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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전 중국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한 뒤로 그 동안 고구려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음을 반성했다. 지난해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가 불거진 이후 고구려에 대한 관심은 커져가고 있었지만, 정작 그다지 열심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려움 끝에 내린 중국의 고구려 유적 답사와 답사를 통해 확인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실감하면서, 어떤 형태로든지 그에 대한 나만의 대책이라도 세워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딱히 중국을 상대로 한 어떤 대책을 가질 수 없는 한 개인으로서는 우리 역사에 대한 정확한 사실 인식과, 나아가 고구려사에 대한 공부를 통해 역사의식을 키워 가는 것이 최선의 대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역사를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하고 있는 국사 교사로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곧 국내에 있는 고구려 유적을 찾아 답사하여 고구려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고 공부하는 것이 우선 해야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서울 광진구의 아차산성과 단양의 온달산성에 대한 답사였다.
먼저 아차산성을 답사하기로 했다. 집에서 차로 30여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고, 예전에 아차산성 아래의 영화사에 가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별 부담이 없었다. 개학 후 첫 일요일은 중국의 고구려 유적 답사기를 정리하느라 시간을 내지 못했다. 두 번째 맞이하는 일요일인 9월 5일에는 꼭 가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9월 5일은 필자가 근무하는 보성중학교의 98주년 기념일이어서 6일이 휴일로 정해져 있었다. 예전 같으면 늘 1박 2일 정도의 답사를 기획했었지만 이번에는 일요일이 끼여 있어서 교직원들과의 1박 2일 답사는 6일 하루 일정의 답사로 계획되어 있는 터였다. 5일 아침 7시경에 일어나 큰아이와 아차산성 등산을 하기로 약속해 두었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등산을 해야 되기 때문에 초등학교 1학년인 작은아이는 데려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5일 아침이 되니 울며불며 데려가 달라고 떼를 쓰는 작은아이를 외면하기 어려워 모두 함께 아차산성 나들이에 나섰다. 그러나 우려했던 대로 작은아이가 힘들어했다. 겨우 아차산성 서쪽 성벽의 일부와 아차산 봉우리의 고구려 보루의 흔적만을 더듬었을 뿐이데, 결국 포기하고 하산해야 했다. 얼마전 발굴한 시루봉의 보루가 있는 곳을 비롯해 고구려의 흔적이 그나마 느낄 수 있는 곳까지는 가보지도 못했다.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다음날로 예정된 학교 직원들과의 답사는 단양지방의 역사 유적을 둘러보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고구려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온달산성과 신라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적성산성과 단양적성비, 그리고 단양의 구석기 유적 중 꼭 가보고 싶었던 금굴 및 수양개 유적 전시관을 살펴보기로 계획을 세웠다. 6일 아침 8시 모두 4명의 일행은 학교에 모여 출발했다. 오후에 비 소식이 있다고 하여 자못 걱정되기는 했으나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은 하늘이어서 다행스런 생각을 가지고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한참을 달려 영동고속도로에 이르자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산성답사가 끼여 있어서 등산을 해야 되는 데 걱정이 되었다. 속으로 비가 개이기만을 바랐다. 바램이 하늘에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제천을 지나 단양 경내에 들어서니 날씨는 다시 좋아져서 하늘이 우리의 답사를 돕고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일행 중에 늘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분이 계셔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수없이 답사를 다녔고 우리나라의 어지간한 곳은 다 가보았노라고 자부했지만 사실 아직도 답사해야 될 곳은 너무나 많다. 우리나라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좁지 않다는 것을 답사를 다녀 보면 알 수 있다. 단양에도 여러 차례 와보기는 했으나 답사하기로 되어 있는 곳은 모두 용케도 피해 가는 바람에 이번에 예정된 장소는 모두 처음 답사하는 곳이었다. 그런 만큼 위치를 정확히 몰랐기 때문에 지도에 의존해야 했다. 그래서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 단양에서 만든 소개 팜플렛을 구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략해 보인 단양 안내서의 지도는 사실 그리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지방 자치제가 시행된 이후 각 지방 자치단체가 앞다투어 자기 고장에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부분의 지자체가 관광안내서를 만들어 배부하고 있어서 여행 시에는 반드시 휴게소의 관광안내소에 들를 필요가 있다. 더구나 이곳에는 컴퓨터는 물론 팩스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급한 용무를 보기에도 편리하다. 출발 2시간여 만에 단양 근처에 이르렀다. 잘 만든 고속도로도 그렇고 여러 편의 시설 등 지난번 중국에서 보았던 것에 비하면 우리의 물질적 수준은 대단히 발달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우리의 정신적인 수준도 그만큼 되는 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문 들기는 하지만.....
