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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자유시 참변 100주년을 맞이해서 카페에 올렸던 글을 다시 8편으로 통합하였습니다.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1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2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3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4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5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6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7편
수라제프카의 총소리 : 1921년 자유시 참변 전말 8편 (참고 인물과 간단한 해설)
몇몇 참고 인물과 간단한 해설
◇ 고명수(高明秀)
◇ 곽송령(郭松齡)
◇ 구트만, 아나톨리 야코블레비치(일명 굿맨 : Гутман, Анатолий Яковлевич. 영문명 Gutman, Anatoly Yakovlevich. 필명 : Gan, A. (Anatoly) 등을 사용함. 1889년경 출생~1950년경 사망) 1918년경 러시아 내전기 백파로 활동하였으며, 시베리아에서는 악명 높은 시묘노프 등과 협력하였다. 일본으로 도피후 니항을 방문하여 니항사건과 관련된 책을 일본에서 출판(영문도서명 The destruction of Nikolaevsk – on - Amur :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1920 등)하고 반볼셰비키 신문을 도쿄에서 발행했다. 구트만의 책은 일본 등지에서 자주 출판된다. (한국인 이지택의 주장도 일본에서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현재 러시아에서는 1만여명 이상의 니항 주민이 학살되었다는 구트만의 주장에 대하여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1920년 니항사건 이후 볼셰비키 타도를 위해 러시아계 파시스트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 구춘선(具春先 : 1857~1944) 만주지방에서 예수교 단체를 조직하였으며 유명한 독립운동가
◇ 권중선((權重仙, 혹은 권중전, 권중강)
◇ 김강(金崗)
◇ 김기룡(金琪龍)
◇ 김기형(金璣衡)
◇ 김규면(金圭冕, 이명 : 김백추, Ким Бяк-чу. 1881~1969) 경흥군 출생, 모스크바에서 작고. 관련도서 : [История рода КИМ БЯК-ЧУ, борца за независимость Кореи], 모스크바, 2016, ISBN 978-5-91775-292-1
◇ 김규식(金查植 : Ким Гю Сик) 동일한 이름을 쓰는 여러 명이 있다.
◇ 김경천
◇ 김낙준(金洛俊)
◇ 김낙현(김학현, 혹은 김 이노껜지 이바노비치) 안드레예브에 대해 진술함
◇ 김동한(金東漢 : Ким Дон Хан) 자유시 참변이후 나중에 일제 밀정으로 변절
◇ 김립(金立) 명천군 출생
◇ 김민선(金敏善 : Ким Мнишен, 혹은 김민석 : Ким Мнишек)
◇ 김성(金星)
◇ 김성배(金聖培) 신민단 대표
◇ 김성우(金聲宇 : Ким Шен У, 이명 : 김아파니시 추정 : Ким Афанасий Арсеньевич)
◇ 김성원(金性元) : 광복단대표
◇ 김승빈(金承彬 : Ким Сын Бин)
◇ 김시현(金始顯 : Ким Си Хен)
◇ 김알렉산드라(Ким, 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등의 이름 : 1885~1918) 시베리아 지역 유명 독립운동가
◇ 김연원(金演源)
◇ 김원서(金元瑞)
◇ 김종헌(金鍾憲)
◇ 김직묵(金直黙) 농무회
◇ 김진(金震 : Ким Дин)
◇ 김좌진(金佐鎭 : 1889년경 출생~1930)
◇ 김철(金鐵) 국민회군 활동
◇ 김철훈(金哲勳)
◇ 김하석(金河錫 : Ким Ха Сек)
◇ 김홍일(金弘壹 : 1898~1980) 유명한 독립운동가. 1921. 6월경 아무르주 자유시를 방문하였으며, 러시아 내전기 사할린부대장 박일리야 등과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군활동을 하였다.
◇ 계봉우(桂奉宇 : Ге Пон У)
◇ 그리고리예프(Григорьев)
◇ 윌리엄 시드니 그레이브스(William Sidney Graves) 미국인. 러시아 내전 무렵 미국 시베리아 간섭군 사령관
◇ 나우모프(Наумов, Тихон Иванович : 1895 ~ 1920. 3. 12.) 이르쿠츠크에서 볼셰비키에 가담. 1918년 일제 침략군과의 전투에 참여. 니항사건 당시 트리피츤 부대의 참모장으로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사망. 트리피츤 부대는 대략 100~500여명 사망으로 알려짐. 오늘날의 니항시에 나우모프의 이름 딴 거리가 있다.
