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偶然한 音樂-달므슈랏트 音樂 講座- ]
白南準
十二番 公式主義나 和聲樂 先生님들처럼 作曲보다 作曲法을 더 所重이 여기는 사람이 있는데 말할 것도 없이 作曲法이 좋으니 늘 좋은 作品이 나오는 게 아니다. 作品이 훌륭하니깐 역시 그 作曲法도 옳았다 란 結論이 나온 것이다.
‘必然的이니깐 옳고(?) 옳으니까 훌륭하다.’란 順序는 音樂에서 흔히 ‘훌륭하니깐 옳고(?) 올으니 깐 훌륭하다.’란 順序는 音樂에서 흔히 ‘훌륭하니 깐 옳다. 옳으니깐 必然的-’으로 뒷 절한다. 技法은 필경 私有階級(시크렛트. 파료라마) 先職的으로 그 梗槪를 判定할 수는 없는 것이다.
故로 今年度 講座의 하나인 그세네그(世間에서는 有名한 ‘윈’ 胎生의 作曲家로 로스앤젤리스에 在任 恒常 세 스라잇 이 좋았던지 幾十年인데 언제나 半 발자국 늦는다.)의 ‘아나리제’도 그 作品이 現代技法의 百科全書的 羅列에 不過한 以上 이 短簡에서 돌볼 必要는 없고 곧 ‘죤. 케이(JOHN CAGE)로 옮겨 괜찮은 것이다.
佛敎를 崇尙하고 基督敎의 覺醒을 ‘멜로 드라마’라고 놀리는 이奇한 美國人에게선 作品마다 作曲의 過程과 記譜法이 다르다.
一例를 들어 그의 피아노를 탄 音樂-. 먼저 任意의 흰 종이의 製紙 工程 時에 생긴 斑點을 쪽 칼로 크게 하는데 點의 數爻는 所謂 CHANCE OPERATION(銅錢 三枚를 주먹 속에서 섞어 그의 裏表가 告하는 바에 따르는 易經의 占術)으로 定한다. 다음 一宣한 約束으로 五線을 치어놓은 遭明 同上한 別紙를 이에 겹쳐 前記의 點을 이에 옮겨 이것을 콩나물의 대가리로 한다. 이에 다시 ‘찬스. 오퍼레이션’으로 一種의 臨時 記號 ‘샤프 후래트 내츄럴’과 符號를 붙이면 너끈한 創作이 된다.
音長, 音色은 피아니스트의 自由로(이렇게 作曲하면 하루 스무 曲을 지을텐데 어떤 것을 公衆 앞에 내놓고 어떤 것을 안 내놓느냐)고 물었더니 ‘아무 거나 괜찮다.’란 答으로 半토막 짜리 넥타이를 한 그는 색종이를 접는 少女처럼 銅錢의 앞뒤를 젖혀가곤 가곤 했다. 勿論 이것은 責任回避가 아니고 意識 無意識의 我執을 버려 天心에 避하기 爲한 自然에의 아름다운 讓步라고 본다.
그의 音樂曲의 外周로 돌고 나가 無心에 飛躍했다는 ‘變奏曲’은 세 種의 VERSION(企案)이 演奏되었으나 音樂 及 音樂作品으로서 最高 完壁.....라듸오, 피리, 掛鍾時計 等을 使用한 第一의 버전은 놀라움의 連續이었다. 피아노의 調音聲을 開始한 第二 第三의 버전(企案)에서는 깊은 思索을 느꼈다. 피아노는 이미 音響樂器인 것을 그만 두었다.
그는 피아노의 듬 줄 뚜껑을 치고 긁고 퉁기고 만진다. 피아노는 아직도 젊은 것이다.
또 레이저는 近作에서 찬스 오퍼레이션 等으로서 ‘어떤 알 수 없는 他者와의 一致에 達할 수 있는 自由’로는 演奏家에게로 주기 爲하여 樂譜에 많은 未決定의 餘地(音長, 音色 때로는 音高까지도-)를 남긴 채 演奏家의 손에 맡긴다. 한 曲은 한 台의 피아노로 칠 수 있고 스무 台의 피아노가 同時에 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無限한 ‘리어리제이션’(實現)에 의하냐를 普通 한 ‘버전’이라고 부른다.
