다, 비선 논란이 생길 수 있으니 이 모임은 그만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해 버렸습니다. 그 후 모임은 없었습니다. 명분은 그랬지만 솔직히 내 사심(私心)이 있었던 거죠. 그런 사람과 함께 앉아서 국사를 논의하기 싫었던 겁니다.”
이때부터 염 전 의원은 문재인 대표와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관계를 격정적으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염동연 전 의원은 전남 보성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던 부친 덕에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청소년기에 상경해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면서 정치현실에 눈을 떴고, 한국청년회의소(JC)와 새시대새정치청년연합(연청) 등 조직에 몸을 담고 활동에 나서 문희상, 김홍일 등과 함께 일하며 동교동계 인맥을 쌓아 나갔다. 그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처음 만난 것은 1991년이었다. 부산지역 국회의원(13대)이었던 노무현은 연청 사무총장이던 염동연에게 “연청에 깊은 관심이 있다”며 찾아왔다. 그러나 염동연 사무총장은 노무현 의원을 그다지 환영하지는 않았다. 그의 설명이다. “연청이란 김대중 총재의 분신과도 같은 조직이었습니다. 김대중 총재의 전위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죠. 김대중 선생을 광신도처럼 믿어야 하는 조직이란 말입니다. 근데 노무현은 그런 것 같지 않았습니다. 연청이 워낙 큰 데다 충성도가 높은 조직이고, 내가 김홍일과 막역한 사이라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보니 나한테 관심이 있었겠지요. 어쨌든 가입은 거절했는데 노무현이 나이도 동갑이고 하니 자기와 친하게 지내자고 하더군요. 성향과 기질도 비슷하고 해서 그때부터 가족끼리도 많이 만나고 개인적으로 친하게 됐습니다.” 이후 염 전 의원은 영남 출신의 혈기왕성한 야당 정치인 노무현이 큰일을 할 사람이라고 눈여겨보게 된다. 1997년 대선 당시 염 전 의원은 조직책임자로 영남지역 선거유세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노무현 의원이 울산으로 지원유세를 왔다. 염 전 의원은 그때 둘이 만난 자리에서 “만약 DJ(김대중)가 이번에 져도 다음 대선에선 나이 때문에 출마하지 못할 것”이라며 “당신(노무현)은 영호남을 아우를 수 있는 인물인 만큼 다음 대선에 도전하라, 내가 돕겠다”고 제안했다. 이후 DJ정권이 출범하고 김홍일씨 등 정권 실세와 가까웠던 염 전 의원은 노무현을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적극 추천한다. 해양수산부 장관이 된 노무현 장관은 2000년 9월 염 전 의원을 불러 “그때의 약속대로 캠프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염 전 의원은 여의도 금강빌딩에 사무실을 얻고 실무자로 젊은 보좌관들인 안희정, 이광재, 서갑원, 백원우 네 명을 불러 이른바 ‘금강팀’을 결성한다. 이 다섯 명이 금강팀의 원년 멤버다. |
노무현, 문재인을 부산시장 후보로 영입하려 해
—처음 문재인이라는 사람을 접한 때가 언제입니까.
“200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후보 선출 전당대회와 당내 경선이 2002년 4월에 있었는데, 이 전당대회를 준비할 때였습니다. 2001년 10월 무주 덕유산리조트에서 지지자 집회를 가졌는데 원래 1500명 정도로 예상했던 것과 달리 3000여 명이 와서 숙소도 모자라고 난리였지요. 이때 노 후보가 기분이 좋고 흥분이 됐는지 연설에서 원고에 없던 얘기를 합니다. 2002년 4월에 대선후보가 결정되고 6월 초에 지방선거를 치르는 스케줄인데, ‘내가 대선후보가 되면 지방선거에서 PK(부산, 경남, 울산) 지역 광역단체장 중 하나를 당선시키겠다, 실패하면 후보 사퇴하겠다’고 말을 한 겁니다. 모두 놀랐고 우리 입장에선 정말 부담스러운 얘긴데, 본인이 무슨 생각이 있나 보다 하고 믿을 수밖에 없었죠. 근데 후보가 되고 나니 당장 지방선거가 걱정되는 겁니다. 안 그래도 당내에서 공격받는 후보였으니까요.”