◇ 나중소(羅仲昭)
◇ 남만춘(南萬春 : Нам МанЧхун = Нам Мачхун = Нам Ман Чху)
◇ 니항사건(= 니콜라옙스크 사건 =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 廟街事件 = 尼港事件 =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 にこうじけん)
◇ 당취오(唐聚伍)
◇ 라조(Лазо́, Серге́й Гео́ргиевич : 1894 ~ 1920) 연해주의 유명 파르티잔. 1920년 4월경 일본군에 체포되어 증기기관차 화로에서 살해됨
◇ 라프타(Лапта, Яков Рогозин) 볼셰비키에 의해 사살됨
◇ 류동열(柳東說 : Лю Тон Ер)
◇ 류조심(Ю-Зосим) 혹은 류소심, 유소심 등의 이름이 있음
◇ 레비제바, 니나 미하일로브나(Лебедева, Нина Михайловна : 1895 ~ 1920. 7. 9.) 1895년경 모스크바에서 출생. 펜자지방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소리도 있다. 1914년경부터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자 활동을 하였다. 동시베리아 치타에서 아들을 출산하였다는 소리가 있다.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 하바로프스크 등지에서 소비에트 건설에 참여하였다. 1919년 하바로프스크 인근의 아나스타시예프카(Анастасьевка) 마을에서 열린 볼셰비키 회의의 서기였다.
레비제바는 키야슈카(Кияшко)라는 성을 쓰기도 하였는데, 백파와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은 키야슈카 주지사의 친척 혹은 양딸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가족관계 문서에 따르면 키야슈카 주지사와는 별 관계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니항사건 기간중 트리피츤과 동거하였다. 1920. 7. 9. 께르비에서 트리피츤과 함께 처형되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는 트리피츤의 부인 「니나 레베데바」라고 나오며 최호림, 이지택은 일본의 주장과 일치되게 총독(주지사)의 딸이라고 주장한다. 최호림과 이지택의 1945년 해방이후 니항 사건과 관련된 주장들은 일제침략기 일제의 주장과 일치되는 점이 많고, 오늘날 러시아 기록과는 정반대되는 경우가 많다.
◇ 마자나바(Мазаново) 러시아 아무르주의 한 개 군, 자유시 북동쪽에 위치
◇ 마점산(馬占山)
◇ 마충걸(馬忠傑 : 이명 마춘걸) 간도,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
◇ 문창범(文昌範 : МУН ЧАНГ БОМ)
◇ 문학빈(文學彬) 오동진 등과 간도일대에서 독립운동, 광복이후의 행적 불명확
◇ 미진(Мизин, Григорий Семёнович) 1919년경부터 사할린주 니항에서 공산주의자로 활동. 1920. 5. 24.일경 트리피츤의 지시에 의해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총살되었다.
◇ 바라비요프(Воробьёв, Пётр Яковлевич) 께르비 인근 광산에서 백파군대에 있다가 러시아 내전기 볼셰비키에 가담함. 1920년 니항사건 당시 니항 방화에 참가하였다. 께르비에서 103명 법원의 부의장으로 트리피츤을 처형후 일본측으로 도주함. 1921년 6월 6일 볼셰비키에 의해 체포되었다. 20년 강제노동형을 선고 받았다. 친일파시스트인 구트만의 책에 중요 증인으로 등장한다.
