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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평론가, 인터넷 각종 기록 및 주변사람들의 증언에 의한
나훈아의 데뷔와 나이 학력에 대한 고찰
나훈아씨 인터넷 포탈 프로필에는1947년생,1966년 천리길로 데뷔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1951년생이고 1968년 데뷔라는 말도 있고 1950년생 이라고도 합니다.
위와 같이 나훈아씨의 데뷔와 나이에 대한 설왕 설래가 많아 여기 저기 자료를
찾아 본 결과를 아래와 같이 한번 풀어 봤습니다.
나훈아의 청춘고백/ 나훈아의 출세비화/1972.1.21 에서는
https://blog.naver.com/joopid/221301642807
"고등학교 막 진학하던 '63년 봄 마을어귀에서 패싸움을 벌인 것이
훈육선생님께 알려져 퇴학 당하고 여름에 평소에 마음먹고 있던
가수를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 여러가지 고생한 내용 등을 적어 놓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니 위 링크글 참조 바랍니다.
'63년도는 나훈아씨가 초량초등학교 졸업한 시기였습니다.
위 청춘고백 내용대로 라면 초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고등학교 입학
했다는 뜻이고 중학교는 생략 되어 버렸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지요.
일설에는 '72년 저 시기가 남진, 나훈아 라이벌 구도가 극에 달할
시기라 남진( 생년'45년, 데뷔'65년)과 비슷하게 맞추기 위하여
나이와 데뷔년도를 올리게 되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또는 당시 나훈아는 형과 같이 하숙을 하였는데 본인의 나이가
어려 형의 나이로 올려서 데뷔년도를 이야기 했다는 설도 있다.
나훈아씨는 부산 초량이 고향이고요.
부친이 외항선원인 관계로 나름대로 유복하게 살았다고합니다.
초량초교에서 야구선수하다 '63년2월에 졸업했고요 키가 작아
중학교 야구부에 스카우트 되지 않으니까 1년 재수하여 1964년
3월에 부산대동중학교에 야구선수로 입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훈아씨 초등동기분이 본명이 최홍기로 나오는 나훈아씨 초등
학교 졸업앨범을 공개하면서 https://youtu.be/JUnTaLN3cLM
별명이 "양간"이었고 키가 작았으며 같이 야구선수 했다고 증언
하더군요. 이 영상을 보고 나훈아씨가 호적이 늦게 올려져서
그렇지 실제로는 '47년생이다 라는 설도 틀리다고 증명되더군요
동기들 보다 나이가 3살 많은 사람이 동기들 보다 키가 작은축에
들었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이야기니까요..
야구 평론가 허구연씨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YS8ckmduQK4
자기가 경남중학교1학년 시절 야구할때 나훈아씨도 대동중학교1학년
으로 같이 야구했는데 같은 학년이지만 나훈아씨는'50년생이고 자기는
'51년생으로 나훈아씨가 자기보다 한살 많았다고 하고, 1학년 때
까지만 야구했다고 하더군요. 허구연씨는'64년에 경남중 입학하고
'67년에 졸업(24회)했습니다.
내하고 같이 '53년생인 중학교 동기가 '52년생인 자기 친구가 생일이
빨라 학교를 한해 일찍 들어가는 바람에 부산 대동중 18회로 나훈아
씨와 '67년도에 같이 졸업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의 졸업 앨범에서
최홍기(나훈아)의 사진을 봤다고 증언 하더군요.
초등학교2년 선배이고 고등학교도 선배인 고향 형님이 나훈아씨와
대동중 동기인데 학교 다닐때 취미로 같이 음악활동을 하였다고
하며 나훈아씨는 노래를 잘 부를 뿐만 아니라 기타도 잘 쳤다고 얘기
하더군요. 그 당시에는 구덕터널이 생기기 전이라 고향선배는 학장동
에서 구덕고개를 너머 꽃마을을 지나 구덕수원지를 거쳐 서대신동
대동중학교 까지 1시간 20분 정도 걸어서 다녔습니다.