—그때 노 후보는 문재인을 생각했던 걸까요.
“사실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때 노무현의 생각은 YS(김영삼) 측근인 박종웅 의원을 데려오는 거였습니다. 노무현은 종종 ‘DJ가 못한 일을 내가 할 수 있다’고 얘기하곤 했어요. YS 밑에서 자라서 DJ의 품으로 온 사람이기 때문에 영호남을 아우를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YS를 찾아가서 박종웅 의원을 부산시장 후보로 내 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근데 결국 실패했지요. 다른 후보를 찾아보려니 그나마 경쟁력 있는 사람이 이기택, 신상우 정도인데 노무현이 이분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문 대표는 인지도가 없었죠.
“4월에 노무현이 대선후보가 되면서 인터뷰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묻는 질문에 부산에서 같이 일해 온 문재인 변호사라고 답했고, 그때부터 문재인이라는 사람이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노무현의 일거수일투족을 언론이 주목하던 시기니까요. 사실 나는 그때도 별로 인식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같이 변호사 사무실을 했던 친한 사이고 경선에서 좀 도와달라고 여러 번 얘기했는데 계속 거절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노 후보가 문재인을 내보내자고 하더군요. 어차피 안 될 거라면 이기택, 신상우보다는 새로운 인물을 내보내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재인이) 거절했군요.
“단순히 거절했으면 그렇게 기분 나쁘지도 않았습니다. 그 사람 설득하러 갔던 캠프 후배가 이렇게 전하더군요. ‘제발 나한테 그런 소리 좀 하지 마라, 난 정치에 관심 없다, 변호사 하게 좀 놔 둬라, 노무현이 대통령 돼도 그 근처에 얼씬도 안할 것이다’라고 했다고 말입니다. 노무현이 대통령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거죠. 그때 친구에게 그런 말을 들었던 노무현의 흔들림과 아픔은 옆에서 본 사람으로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돼도 근처에 얼씬도 안 한다더니…
2003년 4월 28일 나라종금 로비의혹과 관련해 검찰 조사를 위해 출두하는 염동연 전 의원. 그는 이 사건으로 대선 일등공신임에도 불구하고 공직에 나서지 못했다. |
“그때 우리가 겪은 어려움만 해도 책 여러 권 나올 겁니다. 4월에 경선에 이겨서 대선후보가 됐는데 당이 선대위를 10월에야 구성한 겁니다. 일부 언론에서는 비선이 이랬다저랬다 하는데, 당 조직이 안 만들어지는데 어떻게 합니까. 측근들이 움직여야죠. 동교동계는 후보직 내놓으라고 난리인 데다 당에서는 후보실 여직원 월급도 알아서 내라고 하는 지경이었습니다. 우리 캠프 사람들이 그렇게 주변에 조금이라도 도와달라고 부탁하다 번번이 거절당하고 유리걸식(流離乞食)하는 동안 문재인, 이호철은 그냥 변호사, 여행사 하게 나 좀 내버려두라고 했답니다. 10월 돼서 당 선대위가 발족하고 나서야 마지못해 그 두 명이 이름 올린 겁니다. 말 그대로 막차 탄 거죠. 그나마 막차라도 타 줘서 고맙다고 생각했습니다. 직접 얼굴을 보진 못했습니다.”
—그 두 분은 정권 초기 요직에 임명됐죠.(문재인 민정수석, 이호철 민정1비서관)
“노 대통령이 그렇게 캠프에서 고생해 놓고도 비캠프 출신들을 중요 자리에 앉혔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사실 그때 여당 후보였던 만큼 예선(경선)이 본선(대선)만큼 중요했고 그렇게 경선 좀 도와달라고 해도 꿈쩍도 않던 사람들인데 말이죠. 이강철은 지금도 문재인 얘기만 하면 육두문자를 날리곤 합니다. 캠프 출신들이 문재인을 어떤 눈으로 보는지 다른 사람들은 상상 못할 겁니다.”
