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상회
차은량
모처럼 하루 쉬기로 작정한 날이다. 모로 누워 TV를 보던 중 김장 소식을 들었다. 몸은 여전히 누워있는데 시선은 달력으로 가고 머릿속에선 일머리의 순서를 정하기 시작한다.
밤나무 낙엽이 수북이 쌓인 뒤란을 쓸어내고, 갓 받아놓은 소금 두 자루를 뒤란으로 옮겨 잘 덮어두고, 뒤란에 있는 묵은 소금자루는 앞마당 수돗가로 옮겨 놓고, 서너 접 마을을 까고, 작년 김장 때 쓰고 남은 황석어젓을 다려 걸러내고… 가만, 황석어젓은 잘 삭아있겠지만 올 겨울 김장을 하기엔 양이 부족하다. 오늘이 14일, 조치원 장날이다.
목포상회. 몸을 일으켜 TV를 끄고 지갑을 찾아들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나는 어제부터 몸살 난 몸, 오늘 하루 쉬기로 작정한 사람답게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으나 목포상회를 생각하고 차에 오르자 단박 기분이 좋아졌다.
갓 결혼한 어느 날 조치원 오일장에 가시는 시어머니를 따라 장에 갔다. “도가(都家)에 가서 새우젓 좀 사자” 하는 어머니 말씀이 소설처럼 들렸다. ‘도가’라고 하는 낯선 말의 뉘앙스에 반해 스물 두 해를 목포상회를 찾았다. 시장골목 끝머리쯤에 새우젓 가게라곤 두 군데 밖에 없는데 어머니는 항상 그곳을 ‘도가’라고 불렀고 어머니가 ‘도가’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때마다 나는 소설책 속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는 조치원 장의 도가에서도 대를 물려 가업을 잇고 있는 ‘목포상회’를 으뜸으로 치셨다.
목포상회에 가면 언제나 먼 바다 비린내가 났다. 여러 줄로 길게 도열한 드럼통들 사이로 뱃고동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몰래 물을 섞어 양을 늘린다든가 하는 농간은 절대 부리지 않았을 것 같은 갖가지 젓갈이 드럼통마다 수북하게 담겨있었다. 주인을 포함한 네다섯 명쯤 되는 일꾼들이 장화 발목까지 내려간 비닐앞치마를 두르고 뱃사람 같은 표정으로 손님을 맞았다. 잘 꾸며진 마트에서 사는 새우젓 만원어치보다 목포상회 새우젓 만원어치가 훨씬 더 무거웠고 부피도 당연히 두 배는 되었다. 4일, 9일 닷새마다 열리는 조치원 장에 갈 때마다 목포상회를 다녀와야 오일장에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소설 속 풍경 같은 목포상회를 가는 일이 더러 중단되기도 했다. 친정어머니는 음식을 만드는데 있어 무엇보다 최고의 품질과 신선도를 따졌다. 매년 봄마다 소래에 가서 황석어와 생새우를 사다 손수 젓갈을 담그셨다. 딸 낳고 아들 낳고 시집살이 십여 년을 살아낸 이력이 붙은 나는 어느새 나도 모르게 대범해졌다. 김장철마다 시어머니가 마을 부녀회에서 젓갈을 구입해 김장을 담그는 걸 잘 알면서도 친정에서 담근 젓갈을 얻어오거나 같이 구입해 김장을 담그기 시작했다. 나로 인해 시어머니는 젓갈을 팔러 온 부녀회장에게 몇 해를 미안해했고 그 일이 여러 해 거듭되자 나중엔 그러려니 하셨다. 그러다가 최근 어느 핸가 봄철 젓갈 값이 폭등했다. 가난한 농사꾼의 아내인 나는 그해 친정어머니의 젓갈 구입에 동참하지 못했다. 그해 겨울 다시 목포상회를 찾아가 드럼통에 담긴 황석어젓과 새우젓을 샀다. 그해 김장김치가 삶아놓은 듯 물러졌다는 집들이 많았다.
