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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1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2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3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4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5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6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7편
(통합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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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러시아 대기근의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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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경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 간섭 전쟁 기간중 전사, 일제의 학살, 기아와 추위 등으로 죽은 사람은 수백만명 이상으로 알려졌으며, 일제의 간도 토벌 등을 피해 러시아령으로 이동한 독립군에 대한 지원에도 엄청난 영향을 준다.
1921년에 이르자 고려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던 시베리아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 자유시, 마자나바, 이바나프카, 우수문, 인, 사만리 일대에서도 수년간의 전쟁으로 경작지가 감소하고, 소출이 급감하여 대기근이 닥친다.
러시아 일부에서는 식인을 하다 즉결 처형된 경우도 있었던 모양이다.
반일 성향이 강했던 고려인들은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간섭군, 혹은 출정군)의 제1 순위 공격 목표였다고 한다.
1921년에 이르자 러시아 정부는 시급한 대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유럽·미국 등과의 관계 개선, 병력감축과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과의 적극적 교섭에 나선다.
이것은 자유시에 모였던 독립군들의 행로에 영향을 준다.
볼셰비키의 신경제 정책 실시
1차 세계대전 무렵부터 시작된 러시아 경제의 침체와 대기근으로 볼셰비키 정부는 1921년경부터 1928년 ‘5개년 계획’시작 전까지 신경제정책(Новая экономическая политика)을 실시하였다.
러시아 내전중 농민들에게 토지의 무상(無償) 분배 등을 내걸고 볼셰비키 공산혁명에 참가시켰다고는 하지만, 징발과 징병, 군대에 숙식제공 등의 과중한 부담은 차르 정권보다 크게 나아진 점은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불만이 증가되고 있었다.
인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의 생산 의욕을 무시하고 평등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또 소생산자(小生産者)들을 공산화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단계가 필요했고, 정책 결정에 있어서는 볼셰비키 내부에서 여러 논쟁이 있었으나 레닌 등 최고 지도층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과의 무역, 자본도입, 농민의 수확물 자유판매, 공산주의 체제 테두리에서의 소기업 경영, 자유로운 상거래 등 기존의 방법도 그대로 인정했다.
이 때문에 부농(富農) 등이 생기기도 하였다.
상공업 분야에서도 소규모의 사기업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스탈린 시대에 철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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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만주·연해주 지방 독립군들의 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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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의용대와 대한의용군의 강제 해산
(이르쿠츠크파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 주장하기를)
1921년 6월 30일경에 포로한 군인 중 죄의 유무를 조사키 위하여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에서 임시검사부를 조직하여 검사원 5인으로 하여금 포로한 군인의 죄의 유무와 또는 경중을 일주일간 계속 검사한 결과 총군부 군대는 사할린 군대의 위협에 부득이하게 가담한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총군부는 마지못해 사할린 의용대에 가담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밖의 포로 군인중에서도 신임 있는 사람의 보증이 있는 군인은 수용하여 모두 364인은 군정의회 군대에 편입하고 나머지 500명은 재차 검사부에 인도하여 다시 취조에 착수하였다.
(※ 이르쿠츠크파가 주장하는 포로의 수는 자료마다 다르다. 사망한 독립군의 수도 자료마다 다르다. 공격군이 피해를 축소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 비무장 독립군을 독립군으로 보느냐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대체로 김홍일, 김승빈, 파포프, 파르슨 등은 비무장 독립군을 독립군으로 봤다.
1920년대 일제의 토벌을 피해 러시아령내로 들어오자마자 무장해제된 사람도 있었지만, 김승빈 등의 주장에 따르면 아예 비무장 상태로 독립군에 가담하고자 러시아 영내로 온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김승빈은 자신이 자유시 참변에서 사망한 시신을 수습하여 백목으로 덮은 후 관곽 없이 묻었다고 주장하였다.
김승빈은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 수는 약 5천여명 이상이었고, 수라제프카에 있던 사할린 의용대는 약 2천여명 정도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유시 참변 다음날인 1921년 6월 29일경 수라제프카 마을 입구 쪽에서 약 33명의 시체를 발견했다고 하지만 파르슨, 엄윤 등의 주장은 이와 매우 다르다.)
식량과 주택이 부족한 자유시에 독립군 부대를 계속 두는 것은 참사를 목격하거나 전해 들은 독립군들의 반발이 심해질 것이 분명하였고
상해파측이 블라가베셴스크나 마자나바, 보츠카료프카, 자유시 일대를 왕래하며 독립군들을 연해주 혹은 만주지방으로 이동해 일제와 투쟁하자고 설득할 것이 분명하였기에 자유시에는 놔둘 수 없었던 것이다.
스바보드니 시의 발전으로 지금은 없어진 (타타르스코예) 묘지 주변
1989년경 스바보드니의 역사학자 파포프는 수라제프카 구역의 발샤야 거리 북서쪽에 있었던 묘지에 수백여명의 독립군들이 묻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발샤야 거리에 있던 고려인 마을 주민과 러시아계 주민, 볼셰비키 군대도 시체를 수습해 여러 곳에 관곽 없이 대충 매장되거나 처리한 것으로 보여진다.
시신들의 매장 방법도 증언마다 다르다.
제야강을 따라 바르다곤 마을 방향에서 발견되었던 익사자들도 대충 묻어라도 주었으면 다행인 것이다.
자유시 참변 현장에서 독립군 시신을 수습해 매장했다고 알려진 사람의 후손이 선조로부터
“전투중에 전사한 시신을 한번도 묻어준 적이 없었다.
심지어 쫓기거나 죽을 염려가 전혀 없고 보급과 식량이 충분하고 한가할 때에도 옆에서 동료가 죽으면 시체를 묻어 주고 후퇴한 적이 없었다.......”
고 자유시 참변과 지나사변에 참가하여 동료의 시신을 어떻게 했는지 들은 바 있었다.
심지어는
지나사변 등에서는 “수킬로미터 이상 몇시간을 가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즐비하였다......” 등의 회고를 남긴 점에 비추어 볼 때도 매장지 선정과 수백구의 시신을 이동시키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고려인들이나 독립군들이 스바보드니 주민이나 볼셰비키 군대처럼 시신 매장에 참여하기 힘든 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반일 열사 등의 연고를 활용하여 시신의 수를 파악하고 이름을 알아내려고 노력은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충신 엄흥도
조선시대 수양 대군이 단종을 죽일 때 엄흥도라는 충신이 있어 죽기를 각오하고 매장을 해주었다고 하는대
(조선왕조 실록 등에 따르면) “노산군(魯山君)이 해를 입었을 때 아무도 거두어 돌보지 않았었는데, 그 고을 아전 엄흥도(嚴興道)가 곧바로 가 곡하고, 스스로 관곽(棺槨)을 준비해 염하여 장사를 치렀으니, 지금의 노묘(魯墓)가 바로 그 묘입니다. 흥도의 절의를 사람들이 지금까지 일컫고 있습니다.”
그게 어디 책에서나 나오는 것이지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 이 무렵 자유시에 있으면서 공격에는 가담하지 않았던 오광선은 1945년 해방후 한국으로 와서 1964년 11월 16일경부터 김준엽과 자유시 참변 등에 대하여 인터뷰를 하였다고 한다. 김준엽은 일제 시대 일본군 학도병으로 지나사변에 참가하였다가 탈출하여 광복군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 김창순·김준엽 공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권」, 청계연구소, 1986, 329쪽에 따르면)
이르쿠츠크파에서 만든 검사부라는 곳에서 취조를 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사할린 의용대원이거나 니항군대 출신이었다고 한다.
김규면, 리인섭, 김홍일, 오광선, 최진일, 채세윤, 이우석, 김승빈 등의 진술도 이 부분에서는 일치한다.
7월 5일경 이르쿠츠크에 있는 동양비서부의 전보를 수령하니 고려혁명군대를 만주로 출동할 계획을 정지하고 속히 군대를 영솔하고 이르쿠츠크로 입래하라고 지령하였다고 한다.
이 전보를 받은 고려군정의회에서는 임시회의를 개하고 토론이 있었으나 하등의 결정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간도·만주·연해주 독립군들의 반발
(※ 김창순·김준엽 공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권」, 청계연구소, 1986, 330쪽에 따르면)
김홍일이 자유시 참변 이후의 상황을 주변에서 듣기로는 간도 독립군들은 제2의 수라제프카 참변을 피하기 위해 이르쿠츠크행을 단호히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 것은 엄윤 선생 등이 쓴 성토문에 비추어 봐도 사실이다.
북로군정서에 있다가 자유시에 오게 되었다는 이우석과 김승빈은 자유시 참변 이후 홍범도 지휘하에 있던 군인들 중 일부가 수라제프카 구역에 가서 독립군 시신을 수습해 대충 매장했다고 주장하지만
......중략.....
“조준을 정하고 사격하여 생지옥의 참극을 만들었다.” “아라사 소총은 조준을 하지 않고서는 사람을 명중시킬 수 없다.” “세 사람을 쏴 죽이고 그 송장 위에 서서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수라제프카 동구 앞 벌판에서 33구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사격, 포격, 학살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계속됐습니다. 절박한 상황을 보며 많은 파르티잔들이 견디지 못하고 제야강에 뛰어들어 익사했습니다.” “아침부터 석양까지 포격소리 요란하다.” “죽은 자의 시체가 거리에 누워 있고, 부상당한 사람들이 신음하며 주위에 숨어 있었습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에 인접한 거리는 시체로 가득 차 있었다.” “참변의 소식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며칠을 울었는지 모른다.” “참변의 소식이 전해지자 마음이 약한 사람 중에는 자살한 사람까지 있었다.” “무력으로 무장해제 시키는 것은 너무나 터무니 없는 일이었다. 12시간 동안 불필요한 대포 포격과 소총 사격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21년 러시아 영내의 한국 독립군 무장 해제는 내부 투쟁을 격화시켰다.” |
그리고 1921년부터 1924년경 만주 지방 일제 영사관, 일제 경찰, 조선총독부의 기록들에도 엄윤 선생 등이 연해주 혹은 만주·간도 쪽으로 이동한 약 1,500여명 독립군과 한 때 활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봐서도, 자유시 참변 이후 간도계 독립군 상당수는 이르쿠츠크로의 이동을 거부한 것이다.
안무·엄준 등은 이미 만주의 지리에 밝고 만주 지방의 중국계 반일열사들과도 연줄이 있었으나, 악명높은 친일파인 장작림, 장종창 일파가 일제 및 백파와 공모하여 독립군들을 탄압하던 시기인지라, 아무르강을 따라 연해주로 이동하였거나 아니면 철길과 도로, 혹은 삼림지역을 지나서 연해주 혹은 북만주 등을 이동해 다녔던 모양이다.
박일리야는 자유시 참변이후 수라제프카에서 탈출하여 주로 걸어서 흑룡강을 건너 애혼지방으로 탈출하여, 배편 혹은 걸어서 요하현을 거쳐 이만이나 하바로프스크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르쿠츠크파의 이르쿠츠크 이동 계획
오광선, 이청천, 김홍일, 김규면, 리인섭, 김승빈, 이우석, 채세윤의 진술 내용을 살펴보면, 자유시 참변이후 이르쿠츠크파는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부대 전부를 이르쿠츠크로 이동시켜 자신들의 지도 아래 두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르쿠츠크 이동 결과는 결국 대기근의 심화 등으로 실패로 끝난다.)
더군다나 자유시는 아무르주의 주도였던 블라가베셴스크와 직선거리로는 130km정도였고, 아무르주의 공산당원이나 현지 행정기관 등은 동양비서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김규면 등에게 우호적인 것이 분명하였다.