—어려울 때 외면했다면 그럴 만도 하겠군요.
“아닙니다.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나라종금 사건으로 구치소에 100일간 있다가 2003년 4월에 나왔어요. 나와 보니 당이 깨져 열린우리당이 생기고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호남에서는 배신자라며 인기가 바닥인 상황이었죠. 2004년 4월이 17대 총선이니까 당이 총선준비를 해야 하는데 도저히 이 상태로는 지지를 얻기 어려운 상황인 겁니다. 청와대에 들어가서 대통령한테 얘길 했어요. 청와대나 정부에서 인지도와 인기 있는 사람들을 총선에 내보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1년 가까이 벼슬살이 했으면 은혜도 입었고 이제 보은을 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대상에 문재인 민정수석이 있었나요.
“문재인 민정수석, 정찬용 인사수석, 이창동 문광부장관, 강금실 법무부장관 네 명은 꼭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이 살아야 대통령도 살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때 내가 당에서 맡았던 직책이 ‘정무조정위원장’이었어요. 관료들 등 떠밀어서 출마하게 하는 역할이라 관료들은 내 전화 피하면서 ‘저승사자’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대통령 측근이라는 걸 다들 아니까 그런 자리에 앉힌 거죠. 근데 4명 출마를 요청하고 며칠 후에 대통령 전화가 온 겁니다. 내가 말했던 넷 다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고요. 대통령이 임명해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대통령이 부탁하는데 모른 척하는 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내가 기자들 앞에서 ‘가빈사양처 국난사명상(家貧思良妻 國亂思名相·집안이 어려우면 어진 아내가 생각나고 나라가 혼란하면 훌륭한 재상을 그리게 된다)’이라며 네 명을 사정없이 비난한 겁니다.”
그는 어느 범위까지를 ‘원조 친노’로 볼 것이냐는 질문에 “스스로 양심적으로 판단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희정이, 광재(안희정·이광재)는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돌입할 때만 해도 30대 초반의 실무진이었고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는데, 이제 광역단체장도 되고 차기 대선후보로 거론될 만큼 성장한 것을 보니 역시 의리 있는 정치인이며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평가했다. 이강철 전 정무특보에 대해서는 “좌충우돌하는 성격 탓에 대통령에게 신뢰를 얻지 못했다”며 “정권창출 공신으로서 국정원에서 일하고 싶다고 그렇게 어필했는데도 대통령은 대구에 출마해라, 싫으면 삼계탕집이나 하라고 말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유종필 전 대변인(현 관악구청장)의 경우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모두들 대통령 만들기에 전념하고 있는데 후보 대변인이라는 사람이 8월 재·보선에 나가려고 해 대통령에게 실망을 안겼고, 그 후 사이가 벌어졌다”고 말했다. 조경태 의원에 대해서는 “부산대 학생 시절부터 노무현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은 사람으로 진정한 부산 친노는 조경태뿐”이라며 “야당 내부에서 조경태에 대해 탈당할 것이라는 등 음해가 많은데,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며 “다만 현 지도부가 저렇게 엉망인 상태가 계속되면 탈당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
네팔 트레킹의 충격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최고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염동연 전 의원은 “문재인은 노무현이 어려울 때 도와준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지적했다. |
—그래서 ‘비선 실세’라는 시선을 받았던 거군요.
“대통령이 네 명 설득에 실패했다고 전화가 왔을 때 내가 책임지고 하겠다고 말했더니 허허 웃더군요. 그 뜻은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기자들 앞에서 비난도 하고 총선 내보내려고 한 건데 ‘염동연이 다 잘라 낸다’는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다 대통령 위한 거지 설마 내 욕심이겠습니까.”
—당시 기자들 앞에서 문재인 수석을 특히 심하게 비판했던데요.