생새우를 직접 구입해 젓갈을 담던 친정어머니도 그해는 비싼 생새우 대신 새우젓을 구입하셨는데 김치가 물러졌다고 하셨다. 목포상회에서 사 온 황석어젓과 새우젓으로 담근 우리 집 김장김치는 이듬해 초여름까지 무르지 않은 채 아삭거렸다. 나는 그 김치를 이웃에 두루 퍼주며 목포상회의 주인처럼 목에 힘을 주었다.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에 있는 우리 집에선 청주의 큰 재래시장인 육거리 시장보다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에 있는 시장이 더가깝다. 오래 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충청남도의 술꾼들이 통행금지가 없는 충청북도로 2차 3차를 외치며 비틀거리며 건너던 중봉리 다리. 충청남북도의 경계인 중봉리 다리를 건너노라면 바다는 아직 두 시간 거리나 멀었는데도 파도 소리가 들리고 물씬 비린내가 맡아지는 것이었다.
늘 그렇듯 김장을 준비하러 조치원 장에 가면 지물포 먼저 들른다. 목포상회를 다닌 세월만큼이나 오랜 단골인 영신지물포에서 김장비닐을 산다. 김치냉장고가 없던 예전엔 항아리나 고무통 속에 비닐자루를 넣고 김치를 담았다. 이제 김치냉장고 전용의 김치통이 있으니 비닐자루는 없어도 되었다. 그러나 어느 해 한 번이라도 우리 가족이 먹을 분량만큼만 김장을 한 적이 있던가. 대형 김치냉장고를 가득 채우고도 또 그만한 부피의 고무통에도 가득 담아두었다. 그래야 이른 봄 일찌감치 김치가 떨어진 사람들이 찾아오면 김치를 나누어 줄 수 있다. 슬하에 칠남매를 두신 시어머니는 해마다 월동을 위한 음식을 넉넉하게 준비를 하셨다. 시집간 딸들을 위해, 따로 나가 사는 큰 아들네와 둘째아들네, 마흔이 넘도록 장가를 못 간 두 아들의 조석을 해 먹여야 하는 시이모님, 가족들이 김치를 좋아해 한 끼 식사에 김치 한 포기씩 먹는다는 경희네… 그들이 해마다 김치를 얻으러 오는 것도 아니건만 어머니는 해마다 그에 대한 대비를 해 두셨고 나는 점점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었다.
영신지물포 아주머니가 상가 밖으로 가판을 차려놓고 비닐을 팔고 있었다. 그려, 김장 때는 오겠지 했어. 올해도 김치를 그렇게 많이 담글 거유? 올해는 백포기만 담글 거예요. 그것도 많지. 요즘 젊은 사람들이 누가 그렇게 김장을 많이 해? 제가 젊어요? 비닐을 접던 아주머니와 내 눈이 마주친다. 아주머니와 내가 마주보며 하하 웃는 사이로 스물 두 해가 지나갔다. 그려, 시어머니 따라 댕기던 새댁으로만 알았네. 비닐자루가 담긴 봉투를 건네받고 골목을 돌아 곧장 목포상회로 간다.
어느새 만선의 배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목포상회. 나는 잘 삭은 황석어젓 배와 새우젓 배를 기웃거린다. 덤을 달라는 말은 할 필요가 없다. 목포상회에서 덤을 달라고 하는 사람은 목포상회를 처음 찾아온 외지인이나 새댁들뿐이다. 황석어젓과 새우젓을 실은 수레를 밀고 따라오는 젊은 총각을 앞서 걸으며 주차장으로 향한다. 한 해에 고작 서너 번, 김장철에나 찾는 오일장. 조그만 읍내의 촌스럽기 짝이 없던 조치원 오일장도 몰라보게 현대화되었고 시어머님을 따라 장에 다니던 새댁은 머리색이 희끗한 중년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새댁’ 며느리를 데리고 목포상회를 찾을 날도 멀지 않았다. 세월이 참으로 소설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