포로의 처리
이르쿠츠크파의 포로 처리와 이르쿠츠크 이동 계획
주요 단체가 주장했던 자유시 사건 포로 수 | |||
사할린 부대 등의 포로수 | 포로의 처리 | (사할린 의용대원 수 등) | |
(1) 러시아 제2군단 및 공격부대 측의 주장 | 포로 800여명 | (1922. 4. 14자 블류헤르, 파고진 보고서) | |
(2) 이르쿠츠크파측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73쪽 및 77쪽 | 생포한 자 864명중 500명만 포로로 처리 | 72명을 이르쿠츠크 교도소 감금. 428명은 볼셰비키 2군단 인계(노동수용소행) | (사할린 의용대원 1,008명 주장) |
(3) 간도지방 독립군단체 성토문 (구춘선 등 주장) | 포로 917명 | 징역형 다수, 나머지는 교도소 등에 감금 | (수라제프카 주둔 무장 독립군 1,470명 주장) |
(4) 최봉설(최계립) 주장 | 포로 900여명 이상 | (간도 독립군이 주로 죽고, 포로로 잡혔다고 주장) | 박일리야 부대는 대부분 도망가서 죽은 사람이 없었다고 주장 |
(5) 김규면 주장 | 이르쿠츠크 감옥 구금 : 3백명~4백여명 우수문 삼림 나게리 수용 : 1천여명 | 감옥 및 노동수용소 (박일리야 부대는 수백명 이상 사망) | 포로 총원 1천 3백여명에서 ~ 1천 4백여명 |
(6) 김승빈 주장 | 포로 800여명 (동구앞에서만 33구의 시체를 발견 후 매장) | 박일리야는 100여명과 함께 중국령으로 탈출 | |
(7) 허재욱, 이병채 주장 (허재욱과 이병채의 1921. 10. 25. 자 편지) | 포로 500여명, 지휘관 70명 이르쿠츠크 교도소 수감 | (사할린 부대원 1,800여명 ~ 2천여명 이상) | |
(8) 김홍일의 주장 | 포로 1천여명 이상 | 교도소, 노동수용소 등으로 압송후 소식 두절 | 자유시 일대 독립군 7천여명 집결 (박일리야 부대는 탈출에 실패하고 대부분 사망하였다고 주장) |
(9) 러시아 스바보드니시 향토사학자 | 포로 9백여명에서 ~ 1천여명 | (스바보드니는 소련시대 대규모 수용소가 있던 곳) | 자유시 일대 독립군 6천여명 ~ 7천여명 집결 |
(10) 일본군·조선총독부 주장 | 포로 1천 5백여명 | 구금후 행방묘연 |
※ 최봉설(최계립)은 자유시 참변 이후 참변을 경험하였던 독립운동가들과 양파의 화해를 도모하고
새로운 독립운동 방법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공개된 이르쿠츠파의 기록들과 러시아 정부 기록 등은 공격자들의 목표가 사할린 의용대였음이 명백하고,
사할린 의용대에 속해 있던 니항부대가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것도 분명하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 주장하기를)
별 것도 아니었던 자유시 폭동이 간단히 해결된 후, 일본군과 전투지역 출전 정지에 대한 상세한 지시가 있었다. 이 무렵 러시아 볼셰비키의 허수아비 국가인 극동공화국과 일본간에 대련회의가 개최됨으로 국제상 문제 때문에 부득이 중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군대 운반으로서 극동공화국 정부와 동양비서부간에 전보가 빈번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르쿠츠크파에서 말하기를 “일반 군대와 고려혁명군정의회에서는 낙심천만중으로 재하였다.”고 말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자유시 참변은 별 것 아니었다”는 이르쿠츠크파의 몇 명이나 이에 동조했던 몇 명이 하는 이야기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르쿠츠크파 최호림이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연해주에서의 무장 독립운동을 “자신들이 다했다”라고 주장하지만 어디까지나 소설가 최호림의 소설속 이야기일 뿐이며, 오늘날 공개된 일본군측의 기록에서는 이르쿠츠크파 오하묵·최고려·김하석·최호림의 교전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1921년 7월 30일경
이르쿠츠크파가 인정한 포로라고 주장한 독립군은 500명이었는데 중대 범죄자로 판명된 장교 및 군인 72명(이르쿠츠크로 압송할 자)을 제외하고 428명은 극동공화국 제2군단에 인도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노동수용소와 교도소로 보내져 가혹한 형벌과 노동에 시달렸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 대기근 등으로 자유시에 머무르던 독립군 중에도 병자가 많았는데 교도소에서 사망한 사람이 더 많았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 언제가 이르쿠츠크 볼셰비키 5군단 재판소의 독립군 재판기록과 우수문 노동 수용소 등의 재판기록 등이 차차 공개되어 자세한 사정을 밝혀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리고 고려혁명 군정의회에서는 무장 해제한 군인을 이르쿠츠크로 운송하려고 원동정부 군부에 수차 교섭하였으나 원동정부 군부에서 무장해제를 당한 군인은 군인으로 간주할 수 없다하고 그 군인의 운수를 거절하는 동시에 노동병으로 제2군단에 인도하라는 요구가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
극동공화국 군부가 병력을 동원해 수라제프카를 공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도 중립적 자세를 어기고 동양비서부와 이르쿠츠크파 몇 명의 말만 듣고, 큰 학살극이 벌어지자 수습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건이후 자유시 일대에 집결한 독립군중 오하묵의 자유대대를 제외한 나머지 간도 독립군의 마음은 이미 고려혁명군정의회 오하묵·최고려·김하석·까란다리쉬비리에게서는 떠난 것이었다.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측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기록물들과 이르쿠츠크파의 주장에 따르면 독립군 포로들을 그대로 해산하면 무정부주의자, 강간범, 금광노동자, 강도, 약탈자로 구성된 그들이 러시아 아무르주 일대에서 어떠한 악영향을 끼칠지 예측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하게 노동병으로 인도하였다고 한다.
독립군 부대들의 이르쿠츠크 이송 계획
자유시 참변이후, 고려혁명 군정의회 측에서는 매일 군대의 이르쿠츠크 이동문제를 놓고 토의 하였다.
결국 이르쿠츠크파와 동양비서부의 설득 공작이 성공하기 시작한다.
(※ 김창순·김준엽 공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권」, 청계연구소, 1986년 발행에 나오는 오광선의 진술에 따르면)
간도·만주 독립군 부대의 일부 지도자들은 모스크바 레닌 정부의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나 겉으로는 독립국가처럼 행세했던 극동공화국 정부가 한국계 무장 독립군들을 극동공화국 영내에 두지 않는다는 방침이 확실하자
“기회가 성숙할 때까지 후방지역인 이르쿠츠크에서 내일을 위한 독립군 군대 양성에 전념하자”는 이르쿠츠크파와 동양비서부의 권유에 동의하고 말았다고 한다.
간도 독립군들의 탈출
1921년 8월 5일경
독립군 군대를 이르쿠츠크로 수송에 착수하였는데 자유시에 모였던 독립군들의 다수는 일제와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고 극동공화국 밖인 이르쿠츠크로 이동한다는 것에 실망하였고, 자유시 참변을 인정해 줄 수 없었으므로 이탈이 계속되었다.
일제의 기록에 따르면 이 무렵 최소 2,000여명 이상의 독립군이 자유시에서 이탈한 것으로 나온다.
자유시를 이탈한 독립군들은 주로 제야강을 따라 하류 블라가베셴스크로 이동하여 배를 타고 아무르강을 통해 만주 하르빈이나 러시아령인 하바로프스크로 이동하거나, 자유시에서 대륙횡단 기차를 타고 연해주로 가는 방법, 아니면 육로로 이동하는 방법 등으로 간도·만주 혹은 연해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르쿠츠크파 고려군정의회의 목표는
자유시에 모인 군인을 모국 독립과 공산혁명의 기본대로 양성하려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으므로 불만이 있던 여러 군인을 무마하여 8월 5일 밤차로 첫 번째를 삼아 이르쿠츠크로 독립군을 수송하기 시작한다.
오늘날 공개된 이르쿠츠크파와 동양비서부의 일방적 주장에 따르면
독립전쟁 출전 계획이 또 정지됨은 내정외세가 허락하지 않았고, 독립군 부대의 통합을 시도하다가 장구한 시일을 허비하여 연해주나 만주지역으로 이동하여 일제와 싸울 시기를 놓쳤을 뿐 아니라,
무정부주의자였던 트리피츤 부대에 속했던 사할린 주 출신 의용대와 동조자들과 같이 문란한 군인으로 출전하면 도리어 적군에게 무기만을 공급하는 것에 불과할 뿐 어떤 실효를 얻지 못할 것이 분명하기에 때문이라고 한다.
남한의 일부 몰지각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게 사할린주 니항 출신 독립군들은 대부분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박일리야는 군사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 사할린 주에서 독립운동을 선동했던 교사출신이었다.
이에 반해 일본군은 시베리아를 침략한 정규군이었다.
자유시에 모였던 일찍이 없었던 독립군 대부대의 만주·연해주 출전 정지는 이르쿠츠크파 위에서 지시하던 동양비서부의 지시임은 말할 필요도 없었고,
볼셰비키의 허수아비 정부인 극동공화국과 일본간에 니항사건 배상 문제, 연해주 일대의 백파·일본의 재산 문제, 일본군의 시베리아 침략 철군, 사할린섬북부·쿠릴열도 등 영유권 문제, 오호츠크해 일대 어업권 문제, 러시아·일본간 국교수립문제, 만주 동청철도 문제 등에 관한 대련회의가 개최되는 시기임으로 출전계획을 정지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르쿠츠크파 일부에서도
출전정지는 러시아 간섭전쟁과 일제의 간도 학살 시기, 일제·백파 친일파와의 전투지역에 가까우면서도 비교적 안전지대였던 아무르주 자유시 일대에서 독립군 통합부대를 조직해 일제와 싸우고 나아가 조국해방, 민족해방, 무산혁명을 이루겠다는 그들의 처음 목표였던 혁명사업이 낭패를 당하게 된 것으로 봤다.
이르쿠츠크파의 일부도 자유시 참변은 진정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유시 참변 이후 이르쿠츠크파의 변신
이르쿠츠크파의 당시 문제점은 자유시 참변이후에서야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간도 독립군 지도부의 문제점은 이르쿠츠크파가 동의 없이 다른 모든 독립운동단체의 권한을 능가하는 고려혁명군정의회라는 최고 지배기관을 만들 때부터 당연히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알았으나, 대포·기관총·군함·장갑열차·기마병 등을 동원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르쿠츠크파 오하묵·최고려·김하석·최호림·이지택 등이 맨 먼저 한일은 자유시 참변을 수습한 것이 아니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들을 전부 동원해 부상자를 치료하고, 익사자를 찾고, 병력을 추수르고 무기와 식량조달에 힘쓴 것이 아니었다.
이르쿠츠크파와 동양비서부는 곧바로 자유시 참변을 “무정부주의 반란군 몇명의 선동으로 발생한 폭동”으로 규정하고 피해를 축소하기 시작한다.
당시 러시아 내전 진정 및 러시아 기근, 러시아·일본간 교섭, 만주 친일군벌의 등장 등의 내외정세에도 불구하고 박일리야와 상해파 몇몇 악분자의 악선전에 의해 발생한 별 것도 아니었는데 온갖 헛된 소문만 요란했던 “흑하사변”이라는 반란과 폭동을 수습한 것이며,
이제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허황된 야심적 악분자의 선동에 놀아났던 잘못된 태도를 버리고, 독립군 부대에 대한 교육과 실력을 키워야만 하는 긴급한 기본대 양성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내세우고 자유시에 모인 독립군들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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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단체의 규탄과 이르쿠츠크파 고려혁명군정의회의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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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사건에 대한 만주·간도지방 11개 독립운동 단체의 규탄과 이르쿠츠크파 고려혁명군정의회의 반박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시베리아 흑룡주(아무르주) 자유시에 있던 대한혁명군과 이르쿠츠크파 동지간에 자유시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사할린 부대·간도독립군 부대에서 수백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최소 수백여명 이상이 포로가 되고 투옥되었다.
생존 병력 일부가 이르쿠츠크로 이송하게 되자 (만주·간도지방 국민회 등 11개 단체로 구성된) 대한혁명군 측이 성토문을 발표하여 동료들의 동의 없이 비밀리에 조직되었던 고려혁명군정의회를 규탄하였다.
그러자 고려혁명군정의회에서도 고려혁명군정의회 선포문을 발포(發布)하고는 (사죄 없이) 반박하였다.
◇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13, 間島부터 노령으로 옮긴 不逞鮮人團의 末路에 관한 건」, 朝鮮民族運動年鑑 朝鮮獨立運動 第2卷 民族主義運動篇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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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혁명군(大韓革命軍)측의 성토문(번역문)
우리들은 이제 눈물을 흘리며 붓을 들고 동포 각위(各位)에 참혹하고도 비분한 사실을 고하지 않으면 안됨을 깊이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것은 즉 금년 6월 로령 흑룡주 자유시(알렉셰프스크=스바보드니)이며 정거장(停車場) 소재지에서 발생한 한인군대의 대참극에 관한 일이다.