신라 북진 정책의 교두보 적성산성
여러 개의 지도를 살펴가며 첫 번째 목적지인 적성산성으로 향했다. 이미 인터넷을 통해 단양 휴게소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는 정보는 가지고 있었으나, 상행선 쪽인지 하행선 쪽인지를 확인하지 못해 결국 국도를 통해 시행착오를 겪으며 적성산성을 찾아갔다. 충주호의 건설로 인해 쇠락해 버린 구단양의 뒷산을 통해 올라 고개를 하나 넘으니 바로 앞에 적성산성이 보였다. 적성산성은 상행선 단양 휴게소 바로 뒤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중앙고속도로를 통해 안동, 대구 등을 다녀오는 사람은 단양휴게소에 들르면 바로 보이는 적성 산성을 쉽게 답사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야트막한 성재산을 둘러싸고 있는 적성산성은 길이 900m정도의 작은 성이다. 성안에는 단양적성비로 알려진 신라의 비석이 있어서 특히 주목이 되고 있는 곳이다. 성에 오르기 전에는 왜 이렇게 작은 산에 성을 쌓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 성벽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니 남한강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광경은 이곳이 중요한 거점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5분쯤 오르니 단양적성비를 볼 수 있었다. 본래 등산로에 파묻혀 있었으나 이곳을 조사하러 온 단국대 정영호 교수가 발견했다고 한다. 등산하는 사람들이 앉아서 쉬거나 신발을 털던 박힌 돌에 불과했던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인공의 흔적을 보고 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은 전문가의 혜안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일행은 이후 박힌 바위를 볼 때마다 이것도 혹시 하는 생각으로 눈여겨보기도 하면서 웃음꽃을 피웠다. 단양 적성과 단양적성비에 대한 안내문의 내용을 통해 이 성에 얽힌 역사적인 사연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안내문의 중심적인 내용은 이곳이 삼국의 각축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특히 신라와 고구려의 세력 관계의 변동을 알게 해준다는 내용은 이 산성과 비석이 가지는 자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적성산성 안내문> <단양적성비 안내문>
5세기와 6세기는 삼국은 전쟁터였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백제는 한강유역의 위례성을 버리고 공주로 수도를 옮겨야 했으며, 고구려의 영토는 아산만에서 소백산맥 남쪽을 경계로 한반도의 중부이남 지역까지 차지하였다. 상대적으로 중앙집권적 국가로서의 발전이 늦어 세 나라의 각축전에 뒤늦게 뛰어든 나라가 신라이다. 소백산맥이남의 경상도 지역에서 성장하던 신라는 6세기 지증왕 때 이르러서야 비로소 신라라는 국호를 사용하였고, 왕호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꾸었다. 이어 법흥왕 때 율령을 갖추고 제도정비를 마쳐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신라가 대외적으로 국력을 과시하며 삼국의 경쟁에 뛰어든 것은 진흥왕 때이었다. 진흥왕은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고구려와의 전쟁에 나섰고, 그 첫 전과물 중의 하나가 바로 소백산맥 넘어 지금의 단양인 적성 지방을 점령한 것이었다. 이곳의 당시 이름은 고구려의 적성현이었다. 이는 삼국의 세력관계에 있어서 큰 변동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 시기 삼국의 주도권 다툼 과정은 교과서에 잘 정리가 되어 있다. 전남의 한 교육청에서 만든 중학교 국사 학습지에 실린 문제를 여기 실어본다. 괄호 안의 내용을 쉽게 써넣을 수 있다면 삼국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쟁패전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적성 지역을 장악한 진흥왕은 이곳에 성을 쌓고 이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이것이 곧 지금 남아있는 단양 적성 또는 적성산성으로 불리는 산성과 단양 신라적성비이다. 이곳에 산성을 쌓은 것은 죽령너머 한강 상류로 교통의 요충지인 이곳을 고구려 공격의 전초기지로 삼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적성비와 적성산성은 신라의 북방 진출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하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위 부분이 깨지긴 했지만 1500여 년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단양적성비를 보면서 삼국시대를 느껴 보려 했다. 