◇ 바이친스키(Войтинский, Григорий Григорий Наумович : 1893~1953)
◇ 박그레고리 자유시참변 참가하여 이르쿠츠크 교도소 투옥
◇ 박경철(朴景喆)
◇ 박노순(朴魯順 : Пак Носун) 다반군대 활동
◇ 박대성(朴大成) 태극단
◇ 박병길(朴秉吉, 朴炳吉, 박바실리, 박와실리, Пак Василий, ワシリー朴. 1898년경 출생 추정~ 1921. 1월 혹은 2월경 사망) 1917년쯤부터 니항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1918년경 일본의 시베리아 침략기 일본군이 점령했던 니항의 조선인 민회 주무였다. 이지택, 김낙현, 최호림, 김창순, 박경리 등의 대략적인 주장에 따르면 1919년 3·1운동 이전에 니항의 일본인들이 알 수 없었던 비밀독립운동을 단체를 조직하였고, 조선인 니항부대 380여명을 조직해 니항을 해방시켰으며, 성품이 원만하고 살인과 약탈을 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러시아측 기록과 일본측 기록에는 그런 이야기는 전혀 없고, 친일조선인단체를 조직한 정체 불명의 사람으로 1920년 7월 피난길에 올라 일본군의 협조로 트리피츤을 직접 체포해 처형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박병길의 행적도 이르쿠츠크파의 일부가 상당 부분 거짓말한 것으로 보여진다. 박병길이 일제의 밀정이었는지 여부는 오늘날 확인이 곤란하지만 박병길의 동료였던 안드레예브(자유시 포병부대장)는 자유시 참변이후 일제에게 도주하였다. 박병길은 자유시 참변 이전 독립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 박승만(朴承晩, Пак Сын Ман)
◇ 박일리야(박윤천, 朴允天, Пак Илья Харитонович, 朴イリア)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사에 등장하는 니항사건 당시 마가촌의 교사로 있다가 조선인 니항부대를 조직한 유명한 독립운동가. 연해주 일대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 박영(朴泳)
◇ 박애(朴愛 : Пак Ай, 박마트베이)
◇ 박원섭(朴元燮)
◇ 박진순(朴鎭淳, Пак Динь Шунь, Пак Чинсун)
◇ 박창은(朴昌殷, Пак Чан Ын)
◇ 방우룡(方雨龍, 이명 : 방위룡)
◇ 북경군사통일회(北京軍事統一會) 1921년경 북경 인근에서 상해임시정부와 대립되는 측에서 만주, 연해주 일대의 독립군 부대 통일을 위해 개최하였던 회의였으나 독립군부대 통합에 실패하였다.
◇ 비첸카(Орлянковский-Биценко, 이명 : 비첸코) 니항 인근 백파군대에 있다가 트리피츤 부대에 항복하였다. 일본군의 재공격으로 께르비로 대피하면서 볼셰비키인척하고 사람들을 살해함. 1920년 6월경 볼셰비키에 의해 처형됨. 니항사건 당시 청소년에 불과했던 김낙현의 진술에도 등장한다.
◇ 부진-비치(Бузин-Бич, Дмитрий Семёнович. 1887년경 출생 ~ 1938년경 하바로프스크에서 처형. 1957년 구소련에서 복권됨) 1908년경 이르쿠츠크 사범학교 졸업, 하바로프스크 인근에서 교사 생활. 1차 세계대전에 차르군대 장교로 출전. 러시아 내전기 니항에서 볼셰비키에 가담함.
1920년 3월 12일경 니항에서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트리피츤이 부상당한 후 함께 사진 촬영한 사람이다. 트리피츤 부대의 간부로 께르비에서 처형되지 않고 생존하여 니항사건에 관한 회고록을 남김. 트리피츤 부대의 간부들이 모두 처형된 것은 아니며 동시베리아 일대에서 활약한 사람도 다수 있다.
◇ 블류헤르(Блю́хер, Васи́л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 1890~1938)
◇ 사소프(34세쯤에 사망. Сасов-Беспощадный Ефим Варфоломеевич) 니항사건 당시 조선인으로 구성되었던 부대의 부대장(1920 г. - командир корейского партизанского отряд) 역임, 니항의 징발위원회 위원장. 1920년 5월경 사할린주 바가로드스크 지역 지휘관(командовал Богородским фронтом). 1920년 7월 9일경 께르비에서 트리피츤과 함께 처형됨
◇ 사파라프(Сафаров, Георгий Иванович : 1891~1942) 코민테른 총비서 등 역임
◇ 사할린 의용대(Сахалинский Корейский партизанский отряд)
◇ 서초(徐超)
◇ 셰브첸카(Шевченко, Гавриил Матвеевич : 1988 ~ 1942) 동시베리아에서 파르티잔 활동
◇ 소병문(蘇炳文) 러시아 내전 무렵 시베리아에 중국군으로 간섭함. 청산리 전투 등에 대한 진술을 남김. Y17243 蘇炳文同志紀念冊編輯組 編 蘇炳文同志紀念冊編輯組 出版 1987 苏炳文与海满抗战
◇ 시마다 모토타로(島田元太郎,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일본인. 1870년경 일본 나가사키현 출생 ~ 1945년경 조선 평양에서 사망) 동시베리아에 진출한 일제의 최고위급 민간인 밀정. 니항에서 시마다 상회와 가라유키상 성매매업소 등을 운영하며, 화폐까지 발행했다.