이 사실은 한국신문지에 보도된 바 있는데 이는 대단히 비상식적이며 오히려 불가사의하게 생각되는 바이나 이같이 침소봉대하게 과장 선전되었고 참으로 그럴 듯한 사실같이 전해지고 있으므로
그 전말(顚末)을 조사하여 이를 천명(闡明)하기 위하여 실지(實地)에 사람을 보내었는데 이는 우리들의 의혹이 그 사실과 부합하느냐 안느냐를 명백히 하기 위한 취지에서 연유(緣由)되는 것이며
실지에 사람을 보내어 조사한 결과 금년 6월 27일 (※실제로는 6월 28일 상오 밤중에 발생) 황망(荒茫)한 이경(異境)
자유시의 원두(原頭)에서 참담한 최후를 마친 자는 가련한 우리 동포 6백여명인데
그중 적탄에 쓰러진 자가 72명,
익사자(溺死者)가 37명,
기병(騎兵)의 추격을 받아 산중에서 힘이 다하여 사망한 자 200여명,
행방불명이 된 자 250여명,
기타 포로가 된 자 917명이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된 전말(顚末)을 밝히면 금년 3월 자유시 대한의용군총사령부(自由市大韓義勇軍總司令部)가 조직되었는데 이는 한국이 일본에 병합(倂合)된 이래 비분강개(悲憤慷慨)의 선비(士)가 일신(一身)을 바쳐 조국복흥(祖國復興)을 위하여 희생이 되려고 조직한 것이며
그들은 동서간도와 로령 연해주 등지를 근거(根據)로 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군대를 양성하는데 그야말로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간난(艱難) 고초(苦楚)를 맛보며 백방 초지관철(初志 貫徹)에 진췌(盡瘁)한 바 있으나 시기가 미숙한 데다 일본군의 출동으로 다년(多年) 수축(修築)한 근거(根據)를 빼앗기게 되었고 결사적 저항을 취(取)하여 적에 다대한 손해를 주었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 한을 삼키고 다시 재거(再擧)를 도모하기 위하여 피로한 몸을 일으켜 후방으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원래 낭중(囊中)에 여유(餘裕)가 없고 사고(四顧)에 인연(人煙)이 끊기었는데 험준(險峻)한 산로(山路)는 인적(人跡) 미도(未到)의 지(地)로 연일(連日) 행군에 의갈(醫渴)할 연적(涓滴)의 청수(淸水)를 얻지 못하였고 또한 주림을 견디어 내어도 한조각의 식물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초근목실(草根木實)을 먹으면서 주림을 참았고 탁류(濁流)를 떠서 의갈(醫渴)하면서 겨우 로명(露命)을 이어 부활의 지(地)로 나오려 한 것이므로 그들은 태식(太息)하지 않으려 하여도 불가능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대지(大志)를 픔은 그들에게는 이러한 일시적 고간(苦艱)을 만나도 위축할 배 아니며 도리어 용기를 고무한 것은 물론 육체의 피로는 더욱 정신을 지려항분(砥礪亢奮)시켜 미래의 대성(大成)으로 향하여 용왕매진(勇徃邁進)하여 반다시 현하(現下)의 대동단결을 하지 않으면 불가하다는 것을 통절히 감득(感得)한 그들이었으므로 의사(意思)를 소통(疏通)하고 성의를 피력하여 다같이 단결의 실(實)을 거둔 것이 즉 대한의용군총사령부(大韓義勇軍總司令部)이다.
이에 참가한 자는 로령에 있어서는 사할린군대 청룡군대 이만리대(伊萬里隊), 중국령에 있어서는 광복단, 군정서, 의군부, 도독부 및 혈성대 등의 단체이며 이 대동 단결의 결과 선정된 참모부원은 홍범도, 안무, 서일(徐一), 조욱(曹昱), 이청천, 이용(李鏞), 채영, 최진동, 오하묵 등 15명이고 실재 병원(兵員)은 3천여명이다.
그들이 계획한 바는 점차 순조(順調)로히 행진되었는데 이는 오로지 당국 제씨(諸氏)의 덕택이나 또한 일반 한국민족이 촉망(囑望)한 바임은 감히 췌언(贅言)을 요(要)치 않는 바이다.
그러나 선악은 양립할 수 없다.
종래 로령에 거주하는 일부 한인의 자치기관인 한족회(韓族會)를 전대한국민의회(全大韓國民議會)라 개칭하고 외면(外面)으로는 전 한국민족(全 韓國民族)의 통치적 명령을 몽상(夢想)하고
그 실(實)은 일부 주민에 대해 가혹(苛酷)한 주구(誅求)를 일삼던 문창범, 김하석, 원세훈 등의 혐오(慊惡)할 소위(所爲)는 사리로 보아 정(正)히 당연하다 하겠으나 그들의 백반(百般) 간계와 악모중(惡謀中)에서도 문등(文等. 문창범 등)이 이름을 군자금에 빌려 얻은 수만원을 착복한 사실과 활자구입(活字購入)이라 칭하고 부호 김원서(金元瑞)로부터 사취한 금전으로 그의 일파인 원세훈 등을 북경 또는 상해로 파견한 추사(醜事)가 폭로(暴露)되었으므로 의용군과 일반공중(一般公衆)의 격렬한 분노를 산 것이다.
사욕을 위하여 공(公)을 판 그들은 한인군대를 로군(露軍)의 일부로 하여 편입시킨다는 조건으로 이르쿠츠크 동양비서부장(東洋秘書部長) 스마츠(슈먀츠키) 휘하로 들어가 비밀리에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하고 그 의원으로 오하묵 김하석(臨時) 최고려 류동열 및 로인(露人) 1명을 임명한 뒤에 그들은 이러한 비행에 대한 일대협위(一大脅威)인 대한의용군을 그 수중에서 농락(籠絡)하려고 가진 수단을 썼으나 조국복흥(祖國復興)의 대지(大志)를 각성한 그들이 어찌 이러한 공(公)을 팔아 사(私)를 영위하는 비리몰의배(非理沒義輩)에 귀복(歸服)할 리가 있었겠는가.
도리어 그 불법을 널리 알리고 또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 그 자체의 존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그들은 함원(含怨)하는 바 있어 로국군(露國軍)에 무고(誣告)하여 대한의용군은 민족적 관념에 집착(執着)한 반혁명의 군(群)이라 칭하고 거기다 일본의 밀정(密偵)이라고 말하며 일즉이 의용군이 간도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을 때 전리품으로 얻은 일본군의 견장시계 등을 휴대하고 있는 것을 그 증좌(證左)라고 무고(誣告)하였다.
즉 인정(人情) 풍속을 달리하고 또 언어가 통하지 않는 등의 불편이 있는 로군(露軍)에 동족이면서도 이러한 참무(讒誣)를 감히 한 것이다.
그러나 로군(露軍)은 어찌 이러한 사실의 진상을 지실(知悉)할 리가 있겠는가. 거기다 로군(露軍)은 반혁명이라고 말하면 풍성학루(風聲鶴淚)도 빼놓지 않고 신경과민이 되는 것이므로 로군(露軍)은 곧 장갑차 대포 기관총 등을 가지고 1만여(萬餘)의 대부대로 포위한 후 의용군에 대해 3시간 이내에 전부의 무장해제를 명(命)하였다.
이리하여 의용군은 그들의 진의를 해득(解得)하는 데 고심하고 진퇴에 궁(窮)하여 그 처치방법을 주저하고 있을 즈음 강대한 로군(露軍)의 포격을 받아 일대참극을 연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로군(露軍)은 당초 단지 위혁적(威嚇的)으로 고의로 상공을 향하여 발포하였으나 오하묵의 군(軍)은 조준을 정하고 사격한 결과 로군(露軍)측에 있어서는 로국 중대장 1명이 살상한데 불과하였다.
이 교전 경과에 대하여는 대략 추측하기 어렵지 않는 바로서 이 같은 비인도적 참극을 연출한 그들은 그래도 만족하지 않고 포로가 된 817명에 대하여 1등에서 4등에 이르는 죄로 처단하였는데
1등에 해당되는 자는 총살,
2등은 전세계가 적화(공산화)하기까지 구금,
3등은 15년 이상의 징역,
4등은 구로(歐露)에서 로동(勞動)에 종사케 하기 위하여 유배하는 등의 혹형(酷刑)에 처하였다.
그리고 또 이르쿠츠크에 있던 김철훈, 이정(李檉), 서초(徐超), 남만총(南萬聰, 남만춘), 조훈(曹勳), 오진형(吳鎭珩), 장건상(張建相), 안병찬(安秉瓚) 등은 그들의 비행을 덮기 위하여 반혁명의 죄명으로 계봉우, 김진, 장도정, 박애, 장기영, 김동한(나중에 일제밀정으로 변절), 김성우, 김규면, 주영섭, 박원섭, 한운용(한운룡), 안태국, 박상춘, 이노겐지 등 30여명을 무고(誣告) 구금(拘禁)하였다.
이들은 산천이 격절(隔絶)하고 풍속을 달리하는 이역 옥중에서 비통의 눈물을 삼키며 신음하고 있는 바이다.
억(噫) 이 참극에 대해 우리 동포는 무엇이라 말하여 좋겠는가.
조국을 위해 민족을 위해 부모처자를 버리고 최후 목적을 세우려고 그 목적에 쓰러진 그들 신성한 6백여명의 영령은 단지 사리 사욕을 영위하려는 이민족인 로군(露軍)의 총구에 희생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참극은 공전절후(空前絶後)하며 실로 우리 민족의 일대치욕으로 우리 민족의 절대(絶大)한 역사적 오점이다.
황망한 자유시 원두(原頭)에서 혹은 적탄에 쓰러지고 혹은 강물에 몸을 던저 익사한 감개(感慨) 많은 최후를 마친 6백여명 의사의 심술(心術)은 과연 여하(如何)하였겠는가.
총구를 견양한 로군장교(露國將校)가 도리어 낙루(落淚)하며 사자(死者)에 대해 후장(厚葬)의 예(禮)를 취(取)하였다 하는데 그 현장의 활 지옥적(活 地獄的) 참극을 추상하면 우리로 하여금 전율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
6백 의사의 영령(英靈)이 우리에게 고할 바는 대체(大體) 무엇이며 이역(異域) 옥리(獄裏)에서 신음(呻吟)하는 수백의 우리 동포가 우리에게 가르키는 바는 대체(大體) 무엇일가.
참극 사실은 대개 이와 같다.
우리 민족을 팔아 사리(私利)를 영위(營爲)한 배덕비도(背德非道)의 문창범, 김철훈, 김하석, 오하묵, 원세훈, 이정(李檉), 이병휘(李秉徽), 조훈(曹勳), 남만총(南萬聰:남만춘), 최고려, 오진형(吳鎭珩), 김응섭(金應燮), 류동열, 서초(徐超), 안병찬(安秉瓚), 장건상, 최의수(崔義洙), 김기룡(金琪龍) 등의 죄악은 인류의 도의를 위해 민족의 대의를 위해 절대 가차(假借)할 수 없는 바이며 이를 절규(絶糾)하는 우리들은 어찌 일점(一點)의 사욕(私慾)이 있겠는가.
응당 우리는 그들의 죄를 규탄하고 징계하는데 고조(鼓噪)하여 철저적(徹底的)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기원 4254년 (서력1921년) 9월 일
국민회 대표 구춘선 이봉우
군비단 대표 이희삼 윤덕보
광복단 대표 김성원 황만실
신민단 대표 김성배 유봉득(劉鳳得)
로농회 대표 조응순 권중선
공의단 대표 심영택 엄준(嚴俊)
태극단 대표 임석우 박대성
농무회 대표 김기형 김직묵(金直黙)
의민단 대표 방우룡 김연원
청년독립단 대표 정태선 장민준
야단 대표 오석영 윤좌형
성토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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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주지방 독립운동 단체들의 이르쿠츠크파와 대한국민의회에 대한 성토문에 몇몇 오류는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내용이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 정부의 문서 등과 거의 일치한다. (※ 오늘날에도 자유시 사건과 관련된 중국 정부의 기록들은 공개되는 것이 거의 없다.)
오늘날 구춘선 등의 동의 없이 발표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최근 역사책을 쓰는 사람이 딴 목적을 가지고 개인 의견을 터무니없이 기재한 것이다.
독립군이 독립운동으로 한 일마저 허용하지 못할 독립운동가들이 아니었다.
독립 운동사에 일제 침략군과의 뚜렷한 전과가 없었던 이르쿠츠크파로 불려졌던 대한국민의회측에서 독립군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사할린 부대와 만주지방 독립군 부대를 ‘반혁명·무정부주의자’등으로 무고하여 학살한 것은 오늘날 러시아까지 인정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당시 소련의 지도자 레닌은 무정부주의자 등을 냉혹하게 비판하였고, 일부 볼셰비키들은 무정부주의자를 ‘학살범, 강간범, 강도, 아편중독자’와 동일하게 간주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무정부주의자를 ‘정부와 같은 거대 지배조직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만주지방 독립군 단체들은 자유시 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자유시 등의 현지로 사람을 보내어 조사한 결과, 이르쿠츠크파인 오하묵, 최고려, 김하석, 원세훈, 문창범 등의 지도를 받던 한인 보병자유대대가 독립군 공격에 가담하여 “조준을 정하고 사격하였다.”고 규정하였고,
이르쿠츠크파의 일부가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군 군자금과 동포의 금전을 횡령하고, 이르쿠츠크 일대로 도주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몇 명과 결탁하여 독립군부대를 무고하고 공격에 가담해 600여명을 학살한 사실을 규탄하였다.