“대통령 어려울 때 대통령 뜻에 좀 따르라고 강조했습니다. 근데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그때 문재인 수석이 사표를 내길래 대통령은 그래 이제 결심했나 보다, 나를 위해 출마하나 보다 하고 사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건강상 사유 운운하더니 네팔로 트레킹을 간 겁니다. 대통령이 피눈물을 흘리는 시점에 측근이라는 사람이 해외로 트레킹이라니요. 정말 기가 막혀서 입이 안 다물어지더군요. 그런 사람이 친노라고요. 정말 그때 생각만 하면….”
그는 이 얘기를 하며 잠시 침을 삼키고 말을 멈췄다. 당시 17대 총선을 앞두고 그는 열린우리당이 호남에서 ‘DJ를 배신한 배신자’라며 지지율이 5%대로 바닥을 칠 때 수도권 출마를 포기하고 광주 출마를 선언했다.
—선거 때마다 문재인 차출론이 있었잖습니까.
“노무현 대통령은 서거 전까지 총선, 지방선거, 재·보궐선거 때마다 문재인에게 제안을 했어요. 민주당이 아무리 영남에서 약세여도 노무현 주변인물인 송인배, 이봉수 이런 사람들이 야당후보로 총선 출마해서 거물급인 박희태, 김태호와 몇백 표 차이로 선전하곤 했잖습니까. 김정길 후보가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해서 45% 득표했죠. 전부 다 노무현 생각대로 문재인이 나갔으면 이기는 선거였습니다. 근데 끝까지 거절하고 안 나간 거예요.”
—문재인 대표가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입니다.
“《운명》(문재인 대표 자서전)이라는 책 봤죠. 운명이 뭡니까. 노무현 서거가 자기 성공할 운명입니까. 노무현 동정론 업고 정치에 나선 인물이잖아요. 성공할 수 있었던 노무현 정권에 기여는커녕 역행한 인물입니다. 그럼 그대로 조용히 있든가. 당 대표라고 당을 저렇게 사분오열 만들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염동연 전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2004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되기 전까지 새천년민주당 인사위원 외에는 공직이나 공식적인 직책을 맡지 않았다. 그러나 수시로 청와대를 드나들었고 언성을 높여 쓴소리를 하곤 해 비선 실세로 지목됐고 야당과 언론의 적지 않은 공격을 받았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부부회동이 많았는데, 권양숙 여사는 ‘청와대 분위기가 너무 권위적이라 다들 쓴소리를 못하니, 자주 와서 쓴소리를 좀 해 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한테 했던 쓴소리 중 가장 기억나는 것이 “1시간 회의하면 55분 혼자 얘기하고 5분 박수받고 끝난다면서요? 그래서 되겠습니까?” 하고 따졌던 일이라고 말했다. “솔직히 노무현 대통령이 좀 가볍게 처신하거나 말하는 경우도 많고, 그래서 인심 다 잃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런 걸 다 조목조목 얘기해 줬어요.” 그러나 비선 실세로 지목되면서 음해와 모함도 늘어났고, 그가 ‘대통령을 등에 업고 정치장사 한다’는 소문까지 돌기도 했다. 그와 노무현 대통령 간에 거리가 생긴 것은 2007년 1월 대통령과 의논 없이 언론에 열린우리당 탈당 선언을 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열린우리당이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지속해 왔고, 그를 비롯한 현직의원들의 탈당으로 합당에 반대하던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분위기가 바뀌면서 열린우리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은 2007년 8월 합당을 하게 된다. |
호남 민심은 성났다
2003년 11월 11일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개최된 열린우리당 창당대회. 염동연 전 의원은 “열린우리당 창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뜻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
—호남 민심을 간단히 얘기하자면 어떻습니까.
