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놈 둘이 죄없는 소주만 작살낸다고... 김실장에게 인간 이하의 모멸을
당한 대서와 상수는 소주를 마구 마셔댔다. 사실 마구 마셨다는 표현을 썼지만 대서
가 마신 소주는 반병 정도다다. 그래도 평상시엔 소주 반병이 대서에겐 치사량이었다.
유흥가 네온 간판 불빛이 양복 상의 깃을 세우고 마치 갱처럼 걷는 대서를 비틀비틀인
도했다.앞에 두 사내가 마주 걸어오지만 대서는 마치 시비라도 걸겠다는 듯 피하지 않
는다. 양복 상의 안주머니엔 대서의 분신이 새근새근 준비상태로 있다. 마침내 대서와
부딪히는 두사내. 대서가 천천히 뒤돌아서 가래침을 내뱉듯 한마디 한다
"니들 죽을래?"
잠시 서로의 눈에 불꽃이 튀다가 두 사내가 눈을 조용히 내려깐다. 대서의
승리로 끝난 눈싸움은 곧바로 두사내들로부터 사과의 말까지 받아낸다. 그런 사내들을
대서는 너그럽게 쳐다보며 꺼지라는 손동작을 취한다. 골목 모퉁이를 돌아 사내가 사
라지자 술이 확 깨어버린 대서는 너무 기분이 좋아 '야호!'하고 소리까지 지른다. 하
면 된다. 70년대 박정희 정권시대 때의 '하면된다'는 구호가 뭔지 몰랐는데 이제야 그
심오한 뜻이 가슴에 새겨진다. 어린 시절 모형 비행기를 사려고 모은 돈을 뺏었던 놈
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고 한다. 너무나 오래된 일이라 전혀 얼굴의 윤곽조차 떠오르
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다시 만나고 싶다. 만나고 싶은 이유는 단 하나, 철저한 복수를
하고 싶다는 거다. 어린 시절에도 이런 골목 전봇대에서 였다. 전봇대에 등을 기댄채
갖고 있던 돈을 전부다 털린 것이다.뒤져서 숨겨놓은 돈이 나오면 1원대 한대씩 맞을
각오하라던 깡패놈들.... 대서가 전봇대 밑을 서성거려본다. 마치 옛날 전투 격전지를
찾아온 노병처럼 감회에 젖어서 대서는 눈을 날카롭게 떠보기도 하고 한쪽 다리를 떨
어보기도 하고 이빨 사이로 침을 찍 하고 불량스럽게 뱉어본다.그리고 성냥개비를 문
다. 이때 저 앞에서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걸어오는 남녀가 있다. 팔짱치고는 여자 등
뒤로 돌아간 남자의 팔이 여자의 가슴까지 닿아 있었다. 말이 좋아 닿은거지 주무른다
는게 정확했다. 걸어오던 남녀는 대서를 발견하고 팔을 조금 느슨하게 뺀다. 생긴 외
모와 달리 불량스럽게 서 있는 대서를 두 남녀는 미친개 보듯 피하며 지나가려 하자
대서가 성냥개비를 툭 뱉는다. 성냥개비가 남자 구두에 떨어지자 남자가 일순간 멈추
지만 곧바로 여자가 빨리 가자는 듯 남자의 팔을 잡아끈다. 여자의 가슴이 풍만하고
허리가 잘룩했다. 대서가 여자 몸매에 대한 감상평을 바로 내던진다.
"잘 빠졌구먼...."
이 한마디에 가려던 남자가 뒤돌아보자 대서가 뒷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려는
동작을 취한다. 그냥 가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남자가 못이기는척 하면서 간
다. 니 애인한테 잘 빠졌구먼하는데 그냥 가다니.. 병신같은 놈.. 완전히 개구리 올
챙이적 생각못하는 꼴이다.
불법의 날에 화려한 즐거움이여!
어젯밤 권총 오발로 소매치기 범인을 잡게 한 대서는 더 이상 권총을 갖고
있다간 큰일을 칠 것만 같아 자진 신고하기로 했다. 동네 파출소 정문 옆에 있는 '불
법무기 자진 신고기간'이란 담화문이 대서를 반기는듯했다. 권총을 반납할까? 말까?
갈등을 겪던 대서가 마침내 결심한듯 파출소안으로 들어간다.그래.. 권총 소지 경위를
얘기하면 이해해줄꺼야... 요즘 경찰은 옛날과 틀리다구, 선풍기 날개가 힘겹게 돌
아가고 있는 파출소... 뭔가 잘못을 해서 끌려온 사람이 순경 앞에서 취조를 받고 있
었다. 대서가 그 순경에게 다가가 신고를 하려는 순간
"뭐야?! 당신 자꾸 거짓말할거야?!"
취조하던 순경이 갑자기 책상을 꽝친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책상위에 있던
타자기가 들썩거릴 정도다.대서도 깜짝 놀란다.취조받는 남자가 억울한 표정으로 흐느
끼기 시작한다
"정말 줏은거에요"
화를 내던 순경이 대서가 등 뒤에 서 있는걸 알아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저...화..화장실 좀 갈 수 있나요?"
순경이 바빠 죽겠는데 귀찮다는 표정으로 턱으로 옆쪽을 가리킨다
"저 쪽에요"
대서가 순경이 가리킨 방향으로 엉거주춤 가는데 또 책상치는 소리가 들린다
" 이 사람아! 길바닥에서 주웠다는게 말이 돼! 그 애길 여기서 누가 믿어?"
순경의 얘기에 대서가 흠칫했다.
"진짜 어제밤에 주웠다니깐요..."
"이 친구 이거 안되겠구먼..어이 김순경! 이 핸드폰 증거물로 압수하고 이 친
구 일단 조서 꾸며서 넘겨...말로 하니깐 안되겠구먼...."