또 최소 수백여명 이상을 포로로 잡아 징역형과 강제노동형을 준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르쿠츠크파의 자료들을 살펴보면, 1921년 9월 30일경의 이르쿠츠크파 고려군정의회의 반박 선포문과 자유시참변의 책임을 회피할 목적으로 비밀리에 작성하였고 일제가 불분명한 경로로 가지고 있던 문서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김낙현의 수기, 리지택의 수기, 최고려의 수기 등은 역사적 사실을 유리하게 왜곡한 경우가 많다. 마치 그럴싸하게 남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말장난 하듯이 진술하였지만,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 정부 기록과 대조하면 명백하게 조작한 부분이 너무 많다. 이르쿠츠크파의 몇 명이 “니항(니콜라예프스크), 연해주, 만주 등지에서 일제와 백파에 협조한 적이 있고, 독립운동 자금을 횡령하였고, 연해주와 간도 일대에서 친일 매국노라고 동포들에게 소문이 나자, 한국인이 적게 사는 이르쿠츠크 일대로 도피해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것도 오늘날 밝혀진 러시아측과 일본의 기록을 보면 일부 사실이다. |
이 성토문이 전파되자 오늘날까지 국내외의 인심은 이르쿠츠크파 독립운동가들에게 좋지 못했다. “이르쿠츠크파가 러시아 공산당에 무고해 독립군을 학살했다, 독립군 역사의 최대 비극이다”라는 표현이 나돌았다.
이르쿠츠크파의 반박 선포문
이처럼 11개 독립운동단체의 성토문이 발표되어 이르쿠츠크파의 문창범, 김철훈, 김하석, 오하묵, 원세훈, 이정(李檉,이병휘,李秉徽), 조훈(曹勳), 남만춘, 최고려, 오진연, 김응섭, 류동열, 서초, 안병찬, 장건상, 최의수, 김기룡 등이 ‘매국노·반역도당’으로 규탄받게 되자
1921년 9월 30일경에 이르쿠츠크파에서는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선포문 형식으로 이를 반박하였다.
◇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13, 不逞鮮人團의 알력」, 朝鮮民族運動年鑑 朝鮮獨立運動 第2卷 民族主義運動篇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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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의회 선포문
자유시 군변에 대하여
지난 6월 28일날(스무여드랫날)에 자유시에서 군대소동이 있었다함은 신문에 보도와 인편의 전함으로써 누구나 다 들은 소식일지로다.
한데 말이란 전하면 느는 것이오. 실정을 목도한 사람이 아니면 분명히 알 수 없는 바임으로 몇 달 되지 않는 동안에 사실밖에 여러 가지 기괴한 소문이 많이 전하였고 딸아 엇지된 심인지 몰르고 이리저리 당치아닌 추측이 성히 생기게 되었도다.
이 비록 지나간 일이오. 우리 피차의 자랑거리가 아니지만 일반의 오해를 풀고 거짓말의 뿌리를 없이하기 위하여 본 군정의회는 이제 그 군변 나든 전후형편과 진압한 경과를 소상히 적어 무릇 독립혁명운동의 단체나 개인에게 향하야 널리 그 진상의 엇더하엿슴을 알니노라.
자유시와 그 근처에 있든 군대졍형
자유시와 그 부군에는 전년부터 우리의 군대가 있었는 바 그 군대들의 이름과 사람수와 대장은 대개 아래와 같었고
ㄱ. 자유대 000명 오하묵
ㄴ. 사할린대 000명 박일리야(박일니야)
ㄷ. 다반 이만대 000명 박그레고리
ㄹ. 간도대 0000명 최진동, 홍범도, 허근, 리청천, 안무
ㅁ. 학생대 00명 채영
(자유대는 자유시와 블라가베셴스크에서 조직된 것이오, 사할린대는 니꼴라옙스크로서 올라온 것이오. 다반이만대는 다반 이만지방에서, 간도대는 간도로서, 들어간 것이오. 학생대는 군관학생으로 된 것)
각 대 사이에 평일에 연락된 관계로 말하면 다반 이만대의 일부가 사할린대와 좀 접근하고 그밧게 각 군대는 대게 사할린대와 서의한즁에 특히 자유대와 사할린대의 감정은 좋지 못하였나니, 처음에 대한국민의회가 자유시와 블라가베셴스크 부근에서 의용병을 모집하여, 자유대를 편성하고 명의상에 원동공화국 제2군단 제19련대 부속하였으나,
실제 관할을 하여 오든 바,
뒤에 사할린대가 니꼴라옙스크로서 올너오매, 역시 자유대의 일례로 국민의회가 관할하는지라.
사할린대의 대장 대장 박일리야는 이에 불평을 가지고 치타(치따) 한인부(치타 한인부는 박애, 김진, 장도정, 계봉우, 박이완 등이 주의 선전한다고 로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원동총국안에 부처 설한 기관)와 샹해 차함사령 리용(이용) 등과 련락하여, 원동공화국에 청원하여, 각 군대를 제2군단에 부속하되 관할은 한인부가 하기로 하고 박일리야는 군정위원장 김이노껜지는 사령관이 되어왔스나,
자유대는 그 관하를 받지 아님으로 한인부는 다시 원동공화국 총사령관 에이히(Эйхе)에게 교섭하야, 한인의병대를 모두, 원동공화국 총사령부에서 직속케하고, 박이완을 사령관으로 로국인 그리골예프로 참모장을 정하고, 총사령관의 명령으로 오하묵을 치따로 불러간 뒤에 사할린대를 크라스노야로에 옴기고, 자유대에 항하여 복종치 아니면 무장을 해제하겠다 함으로 자유대는 복종한다 선언하였고, 간도대는 대국이 귀졍되기 전에는 중립하겠노라하였스나, 저들은 간도대의 량도를 사흘이나 끊으므로 하는 수 없이 복종하기로 하고, 사할린대 있는 곳으로 간 사실 등이 그 원인이러라.
군정의회 조직과 권한
군정의회는 금년 5월 이르쿠츠크에 모인 고려 공산당 창집대회에서 자래, 각 방면의 공연한 규각과 부질없는 분쟁을 일제 타파하고 투철한 각오 아래에서 통일 또는 적극적으로 우리 혁명운동을 진행하기 위하여 류동열, 최고려, 까란다리쉬비리, 세 사람으로 위원을 정하여 조직한 바이니,
그 권한은 우리의 군정일체를 총할할 것이오. 딸아 원동공화국에 관할되었던, 한인의병대는 다넘겨 맛게 된 바이다.
군정의회의 로력과 사할린대의 안된 행동
군정의회는 래력과 포부가 그러한 것인즉 무릇 우리 군대에 대하야는 하로밧비 정신을 모으고 힘을 합할 필요가 있음으로, 자유시에 당도한 뒤에 즉시 각 군대를 향하야 군정의회 조직한 리유와 방침을 알리고, 군대를 속히 자유시에 집합하야 대사를 같이 진행하자고 한 바이라.
이를 위하여 장래를 생각하는 이는 대개 뜻이 같음으로 자유대는 물론이오.
홍범도, 리청천, 안무, 최진동, 채영 등 여러 장교는 혹 홋몸으로 혹 부하를 다리고 자유시에 선후도착하였고, 간도대의 임시 대대장 허근 군도 역시 부하 사백여명을 다리고 오려하였더라.
한데, 유독 자래로 말성만키로 소문난 사할린대의 박일리야 등과 전능효 일패는 아무 리유가 없이 군대의 집합을 반대하고, 뿐 아니라 간도대의 자유시로 오렴을 다소의 세력에 의지하야 강제로 금지하는 등 부당한 행동을 계속하더라.
그러나 군정의회는 완화방침을 취하기로 하고 사령관이 사할린대에 가서 설유한 결과로 그 군대를 자유시에서 8리 되는 수라제프카 촌에 이둔식히고, 인차 장교회의를 열어 지나간 죄를 용서하기로 선고한 뒤, 이틀만에 다시 군사회의를 열고, 자유대와 사할린대의 묵은 감정을 서로 낮기로 권하매 두 군대의 군인들은 다-일시에 만세를 불러 화기융융하엿으며,
또 군인대표회의를 사오차 열고, 여러 사람에게 대제 방침을 다 깨닫도록 중복 설명하였으나, 이상한 심리를 가진 박일리야 등은 겉으로 순종하는 체하고 속으론 여전히 반항하여 온갖 당치 아닌 말로 그 부하의 어리석은 군인을 꾀우고 위협하야 아모쪼록 통일을 히살하고 분요를 일으킬 양으로 괴악한 짓을 다하였나니,
그중에는 소위 장교 셋이 단지동맹하야 최고려, 최진동, 안무, 리청천, 김하석, 홍범도, 오하묵 등 일곱 사람을 죽이고야 복종하자는 혈서까지 만든 일이 있었더라.
하지만 군정의회는 6월 수무이렛날에(27일) 다시 제 6차의 군인회의를 열고 그여히 화평한 가운대서 좋이 정돈할까하야, 여러 가지 리유로 개유하고, 또 권고하여 온갖 방법을 다하노라고 무한한 애를 썼으나, 소동내기로 직책을 삼듯하는 피 등은 기탄 없이 우에 말한 일곱 사람을 다 죽여야 하겠노라고 마구 떠듬으로, 사령관은 이에 일곱 사람의 죽일 죄가 없음과 또 그 같은 악한 생각을 고칠 것이라는 등 말을 하매, 피 등은 발을 구르고 소래를 질러 아주 질서를 물란케 할 뿐 아니라, 폭탄을 사령관에게 던진 자까지 잇어 회의는 전혀 여지없이 파열되고 말엇더라.
무장해제와 변란경과
형세가 이미 이에 이르매 피 등에 대한 방법은 오직 무장을 해제할 외에 다른 방침이 없음으로 군정의회는 긴급회의를 열고, 심의한 결과 반동하는 부대와 및 그 세력 밑에 있는 군인의 무장을 전부 해제하기로 하고, 부근 로군 수비대에 밀령하갸 6월 스무여드렛날(28일) 새벽 세시에 수라제프카에 가서 피 등의 무장을 해제하기로 한 바 미리부터 소동하기로 준비하고 있든 피 등은 무장해제의 영이 나리매, 듯기는 차치하고 일시에 사격을 시작하여, 완전한 적대행위를 가짐으로, 수비대장은 하는 수 없이 본대로 부득이 하야 퇴군함에 이르럿더라.
이때를 당하야 피 등은 더욱이 기세가 살아, 어찌할 도리가 없음으로 군정의회는 긴급결의로 사령관에게 명하야 군대 전부를 충동케하야, 그 부근을 에위싸고 일변으로 속새포, 장갑포차를 가저다가 놋코, 다시 무장해제를 명하였으나, 피 등은 또 여전히 일제 사격을 시작하야, 도저히 순편히 조쳐할 방책이 없음으로, 오후 두시부터 세길 우를 견우고, 맹열한 시위공격을 더하게 되매, 그제야 변군의 괴수 박일리야 등은 형세의 불리함을 알고, 먼저 도망하였고, 석양에 이르러 변란은 전혀 진정되었는데,
이일에
당장에 죽은 자 37명이오.
중상하여 병원에 가서 죽은 자 4명이며,
도망한 자 오십명이오.
항복하고 잡힌 자 9백여명이며,
또 리용 등이 사할린대에 대하여, 어대까지든지 군정회의를 반항하여 충동을 일으키라한 비밀문자가 들어 낫더라.
변군의 처치
잡힌 변군, 9백여명은 전부 검심한 결과
공모주동한 자, 75명이요.
축임받아 협동한 자 4백 5십명이며,
그 나머지는 강제에 못이기어 일시 섞이엇든 자로 대부분이 간도대의 군인인 바, 그 공동한 진술에 의지하건대
「간도군인은 처음일이 날 적부터 의미 없는 싸움이라고 극력 반대하였으나, 위험한 강박에 엇지할 수 없어, 앞서게 된 것이오.
동무중에는 싸우지 아니랴하야, 총을 걱구로 쥐고 혹 내바리고 군정의회 군대로 넘어오다가 사할린대의 손에 잘못 죽은 사람이 여럿이오. 대대장 허근씨는 저 사위 안하고 방안에서 나오지 아녔나니, 우리는 실상 아무 죄가 없노라」함으로 본 군정의회는 주모자 75명만 군사재판에 붙이기로 이르쿠츠크에 실어 보내고, 협동한 자 4백 5십명은 자동이 아니고 남에게 속음임으로, 무장해제한 대로 로동군을 만들고, 그 외는 전부 혁명군에 편입하얐노라.
이리하야 이른바 자유시 군대 소동은 아주 결말된 것이라.
누구든지 우에 쓰인 글을 보면, 진정한 사실을 요연하게 아실줄 믿거니와 이를 공포함에 당하야 본 군정의회는 우리의 장래, 특히 일반의 리해와 각오를 구하고 겸하여 우리의 품은 바 주의와 방침을 아울러 선포하노라.
세상에서 흔이 적화니 무엇이니 하야 평론이 있고,
또 공산당과 관련이 있다하매 염려 많은 이는 아마 모두가 세계적으로 화하야 고국의 독립에 등한치 아닐까? 혹 로시아의 정쟁에 리용되지나 아닐까? 하리다.
그러나 그는 다 아니할 걱정이니, 첫째 독립과 세계화는 반대되는 것이 아니오.