나훈아 씨는 청춘고백에서 "서라벌예고 1학년 몇달 다녔을때 같은
반에 있는 급우 한 녀석이 유난스럽게 굴어 버릇을 가르쳐 준 답시고
손을 댄것이 화근이 되어 중퇴하고 말았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음악평론가 박성서씨가 조사하여 기고한 내용입니다.
https://blog.naver.com/sachilo/40124241869
서라벌예고 1학년때 같은 반이었던 유명한 서양화가 이목일 화백
은 그 시절부터 이미 노래 하나는 끝내줬던 인물로 기억한다.
“1학년 때 우이동 골짜기로 봄소풍을 갔었어요. 그때 홍기(나훈아
의 본명)가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불렀는데 함께 소풍 왔던 이웃
동덕여고생들까지 환호성을 질러 골짜기가 온통 함성으로 뒤덮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결국 이후 가수로 데뷔한 이 자랑스러운 홍기를
위해 친구들이 너도나도 엽서를 사서 방송국에 신청곡을 보내던
기억이 새롭습니다"라고 하고 2,3학년과 졸업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중퇴한 걸 밝힐 수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친구를 위한
배려였겠지요.(이목일 '51년생, 서라벌예고'67년 입학,'70년 졸업)
조용필씨가 한 발언도 있습니다. 자기가 서울 경동고 2학년때
나훈아씨는 서라벌예고1학년 이었다고 말 했었다고 합니다.
조용필씨는 '50년생으로 경동고에 '66년 입학 '69년 졸업했지요.
나훈아씨는 서라벌예고 중퇴하고 그 해 후반기에 오아시스레코드
사에 가수지망생으로 들어 갔다고 합니다.
송대관씨가 자신의 스타고백에서 한 말입니다.
http://blog.daum.net/watermill/677
"67년도에 오아시스레코드 사무실에 가수지망생으로 들어가니
나훈아도 이틀전에 가수지망생으로 들어와 있었다고 합니다.
성재희,박건,이영숙등 가수들이 화려하고 멋지게 입고 출입하는데
경상도 촌놈 나훈아와 전라도 촌놈 송대관만이 때국물이 줄줄
흐르는 모습으로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창피해 죽겠는데 나훈아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 때의 인연으로 '46년생 송대관씨와 '50년생 나훈아씨가 친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도 나훈아씨가 나이를 올려서 말했을까요?
[(추가) 송대관씨가 오아시스레코드사때 부터 지금까지 나훈아씨
가 여러가지 면에서 의리의 사나이 였다고 많이 칭찬하더군요.]
'67년 그해 가을에 송대관 씨는 "석양에 타는 노을"이란 곡으로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고 하네요.송대관씨는 오아시스레코드사에
나름대로 인맥이 있어 나훈아 씨보다 약간 일찍 데뷔했을 겁니다.
스타고백애 나옵니다.하지만 약간늦게 데뷔한 나훈아가 일찍떳지요.
송대관씨는'67년 말에 나훈아씨가 천리길로 데뷔했다고 말하고
나훈아씨 본인은 위 송대관씨 말과 다르게 '66년 천리길 데뷔로
말하고 있는데 '66. '67 둘다 음반 실체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나훈아 최초 히트곡 "천리길"이 실린 음반표지 1969.5.29
나훈아 데뷔곡 "내사랑"이 실린 음반 표지 '68.8.16 발매,
아래편 중앙에 송대관의 얼굴도 보이는데 나훈아 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인다.
'68년8월에 발매된 "내사랑"이 나훈아씨 가장 최초 발표된 음반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천리길"은 '69년5월에 최초 발매된 음반이
확인 되었기에 '68년 "내사랑"으로 데뷔가 정설로 확인 되었지요.
음악평론가 최규성씨가 조사 기고한 내용입니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3611.html
"1969년 7월5일 세광출판사에서 발행한 <대중가요 제40집>
에 소개된 나훈아의 프로필은 흥미롭다.
노래책에는 나훈아의 본명은 최홍기이고 인터뷰에 소개된
동일한 본적과 그때 살았던 서울 충무로 의 상세한 주소까지
나와 있다. 또한 가장 미스터리한 그의 생년월일은 인터뷰와
인터넷 포털에 등장하는 ‘1947년 2월11일’이 아닌
‘1951년 2월11일’로 4살이나 어리게 소개돼어 있고.
프로필에는 데뷔일이 1968년 7월27일, 데뷔곡은 ‘내 사랑’,
히트곡은 ‘천리길’로 소개되어 있다.
