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말하는 사람
오래전에 두 사람이 나누는 이런 대화를 옆에서 들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왜 이 땅에 오셨을까? 그건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함이지. 그렇다면 주님이 열두 살 혹은 그 이전에도 죽으실 수 있는데, 왜 삼십 년 이상을 이 땅에 사시다가 죽으셨나? 그건 ….’ 그때는 ‘참 흥미로운 대화를 하고 있네’라고 생각했을 뿐, 듣고 있던 제게도 사실 뾰족한 답이 없었습니다. 그 후 좀 더 시간이 흐르면서 주님이 거치신 각 단계마다 영적인 의미가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즉 그분의 육체 되심(성육신)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사람 안으로 이끌어 오심, 인간 생활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사는 본을 세우심, 죽음은 옛 창조의 종결, 부활은 새 창조의 발아(germination), 승천은 주와 그리스도로서의 취임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아래 본문은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사실 때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는 본을 우리에게 남겨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말하는 사람(He who speaks from himself)은
자기 영광을 구하지만,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참되며,
그 사람 속에는 불의가 없습니다(요 7:18).
사실 동시 통역사나 대변인 등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며 삽니다. 민주 사회의 규범도 이것을 존중하고 또 보장합니다. 참고로 우리 헌법도 관련 조항에서 “모든 국민은 언론 출판… 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주 예수님은 자신의 말에서, 보내신 분이신 아버지의 제한을 받으셨는가? 추구해 본 결과, 거기에는 아래에서 같이 깊은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말에 자유가 없으셨던 예수님: 주님은 특정 목적을 위해 아버지에 의해 보냄을 받으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목적을 사람의 신분으로 이루셔야 했습니다. 이것을 안 마귀는 주님을 상대로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시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마 4:3, 6). 하지만 주님은 철저하게 사람의 위치에서 이런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4절). 그런데 이 사례를 포함해서 그분께서 이 땅에서 하셨던 모든 말은, 그분 안에 사셨던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말해내신 것이었습니다. 아래에서 보듯이 그분에게는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소위 언론의 자유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내가 … 아버지께서 나에게 가르치신 대로 이러한 것들을 말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요 8:28).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말한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고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직접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12:49-50).
참고로 성경은 몸의 지체들인 우리도, 본이셨던 위 주님처럼 동일하게 처신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말에 자유가 없어야 할 그 몸의 지체들: 베드로는 주님께서 우리가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 본을 남겨 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도 생전에 ‘내가 여러분에게 본을 보여 준 것은 내가 행한 것같이 여러분도 행하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3:15). 이것은 말하는 것에서도 우리가 위 주님의 본을 따라야 함을 가리킵니다. 관련하여 야고보는 우리가 혀를 잘 관리해야 함을 역설했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여러분 모두가 같은 것을 말하라”라고 명령합니다(고전 1:10).
그러나 예전에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성경 말씀 따로, 실제 생활 따로였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점 이후로 성경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이행하도록 지시하는 내용을 접할 때에는, 그것을 왜 그리고 어떻게 실행할지를 고려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 말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그런 과정이 있었고, 제 안에 나름 정리된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람의 말에는 그리스도(생명)가 담겨 있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가능하면 그리스도가 없는 말들을 줄이게 되었습니다(요 6:63).
둘째, 한 새사람에서 입을 가진 분은 오직 머리뿐이고, 우리는 입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무슨 말을 해야 할 때는 ‘해야 할 말을 생각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구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느 2:4).
셋째, 정경이 완성된 후 직통 계시는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따라서 이미 기록된 말씀들이 제 안에 저장, 기억, 체화되어 필요할 때 제 입을 통해 흘러나오도록 말씀 연구와 암송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고전 12:31, 14:1). 또한 가능하면 격려와 위로와 건축하는 말을 하기를 힘쓰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