“호남사람들은 새정치민주연합이 호남을 머슴 취급하고 있는 것에 대해 엄청나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가 어떤 모습을 보입니까. ‘너희들(호남)은 어차피 우리 표’라며 신경도 안 쓰고 있지 않습니까. 호남사람들은 새정치민주연합을 영남당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이 호남에서 인기가 없는 것도 문재인 대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사람이 자초한 겁니다. 문 대표 스스로 호남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그 사람이 호남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원인이 뭘까요. 그 사람 자서전(《운명》)을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6·25 때 부친이 부산으로 피란 와서 양말공장을 했는데 호남사람들이 양말값을 떼어먹고 도망가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는 얘기가 있어요. 읽으면서 실소가 나왔습니다. 전쟁 직후 호남지역에서 부산으로 가려면 기차도 차도 없었고 배 타고 열 시간이 넘는 시절이었습니다. 호남사람들이 거기까지 가서 사기치고 다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어떤 호남사람이 그랬다고 해도 그게 야당 후보로 대통령 나가겠다는 사람이 할 얘깁니까. 그 책 읽고 충격받은 호남사람들 많습니다.”
—야당 내부에서 호남을 홀대한 역사가 없었죠.
“MB정부, 박근혜 정부 거쳐 오면서 호남사람들은 고위공직에도 제대로 못 올라가고 있어요. 1급 이상 공직자 중 호남 출신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이런 것도 서러운데 지금 야당이 이런 걸 지적하기는커녕 어떻게 야당 내에서 호남을 홀대할 수가 있습니까. 호남사람들의 자존심은 이미 바닥에 떨어져 있어요. 때리는 영남정권보다 더 미운 게 영남이 당권을 쥔 야당인 겁니다.”
—4·29 재·보선이 호남 민심을 대변한 것 같습니다.
“정동영, 천정배 다 내친 야당이 무슨 수로 호남 민심을 잡을 수 있었겠습니까. 근데 그 패배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후 문재인 대표가 광주 민심을 받아들이겠다며 대처를 잘했더라면 수습할 수도 있었어요. 언론에서 연일 호남신당, 호남 자민련 얘기 나올 때 민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였어야 되는 건데 ‘그래 한번 해봐라. 너희들이 갈 데도 없고 어쩔건데’라는 태도를 보인 겁니다. 오죽하면 호남사람들이 손학규 지지한다는 얘길 하겠어요.”
염동연 전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들 노건호씨가 지난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6주기 행사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공개 비난한 것에 대해 “김무성을 향해 한 얘기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가족과 우리 가족은 자주 만나 아내는 물론 아이들(노무현과 염동연은 각각 1남1녀를 두고 있다)도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노건호씨의 심정을 제가 모르겠습니까. 실명은 김무성을 거론했지만 그 연설은 여야 모두, 정치권 모두를 향한 얘기였어요. 아버지를 정쟁에 이용해 먹지 말고 가족들에게 돌려달라는 얘기였습니다. 새누리당을 향한 게 아니고 새누리와 새정치 모두 각성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는 노건호씨가 친노에 대해 직접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친노세력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싶어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건호의 울부짖음이 친노세력에 시사하는 바가 분명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심지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노무현정신 운운하며 노무현을 이용하는 세력이 없었으면 하는 가족의 마음을 다들 좀 헤아렸으면 합니다.” |
‘친노’의 착각
—요즘 친노라는 사람들을 만나 보면 어떻습니까.
“그들이 만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문재인 대표가 지난 대선에서 48% 얻었으니까 이번 대선에서 2%만 더 얻으면 된다고. 48%는 이미 자기네 것이고 2%만 선거운동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한테도 ‘도와달라, 2%만 메워 주시라’는 제안이 종종 오곤 합니다. 정말 착각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지난 대선 당시 MB(이명박) 정권 인기도 바닥이었고, 헌정사상 유례 없던 여성 후보에, 이른바 독재자의 딸을 상대로 48%밖에 못 얻은 걸 부끄러워해야죠. 김두관이나 다른 사람 나갔으면 60% 이상 얻었을 건데 후보 잘못 나가서 졌다는 사실을 왜 인정을 못합니까.”
—당 운영도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당연하죠. 친노 패권주의의 폐해는 심각합니다. 당내에서 자기들 입맛에 조금만 안 맞으면 어마어마하게 공격하고 흔들지 않습니까. 대표적인 예가 박영선 전 원내대표입니다. 원내대표로 선출됐으면 협상 재량권을 줘야지 협상해 오면 흔들고, 다시 협상해 오면 또 흔들고 이러니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문재인 아니라 그 세력 중 누가 대표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당 제대로 운영도 못하고 호남 민심도 못 잡고….”