또한 나훈아는 부산 초량초등학교 시절에 부산시 교육위원회에서
개최한 콩쿠르에서 2년 연속으로 1등을 차지하며 노래에 재능을
보였다. 대동중학교를 거쳐 가수의 꿈을 안고 상경해 형과 함께
장위동에서 하숙하면서 서라벌예고를 졸업했다" 고 나와있는데
나훈아의 자신의 청춘고백에서는 "풀빵을 먹고 청계천 다리밑에서
잠자고 사동 노릇까지 하며 삶의 밑바닥을 기었다 라는 말과 서라벌
예고1학년때 동급생 구타로 중퇴 하였다"고 하는 내용과는 상반
되는 이야기 였다. 그래서 서라벌예고의 중퇴와 졸업에 대한 내용은
본인의 청춘고백의 내용대로 중퇴가 맞아 보입니다. 이유는 오아시스
레코드사 에서 송대관 씨와 만나는 시기 등을 봤을때 그러합니다.
'69년5월에 천리길을 발표 인기를 얻고 뒤이어 사랑은 눈물의 씨앗
임그리워 등이 연이어 크게 히트하여 인기 스타의 반열에 올랐지요.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 '66년도 중1시절 부산 사상역에서 범일역까지
기차통학 할때 사상역에서 내려 들판을 가로 질러 학장동 집에 까지
한30분 동안 걸어가면서 제일 많이 흥얼그린 노래로는 문주란의
동숙의 노래를 제일 많이 부른 기억이 나고 정원의 허무한 마음,
진송남의 덕수궁 돌담길, 남진의 울려고 내가 왔나 등이었다. 중학교
시절('66.3~'69.2)에는 나훈아의 노래를 들은 기억이 없다. 그 당시
나는 노래를 너무 좋아해서 노래공책이 따로 있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 가사를 공책에 따라 적어 노래 책을 만들어 책가방에
가지고 다녔었다. 한곡을 완성 시키려면 그 노래를 두 세번은 들어
면서 가사를 따라 적어야 했다. 고등학교1학년 초여름쯤에 나훈아의
천리길이 라디오에서 자주 흘러 나와 정말 듣기 좋은 노래다 하면서
따라 적고 부른 기억이 난다.
그래서 조사 결과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63년 초랑초교졸업(21회)후 1년 꿇어
'64년 대동중 입학, '67년 졸업(18회)
'67년 서라벌예고(현 서라벌고) 1학년 후반 중퇴
호적상 '51년생, 실제나이는 '50년생, 데뷔는 '68년 입니다.
하지만 학력과 나이가 무슨 상관 있겠습니까..음악 방면에 매진해서
자신이 말했던 유행가 가수로서 그 방면에서는 최고의 경지가 되었고
작사 작곡에 가창력 까지 그리고 공연무대의 지존답게 금년 추석
에도 청중들을 크게 감동시켰죠.
하지만
나훈아의 청춘고백에서 "고등학교 막 진학하던 '63년 봄 마을어귀에서
패싸움을 벌인 것이 훈육선생님께 알려져 퇴학 당하고 그 해 여름 평소
에 마음먹고 있던 가수를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63년도는 나훈아씨가 초량초등학교 21회 졸업한 년도 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0y80Sf28KU&t=2s
'87년도에 KBS2방송 스타데이트에 출연하여 심형래와 인터뷰하면서
'66년6월에 천리길로 데뷔했다고 본인 입으로 말했는데 '66년6월은
나훈아씨 부산대동중3학년 시절 입니다.
위와 같이 나훈아씨는 청춘고백과 방송에서 실제와는 맞지 않는 말들을
하여 팬들과 대중들을 호도한 내용에 대해서는 해명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와 함께 아무리 연예인 이라지만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3번 결혼과 3번 이혼 등으로 진실성이 결여된 모습을 보여줘 펜들과
대중들을 실망시켰지요.
헌데 이번 추석공연에서도 여전히 54년전'66년 데뷔를 말 하더군요.
'72년도와 '87년도 발언을 되풀이 하고 있더군요.