당시 자원의 보고였던 사할린주와 니항의 일본 민간인 진출을 이끌었고 1920년경 니항사건 당시 니항의 일본인거류민회 회장이었다. 생환한 여성들의 구제와 일본정부에 대한 보상소송에 앞장섰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침략에 동원되었던 조선인 가라유키상 여성이 귀환했는지 여부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박병길 등에 대한 진술을 남겼다. 1945년경 광산업과 성매매업을 하던 조선 평안도 평양에서 사망하였다.
◇ 시묘노프(Семёнов, Григорий Михайлович. 일명 셰묘노프, 1890~1946) 시베리아와 만주에서 친일활동을 하였다.
◇ 심용운(沈龍雲)
◇ 심용준(沈龍俊) 문학빈, 오동진, 심만호 등과 독립운동
◇ 스말야크(Смоляк, Виктор Григорьевич) 니항사건을 다룬 「내전 : МЕЖДОУСОБИЦА」 (2009년경 출판) 등을 쓴 저자
◇ 슈먀츠키(Шумяцкий, Борис Захарович. 1886년경 출생 ~ 1938년경 사망) 오늘날의 동시베리아 울란우데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경부터 볼셰비키에 가담하였다. 1921년경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장을 지낼 당시, 한국계 이르쿠츠크파 독립군을 편들어 자유시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1921년 자유시 참변이후 한국계 독립운동가들의 반발로 동양비서부장에서는 해임되었고 한국의 독립운동과 직접 관련된 분야에서 제외되었다.
부인은 릴랴 이사예브나(Лия Исаевна)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서 일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오늘날 슈먀츠키의 후손들은 자주 인터뷰 등을 하고 있다.
◇ 셰르셰프(Серышев, Степан Михайлович. 1889 ~1928년 사망) 차르 러시아 장교출신이다. 러시아 내전기 볼셰비키에 가담하여 동시베리아 아무르주 지역에서 군대 지휘관이 되었다. 1921. 6. 27.일경 자유시를 관할하던 볼셰비키 군대 제2군단장이었다. 자유시 참변의 현장에 셰르셰프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1926년경 일본주재 대사관 무관으로 일했다. 모스크바에서 병사하였다.
◇ 아우셈(Ауссем, Отто Христианович : 1875 ~1929) 볼셰비키
◇ 안드레예브 이반 찌하노비치(Андреев, Иван Тихонович. 1884~1933) 안드레예브가 주장하기를 제정러시아 시대 니항인근 츠니르라흐 요새에서 포병부대 장교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확인결과 장교도 아니었다고 한다. 1920. 2. 29. 니항해방 이후 볼세비키에 가담하여 트리피츤 부대에서 간부가 된다. 일본군의 재공격으로 피난길에 올라 1920년 7월경 께르비에 머무르던 트리피츤 등을 일본군의 협조 아래 바라비요프, 압친니코프, 박병길, 이지택, 김낙현 등과 합세해 기습 체포후 처형했다.
이후 트리피츤 부대가 해산되기 시작하였으며,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로 이동하여 경찰서장을 했다고 안드레예브의 가족이 주장하나 오늘날 러시아측 학자들 연구결과 거짓말이라고 한다.
1921년 한국독립운동사에 등장하는 자유시참변 무렵, 아무르주 자유시에서 포병부대 지휘관을 한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자유시 일대에서 트리피츤 지지자들로부터 3차례 정도의 살해공격을 받았으며, 일제측으로 도주하였다가 중국 상해에서 사망하였다. 직계후손들은 현재 미국에서 구트만과 같은 각종 주장을 하고 있다.
독립유공자 최호림, 이지택은 안드레예브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트리피츤이 니항에서 포병대장으로 5년~6년간 근무했다고 거짓말했으나 이것은 한국에서 과거 인정조차 되지 않았으나, 오늘날 한국의 몇몇 논문에서 인용한다. 특이하게도 일제와 친일파의 주장과는 다르게 니항에서 러시아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 안무(安武. 1883~1924) 마자나바 등지에 주둔하였던 유명한 독립군 부대장
◇ 안병찬(安炳瓚)
◇ 안태국(安泰國)
.....중략.....
