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1주간 화요일(루카14,15-24)
이리로 데려오너라
살아가면서 닥치는 일에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누구의 초대를 받았는데 사정이 생기면 양해를 구하고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 맞습니다. 밭을 샀으면 밭에 나가 보는 것이, 당연하고 겨릿소를 샀다면 그 소를 잘 샀는지 부려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방금, 결혼을 했다면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은 인정해 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가야 할 잔치집이 생겼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이 마련되었습니다. 그 잔치에 초대받은 것이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그 앞에서 무슨 핑계가 필요합니까? 더 좋은 것, 지금까지 갈망하던 하느님 나라가 눈앞에 주어졌는데 왜 망설여야 합니까? 결국, 지금까지 기다리고 희망하던 것은 헛된 환상이었습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세상 것이 더 좋은데 그것을 어떻게 놓고 가라 하십니까?
그러나 “나 없이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도 나 없이 나를 구원하실 수 없으십니다.” 구원의 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결코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저러한 핑계를 갖는 한, 구원의 잔치에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우선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먼저 선택하면 나머지는 다 채워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사로운 정 때문에 인간적인 것을 택하면, 하느님을 만날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루카14,24). 결국, 처음 초대를 받았던 사람들은 재산과 사업상의 관계, 가정사라는 핑계로 말미암아 구원의 문에서 멀어졌습니다.
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초대를 외면하였습니다. 오히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좋아했습니다. 그야말로 배가 부르면 산해진미가 귀찮고 배고프면 보리죽이 꿀맛입니다. 그런데 헛배가 불러서 스스로 배부르다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있어서 걱정입니다. 스스로 배부른 착각에 빠져 죽어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데려 오너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초대에 응답해야 할 사람입니다.
뿌려진 씨앗의 비유(마태13,1-9)를 한번 생각해 보면 씨앗이 어떤 것은, 길바닥에, 어떤 것은 돌밭에, 그리고 가시덤불에,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은 것은 당연히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밭을 준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길바닥 같은 딱딱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그는 무관심한 사람이지요, 돌밭은 흙이 얼마 없다는 것으로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시련이나 어려움이 오면 금방 신앙이 죽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가시덤불은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나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핑계를 대던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 말고 매 순간 하느님 앞에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안녕을 열망하며 그것을 너무 많이 고려하다가 그만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맙니다. 어떤 분이 그러더군요. ‘돌다리를 두드려보다가 오히려 돌을 깨뜨리고 만다고!’ 잔머리를 굴려 이리저리 계산하지 말고 하느님을 꼭 잡으시길 바랍니다. 함께 모여야 할 자리를 기억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첫댓글 장-프랑수아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 1865-66년경, 종이에 콘데와 파스텔, 47 x 37.5cm, 마싸추세츠 스텔링 & 프란신 클라크 미술관(Massachussets), 미국
끝없이 펼쳐지는 드넓은 대지 한 가운데에는 힘찬 발걸음으로 내딛으며 씨를 뿌리는 성실한 농부가 있다. 멀리 지평선에는 밭을 가는 또 다른 농부가 그리고 하늘에는 검은 까마귀 떼의 날아드는 모습이 생기 넘친다. 이 농부의 거친 동작 속에는 비장함과 굳은 기지가 느껴지고 비록 옷차림은 남루하지만 고귀한 기품 마저 느껴진다. 또한 전체적으로 갈색톤이 지배하는 부드러운 파스텔과 목탄 종류인 콘테(Conté)로 그려져서 그 표현이 은은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는 진리의 “말씀을 뿌리는 사람”으로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을” 약속과 확신에 찬 모습이다.(마르 4,1-20) 19세기 프랑스 자연주의 화가 밀레는 거의 전 생애를 파리 근교의 바르비죵(Barbizon)에 살면서 하느님의 위대한 창조물인 자연 속에 보다 가까이 살면서 신의 존재를 발견하려 하였다.
아멘!~~~"구원의문"
묵상 하고갑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
우리는 초댓장에 응답해야 할 사람입니다.
아멘
우리는 초대에 응답해야 할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