도리여 일치한 것으로 세계화를 하려면 먼저 독립부터 하여 놓아야 될 까닭이며,
둘째 로시아는 맘말고 우리 힘이 자라기만 할진 대 온세계의 불평과 억울을 바로 잡기 위하야 싸울지니, 엇지 남의 리용하기를 기다리리요마는,
실상 말이지, 현재 우리의 힘이 우리의 혁명 사업을 진행하기에도 쟝-부족한 것이었거니, 어느 겨를에 다른 일에 힘을 들이며, 다른데 힘을 논으리요. 이는 우리뿐의 생각이 아니라, 실정을 아는 우리의 좋은 이웃도, 충분히 량해하는 것이니라.
군정의회는 유일한 목적이 우리나라의 혁명에 있으므로 무릇 일본의, 자본주의, 군국주의의, 강도세력을 우리의 땅에서 전혀 모라내함이 품은 바 주의요.
이 주의를 관철하기에 순전히 무력에 의지하렴이 우리의 방침일뿐이로라.
1921년 9월 30일
고려혁명군졍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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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9월 30일자 (이르쿠츠크파인) 고려혁명군정의회의 반박 선포문은 간도(간도)지방 독립운동 11개 단체 성토문보다 자유시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수와 포로의 수를 고의로 축소하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조작”이다. 박일리야가 원흉이면 그만 사살하면 되는 것이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성명서들을 살펴보았을 때, 사실을 왜곡한 것은 대체로 이르쿠츠크파의 몇 명과 자유시에서 일방적인 공격에 가담한 자들이다. (※ 오늘날 한쪽의 주장만을 인용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두개의 대립되는 성토문을 보면, 간도계 11개 독립운동단체들은 오하묵, 최고려, 문창범, 김하석, 원세훈 등의 대한국민의회를 학살범·매국노로 규탄하였고 대한국민의회와 이르쿠츠크파를 대변하며 반박한 것은 고려(혁명)군정의회였다.
고려군정의회와 대한국민의회의는 일명 이르쿠츠크파로 불려지는 독립운동가들의 조직이며,
이들과 관련된 사람들이 바로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대단한 인물들이다.
이르쿠츠크파 독립운동 조직이 1921년경 비밀리에 (볼셰비키의 핵심기관인)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결탁하여 만든 극동(원동)공화국내의 독립군 최고군정기관이 바로 러시아계 총사령관 까란다리쉬비리를 중심으로 하는 고려군정의회였다.
고려군정정의회의 반박 선포문이 말하듯이, 이르쿠츠크파 일부가 극동공화국 일대의 독립군 군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사할린부대의 무장해제 및 간부(박윤천)를 사살하기 위해 “로국 수비대장에게 밀명하였고 결국 기습공격” 하였던 것이다.
간도계 11개 단체의 성토문은 1921년 6월 28일경 수라제프카 참변 당시 현장 부근에 있었던 엄선생 등이 주도하여 작성하였고, 사건이 발생했던 자유시 일대를 방문하여 사망자를 확인 후, 간도지방의 독립운동가들로부터 동의를 받아 만주 도회에서 발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 일제는 독립운동가로부터 노획한 성토문을 일본과 중국, 만주 등지의 일제식민지 지배 기관 등에 배포하였다.)
일제의 만주·시베리아 침략군, 만주의 친일파 장작림, 러시아 백파 등에 쫓겨 아무르주 자유시 일대에 집결하여, 동족이라고 믿고 절대 조준사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던 이르쿠츠크파 일부와 (중립을 지켜주고 도움을 줄 것을 기대했던) 러시아측에게 학살당한 사실은 잘 알고 있었으나,
자유시에서의 참변이라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당시의 사면초가의 어려운 사정상 대놓고 그나마 우호적이었던 레닌(Ле́нин)의) 볼셰비키 정부를 비판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많은 독립군 단체들에게 규탄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볼셰비키 러시아까지 적으로 돌릴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이러한 규탄문에조차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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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변 당시 최고 지휘관에 해당하는 최고려의 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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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사건에 관련되어 이르쿠츠크파의 일원으로 자주 나오는 최고려가 1955년 쓴 자서전이라는 책이 1995년경 공개되었는데, 최고려 자서전의 번역은 러시아에서 작고한 김세일이라는 소설가가 하였다.
김세일은 홍범도에 관한 책을 쓴 사람으로 알려졌는데, 그가 쓴 책은 홍범도의 부인 이인복 여사의 인터뷰를 인용하고, 북한과 홍범도 장군의 기록들을 참고해 쓰여진 것으로 보여진다.
일부 왜적 숫자 등이 역사적 기록과 다른 부분이 많지만, 이것은 이동중인 적 병력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문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사망자수 파악 등은 오늘날의 과학 기술로도 어렵기 때문에 완전한 허구라고는 볼 수 없다. 그렇다고 모두 정확한 것은 아닐 것이다.
최고려는 1955년에 쓴 자서전에서 1921년 자유시 사건을 몇 명의 폭동으로 규정하고, 사할린부대를 무력으로 무장해제 시켜 처벌케 한 점을 인정하였다.
또 레닌 자금 문제에 대해서도 사실대로 진술한 것으로 보여진다.
※ 출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자료총서5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홍범도편」, 1995, 최고려 자서전 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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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평화교섭 (일명 대련회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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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조아 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였던 극동공화국 정부는 1921년 8월 26일경에도 일본 정부와 교섭에 들어갔다.
몇 년 동안 지속되었던 대련회담(大連會談 : 요동반도 대련에서 열림)이라는 것이다.
이 무렵 일제를 제외한 다른 시베리아 간섭국들은 1920년경 이미 모두 철군하였고, 중화민국에서는 1919년 5·4운동 등으로 일제의 만주침략 정책 등에 반발이 거세지기 시작하여 만주일대의 악명 높은 친일군벌에 대한 반감이 증가하고 있었다.
일제가 제2의 니항사건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던, 1920년 10월경의 훈춘사건(琿春事件, Хуньчунь Инцидент)도 일제의 거듭되는 조선·중국·러시아 민간인 대규모 학살에 대한 보복적 성격이 강하였다.
1920. 7월경 중화민국, 미국, 영국 등이 일제의 만주 동청철도 점령과 북사할린섬 점령을 인정하지 않음을 발표하고, 1920년 8월경부터는 미국 등이 일제의 사할린섬 북부 점령을 비난하고, 캘리포니아 주내에 일본인 토지 소유를 금지하는 등 압력을 가하자
일본 역시 니항사건 배상문제·시베리아 철군·만주 동청철도·사할린섬 북부와 쿠릴열도·오호츠크해 일대 어업권·러시아 영내의 한국독립군 문제 등을 놓고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1921년경에는 볼셰비키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연해주의 러시아계 친일파들로 구성된 백파 괴뢰정부는 일제의 앞잡이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과 일본정부는 극동공화국·모스크바 정부와 교전과 휴전, 교섭 등을 거듭하며 일본군의 철군 조건 등을 협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원하던 사할린섬 북부 할양, 동청철도 양도, 니항사건 배상, 한국독립군 해산 등은 세계 무산 혁명과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을 표방하며 설립된 레닌 정부가 쉽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모스크바 정부 역시 자유시 일대의 독립군을 연해주나 한국 국경으로 진출시킬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후, 일본은 여러 국제회의들, 특히 대련(1922년 7월), 워싱턴(1921년 11월 ~ 1922년 2월), 장춘(Чанчунь, 1922년 9월 2일 ~ 26일) 회의에서 이 문제를 거듭 제기하였다.
볼셰비키 정부의 일제에 대한 양보
볼셰비키 러시아와 일본간 국교 정상화 교섭은 1925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일본은 결국 니항사건의 배상금과 동시베리아 철군의 조건 때문인지 1922년 수립된 소련(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으로부터 양보를 받아
1925년경 사할린섬 북부의 유전·탄광·삼림·쿠릴열도·어업권 등은 획득하였다.
이것은 소련이 부정하였으나 사실이다.
그러나 만주 동청철도에서는 중국·일본·러시아간의 분쟁이 있어 1929년경에도 동청철도 중동로 사건(中東路事件)이 터지기도 한다.
중동로 사건에도 소련군에는 소수의 여러 민족 군인이 있었으며, 중국 군벌군에는 북만주의 특성상 반일성격이 강하던 장병 등이 동원되어 또 한번 남의 나라 전쟁에 동원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 부근의 국경선 분쟁은 알바진 요새 전투 때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도 간도·녹둔도 문제 등등 다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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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혁명군정의회의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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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쿠츠크파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 주장하기를
1921년 8월 말경 자유시에 남아 있던 일부 독립군들이 철도로 이르쿠츠크에 도착 완료하였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독립군의 총수가 대략 1,745명이었다.
(※ 카프카스 기병(혹은 카자키 기병)과 중국계 군인을 제외한 수)
그리고 고려혁명군정의회는 취소되고 러시아 볼셰비키 제 5군단의 지도를 받는 동시에 일반 교육의 편의를 위하여 한국인들로 1개 여단을 편성한다.
여단장에 까란다리쉬비리(전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 군정위원장에 박승만이 선임되었다.
※ 필자의 의견 :
이르쿠츠크파 몇 명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기관으로, 러시아·만주·중국 일대의 한국인들에 대한 정부 기능과 한국 독립군 최고 지휘권을 가진다고 설립했던 고려혁명군정의회는
자유시에 모였던 독립군, 아무르 일대의 고려인, 상해파, 만주·간도 일대 독립운동 단체, 상해임시정부 등이 거세게 반발하자 바로 폐지된 것이 아니었고
아마 상해파와 관계가 있었던 극동공화국 인물들과 아무르주 현지 러시아계 공산당원의 반발도 대단하였을 것이다.
심지어 이르쿠츠크파 내부의 반발도 있었다.
아시아 혁명을 인도한다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고려혁명군정의회가 간단히 폐지된 것은
대포까지 쏴대며 그 학살극을 벌렸는데 모스크바까지 보고가 되지 않았을 리가 없고, 체카와 달뷰라 등도 이르쿠츠크파가 계속해 독립군들을 “무정부주의자, 반혁명, 일제 간첩, 강도, 강간범”의 누명까지 씌웠는데 진행 과정을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려혁명군정의회 폐지와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의 퇴진은 아시아 혁명과 한국 독립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레닌과 모스크바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다.
또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최고 독립운동지도 기관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근래에는 자유시 참변의 원인을 일제와 친일파의 주장만을 골라 짜깁기해 독립군들과 조선놈들이 “무정부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감행하고, 강도질, 강간, 약탈, 살인 등을 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 이라는 사람도 있고 일부 반공학자의 진술만을 인정해 “러시아 볼셰비키가 공산 혁명 성공을 위해 일본과 공모해 학살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볼셰비키의 영웅 까란다리쉬비리의 사임
1921년 10월 3일경
여단장 까란다리쉬비리는 본직을 사면(까란다리쉬비리가 한국어를 전혀 못함으로 군대 교육에 불편하다는 이유)하고 오하묵을 여단장을 선임하고 동시에 정치부를 설치하고 정치부장에 채동순을 선임한다.
(※ 까란다리쉬비리(Каландаришвили, Несто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1876년 출생 ~ 1922. 3. 6일경 사망. 혹은 까란다라쉬비리 : Каландарашвили)는 1921년 10월경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적기훈장을 받는다.
그는 그루지아(조지아)계 러시아인으로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칼란다리쉬비리, 까란다라쉬비리」등등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1921. 5월경 고려군정의회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6월 28일 사할린부대를 기습공격하여 무력으로 무장해제시키려다가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였다.
한국 독립군 통합 부대를 조직해 일본과 싸우고자 했던 그는 1922년 3월 6일경 이쿠치야(Якутия)에서 반란군의 공격으로 사망하였다.)
여단편성
1. 여단 관리부 (참모부, 공급부, 위생부, 정치부)
2. 제 1연대
3. 제 3연대
4. 특립대대(사관학교)
5. 여단 특립연락중대
6. 특립포병소대
7. 제 2연대는 편성중에 있음
이상으로 여단을 편성하니 여단의 인원 및 무기, 마차 수량은 아래와 같았다고 한다.
1. 20개 중대 및 여단 관리사무원 총수가 2천 1백여명
(※ 카프카스(혹은 카자키)기마병은 본 군대를 떠나 5군단 직할로 감)
2. 대기관포 36문, 소기관포 6문, 대포 3문, 5연발 소총 2,800자루(각 자루마다에 탄환 150발), 폭발탄 1,500개
3. 말 150필
교육
사관학교 설립
1921년 10월 16일경
이르쿠츠크파 등이 계속해 문제를 삼았던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자금 문제에 대하여 상해파 측이 자금의 사용처 등을 러시아측에 보고한다.
이후 미지급되었던 자금은 러시아측에서 상해파로만 전달하지 않았다.
오늘날 공개된 독립운동 자료와 일제의 기록, 러시아의 기록에 따르면 이후부터 이르쿠츠크파·화요파계 등의 일부에도 지원이 된 것으로 나온다.