—현 야당이 호남 민심을 잡지 못하면 앞으로도 힘들겠군요.
“노무현이 왜 대통령이 됐는지 아십니까. 영남 출신임에도 3당합당 따라가지 않고 DJ에게 남은 데 대해 호남사람들은 노무현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호남에서 김대중 대통령보다도 더 높은 투표율과 지지율을 얻었어요. 전통적으로 지지기반이 호남인 야당은 호남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으면 대권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호남지역뿐만이 아니라 수도권에 있는 호남사람들 민심까지 포함하는 겁니다. 문재인은 대선에서 호남에서도 적극적인 지지를 못 얻었고 야당 강세 지역인 경기도에서도 졌어요. 지금 새정치민주연합은 텃밭이 없고 곳간이 빈 당입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이 혁신위원회를 만들어 변신하겠다는데요.
“아무짝에 쓸모없는 일입니다. 시간벌기에 불과해요. 새정치민주연합은 내년 총선 전 소멸될 겁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요. 안방은 뺏겼고, 텃밭은 짓밟고, 입바른 소리 하는 사람은 밟아 버리고, 투쟁력은 없고, 도저히 정당의 동력이 없습니다.”
염동연 전 의원은 “내가 나라종금 의혹으로 2003년 초 구치소에 100일간 있었던 사건이 노무현 정권 실패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내가 100일 동안 갇혀 있은 것은 억울하지 않지만 왜 하필 그 중요한 시점에 있었어야 했는지…”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그 사건으로 청와대에 합류하지 못했고 여당의 분당(分黨)과 열린우리당 창당을 구치소에서 지켜보아야 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염동연·안희정이 대통령을 옆에서 보필하지 못한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구치소에서 대통령이 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한다고 언론이 떠들어대는데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면회를 왔었는데 이광재 한 명을 빼고는 다 대통령이 당을 깬다고 하더군요. 이광재만이 그게 아니라기에 이광재가 잘못 알고 있나 보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내가 4월 24일 구치소에서 나와서 차에 타는데 전화가 울렸습니다. 대통령이었습니다. 어디로 가냐기에 심신이 지쳐 병원으로 간다고 했더니 그날 저녁 병원으로 온다는 겁니다. 대통령이 그렇게 쉽게 움직이는 거 아니라고 거절했는데 그 다음 날 권양숙 여사와 함께 찾아오더군요. 찾아와서 처음으로 하는 얘기가 그겁니다. ‘어쩔 수 없이 승인하긴 했는데 대체 당을 왜 깨야 됩니까?’ 하는 겁니다. 그때 알았죠. 대통령은 당을 깨고 싶어하지 않았고, 대통령 옆에는 진정으로 그를 위하는 사람이 없구나, 알게 된 겁니다. 그는 이와 관련해 ‘부산팀’을 지목했다. “민정 라인을 문재인-이호철이라는 이른바 부산팀이 장악한 것도 우리 입장에선 황당한데, 청와대에서 효자동에 따로 부산팀 사무실을 얻어 줬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대통령 지근거리의 측근이 얼마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 뼈저리게 느꼈죠. 지금도 염동연·안희정·이광재 세 명만 청와대에 있었으면 노무현 정권이 이런 평가를 받지 않았을 거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주장은 그간 알려진 내용과 정반대로, 검증이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
실용주의, 호남 기반 신당으로 돌풍 일으킬 것
4·29 재·보선에서 당선된 천정배 의원을 중심으로 한 ‘호남신당론’은 선거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염 전 의원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염 전 의원은 ‘실용적이면서도 개혁적인 새로운 정치’를 목표로 호남은 물론 전국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신당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현재 여의도에 신당 사무실 계약을 마쳤고 실무진을 구성했으며, 곧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라고 주장했다.