이사부와 무력의 이름도 찾아보며, 삼국 정세의 새로운 변화를 읽으려 했다. 실제로 이 비는 우리에게 생각보다 많은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위 정답 : 1. 근초고왕, 2. 장수왕, 3. 남진, 4. 평양, 5. 신라, 6. 진흥왕, 7. 한강, 8. 백제) 신라가 소백산맥의 죽령을 넘어 한강 상류인 이곳에서 신라의 북방 진출 사업을 처음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나아가 그 과정에서 주민들에 대한 선무 작업이 꽤 필요했었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다. 비문에 의하면, 진흥왕의 첫 북방 진출 과정에서 진흥왕을 도와 이곳에서 고구려와 싸우는데 공을 세운 사람이 그 당시 적성에 살고 있던 야이차이다. 그는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고, 이처럼 신라를 위해 죽거나 공을 세우면 어른이든 아이든 관계없이 상을 주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더구나 영원히 남을 단단한 돌비석을 세워서 약속했으니, 이는 국경지방의 점령 주민을 신라인으로 만드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즉, 진흥왕은 야이차를 표창하고 이 지역사람들을 달래어 자기 세력이 되도록 하려고 할 목적으로 단양적성비를 세운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진흥왕의 정복 전쟁은 나아가 한강 하류 지역까지 차지하고 북으로는 함경도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한강 하류 지역은 백제와 함께 고구려로부터 빼앗았으나 진흥왕은 곧 백제를 배신하고 이곳을 독차지하였다. 이에 분개한 백제의 성왕이 신라를 공격하다 지금의 옥천인 관산성에서 전사했다. 이로써 신라와 백제의 동맹은 결렬되고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두 나라는 적대관계가 되었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한 것은 그 곳의 경제력을 물론이고 선진국인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였다는 점에서 이후 신라가 삼국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단양적성비에 등장하는 또 다른 인물들은 진흥왕 이전부터 공을 세워온 대표적인 장수들로, 흔히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 이사부와 무력이다. 이사부는 지증왕 때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정복한 장수이다. 그가 우산국을 정복할 때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위협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나아가 진흥왕 때에는 대가야 정복에 공을 세우기도 했던 인물이다. 무력(김무력)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아들이다. 가야가 멸망한 후 신라의 귀족으로 편입되어 신라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장수이다. 그가 이룬 일 중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것은 관산성에 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그에게 비참한 최후를 안겨준 일이다. 또 그의 아들 김서현은 신라 자유 연애의 대표적 인물 중의 한사람이다. 예전에 쓴 '고대인의 사랑과 결혼'에 등장하는 그의 이야기를 옮겨본다. "가야계 귀족 출신인 김서현은 길에서 우연히 신라 귀족의 손녀인 만명을 만났는데, 몹시 마음에 들어 그녀를 눈짓으로 꾀었다 한다. 그리하여 중매를 넣기도 전에 성관계를 가졌다. 여자 집에서는 결혼을 반대하여 만명을 가두었으나 만명은 도망쳐 지방태수로 부임하던 서현을 따라가서 살았다. 그리하여 김유신을 낳게 되었다." 눈짓으로 꾀고 반하여 사랑하고 관계를 가진, 이런 식의 자유연애를 『삼국사기』에서는 야합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 명장 김유신은 이렇게 야합으로 태어났다. 금관가야는 멸망하였으나, 그 왕족은 신라 귀족으로 편입된 후 대를 이어 신라에서 크게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단양적성비는 진흥왕이 영토를 확장해 가는 과정에서 세운 첫 비석이다. 이후 진흥왕은 4개의 순수비를 세워 자신의 영토 확장을 기념했다. 경남 창녕의 창녕비, 서울의 북한산비, 함경도의 마운령비와 황초령비가 그것으로 이는 신라의 비약적인 발전 모습을 웅변하고 있다. 이후 진흥왕은 자신을 황제에 비유하여 '태왕'이라 하고 연호를 사용하는 등 신라의 성장을 대외에 과시했다.