1921년 10월 28일경
한국인 독립군 여단 내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수업 기한은 6개월로 정하여 200명 학생을 양성하니 임시교장에 류동열, 교관에 이청천, 채영, 김승빈으로
군정위원장 선우정으로 선임되였다가 1921년 10월말에서~ 11월경 임시교장 류동열은 사면하고 동 교관 이청천이 교장을 겸임하였다.
포병과 설치(1921년 11월 6일경)
연락과 설치(1921년 11월 9일경)
각 기술과 설치 및 양성
1. 기병 교관대 34명
2. 보병척후대 45명
3. 의생 및 간호대 36명
4. 연락대 115명 (내부에 전신·전화 학생 40명)
5. 무기제조 견습생 17명
6. 음악대 28명
위의 기술과에 대하여는 제 5군단내 러시아인 교관으로 가르치게 하였다.
1921년 11월 15일경 국제공산당 상임위원회의 한국문제에 대한 결론
양파간 분쟁을 해결하고 자유시 참변을 조사할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ЦК РКП)가 아무르 사건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체포된 80명 문제를 다룰 것을 요청한다.
Док. № 69
Заключение Комиссии Президиума ИККИ по корейскому вопросу
г. Москва
15 ноября 1921 г.
В Президиум ИККИ и в ЦК РКП
1921년 11월 28일경 이동휘의 레닌 접견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동휘, 홍도, 박진순, 통역사 김아파나시 4명이 레닌과 면담하여 독립군 석방을 탄원한다.
1921. 11. 월경부터 독립운동 단체가 워싱턴회의에 한국 독립 문제 제기하였으나 실패한다.
※ 과거 한국에서는 이동휘의 레닌 접견, 슈먀츠키의 국제 공산당 동양비서부장 퇴진, 고려혁명군정의회의 폐기, 상해파·이르쿠츠크파의 해체 등에 대해서 날짜와 이유 등이 잘못 알려진 점이 많았으나,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측 기록을 확인한 바 러시아 공산당 중앙과 최고 지도자의 지시도 있었다.
1921년 12월 9일경 러시아 공산당 중앙의 결정
코민테른이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지시를 받지 않고 상급기관으로 간주되는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ЦК РКП(б))」는 자유시의 포격·총격 사건을 수사할 것을 지시한다. (※ 앞선 장에서 언급한 내용의 요약입니다)
한국 파르티잔 처형 사건에 관한 조사위원회 구성
...... 중략 ......
소위, 아무르 사건은 한국 파르티잔들의 기억에 매우 불쾌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중략......
무력으로 무장해제 시키는 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12시간 동안 불필요한 대포 포격과 소총 사격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포위된 파르티잔에 대한 포격, 불신되고 바람직하지 못한 분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직접적인 범인 조사가 필요합니다.
유혈 사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그렇게 되는 방식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러시아령으로 이동해온 유명한 한국 군인들, 불행히도 동양비서부의 슈먀츠키 동지가 대표하는 코민테른의 역할은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객관성이 필요했으나, 기본적인 분파적 다툼을 해결하는 것조차 실패했습니다.
아무르 사건은 파르티잔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보복 방법이었습니다.
따라서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자료에 국한되지 않고 이 사건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지시한다.
......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 중략 .......
1921년 12월 18일경(혹은 12월 20일경)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의 형식적인 퇴진과 동양비서부 폐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와 바이친스키가 한국 독립운동 분야에서 형식적인 퇴진을 발표한다.
바이친스키는 한국 공산주의 운동과 관련된 분야에서 이 때 당시에는 물러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다.
슈먀츠키는 1922년 1월경부터 1925년 1월경까지 페르시아(이란) 주재 전권대사 및 무역대표를 하다가. 1926년 말부터 2년가량 공산주의 동방 노동자 대학 총장을 지냈다.
그 이후에는 한국 독립운동과는 별 관련이 없다.
그리고 슈먀츠키가 수장이었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역시 다른 부서로 대체되며 폐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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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쿠츠크 독립군 2,000여명의 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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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 1월경
러시아 내전에서 활약은 했다는 데 일본군과의 교전기록을 아직도 찾기 힘든 여단장 오하묵이 이끌게 된 이르쿠츠크의 1,400여명에서 ~ 2,000여명의 독립군 부대는 러시아 대기근과 겨울이라는 곤란에 다시 부딪친다.
(이르쿠츠크파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 주장하기를)
1921년 말부터 1922년 초쯤
러시아 정부 군부에서 이르쿠츠크에 있는 고려 군대에 대하여 1922년 1월 1일부터는 고려 자체에서 공급 문제를 해결하라 하였기에 공급의 곤란이 발생하자,
1922년 1월 동양대회에 참가한 고려혁명 23개 단체대표에서 고려혁명에 대한 원조 및 군대에 대한 위급문제를 볼셰비키 정부 외교부와 교섭하기 위하여 대표단에서 교섭단원으로 4인을 선정하여 외교를 진행한 결과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의 소개로 볼셰비키 정부 외교부에 교섭한 결과 희망이 있었다고 한다.
첫째 군대 문제에 대한 요구는 현재 무장과 또는 다소 활동비 기십만원을 원조하여 연해주 즉 중로국경까지 출동시켜주던지 불연(不然)하면 일난(日暖)을 기다리기 위하여 1922년 5월까지 극동공화국 영내가 아닌 러시아 볼셰비키 정부 지대에 주둔케하고 전과 같은 공급을 요구한다는 것을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에 건의하니 동양비서부에서는 위 요구에 대하여
“고려공산당 임시간부의 승인을 득하라” 하였다고 한다.
임시간부 중 한명이 이 무렵 모스크바 쪽에 도착한 이동휘였다.
즉 이르쿠츠크파만을 지원하던 동양비서부가 앞으로는 상해파와 무슨 일이든 협의를 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것은 한국 독립운동에 공헌은 적고 ‘자유시 참변’이라는 해악을 남긴 슈먀츠키가 퇴진하고 러시아 공산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 일어난 것이다.
이르쿠츠크파에서 주장하기로는
이것은 무산혁명을 인도하는 국제공산당에서 고려민족혁명을 원조함은 역시 세계혁명을 운전함에 긴요한 도화선을 구함이니 민족혁명도 후원함은 물론이언이와 고려에 공산당이 있는 이상에는 그 공산당의 정견에 의거하면서 후원하겠다는 제 3국제공산당의 정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동휘는 이 무렵 이르쿠츠크로 이동한 독립군 부대의 개편을 원한 것으로 보인다.
(※ 임시간부 중 이동휘, 홍도외 간부 6인은 원동에서 도착 전이었다고 한다.)
이르쿠츠크파에서는 교섭단원의 동의만으로 볼셰비키 정부 군부에 교섭하여 군대에 대한 공급을 5월 15일까지 연기한 것으로 주장하지만, “잘된 것은 자기가 한 것”이라 말하는 이르쿠츠크파의 주장인지라 전부 사실이라고 믿을 수는 없으며,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 정부 문서에 따르면,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한 한인 대표중 일부가 이르쿠츠크로 이동한 독립군 2,500여명에 대한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나옵니다.
이르쿠츠크 독립군 부대의 반발
그리고 이르쿠츠크 독립군 부대에서도
류동열, 이청천 외에도 채영, 이다물, 황하일, 송세주, 김표돌 등 14명 이상이 오하묵 등의 전횡에 반발하기 시작한다.
자유시 참변이 반발의 원인이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1922년 1월 극동인민대표대회
1922년 1월 21일경부터 2월 2일경까지 러시아 서울인 모스크바와 산크트피졔르부르크에서 아시아 지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극동인민대표대회(Съезд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их и революционных организаций Дальнего Востока)가 개최된다. 혹은 ‘동양인민대표대회’라고도 한다.
한국의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등 독립운동관계자들이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운동 방향을 토론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 대회의 참석자는 대략 150명 정도였으며, 한국대표단은 여운형, 이동휘, 김규식, 박헌영 등 23개 단체 52명 정도로 알려졌다.
한국의 유명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참석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고 러시아 내전이 안정화되기 시작할 무렵의 러시아가 한국의 독립운동과 사상계, 그리고 현대사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큽니다.
러시아 공산당 중앙의 지도하에 코민테른(제3 국제공산당)이 개최한 이 대회에는
볼셰비키 지도자들인 레닌, 트로츠키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장 : 지노비예프
코민테른 총비서 : 사파라프
동양비서부장 : 슈먀츠키 (자신의 퇴진결정에 반박하기 위해 온 것으로 보인다)
등이 참석하였다.
이 대회 기간중 레닌,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중국·일본 등의 대표들과 한국 대표들의 만남이 있었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의 지도자 레닌, 코민테른 총비서 사파라프(Сафаров),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이었던 슈먀츠키, 김규식, 여운형, 구오남, 홍범도, 일본대표 센카타야마(片山潜), 중국대표 왕, 인도대표 등의 만남이 있었고, 한국측 통역사는 최고려였다.
1922년 2월 17일경
이르쿠츠크의 한국인 여단을 고쳐 특립 연대로 줄이고 연대장은 오하묵이 군정위원장은 박승만을 그대로 임명하였다.
그 무렵 근무 장교가 137명, 군인 총수가 1,451인이었다고 한다. (병노자를 제대시켰다고 한다.)
이르쿠츠크파에서 주장하기를 한국인 독립군 여단을 다시 연대 편제로 줄인 이유는 처음부터 여단 병력 규모에 부족한 군인수로 여단을 편성하는 것은 허장에 불과하고,
또 기관 시설 및 공급상 어려움을 감안한 것이라고 한다.
(※ 각종 문건에서 그렇게 박일리야가 자유시 일대에 집결한 독립군을 굶기고, 노숙시켰다고 비방 해놓고서는 그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박일리야는 기본적으로 일본군과 싸운 독립운동가였다)
당시 세계 신문상 보도와 같이 몇천만여명의 기민(飢民)이 도로에 전전하는 그 지대에서 검정떡 한쪽이라도 고려인들에게 여유롭게 주지 못할 것이며,
세계혁명을 원조하는 볼셰비키 정부가 아니면 군복 한벌을 고려 군대에 지급할 리가 만무할 것이라 한다.
이르쿠츠크 독립군 교육의 어려움
즉 대기근과 경제침체에 시달리던 러시아 볼셰비키 측의 독립군 병력 감축 요구가 있었던 것이다.
대략 1921년 8월말경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여 10월 28일경 군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 교육에 나섰을 때는 이미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겨울이었고 야외활동이 불가능한 시기였다.
대략 700여명 정도만 겨울옷을 받을 수 있었고, 나머지 1,300에서~1,500여명 이상은 여름옷을 입고 있었다는 소리도 있었으며, 여단 인원의 60% 이상이 영양실조와 괴혈병, 이질 등으로 고통받았다는 소리도 있다.
1922년 2월 17일경 한국인 여단을 연대로 축소하기까지 제대로 된 군사 교육이 불가능하였고 실내 교육도 단순한 사상 교육, 한글·러시아어 교육에 집중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르쿠츠크파에서 주장하기를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독립군 부대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것은 양심상 고통이 있고, 이와 같은 형세에 원조를 주려는 볼셰비키 정부와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여만 하는 것이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 성공이후 세계를 놀라게 한 러시아 볼셰비키들의 정신상 지도를 받는 일반 교육은 원만한 만족이 있으나, 내전에 따른 대기근 시기 식량 등 물질상의 공급은 원활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르쿠츠크에서의 독립군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무렵 볼셰비키 러시아도 유럽쪽의 내전은 끝난 형편이었으며, 동시베리아 지역의 일본군 철군만이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군인수를 줄여 생업에 투입하여 수년에 걸쳐 급감한 경작지 등을 회복하고 산업생산을 복구하려고 노력하던 시기였다.
이에 따라, 물질상 공급에 대한 경비 축소를 연구함도 러시아 볼셰비키의 지도를 받아야만 했던 이르쿠츠크파로서는 어쩔 도리 없이 따라야만 했던 것이다.
즉 이르쿠츠크에서의 독립군 병력 감축은 러시아 대기근에 따른 식량난과 경제침체, 일본과의 평화교섭 등 때문이었다.
한인의용군사회(韓人義勇軍事會) 등 조직
1921년 7월경부터
자유시 참변의 참화를 피해 탈출한 이용, 김규면 등이 연해주로 돌아와서 ‘한인의용군사회’를 조직한다. 혹은 ‘제3차 군정위원회’,‘군정의회’라고도 한다.
김홍일, 김규면 등의 주장에 따르면,
연해주 있던 독립군외에도 자유시 참변에서 탈출해온 독립군들이 증가하여 위원장에 김규면, 사령관에 이용, 1중대장에 임표, 2중대장에 김홍일, 3중대장이 한운용 등이었고 총 병력은 300여명에서 ~ 1,500여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자유시에서 살아서온 박일리야 등도 가담한다.
과거 자유시에 있던 사할린 의용대중 니항부대는 100여명 정도가 연해주 독립군에 복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광복군 출신의 진술에 따르면 이 무렵 김홍일의 활동은 대단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으나 러시아에서 작고한 김규면, 리인섭, 최계립, 김승빈 등은 김홍일이 독립군에 가담하였음을 확인하였습니다.
