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7. 08 수요일
(2735 회)
- 자기 영광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는 법 -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세상에는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는 선이 있습니다.
특별히 인간의 생명에 관한 것이 그렇습니다. 낙태, 살인, 전쟁과 같은 악행은 그 어떤 숭고한 목적으로도 허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명분만 있으면 너무나 쉽게 칼을 휘두릅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보십시오.
그들이 내세우는 나토 가입 저지나 안보 확보라는 명분이, 지금 이 순간에도 차가운 땅 위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청년과 민간인의 생명보다 소중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는 핵무기 억제라는 카드를 꺼내 들고 이란을 침공한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이를 살리기 위해 몇몇은 죽어도 된다는 논리입니다.
여기에는 자기 영광이라는 악이 숨어있습니다.
무엇이 ‘정의’냐고 묻는 철학적 논의 중에 '트롤리 딜레마(Trolley Problem)'라는 것이 있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가 5명의 인부를 향해 달리고 있을 때, 선로를 바꿔 1명만 죽게 하는 것이 정의냐는 물음입니다.
많은 이가 '5명보다 1명이 죽는 게 낫다'며 공리주의적 선택을 합니다.
하지만 상황을 조금 바꿔봅시다.
당신이 육교 위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습니다. 기차를 멈추게 할 유일한 방법은 옆에 있는 뚱뚱한 당신의 자녀를 밀어 떨어뜨려 기차를 세우는 것뿐입니다.
이때도 당신은 '5명을 위해 1명을 죽이는 게 이롭다'며 자녀를 밀 수 있겠습니까?
절대 못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중성입니다.
대상이 '나'나 '내 것'이 아닐 때만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이 됩니다.
자기 영광에 빠진 자에게 타인은 그저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부속품일 뿐입니다.
모기가 피를 빨 때 사람의 아픔을 고려하지 않듯, 자기 영광이라는 생존 본능에 사로잡힌 인간은 타인의 눈물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도 우리 삶 안에서 한 생명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지 살펴야 합니다.
한 생명, 그것은 온 우주보다도 소중합니다. 그것이 나의 생명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지 못할 경우를 잘 살펴보십시오.그렇지 않으면 나도 자기 영광의 감옥에서 못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1961년 예일 대학교의 스탠리 밀그램은 충격적인 실험을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학습 효과 증진'이라는 명분을 주고, 틀린 답을 말하는 학생에게 전기 충격을 가하게 했습니다.
전압이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올라가 비명이 들려도, 권위자가 "책임은 내가 질 테니 계속하라"고 하자 65%의 사람들이 치사량의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들은 '과학 발전을 위해'라는 명분 뒤에 숨어 살인자가 됨을 알면서도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목적(실험 완수)을 위해 수단(인간의 생명)을 도구화한 것입니다. 우리도 '직장 생활을 위해', '자녀 교육을 위해'라는 명분으로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수단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출처: 스탠리 밀그램, 『권위에 대한 복종』)
'많은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많은 사람이 기꺼이 손해 보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구하려고 모든 이가 마음을 합칠 때, 그곳은 모기들의 전쟁터가 아니라 천사들이 사는 천국이 됩니다.
2001년 1월 26일, 일본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 씨는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습니다.
그는 결국 목숨을 잃었지만, 이 사건은 자기밖에 모르던 일본 사회에 거대한 영적 지진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일본 언론은 이 사건을 '기적 같은 이타주의'로 대서특필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이후입니다.
이전까지는 선로에 사람이 떨어져도 자기 안위가 먼저라 외면하던 문화가, 이수현 씨의 희생 이후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시민이 함께 선로로 뛰어들거나 기차를 밀어내는 기이한 현상'들이 계속해서 보고되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의 진실한 희생이 수만 명의 자기 영광을 무너뜨리고, 타인의 생명을 자신의 목적보다 소중히 여기는 천상의 문화를 이식한 것입니다.(출처: 고(故) 이수현 추모 보고서; 「아사히 신문」 2001년 1월 27일자).(출처: 고(故) 이수현 추모 보고서; 「아사히 신문」 2001년 1월 27일자)
미국에서도 이러한 예가 있었습니다.
2013년 11월 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는 하루 동안 영화 속 '고담 시'로 변했습니다. 백혈병에 걸린 다섯 살 소년 마일스 스콧의 소원이 "하루만이라도 배트맨이 되어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보잘것없는 한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시장, 경찰청장, 그리고 수만 명의 시민이 생업을 잠시 내려놓고 연극에 참여했습니다.
수억 원의 비용과 도시 전체의 행정력이 오직 '한 명의 아이를 기쁘게 하기 위해' 투입되었습니다. 효율성을 따지는 사람들의 눈으로 본다면 이는 엄청난 낭비이자 어리석은 짓입니다. 하지만 그날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은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아이를 행복하게 해 준 것이 아니라, 아이가 우리에게서 이기심을 씻어내고 사랑의 기쁨을 알게 해주었다."
한 사람을 목적으로 대할 때, 공동체는 비로소 지옥에서 탈출합니다.(출처: 메이크어위시 재단 기록; 다큐멘터리 '배트키드 비긴즈'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