◇ 알렉산드라프스크(Александровск) 북 사할린섬에 있는 항구
◇ 엄지영(嚴智永, 혹은 연지영, 엄지연) 니항사건 등 참가, 류소심의 사위
◇ 엄준(嚴俊) 동명이인 다수 있음
◇ 엄세준(嚴世俊) 함북 경성
◇ 압친니코프(А. Овчинников) 께르비(Керби)에서 트피피츤을 처형한 법원의 간부. 일제측으로 도피후 1935년경 미국에서 니항사건 관련 도서 출판
◇ 야한토프(Яхонтов, Иван Андреевич. 1894년경 출생) 1918년경 아무르주 자유시와 블라가베셴스크에서 볼셰비키 활동. 1920년경 니항에서 트리피츤과 함께 파르티잔 활동. 께르비에서 안드레예브와 박병길의 반란으로 체포되었으나 블라가베셴스크로 조선인들과 이동중 탈출. 1923년 하바로프스크에서 복권되어 공산당 활동
◇ 여운형(呂運亨. 1886~1947, Е Ун Хен)
◇ 오광선(吳光鮮. 1896~1967) 유명 독립운동가
◇ 오석영(吳錫永) 야단
◇ 오진연(吳鎭衍)
◇ 오하묵(吳夏默, Огай Христофор Николаевич, 혹은 Огаи О Ха Мук, 1895 ~ 1937) 제정 러시아 차르군대의 일원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며, 볼셰비키에 가담하였다. 1920년경 러시아 시베리아 아무르주 자유시에서 한인 보병자유대대장을 지냈다. 자유시 참변 당시 한인보병자유대대 병력을 동원하여 대립했던 사할린부대 및 독립군들을 기습 공격하였으며, 이후 독립운동 역사상 보기 드물게 이르쿠츠크에서 1,000~2,000여명 정도의 한국계 독립군 부대 여단장을 지냈다. 소련군 최종계급은 대령 정도로 상당히 높았으며 1937년 소련 대숙청 당시 처형되었으나 나중에 복권되었다.
◇ 오홀라(охола) 자유시 참변에 대한 보고서를 남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간부
◇ 우수문(Ушумун, 혹은 우슈문) 아무르주 자유시 북서방향의 행정구역
◇ 유봉득(劉鳳得) 신민단 대표
◇ 유익정 - 오하묵이 지휘관으로 있던 보병자유대대 대원
◇ 윤덕보(尹德甫) 군비단 대표
◇ 윤자영(尹滋瑛 : Юн Чжа Ен)
◇ 윤좌형(尹佐衡) 야단
◇ 이동휘(李東輝, Ли Дон Хви) 상해임시 정부 간부
◇ 이두(李杜)
◇ 이바나프카(Ивановка)
◇ 이범석(李範奭 : 1900~1972) 중국 운남에서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경 김좌진 장군과 청산리 전투에 가담하였다. 1971년경 자서전 「우등불」을 출판하였다. 김좌진과 청산리 전투 참가 사실은 일제 강점기 중국계 반일투사들에게도 사실로 인정되었다. 1945년 해방이후 한국에 와서 대한민국 건국 당시 초대 국무총리 등의 고위직 관리를 지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러 한국에서 청산리 전투 등에 관한 이범석의 주장이 과장되었음이 밝혀져 신뢰성이 많이 줄어들었으나, 만주에서는 중국의 악명 높은 친일파 장종창과 관련된 적이 있음을 사실대로 진술하였고,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일부 한국계가 만주의 친일파들과 결탁하였음을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령과 만주지역에서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주장을 검증함에 있어서, 과장된 주장들을 검증해 볼 수 있는 기록중 하나이다. 이범석은 행적을 과장한 사람들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에 반대하였다고 한다. 러시아령에서의 독립운동에 관해서는 오류도 많고 사실대로 쓴 부분도 많다.
◇ 이병채(李秉采 : Ли Бен Че)
◇ 이봉우(李鳳雨) 국민회대표
◇ 이성(李聖, Ли Сенг)
◇ 이시다 토라마츠(石田虎松) 니항 일본 영사관의 영사대리 부영사(領事代理 副領事)로 니항사건 당시 처자식을 먼저 죽이고 방화후 자살함
◇ 이시카와 세이가(石川正雅) 1920년 니항사건 당시 사할린주 니콜라예프스크 항구의 일본군 수비대장(대대장)
◇ 이용(李鏞 : 1888~1954) 유명한 이준열사의 큰아들이다. 상해파 계열 독립운동가이며, 이동휘, 구춘선, 안무 등과 함께 러시아령과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1년 자유시참변 무렵 박일리야 등과 함께 사할린 의용대 등의 독립군을 조직하여 만주 등지로 이동하여 국내진입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해방이후 월북하였다.