1921년 겨울에는 상해파 측에서 이르쿠츠크파에 보복한다는 소문이 나돌며, 중국에서 이르쿠츠크파 이성(李聖, Ли Сенг)이 상해파의 총에 맞았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1921년 10월말경 극동공화국·일본간 대련회의 결렬과 일제의 발악
일본과 극동공화국간의 대련회의가 결렬되어 연해주 일대에서 일본군·백파와 볼셰비키 간의 전투가 다시 벌어진다.
(1925년 1월 20일경 북경에서 소련·일본 간의 조약이 체결 될 때까지 수십차례 이상이 교섭이 더 있게 된다.)
1921년 11월 14일에서 ~ 18일경 연해주 올가(Ольга)에서 전투가 발생하여 독립군 신용걸 등이 전사한다.
1921년 12월 4일경 이만 전투에서 한운용 등 수십여명의 독립군이 전사한다.
이만(Има́н, 현재명칭 : 달네레첸스크)과 인(Ин) 전투에서 전사한 의용군수는 대략 78명 정도라고 한다.
홍범도 등의 독립군 재판 참여
(※ 이르쿠츠크파 문건인 「붉은군사」제2호. 1921. 12. 24자 「중대사건 판결」 및 2023년 8월경 한국 방송 뉴스 보도 등에 따르면)
‘1921년 11월 27일로 ~ 30일까지 4일 동안에 고려혁명군법원은 재판위원장 채동순, 위원 홍범도, 박승만 제동무가 출석하여 금년 6월 28일 자유시 병변에 범죄자 50명을 판결하였는데 세 사람은 2개년, 다섯 사람은 1개년 징역에 처하고, 24인은 일개년 집행유예에 처하고 17인은 방면하야 군대에 보내여 종사케 함.’
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이르쿠츠크파 문건이라 일방적으로 믿을 수만은 없다.
동시베리아 내전의 볼라차예프스키 전투(Волочаевский бой)
(※ 하바로프스크 인근의 볼라차예프스키 지역은 여러개의 명칭을 가지고 있다.)
1921년 12월 23일경 극동의 대도회 하바로프스크 시를 백파군대가 다시 점령한다.
1922년 2월 5일경에서 ~ 14일경 하바로프스크 인근 볼라차예프스카야 전투(Волочаевский бой)에서 한국 독립군 수십여명이 전사한다.
1922년 2월 14일경 극동의 대도시 하바로프스크는 결국 볼셰비키가 탈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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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말에서 1922년 초쯤 자유시 참변 이후 만주·간도로 귀환한 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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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기록에 따르면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중 최소 2천여명 이상은 러시아령 연해주가 아닌 북만주 등을 거쳐 만주나 간도로 돌아간 것으로 나온다.
자유시 참변에 관련되었다가 만주·간도로 생환한 독립군
※ 출처 :
1. 하르빈 일본 총영사관 작성, 기밀(機密) 제15호, 「不逞鮮人의 行動 및 共産黨員 連絡에 관한 件」, 1922년 3월 20일.
2. 하르빈 일본 총영사관 작성, 기밀 제17호 「不逞鮮人 各 團體 및 共産黨 調査報告의 件」, 1922년 3월 20일.
3. 간도총영사관 작성, 기밀 제500호, 「間島부터 노령으로 옮긴 不逞鮮人團의 末路에 관한 건」, 1921년 12월 1일.
등
부대명 | 주요 인물 | 활동지역 | 자유시 참변 직후 현황 |
(1) 국민회 | 구춘선, 이봉우 | 만주·간도 | 500명 |
(2) 군비단 | 이희삼, 윤덕보 | 만주 | 400명 |
(3) 광복단 | 김성원(김성구), 황만실 | 만주 | 500명 |
(4) 신민단 | 김성배, 유봉득 | 만주, 연해주 | 900명 |
(5) 로농회 | 조응순, 권중선(권중전) | 만주 | 800명 |
(6) 공의단 | 엄준, 심영택 | 노령, 만주 | 1,500명 |
(7) 태극단 | 임석우, 박대성 | 만주 | 200명 |
(8) 농무회 | 김직묵(김직점), 김기형 | 만주 | 1,000명 |
(9) 의민단 | 방우룡, 김연원 | 북간도, 만주 | 450명 |
(10) 청년독립단 | 정태선(정일선), 장민준 | 만주 | 600명 |
(11) 야단 | 오석영, 윤좌형, 김소래 | 만주, 중동철도 | 800명 |
(12) 청년단 | 김승만, 박춘근 | 만주 | |
(13) 대한독립단 | 박장호, 이웅해 | 만주 | |
(14) 군정서 | 현천묵, 김좌진, 박영 | 만주 밀산현 | 노령과 만주에서 독립운동 |
(15) 혈성단 | 김국초 | 흑룡강성, 만주 | |
로령 거주 (만주로 미귀환) | 홍범도, 오하묵, 김하석, 이청천, 채영, 강규창, 박일리야(朴イリア) | 러시아령내 | 이청천은 나중에 만주로 귀환. 박일리야·채영은 만주 및 노령에서 활동 |
※ 위 표는 일제의 자료를 참고하여 자유시 참변과 관련된 독립운동 단체를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며,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1922년 말경 러시아 간섭 전쟁의 종료와 러시아내 독립군 부대의 해산
1919년 3·1운동 전후 노령 연해주 일대의 독립군 부대들은 대부분 볼셰비키와 관계가 있었으며, 간섭전쟁이 끝나자 러시아 영내의 독립군 부대들은 오하묵, 김승빈, 전희세, 유익정 등의 소수를 제외하고는. 1922년 말경 볼셰비키에 의해 대부분 해산되었다.
김좌진, 안무, 구춘선 등 연해주로 피난 왔던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해산에 불응하고 만주나 중국으로 돌아간 독립군들도 많다.
러시아령 연해주에서의 김좌진 장군
니항사건, 4월참변,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간도참변, 일본군의 민간인 학살시기,
오늘날 한국의 일부 작가들은 김좌진(1889~1930) 등은 볼세비키에 적대적이었다고 하나 실제 김좌진을 만나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청산리 전투 당시 이범석(1900~1972)의 역할에 대해서도 자유시 사건에 집결한 독립군들은 대부분 니항사건, 청산리·봉오동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범석이 청산리 전투의 주요 지휘관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이범석이 스스로 쓴 회고록 우등불에서 주장한 역할은 하지 못했지만, 청산리전투에 참가한 사실은 대부분 인정하였다.
1922년경 러시아 지원 자금 문제
러시아가 지원한 금화 40만 루블이 레닌이 약속한 금화 200만 루블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나머지 약 1백 40만 ~ 1백 60만 루블을 받기 위해, 김규식(金奎植) 등이 직접 레닌 정부와 교섭하기도 했으나 실패한다.
1922년 4월 22일경 국제공산당 상임위원회의 상해파 복권 결정
코민테른(국제공산당) 상임위원회 한국문제위원회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지도하에 이르쿠츠크파가 1921년 5월 4일경부터 ~ 5월 17일경 폐회할 때까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제1차 대회 개최하여 고려혁명군정의회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까란다리쉬비리, 의원에 류동열, 최고려 등을 임명 할 때)
제명된 (주로 상해파의) 모든 당원을 복권하고, 박진순·박애·최고려·김규식이 퇴진하며, 두 세력의 통합을 위한 3개월의 실천기간을 가지기로 결정한다.
※ 출처 : Док. № 85 Постановление Комиссии Президиума ИККИ по корейским делам г. Москва 22 апреля 1922 г.
상해에서의 여운형 등의 활동
1922년 5월 10일경 여운형 등은 상해에서 국민대표대회 준비위원회의 활동을 부활시킨다.
상해 임시정부의 내분사태를 개탄하는 모든 인사들이 공감하였다.
그리고 한형권이 모스크바에서 자금을 가지고 오자 국민대표대회는 열릴 수 있었다.
1922년 5월 중순부터 수개월간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구성된 임시 연합 간부회의가 시작된다.
결국 겉으로는 파쟁을 중단하고 통일된 공산당 조직에 합의를 한다. 그러나 양파에서는 서로 자기파의 세력 확장에 노력하고 있었다.
8월경에는 연해주 송전관(松田關 : 솔밭관) 등지에서도 문창범, 이중집, 오주혁, 이범윤, 이표(李杓), 윤기영, 김승덕, 김석훈, 홍범도, 백림, 김좌진, 이용, 김승덕, 김하석, 이동휘 등의 회의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동아일보 1922. 9. 19자 3면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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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8월경 아무르주 우수문 노역장에서의 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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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해 독립신문 1922년 8월 1일자 제2면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 블라가베셴스크로부터 철도선로로 서북방향으로 사백여리를 떨어진 우수문 산속에서 벌목정정의 노역하는 2,000여명의 독립군은 무삼 죄역(罪役)인지 아모도 알지 못하는 바이나 작년 흑하 참변시에 독립군 이백여명을 포로로 하야 벌목 징역을 식한 바 이것은 이미 해방하기로 작정(酌定)되엿으나 아라사(러시아) 당국은 이르쿠츠크파(伊市派)의 무함(誣陷)과 또난 군용차(軍用車)의 화목을 빙자(憑藉)하고 1년간이나 무임(無賃)의 노역(勞役)을 식켓더라
더욱이 원통한 것은 앞에 작성한 노동대(勞働隊) 가운데서 도망하야 중국령지방(中領地方)을 러시아지방(俄領地方)인 줄 알고 잘못 도달한 즉 중국 육군은 이를 궁당(躬黨=볼셰비키=赤軍)이라 하고 20여명을 총살하고 겨우 5명은 러시아촌에 와서 야간에 떡을 걸식(乞食)하려 하다가 절도(竊盜)의 혐의로 촌민의 포격(包擊)을 당하야 피살된 일이라더라
(소왕영 통신원경)
(※ 일부 표기를 요즘의 표기로 수정하였습니다.)
...... 독립신문 보도 끝 ......
1922년 7월경에는 연해주의 이용, 김규면, 박일리야 등이 지도하던 상해파측 독립군 부대에 이르쿠츠크파인 박창인, 김춘선, 심상구, 최미하일 등이 가담하자 또 양파의 분란이 발생한다.
이 때의 분란으로 이르쿠츠크파에 의해 일부 독립군들이 우수문 노동병으로 수감된다.
그들은 극동공화국 군부의 지시로 1922년 8월 9일경 석방되었다. (이르쿠츠크파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98쪽 등)
결국 1922년 8월경에 이르러서야 우수문 노역장에 수용되었던 자유시참변 포로 및 연해주 독립군 수백여명에서 ~ 2,000여명이 석방되기 시작한 것이다.
파벌싸움의 무서움은 이것이다.
러시아 공산당 중앙의 석방 지시까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양비서부, 슈먀츠키, 채동순, 박승만, 오하묵, 최고려 등은 시간을 끌며 석방조차 시켜주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르쿠츠크파 몇 명의 문건을 읽거나 자유시 참변, 니항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의 글을 읽을 때는 반드시 철저한 검증과 사실여부 확인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실제 조금만 비교검증하면 허위 주장한 부분이 나타납니다.
이르쿠츠크 독립군 부대의 원동 이동
이르쿠츠크 볼셰비키군 5군단 산하에 있던 독립군 부대는 대기근과 독립운동 노선 갈등 등으로 줄어들기 시작하여, 결국 류동열, 이청천 등도 이탈하였다.
볼셰비키 러시아 군부, 극동공화국 군부와 이르쿠츠크의 고려인 부대를 원동으로 이동시키기로 타협하여. 1922년 8월 15일경부터 원동으로 수송하였다.
그리고 같은 시기 장교와 군인중 주로 오하묵의 자유대대 출신으로 선발한 70여명은 수학키 위하여 모스크바로 보내고, 노약자로 제대한 군인 500여명은 각기 지원에 의하여 원동 각지로 출거하였고, 정식 군인은 고려특립연대로 원동 모처에 주둔케 하였다.
※ 출처 :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94쪽)
일본군 측 자료에 따르면 이 때 이르쿠츠크에서 하바로프스크 쪽으로 이동한 독립군 병력이 대략 1,200여명 정도라는 설이 있다.
일본군의 연해주 철군 준비
이 무렵 연해주에서는 일본군과 볼셰비키 간의 격렬한 전투가 없었다.
백파 군대의 상당수도 친일파 장작림이 장악한 만주로 후퇴한 상황이었다.
독립유공자 최호림·이지택 등이 주장하는 이르쿠츠크파 독립군의 활약상은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입니다.
1922년 10월 8일부터 ~ 9일까지의 연해주 스파스크 전투(Спасская операция (Штурм Спасска))에서도 고려인 부대의 활약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르쿠츠크 독립군 부대의 감축
원동으로 이동한 이르쿠츠크 독립군의 다수는 일본군이 동시베리아에서 철군하자, 러시아의 병력 감축에 맞추어 규모가 축소된다.