적성비를 관찰한 후에는 성을 따라 돌며 살펴보았다. 성안에는 투석기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머리 만한 둥근 강돌들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었다. 성은 생각보다 많이 복원되어 있어서 옛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았으나 여전히 남아있는 일부 성벽을 통해 긴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성에서 본 북쪽의 모습은 남한강 상류가 자연 해자를 이루며 멀리까지 내려다 보여서 천연의 요새임을 알 수 있었다. 성벽을 도는 도중 뱀을 한 마리 발견했다. 힘이 넘쳐 보여 우리 일행을 일 순간 당황하게 한 이 녀석을 두고 신라의 기상을 이어받은 뱀의 후손이 아니겠느냐는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잡아서 소주병에 넣어두어야 한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일행 중 한 명은 뱀을 그냥 보낸 것을 못내 아쉬워 하기도해서 한동안 이야기 거리가 되기도 했다
<적성산성 아래쪽의 단양휴게소. 적성산성은 중앙고속도로 상행선 단양휴게소 바로 뒷편에 있어서 바로 접근할 수 있다. 철탑이 세워진 언덕 너머는 구단양이다.>
<단양 적성산성. 6세기 신라의 진흥왕이 북방진출을 위해 고구려와 전쟁을 시작하면서 죽령너머 적성현에 전초기지로 쌓은 성이다.>
<단양적성비각. 적성산성안에는 국보로 지정된 단양적성비가 있다.>
<단양적성비. 진흥왕의 첫 북방 진출 과정에서 이곳에서 공을 세운 야이차를 표창하고 이 지역사람들을 달래어 자기 세력이 되도록 하려고 할 목적으로 세웠다.>
<옆에서 본 단양적성비. 얇은 자연석을 이용해 만들었다.>
<단양적성비문. 오른쪽에서 두 번째줄 아래쪽으로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무력의 이름이 보인다. 모두 440여자가 새겨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288자만 남아있다.>
<적성산성. 대부분 최근에 새로 보수했다. 옹성처럼 생긴 동북 모서리의 구조는 온달산성과 유사하다. >
<적성산성 북벽. 남한강이 해자처럼 흐른다.>
<적성산성 남벽. 역시 최근에 보수했다.>
<적성산성 남벽. 옛 성벽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적성산성 남벽. 옛 성벽과 새로 보수한 성벽이 비교된다.>
<탁오대. 구단양에서 적성산성으로 오르는 길에는 단양 수몰 이주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앞마당으로 옮겨진 탁오대 글씨는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쓴 것이다. >
<탁오대 글씨. 본래 있었던 곳의 맑은 계곡에서 몸도 씻고 마음도 씻으며 나를 씻는다는 내용이다. "나를 씻는다", 가슴깊이 생각해볼 만한 표현이다. >
한반도 최초의 인류의 흔적을 간직한 금굴 유적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어 일행은 단양읍으로 향했다. 답사를 다닐 때 가장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는 식당을 고르는 문제이다. 일행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곳을 고르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중소 도시나 시골에는 식당도 흔치 않기 때문이다. 사실 사전 조사를 통해 미리 결정해서 가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다행히 일행 중에 몇 년 전 이곳을 다녀온 분이 있었고, 그분은 꼼꼼하게도 그때 맛있게 먹었던 식당의 명함을 가지고 있어서 기억을 더듬어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덕분에 식당을 찾아 헤매야 하는 고통과 시간을 아낄 수 있게 되었다. 여행 중 가장 좋은 식사의 기억은 다른 곳에서는 먹을 수 없는 그 지방의 특색음식을 찾는 일이다. 이 식당도 '묵밥'이라는 독특한 메뉴를 가지고 있었다. 냉면기에 묵을 잔뜩 썰어 넣고 갖은 양념을 한 후 육수를 부어 밥과 함께 내어놓는 음식이었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라 주인에게 물으니 말아서 먹으면 된다고 했다. 일행 모두가 만족한 맛있는 식사였다.