—신당 창당의 구심점을 누구라고 보면 됩니까. 천정배·염동연 두 명인가요.
“구심점으로, 돈으로, 조직으로 창당하는 건 YS·DJ 때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천정배·염동연이 하겠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요. 신당은 호남 민심과 노무현의 실용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물론 호남당이 아닌 전국정당입니다. 야당의 전통 지지기반을 다지고 통일시대를 대비하는 당이 될 겁니다.”
—창당 시점은요.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까.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있으니 후보를 내려면 서둘러야 하겠지요. 이민우 총재가 창당한 신민당이 왜 돌풍을 일으켰습니까. 당시 야당인 민한당은 여당 2중대라는 평을 듣고 있었습니다. 민한당은 국민들이 대통령직선제를 원하는데 그런 투쟁을 아예 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민당이 대통령직선제라는 뚜렷한 비전을 갖고 나타난 거죠. 돌풍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어요. 비전이 있고 민심을 읽는 당은 성공합니다.”
—현역 의원들이 탈당하고 합류하지 않으면 성공이 힘들다는 것이 과거 예인데요.
“지역사회에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현역의원들이 합류한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꼭 현역을 많이 데려와야 한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신당의 비전이 개헌이나 내각책임제인가요.
“아직 그런 건 아닙니다. 다양한 논의를 통해 결정할 일이죠. 개인적으로는 내각책임제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노무현이라는 보통사람이 대통령이 되면서 어떻게 변하는지를 직접 봤고, 그래서 대통령책임제의 한계를 통감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변화라니요.
“노무현은 그야말로 ‘이웃아저씨’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언행이 가볍다는 평도 있었지만 그 정도로 권위주의에서 벗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민주화를 이뤄 냈다는 YS·DJ도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노무현이 그 틀을 벗어난 겁니다. 그게 노무현 캠프의 이미지 전략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청와대에 들어간 이후 변하더라는 겁니다. 남의 말 잘 안 듣고, 권위주의로 돌아간 것이지요.”
6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마쳐 갈 즈음 그는 “아직 하고 싶은 얘기의 10분의 1도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토록 싫어하던 《조선일보》 계열 잡지에 친노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인터뷰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으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지금 야당은 이대로 가면 절대로 정권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새누리당이 어부지리를 가져가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아요. 진정한 야당을 만들기 위해 쓴소리는 얼마든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도 정신 못 차리면 소멸의 길밖에 없는 겁니다.”⊙
첫댓글 너무 길다..
설득되지 않는건 왜 일까
2222222
3333333!
4444
5555 전제가 틀려서요. 그냥 문이 욕하고 싶어서 전제와 논리를 거기에 다 맞춰서 말하네요. 머리쓰는거 눈에 보여서 속아주고 싶지 않게.
그래서????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요..
조선일보, 조경태, 박영선 에서 실소를 해주면 되겠네.
욕 나온다.
조선일보에다 노무현 팔아먹는 놈이
원조친노라고?
병신세리 염동연 과분하게 중간에 발탁된겨? 문재인이? ,,,초딩도 아니구 충성도를 관여도를 다지는겨? 기득관점이구만..그러니 사람보는눈이개구리지, 노짱만빼고
인간아 문재인은 부정개표아니였으면 지금 대통령이야!
와우!!!!
최고!!!
조경태 이야기 듣고 실소를 하며 걍 내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쩐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반은설득 반은구라 진정성 있으려면 천정배의원하고 일하면서 하는말이사심이듬뿍들어있고 반대편에 서서 비판은 자기합리화 아닐까
머여?
걍 요약하면...
"이게 다 노무현.. 아니 문재인 탓이다."
"조경태야 말로 진정한 친노"...
이거 보고 비웃고 욕하시면 됩니다. 킥킥킥
노무현좀 어지간히 팔아먹어라.....뭐..호남신당....할말없음...
ㅉㅉㅉ...
돌풍을 일으킨데~
옴마야 무서버
김두관이면 60%? 이분도 참....가까이 있으면 오히려 더 안 보이는 것도 있는거죠. 그냥 조용히 여생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