오하묵을 비롯한 장교 등과 모스크바 등지에서 교육 받은 사람은 소련 정규군으로 편입되었다.
결국 이르쿠츠크로 이동했던 독립군 부대는 일제와의 전투에 앞장설 기회를 갖지 못했다.
임진왜란 때 같으면, 아무리 과오가 있는 사람이라도 왜놈의 수급을 가져오면 면천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유시 참사를 일으킨 몇몇이 독립전쟁에 나가 조국독립의 염원을 입증하지 못하고 입으로만 주장한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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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침략군의 시베리아 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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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1922년 10월말경 동시베리아에서 철군한다.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 1922년 10월 25일경 극동공화국 군대가 다시 진입한다.
연해주에 잔존하던 러시아 내전 백파 군대의 상당수가 중국령 혹은 만주 등지로 탈출한다.
캄챠카 반도도 1922년 11월경 볼셰비키 군대가 해방시킨다.
1922년 11월 14일경 극동공화국 의회는 극동공화국을 해산하고 소련(1922. 12. 30일경 수립)에 가입하기로 한다.
일본군은 이제 사할린섬 북부만 점령하고 있게 된다.
1922년 10월 베르흐네우진스크 대회
1922년 10월 19일부터 ~ 10월 29일경까지 베르흐네우진스크(울란우데)에서 국내외 각지역 대표 등을 포함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연해주에서의 일본군 철군 등으로 인해 상해파 측 인원이 더 많이 참석하자 결의방법과 대표 자격 문제 등으로 이르쿠츠파가 이탈하여 실패한다.
※ 출처 : Док. № 86 Доклад Нам Ман Чхуна в Дальневосточный отдел ИККИ
Г.Н. Войтинскому о съезде корейских коммунистов в г. Верхнеудинске (Улан-Уде)
Док. № 89 Письмо Ли Дон Хви, Юн Чжа Ена и Ким Шен У В.И. Ленину
с жалобой на действия Г.Н. Войтинского и на непризнание
Исполкомом Коминтерна решений Верхнеудинского съезда ККП
1922년 11월경 한형권이 러시아 자금을 가지고 상해로 온다. (이 자금은 국민대표회의 자금으로 이용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때의 자금은 러시아측에서 한국 민족 운동의 연합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한국 공산주의자에게만 지급한 것은 아니다.
1922년 말경 코민테른의 개입과 양파 고려공산당 해산
1922년 말경 코민테른에 의해 두 파 고려공산당의 해체 결정이 내려진다.
이후 러시아, 중국, 만주, 한국, 일본 등지로 오가면서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대체로 1개 국가의 공산당에 가입하기를 권유 받는다.
1922년 11월경 블라디보스토크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Исполнительный комитет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го интернационала(ИККИ)) 극동국에 고려국(高麗局, 꼬르뷰로, Корбюро, Корейского бюро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го отдела, 혹은 고려총국)의 설치가 결정되어 1923년 2월경 활동을 시작한다.
의장은 바이친스키였으며, 이동휘, 한명세, 김철훈 등이 참가한다.
※ 출처 : 러시아 국가 사회 및 정치 역사 기록 보관소(РГАСПИ). Ф. 495. Оп. 135. Д. 73. Л. 261-265.
Док. № 109
Докладная записка Ли Дон Хви в Исполком Коминтерна о разногласиях в Корейском бюро и с предложениями по изменению его состава
г. Владивосток 17 ноября 1923 г.
적기단 조직
1922년 말에서 1923년 1월경 명칭은 공산당과 흡사하나 실상은 조선 독립당의 별동대인 적기단(赤旗團)이 사회주의자, 김좌진 등 민족주의자, 야소교인들이 가담하여 만들어진다.
※ 출처 :「조선일보 1923. 1. 20. 자 보도」,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 1923. 5. 3일자 3면 보도」
국민대표회의
1923년 1월 3일경 상해에서 독립운동계를 통합하고 독립운동 방법 등을 협의하기 위해 70여개의 독립운동단체와 각지역 대표 160여명이 모인 국민대표회의가 개막되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분열
1923년 5월에서 ~ 6월경 국민대표회의내 창조파 등이 상해임시정부를 대체하는 새로운 독립운동 통합 조직을 만들려고 시도한다.
※ 출처 : 독립신문 1923. 12. 5일자 보도내용. 동아일보 1923. 6. 15. 일자 3면 보도내용 등
1923년 6월에서 ~ 8월경 창조파 일부 등이 새로운 정부 성질의 독립운동 단체를 러시아에 세우려고 블라디보스토크(해삼)에 갔으나 실패한다.
(상해 독립신문 1923. 9. 1. 일자 보도내용, 신한민보 1923. 10. 11일자 보도내용)
1924년 4월경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국(꼬르뷰로)은 해체된다. 1924년 초부터 고려공산당창립대표회 준비위원회(조직국, 오르그뷰로, Оргбюро)가 만들어진다.
※ 출처 : 러시아 국가 사회 및 정치 역사 기록 보관소(РГАСПИ). Ф. 495. Оп. 135. Д. 94. Л. 9-12. Машинописная копия
Док. № 118
Полномочия и задачи Бюро по созыву Учредительного съезда ККП
22 апреля 1924 г.
1925년 3월 3일경 코민테른(국제공산당, 제3 인터내셔널)의 지적
1925년 3월 3일경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자유시 참변이 한국 문제에 많은 문제를 일으켰음을 지적한다.
......중략......
1921년 러시아 영내의 한국 독립군 무장 해제는 수많은 모순을 조성했다.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분파 투쟁을 격화시켰다.
또 러시아내 조선인의 분파투쟁은 혁명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후략......
※ 출처 : 러시아 국가 사회 및 정치 역사 기록 보관소(РГАСПИ). Ф. 495. Оп. 135. Д. 104. Л. 32-34. Машинописный текст, подлинник.
Док. № 130 Проект тезисов ИККИ по корейскому вопросу
г. Москва 3 марта 1925 г.
그리고 1925년 4월경에는 형식적으로나마 국내외의 여러 파를 통합한 성격의 조선공산당이 만들어진다.
한국 현대사에서 좌익계 사회주의 운동의 겉으로 통합된 조직이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1925년 5월 14일경 사할린섬 북부의 일본 군인들은 철군한다.
1925년 9월경 소련과 일본의 수교 이후 서울에 소련 영사관이 설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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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러시아령의 한인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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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주로 인터넷 사이트 : 고려사람 https://koryo-saram.ru)
소련이라는 나라의 수립
극동에서의 러시아 내전은 1922년 말경에 끝났고. 1922년 12월 30일 한국에서 소련이라고 부르던 공산주의 국가가 성립되었다.
소련 정부는 처음에는 한국인들에게 하였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공산주의 이상에 따라 소련은 처음에는 매우 진지한 국제주의를 보여 주려고 했다.
1920년대에는 고려인 공산당원, 고려인 장교(=소련군 장교), 고려인 공무원 등이 등장했다.
한국인들에 대한 자치 허용
러시아령의 여러 지역에서 한인(고려인) 마을 의회가 창설되었고 한국인들은 병역의 의무를 한국인 부대에서 복무했다. (소련군 76연대)
많은 교육 받은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이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과 정보국에서 일하도록 파견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세계혁명과 소수민족 해방의 국제적 슬로건에게도 불구하고 소련은 1920년대 한국인의 러시아 영토내 이주를 항상 도와준 것은 아니며, 우려하는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하였다.
연해주 일대의 고려인 밀집 지역
한국 농민들이 토지를 받고 연해주 지역에 새로운 한국 학교가 열리기 시작했고 (1930년대 초까지 300개가 넘었다), 한국 교육 대학이 우수리스크에서 운영되기 시작했고, 한국 극장이 설립되었으며, 한국어 신문이 연해주에서 발간되었고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후에도, 지금까지 “고려일보”라는 이름으로 카자흐스탄에서 계속 출판되고 있다.
연해주의 한국 교육기관
1930년대 중반, 블라디보스토크에 한국 교육원이 설립되어 당시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고등 교육 기관이 되었다.
(일본의 지배를 받던 한국 내에서는 대학 교육이 일본인을 중심으로 친일파·부르조아 계층을 대상으로 하여 일본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일제에 적극 협조한 한국인은 수두룩했다.)
소련의 공산당은 소수 민족을 지원하는 공식 노선에 따라 소련내 한국인들 사이에서 민족 간부를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아무르강·우수리강·두만강·몽골 일대 국경 봉쇄 시작
1925년경 외교 인민위원회(외무부의 기능을 함)는 한국인과 중국인이 소련 영토로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명령했다.
1929년 세계 대공황시기에 소련으로 이주했던 미국, 유럽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소련 내에서 이주와 직업선택이 항상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만주 친일군벌, 일본 괴뢰인 만주국, 일제 식민지 조선과의 국경 문제
만주의 친일파(장작림·장종창·장학량 정권과 그 후신)들과 소련은‘1929년 동청철도 중동로 사건’과 국경분쟁이 있어왔으며. 1930년경에서 연해주 지방정부와 소련 중앙정부 등에 의해 러시아와 한국, 중국 간의 국경 출입은 더욱 엄격해졌다.
일제의 괴뢰인 만주국 수립과 국경 폐쇄
1931년 이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여 아무르강·우수리강 등을 중심으로 소련과 국경을 접하게 되자 국경을 넘는 불법 이동과 이주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 물론 소수의 불법적 이동은 항상 있었다. 요즘도 각종 밀엽꾼들과 밀수꾼들, 탈북자 등이 활발하게 활동한다.)
이 때부터 러시아 영토에서 간도, 만주, 한국땅으로 독립군이 공격해 오거나 러시아 영토로 대피하는 것이 급격히 줄어들었으나, 소수의 항일 유격대들은 1945년 8월 소련군의 만주국 공격 전까지 국경 일대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오늘날에도 중국, 한국, 러시아, 몽고 국경을 이루는 아무르강, 우수리강, 압록강, 두만강 등의 경비는 삼엄하다.
심지어 종종 국경을 넘다가 사살되는 사람도 있다.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1937년 극동의 고려인들 약 17만에서 ~ 23만여명 정도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참상은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연해주 일대의 고려인 밀집지역과 1937년 강제 이주후 중앙아시아에서는 20세기 초에 평범한 고려인들은 러시아 말을 몰라도 농민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
고려인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한국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한국 노인들과 소통하고, 한글(한국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무렵의 고려인들과 러시아·우크라이나·중앙아시아·시베리아·중국 등 다른 민족과의 혼혈은 매우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후 수 세대가 지남에 따라 한국어를 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줄어들었고, 후손들은 러시아쪽 문화에 동화됩니다.
이것은 중화인민공화국령 간도·만주지방 거주 조선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르주 인근 거주 고려인들에게도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은 자연스럽게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맺음말
1921년 6월 28일 시베리아 아무르주에서 발생한 자유시 참변은
외세 침략주의자들의 야욕과 일제의 앞잡이가 득세하던 어둠의 시기,
조국 독립의 일념으로 자유시 일대에 모였던 독립운동가들에게 일어났던 참변입니다.
자유시 수라제프카 마을에서 일어난 자유시 사건(=자유시 참변=아무르 사건)이 한국 독립운동사에 어떤 결과를 남겼는지는 많은 의견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역사를 다룬 학교 역사교과서에 기록될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별 것 아니었는데 한국의 일부가 그들의 목적을 위해서 과장 혹은 왜곡하였는지 여부, 자유시 사건 이후 참여자와 관계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를 찾아보면 다양한 의견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한국 기록의 공통점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지휘권 다툼에서 비롯되어 발생한 불행한 사건이었습니다.
사망자 수는 주장마다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그리고 만주지방 독립군 단체 사망자 조사원의 보고를 넘어서는 근거 있는 자료를 찾기 힘듭니다.
숙식난, 추위, 전투 속에서 자유시에 모인 6천에서 ~ 8천여명의 다양한 독립운동가들 눈앞에서, 여러 이념으로 뭉쳐진 몇몇 사람들이 다퉈 동지에게 총을 쏘는 생지옥의 참극을 연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유시 참변 이후에도
자유시에서 경험하였던 여러 가지 빈부격차, 자원, 민족, 종교, 이념, 정치체제 등의 내부적 문제는 한반도의 분단과 한국의 반공정권 수립, 북한의 독재체제 등과 겹쳐져 1991년 소련 붕괴시까지 쉽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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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Доклад уполномоченного Дальвостсекретариата Коминтерна при Реввоенсовете корейских революционных войск Охолы за период времени от 20 мая до 20 июля 1921 г. // РГА СПИ. Фонд 17. Опись 84. Дело 210. Лист 36 об. (코민테른 오홀라 관련 문건)
◇ (일본의 시베리아 침략 사진첩) https://youtu.be/-x9pzhFTN3k
'흑하사변'이라는 잘못된 용어는 오늘날 계속 사용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있다.
자유시 인근
수라제프카 구역은 큰 홍수시 쉽게 잠길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자유시 참변 무렵의 자유시 모습
제야강을 통해 목재 가공산업이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