◇ 이중집(李仲執)
◇ 이지택(李智澤. 1899~1976) 독립유공자. 이르쿠츠크파, 화요파계. 한국에 온 후 1947년경부터 1920년 세계 주요 언론에 톱뉴스로 크게 보도되었던 니항 사건에 대한 많은 주장을 하였다. 다른 니항사건 관계자들과는 다르게 「삼천리」, 「신동아」 등의 잡지에 대립하였던 박일리야 부대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설을 줄기차게 주장하였다. 오늘날 일본 역사학계에서 시베리아 출병사를 다룸에 있어서 니항 조선인 민회 주무 박병길과 함께 자주 인용되는 인물이다. 이지택 본인은 1919년 3·1운동 당시 국내에 있었다고 주장하였으나, 같은 이르쿠츠크파였던 최호림·김낙현 등의 주장은 다르고,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니항사건과 자유시참변에서는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지 않는다.
◇ 이오키 료조(五百木良三. 일본의 유명한 시인) 침략주의 이론가로 러일전쟁 개전, 히비야방화사건, 한일합방 여론 조성, 장작림폭살에 관여하였다. 1920년경 니항사건에 관한 책을 출판하였다.
◇ 이포(ЛИ-По, 혹은 리포) 자유시 일대 반일 운동가
◇ 이흥진(ЛИ ХУН ЧИН, 리흥진) 니항사건에서 순국
◇ 이희삼(李凞三) 군비단
◇ 임상춘(林常春, Им Сан Цун)
◇ 임병극(林炳極)
◇ 임표(林彪) 북청군 출생, 군비단 활동
◇ 임학우(林鶴祐) 태극단
◇ 임호(林虎)
◇ 왕덕림(王德林)
◇ 장건상(張健相)
◇ 장기영(張基永)
◇ 장전구(張殿九) 1932년경 몽골로 피난 가서 작고함
◇ 자유시 참변(Амурский инцидент = 자유시 사건 = 아무르 사건)
◇ 장도정(張道政, Тян До Ден)
◇ 장민준(張敏俊) 청년독립단
◇ 장상두(жан-сан-дю, 혹은 장상주) 자유시 일대 반일 운동가
◇ 전희서(田希瑞, 혹은 전희세, 정희세, Тен Хи Ше 추정. 1896 ~ 1938. 3월경 사망) 러시아 자유시에서 독립군부대 조직. 소련군 장교를 지냈다고 함
◇ 전능효
◇ 정태선(鄭台善) 청년독립단
◇ 조응순(趙應順. 1885년경 출생)
◇ 조훈(曹勳)
◇ 주경란(朱慶瀾)
◇ 주복성(周福成)
◇ 주영섭(朱榮燮)
◇ 주코프스키-주크(Иосиф Иванович Жуковский-Жук, 1889~1937)
◇ 진세영(陳世栄 = 혹은 진계량 陳季良 : 1883 ~1945) 복건성 푸저우 출생, 강남수사학당 필업. 1920년 아무르강 하류 니항사건 기간중 배수량 550톤 정도의 군함 강형(江亨)의 함장 겸 분함대 영대장. 일본군의 기습공격 당시 파르티잔에 협조하여 함포를 파르티잔들에게 대여하였다고 한다.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등은 처형되었으나 진세영은 일본군의 재공격에 니항에 있던 중국인 2,000여명과 중국 영사를 피난시키고, 4척의 함대를 아무르강 상류인 하르빈으로 무사히 이동한다. 1924년경 장령으로 승진한다. 1932년 해군 1함대 사령. 1937년 8월 12일경 양자강 강음해전(江阴海战)에 출전.
