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고린도후서 8:13–15, NK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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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헌금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복음을 선포한다. "부요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난하게 되심은 가난한 우리로 부요하게 하려 함이라"는 복음의 원칙을 설명하고 그 은혜가 우리에게 적용될 때 우리도 나누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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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팀 켈러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물질적, 정신적인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은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의 문제이기에 가난한 사람을 돕지 않는 삶은 인색한 것이 아니라 불의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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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정의' 라는 '미쉬파트'는 공평하게 나누어야 할 몫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공평한 나눔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는데 이기심을 극복하지 못할 때 빈인빈 부익부의 현상이 발생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초대교회의 특징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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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사도행전 4:32–35, NK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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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이 없다는 말은 서로가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나눔의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나누는 삶이 복음의 삶에서 중요한 지점이다. 그리스도가 자기를 희생하신 은혜를 기억하는 공동체는 희생과 나눔의 공동체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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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래서 바울은 헌금을 통해 균등하게 함이라고 말하면서 구약 출애굽기 당시의 만나 사건을 언급한다.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자도 모라자지 아니하였느니라" (고후 8:15) 왜 공동체 안에서 균등한 나눔에 '만나' 사건을 기록했을까? 아마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의 모습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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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와서 광야에서 살았던 삶 속에는 모두에게 균등하게 살수 있는 하나님의 공급이 있었다. 그 만나가 가리키는 지점은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만나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떡을 주시나니 하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 6:32-33)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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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즉 만나는 생명의 떡으로 오셔서 진정한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좀 더 상징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서도 예수님은 성찬식을 하시면서 자신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떼어서 나누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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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육신은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셨고 그것을 그림자처럼 보여주는 사건이 만나였다면, 그리스도의 육체는 이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로 이어졌기에, 만나를 통해 많이 거둔자와 적게 거둔자가 균등하게 먹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매개를 통해 교회 공동체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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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래서 아마도 바울은 만나 사건의 균등됨 공평한 공급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복음의 나눔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자본주의의 한계를 말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 중의 핵심은 결국 나누는 것 뿐이다. 은혜를 알지 못할 때 사람들은 나누지 못한다. 나의 노력의 결과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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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진정한 나눔의 삶을 살려면 복음의 은혜가 필요하다. 능력주의, 실력주의의 세상에서 더 많이 노력한 사람들이 더 많은 부를 가지고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교회 공동체가 지향해야 하는 가치가 있다면 공동체 안에서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들이 없는 것' '가난한 사람들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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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김관성 목사님이 잘잘법 영상을 보면서 많이 울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은 왜 기도응답도 더딘 것일까? 반전이 없는 인생이라는 말 자체가 서러웠다. 이것은 기도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나눔의 문제이다. 기도 응답을 잘 받은 사람들이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어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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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개척교회 목사님들을 만난다. 안타까운 것은 조금의 발판이 있으면 도약할 수 있는 수많은 자질과 인품을 가진 분들이 너무 발판이 없기 때문에 힘든 경우가 허다하다. 기도의 부족도 자질의 부족도 아닌, 딛고 일어날 발판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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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나는 우리교회 공동체의 목표를 '가난한 사람이 없는 것' 으로 두고 있다.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내가 힘들지 않고 어떻게 사람을 도울 수 있겠는가? 비빌언덕이라도 마련해줄 수 있어야 한다. 컨패션에 열심히 봉사하는 연예인들 중에는 "이제야 돈을 버는 이유을 알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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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돕기위해 우리는 더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 힘든 직장생활을 버티면서 노력하는 이유도 누군가를 섬기기 위해서일 때 결국 나 자신에게 더 큰 은혜와 혜택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나는 부족하지만 여러 곳에서 강의를 하고, 글을 쓰는 것은 교인들을 잘 섬기고 싶은 마음으로 노력했던 것의 열매를 누리는 것이다. 공동체가 없다면 성장이 없고, 공동체가 없다면 한계를 넘어서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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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결국 인생의 참된 의미와 행복은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나누고 헌신할 때 누리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없도록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나눌 때 내 인생의 방향도 더 선명해지고 의미있어진다. 왜 어려운 사람은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가?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공동체가 순종하지 않은 불의한 죄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를 자신의 행위로 전락시키는 21세기 갈라디아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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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자신의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베드로와 기둥같은 유대인 사도들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이 부탁하기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갈 2:9)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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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복음은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게 하고, 우리의 삶의 방향을 낮은 곳으로 흘러가게 한다. 공동체 안에 정서적으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였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은 언제나 고아와 과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복지의 문제이다. 결국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공동체가 되면, 가난 소외된 사람들이 살기 좋은 복지국가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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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며 각 지체는 서로 이어져있다. 손가락이 아프면 온 몸이 아픈것이 건강한 몸의 기능일 것이다. 소외된 자, 가난한 자가 없는 공동체, 그것은 은혜를 나누는 삶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부요하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가난해 지셨다. 가난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그 은혜가 우리도 성육신적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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