식사 후 일정은 수양개 유적전시관 관람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선사유적 전시관이다. 단양지방에는 여러 곳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다. 특히 단양 지방은 동굴이 많아 흔히 들어본 고수 동굴을 비롯해 여러 동굴에서 구석기시대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구낭굴, 금굴 등 동굴 유적은 구석기인의 생활 무대가 동굴이 주가 되었음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선사유적이다. 동굴에서만 구석기 유적이 발견된 것만은 아니다. 공주 석장리에서 처럼 강가의 한데에서도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다. 단양에서는 충주호의 수몰로 대규모의 발굴이 이루어진 수양개 유적이 대표적인 곳이다. 수양개 유적을 중심으로 선사 유적 전시관으로 꾸며져 선사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교육장이 된 이 전시관은 단양의 충주호 유람선 선착장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던 대로 월요일이어서 개관을 하지 않고 있어서 관람을 할 수는 없었다. 우리나라의 전시관이나 박물관은 일요일에도 개관을 하기 때문에 대부분 월요일에 휴관을 한다.
<신단양의 인공폭포. 신단양 유람선 선착장 맞은편에 있다.>
<수양개 선사 유적 전시관. 신단양 유람선 선착장 앞에 있다.>
<수양개 선사 유적 전시관 앞의 조형물. 구석기인이 석기를 만들고 있는 장면이다.>
아쉬운 발길을 돌려 금굴 선사 유적으로 향했다. 금굴 유적은 우리 교과서의 서술 내용을 바꾼 대단한 유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인류가 살았던 것은 약 70만 년 전이라고 교과서에 나와 있다. 이는 금굴의 유적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다. 즉 금굴은 지금까지 알려진 한반도 최초의 인류 주거지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굴에 대한 안내는 단양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두 장의 지도를 펴 들고 찾아 나섰으나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지도가 정확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특히 강 건너에 있는 것을 반대로 표기하고 있어서 지도를 통해서는 헤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억을 더듬으니 도담삼봉 맞은편 강가 어딘가에 있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예전에 이곳에 찾아갈 생각으로 단양군청 문화공보과에 인터넷으로 질문을 해서 들은 답변이었다. 일단 단양으로 돌아와 다시 도담삼봉을 향해 갔다. 조금 가다보니 강가에 커다란 동굴이 있는 것이 우연히 눈에 띄었다. 금굴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근처의 농원으로 들어가서 물어보니 금굴이 맞다고 한다. 문제는 어떻게 강 맞은 편으로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방법은 없으며 도담삼봉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 한참을 걸어 내려가야 한다고 했다. 강가에 배가 있었지만 마음대로 탈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빌리는 것이 가능한지를 농원에서 물어보니 배의 주인들은 근처에 있지 않다고 했다. 직접 가보기가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되어 할 수 없이 강가에 서서 한반도 최고의 인류 흔적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 최고의 인류의 흔적이 너무 홀대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표지판은 물론 길 안내판조차 없어서 아는 사람만이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최초'나 '최고'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에서는 충분히 관광자원과 학습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에 주차장을 만들고 배로 사람을 건너다 주는 시설을 만들면 좋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이에 있는 도담삼봉을 구경하기 위해 출발했다.