◇ 재등실(사이토 마코토 : 齋藤實) 조선총독, 수상 등을 지낸 일본정치인 日記, 수첩을 남김
◇ 파고진(Погодин) 극동공화국 군부 인물
◇ 파포프 니콜라이 이바나비치(Попов,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 1924 ~ 2005) 자유시(스바보드니시)의 유명한 역사학자. 러시아 내전기 백파와 일본군에 의해 살해된 스바보드니시의 볼셰비키 파포프의 친척이다. 한국의 동아일보 1989. 8. 15. 일자 7면은 파포프와의 인터뷰 내용을 보도하였다. 이 기사에서 파포프는 1921. 6. 28. 자유시 참변이 자유시 수라제프카 구역의 미하일로-체스나코프스카야 기차역 급수탑 주변과 제야강 쪽인 오늘날의 셰르셰프 장군의 거리 등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하였다. 또 기사는 러시아계 유명 파르티잔 까란다리쉬비리 등이 관계되어 발생하였음을 보도하였다. 파포프는 수라제프카 구역 타타르스코예 묘지 주변에 독립군이 매장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풍점해(馮占海)
◇ 프라예르만(Фраерман, Рувим Исаевич : 1891 ~ 1972) 러시아의 작가
◇ 프셰니짜(Пшеница 혹은 프셰니차) 연해주의 볼셰비키
◇ 프치츤(Птицын, Серг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 1898년경 출생) 니항사건 참가
◇ 체룜느흐(Черемных)
◇ 채동순(蔡東順 : Цай Тон Шун (Александр))
◇ 채세윤(蔡世允) 사할린 의용대원
◇ 채영(蔡榮, 혹은 蔡英) 훈춘현 출생. 항주 군관학교 필업. 자유시 사건 참가
◇ 최고려(崔高麗 : Цой Ко Рё, Цой Ко Ре. 1893~1962) 1920년부터 공산당원. 1922년 1월 21일~2월 2일경 극동 인민대회 대표단원. 마르크스의 저서의 한국어 번역에 참여함. 이르쿠츠크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제정 러시아 시대 예수교 전도사까지 한 적이 있다고 자서전에서 진술하였다. 1921년 5월경 자유시 참변 무렵,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 최호림, 오하묵, 류동열, 이청천 등과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하고 군정위원장의 요직에 앉았다. 자유시 참변 직전에는 홍범도가 동조한 데 이어, 안무 등도 고려혁명군정의회에 한 때 협조하였다. 사실상 자유시 참변의 주도한 최고 지휘관이었다.
한국어를 전혀 모르던 러시아계 까란다리쉬비리, 슈먀츠키, 오홀라의 통역사로 활동하였다.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자유시 일대 독립군 부대 조직에 관계한 것도 사실이다. 최고려는 자유시 참변이후 잠시 득세하였고, 연해주 등지에서 국가보안국 게페우(ГПУ)에서도 일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유시 참변 수년이후 이르쿠츠크파였던 최호림 등 자유시 참변 당시 독립군 참살에 가담한 자들이 정리될 때부터 소련시대 교도소에 9년 이상 투옥되었다고 한다. (※ 러시아 정부 문서와 상해파의 일방적 주장에 따르면) 한명세, 남만춘 등은 1925년 조선의 서울에서 이르쿠츠크파 일부 지지자를 규합하여 「화요회」라는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데 관여하였고, 코민테른 중앙위원회의 방침을 위반하였으며 이들이 만든 파는 1925년경 약 32명 정도라고 주장한다.
◇ 최계립(崔溪立, 이명 : 최봉설, 최홍섭, 최이붕, 崔以鵬, 崔鳳雪, 崔鳳卨, 崔雄烈, 崔一崙, ЦОЙ КЕРИБ, Чхве Керип, Чхве Бонг Соль) 간도 등지에서 독립운동, 카자흐스탄에서 사망
◇ 최니콜라이 자유시 참변 참가
◇ 최의수(崔義洙)
◇ 최재형(崔才亨)
◇ 최호림(崔虎林 : 1896~1960, Цой Хорим) 러시아에서 자유시 참변에 관계하였고, 이르쿠츠크파에게 일방적인 기록을 남겼다. 이르쿠츠크파의 몇 명은 일본군과의 교전 기록이 확실하지 않다. 대립하였던 독립군들을 「무정부주의자, 강도, 강간범, 아편중독자, 학살자」 등으로 참무하고 살해하는 것을 정당화하였다. 소련시대 결국 최고려 등과 수년에서 수십년간 투옥되었다고 한다. (한국 독립운동에 관계하다 투옥되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 트리피츤(Тряпицын, Яков Иванович. 1897년경 출생 ~ 1920. 7. 9. 사망) 니항사건 당시 사할린주와 오호츠크해 지역의 파르티잔 대장. 아나키스트. 트리피츤은 1920. 2. 29.일경 니항을 해방시켰고, 박일리야가 지휘하던 조선인부대를 신뢰하였다. 약 2주 후인 1920. 3. 12. 