카리스마있는 외모와 행동, 남자로서의 성적 매력까지 갖추고 있으며
타고난 가창력과 공연무대에서 특유의 부산 사투리의 구수한 멘트와
화려한 퍼포먼스로 대중을 사로 잡습니다.
나도 모르게 거기에 빠져 들다가도 위 나이에 대한 거짓된 청춘고백과
거짓된 데뷔 발언 영상, 세번의 결혼, 이혼을 하고도 서류상으로는
한번이라고 말하던 그때의 영상이 떠올라 고개를 돌리고 맙니다.
그러다보나 나훈아씨의 광펜들은 위 잘못된 내용을 철석같이 믿고
또 송대관의 스타고백도 인용하면서 나훈아의 '47년생 '66년도
데뷔를 끝까지 주장하더군요. 아무리 합리적으로 설명해도 안 믿고
막무가내로 저 엄청난 매력에 빠져 자기내 주장만을 밀어 붙이고
있습니다. 아니라고 하면 남진의 끄나불로 취급해 버리더군요.
그럴려니하고 넘어갈려고 했는데 이 분들 때문에 열 받아서 이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차근차근히 보고 판단해 보시라고..
지는 '53년생 부산토박이로 지금까지 부산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향 형님뻘이고 고향의 향수를 자아내게 하는 나훈아씨의
구수한 노래와 남자다운 매력도 좋아하고 남진씨의 친화적인 성품
과 빠른 템포의 흥겨운 곡도 기분이 상쾌해 지니까 좋아합니다.
하지만 잘하는 것은 잘하는 것이고 틀린 것은 틀린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를 옹호하기 위해 상대 가수를 있는 말
없는 말 근거없는 이야기로 헐 뜻고 비하 하지 맙시다.
상대방 가수를 존중하는 것이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를 존중하는
거라고 셍각합니다
흠이 없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죠. 성인이란 분들도 흠이 있는데..
하지만 알고 있고 진행되고 있는 거짓은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개인적인 의견이오니 본인 생각과 다르더라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나훈아의 청춘고백/ 나훈아의 출세비화/1972.1.21 자체가
나이를 올리기 위하여 음반사(요즘의 소속사) 관계자 들이 만든
작품이라고 봅니다.
'63년2월에 나훈아씨가 초량초등졸업했는데 나훈아의 청춘고백
에서는 고등학교1학년 때인 '63년 봄에 동네에서 패싸움한 것이
학교에 알려져 퇴학당하고 그 해 여름 가수를 하기위해 서울로
올라가서 한3년 고생하다."이"모 라는 가수가 취입하러 오지않아
오아시스 손진석사장님이 대타로 불러보라고 해서 부른 노래가
데뷔곡인 "천리길"이고 '66년도에 발표했다고 나오는대 그게 다
꾸민 내용입니다, 부산에서 고교중퇴하여 중단한 공부를 다시
하기위해 데뷔후 서라벌예고에 입학했다는 내용까지가 다 꾸민 것
입니다. 나이 3~4년 올리려고 없는 3~4년을 가공으로 만들었지요.
'63년 봄 부터 '67년 봄 서라벌고 입학전 까지의 4년여 기록은
꾸며낸 기록이고 없는 세월 입니다.'63년~'67년은 나훈아씨가
부산에서 초량초등 21회졸업('63년2월)하고 1년꿇어 '64년3월
대동중입학하여 3년 다니다 '67년2월에 졸업(18회)한 시기 입니다.
그래서 위 서울에서의 '63년여름~'67년초봄 까지의 기록이 가공
으로 꾸며진 세월이라고 하는 겁니다.
처음에 그리 발표하다보니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훈아씨 본인도
54년전'66년도에 천리길로 데뷔했다고 본인 입으로 말하고 있지요..
긴세월을 사실인양 그리 말하고 발표하다 보니 오랜세월이 지난 지금
에는 꾸민 내용이 습관처럼 당연스럽게 기정사실화 되고 말았지요.
인터넷이나 언론이 활성화 되지 않은 시절에는 그냥 넘어가고 있었는데..
인터넷활성화로 나훈아의 부산의 초등동기와 중등동기,서울의 고등동기
분들과 학창시절 같이 생활했던 사람들의 증언으로 밝혀지게 되었지요.
나훈아의 데뷔 초기 음반 자켓들