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대유행에 일반 응급환자도 비상
“응급실 앞에서 입원도 못 하고 눈뜨고 돌아가실 뻔 했다.”
급성 신부전증을 앓는 김모(89)씨. 그는 지난 4일 오후1시 30분쯤 수도권의 한 시립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지만 입원을 거부당했다. 병원 측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검사부터 하고 오라고 했다. 김씨는 아들이 응급실 앞으로 부른 앰뷸런스 안에서 3시간을 대기한 끝에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입원할 수 있었다. 15일 만난 아들 김모(57)씨는 "응급실 밖에서 기다리려면 추워서 20만원을 주고 앰뷸런스를 불렀다"며 "눈 뜨고 아버지가 돌아가실 뻔했다. 응급 환자인데 응급실 입원을 못 하고 코로나에 의료체계가 정말 엉망이 됐다"고 말했다.
14일 서울대병원 본관에 출입 안내문이 적혀져있다. 위문희 기자
코로나19의 대유행이 장기화하면서 응급 의료를 비롯한 일반 진료도 심각한 차질을 빚고 있다. 현재 응급실 진료는 물론 입원하거나 수술을 받으려면 코로나19 음성 판정을 받아야 가능하다. 외래 환자도 발열 체크를 거쳐 문진표를 작성해야 진료받을 수 있다. 산부인과에서는 산모가 마스크를 쓴 채 출산하는 곳도 있다.
정부가 14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중환자를 중점적으로 진료하는 거점병원으로 지정한 5곳 중 1곳인 경기도 일산병원앞에 구급차가 늘어서 있다. 이우림 기자
할머니(83)를 모시고 최근 경기도 한양대구리병원 응급실을 찾았던 김고은(28)씨도 마음을 졸였다. 심장 통증을 호소하는 할머니를 앞에 두고 병원 측은 코로나19 검사부터 요구했다. 김씨는 “할머니는 계속 고통을 호소하시는 데 음성이 나올때까지 입원을 못한다니 정말 난감했다"며 "어쩔 수 없이 검사를 받고 격리실서 대기하다 18시간 뒤인 오후 8시 40분쯤에야 입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우리 할머니랑 비슷한 연배의 대기자만 3분 정도 계셨다. 새벽 대기자도 10명 정도 됐다고 들었다"고 덧붙였다. 지난 6일 오후 11시 경기도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았던 이모(30)씨도 진료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고열이 나 대학병원을 겨우 찾아갔더니 의료진이 ‘응급실에 코로나 확진자가 4명이 있는데 진료받겠느냐'고 해서 돌아왔다"고 했다.
급기야 일반 환자가 적절한 진료를 못 받아서 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지난 8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고위험군 산모가 열이 난다는 이유로 몇 시간 동안 병원을 전전하다 아이를 사산했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청원인은 “구급대원이 ‘산모인데 열이 39도, 40도’라고 하자 각 병원 응급실에서 거절했다”며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열을 동반한 다른 응급질환에 대해서도 대응할 수 있는 매뉴얼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3월 대구에서 폐렴 증세를 보인 17세 소년은 고열 때문에 입원 치료를 못 받아 결국 사망하기도 했다.
14일 서울 소재 '빅5' 상급종합병원 중 하나인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병동 응급실에 안내문이 적혀 있다. 박현주 기자
대형병원도 코로나19 환자에 대응하느라 일반 응급환자 진료에 애를 먹고 있다. 최근 서울대병원은 서울 시내 소방서에 “우리 병원으로의 응급환자 이송 및 전원 자제를 요청하니 협조해 주기 바란다”는 공문을 보냈다. 서울대병원 관계자는 “응급실 병상을 27개에서 14개로 줄였다”며 “그 대신 코로나19 환자 치료를 위한 병상을 중증환자 20명을 포함 32개로 늘렸다"고 말했다. 허탁 대한응급의학회 이사장은 “서울대병원 같은 대형 병원이 응급실을 줄이면 코로나19 대응은 물론 중증 환자의 의료대란까지 올 수 있다”며 “의료체계 붕괴가 무서운 건 코로나19로 죽는 것보다 일반 응급환자들이 제때 치료 못 받아서 사망하는 비율이 더 가파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 의료진들도 코로나19 전담 병동에 상당수가 투입돼 있다. 수도권 소재 시립병원 중환자실 담당 간호사 이모(27)씨는 “SICU(외과계 중환자실) 부서 간호사만 30명 남짓 됐는데 코로나19 전담으로 파견 가서 15명이 부족하다”며 “지금처럼 일반 병상을 줄이고 간호 인력을 코로나19 병상으로 파견 보낸다고 하면 일반 중환자들이 피해를 본다”고 말했다. 의료계에 따르면 코로나19 환자 1명이 입원할 경우 음압시설을 설치해야 해 기존 병상 2~3개 공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소요되는 의료 인력도 그만큼 늘어난다. 서울대병원의 경우 의사 25명, 간호사 130명, 기타 인력 50명을 코로나19 환자에 투입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일반 입원 환자의 불만도 가중되고 있다. 정부로부터 코로나19 병상확보를 요청받은 일부 공공병원은 입원 중인 경증 환자를 내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2일부터 재활 환자들에게 다른 병원으로 옮겨달라고 요청한 중앙보훈병원의 한 보호자는 “환자가 있는데도 코로나 병실을 공사해 먼지와 소음문제가 심각하다”고 하소연했다. 코로나19 확진자 증가세가 가팔라지면서 일반 중증환자 병상 상황도 더욱 위협받고 있다. 코로나19 중환자용 병상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자 일각에선 정부가 민간 병원에 동원령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빅5 병원(서울대·세브란스·삼성서울·아산·서울성모 병원)의 한 레지던트는 “인력이 수급 안 된 상태에서 병상만 늘린다고 코로나 환자가 무조건 치료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의료계는 코로나19 대처와 응급 중증환자 치료 체계를 다시 짜야한다고 지적한다. 김신우 경북대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코로나19환자를 안 보는 대학병원서 중환자를 수용해주고, 음압 병상을 설치할 수 있는 대형병원(빅5)에서 코로나19 환자를 집중적으로 돌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최대집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지금은 국가비상사태기 때문에 정부가 세금으로 운영하는 수도권 국공립 의료기관부터 코로나19 전용 병원으로 지정하고 필요한 장비와 인력을 갖춰야 한다”고 밝혔다.
14일 서울 소재 '빅5' 상급종합병원 중 하나인 신촌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우림 기자
한편, 중앙사고수습본부는 14일 기준 전국의 코로나19 전담 중증환자 치료 병상은 43개 남았다고 밝혔다. 수도권의 경우 서울 2개, 경기 1개 등 3개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