그의 WINTER MUSIC이나 그 樂派의 하나인 ‘후엘드 맨’의 ‘ 두 개의 피아노스 1957’은 더 큰 問題를 풀고 있다. 이 曲애서는 5 秒에 2. 5개의 音點이나 合音이 無限히 정말 無限히 계속된다. 緊張 弛緩도 없고 컨트라스트도 클라이막스도 코-마도 없고 ‘후엘드 맨’에서는 C 샤프 C B 플랫 1音만이 4分 間 그치지를 아니한다. 衆선의 지루함. 사람은 音은 듣지 않고 沈黙....純粹한 內容이 없는 時間만을 헤아린다. 때[時]에 누렇든 李朝白磁의 살결....이 非 作品은 日本의 茶道가 藝術이 아닌 意味로 藝術이 아니며 松濤나 먼 運動會의 애니운스 梨花月白更天 제 血贅聲怨 杜鵑에 몸을 맡기는 것과 똑같은 次元의 不作爲인 것이다. 나는 原畵에 對하는 마음씨를 聯想한다. 緊張이 어떤 餘裕에 때로는 깊은 困悍에 接해야 했다. 그러나 느끼되 激情이 動하면 안 되었다. 그림이 畵技라는 事情에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안 되었었다. 이 偏頗한 儀式에서 나는 旣說한 儀式에서 나는 低質한(比) 批評術이라는(比) 比喩以外의 모든 手段을 傳코 氣盡했다.
그의 音樂會는 例에 따라 [3자 判讀 未詳]밖에는 모르는 家給人足의 擲笑꺼리가 되었으나 高僧의 웃음을 웃는 이 先達은 四角形보다 五角形을 사랑하여 이에 慈善心 다 人心을 猥危 革心惟敵 그는 너무도 고지식해서 우스운 사람들 유머를 通헤서 神에 途하려는 精神(‘도스토 에프스키’, ‘카프카’ ‘비엔나 漂流曲’, ‘中世의 使徒圖像’, ‘다다’, ‘슐 레아리즘’ 等)의 하나인 것이다. 개는 울음을 웃지 않는다. 사람은 세 번 웃는다. 處女의 一 個性.
今年度에 떠오른 또 하나의 問題는 時間藝術인 音樂에게 空間을 導入하려는 企圖이다. ‘슈토크 하우제’(獨逸의 代表的인 前衛作曲家)의 ‘세 개의 오케스트라를 통할 구루人께’에서는 가운데 앉은 손님을 세 명의 指揮者와 세 명의 오케스트라가 말굽 形으로 둘러싸고 ‘부레스’(佛蘭西를 代表하는 前衛의 힘을 作한 詩)에서는 會場 가운데의 세 개의 오케스트라(指揮 2名)를 둥그렇게 聽衆이 싸고 그 聽衆이 周圍를 多數 둘른 마이크 群이 圓形으로 둘러싸면서 中心에는 또 한 개의 마이크가 돈다. 使用된 마이크의 總數는 64個이며 ‘12 個의 音을 平等히 相對的으로만 關係 시킨다.’는 쉔벨그 12 音 主義 本問그 問各과 메-리(音長, 音論, 音色, 音高)의 平等化와 相互 交換性으로 發展헤왔는데 友誼 층은 30代의 天才는 空間(소리나는 位置) 맞아 平等化 시켜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投企에 對하여 ‘우리의 귀는 音高에 對해서는 날카로우나 音長(리듬), 音色(樂器의 種類)에 對해서는 弱하고 音의 位置에 對해서는 더욱 純하다. 따라서 空間의 開展性에는 그리 期待할 수 없다.’ 한 評이 있다. 이것은 ‘케이지’처럼 공간에 액션(눈을 爲한 行動)을 導入하지 않는 限 一輝있는 말이다.
그러나 空間 自體에 將來性이 있어서 그들이 간 것이 아니고 ‘슈토크. 하우젠’이 갔으니까 空間에 將來性이 생겼다 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物 自體나 歷史 自體 等에 論理가 있느냐 없느냐’란 물음은 ‘죽을 때에나 結論이 날까 말까 한 事情이고 이런 것을 疎忽히 決定해서 權力化, 物神化하는 데에 人間의 오래된 業苦가 있는 것이나 物 或은 物 自體속에 論理 或은 意味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賦與하는 것은 無라는 가위로 도려낸 人間쪽의 主體性이다.’이란 思考法은 能히 可能하고 萬若 그것을 妨害한다면 主體性 偶然 無 天才란 連鎖가 第一 무겁게 作用하는 藝術과 藝術史에 가장 깊게 妥當할 것이다. 젊은 天才의 意外의 企圖에(意外로우니깐 天才임)를 붙여 꿈꿀 생각만 말고 自己가 天才될 것을 찾아야할 것이다. 鄕原들은 처음에는 알지도 못하면서 탓하고 내용에는 알지도 못하면서 테테 한다.
13回째 열리는 이 講座에는 鐵帳뒤를 包含한 五大洲 26個 國에서 127명이 모였다. 眞實로 ‘新 音樂 十年史는 탈므슈탓트 十年史인 것이다.( 칼. 베르니 = 獨逸의 指導的 批評家) =<自由新聞> 1959년 1월 6일, 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