<단양 금굴 선사유적. 약 70만년전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된 우리나라 최고의 구석기 동굴유적이다.>
<단양에서 도담삼봉 가는 길에서 본 금굴 선사 유적. 강 맞은편에 있어서 접근하기가 어렵다.>
<금굴이 보이는 강가에서 기념사진 한 장. 우측은 보성중학교 이영호 교감선생님, 중앙은 성균관 연구로 학위를 받은 장재천 박사님, 좌측은 필자>
재미있는 사연이 깃든 도담삼봉
도담삼봉은 강에서 솟은 세 개의 바위로 이루어져 누가 보아도 장관임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굳이 그 유명한 단양팔경 중의 하나라는 말을 듣지 않더라도 절경이다. 이미 여러 차례 와보았지만 볼 때마다 그 느낌은 새롭다. 주위 환경이 자주 변하기 때문일까? 잘 갖추어진 주차장 시설과 안내판 등 지방 자치단체들의 관광객유치를 위한 노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낀다. 도담삼봉은 무엇보다도 조선건국 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한 삼봉 정도전과 관련된 유적이다. 그가 어린 시절 이곳에서 공부를 했다 한다. 그래서 인지 이곳에는 정도전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고, 정도전에 대해 서울대학교의 한영우 교수가 쓴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도담삼봉은 본래 정선의 삼봉산이었으나 떠내려와 이곳에 멈추었다고 한다. 이에 정선군에서는 늘 단양군에서 세금을 거두어 갔다고 한다. 마치 설악산의 울산바위에 얽힌 이야기와 비슷한 구조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어린 정도전이 꾀를 내었다고 한다. 단양군에서는 도담삼봉 때문에 물 흐름이 막혀 오히려 불편하니 도로 가져가라고 했다고 한다.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결국 정선군에서는 세금을 거두는 일을 그만두었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신흥사 스님이 울산바위를 다시 가져가라고 했다는 구조와 비슷하다. 이런 전해오는 이야기들은 물론 사실일리는 없겠지만 답사객들의 입을 거쳐 재미있는 일화의 하나로 기억에 남아 딱딱한 답사길을 부드럽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삼봉 중 가장 높은 봉우리는 남편봉이고 곁에 있는 봉우리는 첩봉, 뒤돌아선 듯한 자세로 보이는 봉우리는 처봉이라고 한다고 한다. 첩을 통해 자식을 낳으려고 하는 남편이 미워 돌아서 있다는 처봉. 누가 만든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그럴듯하다. 근처의 정자에 올라 다른 각도에서 도담삼봉을 내려다보는 것으로 구경을 마치고 다음 목적지이자 이번 답사의 가장 핵심인 온달산성으로 향했다.
<단양8경 중의 하나인 도담삼봉. 좌측의 고개를 돌린 봉우리가 처봉>
<도담삼봉. 좀 더 가까이서....>
<도담삼봉 우측에 있는 산위의 정자에서 촬영> |
<적성산성에서 북쪽을 바라보고 찍은 파노라마 사진. 남한강을 낀 요새임을 알 수 있다.>
<적성산성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찍은 파노라마 사진. 우측 산아래쪽의 중앙고속도로를 따라가면 소백산맥과 죽령에 이른다.>
첫댓글 백유선선생님을 글입니다.
박물관학교 학생으로 그저 인솔자이신 길경택실장님 따라 가 본곳을 다시 접하게 되니, 새롭기도 하고 조금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하네요.읽고 또 읽고 그리고 잘 보고 갑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