대서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파출소를 빠져 나가려 하는데 취조하던 순경이
발견한다.
"아저씨! 화장실은 저 쪽이라니깐요"
"아..아 됐습니다"
대서가 괜히 손목시계를 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혹시라도 순경들이 권총을 볼까봐 대서는 후다닥 파출소를 뛰쳐 나온다.핸드
폰을 주웠다는데도 믿지를 않는데 하물며 권총을 주웠다고 하면 ...차라리 간첩으로
안몰리는게 다행이지 대서가 급하게 걷는데 뒤에서 그 순경이 부른다
"이봐요!"
대서가 걸음을 멈춘다.혹시 권총을 본게 아닐까...심장 박동 소리가 안들린
다.
"잠깐만요"
순경이 다가오는게 느껴진다.자수랑 체포는 죄질이 틀리다는데 지금이라도 신
고할까......
"이거 아저씨꺼 맞죠?"
순경이 서류봉투를 내민다. 경황이 없어서 대서가 서류봉투를 파출소에 놔두
고 나온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서는 맥이 탁하고 풀린다.
"지연아! 콜라도 먹어!"
토요일 점심시간, 대서가 가족들이 패스트 푸드점에서 치킨,햄버거,감자 튀김
등을 먹고 있다. 토요일은 자유복장 근무이기에 대서는 캐주얼한 차림에 운동화를 신
고 있다. 토마토 캐찾까지 뿌려가며 맛있게 먹는 지연과는 달리 희영은 뭐가 불만인지
뾰루퉁해있다.
"당신 안먹어?"
"저게 어린이들 관람가니..말도 안돼!"
"뭐가 어때서?"
오랜만에 대서와 희영은 지연이를 데리고 극장에서 만화영화를 봤다.
"저렇게 폭력적인게 어떻게 어린이 영화에요?"
"다 먹고 살자고 만든 영화잖아"
"그리고 폭력은 둘째치고 왠 애들 영화가 이렇게 야해요?"
"난 별로 안 야하던데? 그리고 만화잖아...."
"그거야 당신 취향이니깐 그렇죠"
"내 취향이라니?"
대서와 희영의 주고받는 얘기를 지연이 재밌다는듯 엄마,아빠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본다
"당신은 여자들이 속옷만 입고 설치면서 대사는 거의 없는 포르노성 영화를
좋아하잖아요"
주위에 애들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는지 희영은 포르노란 단어를 마구 말
한다.
"내 미학적 취향을 비난하지마... 그건 페미니즘에 입각해 있는 영화야"
"페미니즘?"
"그래 난 페미니스트잖아"
"어이구...페미니스트란 사람이 내가 짧은 치마만 입으면 왜 난리를 쳐요?"
"그거야....짧은 치마는 페미니스트하곤 상관이 없어.단지 남자들 눈만 즐겁
게 해주는거잖아...특히 유부녀들중에 미시족은 정말 철없는 짓꺼리야"
대서가 콜라는 다 먹고 얼음만 있는 컵을 쪽쪽 소리나게 빨대로 빨아댔다.
"흥! 그럼 당신은 내가 옷을 미시족처럼 입고 다니는게 다른 남자들을 즐겁
게 해주려고 그런다는거에요?"
슬슬 열을 받는 희영을 오늘만큼은 더 이상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오늘 희영 몰래 다른 여자와 데이트가 있기 때문이다. 손목시계를 슬쩍 보니 약속시
간이 벌써 다됐다.
"당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는건 그게 더 남성적이고 멋있어 보여서잖아요
"
"알았어..나 페미니스트 안하면 되잖아"
"근데 아빠! 페미니스트가 뭐야?"
지연이가 끼어든다
"응,그건 말이야 여자가 남자보다 더 잘났다는 얘기야"
"여자가 남자보다 잘나?"
토마토 캐찾을 입가에 묻힌 지연이가 귀엽게 물어온다.
"애한테 그렇게 대답하면 어떡해요?"
희영이 지연이 입가를 네프킨으로 닦아준다.
"지연아 그건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단 얘기야"
"그게 무슨 뜻이야?"
"그건 똑같다는 거야"
"어어? 이상하다"
지연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목욕할 때 보면 엄마하고 아빠하고 다른던데?"
지연이의 심오한 탐구력 앞에 대서와 희영은 난처한듯 서로만을 쳐다본다
"똑같다는건 여자와 남자가 똑같이 중요하다는 뜻이야"
그제서야 지연이가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인다.대서의 무선호출기가 삐삐 소
리를 낸다. 오늘 만나기로 한 여자가 찍은 번호다.
"난 그만 가봐야겠어. 회사에서 호출이야"
"토요일 오후에 무슨 근무에요?"
"얘기했잖아. 다음주 감사때문이라고...."
"당신 오늘 아무래도 이상해요"
"무슨 소리야?"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대서가 멈칫한다
"옛날엔 내가 사준 그 옷을 입고 다니라고 해도 무슨 연예인 딴따라냐고 안
입더니만......"
그러고보니 대서가 입고 있는 남방셔츠 색깔이 원색적으로 야했다.
"그거야...뒤늦게 당신의 정성을 받아들이기로 한거고...내가 이상하다니?!
그러면 내가 다른 여자라도 당신 몰래 만난다는거야?!"
어색하나마 대서가 희영에게 되려 큰소리를 친다
"그게 아니라...."
희영이 큰소리 치는 대서 앞에서 꼬리를 내린다. 대서는 기회를 포착한듯 단
도리를 친다.
"난 말이야, 당신 이외엔 다른 여자는 생각한 적도 없어"
첫댓글 즐감하고 감니다
ㅈㄷ
감사히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