일경 일본군의 반자이 기습공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니항사건의 최고 책임자로 수천여명 파르티잔 대장이었고 오호츠크해 방면 파르티잔 사령관이었던 트리피츤이 러시아말도 모르던 조선인 이지택과는 알고지낼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1920. 7월경 대피한 께르비에서 일제의 협조를 받은 안드레예브, 박병길 등의 기습공격을 받고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체포되어 부인 및 동료들과 함께 7월 9일경 처형되었다. 처형을 모면한 트리피츤 부대의 지휘부중 일부는 볼셰비키로 전향하기도 하였고, 일부는 동시베리아에서 다른 파르티잔 부대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 페트로프스키(Петровский, Филипп Емельянович) 북 사할린섬의 부자
◇ 하라 테루유키(原暉之 : 원휘지) 일본인으로 「尼港事件の諸問題」 등을 저술함. 니항사건에 관계된 조선인 박병길과 이지택을 언급하였고 일본에서 니항사건과 관련되어 자주 인용됨
◇ 홍도(洪道, 혹은 洪濤, Хон До)
◇ 한경세(韓京世) 훈춘현, 신민단 활동
◇ 한명세(韓明世, 혹은 韓明西, Хан Мен Ше) 이르쿠츠크파로 활동. 상해파 독립운동가들의 일방적 주장에 따르면 “연맹 공산당 원동변강위원회는 1928년 11월 13일과 22일에 공산당원 한명세에 관한 사건을 심의하였다. 동무 한명세는 고려공산주의운동(조선공산주의운동) 당파싸움을 함에 따라 당 결정에 의한 의무를 지키지 않았으므로 심사에 걸리게 되었다. 당파싸움에 쓸 재정을 모집하기 위하여 같은 생각을 가진 구루빠는 야꾸트스크 공화국민에서 아편장사와 기타 금물장사의 활동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 한무학 자유시 사건 참가
◇ 한운용(韓雲用, 혹은 한운룡 : 1895~1921)
◇ 한창걸
◇ 한형권(Хан Хен Гвон)
◇ 현천묵(玄天默)
◇ 허재욱(許在旭, 이명: 허영장(許營將, 許令將), 허근(許謹, 許根), 허영진(許泳振) : Хе Дзе Ук, 1866년쯤 출생) 청산리 전투, 자유시 사건 등에 참가한 독립군 대대장
◇ 홍범도(洪範圖, Хон Бом До. 1868~1943. 이명 김범도, 박범도, 범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일제 침략기 의병대를 조직하여 국내에서 여러차례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나는(=날아다니는) 홍범도. 범도 나간다’라는 명칭으로 널리 불려졌다고 한다. 안무, 김좌진, 허재욱, 나중소, 이범석 등과 1920년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였다. 1921년경 1,500여명의 휘하 부대중 일부를 거느리고 만주에서 러시아령으로 이동하여 자유시 참변 무렵 아무르주 자유시와 마자나바 일대에서 주둔하였다. 자유시에서 홍범도가 나가 연설을 하면, 독립군들이 한없이 우러러 존경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943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주 까라막치 지역에서 작고하여 3차례 정도 이장되었으나, 다시 2021년 8월경 한국의 대전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 황하일(黃河一) 자유시 참변 당시 자유대대 소속
◇ 훈춘사건(琿春事件 = Хуньчунь Инцидент)
◇ 까란다리쉬비리(혹은 칼란다리쉬비리, 까란다라쉬비리 등등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조지아(그루지아)계 러시아인으로 여러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Несто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1876년 출생 ~ 1922. 3. 6일경 사망) 시베리아에서 활약한 파르티잔 부대장, 1921년 5월경 고려군정의회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자유시 참변 무렵 사할린부대를 기습공격하여 무력으로 무장해제시키려다가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였다. 1922년 3월 6일경 이쿠치야(Якутия)에서 반란군의 공격으로 사망하였다.
◇ 크라스나쇼코프(Краснощёков,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 1880~1937) 러시아 내전기 동시베리아에 설립되었던 극동공화국의 수상(최고 지도자)이었다. 상해파 독립운동가인 이동휘 등과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겸 극동공화국 간부 슈먀츠키는 이르쿠츠크파 독립운동가를 지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